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1권 – 36화 생명의 나무 7 :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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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국내편 1권 – 36화 생명의 나무 7 : 비밀


비밀

어느덧 긴 밤이 지나 창밖이 부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승희는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어제는 너무도 고단한 하루였다. 기지개 를 켜면서 옆을 보니 준후가 꼭 걸레를 빨아 놓은 모양으로 구석 에 처박혀 아직도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승희는 피식 웃었다. 

‘힘든 싸움이었어. 바루라는 엔키두, 그리고 대사제… ‘

그러고 보니 어제 중상을 입은 그자를 데려와 한 지붕 아래서 밤을 보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그놈이 혹시 무슨 짓을 했으면……….

승희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얼른 일어나 현암과 대사제를 같이 눕혀 놓았던 방으로 가 보니 현암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대사제가 누워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은………….

“욱! 현암 씨!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대사제의 모습은 하룻밤 사이에 믿어지지 않을 만큼 변해 있 었다. 손목은 잘라져 바닥에 따로따로 뒹굴고 있었고, 얼굴은 알 아보지 못할 만큼 검게 타 있었으며, 붕대를 감아 응급조치를 했 던 몸에서 선혈이 번져 나와 있었다. 몸 전체가 미라처럼 바싹 마른 채로 죽어 있었다. 현암은 묵묵히 시체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어제 이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던 흑마술의 주술을 스 스로 풀어 버렸어. 그러면 곧 죽는다는 걸 알면서……”

“주술? 어제만 해도 멀쩡해 보이던데………………”

“아니, 전에 우리들과 싸울 때 입은 상처는 그대로였어. 그걸 강한 주술로 막고있었던 거지. 악인이긴 했지만 그래도…..” 

승희가 낌새를 채고 물었다.

“어젯밤에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얘기라도 나눴어?”

현암은 고개를 돌려 승희의 시선을 피했다.

“역시 인간의 마음이란・・・・・・ 아니, 몰라도 돼.”

현암이 옆에 떨어져 있는 종잇조각을 집어 보고는 승희에게 주었다.

“이 친구 유서야.”

승희는 마구 갈겨써서 알아보기 힘든 글자가 가득한 종잇조각을 받아 들었다.

당신들이 이 글을 읽을 때쯤 나는 아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 이다. 나는 밤새 고민했다. 내가 옳은 판단을 하고 있는가? 나는 옳은 판단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러나 이 방법밖에 다른 수가 없다. 나는 내 몸을 유지시켜 주는 흑마술 의 주문을 거두려 한다. 당신들이 옳았다. 인간은 인간으로 살아 야 한다. 영생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내가 죄를 짓고 있다는 것 을 어제 깨달았다. 이제는 벗어날 수가 없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브리트라여! 내가 위대한 신이 요. 진리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믿어 왔던 그림자에 대한 회의가 들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빌어먹을 신부의 종교에 귀의한다는 따위는 아니다. 하지만 내가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깨 달았다. 인간을 해친다면, 신이든 신 이상의 무엇이든 좋은 존재 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내가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나 자신이 놀랍다. 잊고 있었던 옛날 생각이 들어서였나? 빌어먹을, 그대들 을 저주한다. 나를 나약한 인간으로 돌려놓다니! 미안하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두고 좋은 것을 일러 주겠다. 그대들이 나 약함을 불러일으켜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처럼, 나도 그대들 에게 금단의 비밀을 알려 주어 죽음의 위험에 처하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읽다가 승희가 중얼거렸다. 어느새 박 신부와 준후도 와서 승희의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현암이 중얼거렸다. 

“제법 유머 감각이 있는 친구였군.”

승희는 계속 읽어 내렸다.

그대들의 추리는 반 정도 맞다. 우리가 섬기는 브리트라는 고 대부터 내려온 위대한 신의 한 면모로서, 브리트라의 형상이 뱀 의 모습을 띠고 있는 이유는 뱀이야말로 모든 동물 중에서 생명 의 근원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준후가 신음 소리를 냈다.

“맞아요. 묘길상님(문수보살)께 점으로 물었을 때도 ‘뱀은 허 물을 벗고 계속 태어난다’는 대답을 주었어요!”

우리, 즉 소미와 나는 성경에 나와 있는 에덴동산의 이야기에 주목을 했다. 그러다가 에덴동산에 열린 두 가지 나무, 선악과와 생명나무에 대해서 강한 흥미를 갖게 되었다. 성서에는 뱀이 인간을 꾀어 선악과를 먹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많은 연구 결과 우리는 그 내용이 실은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박신부가 중얼거렸다.

“프레이저의 이론이로군.”

즉, 원래 신은 스스로의 모습을 본떠 만든 인간에게 영생을 주 기 위하여 생명의 나무 과실을 먹게 할 의도였으나, 전령 역할을 맡은 뱀이 바꿔치기 하여 자기가 생명나무의 과실을 취하고 인간 에게는 대신 선악과를 먹게 한 것이다. 이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 아들일 수는 없지만 은유로 묘사되어 오랫동안 내려온 비밀이 있 을 거라고 우리는 단정 지었다. 그래서 소미와 나는 독일을 거쳐 고대 바빌로니아의 유적이 있는 근동으로 향했다.

