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1권 – 17화 눈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도다

퇴마록 국내편 1권 – 17화 눈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도다


범준은 잠에서 깨어 눈을 떴다. 자동으로 타이머를 맞추어 놓은 오디오에서 바흐의 칸타타 140번이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독한 꿈이었어. 이렇게 매일 가위에 눌려서야 원.

범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에도 어김없이 가위에 눌려 또 끔찍한 얼굴을 보았다. 끔찍한 얼굴・・・・・・ 생각하기도 싫었다. 범준은 침대를 보았다. 시트와 베개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는 바흐 의 <눈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도다>를 꺼 버렸다.

오늘은 무슨 수를 써야지, 이래서는 도저히 못 살겠어.’ 범준은 수업을 마치고 도장에 들렀다. 찌뿌드드한 몸도 풀 겸 검도 연습이나 할까 해서였다. 대련의 상대가 있으면 스트레스나 풀 수 있으련만. 그러나 불행하게도 도장엔 아무도 없었다. 호구를 착용하려다가 목검만 들고 헝겊 인형 쪽으로 갔다. 원래 호구는 항시 착용해야 하지만, 아무도 없는데 뭐 어떠랴.

퍽퍽 하는 소리를 울리며 수십 차례 인형을 두들겨 대던 범준 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배어나고 있었다. 얼마 후 금세 지친 기분이 든 범준은 목검을 인형 옆에 세워 두고 구석에 있는 벤치 로 가서 벌렁 드러누웠다.

‘내가 밤마다 가위에 눌리기 시작한 게 벌써 얼마나 되었지? 일 년? 육 개월? 아마 영국 연수 다녀온 다음이니까 칠팔 개월 됐겠군.’

처음에는 별것 아니려니 했다. 가위가 이런 것이구나 생각하 고 그냥 넘어가려 했다. 그러나 정도가 날로 심해졌다. 단순히 가위에 눌리는 것이라면 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일 나타나는 흉측한 얼굴만은…………….

범준은 몸을 일으켜 벤치에 똑바로 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오로지 생각나는 것은 얼굴뿐이었다. 어지럽게 풀어헤친 머리에 빈 구멍만 남아 있는 퀭한 두 눈…………,

갑자기 옆에서 무엇이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혼자밖에 없 는 텅 빈 체육관에서 범준은 옆을 휙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 다. 벽에 걸린 몇 벌의 검도용 호구과 목검 들, 매트리스, 그리고 헝겊으로 달아 놓은 인형・・・・・・ 인형?

범준은 소스라쳐 일어서며 앞에 던져 놓았던 목검을 집어 들었다.

인형…………. 나무토막으로 뼈대를 세우고 헝겊으로 살을 메운 인형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인형은 범준을 노려보고 있는 듯했다. 후배 재학이 인형의 얼굴에 그려 놓은 낙서 같은 눈과 입이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에잇, 요사한 것!”

범준은 목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네가 네가 아무리 ………… 아무리 그래도・・・・・・ 도망은…… 도망은…………….”

인형의 입이 일그러지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새어 나왔 다. 헝겊 인형이 한 발짝 다가왔다. 범준은 자세를 단단히 갖추 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인형의 눈이 벌어지면서 붉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넌 결국・・・・・・ 결국은 우리에게 위대한……… 위대한……………”

“가까이 오지 마!”

“위대한…………… 에수스…………… 에수스………….. 그에게로………….”

인형이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범준은 미칠 듯한 공포를 느끼며 뛰어 달아나려 했으나, 발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귓전에 한 가닥의 음성이 들려왔다.

눈을 떠⋯⋯⋯⋯ 눈을…….

“으흑!”

범준은 몸서리를 쳤다. 이건, 오래전부터 그를 시달리게 한 목소리가 아닌가. 밤마다 나타나는 흉측한 얼굴의 임자가 내는 소 리였다. 범준은 온 힘을 끌어모았다. 헝겊 인형의 팔이 뻗어 왔다. 

“야앗!”

범준은 기합을 올리며 목검을 휘둘렀다. 헝겊 인형의 목이 날 아가면서 선혈 같은 것이 위로 솟구치는 광경을 본 순간, 범준은 귓가에 얽히는 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잃었다.

