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1권 – 21화 초상화가 부르고 있다 3 : 숨겨진 것들
숨겨진 것들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땅벌 떼의 아지트에 들어선 현암은 속이 메슥거렸다.
“제발, 제발 우리를 도와주게. 사례는 얼마든지 하겠네.”
두목으로 보이는 남자가 안쓰러울 정도로 현암에게 사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에 있는 털보와 얼굴빛이 파리한 남자는 공포에 질려 있으면서도 현암에게 아니꼬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사례가 문제가 아니오. 우리는 사례 따위 받은 적이 없소.”
“그게 무슨 말인가? 우릴 도와주지 않겠다는 건가?”
“야, 인마!”
아까부터 얼굴이 잔뜩 구겨져 있던 털보가 손마디를 우뚝우뚝 꺾으며 다가왔다.
“너 인마, 우리 형님 앞에서 폼 잡을래?”
가뜩이나 비위가 상해 있던 현암의 성질이 슬슬 꼬이기 시작했다.
“사례를 받은 적이 없어서 그런 적 없다고 말했을 뿐이오. 내 가 잘못 말한 게 있소?”
현암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털보의 주먹이 명치 부근을 강타했다. 탕! 하고 쇳소리가 났다. 어느새 현암은 기공을 모으고 있었다. 털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이 자식이……”
“털보, 뭐 하는 짓이냐!”
“저놈, 몸에 철판을 숨겨 놨나 봐요.”
현암은 손에 암암리에 기공을 끌어모았다.
“이봐, 내 과시하려는 건 아니지만, 자네들은 나를 믿지 않으면 살지 못해. 나를 믿고 따르면 그래도 살아날 확률이 반쯤 될지 모르지만…………..”
“뭐야, 인마!”
얼굴빛이 시퍼런 사내가 옆의 병을 집어 들어 현암을 내리쳤 다. 그러나 현암이 기공이 담긴 손으로 가볍게 막자 병은 퍽 하 고 깨져 버렸다. 현암의 손은 멀쩡했다.
“자, 이제 반의 확률이 반의반으로 줄어들었다.”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한 손을 움켜잡고 있던 털보가 칼을 꺼 내 들었다. 두목은 처음엔 말리려고 하더니 곧 무슨 생각을 했는 지 털보를 그대로 놔두었다.
“흠……. 날 시험해 보자는 수작이렷다! 이놈들, 정말 밥맛 떨 어지는 족속이군. 좋아, 혼비백산하게 해 주지.’
현암은 수련을 통해 어지간히 자유롭게 날릴 수 있게 된 월향 을 꺼내 들었다. 지난번 흡혈마와의 싸움 이후 월향에게 모종의 변화가 있었던지, 예전에는 그렇게까지 말을 잘 듣지 않던 월향 검이 요즘에는 현암의 조종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꺄아아악!
월향이 귀곡성을 울리자 네 명의 남자는 움찔했다. 그 뒤를 이 어 검집에서 월향이 쏘아져 나와 단번에 털보의 칼을 박살내고 내친김에 털보의 뺨과 얼굴 퍼런 사내의 어깨에도 가볍게 상처 를 냈다. 그러고는 나비같이 날아서 검집으로 살포시 돌아왔다. 현암이 능청을 떨었다.
“음음, 그래, 착하다. 하하하. 피 맛이 어떠냐? 더 줄까?” 네 명의 사내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부들부들 떨었다.
“준후야, 뭔가 감이 잡히니?”
“아뇨, 아직은요. 별로 특별한 건 없는 듯해요.”
박 신부는 준후와 함께 현웅 화백 저택의 높다란 축대 밑을 돌 았다. 정말 큰 집이었다. 그리 화려하거나 비싸 보이는 집은 아 니었지만, 크기도 그렇고, 이렇게 높은 축대 위에 있어야 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준후야, 그림에도 영이 깃들 수 있니?”
“예, 물론이죠. 그림만이 아니라 어떤 물건이라도 가능해요.”
“그럼 그림에 깃든 영이 바깥을 살필 수도 있니?”
“음・・・・・・ 어느 정도는요. 투시하고 비슷하게………….”
