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9권 – 3화 : 촉과 오 다시 손을 잡다
촉과 오 다시 손을 잡다
그때 촉나라 사정도 위나라와 비슷했다. 후주(後)가 제위에 오 른 뒤로 오래된 신하들이 많이 병들어 죽어 일할 사람이 많지 않았 다. 따라서 후주는 법령을 정하는 일이며 곡식과 돈을 보살피는 일 과 이런저런 백성들의 다툼을 처결하는 것까지 모두 제갈량 한 사람 에게 물어서 했다.
후주가 아직 황후를 세우지 않은 걸 보고 공명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권했다.
“돌아가신 거기장군 장비의 따님이 매우 어질다 합니다. 이제 나 이 열일곱이라 하니 정궁으로 맞아 황후(皇后)로 세우시는 게 옳을 듯합니다.”
후주는 그 말을 받아들여 장비의 딸로 황후를 삼았다. 그런데 건흥 원년 초가을의 일이었다. 홀연 변방에서 급한 소식이 후주에게 날아들었다.
“위나라가 다섯 갈래의 대병을 보내 서천을 치러 오고 있습니다. 첫째 갈래는 조진이 대도독이 되어 이끈 십만으로 양평관을 뺏으려 하고, 둘째 갈래는 우리를 배반해 간 장수 맹달의 상용 군사 십만으 로 한중을 넘보고 있습니다. 셋째 갈래는 손권이 보낸 십만인데 협 구로 해서 서천으로 들어오고 있으며, 넷째 갈래는 만왕(蠻王) 맹획 이 이끈 만병 십만으로 익주 네 고을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그리 고 마지막 다섯 번째는 번왕(蕃) 가비능이 이끈 강병() 십만인 데, 지금 서평관으로 밀려들고 있다고 합니다.”
“먼저 승상께 이 일을 알렸으나 승상께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시 는지 며칠째 나와서 일도 보시지 않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후주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사람을 공명에게 보 냈다. 공명에게 간 사람이 반나절이나 지난 뒤에야 돌아와 말했다. “승상께서는 병이 나셔서 바깥으로 나오시지 못한다고 합니다. 승 상을 뵙지는 못하고 그 아랫것들에게서 들은 말입니다.”
그러자 후주는 더욱 놀랐다. 다음 날 다시 황문시랑 동윤(董允)과 간의대부 두경(杜瓊)을 공명의 병상으로 보내 위군(魏軍)이 밀려들 어오고 있다는 걸 알리게 했다. 동윤과 두경은 곧 승상부로 갔으나 아랫것들이 막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주상께서 승상께 어린 아들을 부탁하셨건만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지금 주상께서는 보위에 오르신 지 며칠 되지도 않는데 조비는 다섯 갈래의 대병을 보내 국경을 침범하고 있지 않은가. 싸움터의 소식이 매우 급한데 어찌하여 승상은 병을 핑계로 나와보지도 않는단 말인가?”
두경이 이렇게 따져 묻자 다시 안으로 들어간 아랫것이 한참 있다가 나와 말했다.
“승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병이 좀 나으면 내일 도당(都堂)으로 나 아가 그 일을 의논하겠다 하십니다.”
한시가 급한데 너무도 태평스런 소리였다. 그러나 공명이 만나지 않겠다는 데는 어쩔 수가 없어 동윤과 두경은 탄식만 하며 돌아갔다. 다음 날 모든 벼슬아치들은 승상부 앞으로 가서 공명을 기다렸 다. 아침부터 해 질 녘까지 기다렸으나 공명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벼슬아치들이 어리벙벙해서 흩어진 뒤 두경이 후주를 찾아보고 말 했다.
“아무래도 폐하께서 몸소 가보셔야겠습니다. 내일 승상부로 납시 어 승상께 친히 위나라를 막을 계책을 물어보도록 하십시오.”
그 말을 들은 후주는 여러 관원들을 모으고 황태후에게 찾아가 그 일을 알렸다. 황태후가 놀라 말했다.
“승상이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이는 바로 선제(先) 폐하의 당 부를 저버리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마땅히 내가 가서 따져봐야겠다.”
동윤이 그런 황태후를 말렸다.
“태후께서 가볍게 승상을 찾아가셔서는 아니 됩니다. 제가 헤아리 기로는 승상께 반드시 좋은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먼저 주상께서 다녀오실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십시오. 정말로 공명이 선제 폐하의 당부를 게을리한 게 드러난다면 그때 태후를 묘당에 모셔놓고 승상을 불러 따져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태후도 그 말을 따라 공명을 찾아가는 일을 뒤로 미루었다.
다음 날 후주를 모신 가마가 승상부에 이르자 문을 지키던 구실 아치들은 깜짝 놀랐다. 모두 황망히 땅에 엎드려 절하며 어찌할 바 를 몰랐다.
“승상은 어디 계신가?”
후주가 묻자 한 구실아치가 대답했다.
“어디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희에게 이르기를 어떤 관원도 함부로 집 안에 들이지 말라 했을 뿐입니다.”
