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1권 – 6화 측백 산장 1

퇴마록 국내편 1권 – 6화 측백 산장 1

“아홉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동안 소왕산에서 폭풍으 로 인해 연락이 두절되었던 신라대학교 등반대원 일곱 명이 오 래전에 폐쇄된 까치봉 정상의 측백 산장에서 전원 변사체로 발 견되었습니다. 경찰은 수법의 잔인함으로 보아 원한에 의한 살 인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이들이 발견된 측백 산장이 첩첩산중에 외따로 있고, 또 산장이 위치한 까치봉이 당초 이들이 등반로로 잡았던 옥녀봉과는 십이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는 사실로 미루 어 피해자들이 등반 도중에 누군가의 인도로 진로를 바꾸었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고 우발적인 범행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경찰은 그날 소왕산에 등반했다는 삼십 대 남자들에 대해서 수사를 계속……”

뉴스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현암은 리모컨을 거칠게 눌러 TV를 꺼 버리고 소파에 몸을 묻었다. 옆에서 기회를 엿보던 준 후가 게임기 케이블을 재빨리 TV에 연결하더니 오락을 시작했 다. 처음 준후를 데리고 박 신부의 빈 아파트에 왔던 삼 년 전에 비하면, 이제 준후는 거의 보통 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주민 등 록 신고를 하지 않았을뿐더러 준후가 사람 많은 것을 극히 싫어 해서 이상한 짓(애들과 놀다가 귀신을 불러서 기절시킨다거나 하는)을 많이 했기 때문에 학교에 보낼 수는 없었지만, 요즈음 준후는 세상사에 익숙해져 컴퓨터에 게임기까지 섭렵하고 있었 다. 현암은 오락에 빠져 있는 준후를 바라보고 고개를 저으며 빙 긋이 웃다가 물었다.

“네 생각은 어때?”

현암은 박 신부와 함께 신문에서 측백 산장의 괴사에 대한 기사 를 읽고 이상한 감을 잡았으나, 아직 준후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예? 뭘요?”

준후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되물었다.

“방금 뉴스에 나온 산장 사건 말이야. 남녀 일곱이 잔혹하게 떼죽음을 당했다는 사건”

“글쎄요? 앗, 죽었다!”

후는 한눈을 팔다가 자신의 우주선이 뻥 하고 터지자 인상을 찌푸렸다. 현암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이거 이상하지 않니?”

“예? 예. 물론 말이 안 되죠.’

“준후야, 그렇지? 나 좀 도와줄래? 내 한번 추리를 해 볼 테니.”

준후는 아쉬운 듯 게임기를 밀쳐 두고 현암에게 돌아앉았다. 

“경찰의 발표로는 산장에서 일곱 명의 남녀를 묶지도 않고 참 혹하게 때려죽인 범인이 불량배나 정신이상자일 것으로 생각하 고 있대. 아니면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거나. 허나 일곱 명의 피해자들은 대학생이지. 등산 동아리 모임으로 산에 간 거였어. 그들 모두를 죽이고 싶을 만큼 원한에 찬 사람이 있을까? 일곱 명의 선량한 대학생이 전부 공통으로 원한을, 그것도 죽음을 당 할 만큼 심한 원한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있겠어?”

“그건・・・・・・ 한 사람을 죽이고 증인을 없애려고 그럴 수도…….” 

“아니지. 원한이 있는 한 사람을 해치고 증인을 없애기 위해 다른 여섯 명이나 되는 사람을 해쳤다면 일곱 명을 모두 그렇게 잔인하게 처리했을 리 없어. 원한 산 사람은 잔인하게 처리했을 지도 모르지만, 나머지 여섯은 그냥 죽이는 것으로 끝냈을 거야. 정신병자의 짓이라 보더라도 말이 안 돼. 심한 정신병이나 도착 증에 의한 살인이었다면, 역시 한두 사람을 해치는 것으로 지쳐 버릴 테고 그쯤에서 정신적 위안을 얻게 되어서 중단하게 되지. 특히 그런 살인은 성도착적인 행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다수 인데, 남녀가 섞여 있는 상황……”

현암은 말을 잇다가 멍하니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준후의 나이가 이제 열두 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도록 하자. 준후야, 너는 어떤 미친 녀석이 일곱 명이나 되는 남자, 아니 남자 다섯 명과 여자 두 명이라고 했지? 그 사람들을 묶지도 않고 반항의 흔적도 없이 앉은 자리에 서 두들겨 패 죽이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니?”

준후가 이제야 알아듣겠다는 표정을 했다.

“아뇨. 그러면 몇 명은 도망가거나 저항하려 할 테니까 힘들죠.”

“맞아.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벌어질 수 없는 일이야. 경찰의 발표는 너무 간략해서 박 신부님이 자세히 알아보려 가셨지만, 결과는 뻔해. 이건 분명 사람의 짓이라고는 볼 수 없어. 그 일곱 명은 뭔가에 씌인 것에 틀림없지. 분명 원한령(怨恨)의 짓이 야. 그것도 아주 강한…………….”

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령이라. 그러면 가능하죠. 그런데 박 신부님이 알아보러 가셨다고요? 어디로요?”

“부검 담당하는 분을 찾아가셨지. 의대 동기셨대. 너도 본 적 이 있잖니? 장창열 박사라고, 법의학 하시는 분 말이야.”

“아하, 그분요?”

“그래. 이거 좀이 쑤시는군. 만약 죄 없는 일곱 명의 목숨을 빼 앗은 것이 정말로 원한령의 짓이라면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당장 쫓아가서 박살을…….”

준후는 현암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피해자 중에 여학생이 둘 이나 있었다는 것이 현암을 유달리 흥분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언젠가 들은 일이 있던, 현암의 여동생 현아 때문인 듯했다. 준 후가 보기에 현아의 영은 이제 현암의 수호령이 되어 있는데도, 현암은 끔찍했던 고통의 기억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었다.

현암의 품속에서 작은 신음 소리가 났다. 월향검(月)이 우 는 소리였다. 현암은 그 작은 칼을 오래전에 얻었다고 했다. 귀 신이 깃들어 엄청난 능력을 가진 칼이라고만 알고 있을 뿐, 준후 나 박 신부마저도 그 칼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알 수도 없었다. 아무튼 현암은 월향검을 얻은 이래로 끔찍할 정도로 애지중지했 다. 월향이 울고 있다니…………. 준후는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현 암을 걱정스레 올려다보았다. 장맛비가 서울까지 올라온 듯 먹 구름 너머로 번개가 날름거리더니 집 안에 번뜩거렸다.


“아이고, 우리 아들은 안 돼!”

“이놈들아, 사람을 두 번 죽이겠다는 거냐?”

부검을 반대하며 악을 쓰는 유가족들을 경찰들이 제지하고 있 었다. 사이를 간신히 헤집고 들어온 박 신부는 옷에 묻은 물방울 을 툭툭 털어 냈다. 부검을 맡은 장창열 박사와는 예전부터 막역 한 사이였고, 이번에 고인들을 위한 의식을 박 신부가 주관하기로 한 터였다. 이런 기이한 사건의 희생자 처리엔 으레 박 신부가 나서고 있었는데, 단순히 기도를 올리는 정도가 아니라 의견 을 나누며 사인을 짚고 가끔은 영사(靈)도 행해서 장 박사를 돕곤했다.

‘이번에는 일곱 명, 그것도 전부 젊은이들. 채 피지도 못한 젊 은이들이 일곱 명씩이나…………….’

박 신부의 머리에는 잊을 수 없는 소녀, 미라의 얼굴이 또다시 떠올랐다.

‘이래선 안 돼. 부질없는 옛일 따위는……’

소녀의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안 돼, 더 이상은.’

소녀의 얼굴이 아련히 멀어져 갔다.

‘미라야, 미안하다.’

박 신부는 걸음을 멈추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크레졸과 포 르말린 냄새가 풍기고 그보다도 한층 심한 죽음과 고통의 냄새 가 가득 차 있는 안치실에 들어올 때는 항상 과거에 고통받고 죽 어간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곤 했다.

‘내가 조금만 더 일찍 힘을 얻었어도…………..’

지난 일을 후회할 필요는 없다. 박 신부는 앞으로의 노력이 문 제라고 생각을 고쳐먹으면서 과거의 어두운 기억을 애써 지웠 다. 박 신부가 심호흡을 하는 순간 장 박사가 나와 박 신부를 맞았다. 

“여기네.”

언제나 그렇듯 장 박사는 표정 하나 없는 특유의 얼굴로 박 신 부를 대했다. 방 안에는 널찍한 단이 있었고 그 위에 흰 천으로 덮인 일곱 구의 시체가 있었다. 장 박사가 시체를 덮고 있던 흰 천을 들어 올렸다.

얼마 전까지 활기에 넘쳤을 젊은 남자의 얼굴은 온통 멍과 긁 힌 상처로 가득했으며 온몸의 뼈가 뭉개져 있었다. 박 신부는 눈 살을 찌푸렸다. 그는 비닐장갑을 낀 손으로 사체 여기저기를 검 사하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박 신부가 입을 열었다.

“이건 마치 낙석 더미에 깔린 것 같지 않은가?”

“낙석 집 안에서 말인가?”

