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1권 – 9화 파문당한 신부 2 :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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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국내편 1권 – 9화 파문당한 신부 2 : 기도


기도

박 신부는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겨 눈앞에 보이는 성당으로 향했다. 정 신부와의 대화, 아니 자기가 일방적으로 떠든 내용들 이 하나씩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내 믿 음은 과연 올바른 것일까? 정 신부에게 말했던 것처럼 나는 정말 이제까지 오로지 힘을 얻으려고 이 길을 따라왔을까? 성서의 내 용에 심취하고 가르침을 묵사(思)할 때, 거기서 떠오르는 진리 를 냄새 맡으면서도 악귀에 대한 싸움만 생각하고 있었을까? 미 사를 집전하고 거룩한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느꼈던 것들이 자신 에게는 그런 힘을 얻기 위한 의식에 불과했단 말인가? 힘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 힘이 주어지게 되는 요건은 무엇일까? 그 힘은 정말 사탄의 유혹에 불과할까?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나 사 도들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 나 같은 보통의 인간은 힘을 부릴 수는 없는 것일까? 물론 그런 힘은 모든 사람이 지닐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아아,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하 는 건가? 생각이 두서없이 섞여 나와서 갈피를 잡기 어려울 만큼 혼란스러웠다. 정 신부가 말했던 것처럼 나는 영웅주의에 빠져 있는 건 아닐까?

바람이 살갗을 에는 것처럼 매서웠다. 사방은 완전히 어두워 져 여기저기 빛나는 불빛이 박 신부의 몸에서 여러 갈래의 그림자를 만들었다. 박 신부는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이적(異)을 원한다고? 이적은 필요할 때 주어지는 것이지 원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 러나 나는 이적을 원하고 있다. 권능을 원하고 있다. 간절히 바 라고 있다. 오늘 강론 때에 본 일들을 정 신부에게 자세히 설명 하지 않았다. 아니, 할 필요도 없었고 할 수도 없었다. 착한 신자 들, 차라리 청중이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들은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 강론 자리에 몇 번 서 보지 않아서 경험이 없는 탓이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확실히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은 목사가 아니었다. 웅 변가였을 뿐이다.

“여러분!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영생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말을 이어 갈수록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장사꾼이 외치 는 소리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경스러운 생각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신자들, 아니 청중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들 중에는 장사꾼도 있을 터 지만, 장사를 불경스럽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강론을 듣는 그들은 마치 상점의 쇼윈도를 쳐다보고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얼굴들이 훨씬 많았다. 절반쯤은 호기심이 담긴 표정으로 내 얼굴을 무관심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믿으라고요? 그럴까요? 그런데 믿으면 내게 무엇이 좋지요?’

그들은 천국의 존재도 믿지 않았다. 영생을 얻는다는 기대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는 나는 천국과 지옥과 불의 심판을 성경에 쓰인 그 대로 믿고 있는가? 난해한 비유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믿을 수 있는가? 그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말한다. 

“믿습니다!”

그들은 엄숙하게 의례를 따른다. 그러나 그건 상행위나 다름없다. 과거 어떤 교황은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면죄부를 팔았다.

“금 삼백 마르크! 그대의 죄는 사해졌다. 이제 안심하고 나아가라. 천국행 특급 티켓이니라. 그대의 죄는 무엇인고? 음? 금 오백 마르크? 그걸로는 안 된다. 천을 내라. 그래? 그렇다면 구백, 아니 팔백은 어떠냐?”

이제 그런 교황은 없다. 그런 성당이나 성직자도 드물 것이 다. 오히려 이제는 사람들이 먼저 나서서 면죄부를 팔라고 요구 한다. 

“나는 죄가 있소! 사해 주시오! 얼마 내겠소! 이거면 되겠소?” 

나는 그들의 눈초리에서 그것을 보았다. 그들은 더 이상 말 씀의 깊은 뜻을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들이 미웠다. 준엄한 소리로 경고하고 꾸짖고 싶었다. 그러나…………….

자동차들이 차도를 쌩쌩 가르며 달렸다. 사람들은 추운 밤바 람에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코트며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고 걸음 을 재촉하고 있었다. 눈송이가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큰길로 접어든 모양이다. 모두 바빠 보였다. 왜 저리 바쁘게 지나가는 걸까? 그래, 저들은 살려고 바쁜 것이다. 너무 많았다. 싸우지 않고는 제 몫을 차지할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이 많아져 버 렸다. 그리고 똑똑해졌다. 너무 똑똑해서 남을 이기지 않으면 얼 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지식이 넘쳐흘렀다. 그러나 지혜는? 지혜는 어디로 갔나?