승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대사제라는 남자, 임소미라는 여자와 원래 잘 알았나 봐요.”

원래 유대교의 경전인 성서가 바빌론의 주술적 관점과 세계 창 조에 대한 관점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 는 사실이다. 이후 기독교에서는 바빌론의 지식을 이단이나 사악 한 것으로 몰아붙이면서 말살시켰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을 두려 워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빌론에 뭔가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천신만고 끝에 우리는 바빌론의 옛 유적들을 거의 도굴하다시피 뒤질 수 있었고 드디어 귀중한 카발라의 단서를 잡 아내는 데 성공했다. 바빌론에서 만난 바루인 엔키두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엔키두는 나이가 사백 살이 넘었다고 했다.

“사백 살?”

그 카발라의 내용은 해석하기가 극도로 힘들었다. 그건 생명의 나무를 그려 놓은 한 장의 도안일 뿐이었다. 생명의 나무란 아까 현암, 네가 짐작했듯이 열 개의 계율을 지닌 유대교 카발라의 율 법의 나무를 역으로 구성한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거기에 라틴 어로 ‘십자가의 생명나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를 해석하기 위 해 온 힘을 다했다.

박신부가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아보르 비타에 크루치피크사에 (십자가의 생명나무)…….”

현암도 잠시 한숨을 쉬더니 액자를 가리켰다.

“저도 봤습니다. 저기 적어서 감춰두었지요. 지금은 쓸모없게 되었지만……”

준후가 독촉했다.

“계속 읽어 봐요!”

소미와 엔키두는 해석을 위해 소아시아, 히타이트, 페니키아 등 여러 지역을 찾아 헤매었고 나는 유럽의 흑마술계와 마술학파 내에서 단서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연구를 해 나갔다. 나는 단 서가 유럽으로 넘어갔을 것으로 추정했고, 그들은 근동을 고집했 다. 나는 영생이라는 점에서 생 제르망 백작 이야기에 주목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구체적인 단서를 찾지 못한 채 지쳐서 다 시 모였다. 그때 우리의 신비주의에 대한 실력은 대단한 경지에 달해 있었고 또 갖가지 술수를 익힌 후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영생의 비밀은 풀 수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갑자기 문제가 해 결될 기미가 보였다. 그 도안을 뒤집어 불에 비추었을 때, 우리는 역으로 뒤집힌 것이 아닌, 좌우가 바뀐 율법의 나무를 보게 되었 다. 거기에서 아나그램(anagram)*을 이용하여 우리는 생명나무 의 도안이 실은 매우 복잡한 것으로, 각기 다른 세 개의 유파의 비 전을 결합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또 그 흐름은 꾸불거리는 뱀의 모양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나오는 신의 이름을 베다에 나오는 악한(그러나 세상에 과연 절대적인 선과 악이 있는가?) 지혜의 신, 브리트라의 이름을 붙였다. 이 신이야말로 성경에 언급된, 생명나무의 과실을 취할 지혜를 가진 신이었으니까. 첫째 유파는 역시 바빌로니아의 마르둑 신앙에 의한 것으로 생명나무 의 창시에 따른 것이었다. ‘창시’란 갓 태어났고 만물의 기원이 됨 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를 검토해 보고 여기에 해당하는 세 개의 율법의 희생으로 바빌로니아와 전혀 상관없는 이방인의 신생아 세 명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해석했다.


* 한문의 파자와 비슷한 것으로, 영어의 철자를 분해, 재배치하여 해독을 어렵게 만드는 것, 또는 그렇게 바꾼 단어를 뜻한다.


승희가 신음했다.

“윽! 신생아라니!”

박신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페니키아의 신앙이었지. 악신 몰록을 섬기는 최고의 제 물은 신생아…………. 그것을 다시 바빌론의 점술과 결합하여 간을 이용한 것이로군.”

승희가 다시 읽기 시작했다.

두 번째 유파는 아시리아의 전사 신 아슈르의 힘으로 이어졌 다. 전사 신의 능력은 힘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검토하고 이를 위 해서는 힘, 즉 젊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시 아 시리아와 전혀 상관없는 젊은이 세 명의 샘플이 필요했다.

“바빌로니아는 근동이었고, 아시리아는 서쪽의 아리안에 가까운 족속이지 않나?”

박신부가 중얼거리자준후가 물었다.

“그런데 왜 이방인을 바쳐야 한다고 했을까요?”

“아마 희귀한 것, 또 정복을 상징하는 의미겠지.”

세 번째 유파는 기이하게도 기독교의 이단인 성당 기사단과 관 련이 있었다. 이 부분은 십자가를 고문 도구로 여기는 행위에 대 한 말이 많이 나왔다. 십자가는 죽음의 상징이다. 우리는 여기서 또한 성당 기사단과 관계가 없는 이방인 중 노인 세 명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신생아, 젊은이, 노인・・・・・・ . 준후야, 대사제의 지하실에서 보 았던 시체 기억하지? 모두 목적이 있었던 거였어.”

