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6권 4화 – 뒷골목에 있을 놈이 아닌데

뒷골목에 있을 놈이 아닌데

아론 워커는 기습을 좋아한다. 직업상 자신보다 실력은 떨어지지만, 숫자는 많은 적을 상대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기에 생긴 습성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습을 하는 게…, 아니 적의 사거리 안으로 몸을 완전히 밀어 넣어 정면대결을 벌이는 것이 망설여졌다.

미친개의 증언도 그렇고, 이런 생활을 해오며 터득한 육감이랄까? 하여튼 뭔가 찝찝했던 것이다.

결국 워커는 기습이 아닌, 정석대로 싸우는 걸 택했다.

애송이 거지놈을 상대로 뭐 하는 짓인지, 하는 자괴감도 들었지만 적당히 찔러보며 상대의 실력을 확실히 파악한 뒤 상대하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워커가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상대와의 거리를 좁혀나갈 때였다.

간 크게도 거지놈이 먼저 움직였다.

팟!

도약했다 싶은 순간, 놀랍게도 거지놈이 워커의 바로 코앞에 있었다. 그것만 해도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랐는데, 곧 이어지는 놀라운 검격! 거지놈의 검이 움직임과 동시에 미약하긴 하지만 붉은 빛이 보인 건 그의 착시였을까? 하지만 워커는 그게 착시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았다. 거지놈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 엄청난 압력! 저건 눈속임일 수가 없었다.

콰콰콰콰!!

그저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마치 마법이라도 발휘한 듯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고 워커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헉!”

워커가 검의 공격권 밖으로 간신히 몸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여차하면 뒤로 빠질 준비를 하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이, 이런 젠장!!’

검에 내재된 위력을 느끼자마자 워커는 황급히 뒤로 빠졌는데 그게 그의 목숨을 살려줬다. 안 그랬다면 지금껏 라이의 검 앞에 섰던 사람들이 다 그랬듯, 그 또한 피떡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그만큼 라이가 시전한 검술의 위력은 절대적이었으니까.

뒤로 물러선 워커는 경악감을 감추기 힘들었다. 이건 뒷골목 출신이 실전경험을 쌓으며 스스로를 단련하고 또 단련한다고 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절대로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지놈이 뿜어낸 검세(劍勢)의 위력은 그가 익힌 검술이 지닌 순수한 힘이었다. 대제국에서도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위치에 올라서 있는 무가(武家)의 적통들에게만 익히는 것이 허락된다는 최강의 검술. 아마 그것들 중 하나이리라.

‘저런 놈이 어째서 이런 촌구석에 있는 거야?! 하고 있는 꼬라지를 봐서는 대충 짐작이 가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런 뒷골목에 있을 놈이 아닌데?’

저 정도 실력이라면 설혹 반역죄에 연루되어 가문이 망했다 해도, 다른 나라로 탈출할 수만 있어도 어디서든지 환영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런 실력자가 이런 뒷골목에서 허접한 놈들과 함께 거지꼴로 지내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정규 기사단에 입단할 정도의 실력이기에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부귀를 누리며 살 수도 있는데 말이다.

순간 놀라긴 했지만 워커는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목숨을 건 수없이 많은 아수라장을 헤쳐 온 워커였기에 상대방이 새파란 초짜라는 사실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지고한 검술을

배운 건 맞지만, 실전경험은 거의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단숨에 돌진해 들어와 듣도 보도 못한 무시무시한 검술을 전개해 공격했지만, 그것뿐이었다.

자신이 익힌 검술을 단순히 구사하기만 했을 뿐, 적의 움직임에 대응한 추가적인 공격은 전혀 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이 이렇듯 손쉽게 녀석의 공세권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을 턱이 없었다.

‘정말 대단한 일격이야. 느낌이 이상해서 조심하고 있었기 망정이지, 놈을 얕잡아 보고 맞받아쳤다면 내가 오히려 즉사를 면키

힘들었을지도.

재능이 떨어져 스승으로부터 그리 많은 걸 전수받지는 못했지만, 자신을 안쓰럽게 여긴 스승의 배려로 고수를 상대하는 비기 몇 가지는 배울 수가 있었다.