어린아이에게 총을 쥐어 주어서는 안 된다. 일단 총을 쥐고 난 다음에는 도로 빼앗기 힘들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세상은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하고 있었다. ‘네 형제를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라’에서 ‘하라’의 말은 점차 타성적으로 잊혀 갔고, ‘하지 말라’는 말은 반발을 부추긴다. 이 런 지경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혼자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 은 과연 무엇일까?

머릿속에 미라의 모습이 스쳐 갔다. 미라…………. 미라는 내게 말했다. 도와 달라고, 살려 달라고 했다. 의사였을 때 수없이 들 었던 소리와는 달랐다. 환자도 그런 소리를 많이 했다. 그러나 그건 내가 아닌, 내 기술에게, 외과 의사라는 직함에게 청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직함에 몸을 맡기고 그들을 역시 하나의 환자로서만 대했다.

미라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검은자위가 유난히 컸던 눈동자. 푸른 기가 도는 흰자에 떠올라 있던 귀여운 눈동자. 그 눈동자가

내게 애걸했다. 

“의사 아저씨, 살려 주세요!”

의사인 나를 보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서로 친했고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던, 박윤 규라는 인간에게 호소하는 소리였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정체를 알 수 없던 악귀가 던진 질문.

-네가 대신 죽겠느냐? 네가 이 아이 대신 몸을 바치겠느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거부한 것이다. 분명 거부했다. 미라와 같은 꼴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미라는 나를 용서했다. 절실한 소원과 믿음을 거부한 나를 책 망하지 않았다. 그 애의 처연한 모습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웃 음소리가 멀어진 뒤, 침대 위에 놀랄 만큼 조용하게 앉아 있던 그 아이의 모습.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그 애의 얼굴. 그렇다. 미라는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다. 하물며 자신을 그렇게 만든 악귀조차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의사 아저씨, 전 그것하고 같이 가긴 싫지만 아무래도…………… 그 애는 가지 않았다. 자신의 말을 지켰다. 아아, 나는 얼마나 사악하고 부끄러운 인간인가! 그 아이가 그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그 아이는 내 죄까지 짊어졌다. 대답하지 못한, 우 정의 배신, 부족한 믿음, 그 모든 죄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었다. 악귀는 결국 미라를 차지하지 못했다. 비약일까? 예수 그리스 도가 인간의 죄를 몸에 지고 세상을 떠나셨다. 미라도 그랬던 것이 아닐까? 단순히 공포에서 도망친 것일까? 미라는 한낱 인간 이기에 다른 사람의 죄를 짊어질 수 없었을까? 아니다. 미라는 분명 다른 사람의 죄마저 대신 짊어졌다. 내 죄를, 대답하지 못 한 내 죄를 가엾게도 악귀에게 놀림을 당하고 있는 내 죄까지 짊어지고 간 것이다.

-안갈게요. 아저씨. 약속할게요. 저 잘래요. 안녕…….

미라는 약속을 지켰다. 가지 않았으니까. 아아, 하느님! 하느 님이 살아 계시고 하느님이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데, 도대체 어 떤 깊은 뜻이 있기에 죄 없는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셨습 니까! 하느님은 인간에 대한 시험을 위해 악을 만드셨다고 한다. 시험은 가혹했다.

길가에 선 낯선 성당의 문이 박 신부를 향해 열려 있었다. 생 각해 보니 오늘은 12월 15일. 거리는 벌써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 고 있다. 박 신부는 유령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발 걸음을 옮겼다. 성당에는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강론중에 미라의 생각이 떠오르고 그 모습이 회중의 모습과 뒤섞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래, 기억이 났다. 회중, 아니 청중, 그들도 가련한 존재였다. 세상의 압박과 불의의 죄와, 감당할 수 없는 삶의 욕구에 짓눌리고 비틀려 버린 존재들. 사탄은 벌써 세 상을 정복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들을 구제할 수 있는 방법 은? 물론 복음이어야 했다. 역시 복음의 길뿐이었다. 그러나 미라와 같은 경우는 어떻게 했어야 할까? 구원의 길이 없었던, 설령 있다 해도 손을 댈 수 없는 엄청난 적과 마주쳐서 어떻게 했 어야 한단 말인가? 아아, 그것도 섭리란 말인가? 도대체 어떤 이유로?

