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9권 – 16화 : 울며 마속을 베고 스스로 벼슬을 깎다

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9권 – 16화 : 울며 마속을 베고 스스로 벼슬을 깎다


울며 마속을 베고 스스로 벼슬을 깎다

한편 공명은 마속을 보내 가정을 지키게 했으나 영 마음이 놓이 지 않았다. 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결과만 지켜보고 있는데 문득 왕평이 사람을 보내 도본(圖本)을 올려 왔다는 전갈이 왔다.

공명은 얼른 그 사람을 불러들이고 마속이 진채를 내린 곳의 지 형을 상세히 그린 도본을 받았다. 탁자 위에 펼쳐놓고 들여다보던 공명이 갑자기 주먹으로 탁자를 치며 소리쳤다.

“마속이 무지해 내 군사를 모두 구덩이로 쓸어넣었구나!”

그 말에 놀란 사람들이 물었다.

“승상께서는 무엇 때문에 그토록 놀라십니까?”

공명이 탄식하듯 말했다.

“내가 이 그림을 보니 마속은 중요한 길목을 버려두고 산 위에다 진채를 벌였다. 만약 위의 대군이 이르러 산을 에워싸고 물을 끊어버린다면 이틀도 안 돼 우리 군사는 어지러워지고 말 것이다. 가정 을 빼앗긴다면 우리가 어떻게 돌아갈 수 있겠느냐?”

장사양의楊)가 얼른 일어나 말했다.

“제가 비록 재주 없으나 마속을 대신하고 그를 이리로 돌려보내 겠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공명도 그 수밖에 없다 싶었는지 양의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에게 어디에 어떻게 진채를 세워야 하는지를 낱낱이 일러준 다음 가정으 로 떠나게 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양의가 막 떠나려 할 때 보마(報 馬)가 달려와 기막힌 소식을 알렸다.

“가정과 열류성이 모두 적의 손에 떨어졌습니다!”

공명은 그 소식에 발을 구르며 길게 탄식했다.

“마속이 기어이 큰일을 망쳐버렸구나! 모두가 내 허물이다. 내 허물이다………….”

그러나 공명도 탄식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곧 관흥과 장포를 불러 일렀다.

“그대들 둘은 각기 삼천의 정병을 이끌고 샛길로 무공산(山) 으로 가라. 거기서 위병을 만나거든 맞붙어 싸우지 말고 그저 북소 리와 함성만 요란하게 하여 적을 놀라게 하라. 적이 달아나더라도 뒤쫓아서는 아니 된다. 적군이 모두 물러나기를 기다려 어서 양평관 으로 가는 게 그대들이 할 일이다.”

이어 공명은 또 장익을 불렀다.

“그대는 군사를 이끌고 먼저 검각(劍閣)으로 가서 그곳을 수리하고 우리가 돌아갈 때에 어그러짐이 없게 채비하라.”

그렇게 이른 뒤 다시 모든 군사들에게 가만히 영을 전하게 했다. 

“모두 가만가만 행장을 꾸려라. 곧 길을 떠날 것이니 채비에 소홀 함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뿐만이 아니었다. 공명은 또 마대와 강유를 불러 군사를 나눠주며 말했다.

“그대들이 뒤를 맡아 적의 추격을 뿌리치도록 하라. 먼저 산골짜 기에 매복해 있다가 우리 군사가 모두 물러나고도 적의 추격이 없거 든 그제서야 군사를 거두도록.”

그리고 따로이 믿을 만한 사람을 남안, 천수, 안정 세 군에 보내 그곳의 백성들과 벼슬아치들을 한중으로 물러나게 하는 한편 기성 으로도 사람을 보내 강유의 늙은 어머니를 한중으로 모셔들이게 했다.

모든 배치가 끝난 뒤에 공명 스스로는 오천 군사를 이끌고 서성 으로 갔다. 그곳에 있는 군량과 말먹이 풀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 위함이었다.

공명이 장졸들을 시켜 한창 군량과 말먹이 풀을 실어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파발마가 헐떡이며 달려와 알렸다.

“사마의가 십오만 대군을 이끌고 벌 떼처럼 서성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이어 그와 똑같은 급한 전갈이 여남은 번은 되풀이됐다. 실로 눈 앞이 캄캄한 일이었다. 그때 공명 곁에 쓸 만한 장수는 하나도 없고 문관들만 있을 뿐이었다. 거기다가 군사가 오천이라 해도 그 절반은이미 군량을 싣고 성을 나가버려 남은 것은 기껏 이천오백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사마의의 십오만 대군이 온다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공 명 곁에 있던 벼슬아치들은 그 소식에 모두 낯빛이 하얘졌다.

놀라기는 공명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공명은 별로 놀라는 기색 없이 성벽 위로 올라가 먼저 그 소식이 정말인지부터 살폈다. 과연 티끌이 하늘을 덮을 듯 자욱이 일며 위의 대군이 두 길로 나누어 몰 려오고 있었다.

한참을 살피던 공명이 장수들에게 영을 내렸다.

“모든 깃발은 눕히거나 감추고, 군사들은 성안의 길목을 지키되 함부로 나다니지 않도록 하라. 목소리를 높여 떠드는 자는 목을 베 리라. 그다음 성문을 활짝 열고, 문마다 스무 명의 군사를 백성들로 꾸며 물 뿌리고 비질하며 있게 하라. 위병이 가까이 이르더라도 결 코 함부로 움직여서는 아니 된다.”

