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1권 – 28화 태극기공 4 : 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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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국내편 1권 – 28화 태극기공 4 : 수전


수전

현암은 살얼음이 듬성듬성 얼기 시작한 호숫가에 도달했다. 동생 현아가 수마에게 끌려가 숨진 곳, 피눈물을 흘리며 세 번이 나 수색했지만 시체마저도 찾지 못한 곳, 그리고 아무도 믿어 주 지 않았고 도움도 주지 않았던 쓰라린 추억이 밴 곳…….

현암은 입을 굳게 다물고서 언덕배기에 서서 얼음이 깔린 넓 은 호수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마침내 복수의 시간이 온 것 이다. 지난 이 년 동안의 말로 형언할 수조차 없는 고된 수련들 기연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살아날 수 없었던 두 번의 죽을 고 비, 은인들・・・・・・ 그리고 자신의 유일한 벗이었던 외로움과 괴로움…….

현암은 차분히 자신의 몸에서 꿈틀대는 내력을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배낭을 풀어 한빈 거사가 남기고 간 태극패를 꺼냈 다. 내력의 극심한 소모를 무릅쓴다면, 이 태극패에 기공력을 실어 보냄으로써 영의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다고 했다. 언제나 욕설과 꾸짖음으로만 일관했지만, 속으로는 현암의 처지를 누구 보다도 가련하게 여겨 주었던 은인 한빈 거사……………. 현암은 배낭 에서 다섯 자루의 단검을 꺼냈다. 검기를 이용하려면 칼이 필요 했다. 그러나 검기를 주입하면 보통의 칼들은 산산이 조각나기 일쑤였다. 그래서 여러 개의 칼이 필요하고 그러다 보니 장검보 다는 단검을 쓸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영과의 싸움에서는 검기 만이 필요할 뿐 칼의 길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칼을 한 자루 씩 허리춤에 꽂을 때마다 현암의 뇌리에는 한빈 거사와 도혜 스 님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복수란 부질없다는 것을 모르느냐? 이 아둔한 놈!

부질없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제 생도 부질없는 것이지요. 죄송합니다. 한빈 거사님’

-복수라는 말에 얽매이지 말고 진정으로 무엇에 대해 복수하 려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보시게………….

‘내 유일한 혈육을 앗아 간, 악독한 귀신에 대해 복수하는 것 입니다. 도혜 스님.’

-정말 그 길밖에는 없겠느냐? 정말로 그런 독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겠다는 말이냐.

-무엇에 대해 복수하려는 것인지를 먼저……………. 오호 선재, 선재라………….

‘죄송합니다. 스승님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저는 살 수 없어요. 이번만, 이번 복수를 끝낸 연후에 는 물려주신 힘을 반드시 좋은 데에만 쓰겠습니다.’

현암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머금고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 었다. 잠시 후 현암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마지막 칼을 허 리에 꽂고 태극패를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약에 대비하 여 준비한 구명조끼를 꺼내 입었다.

하늘은 매서운 겨울답지 않게 청명했다. 비장한 마음으로 쳐 다보기가 아까울 만큼 고운 하늘이었다.

‘현아야, 조금만 기다려라. 내 반드시 원수를 갚고 잠들지 못 한 네 원혼을 달래 주마.’

현암은 도혜 스님이 준 부적을 다시 한번 품속에서 확인했다. 그러고는 호숫가로 내려갔다.


모든 것이 이 년 전과 똑같았다. 다만 그때는 여름이었고 지금 은 겨울이라는 차이밖에 없었다. 현암은 옛날 자신이 현아와 함 께 텐트를 쳤던 자리를 찾아냈다. 메마른 잡초가 덮인 그 자리 에는 자신들이 박았던 것으로 보이는 텐트 팩 하나가 지친 몰골 로 비스듬히 박혀 있었다. 그것을 보는 현암의 눈시울이 뜨거워 졌다. 현암은 눈물이 나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정좌하고 앉았다.