그 말에 후주는 수레에서 내려 혼자 문 안으로 들어갔다. 세 번째 문을 지나자 공명이 작은 연못가에서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물 속의 고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후주는 그런 공 명 뒤에 한참을 서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승상은 평안하시오?”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뒤를 돌아본 공명은 후주가 거 기와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얼른 땅에 엎드려 절하며 잘못을 빌었다.
“주상께서 오신 줄도 몰랐으니 신의 죄 만번 죽어도 모자람이 없겠습니다.”
후주가 그런 공명을 부축해 일으키며 부드럽게 물었다.
“조비가 다섯 갈래로 길을 나누어 대군을 보내 국경을 침범하고 있소이다. 지금 매우 위태로운데 승상께선 어인 까닭으로 집 밖을 나와 일을 보지 않으시오?”
그러자 공명은 대답 대신 한바탕 시원스레 웃은 뒤 후주를 방 안으로 모셔들였다. 후주가 자리를 잡고 앉자 공명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섯 갈래로 길을 나눈 적의 대병이 오고 있음을 신이 어찌 모르 겠습니까? 신이 거기 서 있었던 것도 한가롭게 물고기가 노는 것이 나 구경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깊이 생각해볼 게 있어 주상께 서 납신 줄도 몰라본 것입니다.”
“그래 그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후주가 매달리듯 공명에게 물었다. 공명이 가볍게 대꾸했다.
“강왕() 가비능과 만왕 맹획(孟獲), 그리고 우리를 저버리고 간 맹달과 위나라 장수 조진이 거느리고 있던 네 갈래 군마는 신이 이미 물리쳐버렸습니다. 오직 손권이 보낸 한 갈래 군마가 남았으나 그것도 물리칠 계책은 이미 신에게 있습니다. 다만 한 사람 말 잘하 는 이를 써야 하는데, 그런 사람을 아직 구하지 못해 그걸 깊이 생각 하고 있었을 따름입니다. 폐하께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후주는 한편 놀랍고 한편 기뻤다. 덥석 공명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승상께서는 참으로 귀신도 헤아릴 길이 없는 재주를 가지셨구려. 그래, 어떻게 위가 보낸 다섯 갈래 군마를 다 물리치실 것인지 그 계 책이나 한번 들어봅시다.”
공명이 별로 자랑하는 기색도 없이 대꾸했다.
“선제께서는 폐하를 신에게 당부하셨는데 신이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게을리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성도의 벼슬아치들이 병법의 묘한 이치와 사람을 쓰는 데 남이 함부로 예측할 수 없게 함이 귀한 줄을 모르기에, 신의 계책이 새어나가게 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신이 먼저 안 것은 서번국왕(西蕃國王)가비능이 군사를 이끌고 서평관으로 쳐들어온 일이었습니다. 신은 마초가 서천 땅 사람들의 핏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평소 강인들의 마음을 사고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강인들은 마초를 신위대장군으로 떠받들고 있을 지 경입니다. 신은 먼저 사람을 보내 강인들에게 마초가 거기 있음을 밤중에 몰래 알리는 한편 마초에게 명을 내려 서평관을 굳게 지키 라 했습니다. 네 갈래 기병(奇兵)들을 숨겨두고 매일 그들을 바꾸어 가며 싸워 막게 하였으니 가비능의 군사는 걱정하실 까닭이 없습 니다.
또 남만의 맹획이 군사를 이끌고 사군(四郡)을 침범하는 것도 이 미 격문을 띄우고 위연에게 한 갈래 군사를 주어 막게 했으니 걱정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위연으로 하여금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 며 싸우게 하여 군사가 매우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계책을 쓰게 했는 바, 만병들이란 원래가 용맹과 힘만 믿을 뿐 의심이 많은 무리 라 그걸 보면 감히 더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맹달이 언젠가 군사를 이끌고 한중으로 밀고들 것도 신은 일찍부터 알아보았습니다. 그 때문에 신은 지난번 성도로 돌아올 때 이엄 (李嚴)을 영안궁에 남겨 그곳을 지키게 한 것입니다. 이엄은 맹달과 일찍이 생사를 함께하기로 맹세할 만큼 두터운 사이였던 터라 맹달 이 함부로 하지 못할 것입니다. 거기다가 신은 또 이엄의 글씨를 흉내 내어 맹달에게 보냈으니 맹달은 틀림없이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을 것이요, 그 군사들도 마음이 풀어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쪽 한 갈래도 걱정하실 일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밖에 조진이 양평관으로 밀고 들어올 것도 신은 이미 알고 있 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땅이 험하고 산이 높아 지키기 쉽습니다. 조운에게 한 갈래 군사를 주어 굳게 지키되 나가 싸우지는 말라 해 두었으니, 우리 군사가 나가지 않으면 조진도 어쩔 수 없이 오래잖 아 물러나게 될 것입니다.”