“그렇다면 그렇게 그림과 비슷한 장소와 여건, 시간을 골라 일을 저지를 수 있겠니?”
“그건・・・・・・ 근데 신부님은 지금 무슨 생각을………….”
“그래, 이건 영 혼자의 짓이 아니야. 사람이 개입되어 있지 않고서는 안 되는 일이야. 영이라고 전지전능한 게 아니란 건 너도 잘 알잖니?”
“그러면 현 화백이란 사람이?”
“그야 모르지만 가장 유력한 사람이지. 자, 봐라.”
박신부는 품에서 몇 장의 메모를 꺼내 안경을 쓴 다음 내용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현웅 화백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었지. 현주희, 현승희 자매 였어. 부인과는 일찍 사별했고, 이 년 전에 장녀 주희를 사고로 잃고 지금은 둘째 딸 승희와 함께 살고 있겠지. 그는 원래 풍경 화를 전문적으로 그리던 사람이었는데…………….”
“잠깐요. 큰딸 주희가 어떤 사고를 당했죠?”
“교통사고라고들 하던데,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더군. 준후야,”
너도 참 예리하구나. 나도 그 점이 미심쩍다.”
“히히히. 이런 추리는 원래 현암 형 전문인데………………”
“하여간 더 보자…………. 이 년 전 딸을 잃고 그 이후 대표작이 라 할 수 있는 ‘소녀’ 칠 부작을 완결하게 돼. 그 기간이 육 개월 이었지. 그 그림들은 원래 공개되지 않았으나, 집을 방문했던 몇 몇 비평가를 통해 걸작으로 소문이 퍼져 할 수 없이 공개하게 된 거지. 바로 우리가 추적하고 있는 그림들이야. 이 그림들은 현웅 화백이 딸을 추억하며 그렸다고 하는구나. 그 이후 현웅 화백의 작품 세계는 우울하고 침울한 분위기의 그림들이 대부분이야.
자, 억측일지도 모르지만 꼬리를 이어 생각해 본다면 어떤 결론 을 내릴 수 있지 않겠니?”
준후는 조그만 손을 턱에 갖다 대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음, 그러니까 주희라는 큰딸의 영이 그림에 나타났다 이거죠? 그렇다면 주희라는 누나는 교통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 폭력 배 집단에게?”
박신부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준후야, 네가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걸 알게 돼서 안됐다마 는, 내 생각도 비슷하다. 사실 내 둔한 머리가 이런 결론까지 가 게 된 이유가 또 있단다.”
박신부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사실, 현웅과 나는 원래 알던 사이야.”
준후의 조그만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예?”
“그는 사실…….”
“뭐죠, 신부님?”
“지금도 그 사실을 모를지도 모르지만, 아마 알게 되었을 거야. 사실 그는 초능력자야. 그것도 굉장한……………”
“뭐가 어째? 다시 한번 지껄여 봐!”
현암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놈들에게서 한 마디 한 마디 흘러나오는 그들이 죄악상은 악랄하기 짝이 없었다. 온갖 파렴 치와 불륜과 타락으로 점철돼 있었던 것이다.
“이 개자식들아! 그러고도 살길 바라?”
현암이 털보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두목을 포함한 네 명 모두 가 자기의 죄들을 털어놓았다가 울분을 참지 못한 현암에게 얻 어맞은 지 벌써 두시간째였다. 냉정한 현암의 눈가는 분노로 충 혈되었고, 눈알도 번뜩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여자를 잡아다가 어쨌냐고! 이런 찢어 죽일 놈들. 중학생밖에 안된 애들을…………….
“….돌아가면서…”
“똑똑히 얘기해! 이 개자식들아!”
현암이 짐승처럼 악을 썼다.
“그러고는・・・・・・ 지방 술집에…………..”
지금 그들은 여중생 두 명을 납치해 윤간하고 술집에 팔아넘 긴 죄를 불던 참이었다.
“살려 주세요. 형님! 아니 선생님! 제발 살려 주십시오. 무섭습니다.”
“무서워? 무섭다고? 너희가 가련한 어린 젊음들을 신나게 짓밟을 때에 그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니? 대답해, 대답해 보라고!”