“위대한・・・・・・ 위대한…………… 에수스………에게로…………….”

눈을… 눈을 떠……………..


범준은 누가 자신의 몸을 흔들어 깨우는 것을 느꼈다. 후배 재학이었다.

“형, 형! 왜 여기서 자고 있어?”

“으, 으응? 재학이냐? 요괴는, 요물은!”

“웬 요물? 무슨소리 하는 거야?”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것도 이상한 것은 없었다. 헝겊 인형은 제자리에 걸려 있었고, 목검도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네가 여길 정돈했니?”

“아니. 와 보니까 여기서 형이 자고 있길래, 밤도 늦었는데 집에 가야 하잖아? 그래서 깨웠지.”

범준은 씁쓸히 웃으며 재학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꿈을 꾼 모양이다. 힐끗 본 인형의 목덜미에 움푹 들어간 자국이 조금 신경이 쓰이기는 했다. 연습할 때 목검으로 친 자국이겠지. 범준은 허탈한 마음으로 체육관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인형의 머리가 바닥에 털썩 떨어져 내렸다.


천장의 무늬가 보였다. 바둑판무늬다. 커다란 사각형 천장은 가로와 세로로 아홉 등분되어 여든한 토막으로 나뉘어 있었다. 범준은 날마다 보는 방 천장의 무늬를 쳐다보면서, 저녁 때 체육 관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인형, 그리고 그 목소리. 으, 싫 어…………. 범준은 도리질을 쳤다. 끔찍한 생각을 지워 버리기 위해 천장의 사각형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일흔아홉, 여든! 응? 여든 개라니? 잘못 세 었겠지. 다시 세어 보자. 하나, 둘, 셋………… 여든, 여든하나, 여든 둘! 이번에 여든두 개? 잘못 센 것 같지도 않은데, 왜 셀 때마다 다르지?

범준은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맞아! 천장의 그림이 움직이고 있는 거야. 뭐? 무늬가 움직인다고?

공포가 엄습했다. 천장의 무늬가 물결치듯이 일렁거렸다. 사각형들이 흩어지고 물결처럼 움직이면서 둥근 무늬들을 이루어 갔다.

몸을 움직이려 해 보았지만 팔다리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개도 돌릴 수 없었고 눈도 감을 수 없었다. 온몸이 꽁꽁 묶인 것처럼. 말도 나오질 않았다.

천장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천장 무늬는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서 돌무더기가 쌓인 모습이 되기도 하고, 사람 의 형상으로 보이기도 하고, 높게 쌓인 시체 더미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천장에 매달린 전등에는 끝이 뾰족한 수정들이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전등이 슬슬 범준이 있는 쪽으로 내려오면서, 수정들은 뱀처럼 고개를 세우고 범준의 몸 쪽으로 기어 오고 있었다. 몸이 움직여 주지를 않았다. 범준은 크게 벌어진 눈으로 수정에 초점 을 맞추었다. 날카로운 돌기가 범준의 심장을 향했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꿈, 악몽일 뿐이야!’

범준은 고함을 지르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천장이 더 가까이 내려왔다. 무늬들이 소용돌이치면서 확연하 게 ‘ESUS’라는 글자를 새기고 있었다.

“으아악!”

범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벌떡 일어났다. 천장은 제자리에 있 었고, 전등도, 거기에 달린 수정 장식품도 잠들기 전 그대로였 다. 그러나 눈가에는 여전히 어떤 모습이 어른거렸다. 범준의 얼 굴에 코가 맞닿을 정도로 들이대던 끔찍한 얼굴. 풀어헤친 머리, 구멍이 파인 두 눈, 푸르뎅뎅한 입술, 썩어 해진 피부・・・・・・ 그리고 입에서 나오는 소리…………. 

눈을 떠라………… 눈을!

“으아! 싫다. 싫어! 무서워! 제발 꺼져 버리라고!”

범준은 사내답지 않게 양 무릎을 감싸 안고 큰 소리로 울어 댔다. 소리를 질러도 들을 사람이 없었다. 범준의 양친은 몇 년 전에 사업차 영국으로 가셨고, 하나뿐인 형마저도(난봉꾼이던 형!) 범준이 영국에 갔을 무렵 실종되었다. 혼자서 지내는 커다 란 집…………. 범준은 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누군가에게서 받 은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찾기 시작했다.