“승상께서는 이제 어찌하시렵니까?”

그 뜻밖의 영에 놀란 사람들이 물었다. 공명이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그들에게 말했다.

“아무런 걱정 말고 모두 시키는 대로만 하라. 내게 다 계책이 있다.” 

그러고는 흰 학창의를 입고 윤건을 쓴 뒤 아이 둘만 딸리고 성벽 위로 올라갔다. 두 아이 중 하나는 거문고를 안고 있었다.

공명은 성 밖에서 눈에 잘 띄는 적루(敵樓)에 자리를 잡았다. 한가 로이 바람이라도 쐬러 나온 사람처럼 누각 난간에 기대 앉더니 향을 사르게 하고 거문고 줄을 고르는 것이었다.

오래잖아 사마의의 전군이 성 아래 이르렀다. 성문은 활짝 열려있고 성안은 조용한데, 어디선가 거문고 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공명 이 한가롭게 거문고를 뜯고 있었다.

그 뜻밖의 광경에 어리둥절한 위병은 감히 성안으로 뛰어들지 못 하고 얼른 뒤따라오는 사마의에게 알렸다. 사마의도 처음에는 웃으 면서 믿지 않다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싶었던지 삼군을 세워두고 스스로 말을 달려 성벽 가까이 갔다. 멀리서 바라보니 정말로 공명 이 성벽 위 누각에 홀로 앉아 웃음 띤 얼굴로 거문고를 뜯고 있었다. 향까지 사르며 앉아 있는 게 한가롭기 그지없어 보였다.

사마의는 다시 그 곁을 살펴보았다. 왼쪽에는 한 사내아이가 보검 을 받쳐들고 섰고, 오른쪽에는 딴 사내아이가 먼지떨이를 들고 서 있 었다. 열린 성문에는 스무남은 명의 백성들이 물을 뿌리며 길을 쓸 고 있는데, 대군이 밀려와도 아무 일도 없는 듯 제일만 하고 있었다. 그 모든 걸 살핀 사마의는 부쩍 의심이 났다. 꾀 많기로 이름난 공 명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몰라 성안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얼른 전군을 후군으로 삼고, 후군은 전군으로 삼아 북쪽 산 으로 군사를 물렸다.

사마의의 둘째 아들 사마소가 가만히 물었다.

“혹시 제갈량이 거느린 군사가 없어 저렇게 꾸민 게 아닐까요? 아 버님께서는 왜 이토록 서둘러 군사를 물리려 하십니까?”

“제갈량은 평생 삼가고 조심하는 사람이다. 이제껏 한번도 위험을 무릅쓰고 일을 꾸민 적이 없다. 이제 크게 성문을 열어둔 것은 반드시 매복이 있다는 뜻이다. 만약 우리가 들어가면 그 계책에 빠지고 만다. 네가 무얼 안다고 떠드느냐? 어서 군사를 물려라.”

사마의는 그렇게 아들의 입을 막고 두 갈래 군사를 모두 거두어 물러가버렸다.

공명은 위병이 멀리 물러간 뒤에야 손뼉을 치며 웃었다. 보고 있 던 벼슬아치들은 모두 놀라 마지않았다. 우르르 공명에게 달려가 물 었다.

“사마의는 위의 이름난 장수입니다. 이제 십오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여기까지 와놓고 승상을 보자마자 물러간 것은 무슨 까닭입 니까?”

“그 사람은 내가 평생 삼가고 조심하는 사람이라 위험을 무릅쓰 고 남을 속이려 들지 않을 것이라 보았다. 그래서 내가 하는 양을 보 고 반드시 복병이 있을 것이라 여겨 물러난 것이다. 실로 나는 위태 로운 짓을 하지 않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어 이런 속임수를 쓰게 되었다.

이제 그 사람은 틀림없이 북쪽 산 있는 데로 갔을 것이다. 그 샛길 에는 내가 이미 관흥과 장포를 매복시켜 두었으니 그는 거기서 정말 로 매복을 만날 것이다.”

공명이 차근차근 그렇게 일러주었다.

모든 벼슬아치들은 더욱 놀라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승상의 깊고 깊은 헤아림은 귀신도 짐작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희들 소견대로라면 틀림없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을 것입니다.” 

그렇게 찬사를 올리자 공명이 별로 뽐내는 기색도 없이 받았다.

“내가 거느린 군사는 이천오백뿐이다.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해도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무슨 수로 사마의에게 사로잡히지 않고 배겼겠느냐?”