현암은 호수를 향해 허리를 쭉 편 채 왼손에 태극패를, 오른손에 단검을 쥐고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가 왔다!’

어디서 와서 이렇게 고여 있는지 알 수 없는 호수는 평화롭게 잔물결을 찰싹이고 있었다.

‘모습을 보여라, 흉악한 것. 네 죗값을 받기 위해 내가 왔다. 현암은 물귀신을 불렀다. 놈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언제까 지고 기다릴 참이었다.

‘나타나라, 모습을 보여라. 내가 왔단 말이다. 그때 네가 끌어 들인 여자아이의 오빠다.’

시간은 한참 흘러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현암의 몸속에 돌고 있던 기공력은 차가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후끈후끈한 열기를 주 고 있었다. 모든 준비를 갖추었다. 그런데 놈은 나타나지 않았다. 두어 시간이 더 흐르자 짙은 어둠이 깔리고 차가운 밤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현암은 계속 눈을 감고 있었지만 주위가 어두워 졌다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어두워진다는 사실 자체보다도 주위의 정경이 현아를 잃은 그날과 똑같이 바뀐다는 사실이 현암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웠다. 그때도 지금처럼 어두웠 다. 현암은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그리고 무릎에 차는 깊이까 지 물속으로 들어가며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다.

“나오란 말이다! 나와, 나와, 나와!”

현암은 소리를 지르며, 자기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단검에 기운을 불어 넣어 던졌다. 검기가 맺힌 단검은 바지직 소리를 내 며 날아가 수면에 닿더니 폭탄처럼 작렬해 버렸다. 요란한 소리 와 함께 수면에 순간적으로 구덩이가 파이고 물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썩 나와!”

현암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현암 의 목소리가 메아리를 치면서 밤하늘 속으로 사라져 갔다. 현암 의 목에서 떨리는 쉰 목소리가 나직하게 새어 나왔다.

“왜, 왜 나타나지 않는거냐, 왜?”

현암은 거친 숨을 내쉬면서 검은 수정처럼 잔잔히 빛나고 있 는 호수를 노려보았다. 순간, 매끈하던 호수의 표면 위에 작은 파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작은 거품 방울들이 밑에서 솟아올랐다. 작은 파문들은 수를 조금씩 늘려 가면서 서 서히 현암 쪽으로 다가왔다.

‘침착, 침착하자. 물고기인지도 몰라.’

현암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무늬를 만들며 다가오는 파문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파문들은 점점 크게 변하며 다가오는 속도 도 빨라졌다.

현암이 왼손에 들고 있던 태극패를 오른손에 바꿔 들었다. 기공력을 가하자 태극패 중앙의 동경이 서서히 푸른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태극패에서 빛이 솟아오르자 파문의 속도가 조금 느 려졌다. 태극패에서 발하는 빛은 아직 거기까지 다다를 정도로 뻗지는 않았다.

현암은 태극패에 가한 힘을 줄인 뒤, 조용히 물을 헤치며 앞으 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무릎에 차던 물이 순식간에 허리까지 찼 다. 태극패에 힘을 가하면 물결이 일던 곳까지 닿을 것 같았다. 물속으로 많이 들어갈수록 불리하다고 생각한 현암은 걸음을 멈 추었다. 물 밑에 있는 것은 그 자리에 멈춘 듯, 물결이 사라지고 거품 방울만 솟아올랐다.

‘자, 가만히, 가만히 있어라.’

현암은 침을 삼키면서 태극패에 힘을 가하여 빛을 물속으로 비췄다. 태극패의 빛이 닿는 순간, 계속 올라오던 거품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놈이 눈치를 챈 것이 분명했다. 현암은 언뜻 물 속을 꿰뚫은 태극패의 기관을 통해, 희끄무레한 것이 물속에 있 는 것을 보았다. 놓칠 수 없었다.