상대를 고수로 판정한 순간, 워커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우선 그는 상대의 공격을 회피하는 데 중점을 뒀다. 물론, 그건 쉬운 일은 아니다. 충분히 거리를 벌려놨음에도 상대의 도약력은 엄청났고, 단숨에 거리를 좁혀오며 무시무시한 공격을 퍼부었으니까.

하지만 초식의 전반부만 회피하는 데 성공하면 그다음에 이어지는 상대의 공격은 일정한 패턴에 의해 진행된다. 즉, 멍청할 정도로 정직하게 초식에 따라 움직인다는 말이었다.

물론, 검술은 수십 개의 초식으로 이뤄져 있고, 각 초식마다 또 상황별로 사용할 수 있는 변초들이 더해지기에 한순간 만난 적의 검술을 꿰뚫어 본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라이가 사용할 수 있는 초식은 몇 개 되지도 않았고, 변초 따위의 응용은 전혀 없었다.

똑같은 초식이 몇 번이나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으니, 워커 같은 노련한 고수가 그 약점을 놓칠 수가 없는 것이다.

“허억!”

자신이 검술을 펼치자 살짝 옆으로 피하며 찔러 들어오는 워커의 검. 그 방향이 실로 절묘했다.

이대로 계속 초식을 펼치면 그의 검에 자신의 팔을 가져가 대주는 고약한 상황!

기겁한 라이는 지금껏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짓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전개하던 검식을 억지로 멈추고 뒤로 빠지려고 했던 것이다.

적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그런 시도를 했던 것이었지만, 곧이어 그는 검식을 멈출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급검술은 검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 몸 전체의 마나가 초식의 묘리에 따라 함께 움직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가공스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고. 단순히 근육만을 사용해 검을 휘두른 것이었다면 멈추는 게 쉬웠겠지만, 일단 움직이기 시작한 마나의 움직임을 임의로 급작스럽게 멈추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 것이다.

“젠장!!”

하마터면 팔에 커다란 상처를 입을 뻔했지만, 다행히도 라이는 초인적인 의지로 움직임을 멈출 수 있었다. 눈뜨고 뻔히 칼을 맞을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물 흐르듯 흐르던 마나를 억지로 멈춰 세운 그 대가는 곧바로 나타났다.

“우윽…….?”

갑자기 하늘이 빙빙 도는 것만 같은 어지러움과 함께 찝찔한 피 냄새가 느껴졌다. 거기다 구토까지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적을 코앞에 두고 구토를 할 수는 없는 노릇. 라이는 억지로 그걸 꿀꺽 삼켰다.

‘도대체 왜 이러지?’

라이가 고급검술을 익힌 뒤로 이런 일을 당해보는 건 처음이었다.

몸 상태가 갑자기 엉망이 됐다는 건 알았지만, 그렇다고 상대에게 다음에 싸우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당황한 라이가 아직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적의 공격이 시작됐다.

“타앗!”

공격해오니 대응할 수밖에 없다. 라이는 억지로 몸에 마나를 끌어올렸다. 평소 그렇게 쉽게 움직이던 마나였는데, 무리하게 움직이려 하니 몸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라이는 그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았다. 최대한 빨리 적을 박살 내 버리고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렇기에 라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력을 다해 초식을 전개했다.

하지만 라이가 검식을 전개하자마자 적은 지금껏 그래왔듯 황급히 뒤로 물러나 버렸다. 기왕에 검식을 전개한 상태였기에 보법을 밟으며 적을 향해 돌진하며 이어지는 검식을 계속 전개해 나갔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더욱 안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 적이 살짝 피하면서 또다시 초식의 빈틈을 향해 검을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달려 들어가지 말 것을.

“크윽!”

또다시 강제적으로 초식을 멈추고 뒤로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된 라이. 두 번째는 훨씬 더 깊은 내상을 그에게 안겨줬다. “우우욱!!”

라이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검붉은 피를 왈칵 토하고야 말았다.