공명은 거기까지 말해놓고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 네 갈래 군마는 말씀드린 바와 같이 걱정될 게 없으나, 신은 그래도 일이 잘못되는 수가 있을까 걱정되어 또 따로이 관흥과 장포 에게 삼만 군마를 주고 알맞은 곳에 머물러 있게 했습니다. 그 네 갈 래 어디서든 탈이 생기면 곧 달려가 구할 수 있게 하려는 뜻이었습 니다. 그런데도 이 일을 사람들이 모르는 것은 모든 군마로 하여금 성도를 거치지 않고 각기 맡은 곳으로 가게 한 까닭입니다. 다만 아 직 나머지 한 갈래 동오가 내는 군사는 온전히 처리되지 못했습니 다. 동오는 비록 재빨리 움직이지는 않고 있으나 다른 네 갈래 군마 가 이겨 우리 서천이 위급해지면 반드시 달려와 그들과 함께 우리를 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군마들을 모두 물리쳐버린다면 저희들이 어찌 감히 움직이겠습니까? 제가 헤아리기에 손권은 전에 조비가 세 갈래 대군을 내어 동오를 친 일을 한스럽게 여겨 쉽게 그 말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때 손권을 달래 먼저 그 군마가 오는 걸 막 아버린다면 다른 네 갈래 군마가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신은 아직 손권을 달랠 만큼 말 잘하는 사람을 얻지 못해 이리 망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어찌 여기까지 몸소 납시었습니까?”
그 말에 후주는 비로소 활짝 펴진 얼굴로 대꾸했다.
“태후께서도 승상을 뵈오시겠다 하시오. 그러나 이제 승상의 말씀 을 들으니 나쁜 꿈에서 깬 듯하오이다. 짐이 다시 걱정할 게 무엇이 겠소?”
공명은 그런 후주에게 술을 내어 서너 잔 함께 나눠 마신 뒤에 문 밖까지 배웅을 나갔다.
문 밖에 둥글게 모여 섰던 백관들이 보니 들어갈 때와는 달리 후 주의 얼굴에 기쁜 빛이 가득했다. 공명과 작별한 후주는 수레에 올 라 궁궐로 향했으나 백관들은 어리둥절해할 뿐이었다. 공명이 한 말 을 듣지 못한 그들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딱 한 사람 하늘을 쳐다보며 웃는 이가 있는 데 후주와 마찬가지로 얼굴에 기쁜 빛이 가득했다. 공명이 놀라 살 피니 그는 의양군 신야 사람 등지(鄧芝)로 자가 백묘(伯)요, 벼슬 은 호부상서였다.
공명은 사람을 시켜 등지를 남몰래 남아 있게 한 다음, 백관이 모 두 흩어진 뒤에야 서원으로 불러들였다.
“지금 촉, 위, 오가 솥발처럼 천하를 나누어 섰소. 만일 촉이 나머 지 두 나라를 쳐서 천하를 하나로 다시 일으켜 세우자면 먼저 어떤 나라를 쳐야 하겠소?”
공명이 등지를 보고 대뜸 그렇게 물었다. 너무 엄청난 걸 갑자기 물은 셈이나 등지는 별로 망설임이 없이 대답했다.
“제 어리석은 생각으로 말씀드리자면 먼저 위가 될 것입니다. 그 러나 위가 비록 한(漢)을 빼앗은 역적이기는 하지마는 그 세력이 너 무 커서 급하게 흔들어 보기는 어렵습니다. 반드시 천천히 도모해야 될 줄 압니다. 거기다가 지금 우리 촉은 주상께서 보위에 오르신 지 오래되지 않아 아직 백성들의 마음이 안정돼 있지 못하니 마땅히 오 와 손을 잡아야 되겠지요. 입술과 이처럼 서로 의지하는 사이가 되 어 선제 때의 묵은 한을 잊고 위를 치는 것이 앞날을 길게 보는 계 책이 될 것입니다. 승상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선주는 죽었으나 촉의 조정은 아직 오와의 화친을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못 되었다. 그런데도 거리낌없이 그 말을 하는 등지를 보 자 공명은 껄껄 웃으며 바로 속을 털어놓았다.
“나 또한 그리 생각한 지 오래요. 다만 그 일을 해낼 만한 사람을 얻지 못해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제 얻은 듯싶소이다.”
“승상께선 그 사람에게 어떤 일을 시키려 하십니까?”
등지가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물었다.
“나는 그 사람을 동오로 보내 우리와 동오가 화친을 맺게 만들고 싶소. 공은 이미 그런 뜻을 가지고 계시니 반드시 군명(君命)을 욕되 게 하지 않을 것이오. 동오로 사신 가는 일은 공이 아니면 안 될 듯 하오.”
공명이 그렇게 대답하자 비로소 등지는 겸양을 했다.
“저는 재주가 모자라고 아는 게 얕아 그같이 큰일을 해낼 만한 그릇이 못 됩니다.”
“아니오. 그렇지 않소이다. 내일 천자께 말씀 올릴 것이니 백묘는 부디 사양하지 마시오.”
공명이 그렇게 권했다. 둥지는 두세 번 더 겸양하다가 마침내 응낙하고 돌아갔다.
