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1권 – 34화 생명의 나무 5 : 금단의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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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국내편 1권 – 34화 생명의 나무 5 : 금단의 의식


금단의 의식

박 신부와 준후, 그리고 승희는 현암을 아지트로 데리고 왔다. 이 아지트는 넷의 회합 장소로, 준후와 박 신부가 정성을 들여 수호력으로 결계를 친 곳이었기에, 주술로부터는 그래도 제일 안전한 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박 신부가 의사였을 당시의 솜씨 를 발휘하여 현암에게 다시 응급처치를 해 주었다. 승희는 아무 말없이 박 신부를 도왔고, 준후는 탈진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현암의 붕대를 갈고 약을 바른 뒤, 링거 까지 꽂은 뒤에야 박 신부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이것저것 뒷수습을 하며 입을 열었다.

“휴우, 이젠 됐다. 현암 군은 보기와는 달리 워낙 단련을 많이 한 몸이라 괜찮을 것 같구나……………. 그런데 승희야, 아까 현암의 손에 써 있던 게 뭐였지? 지금은 보이지 않는데?”

“제가 외웠어요. 그러니까 길일을 택………… 그다음에는 안 보였 고, 바빌론의 점복술 이용, 샘플 아홉 개………… 군데군데 지워져서 전부는 안 보였어요. 그리고 소미와 13일에 약속, 그게 제가 읽 은 다예요.”

박신부의 눈이 커졌다.

“소미? 소미라고? 그건 우리가 추적하던 여사제 이름인…..”

“그런가요? 신부님은 뭣 좀 알아내신 게 있어요?”

“아니, 별로……. 그나저나 바빌론이라…………. 왜 바빌론의 점 복술을 쓴다는 거지? 승희야, 저쪽에 가면 그것에 관한 책이 있 을 거야. 찾아봐주겠니?”

“예. 그러죠.”

승희는 선선히 서가로 가서 고대 종교의 의례에 대한 책을 들 고서 바빌론 부분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바빌로니아의 종교가 오랫동안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천문 학 분야의 발달과 도량형에 상당히 박식한 사제 덕분이었다. 고 대와 중세 초기까지만 해도 바빌로니아 사제와 지혜를 겨룰 상대가 없다고 여겨졌고, 특히 바빌로니아의 마귀론은 중세 유럽의 종교재판관으로 하여금 열광적인 마녀 사냥에 빠지도록 했던 근본 원인으로…..”

박신부가 현암의 베개를 올려 주면서 승희의 말을 막았다.

“아, 승희야, 점술에 대한 것만 읽어 주면 충분하다. 나도 오늘은 영 피곤하구나.”

승희는 다시 책을 몇 페이지 뒤적이더니 읽기 시작했다.

“바빌로니아의 점복술은 아주 발달해 있었다. 몇몇 사제는 점 을 치는 전문가였고 그들은 꿈을 해석하거나 동물이나 새의 날 갯짓 또는 물에 떨어진 기름방울의 모양 등을 통해 미래를 예견 했다. 바빌로니아에서 흔히 쓰이던 점술 도구는 희생 제의에 사 용된 동물의 내장, 특히 간……………”

박신부가 섬뜩함을 느끼며 고개를 홱 돌려서 승희를 쳐다보 았다. 승희도 망연하게 책을 바라보고 있다가 떨리는 어조를 계 속 책을 읽어 내려갔다.

“간이었다. 간 관찰법(hepatoscopy)이라고 불린 이 기술은 예술로까지 발전하여…………….”

“간이라니! 그러면 혹시 현암 군은!”

승희가 역겨운 표정을 지우며 읽기를 멈추고 박 신부를 쳐다 보았다.

“혹시 인간의 간을 이용하는 의례를…..”

“샘플 샘플이 아홉 개라 했지? 만약 그 메시지가 사실이고 우리의 추측이 맞다면 놈들은 뭔가 의례를 행하기 위해 아홉 사람을 희생시킨다는 뜻이 돼!”

“욱! 신부님, 그건 너무!”

“막아야 한다! 현암이 그토록 알리고 싶어 했던 것이 바로 이 것이었을 거야! 오늘이 며칠이지? 어이쿠, 벌써 12일이구나.” 

승희도 흥분하여 외쳤다.

“소미라는 사람과의 약속이 13일이었죠? 벌써 밤이니까 몇 시 간밖에 남지 않았네요!”

“그런데 13일에 약속했다는 것이 단순히 소미라는 여자와의 약속인지, 아니면 금단의 의식을 치르기로 한 날인지는 구분하 기가 힘들어.”

“그렇지만 만약의 경우, 13일이 나쁜 쪽이라면 어쩌죠? 맹목 적으로 저들을 믿고 따르는 사람 중 아홉………… 아니, 다른 선량 한 사람일지도 모르죠. 아무튼 아홉 명이 죽게 될지도 모르잖아 요? 대책을 강구하는 건 빠를수록 좋아요.”

