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8권 2화 : 나 조신하게 큰 여자야! – 2
나 조신하게 큰 여자야! – 2
월터 일행은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 가격이 싸면서도 음식이 맛있는, 하지만 콘도르 기사단원들처럼 높으신 분들은 찾아오지 않을 듯한 그런 술집을 찾아 헤맸다.
발품을 파는 수고를 한 보람이 있었다.
성 외곽 골목 뒤쪽에 숨겨져 있는 허름한 술집.
겉보기와 달리 안에는 수많은 손님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물론 손님들의 행색은 추레하기 짝이 없었고 술집 안은 그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묘한 악취로 가득 차 있었지만, 뭐 그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니 문제 될 건 없었다.
사실, 사막을 건너온 그들의 몸에서도 똑같은 냄새가 풍기고 있는 중이었고,
월터 일행은 술집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놀라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사막 부족을 정벌하기 위해 출동했던 링카 영주군 6만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 술집 안은 온통 그 얘기로 들끓고 있었던 것이다. 정보 통제를 위해 링카 영주 측이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6만씩이나 되는 대군이 감쪽같이 증발해 버렸다는 걸 숨기기는 힘들었다.
외부에서 고용해 온 용병들이라면 몰라도 병사들 모두 이곳 링카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최근 작전을 나갔던 용병단들이 언데드 몬스터 떼를 만나 엄청난 피해를 입고 속속 성으로 복귀하면서 이러한 소문은 들불이 퍼져나가듯 삽시간에 링카 성을 뒤덮어 버린 것이다.
거기에 불안감을 느낀 병사의 가족들이 진위파악을 위해 관청에 수백, 수천 명씩 몰려가서 아우성을 치고 있는 상황이니 소문이 안 퍼질 수가 없었다.
“6만이나 되는 병사가 행방이 묘연하다니……………?”
“믿기 힘드네. 거기에는 기마병 2만이 포함되어 있다잖나.”
기마병의 특성상 빠른 후퇴가 가능하다. 아무리 괴멸적인 피해를 입는다 해도 부대 전체가 전멸당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사막이라는 지형적인 문제가 작용한 것일 수도 있지. 낮에는 뜨겁게 달아오르고, 밤에는 얼어붙고…………”
사막 위에 건설된 도시인 링카에 거주하고 있는 만큼, 모두 사막에 익숙한 병사들이다. 언데드가 어떤 존재인지는 잘 몰라도 사람이 사막에서 생존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잘 안다.
전쟁에서 패한 후, 식량도 물도 다 떨어진 상황이라면 사막은 절대적인 죽음의 땅으로 변모하게 된다.
주위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다이아나는 시원스레 맥주를 들이켠 후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하긴 우리가 본 샌드 웜 몇 마리만 있어도 6만쯤 전멸시키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거야. 게다가 광활한 사막 위에서 어디 숨을 데도 없었을 테고 말이지.”
월터는 그런 다이아나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나는 행방불명이라는 말이 왠지 마음에 걸려.”
“뭐가?”
“6만이라는 대군이야. 뭐, 병사들이야 도망치다 잡아먹혔다고 쳐도, 기마병만 2만이라는데 그들 중 한둘조차 도망치지 못했다는 건 도저히 납득이 가지를 않아. 게다가 본부와의 연락을 담당한 마법사도 한둘이 아닐 텐데 말이지. 최소한 수십 명일 통신 마법사들이 본부와의 연락조차 못 하고 순식간에 전멸한다는 건 아무리 샌드 웜이라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맞아, 통신마법이 있었지.”
“이곳 사막에서는 공간이동을 할 수 없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비행마법을 쓰는 건 가능하잖아. 군에 배속된 마법사들의 수준이 아무리 허접하다고는 해도, 최소한 몇 명은 비행마법을 쓸 수 있을 테고, 그런 마법사들까지 샌드웜이 순식간에 처리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지.”
“그 말이 옳은 거 같아.”