그래 놓고 문득 몸을 일으키더니 손뼉을 치고 크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렇지만 내가 사마의였다면 그렇게 빨리 물러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공명의 이른바 공성계(空城)는 그 야말로 그림 같은 승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연의』의 저자가 살았 던 시절에는 그런 얘기가 민간의 전설로 떠다녔는지 모르지만 정사 에서는 그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특히 진수의 『삼국지』는 가정의 싸움에서 사마의가 참여한 것조 차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명제기(明帝紀)」도, 「제갈량전」도, 「조진 전도 가정의 싸움은 제갈량과 조진, 장합 간의 충돌로만 기술되어 있을 뿐이다. 배송지 주(註)에서는 곽승이란 사람이 제기한 의문을 부정함으로써 공성계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하지만 공명의 물러남이 그렇게 여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공명은 사마의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보아 서성의 벼슬아치 들과 백성들을 데리고 한중으로 달아났다. 천수, 남안, 안정 세 군의 관민도 그런 공명을 뒤따라 한중으로 피했다. 어쩌면 『연의』의 저자 는 사마의에게 몰려 그렇게 쫓겨가는 공명의 초라함을 덜어주기 위 해 서성에서의 공성계란 그 화려한 막간극을 끼워넣은 것이나 아 닌지.

한편 서성에서 물러난 사마의는 공명의 예측대로 무공산 샛길로 접어들었다. 쫓는 사람도 없건만 허겁지겁 군사를 몰아나가는데 문 득 산등성에서 함성이 울리며 북소리가 요란했다.

사마의는 그것 보라는 듯 두 아들에게 말했다.

“만약 내가 물러나지 않았더라면 반드시 제갈량의 계책에 떨어지 고 말았을 것이다.”

그때 큰길 위로 한 떼의 군마가 몰려왔다. 깃발에 크게 씌어진 글 자를 보니 ‘우호위사 호익장군 장포’였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 껑 보고도 놀란다고 사마의의 갑작스런 퇴각 명령으로 그러지 않아 도 은근히 겁에 질려 있던 위병들은 금세 어지러워졌다. 갑옷을 벗 어던지고 창을 내버리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위병이 그렇게 몰리기 한 마장쯤 됐을까, 다시 산골짜기에서 북 소리와 함성이 크게 일며 한 떼의 촉군이 나타나 앞길을 막았다. 앞 세우고 있는 큰 깃대에 씌어진 글자는 ‘좌호위사 용양장군 관흥’이 었다.

관흥의 군사들의 함성에 먼저 나와 뒤쫓던 장포의 군사들이 지르 는 함성이 화답하니 산골짜기 안은 온통 촉군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위병들로서는 적군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조차 못할 만큼 많게 느껴졌다. 거기다가 겁까지 잔뜩 먹은 뒤라 도저히 맞서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모두 치중을 버리고 달아나기 바빴다.

관흥과장포는 제갈량이 시킨 대로 따랐다. 달아나는 적을 뒤쫓지 않고 그들이 버리고 간 병기며 군량만 거둬들여 자기들 진채로 돌아 갔다.

쫓기는 마음이라 그런지 사마의의 눈에는 산골짜기마다 촉군으로 가득 찬 듯했다. 감히 큰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가정으로 돌아갔다.

그때는 조진도 공명이 군사를 물리는 걸 알았다. 급히 군사를 몰 아 공명을 뒤쫓았다. 얼마나 뒤쫓았을까, 한군데 산그늘에서 포향이 울리더니 촉군이 산과 들을 뒤덮듯 하며 쏟아져 나왔다. 앞선 장수 는 강유와 마대였다.

조진은 깜짝 놀랐다. 급히 군사를 돌리려 했으나 뜻 같지가 못했 다. 선봉을 섰던 진조(陳造)가 어느새 마대에게 목이 떨어지고 군사 들은 뭉그러지기 시작했다. 조진이 겨우 군사를 수습해 달아나니 나 머지 촉군들은 편안히 한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가정의 패배에 비하면 너무도 정연한 철수였다. 공명의 신화를 지어낼 수 있는 건 더기는 바로 그런 데 있지 않은가 싶다.

그 무렵 조운과 등지는 기곡 길가에 매복해 있었다. 공명이 전갈 을 보내 군사를 물리기 시작했음을 알리자 조운이 등지에게 말했다.

“우리 군사가 돌아가는 걸 알면 위병은 반드시 그 뒤를 쫓을 것이 오. 나는 먼저 일군을 거느리고 뒤편에 매복해 있을 것이니, 공은 내 깃발을 앞세우고 군사들과 함께 천천히 나가도록 하시오. 나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따라가며 뒤를 지켜드리겠소.”

이에 등지는 조운의 말대로 따랐다.

한편 곽회는 군사를 거느리고 두 번째로 기곡으로 돌아갔다. 하지 만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라 선봉 소옹(蘇顒)에게 일렀다.

“촉의 장수 조운은 영용하여 당할 사람이 없다 한다. 조심해서 맞 서야 할 것이다. 적이 물러나는 것은 틀림없이 계책에 의한 것이니 함부로 뒤쫓지 않도록 하라.”

그러나 소옹은 조금도 겁내는 눈치가 아니었다. 선봉 된 것만 기꺼워하며 큰소리를 쳐댔다.

“도독께서 응만 해주신다면 반드시 조운을 사로잡겠습니다.” 

그러고는 삼천 군마를 이끌고 기곡으로 뛰어들어갔다.

소옹이 촉군을 뒤쫓아가다 보니 한군데 산기슭에 깃발 하나가 눈 에 들어왔다.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조운’이라고 씌어 있었다. 소옹 은 큰소리를 치고 오기는 했어도 막상 조운과 싸울 생각을 하니 가 슴이 떨렸다. 얼른 군사를 되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처 몇 리 가기도 전이었다. 문득 함성이 크게 일며 한 떼 의 군마가 덮쳐왔다. 앞선 장수가 창을 끼고 말을 몰아오며 큰 소리 로 외쳤다.