“그래. 막아야지!”

“어떻게요? 어떻게 막죠?”

박신부가 입을 다물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준후가 그제야 기지개를 켜며 무아지경에서 벗어났다.

“신부님! 왜 그리 얼굴이 굳어 계세요? 오늘 이겼잖아요?”

박신부가 각오를 한 듯, 준후와 승희를 가까이 모았다.

“이 방법밖에는 없다. 승희야, 교단의 위치를 알지?”

“예, 대강 기억할 수 있어요. 교단 사무실과 대사제라는 자의 거처…….”

“사무실은 표면적인 걸 거야. 대사제의 집, 길을 안내할 수 있겠니?”

“예.”

“좋다. 방법은 하나뿐이야.”

“뭐죠?”

박 신부의 안광이 빛났다.

“쳐들어가는 거다.”

준후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예? 지금 당장 간다고요? 이렇게 지친 상태로요?”

“지금밖에 시간이 없다.”

박 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교의 인물들은 현암에게 중요 한 비밀을 들킨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급하게 흑마술을 사용 하여 인형을 만들고 직접 추격까지 해 온 것이다. 하지만 대사제 라는 자가 중상을 입은 현재의 상태에서 그들의 금단 의식을 수 습할 경황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이때 치고 들어가야만 그들의 정체와 추구하는 목표, 그리고 금단의 의식이 무엇이지 알아낼 수 있다고 박 신부는 생각했다. 어떻게 하든 지치고 피곤하기는 피차 마찬가지일 터였다.

“저도 갈게요!”

승희가 끼려고 했으나 박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너는 남아서 현암 군을 지켜야 해. 현암 군은 의식이 없는 상태이니, 누가 간호를 해 줘야지.”

“흥, 알았어요.”

“대사제라는 자의 집으로 가는 약도를 부탁한다.”

박 신부와 준후는 영력이 지닌 물건들을 이것저것 챙기기 시 작했고 승희는 약도를 그렸다. 그러나 막상 떠나려고 하니 아직 자신의 특별한 힘을 제대로 발휘할 줄 모르는 승희만을 남기기 가 뭣해서, 승희에게 월향검과 간단히 쓸 수 있는 부적 몇 장을 맡기며 사용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또 만약을 대비하여 박 신부 는 성수 뿌리개도 챙겨 주면서 한 가지 일을 승희에게 맡겼다. 

“나하고 준후가 소미라는 여자의 조사를 해 온 서류봉투가 있 을 텐데, 정신이 없다 보니 제대로 읽어 보지도 못했구나. 현암 군을 보살피면서 정리해 주겠니? 가능하다면 자료를 찾아 추리도 해보렴!”

“예,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혹시 모르니 삼십 분마다 연락 주시고요.”

“내 차에는 카폰이 없는걸. 너무 걱정 마라. 지금이 밤 열한시니까. 새벽 두시까지는 꼭 연락하마!”

“예.”

박 신부와 준후는 승희가 그린 약도를 들고 금단의 의식이 행 해지고 있을 대사제의 집으로 출발했다.


승희는 현암의 몸에 꽂힌 링거병에서 똑똑 떨어지고 있는 방 울을 처량하게 바라보았다. 현암은 곤히 잠든 듯 고르게 숨을 쉬 고 있었다. 승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박 신부의 서류봉투를 꺼 냈다. 거기에는 임소미라는 여자의 사진을 복사한 것 몇 장과 K 대학의 졸업 증명서, 그리고 출입국 신고서와 기타 몇 가지 서류 들이 들어 있었다. 먼저 승희는 사진부터 펼쳐 보았다. 대학 졸 업 앨범에서 복사한 듯, 사각모를 쓴 얼굴과 평복 차림의 얼굴, 그리고 여러 명이 함께 찍은 스냅 사진들이었다. 평범하기 그지 없는 모습이었다.

“그럭저럭 괜찮은 얼굴인데 옷을 잘 입을 줄 모르는군. 후 ……”

승희는 다른 서류를 펼쳤다. 출입국 신고서였다. 거기에는 독 일의 입국 및 출국 도장이 찍힌 페이지들이 있고, 시력이 나쁜 박신부가 표시해 놓은 붉은 동그라미가 보였다.

“독일에서 공부한 모양이지? 기껏 나가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이상한 것이나 배워 와서는………..”

승희는 소미라는 여자의 전공을 들춰 보았다. 전공은 고고학이었고, 특히 수메르나 바빌로니아의 분야를 주로 연구한 듯했다.

“수메르? 바빌로니아? 하긴 사교의 교리에 그쪽 내용이 많이 있었지.”

다시 눈을 돌리는데 아까 보았던 출입국 신고서의 한 페이지에 다른 도장이 찍혀 있었다.

“응? 이건 근동 지방을 여행했던 비자네?”

도장은 여러 개가 있었다. 그곳은 고대 바빌로니아, 수메르, 우루크 등이 있던 지방이었다.

