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1권 – 16화 유혹의 검은 장미 6 : 홍녀의 과거
홍녀의 과거
붉은 형체는 점점 또렷한 모양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어디에 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많은 핏방울들이 서로 엉키며 흐르고 또 솟구쳐 오르기도 하면서, 흡혈마는 점점 여자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박 신부는 홍녀에게 달려갔다. 홍녀는 힘을 잃어 자칫하면 수 위처럼 흡혈귀로 변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박 신부는 성수병 의 마개를 열고 성수를 한꺼번에 홍녀의 몸에 퍼부으면서 기도 력을 집중했다.
“만물의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악한 피조물은 사라질지어다!”
흡혈마는 갑작스런 박 신부의 행동에 멈칫하는 듯했지만 그뿐 이었다. 놀랍게도 박 신부의 성수를 몸에 맞은 검은 장미는 별다 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홍녀가 차가운 느낌을 받고는 가물거 리는 의식을 가다듬었을 뿐이다. 박 신부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깐동안 정신을 차린 홍녀가 외쳤다.
“신부, 소용없어! 이 꽃은 마물이 아니야! 이건, 에잇!”
홍녀가 이성을 되찾았다.
“칙쇼! 더러운 것! 만물을 불사르는 염부염왕의 번뇌화(煩惱*)!”
홍녀가 기합을 발하자 몸에서 주황색의 불꽃이 일어났다. 박 신부가 뿌린 성수도 함께 상승 작용을 일으키며 녹색빛을 발했 다. 검은 장미가 고통스러운 듯 줄기가 비틀리며 타들어 갔다. 흡혈마가 놀란 듯 주춤하며 물러섰다. 흡혈마의 모습은 이제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선명해져 있었다. 요염한 여인의 얼굴이었다.
홍녀의 몸에서 불길이 사그라졌다. 그녀의 옷은 군데군데 가 시에 찢기기는 했으나 불탄 곳 없이 말짱했다. 홍녀가 몸을 일 으키자, 타 버린 검은 장미의 회색 잔해와 재가 땅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홍녀는 허리에서 막대를 꺼내 한 번 휘두르고는, 양손으 로 막대의 중앙을 잡고 둘로 나눴다. 막대가 양쪽으로 쪼개지며 번쩍이는 두 개의 짧은 칼로 변했다.
“발(發)!”
홍녀의 기합과 함께 두 개의 칼에 아까처럼 주황색 불길이 번 져 갔다. 불의 칼이었다. 홍녀는 몸의 피를 빨려서 체력 소모가 극심했던지 창백한 얼굴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잠시 다리를 휘 청이던 홍녀는 자세를 가다듬어 발검(劍) 자세를 취했다.
“구마열화검(驅魔劍)! 밀교의 보물인데!”
어느새 정신을 가다듬은 준후가 소리쳤다.
“흡혈마의 몸은 지금 인간에게서 빼앗은 생혈(血)의 기운으로 덮여 있어서 마물을 퇴치하는 주술이나 성수의 영향을 받지 않아요! 불이나 물리력만이 저 피갑옷을 물리칠 수 있어요!”
준후가 외치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준후는 즐겨 쓰던 인드라의 번개 대신 부동명왕의 멸겁화 주를 외웠다. 준후의 양 손에 이글거리는 흰 불덩어리가 뭉쳐가기 시작했다.
박 신부도 방법을 바꾸었다. 잘 쓰지 않던 비장의 방법이었으 나. 해박한 준후의 말대로 하려면 박 신부로서는 성령의 불을 일 으켜야 했다. 박 신부는 품에서 은 십자가를 꺼내 오른손에 쥐고 기도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성령의 화신이라는 연푸른색의 불 꽃이 이글대며 십자가 전체에 번져 갔다.
흡혈마는 당혹한 모습이었다. 홍녀, 박 신부, 준후는 세 방향에 서 흡혈마를 에워싸고 다가섰다. 흡혈마는 상황이 불리한 것을 깨달은 듯 몸을 날려 달아나려 했다. 준후가 멸겁화의 불덩이를 하나 던졌으나 흡혈마는 몸을 비틀어 피했다. 불덩이는 건너편 벽을 뚫고 다음 방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폭발했고, 흡혈마는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바깥 창을 향해 몸을 날리려 하고 있었다.