“이놈, 너는 상산의 조자룡을 알아보겠느냐?”

소옹은 깜짝 놀랐다. 조금 전에 틀림없이 조운의 깃발을 보고 쫓겨오는 길이라 꼭 무엇에 홀린 느낌이었다.

‘어째서 여기 또 조운이 있단 말인가?’

그런 놀람과 궁금함에 허둥거리다 보니 손발마저 제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한번 싸움다운 싸움을 해보지도 못하고 조운의 한 창 에 찔려 말 아래로 떨어졌다. 대장이 그 모양으로 죽자 졸개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타작마당에 쏟아진 콩사발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조운은 한 무더기 적을 흩어버린 뒤에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다시 한 떼의 위병이 그런 조운을 뒤쫓아왔다. 곽회의 부장 만정(萬政)이 이끄는 군사들이었다.

조운은 위병의 추격이 급한 걸 보자 다시 말고삐를 당겨 돌아섰 다. 창을 끼고 홀로 길목을 막아서며 한바탕 싸울 채비를 했다. 그사 이에 촉군은 길을 재촉해 삼십여 리나 물러갔다.

만정은 길목을 막아선 게 조운임을 알아보고 감히 앞으로 밀고 나올 엄두를 못 냈다. 조운은 그런 만정과 한나절 눈싸움만 하다가 날이 저문 뒤에야 말 머리를 돌려 자기편 군사들을 뒤쫓았다. “여기서 여태껏 뭘 하고 있었는가?”

이윽고 그곳에 이른 곽회가 만정에게 물었다. 만정이 부끄러운 듯 대답했다.

“조운이 길목을 지키고 있어 감히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 영용함은 예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무슨 소린가? 어서 그 뒤를 쫓으라.”

곽회가 그렇게 소리치며 군사를 내몰았다. 만정은 하는 수 없이 날랜 장수 수백 기를 데리고 조운을 뒤쫓았다.

그들 수백 기가 한 커다란 숲에 이르렀을 때였다. 문득 그들 등 뒤 에서 한소리 큰 외침이 들렸다.

“이놈들, 어디를 가려느냐? 조자룡이 여기 있다!”

그 소리에 놀라 위병 중에 백여 기가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나 머지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두 구르듯 말에서 내려 산등성이 를 기어 넘고 달아나버렸다.

만정은 장수된 도리로 졸개들을 꾸짖어 싸워보려 했으나 그 바람 에 도리어 험한 꼴을 당했다. 조운의 화살이 투구 끈에 맞자 놀란 나머지 발을 헛디뎌 개울창에 떨어져버린 것이었다.

조운이 그런 만정을 창 끝으로 겨누며 꾸짖었다.

“내 너의 목숨을 붙여줄 테니 돌아가 곽회에게 일러라. 어서 빨리 뒤쫓아오라고. 나는 여기서 그가 오기를 기다리겠다!”

겨우 목숨을 건진 만정은 머리를 싸쥐고 저희 편에게로 달아났다. 그렇게 되니 곽회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멀거니 조운이 물러나는 걸 보고만 있었다.

조운은 촉군의 수레와 기치며 병기, 그리고 다수한 인마를 호위하 며 무인지경 가듯 한중으로 돌아갔다. 길 위에 쌀 한 톨 떨어뜨리지 않은 완벽한 철수 작전이었다. 조진과 곽회는 그저 삼군을 되찾은 걸로만 공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기고도 뒷맛이 가장 씁쓸한 것은 사마의였다. 관흥과 장 포에게 호된 맛을 본 뒤 다시 군사를 나누어 밀고 나갔으나 그때는 이미 촉군이 모두 한중으로 돌아가버린 뒤였다. 거기다가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서성에 이르러 남은 백성들과 산 속에 숨어 살던 이들 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장군께서 십오만 대군을 이끌고 이곳으로 오셨을 때 제갈량에게 는 겨우 이천오백의 군사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것도 무장은 별로 없고 약간의 문관이 곁에 있었을 뿐입니다. 매복 같은 것은 전혀 없 었습니다.”

무공산 기슭에 살던 백성들도 입을 모아 말했다.

“관흥과 장포도 각기 삼천의 군사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 산· 저 산으로 몰려다니며 함성을 질러 수가 많은 양 장군을 놀라게 했을 뿐입니다. 그밖에 따로 군사가 없었기에 겁만 주고 감히 덤벼들지는 못한 것입니다.”

그제서야 사마의도 제갈량에게 속은 걸 알았으나 후회해도 소용 없었다. 그저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길게 탄식할 뿐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공명을 따를 수가 없구나!”

사마의는 다시 찾은 그 땅의 백성들과 벼슬아치들을 위로하고 달 랜 뒤 장안으로 군사를 돌렸다. 뒷맛이 씁쓸한 대로 어김없는 개선 이었다. 위주 조예가 반겨 맞으며 사마의를 추켜세웠다.

“오늘 농서의 여러 고을을 되찾은 것은 모두가 경의 공이오.”

사마의가 아쉬운 표정으로 그 말을 받았다.