현암은 발악하듯 한 놈의 멱살을 쥐어 잡고 소리를 질렀다. 파르르 떨던 그의 눈에서 노여움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준후가 눈을 껌벅거렸다.
“신부님, 그렇다면 왜 현암 형을 떼어 놓으신 거죠?”
“그 친구 성질, 너도 잘 알잖니? 이런 증거가 있다면 다짜고짜 현 화백의 집으로 쳐들어갔겠지. 그리고 닦달을 했을 테지. 그것 도 좋아.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만에 하나 현 화백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되겠니?”
“하긴 그래요.”
“현암 군은 아직 인생을 제대로 알지 못해. 그래서 한번 겪어 보라고 그리로 보냈다…………….”
둘은 말이 없이 현 화백의 집 주위를 잠시 거닐었다.
현암은 울고 있었다. 그의 주위를 네 명의 남자들이 둘러서 있 었다. 추하게 얻어맞고 멍들어 부푼 얼굴을 한 악한들・・・・・ 그들 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의 죄악이 한 남자의 눈물 앞에서 모조리 되살아났다.
현암이 뇌리에 현아의 영상이 떠올랐다.
오빠아………………
울지마, 오빠…….
‘현아야’
오빠아, 울지 마….. 울면 싫어…….
현암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았다.
‘그래…………. 모두가 불쌍하다. 나도 가련하고, 이들에게 당한자들도 가련하고, 이들도 역시 불쌍하고…………. 도대체 무엇 때문 에 사람들은, 그리고 영들은 이런 속에서,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아옹다옹하는 걸까……………..’
오빠, 힘을 내. 오빠는 할 일이 많아……
‘현아야 잠시라도 곁에 있어 주렴. 가지 마. 난 외롭다……………’
오빠, 오빠가 가야 할 길이 너무…….
‘현아야.’
오빠, 제발 힘을…… 힘을…….
현암은 벌게진 눈을 들었다. 현아의 환상이 어슴푸레 사라져갔다.
“자,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 죽고 싶지 않거든. 아 니, 나도 장담 못해. 하지만 나도 너희를, 비록 죄 많은 인생을 살 아온 너희지만 죽게 하고 싶지는 않다.”
“응? 이건?”
준후가 침묵을 깼다. 박 신부도 깊은 생각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뭐지, 준후야?”
“아주 강한………… 음………… 그러나 착한…… 아니, 아니…………선과 악이 반반 섞인………… 이건……”
눈앞에서 문이 갑자기 열렸다(그러고 보니 그들은 어느새 대 문 앞에 와 있었다). 깔끔하고 날카로운, 윤곽이 가느다란 젊은 여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누구시죠? 무슨 용건으로……………..”
여자는 매우 예뻤으나 선천적으로 화가 난 듯한 인상이었다. 박신부는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말을 꺼냈다.
“아, 현 화백을 만나러 왔습니다. 전 박 신부라고 합니다만, 아가씨는?”
“딸이에요. 승희라고 해요.”
준후는 아무 말도 않고 승희라고 자신을 밝힌 여자의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디서 뵌 분 같군요. 아버님은 지금 병중이신데…………. 아무 튼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앞장서는 그녀의 뒤에서 준후가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박 신부의 옆구리를 찔렀다. 박 신부가 나직이 물었다.
“왜 그래?”
“신부님, 저 누나. 굉장・・・・・・ 굉장해요.”
“뭐가?”
“저 누나, 아바타라(화신)・・・・・・ 애염명왕(愛)라가라쟈* …….”를 봉인한 사람이에요. 저런 사람이 여기에 있었다니 준후는 채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어느덧 밖은 어두워져 밤이 되었다.
준후는 입을 다물고서 현승희라고 밝힌 여자를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그러나 박 신부는 그녀에게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영기나 귀기도 없었고,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 았다. 둘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승희는 혼자 재잘거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몸이 안 좋으세요. 그래도 작업실에만 계속 틀어박 혀서 나오시지를 않으니…………. 신부님은, 아참, 박 신부님이라고 하셨죠? 퍽 오래전에 뵙고는 못 뵌 것 같네요. 절 기억하시겠어요?”
