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1권 – 31화 생명의 나무 2 : 잠입
잠입
“와, 신난다!”
긴장을 가다듬던 현암은 옆에서 승희가 쫑알대는 소리가 들리자 맥이 풀렸다.
“뭐가?”
“처음 출동하는 거잖아? 와우, 재밌을 거 같아!”
“재미? 승희야, 지금 우리가 재미로 가는 것 같니?”
“아아, 물론 알지.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거. 하지만 천하무적인 현암 군이 옆에 있으니 어떻게 잘되겠지, 뭐. 수련할 때 보니까 끝내주더라? 맨손으로 바위도 부수고…….”
현암이 눈을 찡그렸다. 어이구, 이 푼수!
“이봐, 승희야, 너 몇살이야?”
“스물세 살.”
“나 몇 살인지 알지?”
“응. 서른 살.”
“근데 여태까지 한 번도 존댓말 쓰는 걸 못 봤어. 내가 대학 일 학년 때 넌 뭘 하고 있었는지 알아? 초등학교육학년 코흘리개였어! 그런데 뭐, 현암 군?”
“그게 뭘?”
“관두자.”
승희가 삐친 듯, 안 그래도 위로 쭉 찢어진 눈썹을 더 위로 치켜 올리며 말했다.
“흥! 그럼 영감탱이라고 불러 드릴깝쇼? 나 참, 그깟 일곱 살 차이 갖고 되게 재네. 젊게 봐주는게 기분 나빠?”
“그만 내가 잘못했다고 치자.”
티격태격하는 사이에 차는 사교의 총단이 있다는 어느 한적한 교외의 야산 모퉁이로 접어들고 있었다.
박 신부와 준후는 K대학 캠퍼스를 나섰다. 날씨가 몹시 더워 서 몸에는 땀이 흘렀다. 박 신부는 준후를 근처의 한적한 제과점 으로 데리고 들어가 팥빙수를 주문했다. 한참 말없이 빙수만 먹 던 준후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정말 그 여자가 맞나요? 사진으로 보니 전혀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던데요.”
“아니, 틀림없어. 임소미라는 여자가 틀림없다. 경찰 수사 기록에 나온 얼굴과 똑같아.”
“신부님, 또 장 박사님을 통해서 알아내셨군요?”
“응. 많이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이 학교 출신이었다는 것과 사진 정도는 미리 봐 두었지. 어떠냐, 준후야? 뭐 다른 건 느껴지 는 것 없니? 사진이나, 아니면 다른 데서라도………….”
“아뇨, 그냥 예쁜 누나던데요.”
“분명 독일 유학 때에 뭔가 사악한 것과 접하게 되었을 거야.” “맞아요. 졸업 후 그 여자 독일로 유학 갔다고 했죠? 그게 삼 년전……………”
“그래. 공부를 마치고 학위를 따기에 충분한 시간은 아니지. 출입국 관리소에서 확인한 건데, 그 여자가 다시 귀국한 건 작 년이야. 그러니 이 년 동안에 무슨 일이 생긴 걸로 볼 수밖에 없어……. 그런데 준후야!”
“예?”
“네가 주술을 수련한 지가 얼마나 됐지?”
“헤헤.. 저야 뭐, 날 때부터 해 왔죠. 그러니까 나이하고 같죠.”
“그러면 주술 수법 중에 이 년 안에 수련할 만한 게 있니?”
“글쎄요…………. 정파의 술수는 천부적 자질을 타고 났어도 그렇 게 쉽게는 안 돼요. 불가나 도가의 주술은 아무리 쉬운 것도 오 년 이상은 걸릴 거예요. 음, 무속에서는 천부적 자질만 있으면 당장에 이루어지는 것도 있지만……”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그 두 사제는 주술력으로 많은 사람 의 눈앞에 뱀의 환영을 보일 수 있다고 하고, 또 여러 가지 이적. 그러니까 손에서 불을 낸다든가 몸에서 광채를 낸다고 하던데?”
준후는 깜짝 놀라는 듯했다.
“와! 만약 속임수가 아니라면 그건 대단한 거예요. 신부님, 제 가 어떤 수련을 받았는지 아시죠?”
박신부는 사 년 전 준후를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해 보았다.