다음 날이 되었다. 공명은 후주 앞에 나가 동오와의 화친이 필요 한 까닭을 아뢴 뒤 등지를 사신으로 뽑아 동오로 보낼 것을 청했다. 후주는 그걸 받아들여 등지를 사신으로 삼아 동오를 달래러 보냈다. 공명에게 미리 응낙한 등지는 이렇다 할 사양 없이 후주께 절하고 물러나 동오로 향했다.
그 무렵 오는 바야흐로 육손의 시대였다. 오왕 손권은 육손이 촉 을 막고 또 이어 위를 물리친 공을 기려 그를 보국장군 강릉후에 형 주목으로 삼았다. 이에 오의 군권은 모두 육손의 손아귀로 들어갔다. 또 장소와 고옹이 오왕에게 연호를 갈 것을 청하자 오왕은 그걸 받아들였다. 그때껏 쓰던 위의 연호 대신 황무(武)란 연호를 쓰기 로 했다. 아직 천자를 칭하지는 않았으나 이제 더는 위에 신하 노릇 은 않겠다는 뜻을 밝힌 셈이었다.
바로 그 황무 첫해 위주 조비가 보낸 사신이 오에 이르렀다. 손권 은 그 사신을 불러들이고 짐짓 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왔는가?”
그러자 그 사신이 머리를 조아리며 조비의 뜻을 전했다.
“전에 위가 오로 군사를 보낸 것은 폐하의 본뜻이 아니었습니다. 촉이 사람을 위에 보내어 구해주기를 비는 바람에 잠시 밝게 살피지 못해 군사를 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폐하께서는 그 일을 몹시 뉘우치시고 네 갈래의 군마를 내어 서천을 치고자 하십니다. 동오에 서도 군사를 보내 함께 호응해주셨으면 합니다. 만약 촉을 얻게 되 면 그 땅을 반씩 나누어 갖자는 게 폐하의 뜻이니 부디 마다하지 않 으시기를 빕니다.”
위가 전에 한 짓은 괘씸했으나 그 말은 귀에 솔깃했다. 그러나 그 뒤에 어떤 꾀가 숨어 있는지 몰라 손권은 얼른 마음을 정할 수 없었 다. 사신을 잠시 물러가 있게 하고 장소와 고옹을 불러 물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육백언(伯)이 견식이 매우 높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장소가 그렇게 대답했다. 손권도 그 말을 옳게 여겨 곧 육손을 불러오게 했다.
육손은 조비의 속셈을 한눈에 꿰뚫어보았다. 손권 앞에 이르기 바 쁘게 말했다.
“조비는 중원에 버티고 앉아 급히 쳐 없애기 어렵습니다. 이번에 만약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틀림없이 원수가 될 것이니 듣기는 들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신이 헤아리기에는 위의 장수들 가 운데 제갈량을 당해낼 만한 이가 없습니다.
주상께서는 그저 못 이긴 체 조비의 말을 들어주시되, 군사를 정 돈하고 싸움 채비를 하는 데 시간을 끌며 위의 네 갈래 군마가 어떻 게 되는지를 살피십시오. 만약 그들이 싸움에 이겨 서천이 위급해지 아무리 제갈량이라도 머리와 꼬리를 한꺼번에 돌볼 틈이 없을 것 입니다. 그때는 즉시 군사를 내어 먼저 성도부터 차지하시는 게 상책입니다. 그러나 위가 싸움에 질 경우에는 따로이 의논을 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손권도 그게 좋을 듯싶었다. 곧 위의 사신을 불러 말했다.
“뜻은 좋으나 우리는 아직 싸움에 쓰일 마필이며 병장기, 군량이 마련되지 못했소. 그게 마련되는 대로 날을 골라 군사를 일으키도록 하리다.”
그 말을 들은 사신은 군사를 내겠다는 말에만 기뻐하며 위로 돌아갔다.
손권은 곧 사람을 사방에 풀어 위의 네 갈래 군마가 하는 양을 살 피게 했다. 서평관 쪽에서 먼저 소식이 왔다.
“서평관으로 밀고 들어가던 서번() 군사는 마초가 거기 있는걸 보자 싸우지도 않고 물러가버렸습니다.”
이어 다른 세 곳에서도 비슷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남만왕 맹획이 군사를 일으켜 촉의 네 고을을 쳤으나 위연 때문 에 조금도 얻은 게 없었습니다. 위연이 의병(兵)을 써서 물리치니 맹획은 하릴없이 제 땅으로 되돌아가버렸습니다.”
“상용 맹달의 군사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주저앉았습니다. 서천으 로 가는 도중 갑자기 군중에 병이 돌아 더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합니다.”
“조진도 양평관을 넘지 못하고 돌아섰다고 합니다. 조자룡이 험한 길목마다 지키고 앉았으니 양평관은 실로 한 사람의 장수를 만 명이 당해내지 못하는 관이 되고 말았습니다. 조진은 야곡도(斜谷道)에 진을 치고 있다가 끝내 이기지 못할 줄 알고 돌아간 것입니다.”