“물론 그럴 리야 없지만, 예전에 내가 광산 마을에 있을 때 이 와 비슷한 상처를 입은 사람을 보았어. 오십 미터 이상의 절벽에 서 쏟아진 큰 자갈더미에 깔렸는데 전신이 으깨어졌지. 성한 곳 이 하나도 없었어. 이 사체는 그것과 흡사하군.”

“현장 사진을 보면 사체 주위에 돌무더기들이 좀 있었지만, 그렇게 많은 양은 아니었어.”

“그냥 그렇다는 걸세.”

박신부는 시신의 팔 주위를 눌러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사체도 마찬가지인가?”

“대부분 그래. 하지만 이쪽에 누운 두 여자와 한 남자는 조금 달라. 특이한 상처가 있어.”

장 박사는 다섯 번째 시신의 흰 천을 들췄다. 그 시신은 앳되 어 보이는 여자였는데, 몸의 외상은 앞서 남자들과 비슷했다.

“글쎄, 어디 내부적으로 다른 곳이 있나?”

“응. 사망 직전에 성폭행을 당한 흔적이 있네.”

“성폭행?”

“윤간당한 것 같아. 다른 한 여자도 비슷하고, 나는 그래서 이 이들이 한 무리의 정신병자들의 소행이라고 생각하는 걸세. 그 래서 경찰에게도 그렇게 이야기했고.”

한 무리의 정신병자라? 그런 정신병자들이 깊은 산속을 헤매 고다니다가 등반대를 최면술로 꾀어낸단 말인가?”

“최면술?”

“이 표정들을 보게. 고통을 느낀 흔적이 없지 않은가? 이 사람 들은 돌과 같은 단단한 물체로 전신을 난자당해 죽었는데 고통 의 표정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는가?”

“한방에 즉사했을 가능성도 있네. 그다음에 난자당했다고 해 석할 수도 있지. 그리고 저 여자들은 팔목에 포박했던 흔적도 있다네.”

박신부는 여자들의 시신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난 납득할 수가 없어. 여자들이 포박을 당했다면 남자들이 가만있었겠나? 아니, 남자들이 먼저 죽었다고 하세. 그런데도 저 여자들의 얼굴에는 고통의 표정이 없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또 뭐가 문제인가?”

“사람이 죽어도 꽤 긴 시간이 지나기 전에는 생전의 기억이 단편이라도 남아 있는 법일세. 영사를 해 보면 알 수 있지.”

“자네에게 도움을 받은 일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아직 그런 것을 믿지 않네. 의사니까…”

“잠자코 들어 봐. 그런데 이 시신들에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그게 뭘 말하는지 아나? 이들의 영혼은 죽기 전에 이미 몸 에서 빠져나가 버린 거야. 내가 맨 처음 시신을 보고 놀란 것도 그 때문이었네.”

장박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시신도 있네. 마지막 시신을 보게. 고통 에 찬 표정을 짓고 있어.”

박 신부는 마지막 일곱 번째 시신으로 눈을 돌렸다. 건강해 보 이는 남자의 시신이었는데, 머리 뒷부분을 육중한 둔기로 맞은 듯 두개골이 함몰되어 있었다. 온몸에는 역시 외상이 많았는데 고통의 표정이 얼굴에 역력히 남아 있었다.

“응? 손이 왜 이렇지?”

박신부는 장 박사에게 일곱 번째 시신의 손바닥을 가리켰다.

손바닥이 너덜너덜하게 헤어져 있었다. 장 박사는 그것만은 잘 모르겠다는 듯 양손을 머쓱하게 치켜 올렸다. 박 신부는 의아했 던지 기도력을 모아 영사를 행하기 시작했다.

현암은 빗속을 뚫고 과속 카메라마저 무시한 채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준후에게 말도 하지 않고 혼자서 측백 산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준후야, 염려 마. 신부님 오신 후 같이 가는 게 좋겠지만 예감 이 이상해. 좀이 쑤셔서 기다릴 수도 없고. 그리고 생각해 보니 그곳에 있는 사람들 역시 위험해’


현암은 액셀러레이터를 밟은 발에 힘을 주었다.

‘아마 나 혼자서도 박살 낼 수 있을 거야. 원한령이나 지박령 (地)의 소행일 테니까……………’

현암은 준후와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추리를 마무리 지었다. 등반대는 폭풍우를 피해서 산장으로 들어간 것이 틀림없다. 거 기서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던 원한령에게 당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현암은 잠시 바람도 쐴 겸 집 밖으로 나왔다.

*특정한 이유가 있거나 아니면 본인의 원한 또는 자신이 죽은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등등의 이유로 승천하거나 환생하지 못해 일정한 장소에 붙어 있는 영, 이 러한 지박령은 시간의 경과를 느끼지 못하고 죽기 직전에 행했던 행동들을 반복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문득 현장에 득시글거리고 있을 경찰이며 수사관들에게 생각이 미쳤다. 그들까지 희생된다면? 그런 생각이 들자 현암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경찰이라고 귀신들이 봐줄 리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성질이 급한 현암은 즉시 자신의 고물차를 몰고 측백 산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준후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현암은 혼자서 측백 산장으로 간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람 쐬러 나간다는 사람이 어 째서 아직도 오지 않겠는가? 그것도 비오는 날에 말이다. 준후는 현암의 기운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 기운은 몹시 흥분한 상태로 멀어졌다.

준후는 일곱 번째의 촛불을 켜고 막 주문을 외우려는 참이었 다. 이것은 과거 해동밀교에서 을련 호법에게서 배운 강신술이 었다. 평소 박 신부와 현암 등은 준후가 주문으로 신의 힘을 빌 리는 것은 괜찮다 했지만, 직접 영을 불러내는 것만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특히 현암은 그런 짓을 자꾸 하면 명이 깎이거나 수호령이 떨어지게 된다고 화까지 냈으나, 이번 경우는 그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현암이 무엇과 마주치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영사를 해 보아도 먹장 같은 막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점을 쳐 보아도 뱅뱅 도는 괘(卦)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 런 일은 흔하지 않았다. 몇 년을 통틀어 두세 번, 아주 위험했던 경우나 대단히 강한 영과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만 점괘가 뱅뱅 돌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영을 직접 불러 상대의 정체를 알아낼 생각이었다. 주를 외우기 시작하자 촛불 가운데 그린 도 형이 마치 물 위에 놓인 듯이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박신부는 나직한 소리로 기도문을 외우며, 일곱 번째 남자의 이마에 두 손가락을 짚고 영사를 시도했다. 숨을 거둔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의당 생전의 기억이나 임종시의 정경이 약간은 보일 듯하건만 앞의 여섯 명의 시신에는 아무런 영의 흔적도 남 아 있지 않았다. 마치 죽은 지 몇 달 이상 지난 것처럼. 박 신부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런데 일곱 번째 시신에서는 느낌이 있었 다.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져서 흐느낌 같은 흔적만 간신히 남아 있었지만…………….

‘고통, 지독한 고통이다. 슬프기도 하고, 가슴이 미어질 듯한 슬픔과 분노, 그리고 또 고통, 반항……. 무엇에 대한 반항이지? 무슨? 슬픔, 고통, 애착심…………. 아끼는 것, 가장 소중한…… 으 응?’

박신부는 놀라움에 시신의 이마에서 손가락을 떼어 냈다.

‘환령을 당했구나!’ 


[*영이 뒤바뀌는 현상. 주로 어떤 목적을 가진 영이 피해자의 영을 쫓아내고 육체 속에 대신 들어앉는 것으로, 서로 다른 영이 육체 한 구석에조차 머물지 못하고 완전히 쫓겨나게 된다는 점에서 빙의(憑依)와 구별된다.]


장 박사는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으나 박 신부는 아무 말 없 이 화급하게 전화 쪽으로 달려갔다. 장 박사가 화난 듯 소리쳤다. 

“이봐, 신부! 검시만 하고 마지막 기도문을 왜 올려 주지 않 나? 자네의 본분이 뭐야. 응?”

박 신부는 꼬장꼬장한 장 박사가 귀찮았다.

“안식시켜 주려고 해도, 그 시신에는 안식시켜 줄 영혼이 없다

“네!”

장박사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안경 너머로 눈만 찡 그리고 있었다.


현암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급브레이크를 밟아 간신히 차를 멈추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길 앞에는 장맛비 때문인지 머리통 만한 돌덩어리가 뒹굴고 있었다. 차가 돌을 밟았다면 미끄러지 거나 튕겨져 절벽 아래로 굴렀을지도 몰랐다.

‘왜 이러지. 내가?’

벌써 이런 일이 몇 번째인가. 정신이 아득해지다가 중앙선을 침범하여 맞은편에서 오는 트럭과 정면충돌할 뻔하기도 하고 눈 앞에 아른거리는 죽은 동생의 모습에 소스라치다 정신을 차리면 큰 나무 앞에 서 있기도 했다.

‘왜 현아 생각이 자꾸…………… 왜 현아가 나타나는 걸까?’