“신부님이셨습니까? 전화를 받은 분이요?”

대문을 여는 범준 앞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체격이 우람한 신부가 자상한 미소를 띠며 서 있었다.

“그래, 맞네. 박 신부라 하지. 원래 세 명이 같이 다니는데 요 즘은 다들 바빠서.”

“전 성당이나 교회를 나가지 않는데요?”

종교라면 왠지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범준이 우물거렸다. 그러나 박 신부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호쾌하게 웃었다.

“아, 염려 말게나. 나도 안 나가니까. 하하하!”

박신부는 어느새 범준의 옆을 지나 방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 다. 범준이 의아한 얼굴로 뒤따라 들어가자. 박 신부는 책상 위에 놓인 테이프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음….. 음악을 좋아하나 보군. 바흐 칸타타 140번이라. 재미있는 제목이군. <눈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도다>.”

“아, 예. 매일 아침 일어나는 음악으로 듣죠.”

“그래? 하하하. 정말 눈뜨게 하는 음악으론 적절하군그래!” 범준은 처음 보지만 인품이 넉넉해 보이는 신부에게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하. 그러니까 꿈에서 자꾸 나타나는 얼굴이 있단 말이지?”

“예. 반쯤 썩은 얼굴이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쳐요.”

“그 얼굴, 누구 아는 사람이거나 본 적 있는 얼굴은 아닌가?”

“아뇨, 그렇게 썩어 문드러진 얼굴을 어떻게 알아봐요?” 

박 신부는 잠시 눈을 감고 있더니 침중한 얼굴이 되었다. 범준은 영문을 몰라 우물쭈물 있었다. 처음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신부의 눈은 형형히 빛나고 있어서 마주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신부님. 가위 눌리는 것도 좋고 견딜 만해요. 하지만 얼굴만 은・・・・・・ . 그 얼굴을 보는 것만은 이제 신물이 나요.”

“흠… 얼굴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는 뭔가?”

“너무, 너무 추해요. 그런 썩은 얼굴을 가까이에서, 입김을 느 낄 만큼 가까이에서……………..”

“다른 일들도 예사로 있는 일들이 아닌데?”

“전부 그 얼굴이 만들어 내는 일이겠죠! 그 추악한 것이 꾸몄겠죠.”

“아무튼 알겠네. 가족은? 집에는 누가 있지?”

“아무도 없어요, 저밖에는요. 부모님은 영국에 계시고, 형이 하나 있는데 집을 나가 버렸어요. 난봉꾼이죠.”

“집을 나갔다고?”

“예.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요. 신고는 했지만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옛날부터 툭하면 나가서 몇 달씩 있다 들어오 곤 했죠. 부모님도 별 신경을 쓰지 않으세요. 이젠 나이도 들었 으니까요. 또 글이다 뭐다 쓴답시고 떠돌아다니고 있겠죠, 뭐.”

“형과 사이가 좋았나?”

“그건…….”

범준의 머리에 옛날 일이 떠올랐다. 공부는 못하면서 매일 부 모님에게 큰 소리로 대들던 형의 모습. 그러고 난 뒤에는 으레 자신의 방에 들어와 ‘범준아, 너만은 이해해 주라’ 하며 울먹이 던 형의 모습이 생각났다. 형은 나를 참 좋아했다. 그러나 난 쌀쌀맞게 뿌리쳤지. 형은 그런 나를 슬픈 눈매로 물끄러미 쳐다보았고. 

“됐네, 범준 군. 그런데 저 사진은 뭐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왠지 눈물이 날 듯하던 범준은 박신부의 질문을 받고는 눈가를 문지르며 황급히 답했다.

“아, 저거요? 작년에 영국에 갔을 때 찍은 사진들입니다.”

“음, 잘 나왔구먼. 여기는 도버 해협이군. 이건 런던탑이고…………… 응? 이건 스톤헨지 아닌가?”

“예. 하지만 거기서는 한장밖에 안 찍었어요. 기분이 묘해서요.” 

“이 뒤에 희미하게나온 사람은 누군가?”

“예?”