그 모든 소식을 듣고 난 손권은 가슴이 뜨끔했다. 모든 벼슬아치 들을 모아놓고 새삼 감탄했다.
“육백언의 헤아림은 참으로 귀신 같구나! 내가 함부로 움직였다면 또다시 촉과 원수질 뻔했다.”
그러는데 문득 사람이 들어와 알렸다.
“서촉에서 등지를 사신으로 보내왔습니다.”
“이것은 앉아서 우리 군사를 물리치려는 제갈량의 또 다른 계책입니다. 등지를 보내 우리를 달래보려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촉이 사신을 보낸 까닭쯤은 자기도 알 수 있다는 듯 장소가 그렇 게 대답했다. 그러자 손권이 물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좋겠소?”
장소가 잠깐 생각하다 말했다.
“먼저 대전 앞에 큰 가마솥을 걸고 거기다가 기름 수백 근을 부어 숯불로 끓이십시오. 그 기름이 끓거든 키가 크고 얼굴이 넓은 무사 천명을 각기 손에 칼을 들려 궁궐 문에서 대전 앞까지 늘여 세웁니 다. 그런 다음 등지를 불러들이시되, 그가 입을 열어 우리를 달랠 틈 을 주지 말고 먼저 옛적 역이기(食)가 제나라를 달래러 갔던 일 을 들며 꾸짖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그 일을 본떠 기름에 삶아 죽이 겠다 하시면서 등지가 어떻게 나오는지 살피시는 것입니다. 그때 그 가 말하는 걸 보아가며 대하시면 일을 그르침이 없을 것입니다.”
손권이 들어보니 그럴듯했다. 곧 큰 가마솥을 대전 앞에 걸게 하 고 기름을 부어 끓인 뒤 다시 무사 천여 명을 불러들여 늘여 세웠다.
손권이 등지를 불러들이게 한 것은 그 모든 채비가 끝난 뒤였다.
등지는 관을 바로 쓰고 옷매무새를 가지런히 한 채 손권을 만나 러 갔다. 궁궐 문 앞에 이르니 무사들이 두 줄로 죽 늘어서 있는데 모두가 하나같이 키가 크고 씩씩해 보였다. 손에 손에 칼이며 도끼, 창 등을 번쩍이며 대전까지 이어져 있는데 예사롭지 않았다.
등지는 얼른 손권이 그들을 벌여 세운 뜻을 알아차렸다.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어깨를 펴고 얼굴을 세운 채 걸어들어갔다. 대전 앞에 이르니 거기 다시 큰 가마솥이 걸려 있는데, 그 안에는 기 름이 한창 끓고 있었다.
등지는 더욱 마음을 다잡아먹고 잔잔한 웃음까지 흘렸다. 손권을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가 나와 등지를 손권 앞에 쳐진 발 있는 데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등지는 길게 읍할 뿐 엎드리지 않았다.
“너는 어찌하여 절하지 않는가?”
손권이 구슬로 된 발을 걷어젖히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둥지가 머리를 꼿꼿이 세운 채 대답했다.
“큰 나라에서 온 사신은 작은 나라의 임금에게 절하지 않는 법입니다.”
후주는 제위에 올랐으나 손권은 아직 왕인 것을 내세워 하는 말 이었다. 그러자 손권은 정말로 성이 났다. 저희 스스로 제 주인을 천 자에 올려놓고 거기 기대 상국 행세를 하려는 게 아니꼽고도 분했 다. 사신이고 뭐고 봐주는 것도 없이 소리쳤다.
“너는 제 처지도 헤아려보지 않고 감히 세치혀를 놀려 옛적 역 이기가 제나라 달래던 일을 흉내 내려 하는구나. 여봐라, 무엇들 하느냐? 어서 저놈을 기름솥에 처넣어라!”
그러자 등지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동오에 밝고 어진 이가 많다더니 누가 알았으랴. 한낱 선비를 이토록 겁낼 줄을!”
“무슨 소리냐? 내가 어찌 너같이 하찮은 필부를 두려워한단 말이냐?”
손권이 더욱 성나 목소리를 높였다. 등지가 조금도 움츠러드는 기 색 없이 대꾸했다.
“만일 이 등지를 겁내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내가 그대들을 달 래는 걸 걱정한단 말인가? 어찌하여 입도 열기 전에 기름솥에 삶아 입을 막아버릴 궁리나 하는가?”
“너는 제갈량의 세객이 되어 나로 하여금 위와 손을 끊고 촉과 손 잡게 하려고 오지 않았느냐? 그따위 말은 들으나마나다.”
손권은 짐짓 틈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그렇게 잘라 말했다. 그 래도 등지는 조금도 수그러지는 기색이 없었다.
“나는 촉의 한낱 선비일 뿐이나 특히 오나라를 위해 이로운 것과 해로운 걸 일러주러 왔다. 그런데 무사를 늘여 세우고 가마솥을 내 걸어 사신을 맞으니 그 깜냥으로야 어찌 사람을 제대로 쓸 수 있겠 는가?”