“받아라!”

현암은 태극패와 단검을 재빨리 바꾸어 쥐고 단검에 기공을 실어 힘껏 던졌다. 검기를 실은 단검이 물과 부딪히자 굉음과 함 께 단검이 박살 나면서 물기둥이 일어나고 물방울이 사방으로 어지럽게 튀었다. 현암은 다시 단검을 하나 뽑으면서 태극패에 기공력을 가했다. 무엇인지 허옇고 큼직한 것이 서서히 물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잡은 걸까? 이렇게 쉽게 끝날수가?’

현암은 눈을 크게 뜨고 떠오르는 물체를 지켜보았다. 떠오른 물체는 단검의 파편을 맞아 몸이 반쯤 박살 난 커다란 잉어였다. 

‘아니었구나!’

현암이 낙담하는 순간, 물밑에서 무엇이 현암의 다리를 잡고 무서운 힘으로 끌어당겼다.

‘아차!’

기습을 당한 현암은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꼬르륵 하고 거품 이 일며 차가운 물이 코와 입으로 들어왔다. 현암의 다리를 잡은 것이 현암을 무서운 속도로 호수 안쪽으로 끌어들였다. 현암은 발버둥을 쳐 보았지만 현암의 다리를 움켜쥔 것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잡힌 발목에 감각이 없어지며 저리기 시작했다. 현암은 애써 침착함을 되찾으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생각했다. 정체불 명의 힘은 몹시 빠른 속도로 호수의 중심 쪽으로 현암을 끌어당 겼다. 현암은 거의 평행으로 누운 채 끌려가고 있었고, 이제 조 금만 더 가면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 깊은 곳이었다. 구명조끼를 입고 있기는 했지만 물속에서는 현암의 처지가 압도적으로 불리 했다. 현암이 오른손을 뻗어 바닥을 더듬었다. 돌부리가 잡혔다. 현암이 돌부리를 잡고 사력을 다해 버티자 허리에서 우두둑 하는 소리가 났다. 현암은 고통을 느끼면서 기공력을 몸에 돌렸다. 언제까지나 이 상태로 버틸 수는 없었다. 현암은 자유로운 왼손 으로 단검을 쥐고 대충 발치라고 짐작되는 부분을 향해 던졌다. 그러나 저항이 심한 물속에서 기공조차 실리지 않은 단검이 제 대로 날아갈 리 없었다. 단검은 속절없이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영을 가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오른손으로 뻗어 나오는 기공력 뿐이었다. 현암은 왼손으로 태극패를 허리춤에 꽂고 바위를 잡 고 있던 오른손을 놓았다. 몸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 다. 숨쉬기가 어려웠다. 현암은 기공을 기해혈에 모으며 오른손 에 단검을 빼들었다. 검기를 단검에 미리 실으면 물속에서 폭파 되어 자신도 위험하기 때문에 곧바로 힘을 가하지는 않았다. 현 암은 허리에 힘을 주었다. 물의 압력이 굉장했지만 오랜 수련을 쌓아 온 현암은 간신히 허리를 굽힐 수 있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오른쪽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을 향해 단검을 찔러 넣으며 순간적 으로 검기를 발했다.

단검이 폭발하면서 엄청난 충격이 현암의 몸에 전달되어 왔 다. 현암은 아찔한 충격으로 입이 벌어지면서 참고 있던 숨이 보 글보글 새어 나가는 것을 느꼈다.

‘놈도 충격을 입었을 테니 일단 물 밖으로 나가자!’

현암은 발을 굴렀다. 기공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었으나 여기 저기 단검의 파편이 박힌 듯 통증이 일어났다. 오른발은 자유로워졌지만 왼발을 잡은 힘은 아직도 현암을 놓지 않고 있었다. 끌 고 가는 속도가 약해졌을 뿐이다. 현암은 상체를 수면 위로 내밀 었다. 헤엄을 쳐서 밖으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왼발을 잡고 있는 힘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현암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지독하구나!’

