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1권 – 12화 유혹의 검은 장미 2 : 무녀 홍녀
무녀 홍녀
여인은 준후의 바로 앞에 와서 섰다. 준후는 그제야 잔뜩 집 중해 있던 얼굴을 펴고 자기 앞에 서 있는 이상한 여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호호호……. 귀여운 아이로군. 재주도 있고.”
여인의 발음에는 일본어의 억양이 섞여 있었으나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누구시죠?”
현암과 박 신부는 암암리에 기운을 끌어모았다. 가까이 있노라니 그녀의 뒤에서 물결치는 영들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저 말인가요? 고향을 찾아온 사람이지요. 먼 옛날에 떠났던 고향을 처리해야 할 일도 있고 해서…………….”
여인의 눈이 잠시 번뜩였다.
“무녀 홍녀라고 합니다. 원래의 성은 권(權)이지요.”
잠시의 침묵을 깨고 현암의 품 안에서 월향이 길게 울었다. 여 인은 흠칫하더니, 현암의 품속을 쏘아보고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기한 것을 가지고 다니시는군요. 역시 꼬마뿐 아니라 두 분 다 보통 분은 아니군요.”
“댁의 몸 전체에 이상한 기운이 가득 서려 있군요.’
박신부의 눈이 안경 속에서 형형히 빛났다.
“백귀야행(百鬼夜行! 일본 밀교 분이시군요.”
준후가 결코 반갑다고는 할 수 없는 눈으로 여인을 보면서 말했다. 여인은 깔깔깔 웃었다.
“정말 깜찍한 꼬마로군! 어린 데도 견문이 넓고!”
“백귀야행? 그렇다면 백귀의 힘을 지닌………….”
현암이 중얼거렸다.
“맞아요. 백 가지 귀신의 힘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수행을 하신 분이에요. 대단하시군요. 허나 사악한 기가 많군요.”
준후가 여전히 곱지 않은 투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홍녀는 기분이 상한 듯 날카로운 어조로 웃어 젖혔다.
“호호호! 예쁘게 봐 주려 했더니 건방진 데도 있군. 사악하다 고? 그러면 내가 수행한 것이 외문방도의 술수란 말이냐?”
여인이 한쪽 눈을 치켜 올리며 비웃듯 내뱉었다. 준후는 눈 하 나 깜짝하지 않았다.
“밀교의 본분은 흩어진 사람과 영의 질서에 조화를 찾아 두 세 계에 조화로움을 가져오게 하는 데 있거늘, 아주머니는 자기 술 수만 믿고 영을 마구 소멸시켜 버리기만 했던 것 같군요. 아니면 사로잡아 백귀로 만들어 달고 니든가……………..”
“그게 뭐가 어쨌단 말이냐? 어차피 오갈 데 없고 쓸모없는 잡 령, 악령이다. 내 힘이 커지는 것에 질투가 나는 거냐?”
“흥! 밀교, 아니 불가 자체의 근본이 자비심을 잊고 윤회를 거 듭해 해탈할 수 있는 영을 함부로 다루는 아주머니! 힘이 커지면 커질수록 선행도 커야 하는 걸 모른단 말예요?”
“바카야로! 그럼 고통받는 인간들을 자유롭게 해 주는 게 선 행이 아니란 말이냐?”
“아주머니가 말하는 잡령, 악령도 한때는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마구잡이로 영을 파멸시키는 게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예요?”
“칙쇼!”
여인은 정말 화가 난 듯, 쥐고 있던 막대기를 높이 들었다. 현 암은 품안의 월향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여인은 내려치지는 않 고 씩씩대며 발걸음을 돌렸다. 여인의 일갈이 들리더니 막대기 가 가로등을 치고 지나갔다. 쇠로 세운 가로등이 쓰러져 준후의 바로 발 앞에서 와장창 깨져 나갔다. 하지만 준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흥, 힘이 대단하시네요. 힘자랑하려면 방송국에나가 보시는 게 어때요?”
“재주들이 아까워 목숨이나 보존케 해 주려고 힘든 발걸음을 했더니, 오만 건방들을 다 떨고 있군그래! 내 대자대비한 마음으 로 말해 주는데, 이번 일에서 손 떼! 재주깨나 있다고 함부로 덤 비다간 무주고혼(無主孤魂)이 될 테니까. 호호호…….
여인은 순식간에 사라져 갔다. 그 뒤로 누런 모래바람이 일었 고, 겁에 질린 아이들이 와하며 도망쳤다. 여인의 웃음소리는 메 아리가 되어 한참 동안 허공을 떠돌았다.
“대단하군, 저 여자. 수행이 깊어. 그리 악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박신부가 중얼거렸다. 준후가 말을 이었다.