“아까의 빚을 갚아주마, 야압!”
바람을 가르면서 월향이 날아갔다. 현암이 정신을 차린 것 이다. 무서운 속도로 날아간 월향은 흡혈마의 오른쪽 어깻죽지 를 꿰뚫고 지나가서 벽에 깊숙이 박혔다. 오른팔이 잘려 나가면 서 땅에 떨어졌다. 더불어 흡혈마의 몸도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땅에 내려앉아 비틀거리더니, 몸에서 핏방울이 화살처럼 네 명을 향해 쏘아졌다.
“조심해!”
현암이 벽에 기대어져 있던 평평한 쇠 문짝을 집어 던졌다. 기 공이 실린 쇠판이 세 명의 앞을 가로막으면서, 흡혈마가 쏘아 댄 핏방울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쇠판에 부딪혀 사라졌다. “잘했어요. 현암 형!”
준후가 소리쳤다.
“기회다!”
홍녀의 손에 들린 쌍검에서 불기운이 폭발하듯이 터져 나오며 허공을 날아 흡혈마에게 쏘아져 갔다. 자신의 공격이 현암의 기 지로 순식간에 무산되자 망연해 있던 흡혈마는 몸을 돌려 피하 려 했지만 두 개의 불검은 그대로 흡혈마의 양쪽 가슴에 박혔다. 준후가 일갈하며 쏜 불덩이가 작렬하면서 흡혈마의 온몸을 뒤덮 어 버렸다.
“사악한 것! 죗값을 받아라!”
박 신부가 걸음을 옮겨 연푸른 불꽃이 이글거리는 십자가를 고통에 몸부림치는 흡혈마의 이마에 대고 눌렀다. 희뿌연 연기가나면서 십자가는 이마 속으로 박혀 들어갔다.
이윽고 흡혈마의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싸움은 끝났다.
넷은 잦아드는 불길 속에 한 여자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처참한 모습이었다. 홍녀와 준후의 주술에 의한 불은 영적인 것이어서 여자의 몸을 검게 태우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오른팔 이 잘려 나가고 가슴에 두 자루의 칼을 꽂고 있는 모습은 비참하 기 그지없었다. 더욱이 이마의 복판에 검게 탄 깊숙한 십자무늬 는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네 죗값을 받은 거다. 오유키……”
홍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셋은 홍녀의 눈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현암이 물었다.
“아는 사람이었나요?”
“오유키는 내 동생입니다.”
홍녀는 입술을 깨물며 참으려 했지만, 철철 흐르는 눈물을 가누지 못했다.
“저는 어려서부터 영기가 강해서, 부모님은 저를 밀교에 입문 시켰습니다. 제겐 여동생이 있었는데 바로 오유키입니다. 저는 도를 닦아 밀교구대 호법의 하나가 되었고, 동생은 공부를 하여 육종학을 전공했습니다.”
홍녀가 눈물로 털어놓은 과거 이야기를 정리하면 대강 다음과 같았다.
육종학을 연구하던 오유키는 새까만 장미를 만들어 보겠다는 집념을 버리지 못하였다고 한다. 온갖 방법을 써 보았지만, 새까만 장미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외곬의 집념을 가졌던 오유키는 검은 장미를 만들기 위해 주술과 유럽의 흑마술의 방법까지 동 원하게 되었다.
그러다 마침내 인간의 피를 이용하여 검은 장미를 키워 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검은 장미는 생명이 없는 마물이었다.
“일본에서 몇 차례 혈액원이 습격당해 많은 혈액이 탈취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상한 일이라 밀교 총단에서 그 일을 조사 하라고 저를 내려보냈죠.”