박신부가 가리키는 곳을 자세히 보니, 범준의 등 너머로 작고 희미하게나마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여태까지는 별로 주의 깊 게 본 적이 없어서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게요. 누구죠? 지나가는 사람인가?”

박신부가 눈살을 찌푸렸다.

“흠, 복식으로 보아 머리에 후드를 둘러 쓴 드루이드의 영 같군.”

“드루이드요? 그건 고대의………….”

“맞아. 자연력과의 친화를 내세우고, 윤회와 전생을 믿었던 일 파지. 그중의 한 영인 것 같네.”

“영, 영이라구요? 그러면 이게, 심령사진이라는 말이에요?”

“아, 가만, 진정하게 사진만으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 으니까. 자네, 영국 연수를 갔었다고 했나?”

“예.’

“그러면 거기서 이상한 것을 가져온 적은 없나? 무심결에라도 말이야.”

“그 글쎄요.・・・・・ 기억이 나질 않는데요.”

“잘 기억해 보게.”

범준이 기억을 되살리려 애쓰는 동안 박 신부는 사진을 유심 히 살폈다. 한참 동안을 쳐다보던 박 신부의 눈이 가늘게 모아졌 다. 사진에는 비록 일부분이긴 하지만 예사롭지 않은 붉은 바위가 찍혀 있다.

“아무래도 생각이 나질 않아요. 신부님.”

“그러면 됐네.”

박 신부는 이상한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분명 범준이 영국 에 갔을 때, 지박령이나 폴터가이스트 따위가 옮아온 것이 틀림 없었다. 그러나 매개물 없이는 이 정도로 강력한 현상이 일어날 수가 없었다. 상대가 아무리 드루이드 출신의 영이라 해도……………… 

“복잡하구먼.”

“예?”

“아, 아니네. 범준 군. 꿈에 대해 다시 한번 이야기해 보세.”

“얘기해야 하네.”

“아, 알겠어요.”

박신부는 하나도 빠짐없이 들으려는 듯이 범준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범준이 소름끼치는 얼굴에 대해 욕설을 퍼부을 때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범준의 이야기가 어젯밤이 일로 끝이 나자 박 신부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얼굴이 달리 한 말은 없었나?”

“없었어요. 항상 소름끼치는 얼굴로 나타나 ‘눈을 떠!’라고만 하더군요.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려요.”

“다른 일들은 무섭지 않나?”

“물론 무섭기는 하죠. 하지만 얼굴에 비한다면………….”

“흐흠.”

“어떻게 된 걸까요?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일단 지금 상황을 이야기한다면…………. 아니, 그럴 것 없이 본론부터 말해 주는 편이 낫겠군.”

박 신부의 눈이 번쩍였다.

“이건 확실하네. 자네 목숨이 위험해.”

범준의 머리털이 곤두섰다. 박 신부는 그것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말을 이었다.

“자네 이야기와 이 사진, 꿈에 나타난 형상・・・・・・ . 모두가 한 가지 결과를 가리키고 있네. 즉 에수스……..”

“에수스요? 그건 어젯밤 꿈에 나타난 무늬들이…….”

“에수스는 고대 켈트족, 그러니까 드루이드 사제들이 섬기던 신의 이름이라네. 그들에겐 숲의 신이자 최고신이지.”

“그게 나랑 무슨 관계가 있죠?”

“드루이드 교파는 윤회나 자연의 힘을 믿었고, 자연력을 바탕 으로 여러 가지 주술과 마법을 부릴 수 있다고 믿었어. 그러한 힘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 제물도 바쳤다고 전해지고 있지.”

범준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인간 제물이요?”

“그래, 스톤헨지에서 스톤헨지는 원래 선사 시대의 건축물이 지만, 거기에는 이상한 힘이 깃들어 있다네. 그 힘을 끌어내 볼 생각으로 드루이드 교파의 이단자들과 흑마술사들이 사악한 의 식을 많이 행했지. 잉카에서 행해진 것과 비슷한………………

“어떤 의식이요?”

“날카로운 칼로 제물의 심장을 파내는 거지.”

“시, 심장을요?”