그걸 보며 워커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스승님의 가르침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저토록 무시무시한 고수가 그저 검로를 조금 방해받은 것만으로 토혈을 할 정도의 내상을 입다니.

워커는 토혈하고 있는 라이를 향해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런 뒷골목에서 썩기에는 너무 아까운 실력이군. 어때, 내 밑에서 일해 볼 생각은 없나?”

“내가 모시고 있는 보스는 상류층 귀족과의 인맥이 아주 두터우시지. 자네가 어떤 사정으로 인해 이런 밑바닥까지 떨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모든 걸 깨끗하게 지워줄 수도 있어. 어때? 나하고 함께 가지 않겠나?”

하지만 라이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하기야 제안을 받는 쪽이 워커였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그런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 힘들었으리라. 상대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신뢰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라이가 검을 꽉 움켜쥐며 다시금 일격을 준비하는 것을 보며 워커는 안타까움에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또다시 살벌한 공격을 피하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이젠 검로가 어느 정도 눈에 익어 피하는 건 쉬웠으니까. 단지 워커는 저 애송이 거지놈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저 어린 애송이의 검에 대한 재능이 아까웠던 것이다.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좋을 텐데…

“개소리하지 마, 새꺄. 너 같으면 그러겠냐?”

말을 할 때마다 쿨럭이며 연신 검붉은 피를 토해내는 모습을 보니 애송이의 싸울 의지도 이제 거의 끝난 거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 봤을 때는 그저 피를 토해내는 정도였지만, 일반적인 상처와 달리 생명의 근원인 마나 회로가 타격을 받은 것은 웬만한 회복마법조차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치명적이다. 그건 검술의 위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반동으로 피해는 더욱 크다고 배웠다. 지금 저 애송이 녀석은 서 있기도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송이 녀석은 모든 힘을 쥐어짜서 또다시 공격을 가해왔다.

“타핫!”

워커는 지금까지의 회피 위주의 접전방식에서 벗어나 이번에는 자신이 가진 모든 기량을 다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칼과 칼이 부딪치며 요란한 불꽃이 튀었다. 접전이 지속될수록 워커의 얼굴은 점차 안타까움에 사납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마나 회로가 계속 타격을 받는다면 애송이의 내상은 더욱 심해질 것이고, 결국에는 그 어떤 신관이나 마법사가 와도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될 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검사로서의 생명 또한 끝나게 되는 것이다.

애송이의 검에서 뿜어지던 그 놀라운 기운은 어느 순간 느껴지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서서히 공격의 주도권이 워커 쪽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워커는 바로 지금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더 이상 쓸데없는 이 대결을 계속할 생각이 없었다. 몸에 상처를 조금 남기는 한이 있더라도, 최대한 빨리 이 대결을 종료시키는 것만이 최선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게 저 애송이가 폐인이 되는 걸 막는 유일한 길이었으니까.

챙!

워커의 검이 내뿜는 강력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라이의 검이 부서지며 상반신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가죽갑옷을 입고 있긴 했지만, 저런 싸구려 가죽갑옷 따위는 마나가 실린 검 앞에는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설혹 판금갑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다고 해도 갑옷 채로 몸뚱아리가 썰려버릴 정도였으니까.

팟!

“크윽!”

반동으로 튕겨 나가며 벽에 처박혀버리는 애송이.

워커는 황급히 검을 거두고 애송이에게로 달려갔다.

적당히 제압할 생각이었는데, 격렬한 저항을 뚫다 보니 의도한 것보다 검이 깊게 들어갔다. 길게 잘려 나간 가죽갑옷 틈새로 펑펑 뿜어져 나오는 검붉은 핏줄기!

상처를 조심스레 살펴보던 워커는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겉보기보다 상처가 깊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던 것이다.

“다행히 깊게 들어가지 않았구만. 정말 다행이야…..”

워커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이 녀석 데리고 가서 치료 좀 해줘. 아니, 그것보다는 신전에 가서 신관을 데려오는 게 더 빠르겠군. 돈은 달라는 대로 줄 거라고 하고 어서 데려와!”

“옛.”