영사를 통해 조사를 계속하던 홍녀는 그 혈액이 마물인 검은 장미를 키우는 데 이용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장본인이 다름 아 닌 자신의 친동생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동생의 근거지를 덮친 홍녀는 못 볼 광경을 보고 말았다. 검은 장미가 뿜어내는 피 냄새에 현혹된 오유키는 흑마술의 금단의 방법을 이용, 마귀 를 불러들여 자신의 몸에 빙의시킨 것이었다. 홍녀는 동생의 정 신을 차리게 하려고 애를 썼으나, 도리어 흡혈마가 되어 버린 오 유키의 공격을 받아 중상을 입고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밀교 총 단은 이 사실을 알고 영력이 강한 구대 호법을 풀어 흡혈마를 쫓 았으나 도리어 세 명이 당하고 말았다. 흡혈마는 정체가 드러나 자 불안을 느끼고 한국으로 자리를 옮겨, 많은 사람의 생혈을 빨 아 힘을 키우려 한 것이었다.
“저는 상처를 치료하던 중에 밀교 비술 세 가지를 익혔습니다. 한 가지는 결국 방해만 된 백귀를 부리는 법, 또 하나는 아까 동생을 벌 줄 때 쓴 구마열화검, 나머지 하나는 흡혈마를 제압하여 사람의 몸에 가둘 수 있는 금제법입니다.”
“그러면 세 번째 방법은 사용하지 못했군요.”
준후가 중얼거렸다.
“아니, 꼬마야!”
홍녀의 얼굴에 웃음이 비치며 준후를 귀엽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사용하고 있단다. 아까부터!”
“예? 무슨 말이에요? 흡혈마는 죽었는데?”
홍녀가 쓸쓸히 웃었다.
“아니, 흡혈마는…..?
셋의 놀란 얼굴이 홍녀를 향했다.
“내 몸 안에 있어.”
준후가 놀라움에 입을 딱 벌렸다. 박 신부는 갑자기 기침을 했 고, 현암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으나 눈초리를 위로 올렸다. 홍녀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흡혈마가 어떤 녀석인데 그렇게 쉽게 죽겠습니까? 녀석은 세 분의 강한 힘을 보고 아까부터 내 몸으로 옮겨 와 있었습니다. 다만 아직 적응을 못해서 가만히 웅크리고 있지요. 몇 시간만 지 나면 활동을 시작할 겁니다. 그러니 그전에 저는…………….”
준후가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고 못하고 손을 휘휘 저었다. 안된다는 뜻이었다.
“속세의 인연을 끊었다 생각은 했지만, 동생을 제 손으로 죽인 몸입니다. 무슨 살 생각이 있겠습니까?”
홍녀는 자결할 작정이었다. 홍녀의 손에는 어느새 길쭉한 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가솔린 냄새가 났다.
“아, 안 돼요. 누나!”
준후가 울부짖었다. 박 신부도 소리쳤다.
“자신의 생명을 희생할 생각인가! 다른 방법을! 다른 방법!”
현암도 소리쳐서 막으려 하다가 멈칫했다. 홍녀를 구하면 흡 혈마를 놓치게 되거나, 되레 홍녀가 흡혈귀로 변할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었다. 몸 안에 들어가 버린 흡혈마는 놈이 스스로 원하지 않는 바에야 꺼낼 도리가 없었다.
현암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녕히…………. 세상의 많은 이들을 구제하시는 겁니다.”
현암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오자 준후와 박 신부의 놀란 입 이 더욱 크게 벌어졌다. 홍녀도 눈으로 인사를 보내며 쓸쓸히 웃 었다. 그리고 병 안에 든 가솔린을 머리부터 들이부었다.
“현암군, 자네 제정신인가?”
“흡혈마는 제거해야 합니다! 저렇게 강한 금제로 막고 있는 지금이 기회입니다. 홍녀 님이 막지 않으면 또 도망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해치게 될지 몰라요!”
“홍녀 누나! 그래도 그럴 순 없어요!”
“이렇게 하지 않아도 방법이 있을 거야! 우리가 돕겠네! 제발 그러지 마!”