현암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현아의 영은 이제 현암의 수호령이

되어 있다고 준후가 알려 준 적이 있었다. 현아의 영이 자꾸 작용 한다는 것은 현암에게 위험한 일이 일어나려 한다는 암시였다. ‘그래, 그렇다면 차가 똥차라거나 내 운전 솜씨가 엉망이어서 가 아니라 어떤 녀석이 나를 자꾸 개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뜻이 군. 설마 그 산장에 있는 녀석이? 그럴 리가 아직 반도 안 왔는 데 이 먼 곳까지?’

그러고 보니 어느덧 현암은 소왕산 부근까지 와 있었다. 시간 이 잠깐밖에 흐르지 않은 것 같은데. 현암은 갑자기 음산한 기운 을 느꼈다. 영이 나타날 때 생기는 특유의 현상이었다.

“음. 누군가의 영이 근처에 있다.’

현암은 몇 차례 심호흡을 하고 단전 부근에 기를 모았다. 일반 적으로 영은 불멸의 존재로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도 않다. 인간 에 비해 수명도 엄청나게 길고, 순수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어 일 반적인 물리력으로는 피해를 줄 수 없지만, 순수한 영력을 손과 발이나 칼 같은 물체에 실어 보내면 영에게도 타격을 입히거나 심지어 소멸시킬 수도 있다. 옛 고승이나 은둔자는 생각만으로 도 사념을 구체화시켜 잡령을 제압했다지만, 현암은 과거 도혜 선사가 물려준 엄청난 내력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아직 혈도를 치유하지 못해 간신히 오른손과 월향을 통해서 기공력을 응축시 키고 검기를 발할 수 있었다. 월향은 우연히 얻게 된 작은 은장 도처럼 생긴 단검이었다. 월향이라는 이름의 여인이 소지했던 칼인 것으로 현암은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여인의 한과 혼이 봉인되어 있는 귀검鬼劒)이었다. 위험한 물건이기는 했지만 현암 은 월향에 대단한 애착을 보여 늘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차를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전원이 나간 듯 와이퍼가 멈추더 니 실내등마저 꺼져 버렸다. 이어서 창에 쏟아지는 빗줄기가 이 상하게 뭉치더니 천천히 어떤 형상으로 변해 갔다. 현암은 조용 히 숨을 들이마시며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오른손에 기공력을 모았다.

느닷없이 앞 유리창의 물방울들이 역류하여 빙글빙글 섞여 돌 더니 뚜렷한 얼굴 형상을 만들어갔다.

‘데스마스크(Death Mask)*……. 특이한 형태로군.’

현암은 의식을 집중하여 정체 모를 영을 향해 선수를 치려 했 다. 그러자 유리창의 얼굴이 그의 마음을 향해 전하는 소리가 들 려왔다.

어서 오게나.

준후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일곱 개의 초 중 다섯 개는 질 펀히 녹아 깜박거렸고, 하나는 불이 꺼져 뻣뻣이 굳어 있었다.

[* 일종의 지박령에 의한 현상으로, 죽은 자의 얼굴이나 모습이 창문, 유리, 사진 에 붙박여 시각화된 모습.]

나머지 하나만이 천장에까지 닿을 듯 엄청난 불꽃을 뿜어 대고 있었다. 바닥의 도형은 일그러져서 금방이라도 지워질 듯하더니 원래의 모습으로 서서히 되돌아갔다. 그와 함께 준후의 몸에 강 신했던 영이 빠져나갔다.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준후의 입에서 긴 한숨과 주문의 끝을 나타내는 탄식이 새어 나오자 마지막으로 타들어 가던 촛불이 사그라져 보통 크기로 변했다. 바닥에 그려진 도형을 손바닥으 로 문질러 지우며 준후는 수화기를 들었다.

“준후야? 나다. 현암군 있니?”

“아, 신부님! 큰일 났어요. 현암 형이 혼자 소왕산으로 간 것 같아요.’

“이런 이런 걱정했는데. 혼자서 무슨 배짱으로. 또 성질이 발 동했구먼!”

“산장의 수사관들을 염려하는 것 같아요! 큰일이에요! 이번 산장에서 사람을 죽인 놈들, 예사 것들이 아녜요.”

“그런 것 같다. 환령 능력이 무척 뛰어난 원한령이야……………. 응? 근데 너 뭐라고 했지? 예사것들이 아니라고?”

“들이라면, 여럿이란 소리냐? 말해 봐, 준후야!”

“예. 아홉, 아홉이나 되는 악령들이………….”

“뭐? 현암 군이 큰일이구나. 어서 우리도 그리로 가야겠다. 그런데 너, 어떻게 알았지? 또 영을 불러 물어봤니?”

“……예. 현암 형이 하도 걱정이 되어서. 영사도 안 되고 …”

“준후야, 준후야! 아멘…………. 그런 짓 자꾸 하면 아무리 너라도 위험하다고 내가 몇 번이나 그랬니? 직접 영을 불러 몸에 씌우다 가는 잘못하면 큰일 난단 말이다!”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아무튼 내 곧 그리로 가마. 네가 꼭 필요해. 투시력이 있는 사 람은 너뿐이니까. 준비 단단히 하고 있어라!”

박 신부의 전화가 끊겼다. 준후는 혀를 날름하며 하나밖에 남 지 않은 촛불을 보며 소리쳤다.

“신부님은 자꾸 뭐라고 그래. 넌 착하지, 그렇지? 하여간 고마웠어!”

촛불이 웃는 듯이 너울거리더니 조용히 꺼져 갔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퍼붓는 빗줄기 속에서 현암의 차 유리에 엉겨 있는 영상이 점점 또렷해져 갔다.

꼭 이리로 올 생각인가? 환영하네. 지옥문으로 들어섰다는 건 알고 있겠지?

흐릿한 울림이었다. 영과의 대화는 의식을 열고 하지 않으면 스스로의 사념에 왜곡되어 제멋대로의 뜻으로 바뀌기 쉽다는 건 익히 알고 있던 바였지만, 이 영의 경우에는 현암이 의식을 집중해도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여럿의 목소리가 동시에 웅웅거렸기 때문이다.

“흥. 난 지옥 좋아하거든?”

현암은 영을 놓치지 않기 위해 손의 기공력을 서서히 풀었다.

자네에 대해서는 금방 알 수 있었네. 상당한 조예를 쌓았더군. 웬만 한 잡귀는 얼씬도 못하겠지.

“근데 왜 너는 얼쩡거리지?”

현암은 품안의 월향으로 손을 뻗었다. 예전에 월향을 얻을 때 에 한 번 사용하고 이후에는 위력이 너무 엄청나서 여간해서 쓰 지 않던 물건이었다.

그런 장난감은 꺼내지 말기로 하세. 자네 시험을 한번 받아 볼 텐가?

품으로 들어가던 손이 덜컥 멈추더니 품에서 서서히 밀려 나 왔다. 뒤늦게 기공력을 발해 보았으나 힘이 손으로 들어가지 않 고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실수였다. 공력을 돌려서 보호를 하 고 있었어야 하는데 현암은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움켜쥐었으 나 오른손은 엄청난 힘으로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윽, 굉장하다!’

오른손의 색이 푸르게 변했다. 피부 밑에서 뭔가 불룩불룩 움 직이는 것이 움켜쥔 왼쪽 손아귀에 느껴졌다. 현암의 오른손은 어마어마한 힘으로 현암의 목을 향해 뻗어 갔다.

‘크윽!’

앞좌석이 뒤로 휘청 젖혀지면서 현암은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이대로는 죽는다.’

현암은 오른손으로 계속 목을 졸리면서 왼손으로 품 안에서 월향을 찾았다. 월향이 손에 닿는 순간…………

꺄아아악!

월향검이 울었다. 귀신을 벨 때에 내뱉는 귀곡성(哭聲)이었 다. 현암의 왼손에도 이미 마기(氣)가 침투한 것이 분명했다. 왼손이 시큰하더니 점점 감각이 없어지고 의식이 가물거리기 시 작했다. 흐려지는 시야에 자신의 왼손마저 꾸물거리며 품 안에 서 기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푸르게 변해 불룩거리는 손이……………. 두 손이 한꺼번에 목을 조이자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기공력으 로도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현암의 목이 뒤로 꺾어지면서 거 울에 현암의 얼굴이 비쳤다. 현암의 얼굴도 푸르게 변해 가고 있 었고 눈자위 밑이 불룩거리며 일어나고 있었다. 순간 현암의 뇌 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왜 내 손이 닿았을 때 월향이 울었을까? 월향은 영과 접촉했 을 때만 운다. 그러면 손에 악령이…..’

이제 손뿐만이 아니었다. 솜에 서서히 물이 번지듯 야릇한 무 감각이 하반신에서도 번지기 시작했다.

“이놈들이 환령을 하려는구나! 그런데 어째서 각각 다른 곳에 서 감각이 없어지기 시작할까? 놈이 침투하는 부근부터 번져 나가는 것이 정상인데……. 내 몸을 파고드는 것은 한 놈이 아니다!’ 현암의 목은 사정없이 죄이고 있었고, 무감각은 단전 부근까 지 침투해 들어왔다. 단전마저 침투당하면 그나마 저항하고 있 는 기공력도 깨져서, 목을 누르는 강한 힘에 단숨에 목이 부러질 지도 모른다. 시간이 없었다. 현암은 마지막 힘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몸 구석구석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갈(喝)!”