그 말을 듣자 잠시 감정에 휘몰렸던 손권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더는 하찮은 감정 싸움을 할 때가 아님을 깨닫고 얼른 태도를 바꾸 었다. 무사들을 꾸짖어 내쫓고 등지를 전(殿) 위로 오르게 하여 자리 를 내준 뒤 물었다.
“실은 선생을 한번 떠보았을 뿐이외다. 그래, 오와 위의 이롭고 해로운 게 무엇이오? 바라건대 내게 가르침을 내려주시오.”
그제서야 등지도 말투를 바꾸었다.
“대왕께서는 우리 촉과 화친을 하시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오히 려 위와 화친을 맺으시려는 것입니까?”
“나는 기실 촉과 화친을 맺고 싶소이다. 그러나 주는 나이 어리 고 헤아림이 얕아 처음과 끝을 온전히 해낼지 걱정되오.”
손권이 비로소 속마음을 밝혔다. 등지가 목청을 가다듬어 그 말을 받았다.
“대왕께서는 세상이 알아주는 영웅이요, 제갈량 또한 한 시대의 준걸(俊)입니다. 또 촉은 산천이 험하고 오는 삼강(三江)을 건너야 하는 어려움을 가진 땅입니다. 만약 이 두 나라가 입술과 이의 사이 가 되어 서로 손잡고 돕는다면, 나아가서는 천하를 삼킬 수 있고 물 러나도 솥발처럼 천하의 한 모퉁이를 떠받들고 서 있을 수 있습니 다. 그러나 만약 대왕께서 위에 몸을 굽혀 신하 노릇을 자청하신다 면 위는 틀림없이 대왕께서 조정에 들어오기를 바라고 태자는 내시 로 삼으려들 것입니다. 그래 놓고 그걸 따르지 않으면 군사를 일으 켜 치겠지요. 그때는 우리 촉도 틈을 노려 물길을 타고 오로 밀고 들 것이니, 이 강남의 땅은 두 번 다시 대왕의 것으로 남게 되지 못할 것입니다. 대왕께서 제 말을 옳지 못하다 여기신다면 저는 대왕 앞 에서 스스로 죽어 세객이란 이름만이라도 벗을까 합니다.”
그러고는 옷을 활활 벗어부친 뒤 기름가마 속으로 뛰어들려 했다. 손권은 그런 등지를 급히 말리고 후전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귀한 손님의 예로 대하며 물었다.
“선생의 말은 바로 내 뜻에 맞소. 나는 이제 촉주와 화친을 맺으 려 하는 바, 선생은 나를 위해 다리를 놓아줄 수 있겠소?”
“저를 튀겨 죽이려 하신 것도 대왕이요, 이제 저를 쓰시려고 하시 는 것도 대왕이십니다. 대왕께서 아직도 망설이심으로 마음을 정하 지 못하셨으면서 어찌 다른 사람의 믿음을 살 수 있겠습니까?”
등지가 그렇게 쐐기를 박았다. 손권도 더는 자신의 뜻을 빙빙 돌 려 말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내 뜻은 이미 정해졌소. 선생은 의심하지 마시오.”
그렇게 말을 맺고 등지를 내보내 쉬게 했다.
등지가 나간 뒤 여러 벼슬아치들을 불러들인 손권이 한탄하듯 말했다.
“나는 강동 여든한 고을을 손에 넣고 다시 형초(楚)의 땅까지 얻었건만, 오히려 서촉의 한쪽 구석 땅을 가진 것보다 못한 듯하오. 촉은 등지 같은 인물이 있어 그 주인을 욕되게 하지 않았으나 우리 오에는 이 몸을 위해 촉으로 들어가 뜻을 전해줄 사람이 없구려.”
그러자 여럿 가운데서 한 사람이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제가 한번 사신이 되어 촉으로 가보겠습니다.”
여럿이 돌아보니 그는 오군 사람 장온(張溫)으로 자를 혜서(惠恕)라 쓰는데, 벼슬은 중랑장이었다.
“경이 해낼 수 있겠소? 촉으로 가 제갈량을 만나보고 이 몸의 뜻을 잘 전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오.”
손권이 못 미더운 듯 그렇게 말하자 장온이 힘주어 말했다.
“공명 또한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이 그 사람을 두려워할 까 닭이 무엇 있겠습니까?”
그 기개에 손권도 그를 믿는 마음이 생겼다. 기쁜 얼굴로 장온의 청을 들어주고 무거운 상을 내린 뒤 등지와 함께 서촉으로 보냈다. 한편 공명은 등지를 오로 보내놓고 후주에게 조용히 아뢰었다.
“이번에 등지가 가면 반드시 일이 되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러면 인물이 많은 오나라는 틀림없이 사람을 보내 답례를 할 것인데, 그 때 폐하께서는 예를 갖춰 사신을 대하셔야 합니다. 그가 돌아가 화 친이 이뤄지고 우리가 오나라와 손잡게 된다면 위도 함부로 우리에 게로 군사를 몰아보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와 오가 조용해 지면 신은 남쪽을 쳐 그곳 만족蠻族)들을 평정할까 합니다. 그리고 다음은 위를 치면 될 것입니다. 만약 위만 쳐 없앨 수 있다면 오도 오래는 가지 못할 것이니, 천하는 다시 하나로 돌아오게 됩니다.”