준후가 박 신부의 말을 듣고 기억을 되살리자 비위가 뒤집히 려고 했다. 승희의 얼굴도 하얗게 질려 토할 기색이었다.

마지막, 중앙에 한 자리가 비었다. 이걸 만든 자들은 필경 중 세의 악마파나 마술학파의 일원으로, 이렇게 아홉 자리를 채우고 중앙을 완성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이 마지막 남은 자 리, 율법의 나무에서는 티페레트(Teferet)의 자리를 채울 희생물 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국, 티페레트

가 뜻하는 광휘에 힌트를 얻어 강력한 인간, 즉 보통 사람 이상의 힘을 지닌 주술사의 간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테트라 그 라마톤이나 카발라의 해석으로도 그런 결과가 나왔다.

박신부가 어둡게 말했다.

“정말 무시무시하군.”

하나 남은 문제는 신성한 제의를 위한 이방인을 구할 장소를 찾는 것뿐이었다.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성당 기사단과 전혀 관 련이 없는 곳…………. 그곳은 극동뿐이었다. 그곳은 피도 섞이지 않 았을 것이고 이들 신앙과도 전혀 관계가 없었다. 또 무수히 많은 종교가 횡행하고, 그런 것들이 포용될 수 있는 신들의 땅이었고, 우리의 고향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 왔고, 그 이후의 일들은 그대들이 더 잘 알리라 믿는다.


*광휘를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창의력과 상상력을 상징한다고 한다. ** 테트라 그라마톤 또는 테트라 그라메이션은 원래는 신의 이름으로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지는 것이었다. 현대의 성서에서 보통 예호바 또는 여호와로 알려진 신의 이름은 히브리어의 네 글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네 문자는 yod, he, vaum, he로 영어에서는 YHVH로 옮겨진다. 원래 이 말의 일반적인 뜻은 ‘그는 존재한다’였으며 이 네 글자를 바탕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해석하고 풀어 나갈 수 있다고 믿어졌다.


승희의 목소리가 떨리며 말을 더듬거렸다. 나머지 셋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아기를 첫 번째 제물로 바쳤다. 아아, 소미와 엔 키두의 제의였고 나는 그걸 막지 못했다. 그 일만 아니었다면, 그 일이 나를 계속 괴롭히지만 않았더라면, 내가 죽더라도 이 비밀 을 그대들에게 남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이런!”

“자신의 자식까지!”

나는 괴로웠지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결국 하나가 모자라게 되는 법. 나는 그 사실을 잊기 위해 수없이 잔인한 짓을 벌였다. 마치 그것을 보상하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나 이제 정신이 든 듯하다. 소미를 구해 다오…………… 그대들에 게 남기는 마지막 부탁이다. 어제, 여기 쳐들어올 때만 해도, 나 는 오로지 소미가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밖에 없었 다. 그러나 아니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혼자 카발라를 되씹어 보았다. 전혀 다르게, 인간의 관점에서…………. 그 괘는 분명 영생을 가리키고 있었으나, 그것은 인간의 영생이 아니었다.

“음?”

“아니, 어서 읽어 봐, 승희야! 어서!”

우리는 몰랐다. 영생을 얻겠다는 욕심에만 사로잡혀 해석이 근 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걸 몰랐다. 아, 이젠 힘이 없다. 손을 움 직이기가 힘들다. 현암에게 직접 말하고 싶지만 그를 깨우기에도 벅차다. 그의 식은…….

“뭐라고 썼어. 응?”

“글자가 희미해서 읽기가 힘들어요! 손에 힘이 빠졌나 봐요.

여기부터는…………….

“이리 줘!”

현암이 종이를 승희에게서 받아 기력을 눈에 집중해서 색깔조 차 전혀 없는, 펜이 긁은 자국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마 주술 이 풀리면서 극도의 고통, 그보다는 주술로 붙였던 손이 막 떨어 지는 순간에 쓴 모양이었다.

“의식은…… 브리트라………… 뱀의 환생…….”

박신부가 의자 팔걸이를 으스러지게 움켜쥐며 신음하듯 외쳤다. 준후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뱀의 환생이라고?”

“구했는지 몰라도………… 주술사의 간………………”

“주술사의 간을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하는 뜻이군! 그다음은?”

“의식은……… 바로 내………… 내일!”

넷은 망연히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사제가 죽기 직전 행한 괘가 맞다면, 대신 브리트라, 아니 거대한 뱀의 화 신인지 악마인지 모르는 악신이 이 땅에서 부활하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의식은 바로 내일이었다.

“야단이군! 더 써진 것은 없나?”

“뭔가 더 쓰려 한 것 같지만 없어요.”

준후가 멍하니 말했다.

“그런데, 그 장소가 어딜까요?”

넷은 하얗게 질린 서로의 얼굴만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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