폭풍과도 같은 기운으로 바뀐 기공력이 전신의 모공(毛孔)에 서 뻗어 올랐다. 푸른 기운이 급류에 휩쓸리듯 휘르르 밀려 나갔 다. 몸의 감각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현암은 눈을 부릅뜨고 조 각으로 나뉜 푸른 기운의 수를 세었다. 넷이었다. 현암은 한 모 금 숨을 들이마시며 왼손으로 월향을 꺼내고 오른손에 기를 모 았다. 푸른 기운들이 앞 유리창을 뚫고 나가려는 순간 현암이 월 향을 짧게 그었다.

꺄아아악!

월향의 비명 소리가 들리며, 검이 닿지도 않은 앞 유리에 금이 쫙 그어졌다. 연이어 공격하기 위해 월향의 귀기(鬼氣)만으로 검 을 그었는데도 위력이 엄청났다. 푸른 덩어리 하나가 파르르 떨 며 사라지는 모습이 얼핏 보였다. 현암은 재차 대갈하며 기를 오 른손에 집중하여 앞 유리에 떠 있는 얼굴을 움켜쥐었다. 앞 유리 가 산산이 깨지면서 현암의 손끝에 푸른 기운이 번뜩였으나 잡히는 것은 없었다.

‘재빠른 놈들!’

현암은 양미간에 월향을 세웠다. 원래 투시력이나 영력이 없 는 현암이었지만, 월향검을 이용하면 희미하게나마 영을 볼 수 있었다. 여러 개의 푸른 기운이 서로 엉키며 사라져 가는 모습이 멀리 보였다. 현암의 몸에서 기운이 쭉 빠져나갔다. 아까 월향검 을 잡으려 왼손을 품에 넣었을 때 베인 듯, 왼손은 피투성이였 다. 박살난 앞 창문으로 빗줄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현암의 피 맛을 본 월향은 엄청난 귀기를 발하고 있었다. 앞 창문을 깬 오 른손은 기공력을 뿜고 있었기에 다행히도 멀쩡했으나, 얼굴에 유리 조각을 맞아 따끔따끔했다. 뒤에서 트럭 한 대가 스쳐 지나 가며 굉음을 울리자 현암의 감각이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현암은 깊은 한숨을 쉬며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준후야. 뭐 좀 찾아냈니?”

박 신부의 차 뒷좌석에는 오래된 스크랩북들이 가득했다. 각 종 사건 기사만을 모아 스크랩한 것으로 박 신부가 엑소시즘에 관심을 가지고 십여 년 전부터 모아온 자료였다.

“아이고, 이 많은 것 중에서 어떻게 그 몇 개를 금방 찾아요? 컴퓨터에 입력이라도 하시지.”

준후는 피곤함으로 붉어진 눈매를 비비며 투정하듯 말했다.

“주문을 외우면 금세 찾을 수 있는데, 씨이…….”

“너 또 잡귀와 얘기하려고 그래? 안 돼! 차라리 그냥 가자.”

“아녜요. 아녜요. 알았어요. 안 부르면 되잖아요.”

쫑알거리던 준후의 눈에 오래된 스크랩북의 한 페이지가 눈에 들어왔다.

“신부님 이것!”

준후의 눈이 커졌다.


“으으음!”

현암은 소스라치며 잠에서 깨어났다. 억수로 내리던 빗줄기가 조금씩 가늘어지고, 차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있었 다. 깨어진 창문으로 비가 들이쳤는지 옷이 축축하게 젖었는데 도 현암은 그것도 모르고 잠들었다 겨우 깨어난 것이다. 

‘또 현아의 꿈을……..’

잠결에 눈물을 흘렸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지나가던 차 한 대가 속도를 줄이더니 앞 유리가 박살난 현암의 차를 기웃거리다 그냥 지나쳤다.

‘음, 너무 지체했다. 빨리 가야지. 아무튼 지독했어. 네 놈이나 한꺼번에 덤비다니. 창 앞에서 지껄이던 놈까지 합한다면 적어 도 다섯은 넘으렸다? 하나는 없앴으니 적은 최소한 넷………….’

뒤에서 경적 소리가 빵빵 울려 왔다. 돌아보니 준후가 환한 얼굴로 차에서 뛰어 나왔다.

“현암 형, 다행이에요! 괜찮아요?”

현암도 차에서 내리면서 엉망이 된 손을 들어 보였다.

“말도 마라. 이 꼴봐라.”

“그만하기가 다행일세.”

박신부가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지독하구먼. 자네 정도 되는 사람을 이 정도로 고생시키다니.”

“녀석들이 환령을 하려 했어요. 여러 놈이더군요. 상당히 강하 고, 다섯 놈입니다.”

“아니에요, 현암 형. 아홉 놈이에요.”

놀라는 현암에게 준후가 스크랩북을 내밀었다.

스크랩북에는 오래된 잡지의 기사가 있었다. 역이나 터미널 부근에서 파는 싸구려 잡지에 ‘납량 특집’이란 부제가 달린 기사 였다. 현암은 앞 유리가 깨진 자신의 차를 그 자리에 놓아두기로 하고 박 신부에 차에 몸을 실었다. 차 속에서 현암은 문제의 기 사를 찬찬히 읽어 내렸다.


소왕산의 저주받은 산장

등반 코스가 최근에 개척되기 시작한 소왕산에는 아직도 사고 다발 지역으로 묶여 폐쇄된 봉우리가 있는데 그것이 까치봉이다. 까치봉에는 소수의 등반가에게만 알려져 있는 좋은 등산로가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어느 재산가가 봉우리 위에 산장을 지은 일도 있다. 그 산장의 이름은 측백 산장. 까치봉 봉우리 주변에 측백나 무가 유달리 많은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그 터에는 옛 건물의 자취가 남아 있었는데 토목 공사가 힘들 어 터를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산장을 지어 올렸다고 한다. 그런 데 한창 공사를 진행하는 동안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고, 실제로 귀신을 보았다는 인부들이 속출하여 도주하는 사 람도 늘어났다. 그 바람에 공사가 대단히 어려워져, 자산가는 산 장을 완공하기 위해 수많은 농지를 팔아야 할 정도로 돈이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완공이 되자마자 주인마저도 귀신의 위협 을 받아 산장을 떠나 버려서, 산장은 이후로 지금까지 빈집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이런 집이야 많지 않습니까? 문장도 엉망이고 읽기가 싫군 요. 그런데 신부님도 이런 싸구려 잡지를 보십니까? 흠, 예쁜 여 자사진이 실렸나?”

“농담할 때가 아닐세. 계속 읽어 보게나. 뒤에 보면 동네 촌로 가 이야기한 전설이 있을 거야.”

박신부가 웃지도 않고 정색을 하는 바람에 현암은 다시 기사로 눈을 돌렸다.

“우리 동네 사람은 모두 이 소왕산에서 약초를 캐는 걸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지만 까치봉 주위론 절대 들어가지 않지요. 제 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한테 들은 이야기지만, 조선 말엽쯤에 저 까치봉에 산적소굴이 있었답니다. 그들이 자주 민가를 습격하자 관군이 토포를 해서 대부분 목을 베었대요. 그런데 그중 두목격 인 여덟 명이 까치봉 꼭대기로 도망간 걸 몰랐다나 봅니다.”

김 노인의 말에 의하면 그 후로 도적들은 관군의 토포가 있을 까 두려워 내려오지 못하고 산에서만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 디서 방사하나가 두목으로 들어앉은 이후 그들은 나찰신 (神)을 받드는 사교 집단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두목은 그들 에게 주문을 가르쳐서 아홉 명 모두 신기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 다고 한다. 이들은 스스로를 흑암성제, 흑암장군, 흑암천녀 등의 호칭으로 부르면서, 어린 아이를 잡아 생피를 마시고, 손으로 사 람을 갈기갈기 찢는 놀이를 하고, 사람 고기까지 먹는 등 극악무 도한 짓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지독한 얘기군요.”

“아까 난 기사를 읽다가 토할뻔했다고요.”

“준후야.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 산적들은 주문 같은 걸 함부로 써서 그 힘에 도취됐기 때문에 그토록 잔인한 짓을 하게 되었을 거야. 그러니 환령 같은 술수를 부릴 만도 하지.”

결국 그들의 만행을 참지 못한 마을 사람들은 죽을 각오를 하 고 그들의 근거지를 덮쳤다. 이 와중에 여섯이 마을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고, 여자 둘과 방사 출신의 두목까지 셋만 산 채로 잡혔 다. 마을 사람들은 분노로 그들을 오우분시(五牛分屍)하고 시체 마저 태워서 산에 뿌렸다고 한다. 두목은 죽으면서도 웃으며 ‘너 희는 날 죽일 수 없다. 나는 다시 나타나 모든 백성을 죽이고 그 살을 씹을 것이다’라고 저주했다고 한다. 그 이후 비가 으슬으슬 오는 날이나 밤이 이슥한 시간에는 까치봉에서 불빛이 번뜩이고 해괴한 웃음소리가 들리며, 늑대가 떼를 지어 활보하는 등 이상 한 일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을 사람이 하나둘씩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 뒤 이 마을은 거의 폐촌이 되다시피 했는데, 지나 던 어느 고승이 산 곳곳에 돌탑과 부적을 묻은 뒤로는 그런 일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을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사실이라 굳게 믿고 있으 며, 그래서 절대 까치봉 정상 근처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여기 나와 있는 전설이 사실이라면, 그 도사라는 자와 나머지 여덟은 악령이 되었겠군요. 죽는 순간까지 죄과를 깨우 치지 못하고 사람들을 원망하다니…”

“게다가 방사라 했으니 술법 같은 데도 능하고 주문에도 능통했을 것이 아닌가? 금지된 의식도 행한 것 같고.”