“좀 미안하네요. 그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백귀들이 가여워서요.’
“왜 가엾지?”
“원래 받아 주는 곳이 없어 무주구천을 헤매는 것들이 백귀지 요. 그런데 저 아주머니는 그 백귀를 마구 부려서 신통력을 쓰 고, 또 자기가 잡은 영들을 해방시키지 않고 죽이거나 다시 무리 에 넣고 있어요. 백귀들의 원망과 한숨 소리가 너무 컸어요.”
“뭔가 사연이 있는 게 분명해.”
“예. 나쁜 짓을 할 아줌마는 아닌데, 손이 너무 지독해서 심하 게 말을 했어요.”
“아줌마 아줌마 하지 마라 준후야, 누나뻘밖에 안 되는 것 같던데.”
쓰러진 가로등을 살피던 현암이 끼어들었다.
“그래요? 전 미처 그것까진 못 보고 얼굴만…………….”
“화장을 그렇게 해서 그래. 하지만 내 눈은 못 속이지. 여자 보는 데엔 천부적인 눈이 있거든?”
“핏! 그래서 애인 하나 없군요. 잘났어요. 정말.”
“아무튼……………..”
현암이 쓰러진 가로등의 잘린 부분을 쓰다듬었다.
“이건 내가 기공이 아니고, 그런 막대기에 날이 있는 것도 아 닐 텐데…………. 수법은 뭔지 모르지만 고명하군그래.”
“어쨌든 하던 일을 포기할 순 없지. 여기선 알아낸 게 없으니 다음 장소로 가 보세나.”
박신부가 잘라 말했다. 준후는 아직도 여인이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차 안에서 사람이 죽긴 했지만, 차 자체는 멀쩡했기 때문에 차 는 집 앞으로 돌아가 있었다. 현암은 남겨진 영기가 없을지도 모 른다고 했지만, 준후는 그래도 찾아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준 후는 투시력으로 곽형준이 살던 곳 부근의 차들을 뒤지고 다니 기 시작했다.
“음. 이 차예요. 여기에는 아직 영의 기색이 강하게 남아 있어요.”
준후가 가리키는 차의 옆 유리창에는 립스틱인지 뭔지 모를 빨간 글씨가 써 있었다.
목수미 아깝거든 내 일을 방해 말고 다른 이를 차자바라 紅
“아까 그 여자가 남긴 걸까요, 신부님?”
“그런 것 같군. 홍 자가 써 있잖아? 근데 말은 잘해도 아직 받 침 쓰는 법엔 서툰 모양이다.”
현암이 필적을 살피는 동안 준후는 차의 앞 유리에 손을 대고 영사를 시작했다.
“음………… 보여요… 그 남자………… 차를 몰고…………… 여기에 주 차하려고 했네요…… 그리고…… 어? 이건………….. 이건……………”
“뭐지, 준후야?”
“황홀한………… 황홀한 기분…………. 아주 기분 좋은 나른함…………그리고………….”
“흡혈귀다! 틀림없어!”
현암이 외치자 박 신부가 말을 이었다.
“피를 빠는 의식, 생명을 빼앗기면서 아주 강렬한 쾌락의 기분을 느끼게 된다. 성행위의 도착적인 형태…………. 음, 준후야. 그리 고 뭐지?”
“향기・・・・・・ 아주 좋은 냄새・・・・・・ 향기……………”
“향기?”
현암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꽃…… 꽃은 향기가 난다.
“음……. 으윽, 그러고는………… 지, 지독한 고통……. 지독한….”
오세열의 방 안에 시들어 있던 검은 장미 준후가 우연히 영사 해 낸, 차에 밟혔다던 장미 송이들. 그리고 짙은 향기.
“음…… 뭔가 있어요……. 작은…… 아니, 커져요………….. 검 은, 검은…… 으윽…………… 핏빛, 핏빛으로………… 고통이………… 공포 가・・・・・・ 무서운 공포가………….”
준후는 소스라치게 놀라 땀에 흠뻑 젖은 얼굴로 영사에서 깨어났다.
“뭔가 들어왔었어요. 차 안으로요. 뭔지 잘 보이진 않지만, 그건마치…….”
“됐다. 준후야, 이제 진정해! 진정!”
박신부가 따뜻하게 준후를 감쌌다. 준후는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뭔가를 타고…………. 아니, 맞을지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뭔가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이 들어오고・・・・・・ 그리고……..”
현암이 차 안으로 몸을 굽혔다.
“잘했다. 준후야, 중요한 단서를 찾았어.”
현암의 손에는 말라 버린 한 조각의 검은 칠흑같이 검은 이파리가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