“물론 드루이드의 대다수는 선한 일파로 자연과의 자연스러운 융화를 주장했지. 그러나 이단의 무리 중 일부는 극단적인 수단 으로 마력을 얻기 위해 끔찍한 짓을 일삼기도 했어. 태아를 요리 한다거나, 사람을 조각내는 따위가 그것이지. 이런 말은 뭐할지 도 모르지만, 아마 놈들의 악령이 남아서 자네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아.”

“우욱!”

범준이 고개를 숙이더니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런.”

범준은 박 신부의 도움으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박 신부는 화장실 밖에 서서 겸연쩍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집 안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사악한 영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박 신부는 아차 싶었다.

‘놈은 범준 군의 의식이 흐려지는, 잠드는 시각이나 혼미할 때 를 노린다. 그렇다면 공포에 질려 정신이 없는 범준 군을……………. 이거 내가 기회를 제공한 셈이 되었군!’

“으악!”

화장실 안에서 범준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박 신부는 재빨리 화장실로 뛰어갔다. 하얗게 질린 범준의 모 습이 보였다. 벽에 등을 기댄 범준은 동공이 크게 확대된 눈으로 거울을 가리키고 있었다. 거울 속에는 잔뜩 겁에 질린 범준과 또 한 사람, 후드를 쓰고 흰 수염과 눈썹을 날리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악한 악의 종은 물러가라!” 

박 신부는 손에 든 십자가에서 기도력을 발출하면서 성수병을 꺼냈다. 범준은 의식을 잃고 화장실 바닥에 쓰러졌다. 거울 속의 남자는 흉한 이를 드러내며 박 신부에게 소리를 질렀다.

“나………… 나는…………… 대사제 마몬…………… 드루이드의 위대한 에수스…………… 에수스의 대사제………….”

“썩 물러가라!”

박신부는 거울에 성수를 뿌렸다.

“크아아악!”

거울에 금이 가더니 산산조각 났다. 동시에 거울 속의 영은 재 빠르게 모습을 감춰 버렸다. 박 신부는 수건을 펼쳐 범준의 몸을 유리로부터 보호하면서 주위를 살폈다.

“아까 사진에 비친 남자는 대사제 마몬……………. 틀림없이 드루이 드의 이단파 사제일 것이다. 이름부터 시리아의 악신의 것을 따 고 있으니. 희생 제물을 찾아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 틀림없다. 그나저나 이렇게 쉽게 도망치게 하다니! 놈의 은신처가 분명히 있다. 아니, 영국에서 건너온 물건이 있을 것이다. 그걸 찾아야 한다!’

집 전체에 흰 인광이 퍼지기 시작했다. 박 신부는 여기저기 성 수를 뿌렸으나, 곳곳으로 번져 가는 요기를 한꺼번에 막을 수는 없었다.

‘뭔가 있다. 단순히 특정 영의 주술로 이렇게 될 수는 없다. 분 명히 스톤헨지에서 가져온 저주받은 물건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이봐, 범준 군! 정신! 정신을……………..”

범준의 입이 벌어졌다. 박 신부를 향해 하는 말이었다.

“네 이놈, 방해하지 마라. 신성한 돌에 의해 제물로 선택된 자를 구할 자는 아무도 없다.”

“당장 청년의 몸에서 떠나라!”

“우하하!”

눈이 하얗게 뒤집힌 범준이 큰 소리로 웃었다. 박 신부는 분명 히 알 수 있었다. 범준의 꿈은 꿈이 아니었다. 영이 제압당한 상 태, 몸을 빼앗긴 상태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지금껏 범준의 영 은 항상 가위에 눌린 듯 움직이지 못했고, 육신은 마몬에 의해 제물로 바쳐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박 신부의 머리 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사태가 저 지경까지 갔다면 범준 군은 예전에 당하고 말았을 텐데…………. 범준 군이 위급한 시기마다 정신이 들었던 이유는 뭘까?’

또다시 범준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번에는 범준 자 신의 음성이었다.

“으아악! 저리 가!”

박 신부는 그제야 깨달았다. 범준이 보는 정체불명의 얼굴은 범준을 돕고 있었던 것이다. 무의식 상태에서 마몬에게 제압당 해 목숨을 잃지 않도록, 흉악한 모습을 비추어 충격으로 범준이

깨어나도록 했던 것이다.