“응. 너야 태어날 때부터 모든 주술 의례를 받고, 호법들이 주 술력도 심어 주고 천부적인 자질 또한 있었으니……….”
“그랬는데도 이제 겨우 몸에서 초일월광을 낼 수 있을 정도예 요. 손에서 불을 내는 것도 삼 년 전까진 안 됐구요.” 박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렇다면 역시 사술에 의한 것밖에 없겠지?”
“예. 서양의 주술은 잘 모르지만, 강한 마력을 지닌 물건을 이 용하거나 강력한 영을 빙의시키면 가능할 수도 있죠. 하지만 그 런 방법을 이용하면 점점 자신의 영혼을 잠식당하게 돼서 결국 에는 꼭두각시처럼 될 위험이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자유자재 로 되는 것도 아니구요. 아니지, 또 방법이 있긴 있어요.”
“뭐지?”
“천지간에 정(正)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사(邪)도 있고 마 (魔)도 있죠. 그런 사악한 정기, 아니 사악한 영에서 힘을 얻을 수도 있어요. 근데…………”
“근데 뭐지?”
준후의 눈이 커졌다.
“영계는 인과율이 지배하는 세계, 뭔가를 얻으면 다른 뭔가를 주어야 해요. 강한 힘을 얻으려면 상응하는 걸 바쳐야 하죠. 그 러니까 인간의 영혼이나 생명을 바쳐야……………..”
“음, 역시……. 준후야, 사교의 교리서에 있던 내용 기억나니?”
“예? 어떤 거요?”
“육신으로 지은 죄는 육신을 바치고, 마음으로 지은 죄는 영혼을 바쳐서 속죄하라는 것 말이야.”
“예, 생각나요. 그렇다면 역시………….”
“그래, 틀림없어. 신자들에게 그런 논리를 심어 놓고 신자들의 몸과 영을 갉아먹는 대가로 흑암의 권세를 얻으려 하는 게 틀림 없어. 그들이 바라는 게 뭘까?”
준후가 숟가락을 입에 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박 신부는 새 삼준후가 이제 겨우 열세 살밖에 안 된 아이라는 걸 깨달았다.
“모르겠어요.”
“그래그래, 미안하다. 아무튼 그들은 일반 사이비 종교와는 다 른 자들이 틀림없어. 그저 사리사욕을 노리는 것만도 아닌 것 같은데, 목적이 뭘까?”
박신부가 탁자를 보았을 때는 이미 준후가 박 신부의 빙수까지 먹어 치운 후였다.
“헤헤헤…… 녹아 버릴 것 같아서요.”
“알아냈어. 후훗…………. 별로 어렵지도 않던데, 뭐.”
“벌써?”
승희가 희색이 만면해서 교단의 접견실에서 나오는 것을 현암 이 서둘러 차에 태웠다. 승희가 쪽지를 내밀었다.
“대사제라는 남자의 주소는 여기래.”
“흠. 상당히 외진 곳인데? 헌데 그렇게 쉽게 알려 줬어? 난 그 냥 쫓겨났는데?”
“후후…………. 내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랬거든. 그랬더니 알겠다는 듯이 가르쳐 주던데? 아마 대사제라는 남자, 사생활이 그렇고 그런 모양이야.”
현암은 왠지 찜찜했다.
“하여간 잘했어. 이렇게 쉽게 주소까지 알아낼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뭐 또 딴소리한 거 아냐?”
“딴소리는 뭘. 그냥 사제님한테 부름받았는데 주소를 잊어버렸다고 했을 뿐이야.”
“뭐, 부름받았다고? 아니, 그런 생각은 또 어떻게 했지?”
“눈치지, 뭐. 들어가니까 사무실에 앉아 있던 대머리가 그런 생각을 하던걸 호호호”
“어떤 생각?”
“그러니까…………… 에이, 그런 거 왜 자꾸 알려고 그래? 그런가보다 하지.”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의 생각을 알았냐고.”
“글쎄? 어? 그러고 보니 신기하네!”
현암은 멍해 있는 승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혹시 독심술이 아닐까? 승희는 원래 초능력이 발달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애염 명왕을 봉인하고 있는 몸이니 그럴 수도 있었다. 혹시 능력이 슬 슬 나타나고 있는 거 아닐까? 현암은 시험을 해 보기로 했다.
“승희야, 내가 무슨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니?”