준후가 끼어들었다.

“그러나 믿기지가 않는데요? 사람을 먹었다는 말이요. 도사라는 사람이 식인종도 아니었을 거고………….”

현암이 무심코 대답했다.

“아냐, 사실일지도 몰라. 나찰(羅刹)들은 원래 식인 풍습이 있 다 했으니, 의식 중에 그런 과정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박신부도 입을 열었다.

“여기 나온 이야기들은 사실일지도 모르네. 불행한 일이지만.”

준후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너무 징그러운 귀신들이야. 더러워.”

“그러니 우리가 가는거야. 더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헌데 그동안 잠잠하다가 왜 세월이 지난 이제야 그 귀신들이 나온 거죠?”

현암이 침울하게 대답했다.

“그거야 알 수 없지. 고승이 탑을 쌓고 부적을 묻었다니, 결계(結界)를 맺은 모양인데, 어쩌다 그게 깨졌겠지.”

어느덧 차는 소왕산에 도달했다. 이제부터는 걸어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제 가 볼까?”

십자가와 성수 뿌리개를 챙기면서 박 신부가 재촉했다.

“해지기 전까지는 올라가야지. 아홉 모두가 덤빈 것도 아닌데 현암 군을 이렇게 애먹인 놈들이야. 특히 환령술이 장기인 모양이니 각자 알아서 준비를 해.”

준후가 제일 반가워했다.

“헤헤…… 그럼 난 밀교의 주술을 써야지. 뭘 쓸까?” “네가 제일 좋아하는 인드라 님의 힘을 사용하지 그러니?” 현암은 준후에게 말하면서 붕대로 감긴 왼손을 가볍게 흔들어 월향검을 꺼냈다. 준후가 밀교 제신 중 가장 좋아하는 신이 제석 천으로도 불리는 뇌신(神) 인드라였다. 준후는 사람 고기 먹는 귀신이란 소리에 겁을 먹은 듯, 제석천 인드라의 주문에다 브라 흐마의 주까지 중얼중얼 읊조리다가 피식 웃었다.

“이분들은 상천계에서도 제일 센 분들이니 염려 없을 거예요. 자, 가요, 나쁜 놈들 잡으러.”

그들은 잔뜩 긴장한 채 측백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는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전설은 사실인 듯했다. 적어도 까치봉에 오르는 도중에 들른 마을에서 만난 촌로들은 전설을 사실이라 믿고 있었다. 준후는 그들의 마음속에서 심한 공포감도 읽을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경찰이 측백 산장에서 일찌감치 철수했다는 반 가운 소식도 알려 주었다. 산 정상에서 사고 수습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현장을 유지하기 위해 경계라도 세워야겠지만, 누가 그 일을 하려 하겠는가? 그래서 산장이 텅텅 비어 있을 거라고 마을 사람들은 말했다. 현암은 수사관들을 위해 서 둘러 달려온 자신의 행동이 쓸모없었음을 알고 씁쓸히 웃었다. 까치봉으로 올라가는 도중에는 특이한 점이 없었다. 전설대로 승려가 세웠다는 결계가 있다면 준후가 느꼈을 터인데 아무 힘 도 느끼지 못했다. 다만, 일반인의 눈에는 잘 띄지 않는 곳에서 부서진 결계를 간간이 발견할 수 있었는데, 옛날에 누가 새겨 놓 은 글자들의 흔적만 겨우 남아 있었다.

준후가 바위 하나를 살피더니 말했다.

“대………… 문선・・・・・・ 음, 아마 대성지성문선왕(大聖地聖文宣王) 의 주를 새긴 듯하네요. 저쪽 바위는 그에 대응되는 관우장비웅 호장(關羽狎張飛雄虎將)의 주를 새긴 것 같고요. 둘 다 병마를 쫓는 주인데, 아마 각종 주를 사방에 골고루 새겨 대결계를 세웠던 것 같아요.”

“그것보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현암이 침중하게 말했다.

“그놈들이 보통 잡귀와는 달리 주술을 쓴다는 데 있어. 환술을 연마한 방사의 귀신이니 벼락을 빌려서 결계를 스스로 파괴할 줄 알았던 건 아닐까?”

“결계에 갇힌 귀신이 어떻게 재주를 부리겠어요? 거기에 벼락

을 불러요? 그건 불가능해요.”

“아마 우연히 몇 군데의 결계가 파괴되어 힘이 약해졌겠지. 그 래서 조금씩 놈이 힘을 쓸 수 있게 되자 방술로 나머지 결계들을 파괴한 것 같아. 꼭 벼락을 부리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러면 바위를 이렇게 긁어 낸 것은 누구 짓이지?”

준후도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 박 신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결계들을 복구해 볼까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박신부가 준후를 말렸다.

“아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언제 온 산을 뒤져서 글자들을 새긴단 말이냐? 그러다 악귀들이 완전히 빠져나가 버리면 일이 복잡해진다. 결계는 그냥 두고 어서 가도록 하자.”

일행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산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언뜻 보아도 사람이 살지 않은 지 수십 년이 지난 모습이 확연했다. 크기는 웬만한 이층집만큼 컸다. 자산가의 별장으로 쓰려던 역사를 말하듯이 곳곳에 달렸 던 화려한 장식들이 추하게 떨어지고 부서져서 을씨년스런 느낌 을 더하고 있었다.

“터의 기운이 부자연스러워요. 음기(陰氣)가 너무 강해요. 저쪽 측백나무 숲은 음기를 빨아들이는 일종의 진식 같아요.”

“진식?”

“예. 무슨 진인지 알려면 시간이 걸리지만, 하여간 요기가 저 측백나무들에서 뻗쳐 산장으로 몰려 들어가고 있어요.”

“저 측백나무들은 백 년도 더 된 것 같은데.”

“우리가 불리할지도 몰라요. 백 년 이상 숲의 요기를 모으고, 환술과 환령까지 아는 방사 출신 상대가 아홉이라면….”

“여덟일 거야. 월향으로 한 놈 잡았으니. 아무튼 한번 투시를 해봐. 놈들의 근거지가 어디인지.”

준후는 눈을 감고 도교의 명목(明目法)을 읊었다.

“지하실 같아요. 땅 밑에 기운이 엉켜 있어요. 음…… 수는 잘 알 수가 없지만 은형법(隱形法)**을 쓰는 듯해요.”

“더러운 놈들 같으니. 그런 법들은 도교 전래의 비법들인데 그 런 술수를 사람 해치는 데 쓰다니. 환생도 못하게 없애 버리고 말겠어.”

“너무 잔인하지 않아요?”

“아무튼 들어가세.”

박 신부의 조용한 음성이 떠들고 있는 두 사람을 재촉하였다. 산장 안은 어둡고 음침했다. 바닥은 핏자국과 사람들의 발자국들(수사관들의 것인 듯했다)로 어지러웠고, 낡아 빠진 가구며 돌무더기들이 널려 있어서 흉가의 분위기가 완연했다. 준후가 눈을 감고 투시를 하다가 신음을 흘렸다.

“음・・・・・・ 은형술이 강해요. 분명 이 안에 다들 숨어 있는데, 한 놈이 강한 은형주를 써서 나머지 놈들을 감싸고 있어요. 더 이상 은 보이지 않아요.”

“자네들 잠시 내 뒤에 서게.”

박 신부가 앞으로 나섰다. 박 신부의 주특기는 강한 기도력으 로사마를 쫓아내는 데 있었고, 위급할 때는 연녹색의 오라가 주 변을 환하게 빛내면서 막을 칠 정도로 힘이 강했다. 박 신부는 영들에게 직접 공격을 가하지는 않았으나 기도력으로 일행에게 강력한 방어막을 제공해 주었다. 또 박 신부의 성수는 기독교계 의 영이 아니더라도 큰 위력을 보였다.

“준후야, 상대가 나찰 신앙을 가졌으니 그에 상응하는 신을 불 러서 너를 보호해.”

아무리 많은 주술과 부적을 사용할 수 있어도 역시 어린애에

불과한 준후를 현암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히히. 벌써 나찰을 다스리는 비사문천(毘沙門)*의 힘을 빌리고 있어요. 이 방울이요.”


[*다문천, 사천왕, 십이천, 칠복신의 하나.]

[*도가에서 쓰는 비술 중의 하나로 원래는 눈을 맑게 하여 밤에도 잘 볼 수 있게 하는 술법이지만 사물의 근본을 밝히는 효과도 있다.

* 스스로의 모습이나 기를 감추어 보이지 않게 하는 도가의 비술 모습을 감추는 경우에도 발자국이 나는 것은 막지 못한다고 한다.]