“그래요, 승희 양. 그땐 아주 작은 꼬마였지. 하하하!”
“후후, 신부님도 그때는 젊으셨죠. 근데 이젠 머리가 희끗희끗 해지셨네요. 하긴 우리 아버지도 그렇지만.”
“세월 앞에서야 누군들 별수 있나.”
* 원래는 인도의 신으로 후에 진언 밀교의 신이 된다. 밖으로는 분노의 정을 나타 내고 있으나 내심은 애욕을 본체로 하는 사랑의 신이다. 전신이 붉고 눈이 셋, 팔 이 여섯으로 머리에 사자관을 쓰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예고도 없이 찾아오신 건 무슨 까닭이신가요? 제가 없었으면 아버님도 못 만나보셨을 거예요. 전 방학을 해서 어제 왔는데, 아버님께선 밖에 전혀 나가시지도 않고, 또 누구와 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시더군요. 저도 잠깐 얼굴을 뵈었을 뿐이 에요. 혹시 아버님이 신부님께 문 열어 주었다고 혼내시지나 않 을지 모르겠네요. 호호호…….”
준후는 승희가 계속 스스럼없이 재잘거리자 고개를 갸웃했다. 자기가 뭔가 잘못 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수 다쟁이 여자가 애염명왕의 아바타라라니.
“승희 양, 최근에 아버님의 전시회에서 이상한 사건이 생겨 행 사가 중지되었다던데, 그 후에 아버님은?”
승희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아, 그 지저분한 사건요? 참 어이가 없어요. 왜 남의 귀한 그림 앞에서 죽어요? 죽으려면 딴 데 가서 죽을 것이지.”
“아버님은 전람회를 중지하고 나선 좀 어떠신가?”
“그냥 말이 없으세요. 그림들은 전부 회수하셨다는데…………. 그 상인들이 저한테까지 연락을 해서 조르는 바람에 알게 됐죠. 수 집가들이 몹시 탐을 낸다고 팔 수 없냐고요. 하지만 그 그림들을 아버지가 파실 리 없죠.”
준후의 눈이 빛났다.
“왜요?”
“어머, 귀여워라. 안녕, 꼬마야, 근데 누나 보고 인사도 안 하니?”
“왜 그림을 팔 수 없단 거예요?”
박 신부도 숨을 죽였다. 승희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태연히 말했으나, 그런 그녀의 눈에도 얼핏 슬픔 같은 것이 비쳤다.
“그 그림들은 언니를 모델로 그린 거거든요. 이 년 전에 사고로 죽은…………….”
박 신부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주희를?”
승희의 얼굴이 더욱 침울해졌다. 준후가 이상한 것을 느낀 듯 몸을 흠칫했다.
“예. 그때 저는 미국 연수중이었어요. 그런데 전보가 날아들었 죠. 언니 장례식에 참석하라고……………. 급히 돌아와서 아버지께 여 쭤 보아도 교통사고라고밖에는………”
준후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박 신부도 이상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강한 영기・・・・・・ . 그 기운은 바로 눈 앞에서 조금씩 눈가가 붉어져 가는 승희에게서 뻗쳐 나오고 있었다.
“해결법은 간단하다. 우선 너희는 속죄해야 한다. 경찰에 자수해라. 안 그러면 내가 없애 버릴 테니……….”
현암은 아직도 씩씩거리며 일당에게 다그쳤다. 속죄의 눈물을 흘린 그들이었지만, 또 언제 못된 마음을 품을지 모르기에 협박 을 섞는 중이었다.
“마음속으로 진실하게 속죄해야 한다. 너희가 해친 사람들의 영과 가족에게 속죄를 해야 하는데, 우선은 너희에게 복수하고 자 하는 영을 달래는 게 우선이다. 여기에 준후가 있었으면 좋겠 지만 한시가 급하다. 도가의 강신술(降神術)은 나도 조금 알고 있으니 당장 속죄를 할 수 있게 해 주마.”
두목이 부들부들 떨었다.
“강, 강신술이요? 그러면 귀신을…..”