승희가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현암의 얼굴을 한동안 들여다보더니 외쳤다.
“응? 음……. 아, 애인 생각하는구나! 맞지? 맞지?”
현암은 어이가 없었다. 무슨 세상에 있지도 않은 애인이냐?
현암은 얼마 전 깨닫기 시작한 파사신검의 검식 하나를 생각하 고 있었다.
“어이구, 내가 바보다. 빨리 가자!”
현암의 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출발했다.
소위 대사제라는 남자의 집은 정말로 한적한, 인가에서 삼십분 이상 산굽이를 돌아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미 해가 져서 어두워졌고, 사방에는 풀벌레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괴괴했다. 눈앞에는 막 떠오르는 달을 배경으로 삼층짜리 건물이 공룡처럼 육중하게 서 있었다.
“기분 나빠. 막상 오기는 왔는데, 어쩌려고?”
“들어가야지.”
“들어가? 그냥?”
“응. 숨어 들어가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아.”
“숨어 들어간다고? 왜?”
“그럼 벨 누르고 들어가냐? 그래서 뭐라고 하지? 어차피 그런 식으로 들어가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해. 나에게 맡겨 둬.”
“그래도 도둑처럼 담을 넘는 건 영…..”
“승희 너는 여기서 기다려. 운전할 줄 알지?”
“응.”
“여기서 기다리다가 내가 나오면 재빨리 떠날 수 있도록 준비 해두라고. 아니지, 안이 소란스러워지면 그냥 가. 내 걱정은 말고”
“진짜 담 넘어서 숨어 들어갈 거야?”
“그렇대도 뭔가 알아내려면 그게 제일 빨라.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지.”
“가택침입죄로 걸리면 어떡하려고?”
“지금 그게 문제냐? 저들이 정말 사악한 주술을 사용하고 있는지 확인만 하고 돌아올 테니까 염려 마. 정 안심이 안 되거든 신부님께 카폰으로 전화하든지…”
현암은 승희를 차에 남겨 두고 집 쪽으로 갔다. 담이 꽤 높았 고 위에는 가시철망까지 둘러쳐져 있었다. 수상했다. 인가도 없 는 이런 곳에 이렇게까지 높은 담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현암은 기공을 모아 힘을 끌어 올린 뒤 담 위로 올라섰다. 다른 무엇이 더 있을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래쪽에 시커먼 그림자들이 몇 개 오가고 있었다. 개였다. 그것도 도베르만……
‘이거 아차 하다간 꽤 시끄러워지겠군!’
현암은 눈을 돌려 마당 한쪽에서 자라고 있는 큰 나무를 바라 보았다. 거리는 담장에서 삼미터쯤…………. 그리로 건너뛰어서 가 지를 잡고 나무 위로 올라가면 이층 창문가를 붙들고 안으로 들 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으라차!’
현암은 담장 위를 달리다가 나뭇가지로 몸을 날려 가지를 잡 고는 탄력을 이용하여 그대로 창문가에 매달렸다. 빨리 들어가 지 않으면 개들이 짖을 염려가 있었다. 현암은 오른팔을 뻗어 창 문을 열려 했으나 잠겨 있었다.
‘제기랄, 일이 잘 풀린다 했더니만……’
현암은 기공술 중 흡(吸) 자결을 외우며 오른 손바닥을 유리 창에 댔다. 유리가 손에 바싹 붙자 현암은 손을 살짝 당겼다. 나 직하게 “퍽” 소리가 나며 유리가 손에 매달렸다. 현암은 공중에 서 몸을 돌려 창문 안으로 들어섰다. 집 안은 조용했다. 현암이 들어선 방안은 서재 같았다. 벽에 갖가지 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고, 벽에 큼직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모나스 히에로글리피카…………. 우주의 지혜를 모은다는 부적?’
현암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 밖에 이상한 것은 없었다. 책 상 위에 해골 모형으로 눌러 둔 서류만 몇 장 보였다. 서류 내용 이 궁금하여 해골을 치우려는데 촉감이 이상했다.
‘이크! 이거 진짜 해골 아냐!’
현암은 해골을 카펫이 깔린 방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러자 눈구멍에서 붉은빛을 발하며 해골이 입을 들썩거렸다.
“마스터! 마스터!”