예전에 준후가 을련 호법에게서 얻은 방울이었다. 준후는 밀 교를 빠져 나오면서 그것 말고도 작은 호로 하나와 고서 몇 권을 가지고 나왔는데, 아직까지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 준후는 부적 몇 장과 작은 놋쇠 방울을 꺼내 들었다. 준후는 태연한 듯 웃고 있었으나 손에는 땀이 축축하게 배어 있었다.

박신부가 방의 중앙에 똑바로 서서 기도문을 암송하기 시작 했다. 기도문이 벽 사이로 울려 퍼지자 요기가 사방에 드러나면 서 짙어지기 시작했다.

“준비해라, 준후야!”

박 신부가 성수를 사방에 뿌리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성수가 닿은 벽면에서는 흰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피어오른 흰 연기가 부옇게 뭉치기 시작하여 시야가 흐려질 정 도가 되었다. 박 신부의 오라가 장엄하면서도 따뜻하게 원형으 로 퍼져 가자, 흰 연기는 오라 막에 의해 사방으로 밀려 나갔다. 

“역시 대단한 분이셔, 신부님은.”

준후는 중얼거리더니 즉시 비사문천 주를 외우며 방울을 흔들 기 시작했다. 방울 소리는 벽에 부딪히며 귀가 멍멍할 정도로 소 리가 커져 갔다. 준후가 손에 힘을 넣었다. 소리는 공명에 공명 을 거듭하면서 주문과 오라의 힘을 타고 굉음을 발했다.

박 신부의 기도 소리와 준후의 주문이 방울 소리와 함께 증폭 되자, 벽들이 흔들리면서 먼지와 거미줄 나부랭이가 천장에서 떨어져 내렸다. 현암도 월향을 빼 들었다. 월향검이 나직한 소리로 울었다. 현암은 칼에 기를 모으며 태극패를 꺼내 왼손에 들었다. 벽과 천장이 마치 상처 입은 짐승마냥 흔들렸다. 먼지들이 주 르르 흘러내리고, 박 신부의 성수에 닿아 피어나는 흰 연기가 여 기저기서 휘감겨 사라져 갔다. 갑자기 바닥에 흐트러져 있던 작 은 돌들이 공중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큰 돌도 움찔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고 낡은 의자며 나무토막 들도 덜컹거리며 공중에 떠올랐다. 현암은 기공력을 증대시켰다. 

‘음, 시작이군. 이건 물건에 백(魄)을 깃들게 하여 부리는 수 법. 별 신통하지는 않다.’

갑자기 잔돌들이 우박같이 셋을 향해 쏟아졌다. 무서운 속도 였으나 박 신부의 오라를 통과하지는 못했다. 몇 개가 간신히 오 라를 비집고 들어왔지만 곧바로 떨어져 버렸다. 그러나 떨어진 돌들은 다시 떠올라 벌 떼처럼 셋에게 달려들었다.

박 신부는 이곳에서 죽은 시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마도 이 런 식으로 돌에 맞아 죽었으리라. 박 신부는 분노를 느끼며 마주 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오라 막이 강해지며 넓어져 갔다. 방어력이 강해지자 부딪쳐 오던 잔돌들이 팍팍 소리를 내며 부서져 먼지로 화했다. 이번에 는 덜컹거리던 의자들이 날아왔다. 현암이 태극패를 쥔 왼손에 기공력을 실어 갈기자 의자는 폭죽처럼 터져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박 신부가 날아오는 의자와 나무토막에 침착하게 성수를 뿌리자, 그것들은 마치 강한 망치에 맞은 것처럼 뒤로 나가 떨어 져 벽에 부딪히면서 흡사 사람이 쓰러지듯 뒹굴었다.

어지럽게 날리던 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려, 현암은 태극패로 박신부의 오라를 반사하여 방 안을 한 바퀴 돌렸다.

“잡것들아! 그 따위 장난질은 우리에겐 안 통한다! 어서 모습 을 보여라!”

방에 뒹굴던 의자에서 희뿌연 기운이 세 가닥 솟아오르고, 사 방 벽과 천장에서도 각각 하나씩의 기운이 솟아 뭉치기 시작했 다. 그 기운은 점차 푸른빛과 흰빛을 띠며 세 사람의 주위를 에워쌌다.

상대의 모습이 드러나자 준후가 순간적으로 부적을 눈에 문질 러 상대의 모습을 파악했다.

오른쪽 둘은 여자고 나머진 남자예요. 음………….. 현암 형 쪽 두 놈이 아주 세요. 조심………… 으악!”

“왜 그러니, 준후야!”

“여자들이 발가벗고 있어요.”

“뭐라고?”

영이 모습을 보일 때는 스스로의 의지 또는 습관에 의해 모습 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 일반 사람이 볼 때는 일상 옷을 입은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영이 특별히 그에 신경을 쓰지 않아 생전 모습이 투사되기 때문이다. 영이 신경을 쓰게 되면 특정 형태가 강조된 모습으로 눈에 비치는데, 즉 머리 잘린 모습에 신경을 쓰 면 머리가 잘린 모습으로 가시화되지만 나머지는 생전의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이다. 준후의 눈에 비친 두 여자의 모습은 완전 나 체였다. 네 남자는 그냥 민중민숭하게 희뿌연 모습이었으며 그 중 둘은 어딘지 어색하게 남색 도복을 입은 듯했다. 현암은 곧장 월향과 태극패를 휘두르며 몸을 공중에 띄워 준후가 가장 세다 고 알려 준 두 개의 푸른 기운을 향해 몸을 날렸다. 박 신부는 희 뿌연 네 개의 기운을 향해 천천히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준후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

“아이고, 차라리 끔찍한 귀신이 낫지, 벗은 여자랑 어떻게 싸 워요! 형이나 신부님은 똑똑히 안 보이니 괜찮지만 난……”

퇴마사라도 아이는 아이였다.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여귀는 어쩔 줄 몰라 뒷걸음치는 준후 쪽으로 점점 다가들었다.

꺄아아악!

월향이 길게 비명을 지르며 사방을 그었다. 푸른 두 기운은 교 묘한 움직임으로 검 끝을 피하며 번뜩이는 태극패의 공격도 가 볍게 받아넘겼다. 현암은 그들이 피하는 척하고 있지만 실은 백 (魄)을 이용해 서서히 압박을 가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나는 가위에 눌릴 때 느껴지는 중압감을 엄청나게 확대한 것처럼 묵직하게, 또 하나는 면도(面)처럼 예리하게 현암의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무예 시합이나 다름없었다. 현암은 월향 귀검과 태 극패 간간이 기술까지 섞어 가며 대적했다. 그는 오랫동안 무 예를 연마한데다가 태극기공으로 온몸을 방어하고 있어서 든든 하긴 했지만, 푸른 기운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어려웠고 둘과 맞 붙는 것이라서 어려운 싸움이었다.

“보통내기들이 아니군. 귀신으로 따지면 지신(地神) 중에서 귀장(鬼)급은 넘겠다!”

박신부는 온갖 잡동사니가 총알같이 날아드는 가운데서도 천 천히 기도문을 읊으며 네 영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네 영은 다가 드는 오라 막에 밀려 벽 쪽으로 흘러갔으나 박 신부가 뿌려 놓은 성수가 벽에 잔뜩 칠해져 있어서 그리로는 투과해 도망칠 수 없 었다. 그들은 발악을 하듯 바닥의 잔돌과 나무 조각 따위를 아까 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속도로 박 신부를 향해 날렸다. 그 러나 그 잡동사니들은 박 신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라 막 과 마주치면 비껴 지나가거나 힘없이 떨어지곤 했다. 

“죄의 소산인 어둠의 생명들, 사탄의 앞잡이들아!”

박신부는 엑소시즘에 사용하는 기도문을 침착하게 읊으며 십 자가를 비추고 성수 뿌리개로 성수를 흩뿌리며, 파르르 떨고 있 는 네 개의 희뿌연 기운 쪽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많은 성수를 벽에다 뿌린 탓에 성수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네 영들은 박신부에게 완전히 위축된 듯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이상했다. 네 영의 기운은 그다지 악독한 것 같지 않고 능력도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응? 생각보다 사악한 기운이 적은 영들인데? 이 정도 힘으로 는 단번에 여러 명을 몰살시킬 수 없을 텐데…………….’

박 신부는 고속도로에서 다섯 정도의 영이 현암을 몰아붙여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던 일을 기억해 냈다. 현암을 위태롭게 했을 정도라면 이 다섯의 영은 훨씬 강한 영력을 가진 것이 틀림 없는데………….

‘그때 하나가 죽었다면, 나머지는 여덟. 그렇다면 이 넷은 허 약한 졸개급이고 현암 군과 준후가 싸우는 녀석들이 강한 놈들 인가? 이거 시간을 길게 끌면 안 되겠군그래.’

박신부는 성수 뿌리개를 움켜쥐었다.

“아이고, 이것들아, 아니 누나들・・・・・・ 가까이 오지 마세요.” 준후는 두 여귀의 요상한 전법에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쳐다보기가 민망하며 아예 눈을 돌리고 있으니 어떻게 할 방법 이 없었다. 하물며 자신의 손으로 귀를 치거나 되려 차가운 손 톱에 잡히면? 다급하다 보니 주문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하 나가 있긴 있었다.