“이제 촉병은 모두 한중으로 돌아갔을 뿐 전부쳐 없앤 것은 아닙 니다. 바라건대 신에게 대병을 주신다면 힘을 다해 동서 양천을 되 찾아 폐하의 은덕에 보답하겠습니다.”

그 말에 조예는 더욱 기뻤다.

“경의 뜻대로 하라. 양천을 되찾는 것은 짐의 기쁨일 뿐만 아니라 천하의 복이다.”

그렇게 말하며 군사를 일으키기를 오히려 재촉했다.

그때 줄지어 서 있던 관원들 중의 하나가 나서며 소리쳤다.

“제게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넉넉히 촉을 평정하고 오를 항복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조예가 그 사람을 보니 그는 상서 손자였다.

“경은 어떤 묘한 계책이 있는가.”

조예가 그렇게 묻자 손자가 목소리를 가다듬어 아뢰었다.

“지난날 태조(太祖, 조조) 황제께서 장로로부터 한중을 거두실 때 도 한번 위태로움을 겪으신 뒤에야 겨우 평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시기를 ‘남정의 땅은 하늘이 만들어놓은 감 옥 같다’고 하셨을 정도였습니다. 그중에 야곡 오백리 길은 그대로 바위 사이에 뚫어진 구멍이라 할 만큼 험해 군사를 부리기에 좋은 땅이 못됩니다. 거기다가 이제 우리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촉을 치 러 간다면 틀림없이 동오가 쳐들어올 것이니 그는 또 어찌하겠습니 까? 차라리 지금 있는 군사를 큰 장수들에게 나누어주고 험한 길목 을 지키면서 힘을 기르고 사기를 돋우도록 하는 편이 낫습니다. 몇 년 안 돼 우리 중원은 갈수록 흥성하고 촉과 오는 반드시 서로 싸워 해치게 될 것입니다. 그때를 기다려 그들을 친다면 이기지 못할 까 닭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부디 그 점을 헤아려 주십시오.”

얼핏 들으면 대단찮은 계책 같았으나 이치에 닿는 말이었다. 조예가 대답 대신 사마의에게 물었다.

“경은 이 말을 어떻다 보시오?”

“손(孫)상서의 말이 매우 이치에 맞습니다. 따르도록 하십시오.”

사마의가 그렇게 말하자 조예도 거기 따랐다.

“경은 거느리고 있는 장수와 군사를 알맞게 나누어 험하고 긴요 한 길목을 지키게 하라.”

조예는 사마의에게 그런 영을 내림과 아울러 곽회와 장합은 장안 에 남겼다. 그리고 삼군에게 두루 상을 내린 뒤 어가를 돌려 낙양으 로 돌아갔다.

한편 한중에 이른 공명은 먼저 장졸들부터 점고해보았다. 누구보다도 아직 조운과 등지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몹시 걱정이 된 공 명은 관흥과 장포를 불러 말했다.

“그대들은 각기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조자룡과 등지가 돌아오 는 걸 도우라. 반드시 데려와야 한다.”

이에 두 장수가 막 몸을 일으키려는데 사람이 들어와 알렸다. 

“조운, 등지 두 분 장군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말 한 필 사람 하나 상한 게 없고, 군량 한 톨 화살 하나 잃지 않았다 합니다.”

그 말을 들은 공명은 몹시 기뻤다. 여러 장수들을 데리고 조운과 등지를 맞으러 갔다.

조자룡은 공명이 몸소 마중을 나오는 걸 보자 황망히 말에서 뛰 어내렸다. 그리고 부끄러운 듯 땅바닥에 엎드리며 말했다.

“싸움에 지고 온 장수를 승상께서 어찌하여 이토록 수고스럽게 마중 나오셨습니까?”

공명이 그런 조운을 부축해 세우고 그 손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번 일은 내가 사람의 어리석고 밝음을 알아보지 못해서 이지 경에 이른 것이오. 그걸 어찌 장군의 허물이라 하겠소이까? 오히려 궁금한 것은 다른 장수들은 모두 군사가 꺾이거나 잃은 것이 있는데 오직 장군만은 사람 한 명 말 한 필 꺾이지 않은 것이오. 그게 어찌 된 일이오?”

그러자 등지가 조운을 대신해 대답했다.

“제가 먼저 군사를 이끌고 떠나고 장군께서 홀로 뒤를 지키셨습 니다. 길목을 막아서서 뒤쫓아오는 적장을 목 베니 적은 놀랍고 두려워 감히 우리를 뒤쫓지 못했습니다. 그 까닭에 사람과 말은 말할것도 없고, 화살촉 하나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장군이라 할 만하구나!”

공명은 그렇게 감탄하며 황금 쉰 근을 조운에게 주고, 또 비단 만 필을 주어 그가 거느린 군사들에게 상으로 내리게 했다. 조운이 사 양했다.

“삼군이 한 치 공도 세우지 못하고 쫓겨왔으니 저희들은 오히려 죄가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상을 받게 되면 이는 바로 승상께서 상벌을 내리는 데 밝지 못한 게 되고 맙니다. 바라건대 그 황금과 비단은 도로 곳간에 넣어두게 하십시오. 이번 겨울이 오기를 기다려 여러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셔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에 공명은 더욱 감탄했다.

“선제께서 살아 계실 때 매양 자룡의 덕을 말씀하시더니 정말 그렇구나!”