“이런 요사한!”
현암은 오른 손바닥에 기공을 돋우어 지껄이는 해골을 갈겼 다. 빠직 소리와 함께 해골이 박살 나면서 잠잠해졌다. 박살 난 해골에서 누런 연기가 피어올랐다.
‘음・・・・・・ 이거 정말 사술을 쓰는 놈이 분명하군.’
현암은 조용히 복도로 나섰다. 집 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사 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현암은 계단을 한 걸음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월향을 차에 두고 와서인지 좀 허전했다. 월향의 귀곡성 때문에 일부러 놓고 온 것이다. 계단을 따라 일층 거실로 내려온 현암은 책상 위에 갈겨쓴 메모 하나를 주웠다.
길일을 택하기 위해 바빌론의 점복술 이용 → 샘플 9개 소요
소미와 13일에 약속→ 흑마술 전수
‘바빌론의 점술? 샘플은 뭘 가리키는 거지? 흑마술이라……………. 그리고 소미는 또 누구지? 어쨌든 단서가 될 것 같군. 적어 두자..
서둘러 왼손 바닥에 볼펜을 꺼내 적고 있는데 맞은편에 있는 계단에 눈에 들어왔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 같았다. 거기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현암은 그쪽으로 조심스럽 게 걸음을 옮겼다.
승희는 혼자 남게 되자 불안해졌다. 박 신부에게 몇 번이나 카 폰으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자동응답기가 받을 뿐이었다. 주 위는 이제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렇다고 실내등을 켤 수도 없었 다. 현암이 들어간 지 벌써 삼십 분이 넘게 지났다. 그 시간이 승 희에게는 엄청나게 길게 느껴졌다. 승희가 다시 한번 전화를 시 도해 보려고 하는데, 집 쪽에서 난데없이 귀청을 찢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르르륵!!
정적을 깨는 기관총 소리에 승희는 깜짝 놀라 쇳소리를 질렀다.
“꺄악!”
현암은 비틀거리다가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한 채 벽에 기대 어섰다. 뒤돌아 서 있던 남자가 뭔가를 꺼내는 순간 재빨리 몸 을 날리기는 했지만 그자가 권총도 아닌 기관단총을 가지고 있 을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오른쪽 아랫배와 왼쪽 가슴 부위에 총알을 맞은 것이 분명했다. 의식이 가물거리면서 고통 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하하핫! 바보 같은 놈, 넌 도망 못 간다! 감히 금지된 의식 장소를 기웃거리다니!”
현암은 아득해져 가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기공을 돋우려 했 으나 기가 잘 모이지 않았다. 울컥 하고 입에서 피가 나왔다. ‘안 돼, 정신을 잃으면…………. 저 사악한 의식을 막아야………… 막아야……’
현암이 털썩 쓰러졌다. 안간힘을 다해서 정신을 잃지는 않았 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누가 뚜벅뚜벅 다가왔다.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었지. 지하실 계단에 감시 카메라가 있는 건 몰랐나? 하하핫…….”
녀석의 손이 현암의 머리털을 움켜쥐고는 위로 치켜들었다.
“오호라, 네가 현암이로구나. 공력이 꽤 세다고 들었는데 총알 은 아직 못 막나 보지? 비밀을 훔쳐봤으니 이제 안녕이다. 멍청한 녀석!”
남자가 현암의 머리를 쥔 채로 주머니에서 철컥 소리와 함께 칼을 빼들었다.
“안심해라. 단번에 따 줄 테니까, 아프진 않을 거야.”
승희는 미칠 것 같았다. 느닷없이 총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제 는 정적만 감돌고 있었다. 현암이 달려 나와야 하는데, 만약 현암이 당했다면…….
“안 돼! 아아아!”
승희는 눈을 감고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승희다! 승희가 힘을 보내 주는구나!’
단전에서 형언할 수 없는 기운이 솟아올랐다.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으나, 기공이 몸에 퍼지기 시작했다. 대사제의 칼이 현암의 목에 닿은 순간, 현암은 눈을 번쩍 뜨고 오른손으로 있는 힘을 다해 녀석의 손을 치며 몸을 일으켰다.
“으윽!”