‘그래. 우보법(牛步法)* 구절 중 발을 땅에 붙게 만드는 주문이 있다.’

준후는 양발을 한 발씩 내디뎌 제2보까지 정신을 모아 걷고는 여귀 쪽을 향해 일갈했다. 효과가 있었다. 두 여귀는 발이 땅에 붙어 버린 듯 자리에 우뚝 서서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준후는 이 제야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 꼴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부적으로 가려주마.”

준후는 둔갑 부적을 꺼내 부적을 확대한 뒤 여귀들에게 날렸 다. 제압부 소혼부 오뢰부 귀신칙소부와 전혀 관계없는 신행부 해금부 따위까지 무더기로 날아가 여귀의 온몸에 다닥다닥 달라 붙었다. 부적을 한두 개도 아니고 무더기로 몸에 달자 두 귀신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뭉개져 갔다. 소혼부나 귀신 칙소부 등의 부적이 귀신의 몸을 빨아들였다. 물론 관계없는 부 적들은 그냥 몸 가리개 대용으로 붙인 것이었다.

준후는 의기양양 부적에 불을 붙여 날려 버릴 심산으로, 우보 를 밟아가며 짜부라지고 있는 귀신에게로 향했다.

‘흥, 남녀가 유별한데 창피한 것도 모르고. 내 야마라쟈 (염라 대왕)께 빌어 암여우로 태어나게 해 주지.’

그런데 난데없이 팔 두 개가 부적 더미에서 튀어나와 준후의 양팔을 잡았다. 힘이 팔에 다 모였는지 놀랍게도 직접 물리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으악!”

순간적으로 놀란 준후가 기를 흐트러뜨리자 준후를 보호하던 신의 힘도 흐트러져 준후의 팔에 사악한 기가 몰려들었다.

“악, 이걸 어째! 환령술이다!”

현암은 준후의 비명 소리를 듣고도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으 나 자신이 싸웠던 경험으로 볼 때 준후가 환령술에 오래 버틸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가 맞상대하고 있는 두 놈도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현암은 쇠뭉치 같은 일격을 어깨의 기공으로 튕겨 내며 소리쳤다.

“신부님, 준후를!”

순간적으로 면도와 같은 예리한 기운이 두 개로 갈라지는 듯 허초를 보이며 현암의 기공을 뚫고 왼쪽 어깨에 상처를 냈 다. 현암은 상처보다도 그 수법이 놀라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 다. 예전에 한번 거사로부터 받은 비급 전서들 속에서 보았던 수 법이 생각났던 것이다.

“엇, 이건 비사검법(飛蛇劍法)! 백 년 안에 이 검법을 익혔던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그렇다면 현암과 상대하는 두 영은 적어도 백 년 이상의 과거 에 죽은 녀석들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상한 점은 또 있었 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영적인 힘으로 일격을 받았을 때 통증은 실제의 물건에 맞은 것처럼 느껴지나 외면적으로 상처가 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 현암의 어깨에 난 상처에서는 선혈이 흐르 고 있었다. 그렇다면 현암을 공격한 힘은 영력이 아닌, 실제 물 건에 의한 것이다.

‘그렇군. 이놈들은 실제의 칼에 깃들어서 싸우고 있구나. 칼에 붙어 귀기로 칼의 모습을 감추고 그걸 조종하고 있다.’

저쪽이 실물 병기를 이용하고 있다면 꽤 긴 것들일 테고, 그렇 다면 아무래도 길이가 너무 짧은 월향은 불리했다.

박 신부는 준후의 비명과 현암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아끼던 마지막 성수를 뿌렸다. 그리고 JNRJ*의 부적을 꺼냈다.

“생겨나지 않은 자, 이름도 없는 자, 하늘나라에 골고루 넘쳐 흐르는 자, 무참히도 꿰어 찔린 자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아직 주문을 끝내기도 전인데 네 영은 서서히 사그라져 갔다. 박신부는 언뜻 그들이 고통스러워하기보다는 기뻐한다는 느낌 을 받았다. 사람을 해칠 정도의 악령이라면 이렇게 순순히 사라 질 리가 없는데……. 박 신부는 의심이 일었지만, 일단 준후의 일이 급했다. 박 신부는 황급히 준후 쪽으로 다가갔다.

준후는 자기의 몸속으로 들어와 혼을 바꿔 버리려는 환령술에 저항하기보다도, 자신의 몸속에서 흐트러져 버린 힘들이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데 더 고통을 느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이를 악물어 윗입술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준후는 제석천과 브라흐마의 기운, 비사문천의 기 운, 거기에 몰래 십육나한의 기운까지 불러 놓은 상태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렇게 많은 신을 부르지 않는 건데, 으윽…….”

박신부가 달려와 준후의 팔목을 잡자, 준후의 손을 쥐고 있던 손 하나가 박 신부의 기도력에 움츠러들었다. 그와 동시에 준후 의 투시력이 박 신부에게 전파되어 박 신부의 눈에도 두 여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부적을 주재하는 준후가 힘을 잃자 부 적들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여귀들은 둘이서 준후의 한쪽 팔을 잡고 몸을 일으키려는 참이었다.

“이, 요사스러운 것들!”

박 신부가 한쪽 팔을 잡아끌고 두 여귀가 나머지 한 팔을 잡아 끄니 준후는 대롱대롱 매달리는 꼴이 되었다.

박 신부는 준후에게 기도력을 퍼부었다. 순간 준후의 마음은 박 신부의 평온한 힘에 도움을 받아 안정을 찾게 되었다. 일단 정신이 수습되자 준후는 화가 치미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부적 을 발화시키려 했으니 이미 여귀의 몸에 붙은 부적은 힘을 잃고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 액막이를 목적으로 하는 도교의 걸음걸이 법으로 여러 효력을 발한다고 전해 진다.]

[* 라틴어 Jesus Nazarenus Rex Judaeorum의 약자. ‘유대의 왕 나사렛 예수’라 는 뜻.]


“에잇, 십육나한주(十六羅漢呪)닷!”

준후의 손끝에서 오색 광채가 뻗어나가 두 여귀를 에워쌌다. 두 여귀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여귀의 몸은 무지무지한 압 력으로 사방에서 밀려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준후는 이를 갈며 두 여귀를 소멸시키려고 마음을 먹었다. 준후가 브라흐마의 기 운을 모으자 손끝에 노란 불덩이 같은 기운이 바작바작 소리를 내며 퍼지기 시작했다.

“흥! 범천왕 브라흐마의 힘으로…”

완전히 끝낼 작정을 한 준후의 눈이 두 여귀의 눈과 마주쳤다. 십육나한의 힘을 빌린 엄청난 힘으로 온몸이 짓눌려 찌부러지는 고통에 못 이기면서도, 그들 눈에서 준후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증오나 저주가 아니라는 슬픔이었다. 그것은 절대 악으로 물들 어 재미로 사람을 해치는 악령은 지닐 수 없는 눈빛이었다. 

“아니야, 이것들은 벌써 예전부터 수십 명을 죽이고 근래에 만 일곱 명의 사람을 죽이고 혼까지 빼 버린 악마들이야. 속으면 안돼.’

그러나 슬픔이 가득한 눈에는 사악한 기운이라곤 깃들어 있지 않았다. 고통과 슬픔과 애원의 눈초리일 뿐이었다. 준후는 악령 이라고 모두 잔인하게 파멸시킬 만큼 모질지 못했다. 준후의 손 에서 노란빛이 사라지고 손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왔다. 박 신부 가 돌연한 변화에 어안이 벙벙해 있는데, 준후가 바닥에 흩어진 두 여귀의 영을 부적에 몰아넣기 위해 꼼짝 못하는 여귀에게로 다가갔다. 이제 부끄러운 생각은 없었다. 준후는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부적을 여귀에 이마에 조용히 갖다 댔다. 그러자 놀랍게 도 두 여귀의 표정은 안도하는 표정으로 바뀌고, 그중 하나의 눈 에 눈물이 번득이는 느낌마저 들었다.

‘무슨 이유에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나쁜 짓들은 하지 말아요. 다시는요.’

박 신부도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준후는 마음이 너그러워. 분명 많은 사람을 구할 거야. 많은 영들을 쉬게 할 거고. 그래, 영도 인간처럼 가련한 경우가 많지.”

부적으로 두 여귀의 몸이 빨려 들어가면서, 준후의 귀에 나직 한 몇 마디의 소리가 스쳐 갔다. 흐뭇해하던 준후의 안색이 갑자기변했다.

“신 신부님!”

“왜 그러니, 준후야?”

“지금 이것들은 진짜가 아녜요!”

현암은 이제 푸른 두 귀신의 수법을 대강 알아챌 수 있었다. 지난날 산상에서 한빈 거사에게 무예를 배우고 열심히 수련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두 사람은 이미 제 몫을 다 한듯하니 자기도 어서 처리하고 싶었다. 오래 싸울수록 기력도 쇠해지고 기공도 운행하기가 답답했다.

“에잇, 가거랏!”