준후와 박 신부가 외치는 중에도 현암은 외면하고 있었다. 머 릿속에 여러 생각들이 교차되어 스쳐 지나갔다. 긴장하여 깨물 고 있는 윗입술에 피가 배어 나왔다.
홍녀가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안녕히…………. 뒷일을 부탁합니다.”
홍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불꽃이 튀고 삽시간에 불은 홍녀의 전신으로 와락 번졌다. 홍녀는 아픔을 느끼지 않으려는 듯 고요 히 법문을 읊으면서 불에 타들어 갔다.
“으악! 안 돼요 안돼!”
준후가 울음을 터뜨리며 발을 굴렀다.
박신부가 허둥지둥 달려가 구석에 있는 소화기를 집어 들고 달려왔다. 소화기를 작동시키려는 순간 누가 소화기를 빼앗았 다. 현암이었다. 박 신부가 노여움으로 눈을 치켜떴다.
“현암군! 이럴 수가 있는가!”
한 손에 소화기를 든 현암은 이를 악물더니 다른 한 손으로 월 향검을 들어서는 칼집을 홱 뿌리쳐 던져 버렸다.
“이대로 놔둔다 해도 홍녀 님은 흡혈귀로 변하게 돼요! 그럼 우리 손으로 홍녀 님을 처치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방법이!”
“냉정해져야 해요! 흡혈마는 자유자재로 몸을 옮겨 다닙니다! 우리에게 옮길지도 모른다고요!”
현암은 지독한 소리를 내뱉고 있는 자신에게 아연해하면서도, 초조한 마음으로 자신의 생각이 맞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방법 은 이것뿐이었다.
“현암 형. 다시 봤어! 어쩌면 세상에 그럴 수가!”
준후가 악을 썼고, 박 신부는 옷소매까지 걷어붙이고 있었다. 완력으로라도 현암이 들고 있는 소화기를 빼앗을 심산이었다.
“현암 자네. 자네가 이렇게 비겁할 줄은…………….”
현암이 놀랄 만큼 큰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하세요!”
현암의 눈은 서서히 사그라져 가는 홍녀를 초조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현암이 준후에게 무슨 표시를 했다. 눈물에 젖어 있던 준후는 현암의 손을 살짝 쳐다보았다. 부동명왕의 인장이었다. 준후의 머릿속에 한 가닥 광명이 비쳤다.
“지금이다!”
체통도 잊고 현암에게 주먹을 날리려던 박 신부는 현암이 지 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타들어 가는 홍녀를 쳐다보았다. 무언가 붉은 기운 한 뭉치가 쓰러져 가는 홍녀의 몸에서 반쯤 빠져나오
려 하고 있었다. 홍녀가 의식을 잃자 금제가 풀리고 흡혈마가 화염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현암이 승부를 걸었다.
“준후야!”
현암이 소리치며 몸을 날렸다. 동시에 준후는 암암리에 끌어 올렸던 부동명왕의 멸겁화를 붉은 기운을 향해 날렸다. 현암은 허공을 날면서 소화기를 작동시켜 홍녀의 몸에 붙은 불을 끄기 시작했다.
“캐애애액!”
준후가 독한 마음으로 쏜 불덩이는 한 번에 그치지 않고 계속 해서 긴 호를 그리며 화염방사기처럼 붉은 기운을 태워 갔다. 붉은 기운은 괴이한 소리를 내며 몸부림쳤다.
박신부가 정신을 차리고는 기도력을 발출했다. 푸른 오라가 퍼져 나가 불에 휩싸인 흡혈마를 허공에 옭아매기 시작했다. “잠시 잠시만 버텨줘!”
현암은 기공이 잔뜩 실린 월향검으로 소화기의 뚜껑에 일격을 가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소화기의 내용물이 폭발하듯 터져 나와 홍녀의 몸으로 쏟아졌다. 몸을 태우던 불이 단번에 꺼졌다. 준후와 박 신부는 흰 소화 분말이 사방으로 튀는 것도 아랑곳하 지 않고 계속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땅에 내린 현암의 손에서 일갈성과 함께 월향검이 날아 날카
롭게 흡혈마를 향해 쏘아져 들어갔다.