그러고는 그 뒤부터 조운을 전보다 더욱 우러르고 흠모했다. 얼마 후에 마속과 왕평, 위연, 고상이 군사들과 함께 이르렀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공명은 그중에서 먼저 왕평을 장막 안으로 불러들 여 꾸짖었다.

“나는 너에게 마속과 함께 가정을 지키라 했다. 그런데 너는 어찌 마속을 말리지 않고 일을 이같이 그르쳤느냐?”

“저는 두번 세번 길가에다 토성을 쌓고 지키자고 권해보았습니 다. 그러나 참군이 몹시 성을 내며 따라주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저만 오천 군사를 이끌고 산 아래 십리쯤 되는 곳에 진채를 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얼마 후에 위병이 그 산을 사방에서 에워싸는 걸 보고 저는 여남은 번이나 짓쳐들어보았지만 뚫고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 다. 그러다가 다음 날 참군의 군사가 무너지자 저는 몇 안 되는 군사 로 버텨낼 수가 없어 위문장, 위연의 자)에게로 의지해 갔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또 문장이 산골짜기 속에서 적에게 에워싸여 있더 군요. 저는 죽기로 싸워 문장을 구해냈으나 진채에 돌아와 보니 그 곳은 이미 위병들이 차지하고 있어 하는 수 없이 열류성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로 가는 길에 가정을 구하러 달려오는 고상과 만났 습니다…….”

거기서 왕평은 잠깐 숨을 돌린 뒤에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저와 위문장, 고상은 세 길로 나누어 위병들의 진채를 밤중에 들 이치고 가정을 되찾기로 의논을 맞추었습니다. 하지만 가정에 이르 도록 마주쳐 오는 위병이 없어 문득 의심이 들었습니다. 무턱대고 나아가는 대신 높은 곳에 올라가 살펴보니 딴 길로 갔던 문장과 고 상이 다시 위병들에게 에워싸여 위태로웠습니다. 저는 이번에도 죽 기로 싸워 그 두 장수를 구해 내고 나중에는 참군과도 만날 수가 있 었습니다. 그때 걱정이 된 게 양평관이었습니다. 저희들은 그마저 적의 손에 떨어질까 두려워 그리로 가서 지켰던 것입니다. 가정의 일은 제가 말리지 않아서 그리 된게 아닙니다. 승상께서 믿지 못하 시겠으면 다른 장수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왕평의 말을 듣고 보니 그의 허물은 없는 듯했다. 이에 공명은 왕 평을 내보내고 마속을 불러들였다. 마속은 스스로를 묶고 공명 앞에 무릎을 꿇었다. 공명은 낯색이 변해 그런 마속을 꾸짖었다.

“너는 어려서부터 많은 병서를 읽어 전법(法)을 익히 알고 있었 다. 거기다가 내가 그토록 너에게 경계하여 가정이 이번 싸움의 바 탕이 되는 곳임을 일렀건만 너는 네 가솔을 걸고 그 무거운 책임을 떠맡았다. 네가 진작에 왕평의 말만 들었어도 어찌 이 같은 화를 입 게 되었겠느냐? 이제 군사는 싸움에 지고 장수는 꺾였으며, 땅을 잃 고 성을 빼앗기게 된 것은 모두가 네 허물에서 비롯되었다. 이때에 군율을 밝히지 않는다면 내가 무슨 수로 여러 사람을 복종하게 할 수 있겠는가? 네가 죽더라도 네 스스로 군법을 어겨 그리된 것인 만 큼 나를 원망하지는 마라. 네가 죽은 뒤에도 네 식구들에게는 봉록 을 전처럼 내려 살이를 꾸려가게 할 터이니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고는 좌우에게 소리쳐 마속을 끌어내다 목 베게 했다. 마속이 울며 말했다.

“승상께서는 저를 아들같이 보아주셨고, 저는 또한 승상을 아버님 처럼 여겨왔습니다. 저는 죽을 죄를 지었으니 실로 죽음을 면하기 어려우나 바라건대 제 자식들에게는 아비의 죄가 미치지 않게 해주 십시오. 옛적 순(舜)임금께서는 곤, 우임금의 아버지)을 죽이고도 우(禹)를 쓰시었습니다. 그 의로 제 자식들을 대해주신다면 저는 죽 어 구천에 있더라도 아무런 한이 없겠습니다.”

말을 마친 마속이 큰 소리로 울자 공명도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그 말에 답했다.

“나와 너의 정리는 형제와도 같았다. 네 자식이 곧 내 자식이니 그 일은 당부하지 않아도 된다.”

정은 배어 있으되 군율을 곧게 시행하려는 뜻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그 뜻을 읽은 무사들이 마속을 진문 밖으로 끌고 나 갔다.

무사들이 막 마속을 목 베려 할 때였다. 마침 장완(蔣琬)이 성도에 서 그리로 왔다가 무사들이 마속을 베려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라 소 리쳤다.

“잠깐만 기다려라. 내가 승상을 뵙고 말씀드려보겠다.”

그리고 공명에게 달려가 말했다.