털보도 얼굴이 하얘졌다.
“귀신을 부르면, 우, 우릴 다 죽일 거예요.”
“닥쳐! 그러기에 누가 나쁜 짓을 하라고 했나! 너희 같은 놈들은 죽어도 싸! 죽음을 내리면 곱게 받아야지!”
“아, 아이고, 형님! 살려 주세요!”
“형님, 으아…….”
놈들의 아우성치는 모습이 추악해 보였다.
“그만하지 못해! 내 손에 죽을래?”
“살려 주세요. 제발………….”
“내가 최선을 다해 설득해 보겠다. 그러니 솔직하게 죄를 털어 놓고 용서를 빌어 ! 만에 하나 딴 생각을 품으면………….”
꺄아아악!
월향이 울음소리를 내며 현암의 조종에 의해 칼집 밖으로 나와서 허공에 섰다.
“이 월향검으로 호법을 세울 테니 도망가거나 수작을 부리면 당장 너희 모가지가 두 동강 날 줄 알아!”
월향검이 놈들의 머리 위를 빙 돌더니 현암 앞의 바닥에 탁! 소리를 내며 똑바로 박혔다.
놈들은 그야말로 사시나무처럼 떨며 이제는 입도 벙긋 못하고 있었다. 현암은 오대명왕(五大明王)의 부적을 꺼내어 사방 에 붙이며 결계를 쳐 나갔다. 이건 준후에게 빌린 밀교의 술수였 지만, 이런 종류의 술수에 익숙하지 않은 현암으로서는 별수 없 었다. 현암은 부적술에 미숙해서 위력의 결계를 얼마만큼 이룰 수 있을지 안심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북방의 금강야차………… 서방의 대위덕・・・・・・ 동방의 항삼세………… 남방의 군다리였나? 그리고 중앙의 부동명왕!”
승희는 언니 생각에 슬퍼지는지 울기 시작했고, 미지의 영기 는 걷잡을 수 없으리만큼 짙어져 갔다. 그러나 준후나 박 신부를 고통스럽게 하거나 저항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들을 공중에 띄우듯 몽롱하게 만들었다. 박 신부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말했다.
“승희 양, 울지 말아요! 어서 아버님을 만나고 싶은데…….”
승희가 눈물을 그치자 강한 영기도 가라앉았다. 준후가 한숨 을 내쉬었다.
“아, 이런・・・・・・ 용서하세요. 제가 아버님을 부를…………….”
말을 잇던 승희가 휘청하면서 쓰러졌다. 마치 무언가에 강하게 맞은 것 같았다.
“응? 이건?”
“누나! 정신차려요!”
승희가 쓰러지자 박 신부와 준후는 깜짝 놀라 승희에게 다다 가려 했으나, 승희의 몸에서 영기가 폭포수같이 흘러나오는 바람에 주춤했다.
“이건 뭐지?”
“시, 신부님! 무슨 영문인지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영기는 마치 폭류처럼 지하실로 향했다. 엄청난 영기가 물이 쏟아지듯 지하실로 빨려들고 있었다. 가벼운 진동이 집 전체에 퍼지면서 마루며 벽, 천장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기운이었다. 준후가 갑자기 허리를 굽혔다.
“지하실, 지하실에 뭔가 있어요! 뭔가 영기를, 저 누나의 영기
를 빨아들이고 있어요!”
“뭐라고? 영기를 빨아들인다고?”
벽에 걸려 있던 액자 몇 개가 우당탕 떨어져 내렸다.
“보통 일이 아녜요! 이 엄청난 기운을 빨아들여 그걸 이용한….”
“다면……………..”
“현웅이 그 친구가! 그 친구야!”
“예?”
“내가 말했잖니! 현 화백………. 현웅이는 초능력을 쓸 줄 안다 고. 만약, 만약 그가 이 엄청난 영기를 흡수한 힘을 사용하는 주 술을 부리는거라면……………..”
준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갑자기 창문과 문이 왈칵 열리 고 바람이 몰아쳐 들어왔다.
“만약 그 화가가 이 힘을 이용한다면, 우리도 상대가 못 돼요!”