라디아가 자신의 말에 수긍하자 월터는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해. 아무리 타이탄조차 씹어 삼키는 샌드 웜이 공격했다고 해도, 분명히 뭔가 흔적을 남겼을 거라는 거지. 설마 샌드 웜이 영양가도 없는 마차까지 살뜰하게 다 씹어 먹었을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하거든.”
다이아나는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흐음……, 그렇다면 링카 영주가 뭔가를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하겠네?”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
“대체 숨기고 있는 게 뭘까?”
여태껏 옆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던 파벨이 두 사람의 대화에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제가…, 한번 알아볼까요?”
“여기에도 우리 정보원이 배치되어 있나?”
“이곳 링카 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월터는 잠시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곧바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인데, 이곳 정보원과 접촉해도 괜찮을까?”
“괜찮을 거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원활한 복귀를 위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접촉한 거라 보고하면 되니까요. 그 와중에 두 분이 궁금해 하시는 걸 슬쩍 물어볼 수도 있잖습니까?”
자신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 월터의 표정을 보고, 파벨은 자신 있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동안 짐짝처럼 끌려다니다 뭔가 1인분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파벨은 신이 난 듯했다.
“6만 명의 정예 병력이 한순간에 사라졌다면 분명 상부에서도 이미 조사에 착수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핵심적인 정보까지 획득했을 가능성도 있고요. 요충지인 링카 성에 파견된 첩보조이니, 아주 능력 있는 요원들로 골라서 뽑았을 겁니다.”
“그건 그렇겠지.”
잠시 고심하던 월터는 이윽고 마음을 정했는지 파벨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그럼 그렇게 해. 그리고 혹시 아직 정보를 얻지 못했다고 하면 병력이 사라졌다는 지역이 어디인지 슬쩍 물어봐. 사막 쪽으로 몰래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도 함께 복귀하기 전에 대부대가 행방불명되었다는 곳을 좀 둘러보고 싶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링카 성에 잠복하고 있던 정보원과 비밀리에 접촉한 파벨은 필요한 정보를 얻자마자 곧바로 술집으로 돌아왔다.
대략 두 시간쯤 걸렸는데 나머지 일행은 그때까지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흥겹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어찌 보면 적진 한복판이나 다름없는 곳인데도 긴장은커녕 마치 집 근처 술집에 놀러 나온 듯한 태연함에 놀라움을 감추기 힘들었다.
특히 다이아나는 사막에 나가 있는 동안 못 마신 술을 벌충이라도 하겠다는 듯 쉼 없이 술잔을 비우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술 취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파벨은 자리에 앉자마자 주위를 조심스레 살핀 뒤 작은 목소리로 월터에게 보고를 시작했다.
“정보원들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행방불명된 6만의 병사들은 도시연합 쪽에서 사막 부족을 돕기 위해 달려오는 원군을 기습하기 위해 은밀히 출동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파벨은 앞에 놓인 물잔에 손가락을 담가 그 물기로 탁자 위에 지도를 그린 뒤 다시 설명했다.
“일단 용병들로 사막 부족의 이목을 끈 뒤 이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오는 도시연합의 군대를 매복을 통해 기습 공격하겠다는 작전이었다고 합니다.”
“흠, 제법 머리를 굴린 작전이군. 그런데 결과로만 보면 중간에 정보가 샌 모양이지?”
파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정보원들 말로는 6만 대군이 행방불명된 당일까지 정보 통제가 심해 전혀 모르고 있었답니다. 6만 대군이 행방불명된 후 링카 성이 발칵 뒤집혔고, 그 난리통에 겨우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더군요.”
월터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긴 한두 명도 아닌 6만이나 갑자기 증발했으니 링카 성이 뒤집어질 만도 하지. 그럼 지금까지 뭔가 밝혀진 게 있다고 하던가?”
“그것까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병사들이 사라졌다고 짐작되는 현장을 콘도르 기사단이 철통같이 지키며 통제하고 있기에 아예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하던데요.”
콘도르 기사단이 현장을 통제하고 있다는 말에 월터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영주 쪽이라면 아무리 정보를 통제하려 해도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영지를 운용하기 위해 일하는 수많은 관리들과 그 가족들이 있다. 뇌물을 듬뿍 뿌린다면 몇 명 포섭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다.