“옛적 초(楚)나라가 싸움에 진 대장군 성득신(成得臣)을 죽이자, 진(晋)의 문공(文公)은 그걸 기뻐해 마지않았다 합니다. 지금 아직 천하가 평정되지 않았는데 지모 있는 선비를 죽인다면 그 어찌 아깝 지 않겠습니까? 마속의 일을 다시 한번 돌려 생각해주십시오.” 

그러자 공명이 흐느끼며 대꾸했다.

“그 말씀은 옳으나 옛적 손무(孫武)의 일은 또 어찌하겠소? 손무 가 천하와 싸워 능히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 군법을 엄히 밝혔기 때문이었소이다. 지금 사방이 서로 나뉘어 다투고, 군사를 내어 싸 우려고 하는데 군법을 함부로 지키지 않는다면 무슨 수로 우리 장졸 을 부리며 역적을 쳐 없앨 수 있겠소이까? 마속은 마땅히 목 베어야 하오.”

이 같은 공명의 말에 장완도 더는 졸라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마침내 형(刑)이 집행되어 무사들이 마속의 목을 공명에 게 바쳤다. 공명은 마속의 목을 보며 큰 소리로 통곡했다. 그 슬퍼하 는 양을 보고 장완이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이제 마속은 지은 죄를 받고, 군법은 바로 섰습니다. 그런데 승상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그토록 슬피우십니까?”

공명이 울음을 그치고 까닭을 밝혔다.

“마속을 위해 우는 게 아니다. 나는 선제께서 살아 계실 때 백 제성에서 하신 말씀을 생각하며 울고 있소. 선제께서는 임종의 자리 에서 내게 당부하시기를 마속은 말이 그 실제보다 지나친 사람이니 크게 써서는 아니 된다 하셨소. 그런데 이제 그 말씀대로 되고 말았 으니, 스스로의 밝지 못함이 실로 한스러움과 아울러 선제의 밝으심 이 새삼 우러러 보이는구려. 나는 그 때문에 통곡하고 있는 것이오!” 

공명의 그 같은 말을 들은 장졸들은 높고 낮고를 가리지 않고 눈 물을 쏟지 않은 이가 없었다. 사람과 사람의 아름다운 맺어짐이 주 는 감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죽은 마속의 나이는 서른아홉이요, 때는 건흥 육년이었다. 뒷사람이 시를 지어 그 일을 노래했다.

가정을 못지킨 죄 가볍잖으니 失守街亭罪不輕

딱하구나, 마속의 병법 큰소리뿐이었네. 堪嗟馬謖枉談兵 

원문 밖 목을 베어 군법을 엄히 하고, 轅門斬首嚴軍法

눈물 씻으며 선제의 밝음을 생각한다. 拭淚思先帝明

하지만 공명은 마속에게도 엄하지만은 않았다. 그 목을 잘라 각 영채를 돌려 보인 뒤에는 다시 몸에 꿰매 시신을 온전하게 했다. 그 리고 관곽을 갖추어 장사 지내며 스스로 제문을 지어 그 넋을 달래주었다. 뿐만 아니라 마속의 가솔들을 위로하고 마속이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은 봉록을 내리어 그살이에 어려움이 없게 했다.

그렇게 대강 가정에서의 패배를 마무리지은 공명은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벌을 내렸다. 장완에게 표문을 지어주어 후주(後)께 올리게 하면서, 승상의 벼슬을 깎아내려주기를 스스로 빌었다.

장완은 그 표문을 지니고 성도(成都)로 돌아가 후주에게 올렸다. 후주가 표문을 열어보니 거기에는 대강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신은 본바탕이 보잘것없는 재주뿐이면서 앉아서는 아니 될 자리 를 분수도 모르고 차지한 뒤 감히 장수의 모월)을 잡고 삼군을 몰아 나아갔습니다. 군사를 가르치는 것도 군법을 밝히는 데도 아울 러 능하지 못했으며, 일을 당해 지모를 쓴 것도 고작 가정과 기곡의 꼴이 나고 말았습니다. 가정은 명을 어겨 빼앗겼고 기곡은 경계를 게을리해 잃었으되, 그 허물은 모두 신의 밝지 못함에 있었습니다.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했음과 일을 꾸려감에 어두운 곳이 많음이 바 로 그것입니다. 모든 일은 온전히 갖추어 한 가지의 허물도 없기를 바라는[] 춘추(春秋)의 엄격함에 비춰볼 때 이 큰 죄를 어찌 면 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신의 벼슬 삼등(三等)을 깎아내리시어 신의 모자람과 그릇됨을 꾸짖어주옵소서. 신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다만 엎드려 폐하의 명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 같은 표문을 읽은 후주가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에게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런데 승상은 어찌 한 번의 싸움으로 이런 소리를 하는가?”

곁에 있던 시중 비위(費禕)가 나와 말했다.

“신이 듣자오니 나라를 다스리는 이는 반드시 법을 받들기를 무 겁게 여긴다 합니다. 만약 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면 무슨 수 로 사람들을 눌러 따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승상께서 싸움에 진죄 를 스스로 물어 벼슬을 깎아달라고 하신 것은 매우 옳은 일입니다. 들어주도록 하십시오.”

그제서야 후주도 공명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공명을 우장군 으로 내려앉히되, 승상 일은 그대로 보게 하고[行丞相事]군마를 도 맡아 거느리는 것도 전과 같이 하게 했다. 비위가 그런 뜻이 담긴 후 주의 조서를 받들고 한중에 있는 공명에게로 갔다.