“현웅…… 자네가 자네가 대체 왜?”
집안의 전등 몇 개가 파삭하며 꺼져 버리더니 곧이어 전기마 저 나가 버렸다. 준후가 놀라서 야명주(夜)를 외워 작은 빛 을 허공에 띄웠다. 한동안 계속되던 난리가 지나가고 영기의 흐 름도 멈추었으나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주술로 밝힌 불이라 별 로 환하지 않아 주위의 것들은 긴 그림자를 괴괴하게 드리우고 있었다.
박 신부는 쓰러져 있는 승희가 무사한지 살폈다. 그녀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영기를 폭사해서인지 심한 허탈 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박 신부는 준후에게 고개를 끄덕해 보 였다. 준후도 안심한 얼굴이 되었다.
몹시 조용했다.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가끔씩 커튼을 흔들 뿐, 높은 축대 위에 선 이 집에서는 바깥 풍경도 보이지 않 았다. 둘은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순간 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부르는 소리………….
“지하실이에요, 신부님! 지하실!”
준후의 얼굴이 굳어졌다.
“알 것 같아요. 저건・・・・・・ 초상화, 초상화가 부르는 소리예요.”
박 신부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지하실로 가 보자, 준후야!”
준후가 나직이 수호신들을 부르는 주를 읊었고, 박 신부도 품 안의 십자가를 거머쥐었다.
*금강야차(夜叉), 대위덕(德), 강삼세(三世), 군다리(軍茶利), 부동명 왕(王)의 다섯
현암은 죽은 영들을 초혼하기 시작했다. 희생자는 많았지만 이들의 이야기로 짐작건대 작고 예쁜, 유난히 얼굴이 하얗다던 여자가 바로 현웅 화백의 죽은 큰딸일 터였다. 이제까지 벌어진 일을 조합해 볼 때 복수를 하고 있는 영은 주희의 영이어야 했 다. 그러니 그 영을 불러야 하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어서 그림에 그려진 얼굴로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현암은 묵묵히 도가 비전의 초혼 주문을 외우며 아련한 그 여 자의 영상을 앞에 놓인 신필(神)에 모아 갔다. 영이 부름에 응 하면 신필이라 불리는 붓(보통은 천장에 줄로 매달아 놓지만 지 금은 시간이 없었다)에 그 영이 깃들어 글자를 써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다. 준후가 옆에 있거나, 하다못해 부적이라도 하나 빌 려 왔으면 직접 대화도 할 수 있으련만, 기공만 연마하여 영력이 떨어지는 현암으로서는 이런 방법밖에는 쓸 수가 없었다.
네놈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그러나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 로 현암과 신필을 흘깃흘깃 훔쳐보다가, 이따금 하얀빛이 서려 있는 월향(월향은 색계를 범한 자들을 제일 미워한다)을 두려운 눈빛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한참을 비지땀을 흘리며 정신을 모으던 현암이 눈을 번쩍 떴다.
“왔다!”
신필이 가늘게 떨며 서서히 세워졌다.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네 악당은 신음 소리를 냈다. 신필은 잠시 쓰러질 듯하다가 다시 꼿꼿이 서서 성큼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으악!”
털보가 비명을 질렀다. 신필이 솟구쳐서 털보에게로 날아갔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털보의 몸에 탁! 소리를 내며 닿자 갑자기 털보가 온몸에 힘이 빠진 듯 늘어졌다.
“악! 털보가! 털보야!”
현암은 나직하지만 기공이 담긴 소리로 두목을 눌렀다.
“조용히 해! 죽은 게 아냐! 여자의 영이 글로 이야기를 하기 힘들어서 털보의 몸을 빌리는 것뿐이야!”
털보가 눈을 반쯤 뒤집은 채 일어섰다. 그의 입에서 난데없이 고운 여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머지 세 명의 악당들은 까무 러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당신은 누구시기에 저를 부르셨나요?”
“현주희・・・・・・ 당신은 현주희 씨가 맞지요?”
“……· 예.”