현암은 이를 악물고 솟구쳐 오르려 했지만, 점차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코로 물이 들어왔다. 현암은 도리질을 치며 마지막 남 은 단검으로 놈을 칠 생각을 하고는 칼을 오른손에 들었다. 또다 시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숨이 막혀 죽느니 그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놈, 혼자 죽지는 않겠다!’

현암은 방향을 바꾸어 아래로 몸을 숙이려 했으나 생각대로 되 지 않았다. 현암의 눈앞에 검은장막 같은 것이 드리워져 있었다.

‘아아, 이건 왜?’

구명조끼가 생각났다. 그것 때문에 몸을 굽힐 수 없었던 것이 었다. 현암은 구명조끼를 벗으려 했지만 띠가 엉켰는지 잘 풀리 지를 않았다. 단검으로 어깨에 걸린 띠를 사정없이 그었다. 살 까지 베는 바람에 날카로운 통증이 전해졌다. 현암은 이를 악물었다.

‘현아야, 힘을, 마지막 힘을 다오!’

현암은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숨을 일시에 토하면서 허리를 굽혔다. 단검이 왼쪽 발목에 이르는 순간 현암은 기공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거대한 충격이 온몸을 엄습했다. 눈앞이 희미 해져 갔다.

‘네놈을 두고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왼쪽 발목이 풀렸는지 잘렸는지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현암 은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무의식적인 복수심이 기계적으 로 오른손에 기공력을 모았다. 현암은 발치에 있을 물귀신을 향 해 기공력을 담은 일격을 가했다.

거대한 스펀지를 친 듯, 현암의 몸이 물에서 튕겨져 위로 솟구 쳤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물귀신을 치려고 가한 주먹이었는데…………. 현암의 머리가 물 위로 나오자 맑은 공 기가 밀려들어 순간적으로 정신이 돌아왔다. 현암은 양손으로 물을 저으면서 캑캑 기침을 했다. 공기를 다시 마시게 되니 감각 이 되살아나면서 통증이 느껴졌다. 꽤 멀리까지 끌려온 듯, 호수 중앙에 가까워져 있었다. 현암은 헤엄을 치면서 왼발을 흔들어 보았다. 큰 상처를 입거나 잘린 것 같지는 않았으나 쿡쿡 쑤셨 다. 아직도 현암의 왼발을 붙들고 있는 것이 있었다. 이제는 끌 어당기고 있지 않았지만, 집요하게 매달려 있는 귀신을 향해 현 암은 저주의 욕을 퍼부었다.

“지긋지긋한 놈! 완전히 없애 주마!”

현암이 오른손에 기공력을 모으려는데 문득 도혜 스님이 말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그 귀신의 이야기도 들어 보라던.

‘그래, 어차피 승부는 갈린 것 같으니 은인이 당부하신 바를 어길 필요 없지.’

현암은 한편으로 헤엄을 치면서 오른손으로 흠뻑 젖은 옷 속 에서 부적을 꺼냈다.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모르지만 부적은 물에 닿아도 젖지 않았다. 현암이 부적에 기공력을 가하자 부적 에는 저절로 불이 붙었다. 현암은 그 기운을 한 모금 들이켰다. 

가지 마세요………….

현암의 귓전에 난데없이 가냘픈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현 암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폈으나 아무도 없었다. 지금 이호 수에는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이 소리가 자신과 싸운 물귀신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이 소리는 막연히 예상했던 피에 굶주린 귀신의 푸념이 아니라 너무나 가늘고 힘없는 애원 의 소리였다. 현암은 흠칫하면서 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가지 마세요 제발! 날 이렇게 내버려 두고………….

현암은 등골이 오싹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현암 은 왼발에 매달린 것을 그대로 놔둔 채 물 밖으로 헤엄쳐 나가기 시작했다.