“옳으신 말씀이오. 승상의 뜻대로 하시오.”
후주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대뜸 그렇게 허락했다. 며칠 안 돼 과 연 기다리던 소식이 왔다.
“동오에서 장온을 등지와 함께 보내왔습니다.”
후주는 문무백관을 단지(丹, 궁궐의 뜰)로 불러모으고 등지와 장 온을 맞아들이게 했다.
이에 기가 산 장온은 고개를 쳐들고 전상으로 올라 후주를 만나 보고 예를 올렸다. 후주는 장온에게 금으로 만든 항아리 모양의 의 자를 내리고 대전 왼편에 앉게 한 뒤 잔치를 벌여 대접했다. 모든 게 겸손하고 예를 다한 태도였다. 백관들도 잔치가 끝난 뒤 장온을 역관까지 바래다줄 만큼 마음을 썼다.
다음 날이 되었다. 이번에는 공명이 또 장온을 청해 잔치를 열고 대접했다. 몇 순배 술이 돈 뒤 공명이 장온에게 말했다.
“선제께서 살아 계실 때는 오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으나 이제 이미 돌아가셨소이다. 지금의 주상께서는 오왕을 깊이 흠모하여 옛 날의 원한을 잊고 길이 동맹을 맺기를 원하시오. 함께 힘을 합쳐 위 를 쳐부수자는 뜻이니 바라건대 대부께서 돌아가시거든 좋게 말씀 드려주시오.”
“알겠소이다. 그렇게 하지요.”
이미 정해진 조정의 뜻이라 장온이 선선히 대답했다. 그러나 공명 이 간곡히 말하는 데 힘이 났던지 술이 오르면서 웃고 떠드는 품이 자못 오만한 데가 있었다.
다음 날이었다. 후주는 장온에게 황금과 비단을 내리고 성 남쪽 우정(郵) 위에 잔치를 열었다. 오로 돌아가는 장온을 배웅하는 뜻 의 잔치로, 그 자리에는 촉의 백관이 거의 다 모였다. 거기서도 공명 은 줄곧 장온에게 술을 권하는데 그 태도가 은근하기 그지없었다. 문득 한 사람이 술이 취해 공명과 장온의 술자리로 오더니 길게 읍을 하고 끼어들었다. 괴이쩍게 여긴 장온이 공명에게 물었다.
“이분은 누구십니까?”
“진복(秦)이란 사람으로 자는 자칙(勅)이라 하지요. 지금 익주의 학사로 있소이다.”
공명이 그렇게 대답했다. 많은 상과 융숭한 대접에 잔뜩 기가 난 장온이 비웃듯 말했다.
“이름은 학사라 하나 정말로 가슴속에 배운 게 들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자 진복이 정색을 하고 그 말을 받았다.
“우리 촉에서는 키가 석 자 되는 어린아이라도 모두 학문을 배우고 있소. 하물며 나 같은 사람이겠소이까?”
“그럼 공은 어떤 학문을 배우셨소?”
장온이 여전히 거만한 말투로 진복에게 물었다. 진복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위로는 천문이며 아래로는 지리요, 세 가지 교(敎) 아홉 갈래 가 르침과 제자백가(諸子百家)에 이르기까지 알지 못하는 게 없소. 또 옛날과 지금의 흥하고 망한 일이며 어질고 거룩한 분들이 남기신 경 전도 읽지 않은 게 없소이다.”
진복의 말을 터무니없는 큰소리라고만 안 장온이 한층 빈정거리는 어조로 물었다.
“공이 그토록 큰소리를 쳤으니 먼저 하늘을 가지고 물어보겠소. 공이 알기로 하늘은 머리가 있소? 없소?”
“하늘은 머리가 있소이다.”
이번에도 진복이 서슴없이 대답하자 장온이 다시 물었다.
“머리가 있다면 어느 쪽에 있소이까?”
“서쪽이외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서쪽을 돌아본다[乃眷西顧]’라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하늘의 머리는 서쪽에 있소.”
“그러면 하늘은 귀가 있소?”
진복의 재치있는 대답에 지지 않으려고 장온이 또 물었다.
“하늘은 높이 있으나 낮은 곳의 소리를 모두 듣소. 역시 『시경』에 이르기를 ‘학이 으슥한 늪가에서 우니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鶴 嗚九皐 聲聞於天]’’했소이다. 하늘에 귀가 없다면 어떻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겠소?”
“하늘에 발은 있소?”
“있지요. 『시경』에 이르기를 ‘하늘의 발걸음은 떼어놓기 어렵다[ 步艱難]’했으니, 하늘에 발이 없으면 어떻게 걸을 수 있겠소이까?” “하늘에 성(姓)은 있소?”