상황이 절박했다. 박 신부는 범준을 내버려 두고 마몬이 말한 신성한 돌을 찾으러 범준의 방으로 뛰어갔다. 모험이었지만, 한 시가 급한 시점에서 이것밖에 다른 수가 없었다. 소름끼치는 얼 굴이 범준을 돕고 있는 동안에 어떻게든 악의 매개물을 찾아내 는 것이 급선무였다. 박 신부는 서둘러 영사를 행하여 강한 영기 의 근원을 추적했다. 뒤에서는 고통스러운 범준의 비명이 계속 울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라.’

범준의 책상 서랍에서 강한 영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박 신부는 성령의 불을 일으켜 십자가에 모으면서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는 핏빛으로 빛나는 돌조각이 하나 들어 있었다.

“블러드스톤, 제물의 피에 한없이 적셔져 그 빛마저 붉어진 저주받은 돌…………. 사진에서 본 그 돌조각이 틀림없다.”

박 신부는 오라를 집중하여 성령의 불이 이글거리는 십자가 로 블러드스톤을 뭉갰다. 사금파리를 긁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집 안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스톤헨지의 사진이 저절로 불타기 시작했다. 박 신부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범준에게 가자.

“이, 이 망할 놈의 신부…………….”

뒤에서 목쉰 소리가 들리면서 날카로운 충격이 어깨를 파고들었다. 박 신부는 비틀비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눈이 뒤집힌 범준이 목도를 쥐고 있었다.

“신성한 돌을 파괴한 자! 죽여 버리고 말리라!”

범준의 목도가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박 신부는 기도력 을 발출할 틈도 없이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범준의 의식을 되돌리려던 영이 실패한 게 분명했다. 박 신부의 거구가 축 늘어 졌다.

“자, 이제 너를 죽이고 제물의 심장을 바치리라. 위대한 에수 스의 영광을 위해………….”

“그, 그럴 수는 없다!”

박신부는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었지만 사력을 다해 기도력을 발했다. 순식간에 오라가 뻗어 나가 범준의 몸을 휩쌌다.

“으아악!”

범준은 목도를 떨어뜨리고 데굴데굴 굴렀다. 박 신부는 주저 했다. 힘을 더 가하면 범준도 위험해질지 몰랐다. 하지만 힘을 가하지 않고서는 놈을 범준의 몸에서 떼어 낼 수가 없었다.

“신부 놈……………. 이렇게 물러나느니.. 같이 죽겠다…….” 

범준의 손이 목도를 반으로 꺾더니 부러진 끝을 가슴에 댔다. 

“안 돼! 이 사악한 것! 물러나라!”

박신부가 오라력을 증폭시키자 범준의 손에서 힘이 빠졌는지 목도를 놓았다.

“으…….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신부! 나는 이 정도로…………… 물러서지 않는다…………. 힘을 더 가해 보아라…………. 흐흐흐….. 그러면 이놈도 죽는다…………. 벌써 몸이 망가지고 있다…………….. 흐흐흐…….”

박 신부는 당황했다. 마몬의 영은 끈질겼다. 하지만 이놈보다 범준이 받는 고통이 더 클 것이다. 놈이 떨어지도록 오라의 기도 력을 늘릴 순 있으나 그랬다가는 범준이 먼저 목숨을 잃는다. 

“어. 어쩌면 좋지?”

그때 눈앞에 흉측한 얼굴 하나가 나타났다. 박 신부는 움찔했 으나 기도력을 늦추지 않았다. 얼굴은 정말 추악했다. 그러나 악 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범준의 이야기대로라면 이 영은 범 준을 해치려는 게 아니었다. 박 신부는 모험을 걸기로 마음먹고 이 영에 대한 방어를 풀었다. 얼굴이 박 신부에게 속삭였다.

눈・・・・・・ 눈을 뜨게 해야…………. 범준이 정신을 차려야………….

“또 방해할 셈이냐!”

땅에 구르던 범준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오자, 흉측한 얼굴은 고통스럽게 신음소리를 내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대는…………… 범준의 수호령인가?’

박신부가 영력을 끌어 올려 얼굴을 향해 외쳤다.

눈・・・・・・ 정신을…… 잠에서 깨게 해야…………..