‘이 요사한 것이 무슨 술수를 쓰는 모양인데, 내가 호락호락 넘어갈 것 같으냐?’

또 날 내버리고 가시면 안 돼요. 제발…………. 제발…………

현암이 헤엄을 치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부적을 사용한 것이 후회스러울 만큼 가련한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지고 있었다. 

“듣기 싫다! 썩 입을 닥쳐라!”

왜, 왜 날 구해 주지 않나요?……. 왜 나를 버리고, 그렇게 무정한 눈 으로 보시는 거예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현암은 갑자기 허망한 기분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이 귀 신에게도 무슨 사연이 있었단 말인가?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 게 가련하게 호소한단 말인가? 아냐, 이건 속임수일 거야…………. 

내가 싫다면 싫다고 하세요. 너무해요…………… 왜 나를 이곳에 버리고 혼자 가시는 거예요? 가지 마세요. 제발 그런 눈으로…..

현암은 힘을 다해 헤엄을 쳤다. 발에 매달린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가지 마세요. 아아, 그런 눈은 싫어요. 마지막으로 손이라도 한번 잡 아 줄 수 없나요? 뿌리치지 말아요……..

발이 땅에 닿았다. 물 밖으로 뛰어나오면서 현암은 양손으로 귀를 막고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

“그만해!”

사위가 적막해졌다. 현암은 충혈된 눈으로 숨을 헐떡이면서 귀를 막았던 손을 가만히 떼었다. 여자의 소리는 작은 신음으로 변해 있었다. 현암은 듣지 않으려 애썼으나 자꾸만 신경이 그리 로 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이대로 가도 좋아요. 그러나 마지막으로 손을………… 아아, 그런 눈은 싫어요…… 제발 뿌리치지 말아 줘요.

현암은 헐떡거리면서 허리에 찬 태극패를 꺼내어 양손에 받쳐 들고는 힘겹게 발목께를 비췄다. 극한의 내력을 받은 태극패는 랜턴처럼 환한 빛을 뿌리면서 현암을 끌어들인 것의 정체가 무 엇인지 똑똑히 보여 주었다.

그것은 영력에 의한 타격을 입어서인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 다. 오른손이 날아가 버리고, 왼손도 반쯤 떨어져 있었다. 왼손 에 매달려 있는 것은 머리를 풀어헤친, 현암이 악몽에서 대하던 바로 그 여자였다. 생전의 모습이 예쁠 것 같지는 않은, 윤곽이 가느다란 선병질(病質)적인 얼굴이었다. 구멍만 남은 두 눈에 서 피 같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싫다면 할 수 없어요……. 그러나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자꾸 떼밀지 마세요………….

현암은 여인이 겪은 일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호수에서 살해 당한 것이다. 자신이 좋아했던 어떤 남자에 의해 남자는 아마도 여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인은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다. 남자는 최후의 방법으로 인적 없는 호수로 여인을 유인한다. 아마도 배를 타고 호수 중앙까지 갔겠지. 물속으로 떠 밀었을 것이다. 허우적거리며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여인을 싸 늘한 눈초리로 쳐다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인은 자신을 그렇게까지 만든 남자를 미워하기보다 남자가 떠난다는 사실이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던 싸늘한 눈초리가 더 서러웠을 것이다. 여인의 영은 현암을 그 남자로 생각한 듯, 움찔거리며 현암 쪽으로 기어 왔다. 퀭한 얼굴에 묘한 웃음을 띠면서.

“아아, 이런 게 아니었어! 내가 싸우고자 했던 것은 이런 게 아 니었다고!”