얼굴 퍼런 녀석이 뒤로 확 나가 자빠졌다. 까무러친 것이다. 현암은 아랑곳 않고 현주희와의 대화에만 열을 올렸다. 한동안 이야기가 이어졌다. 예상외로 주희의 영은 꽤 담담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당신이 살아생전 악한들에게 몹쓸 일을 당한 뒤 살해당했죠?”
“그렇죠?”
“……예.”
현암은 됐다 싶어 주희의 영을 설득하려 하는데, 천만 뜻밖의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다 지난일일 뿐이에요. 다만, 다만…………… 아버지를….”
“예? 뭐라고요?”
“아버지를…………… 제 아버지를 구해 주세요.”
“아버님이요? 현웅 화백 말입니까?”
“예… 아버지는 지금 속고 있어…. 아!”
주희의 목소리가 갑자기 고통에 찬 비명으로 바뀌었다.
“주희 씨, 주희 씨!”
“아악! 안돼!”
털보가 그 자리에서 비명을 올렸다. 그때까지 정신을 차리고 있던 두목도 공포에 가득 차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창밖, 바로 창밖이었다. 이곳은 아파트의 층, 창밖에 그림이 한 장 붙어 있었다. 껑충껑충 뛰는 소녀. 주희를 그린 그림이었다. 현암이 내뱉었다.
“그림! <줄넘기 하는 소녀>! 결계를 쳤는데!”
창문이 와장창 깨져 나가면서 털보의 몸이 무엇에 끌린 듯 허 공에 떠올랐다. 털보는 찢어지는 비명을 질러 댔다. 한쪽 다리를 현암이 잡았다.
“뭐 해! 다들 잡지 않고!”
그제야 세 명은 털보의 다리에 매달려서 몸을 끌어 내리려 애 를 썼다. 그러나 현암과 세 악당의 몸마저 허공에 뜨려 하고 있 었다. 영력이 아니라 엄청난 물리력이었다. 현암이 만든 결계가 힘을 못 쓰는 것도 당연했다.
“빌어먹을, 태극기공!”
현암이 일갈하며 오른손에 기공을 모아 방바닥을 쳤다. 콘크 리트가 펑! 하고 구멍이 뚫리자 현암은 오른손을 찔러 넣어 바닥 을 움켜쥐었다. 그런데도 끌어당기는 힘이 엄청나게 강해 감당 하기 어려웠다.
“으아아!”
고통에 못 이긴 털보가 비명을 질렀다. 원래대로 돌아온 목소 리는 고통을 처절하게 호소하고 있었다. 현암이 붙잡고 있는 다 리에서 우둑우둑 뼈 소리가 났다.
“으, 기공으로 더 버틸 수는 있으나 이대로 가다간 이자의 다 리가 뽑히고 만다!’
현암은 월향을 부르려 했으나 월향마저도 강한 힘에 눌려 있 는 듯, 바닥에 꽂힌 채 빠져나오지를 못했다. 그러기커녕 점점 깊이 박혀 들어가고 있었다.
“아아악!”
현암이 월향을 보고 잠시 정신이 흐트러진 사이, 피멍이 든 털 보의 다리가 현암의 손에 바지 자락을 남긴 채 쑥 빠져나갔다.
“아아악!”
털보의 몸은 창에서 꽤 떨어진 곳을 지나던 고압선까지 튕겨 나가 전깃줄에 걸렸다.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번개와 같
은 방전이 일어나고, 털보의 몸 여기저기 연기가 솟아올랐다. 털보의 몸이 줄에 엉켜 껑충거리고 뛰는 듯 흔들리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
“줄넘기, 줄넘기…..”
현암은 분노의 눈으로 창밖을 망연히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여자의 웃음소리가 깔깔거리며 울려 대다가 사라져 갔다. 현 암은 몸을 날려 창밖을 보았다. 거의 새까맣게 타 버린 털보의 몸 너머로 그림이 너울너울 날아가고 있었다.
‘저건 주희가 아니다. 주희의 아버지 현웅 화백이 속고 있다 고? 그렇다면………..?
현암의 눈에 핏발이 섰다. 박 신부가 위험했다. 어쩌면 준후까 지도…………. 그들이 상대를 모르고 있다면…………….
“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