영은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마몬의 다른 술수가 작용한 듯싶었다. 아까부터 미심쩍었던 것이지만 저 영이 정말로 범준의 수호령이라면?

박신부는 영의 말을 믿기로 했다. 그러나 모든 힘을 기도력에 집중하고 있는 박 신부로서는 다른 방법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순간, 박 신부의 머리에 어떤 생각이 번뜩 스쳐갔다.

‘눈? 눈을 뜨게 한다고?’

박 신부의 눈이 옆에 있는 오디오를 향했다. 바흐의 칸타

타…………. 테이프가 그대로 꽂혀 있었다.

-아, 예. 매일 아침에 일어나는 음악으로 듣죠.

-그래? 하하하. 정말 눈뜨게 하는 음악으론 적절하군그래!

‘이거다! 습관적으로………… 어쩌면 범준 군은 습관적으로 정신 을 차리게 될지도 모른다!’

박 신부는 재빨리 손을 뻗어 오디오 데크의 단추를 눌렀다. 장 중한 선율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음…… 아아!”

범준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두 가지의 음성이 섞여서 울려 나왔다. 귀에 익은 소리를 들은 범준이 자기도 모르게 깨어나려 는 것이었다. 박 신부는 오라를 거두고 기도력을 십자가에 모았 다. 마몬을 놓칠 수 없었다.

범준의 얼굴이 찌푸려지면서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아악! 이럴 수가……………. 놈이 정신을 차리다니!”

박 신부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범준의 몸에서 사악한 기운이 도망치듯 빠져나오는 순간, 오라를 집중하여 마몬의 영을 잡 고는 성수를 뿌리며 기도문을 읊었다.

“크아아악!”

기다란 비명과 함께 마몬의 영이 성수에 녹아내려 갔다. 집 안 을 돌아다니던 인도 사라지고 책상 위의 불붙은 사진도 재만 남았다. 블러드스톤도 서랍을 태우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박 신부는 서서히 기도력을 거두고 양팔을 늘어뜨렸다. 그 영 의 헌신적인 도움이 아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 영은 누구였 을까? 박 신부는 의식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범준을 쳐다보았 다.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범준이 부스스 눈을 뜨며 말했다.

“신부님, 얼굴이 또 나타났어요! 평소보다 훨씬 더 무서운 얼 굴로요. 신부님이 계시는데도 나타나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박신부는 멍든 어깨며 몸을 주무르며 말했다.

“자네, 나랑 같이 가세.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어.”

준후가 땀을 뻘뻘 흘리며 투시를 해 준 지도를 들고, 박 신부 와 범준, 그리고 두 명의 경찰은 어느 해변에 당도했다. 경찰관 들이 썰물 때만 드러나는 바위굴로 들어가자, 범준은 불길한 예 감에 박 신부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박 신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다!”

“있어요. 신부님! 찾았습니다!”

경찰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 신부는 말없이 범준의 어깨를 잡았다. 둘은 경찰이 굴속에서 끄집어내 온 것을 보았다.

범준이 기겁을 했다.

“으악, 신부님! 이, 이건 썩은 시체 아녜요!”

범준이 후들후들 떨었다.

“그래. 자네가 밤마다 보았던 얼굴 맞지?”

“예・・・・・・ 이놈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던 건가요?”

“아니, 자네를 도왔지.”

“예? 아니, 이 추한 몰골이 나를 어떻게?”

박신부가 표정이 엄하게 바뀌었다.

“외면하지만 말고 누군지 자세히 확인해 보게나. 그러면 알 수 있을 게야. 자네 적은 드루이드의 사제 마몬이었어. 이 가련한 사람이 아니고…”

박 신부는 발걸음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한적한 바닷 가는 목이 터져라 울부짖는 소리로 뒤흔들렸다.

“형!”

박신부는 울부짖는 범준을 뒤로하고 천천히 걸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과연 얼마나 진실을 말해 주고 있을까?

박 신부는 뒤를 돌아보았다. 오래전에 물에 빠져 죽은 뒤 수호령으로 남아 동생을 지켜 준 형의 유체가 범준의 오열 속에 두 경찰의 손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흉한 얼굴에 햇볕이 쏟아졌다.

범준은 더 이상 악몽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방황하던 영도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염려 말고 편히 쉬시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