현암이 한빈 거사에게서 배운 필승의 수, 파사신(邪神劍) 을 썼다. 자그마한 단검에 불과한 월향이 기를 주입받고 다시 거 기에 깃든 혼의 힘과 합쳐져 검기가 석 자를 넘게 뻗어 나갔다. 현암은 몸을 풍차처럼 돌면서 몸을 날렸다. 원래는 신검합일(神 劍)하게 되어 있는 수였으나 아직 수련이 모자란 현암은 그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엄청난 내력과 월향의 기운이 합쳐서 뻗어 나온 검기는 허공을 가르고 거칠 것 없이 두 악귀의 기운을 덮쳐 갔다.

쨍! 퍽!

요란한 소리를 내며 허공에서 검 한 자루와 철추 하나가 두 조 각이 나면서 형체를 드러내더니 공중에서 부서졌다. 푸른 기운 들은 부르르 떨더니 시커먼 물을 흘리고 지독한 악취를 풍기면 서 땅에 처박혀 사라져 갔다. 현암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 다. 마지막이라 생각해서 전신의 기운을 모조리 쓴 것 같았다. 그냥 그 자리에 드러눕고 싶은데 준후가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형, 방심하면 안 돼요! 큰일 났어요!”

“무슨 소리야? 나도 이제 다 처리했어. 좀 쉬자고…….”

“아녜요. 방금 우리가 잡은 귀신들은 모두 여기서 죽은 등산객들의 영이에요!”

현암이 눈이 크게 벌어졌다.

“뭐? 말도 안 돼! 나랑 싸운 것들은 백 년도 넘는 검법을 쓰던 놈들이었단 말야!”

이번엔 준후의 얼굴이 놀란 토끼처럼 되었다.

“아녜요. 제가 직접 들었어요! 그들은 환령술로 부유령이 된 뒤에 소혼술로 다시 자기들을 죽인 귀신들에게 잡혀 할 수 없이 우리와 싸운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약했던 거구요!”

“아니라니까! 나랑 싸운 둘은 분명 백 년 넘게 묵은 최고 악질들이었어!”

박신부가 끼어들었다.

“내가 상대한 네 영들도 약한 것들이었어! 준후의 말이 틀린 것 같지는 않네. 현암 군, 자네와 대적한 둘은 오래 묵은 악령이고 나와 준후와 싸운 여섯은 가련한 등산객의 영혼이었단 말이 되는데? 원래 등산객은 일곱이었고…….”

준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이고, 난 모르겠어요.”

박신부는 계속 말을 이었다.

“현암 군, 자네가 차에서 소멸시킨 한 영이 등산객 중 하나의 영이었다 치면 아직 자네와 싸운 것과 같은, 아니 그 이상의 귀신이 일곱이나 남아 있다는 얘기야.”

현암은 머리끝이 쭈뼛했다.

“그렇다면?”

준후가 발을 동동 굴렀다.

“아이고, 난 인제 기력도 없고 부적도 거의 다 엉망이 됐다구요!”

“내 성수도 떨어졌네. 오늘은 아무래도 안 되겠군. 우리 어서 나가세. 다음을 기약하세!”

셋은 퇴마행 이후 처음으로 공포감을 느꼈다.

셋이 막 발걸음을 옮기는데 문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닫히더 니 방 안의 벽과 천장이 붉은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셋은 이를 악물며 둥글게 섰다. 피같이 찐득거리는 액체가 벽 이곳저곳에 서 흘러내리기 시작하고, 엄청난 웃음소리가 집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으하하하!”

영적 전달이 아니라 또렷하게 물리력을 구사하는 목소리였다. 박신부가 눈을 번쩍 떴다.

“엄청난 놈이다!”

웃음소리가 웅웅 메아리치면서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가진 재주를 다 썼는가! 피곤할테니 쉬시게 영원히……….” 

목소리가 너무 커서 귀를 막고 싶을 정도였다. 이를 악물고 있 는 셋의 눈앞에 푸른 기운이 뭉쳐지더니 또렷한 형상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수는 여섯이었다.

여섯 개의 푸른 형체들은 놀랍게도 완연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중 둘은 불자(拂子)를 들고 눈에 요기를 담 뿍 담은 고혹적인 여자였고, 셋은 험상궂은 남자의 모습으로 귀 두도(龜頭刀)*와 당파창(삼지창), 낭아곤을 들고 있었으며, 중앙 의 우두머리인 듯한 자는 도관을 쓰고 한 손에 새빨간 부채를 들 고 있었다. 여섯 모두 푸른색의 도복을 입고 있었는데, 옷깃 중 앙이 섬뜩한 붉은빛을 띠고 있는 것이 예사 도복과는 달랐다. 여 섯의 형체는 산 사람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뚜렷해지고, 목소 리도 분명하게 들려왔다. 현암이 이를 악물었다.

“이 악귀들, 재주가 좋구나! 못된 것만 골라 배웠군!”

준후도 외쳤다.

“그만한 도력을 가지고 악행만을 일삼다니, 원시천 尊)**도 코를 싸쥐고 외면하시겠다. 이 호랑말코들아!” “푸하하하!”

다시 한번 우두머리가 웃어 젖혔고, 나머지 다섯도 따라 웃었 다. 벽이 마구 울리고 천장이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박 신부는 숨을 깊게 몰아쉬며 생각에 잠겼다.


[* 끝이 뭉퉁하고 폭이 넓은, 날이 한쪽에만 있는 무거운 칼.

** 도교의 최고신]


‘이놈들의 내력을 알아내야 한다. 멋모르고 덤비면 당하기 쉽 다. 원인을 알아야 한다.’

“이봐 거기 사제님이신가? 염두 굴리는 소리가 예까지 들리네.”

한 거한이 이죽거리며 말을 내뱉었고 한 여귀의 간사스러운 소리가 뒤를 이었다.

“알고 싶으면 가르쳐 주지. 우리는 흑암요녀, 흑암마녀, 흑암 서장군, 흑암북장군, 흑암우장군이고 저분은 흑암성제시다. 이 제 곧 흑암천을 창시할 분이시니 냉큼 혼백을 바쳐라.”

“웃기는 소리! 일개 방사와 산적의 무리였던 너희가 무슨 신 이 된다고?”

“흥! 불가 십이천(十二天)의 하나밖에 안 되는 나찰천의, 그 것도 졸개인 나찰을 믿는 너희가 무슨 얼어죽을 성제요 장군이냐? 마녀, 요녀는 좀 낫군그래.”

현암과 준후의 욕설에 어지간히 성질이 급해 보이는 장한 하 나가 소리를 질렀다.

“그놈의 나찰 얘기는 듣고 싶지 않다! 난 그것들 때문에 혼백이 빨려 가서…………..”

“그만!”

여귀 중 하나가 매섭게 눈을 흘기며 말을 막았다.

[*불교에서 인간을 수호하는 열두 신.]

“그래서 그 일곱 놈을 이용해 소혼술(召魂術)을 해 주지 않았 는가!”

“내 친구였던 장쇠, 아니 흑암좌장군의 혼은 아직 다 돌아오지 도 못했다! 사내놈의 혼이 어찌나 끈질기던지 장쇠의 힘은 반푼 밖에 못 와서 저놈에게 원통히 당하고 말았다.”

현암의 머릿속이 밝아왔다.

“그래, 너희는 처음엔 나찰을 섬겼지. 나찰의 풍속으론 여나 이 우두머리가 되도록 돼 있고 힘도 월등하지. 그래서 너희 조무 래기 남자들의 혼백은 모두 저 여귀들에게 빨려들게 되었을 거야!”

“닥쳐!”

현암은 으르렁거리는 거한들의 소리는 아랑곳없이 말을 이어갔다.

“병신 같은 것들! 나찰 의식이 얼마나 지독한지 나는 들어 알 고 있다. 아마 온몸의 정혈을 여귀들에게 남김없이 빨아 먹히고 강시(屍)같이 되었겠지. 아니 몸뚱이도 먹혔는지도 모르지. 그러고는…………….”

준후도 알겠다는 듯 현암의 말을 받았다.

“나중에 공력이 좀 높아지니 흑암천을 사칭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겠지? 그러다 보니 전에 치른 나찰 의식을 무효화하는 술법 이 필요했겠고. 그래서 일곱 등산객을 꾀어낸 거지? 마침 여자가 둘, 남자가 다섯, 한 명만 기다리고 참으면 됐을 테고 말야.”

“그 한 놈이 차에서 월향에 맞아 죽은 장쇠란 놈이군. 내 몸 을 이용하려 했던 모양인데, 두꺼비가 거위 고기를 먹으려는 격이지.”

“몸이 없으니 의식을 제대로 치를 수 없어서, 가련한 사람들의 몸을 환령해서는・・・・・・ “

“흥! 인간이라는 것들! 모두 다 마음속에 악한 생각뿐이다! 우 리 의식에 영광스럽게 쓰인 그놈들의 마음에도 음심이 없었다면 어찌 이리 일이 쉽게 되었겠느냐?”

“닥쳐라! 인간에게는 극복할 수 있는 이성이 있고 믿는 마음 과 사랑이 있다! 너희같이 추잡한 것들이나 그런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추한 꼴을 보이는 것이다!”

준후의 눈에 지나간 영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 손을 잡으세요.”

현암과 박 신부는 준후의 양손을 잡았다. 둘의 눈에도 과거의 영상이 비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