비위는 공명이 벼슬을 깎아내리는 조서를 받고 부끄러워할까 봐 짐짓 경하의 말을 건네보았다.

“촉의 백성들은 승상께서 처음 네 고을을 뺏은 일만으로도 매우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공명은 낯색이 변해 꾸짖듯 비위의 말을 받았다.

“그 무슨 소리요? 비록 네 고을을 뺏었다 하나 다시 잃었으니 얻 지 못한 것과 같소. 공이 그런 일로 나를 경하하는 것은 실인즉 나를 더욱 부끄럽게 만드는 게 될 뿐이오.”

비위는 머쓱했으나 그대로 물러날 수도 없어 딴소리를 해보았다. 

“요사이 듣자니 승상께서는 강유란 인재를 얻으셨다 하더군요. 천자께서도 매우 기뻐하고 계십니다.”

이번에는 공명이 성난 기색까지 보이며 대꾸했다.

“군사는 싸움에 져서 물러나고, 땅은 한 치도 얻은 게 없으니 그 모두가 나의 큰 죄요. 강유 같은 인재를 하나 얻었다 쳐도 그 일이 위(魏)에 무슨 큰 손실이 되겠소?”

그래도 비위는 그냥 물러나기가 안됐던지 다시 앞일을 가지고 공 명의 기운을 돋우어주려 했다.

“승상께서는 지금 씩씩한 군사 수십만을 거느리고 계십니다. 언제 다시 위를 치시겠습니까?”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공명은 화를 내지는 않았으나 조금도 들뜨는 기색 없이 그 말을 받았다.

“지난날 대군을 이끌고 기산과 기곡으로 나아갔을 때 우리 군사 는 적병보다 그 머릿수가 많았소. 그러나 적을 쳐부수지 못하고 도 리어 우리가 적에게 무너지고 말았소. 일이 그 꼴로 어그러진 것은 결코 군사의 많고 적음 탓이 아니라 장수의 탓이었소이다. 이제 나 는 군사를 줄이고 장수를 추려 쓰며, 허물에 따라 벌을 뚜렷이 함으 로써 앞날의 변화를 기다려보기로 했소.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군사 가 많은 게 무슨 쓸모가 있겠소이까? 이제부터는 진정으로 나라를 깊이 걱정하는 이들이라면 나의 모자람을 나무라고 그릇됨을 꾸짖 어주셔야 할 것이오. 그래야만 일은 뜻한 바대로 이뤄질 것이며, 역 적을 쳐 없앨 수가 있고, 발돋움해서 공 세우기를 기다릴 수 있을 것 이오.”

이제는 드러내 놓고 비위의 듣기 좋은 말을 나무라는 것이나 다 름없었다. 어찌 보면 매몰찬 데가 있었으나 마디마디 옳은 소리였 다. 듣고 있던 장수들뿐만 아니라 은근히 무안을 당한 셈이 된 비위까지도 그 옳음만은 감탄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공명은 그런 생각을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비위가 성도로 돌아간 뒤 그대로 한중에 머물면서 위와의 다음 싸움을 준비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군사들을 가엾이 여기고 백성을 사랑하며 무예와 병법을 가르치고 성을 공격하는 기구와 물을 건너는 데 쓰는 기구들 을 만들어 쌓아두었다. 군량과 말먹이 풀을 거두어 모으고, 싸움에 쓸 뗏목을 마련하여 뒷날의 쓸모에 대비하니, 오래잖아 다시 촉군은 강성해졌다.

위의 세작이 그 일을 탐지해 낙양에다 알렸다. 위주 조예는 그 말 을 듣자 곧 사마의를 불러들여 물었다.

“제갈량이 한중에서 힘을 기르며 틈을 노리고 있다 하오. 어찌하 면 동서 양천을 차지할 수 있겠소?”

사마의가 그 말에 대답했다.

“촉은 아직 칠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한창 더울 때라 병이 나 오지 않을 것이니 촉을 치려면 우리가 그곳으로 가는 수밖에 없습니 다. 하지만 우리가 그 땅 깊이 들어가도, 적이 험한 길목에서 지키기 만 하면 급하게는 이기기 어렵습니다.”

“그러다가 만약 적이 다시 침입해 오면 어찌하겠소?”

조예가 다시 사마의에게 물었다.

“신이 헤아리기로 다음에는 제갈량이 한신(韓信)을 본받아 몰래 진창(陳)을 건너올 것 같습니다. 신이 한 사람을 천거해 올릴 것이 니 그를 진창 길목에 보내 성을 쌓고 지키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만 에 하나라도 그릇됨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천거하는 이 사람은 키가 아홉 자에 원숭이 팔을 가졌고 활을 매우 잘 쏩니다. 또 지모와 계략에도 밝아 제갈량이 온다 해도 넉넉히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마의가 그렇게 대답하자 조예가 기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누구요?”

“태원 사람으로 학소(郝昭)라고 합니다. 자를 백도(伯道)라 하는데 지금은 잡패장군(雜覇將軍)으로 하서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에 조예는 사마의의 말을 따라 학소를 써보기로 했다. 그에게 진서장군을 내리며 진창 도구를 지키러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