혹시나 하며 기대하고 있던 박스터는 라이가 쓰러지는 것을 보자마자 황급히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그리고 그런 두목의 모습을 본 부하들 역시 바닥에 납죽 엎드리며 고개를 팍 숙였다.

‘이런 젠장! 괜히 잭을 불렀네. 역시 여왕벌의 둥지를 박살 낸 건 운이 좋아서일 거야.’

박스터는 내심 라이를 욕하면서도 이후 어떻게 처신을 할 건가를 맹렬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부상당해 쓰러진 잭을 치료하겠다는 걸 보면 아직 희망이 있을 수도 있었다.

박스터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며 아부성 발언을 내뱉었다.

“역시 굉장한 실력이었습니다, 형님.”

“뭘, 이 정도 가지고…………… 어쨌거나 저 애송이를 이기면 조직 전체가 날 따르겠다고 동생이 승부수를 걸 만도 했어. 나 정도 되는 사람을 일순 당황하게 만들었으니 말이야. 하지만…….

워커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내상을 입어 빈사 상태에 놓여 있어야 할 애송이가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저 정도 부상이면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게…………?”

워커가 기겁을 하며 놀란 것은 애송이가 온 힘을 다 짜내서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아무런 표정 없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는 애송이의 모습에 워커는 일순 소름이 돋았다. 주위에 흩뿌려진 진득한 피들만 아니라면 방금 전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녀석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박스터는 물론이고 그 부하들까지도 멍한 시선으로 라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다시 싸우려는 건가? 저러고도 아직 덤벼들려고 하는

그 투지가 놀랍다.

박스터는 짐짓 성난 표정으로 잭을 향해 소리쳤다.

“잭, 져서 속상한 건 알겠지만 더 이상 형님께 무례하…………?”

박스터는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놀라움에 그저 입만 떠억 벌렸다. 벌어진 가죽갑옷 틈으로 보이던 피를 콸콸 쏟아내고 있던 상처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같이 지켜보고 있던 워커는 자신도 모르게 재빨리 방어자세를 취했다. 왠지 모를 섬뜩함에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을 한 것이다.

하지만 천천히 몸을 일으킨 애송이는 워커는 쳐다보지도 않고 갑자기 전력을 다해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워커와 그 부하들, 그리고 박스터와 부하들까지 그저 입만 떠억 벌린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게다가 도망치는 속도가 너무 빨라 추격한다고 해도 따라잡을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워커 역시 온몸의 마나를 끌어 올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방어에 집중하고 있다 보니 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도저히 대처할 수가 없었다.

애송이는 놀라운 몸놀림으로 옆에 있는 상점의 지붕 위로 도약하더니, 그대로 내달려 지붕과 지붕을 건너뛰며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라이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던 워커는 고개를 휙 돌려 박스터를 향해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된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박스터와 그 부하들 역시 황당한 표정으로 라이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뭔가 상처를 치료하는 마법도구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하지만 이렇게 빠른 속도로 치료를 해주는 게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는데……………

박스터가 혼란에 빠져 대답을 못하자 워커는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렸다.

“동생, 현 상황을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자세한 설명이 있어야 할 거야. 동생도 잘 알다시피 이 바닥에서 믿을 수 없는 놈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모를 리 없을 테니 말이야.”

워커의 말속에서 진득한 살기를 느낀 박스터는 소름이 쭉 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재빨리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마법 아티펙트와 보석들을 꺼내 워커의 앞에 내밀며 애원했다.

“제발 살려만 주십쇼, 형님.”

“이런, 눈치 빠른 동생이 내가 알고 싶은 게 어떤 건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자꾸 이렇게 날 실망시킬 건가?”

그제서야 박스터는 워커가 잭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어 한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그걸 이 자리에서 얘기하기는 부하들 때문에 곤란했다.

박스터가 뒤쪽의 부하들을 힐끔거리자 워커는 피식 웃으며 가게 안쪽의 밀실을 향해 걸어갔다.