현암은 발악하듯이 밤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눈물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자신은 무엇에 복수를 하려고 했단 말인가? 연 인에게 배신당해 가련하게 죽어 간, 그러고도 자신을 죽인 자를 잊지 못해 손을 내밀고 있는 정신 나간 여자의 영혼에 대해서? 현아를 물로 끌어들인 것은 이 여인의 영혼이 저지른 소행이 분 명했다. 분명코 이 여인 때문에 현아는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혼령에게 복수를 한다고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으흐흐……”

현암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정신 나간 여인의 영은 그런 현 암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기공력이 실린 공격을 받아 만신창이 가 되고, 아니 그 이전에 연인의 손에 목숨을 빼앗긴 가련한 여 인. 현암은 여인을 응징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가련하다는 생각 만 밀려왔다. 아, 그러면 현아의 목숨은 누구에게 보상받는다는 말인가?

울지 마세요. 그리고 날 버리지 마세요………….

현암은 황소처럼 목을 놓아 울었다. 여인의 반쯤 잘린 왼손이 현암의 얼굴 쪽으로 올라왔다. 오랜 집념과 바람이 물리력으로 나타난 듯, 현암의 볼에 손의 촉감이 느껴졌다. 현암은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고 여인의 손을 잡아 뺨에 비볐다. 여인의 흉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가시지 않았군요.

현암은 이 여인에게 부상을 입힌 것을 후회하면서 진정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현암이 흐느끼면서 여인의 잘려진 손목 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갑자기 여인의 몸에서 불길 같은 것이 일 어나기 시작했다. 여인의 몸이 물에 썩은 형체를 벗어나 서서히 생전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현암은 눈물을 머금은 얼굴로 애써 미소를 지었다. 여인의 얼굴은 그리 예쁘지 않지만 순진했 던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현암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려 했으나 자꾸 흐느낌이 섞여 나왔다.

“가지 않았어……………. 이렇게 다시 왔잖아……………. 이젠 편히 쉬어…….”

여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동시에 여인의 감촉이 사라지면서 몸 전체가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천천히 여인의 모 습이 사라져 갔다. 그녀의 얼굴에 마지막으로 환한 빛이 떠올랐 다고 생각한 순간, 여인은 가고 없었다. 현암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속으로만 목을 놓아 우는 현암의 주변에서 다시 풀벌레 소리와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오빠………….

오빠, 잘했어.

이건 내 운명이야. 오빠의 운명이기도 하고.

이젠 오빠의 길을 가야 해.

난 항상 오빠 곁에 있을 거야.

언제까지나 영원히…………….

현암은 눈을 떴다. 현아의 영상이 스쳐 지나고 있었다. 현아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동안 현암의 마음이 말끔 히 개기 시작했다. 어느덧 해가 고개를 삐죽 내밀고 있었다. 현 암은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저만치에 태극패와 구명조끼가 보였다.

그리고 저 아래 호숫가에 무엇인지 밀려와 있었다. 두 구의 시체였다.

“현아야!”

현암은 정신없이 그쪽으로 달려갔다. 많이 상했지만 미소를 띠 고 있는 듯한 여인의 시체와 이 년이나 지났는데도 생시와 전혀 다를 바 없이, 마치 잠든 듯 여인의 등에 업힌 현아의 시체였다. 

“현아야, 현아야!”

현암의 눈에서 눈물이 솟구쳤다. 현아의 얼굴이 햇살을 받아

밝게 빛났다. 깨우면 금방이라도 부스스 일어날 것처럼……………

현암은 무릎을 꿇었다.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깨고 나면 웃고 말 꿈이었으면……….


며칠이 지났다. 호수를 다시 찾은 현암의 손에는 두 봉지의 화 장한재가 들려 있었다. 현암은 더 이상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묵묵히, 현아와 알 수 없는 여인의 재를 바람에 실어 호수 위에 흩뿌렸을 뿐이다. 현암은 다짐했다.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 이기로…………. 그리고 다시는 자신의 눈앞에서, 아니 세상에서 이 런 일들이 일어나지는 않게 하겠노라고 결심했다. 흩날리는 재 사이로 한빈 거사와 도혜 스님, 이름을 알 수 없는 여인과 현아 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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