“왜 없겠소?”
진복이 이번에도 서슴없이 맞받았다. 그 말에는 장온도 어리둥절해 물었다.
“그럼 하늘의 성은 무엇이오?”
“유씨(劉氏)외다.”
“어떻게 유씨인 줄 아시오?”
“천자의 성이 유씨니까 하늘의 성도 유씨가 아니겠소?”
진복이 천연스레 말했다. 『시경』으로 줄곧 응대하다가 갑자기 자 기가 모시는 주인을 높이는 쪽으로 말을 돌려버린 것이었다. 섬기는 주인이 다른 장온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해는 동쪽에서 뜨지 않소?”
장온이 그렇게 제 주인을 높였다. 오나라가 동쪽에 있으니 결국 오의 임금이 옳은 천자라는 뜻이었다. 진복이 가볍게 받아넘겼다.
“해가 비록 동쪽에서 뜨나 또한 서쪽에 지는 법이오.”
진복의 말이 뚜렷하고 묻는 말에 하는 대답이 물 흐르듯 하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랐다. 장온도 거기까지 오자 말이 막히는지 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장온에게 진복이 오히려 물었다.
“선생께서는 동오의 이름난 선비로 이제껏 하늘을 가지고 제게 물으셨으니 틀림없이 하늘의 이치를 밝게 알고 계실 것입니다. 아주 옛적 뒤섞여 엉켜 있던 세상이 나누어지고 음(陰)과 양(陽)이 갈라 져, 가볍고 맑은 것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었으며 무겁고 흐린 것 은 아래로 가라앉아 땅이 되었다 합니다. 그런데 공공씨(工氏)가 싸움에 져서 머리가 불주산(不周山)에 닿으니 하늘 떠받치는 기둥이 부러지고 땅이 꺼져, 하늘은 서북으로 기울고 땅은 동남으로 내려앉 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이 가볍고 맑은 게 위로 떠서 만들어 진 것이라면 어떻게 그 하늘이 서북으로 기울어질 수 있겠습니까? 하늘에 가볍고 맑은 것 외에 또 다른 무엇이 있습니까? 참으로 알 수 없어 묻는 바이니 선생께서 부디 가르쳐주십시오.”
말이 한껏 공손했으나 그거야말로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물음이 아니었다. 한참이나 대답을 못하고 있던 장온이 문득 자리를 비켜 앉으며 말했다.
“뜻밖에도 촉 땅에는 뛰어난 인물이 많소이다. 마치 강론을 듣는 것 같아 이 사람의 막힌 속을 확 틔워주는 듯하오.”
솔직하게 두 손을 들고 나오는 셈이었다. 공명은 장온이 부끄러워 할까 봐 좋은 말로 그의 낯을 세워주었다.
“이 자리에서 주고받은 말은 모두가 우스갯소리외다. 공은 나라를 평안케 할 길을 깊이 꿰뚫어 알고 계시는데, 까짓 입술과 이로 하는 우스갯소리가 무엇이겠소이까?”
그러자 장온은 공명의 그런 보살핌이 고마운지 머리를 조아려 감사했다. 잔치가 끝난 뒤 공명은 다시 등지에게 장온과 함께 오로 가 서 답례를 하도록 했다. 이에 장온과 등지는 공명에게 절하고 물러 난 뒤 동오로 되돌아갔다.
장온이 돌아간 것은 손권이 바로 그 일에 대해 백관을 불러 모아 의논하고 있을 때였다. 근시가 와서 장온이 등지와 함께 촉에서 돌 아왔음을 알리자 손권은 곧 그들을 불러들이게 했다.
“촉의 후주는 덕이 있고 제갈공명은 헤아림이 밝아 우리 오와 길 이 화친을 맺기를 바랐습니다. 특히 등상서를 보내시어 답례를 하고 자 하십니다.”
손권 앞에 불려간 장온이 그렇게 말하자 손권은 몹시 기뻤다. 크 게 잔치를 열어 등지를 대접하며 물었다.
“만약 촉과 오가 힘을 합쳐 위를 쳐 없애고 천하를 둘로 나누어 다스릴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기쁘겠소?”
그러자 등지가 대답했다.
“하늘에는 두 해가 있을 수 없고, 백성은 두 주인이 있을 수가 없 습니다. 위를 쳐 없앤 뒤 천명이 어떤 사람에게 돌아가게 될는지는 알 수가 없지요. 다만 임금된 이는 그 덕을 닦고 신하된 자는 그 충 성을 다할 뿐입니다. 그렇게 되는 날 비로소 천하의 모든 싸움은 끝 날 것입니다.”
어찌 보면 당돌하기 그지없는 말이었으나 손권은 오히려 거침없이 말하는 등지의 기개를 높이 샀다. 껄껄 웃으며 등지를 추켜세웠다.
“그대는 실로 정성이 놀라운 사람이구려.”
그리고 등지에게 무거운 상을 내려 촉으로 돌려보냈다. 촉과 오가 그로부터 굳게 손잡게 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