기공이 잔뜩 실린 현암의 주먹을 맞은 남자는 현암의 머리털
을 움켜쥔 채 나가 떨어졌다. 칼은 저만치 날아가 버렸고, 오른 손이 축 늘어진 것이 아마 부러진 것 같았다. 현암의 입에서 선 혈이 뿜어져 나왔다. 순간적으로 무리해서인지 상처가 더 쑤셨 다. 그를 잡아 캐묻고 싶었지만 아까 지하실에서 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박 신부와 준후에게 알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현암은 몸을 날려 밖으로 뛰어나갔다. 대사제가 부러진 오른손과 비틀 거리며 뛰어나가는 현암을 보고는 이를 갈면서 왼손에 쥐고 있 던 현암의 머리카락을 던지며 펜타그램을 꺼내 들었다.
“이이, 망할 놈! 죽어라! 땅의 정령 코볼트여!”
대사제가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고 주문을 외자 정원의 흙이 불쑥거리며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현암은 놀랐으나 걸음을 늦출 수는 없었다.
‘이놈이 사대력(四大力)*을 쓰는구나! 어쩐다?’
땅이 뭉클거리더니 마치 유사(流)처럼 소용돌이치며 흐르기 시작했다. 아차 하는 사이에 발이 땅으로 꺼져들기 시작했다. 현 암은 기합을 넣으면서 몸을 솟구쳐 올렸다. 사납게 짖으며 달려 오던 도베르만들이 땅에 휘말려 짓눌린 벌레마냥 터져 죽었다. 현암은 왼손으로 담장에 매달렸다. 오른손으로는 총상을 입은 아랫배를 움켜쥐었다. 피를 많이 흘려서인지 기공이 몸에 도는 데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 서양 신비주의에서 나오는, 만물을 구성한다고 하는지, 수, 화, 공의 4가지 요 소(element)의 힘, 지(코볼트), 수(운디네), 화(살라만더), 공(아리엘 또는 질 페, 실피드)이 각각의 정령들이다.
“으, 허리를 움직일 수가 없다. 넘을 수가 없어!’
대사제가 악쓰는 소리가 들렸다.
“도망치려고? 그렇게는 안 된다! 아리엘! 아리엘이여!”
광풍이 몰아쳐 왔다.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이 담에 매달린 현 암의 몸을 강타했다. 현암은 고스란히 그 힘을 받는 수밖에 없었 다. 순간, 현암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현암은 오른 손에 최후의 힘을 짜내 벽을 후려갈겼다. 벽이 부서져 나가는 것 과 동시에 무서운 바람의 일격이 몰아쳐 왔고, 담벼락이 산산이 부서지면서 현암의 몸도 허공을 날았다. 대사제가 이를 갈았다.
“약은 놈! 바람에 대항하지 않고 그걸 이용하다니!”
바깥에서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차를 모는 소 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한패가 밖에 있었구나… 질긴 놈!”
생각 같아서는 따라가서 박살을 내고 싶었지만 자신의 부상도 컸다. 대사제는 아까 던져 버린 현암의 머리카락 뭉치를 주워들 었다. 손에는 현암의 피가 묻어 있었다. 사제의 눈에 야릇한 미소가 흘렀다.
“이것만 있으면, 너는 살아 있어도 산목숨이 아니다.”
승희는 미친 듯이 차를 몰면서, 한 손으로는 카폰의 키를 누르기 바빴다. 자꾸 번호를 잘못 눌러 엉뚱한 데가 나왔다.
“현암 씨, 아니 현암 오빠! 죽지 마! 이런 젠장!”
승희가 소리를 빽 질렀다. 또 잘못 눌렀나 보다.
“죽으면 안 돼! 약속해! 죽지 마, 죽지 말라구!”
“으음…….”
만신창이가 된 현암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도망치는 데 최후의 힘을 쓰느라 기공이 다 빠져서, 이제 현암에게는 말할 기운조차 없었다.
“의 의식・・・・・・ 놈들의 의식………….”
“말하지 마! 말하지 말고 정신을 차려!”
맞은편에서 오는 트럭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며 승희가 외쳤다. 눈에서는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
“막, 막아야…… 의, 의식・・・・・・ 저주, 저주받은…………”
“말하지 마 바보야! 살아난 다음에 해도 되잖아!”
승희가 악을 썼다. 현암의 입에서 가쁜 숨이 흘러나오더니 더 이상 말소리는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