신호등이고 뭐고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몸 여기저기 그슬리 고 흰 소화 분말까지 뒤집어쓴 세 퇴마사는 시커멓게 그슬린 홍 녀를 차에 싣고 미친 듯 병원으로 향했다. 차 속에서 박 신부가 미안한 듯 중얼거렸다.
“미안하네, 현암 군. 깜박 속았지 뭔가. 흡혈마를 끌어내기 위 해 그런 걸 가지고………….”
“말시키지 마세요. 사고 납니다.”
“자네가 그렇게 안 했더라면 홍녀 님도 죽고 흡혈마도 다시 나 와 세상에 많은 피해를 주었을 거야. 아무튼 이거 이렇게 힘들어 서야 어디 퇴마사 해 먹겠나. 목숨을 건 연극까지 해야 하니, 원.”
“홍녀 님이 무사한지 살펴봐 주세요. 신부님은 의사 출신이잖아요.”
준후가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끼어들며 말했다.
“수양이 깊은 사람이니 이 정도로 큰일 나지는 않을 거야.”
홍녀의 새카만 얼굴에서 휴 하는 숨이 나왔다.
“정말, 꼭 완쾌하셔야 해요. 그리고 절 용서해 줘요. 착한 누나…….”
준후가 눈물로 시커멓게 범벅이 된 눈가를 허옇게 얼룩진 소매로 훔쳐냈다. 눈물이 참 흔한 아이였다.
“9시 30분발 오사카행 비행기에 탑승하실 손님들께서는 해당 게이트로 입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밀교에서 파견 나온 몇 명의 승려가 홍녀가 앉은 휠체어를 밀 고 게이트로 향하기 시작했다. 홍녀는 아직 곳곳에 붕대를 감고 는 있었으나 거의 회복된 듯했다. 현암과 박 신부가 웃으면서 손 을 흔들었다. 홍녀도 나직한 미소로 답했다.
준후가 헐떡거리며 붉은 장미 한 다발을 껴안고 뛰어와서는 홍녀에게 건네주었다.
“푸훗! 또 장미?”
홍녀의 얼굴이 미소로 환해졌다.
“그래, 역시 붉은 장미가 아름다워. 향기도 좋고…….”
준후가 씨익 웃었다. 홍녀는 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보냈다.
“잘 있어, 착한 동생…………. 사요나라!”
여객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준후가 넋을 놓고 사라진 비행기의 자취를 쳐다보는 동안 현 암과 박 신부는 천천히 출구로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 작했다.
“대단한 여자였네. 처음에는 사악한 기운이 보였는데, 한이 많아서 그랬을 거야.”
“예. 원래 천황가의 은밀한 후손이었다는군요. 백제의 후예인 셈이지요. 원래 옛 선조의 고향인 이곳에 남고 싶다고 했는
데・・・・・・ “
“아무튼 존경할 만해. 스스로를 희생하여 악령을 퇴치하려 하다니…….”
어느새 준후가 톡 끼어들었다.
“근데 신부님. 전에 현암 형과 월향검을 놓고 왜 선택을 못하 셨죠? 전 당연히 형을 구하라고 하실 줄 알았는데.”
“응…… 응? 아참, 거기에 현암 군도 있었나? 하하하……………”
박신부는 한바탕 호탕하게 웃고는 진지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준후야, 그건 말이다. 난 그때 월향의 모습에서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란다. 스스로를 희생하여 남을 구하려 는 건 고귀한 정신이 아니겠니? 홍녀 님도 그랬고…………. 귀신이 봉인된 월향검의 그런 모습에서도 사랑이란 정말로 그 당사자를 고귀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거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단다. 지옥 같은 우리의 싸움 속에서도 말이야.”
“그건 자비심이 아닌가요? 불타의 가르침에………….”
“그만, 그만! 신부더러 염불을 외우라는거냐? 하하하.”
그들이 웃고 있는 동안 비행기가 서서히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