뇌물이 통하지 않는다면 가족을 납치해서 협박하는 방법도 있다.
물론 그 뒷감당이 좀 힘들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몇 가지 핵심적인 정보만 획득하고 튀는 거라면 크게 문제 될 건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규 기사단이 그 상대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정규 기사단은 우수한 마법사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만큼, 내부 정보를 탐색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했다.
정보원들이 알아낼 수 있는 건, 기사단 쪽에서 영주 측에 내린 지시가 뭔지를 살펴보는 것 정도일 것이다.
“흠, 그럼 6만 병력이 행방불명된 단서를 기사단이 찾았는지조차도 아직 모른다고 봐야 하겠군?”
“예. 현장 일대를 콘도르 기사단이 철통 경계하고 있고, 게다가 그 위치가 사막이라 몰래 침입하기가 거의 불가능한지라 링카 성 내부로 첩보 전력을 집중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직접 현장을 찾아가 확인해 볼 수 없다는 말에 월터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지금과 같은 긴급 상황에 현장에서 자칫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면 그 외교적 파장이 장난이 아닐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콘도르 기사단 쪽의 움직임에 대해서 뭔가 알아낸 건 없다던가?”
파벨은 탁자 위에 그려진 지도상의 링카 성 주위의 여섯 군데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여섯 곳에 1개 분대와 그를 보조하는 2개 정찰조를 각각 투입해 방어선을 구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에 주둔 중인 팔콘 분견대는 콘도르 기사단의 지시를 받고 있다고 하고요. 보시다시피 폭넓게 방어선만 구축한 채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 보면, 아직 행방불명된 병사들에 대한 단서는 찾지 못한 것 같다는 분석입니다.”
말을 듣던 월터는 왠지 모르겠지만 가슴이 답답해져 옴을 느꼈다. 그건 수많은 작전을 뛰며 키워온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의 영역이었다. 아무래도 뭔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알 수가 없다. 그것도 상당히 위험한 뭔가가………………
“그리고 한 가지 특이한 정보가 있었는데요.”
“뭔데?”
“콘도르 쪽에서 영주 측에, 성문을 통한 통행 제한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 성문들은 모두 굳게 닫혀 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링카 성은 넓은 사막 위에 있는 암석지대에 건설되어 있었다. 즉, 링카 성 밖으로 나가면 사방이 다 사막이라는 얘기다.
주민들이 사막으로 나가는 걸 막는 이유야 뻔했다.
“흠, 그렇다면 샌드 웜의 존재를 알아내기 전에 콘도르가 파견되었다는 얘기로군.”
“그런 것 같습니다.”
“링카 변경백의 수완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병력이 행방불명된 이유를 파악하지도 못했는데, 바로 콘도르 기사단을 불러들인 걸 보면 말이야.” “황실에서도 곧바로 콘도르를 파견한 걸 보면, 드래곤을 경계한 게 아닐까요?”
6만이 행방불명된 게 드래곤이 관여한 게 아닐까 걱정했을 거라는 얘기에 월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렇다고 보는 게 옳겠지.”
“그리고 쓸 만한 정보가 하나 더 있습니다. 대규모 언데드 무리가 링카 성 서쪽으로 이삼일 정도 떨어진 위치에 매복해 있었다고 하더군요. 사막 부족을 정벌하기 위해 출동했던 용병단들이 후퇴하던 과정에서 언데드 무리와 교전이 있었다고 하는데, 야간에 갑작스레 전투가 벌어졌기에 언데드 무리의 전체 규모는 정확한 파악이 불가능했다고 하지만, 최소 몇만 단위는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결과는?”
“언데드 무리와의 전투를 피해 용병단이 링카 성으로 황급히 후퇴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당시 근방을 지나가던 콘도르 기사단이 이를 발견해 그들을 구원했다고 하는데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을 거라고 하더군요.”
월터 일행은 링카 성으로 돌아오던 도중에 동남쪽으로 이동하던 언데드 무리를 뒤따라가느라 처음 예상보다 한참 남쪽으로 내려갔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도 그 언데드 무리와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