“날 따라와, 동생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싶으니 말이야. 참, 동생 부하들도 적당히 술을 마실 수 있도록 조치하는 게 좋겠지.” 그러면서 워커는 자신의 부하들을 향해 슬쩍 눈짓을 했다. 애송이를 추적하라는 신호였다. 그러자 부하들 중 반은 밖으로 나가 라이의 흔적을 찾아 추적하기 시작했고, 나머지 반은 가게의 문을 틀어막고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했다. 혹시라도 박스터의 부하들이 애송이의 도망을 돕지 못하게 하려는 조치였던 것이다.

워커에게 이제 삼천 골드나 박스터의 조직 같은 건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어떻게든 절대 무가의 검술을 구사하는 잭이라는 자를 포섭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애송이의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고, 그 정보는 박스터가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렇기에 박스터를 살살 구슬려 그 정보를 토해내게 할 생각이었다. 뭐, 필요하면 적당한 협박과 고문까지도…

라이는 당혹스런 마음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근래 그는 무적이었다.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며 살인의 광기에 젖어보기도 했고, 산맥 안에 들어앉아서는 그때의 깨달음을 토대로 몬스터들을 상대로 검술을 갈고 닦았다.

그 과정에서 과거 자신에게 절망을 안겨줬었던 숲의 유령, 트롤까지 단칼에 산산조각 내버리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라이는 자신이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에게 무적이라는 자신감을 안겨줬던 검술은 그 사내에게는 전혀 먹혀들어 가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죽음을 각오해야만 하는 최악의 상황으로까지 내몰렸었다. 적을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이었으니까.

하지만 또다시 자신은 살아났다. 무엇보다 꿈을 꾼 게 아니라는 건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말해주고 있었다. 가죽갑옷은 물론이고, 그 안쪽에 입고 있던 옷까지 섬뜩하게 잘려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주위를 흠뻑 적시고 있는 검붉은 피는 아직 채 마르지도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건 옷이 잘린 부위의 피부에도 피가 흠뻑 묻어있긴 했지만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하다는 점이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는 게 문득 떠올랐다.

광기에 찬 눈빛으로 떼 지어 달려들던 키메라들! 라이는 그놈들과 목숨을 건 처절한 접전을 벌였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는지 자신이 눈을 떴을 때, 키메라는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혼자 숲속에 벌거벗은 채 누워있지 않았던가.

온몸에 잘게 찢긴 키메라의 살점과 검붉은 피, 그리고 뭔지 모를 오물들을 흠뻑 뒤집어쓴 것만 봐도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이해할 수 없었던 건 그토록 치열한 격전을 벌였던 기억이 어느 한순간을 기점으로 전혀 남아있는 게 없었고, 지금과 마찬가지로 몇 번이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것 같은데 눈을 떴을 때는 작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는 점이다. 그토록 무시무시했던 키메라들을 상대로 말이다.

그때는 다급히 도망치는 것에 정신이 팔려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넘겼었는데, 또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라이는 풀이 죽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나…, 설마…, 사람이 아닌 건 아니겠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어머니가 있었다고 했고,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함께 살았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자신이 알기로 아버지가 사람이 아닌 흡혈귀나 늑대인간 같은 인간형 몬스터는 분명히 아니었다. 혹시 친자식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주워다가 기른 양자였을까? 그럴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 촌장(?)을 따라 이주해 온 주위 이웃들이 어머니를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그 어머니로부터 자신이 태어났음을 증언하고 있었으니까.

“아냐. 그건 아닐 거야.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려 봐도 내가 주워온 자식이거나 아버지가 이상한 몬스터가 아님은 분명해.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밖에 없는데…..”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죽을 정도의 치명적인 상처를 입혀도 곧바로 재생하며 살아나던 키메라들! 어쩌면 그놈들을 죽이는 과정에서 튄 핏방울 중 하나가 입으로 들어와 자신도 키메라화 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겨우 피 몇 방울을 먹었다고 해서 키메라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지만, 당시 봤었던 키메라들과 같은 무시무시한 재생력이 자신의 몸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라이는 날카롭게 베어져 나간 가죽갑옷을 바라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나…, 키메라가 되어버린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외에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