“역시………….”

승희는 날짜를 맞춰 보았다. 소미가 독일로 떠난 것이 삼년 전, 신고서에 찍힌 근동 지방을 여행한 시기는 대략 이년 반 전 부터 일 년 반 전까지였고, 인도 북부 지방도 한 번 간 듯했다. 이 것으로 볼 때, 소미라는 여자는 독일로 간 지 육 개월 정도 지나 고 나서부터는 계속 근동을 여행한 셈이다.

“무슨 이유였을까? 어쨌든 근동 고대사나 종교사를 뒤져 봐야 겠군.”

승희는 책들이 빽빽이 꽂힌 서가에서 책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박 신부와 준후는 바싹 긴장하여 별장처럼 보이는 외딴집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박 신부가 속삭였다.

“준후야, 조심해라. 녀석들은 주술뿐이 아니라 기관총 같은 무 기도가지고 있어!”

“예. 알겠어요.”

둘은 현암이 뚫고 나왔던 걸로 보이는 무너진 벽으로 쉽사리 들어갈 수 있었다. 마당은 한바탕 폭풍이 몰아친 것처럼 엉망이 었고, 개 몇 마리가 땅에 반쯤 파묻혀 비참하게 죽어 있었다. 집 안은 불이 켜져 있기는 했지만 무척 적막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자.”

박 신부와 준후는 집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 안도현암과 대사제의 싸움 탓이었던지 꽤 헝클어져 있었다.

“신부님, 마기가 강하게 느껴져요. 질은 낮지만, 악령들이 몇 몇 있는 것 같아요.”

“음, 그래.”

둘이 소곤대고 있는데 갑자기 철컥거리며 움직이는 소리가 났 다. 뒤돌아보니 커다란 서양의 기사 갑옷 둘이 흡사 로봇처럼 걸어오고 있었다.

“이 따위 장난을!”

박 신부와 준후는 갑옷을 하나씩 맡았다. 박 신부의 십자가에 맞은 갑옷의 투구가 벗겨져 나가자, 텅 빈 내부가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갑옷은 팔을 휘둘러 댔고, 박 신부는 간신히 쇠뭉치의 일격을 피했다.

“준후야, 사람이 아니니 사정 봐줄 것 없다!”

준후가 몸을 날리며 번개 한 방을 쏘자 갑옷 하나가 달아오르 면서 몸을 비틀더니 쾅 하며 분해되어 버렸다. 박 신부도 벗겨진 갑옷의 목 부분에 오라력을 집중하자 갑옷은 뒤로 우당탕 넘어 지면서 역시 분해되었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경비를 시키려면 센 것을 부려야지, 바보들!”

“저 정도라도 보통 도둑은 기절하고 말걸? 계속 찾아보기나 하자.”

싱겁다는 듯이 말을 잇던 박 신부가 바닥에서 핏자국을 발견 했다. 아마 현암의 핏자국인 듯했다. 핏자국은 지하실로 이어지 고 있었다. 핏자국을 따라가려고 둘이 막 걸음을 옮기는 순간,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며 여러 사람이 달려오는 소리와 요란한 마이크 소리가 들렸다.

“꼼짝 마라. 경찰이다! 가택 침입 및 상해죄로 체포한다!”

박신부와 준후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경찰이라니?”

“귀신도 아니고 이게 무슨…………….”

박신부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이, 이런 함정이다! 놈들은 우리가 올 것을 예측하고는 경찰에 신고를 했구나. 우리를 묶어 두려고!”

준후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발소리들이 마당을 지나 현관까지 들어오고 있었다.

“현암 형과 승희 누나가 위험해요!”


“응?”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발굴되었다는 점토판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던 승희의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읽던 부분은 길가 메시 서사시 중에서 길가메시가 우트나피슈팀을 찾아가 영생을 얻으려 하는 대목이었다. 영생, 무언가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영 생과 생명의 나무 열매를 먹었다는 뱀의 이야기, 브리트라……………… 

“혹시 그들이 노리는 게 바로 아……….”

별안간 째지는 소리가 옆방에서 들렸다. 승희는 놀라서 얼른 옆방으로 달려갔다.

현암은 아니었다. 현암은 여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소리 를 질러 대는 것은 월향이었다. 월향이 공중에 떠서 귀곡성을 질 러 대고 있었다. 승희는 그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월향이 운다면, 그것은!’

승희는 현암의 태극패를 꺼내 준후가 주고 간 명경부(明鏡符) 를 문질러 보았다. 분명했다. 월향은 경고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 다. 그 사실을 뒷받침해 주듯, 태극패에는 수없이 많은 검은 그림자들이 나타나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사교의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직접 쳐들어오지는 않더라도 아까 박 신부와 준후와 싸웠을 때와 같은 엄청난 주술을 힘을 합하여 쓸 것이었다. 승희는 혼자인데다 현암까지 보호해야 했다. 승희의 몸이 저절로 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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