그건 결코 섭리가 아니다.

악귀는 하느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다.

인간이 만든 것이다.

그것을 해소하는 것도 인간의 몫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평범한 인간이 거대하게 똘똘 뭉친 악과 어떻게 싸울 수 있단 말인가?

그 앞에서 어떻게 저항할 수 있단 말인가?

무슨 힘으로?

권능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그 권능을 얻으려는 것이다. 얻 지 못하면 훔치기라도 할 것이다. 인간의 몫은 인간이 맡아야 한 다. 구세주를 기다릴 수만은 없다. 그사이 사라져 가는 생명이 너무 많지 않은가. 모두를 구원하는 것이 궁극의 목적이라면 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도 궁극의 목적이다. 그러나 그 일을 하는 사 람은 아무도 없다. 아니, 믿는 사람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미라 의 일을 겪은 것은 숙명이 아니었을까? 가련한 미라. 그래, 미라 로 인해 깨달음을 얻는 내가 하나라도, 단 한 명이라도 그런 고통을 대신 짊어질 수 있다면!

박 신부는 종루로 통하는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 다. 종을 손보기 위해 만들어진 이 계단은 일 년에 한두 번 사람 들이 올라갈까 말까 하는 곳이다. 종은 밑에서 줄로 잡아당기게 되어 있으니 박 신부의 결심을 방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러 개의 종들이 매달려 있는 종루 꼭대기는 꽤 넓었다. 벽은 없고 기둥만 서 있어서 바람이 거침없이 몰아닥쳤다. 바닥은 콘 크리트만 깔아 놓은 터라 발을 댈 수 없을 만큼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박 신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품에 있던 작은 은 십자가를 동쪽을 향해 놓고 몸을 숙였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 했다.

“야훼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 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느 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야훼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나이다 내가 나의 목소 리로 야훼께 부르짖으니*…….”

조용히 울리는 박 신부의 기도 소리는 칼날 같은 밤바람에 실 려 깊은 허공 속으로 날아가 버렸다.

사흘이 지났다. 옆에서 굉음처럼 들리는 종소리 때문에 박 신부는 날짜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근래에 보기 드문 강추위 탓인지 길을 가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그러나 성당의 종루 위에서는 아 무도 알지 못하는 박 신부의 금식 기도가 계속되고 있었다. 용변 조차 해결하지 않고 참았다. 이틀이 지나자 온몸의 기운이 빠져 나가면서 이상하게도 용변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시편」 제1권 3편,]


“야훼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 이까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구박하오니 *…….” 

사흘 동안이나 맹추위 속에서 기도를 올리는 박 신부의 몸은 자신도 모르게 계속해서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이빨이 딱 딱 부딪히는 소리가 기도 소리 중에 간간이 섞여 나왔고, 발은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굶주림의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박 신부는 미동도 하지 않고 엎드려 있었다.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느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 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야훼 일어나옵소 서 하느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입에 올리는 기도와는 다르게 마음속에서 자꾸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지 않으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무엇 하는 거냐? 그런다고 하느님이 긍휼히 여기시겠는가? 그건 위선이다.


* 『시편 제10편.


‘위선이어도 좋다.’

그 정성으로 세상에 나아가서 가난한 자를 돕고 복음을 전파하라. 그게 옳은 일이 아닌가?

‘복음을 전파하는 자, 너무나 많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겠다.’

우선은 좀 쉬거라. 네 얼굴을 보아라. 발을 보아라. 동상에 걸리지 않았느냐.

‘하느님이 살펴 주실 것이다.’

너는 죄를 짓고 있다.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

그런다고 네가 원하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어림도 없다.

물러가라! 유혹이여!’

다시 하루가 지났다. 박 신부의 기도 소리는 드문드문해지고 몸도 반쯤 기울어졌다. 안경에는 얼음이 끼어 뿌옇게 변해 있었 고, 몸도 떨리지 않았다. 찬바람만이 몸을 뚫고 지나가듯, 쉭쉭 거리며 배 속까지 서늘하게 훑었다. 암송할 성경 구절도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유혹의 소리를 듣지 않 으려 계속 기도를 올렸다. 박 신부의 기도는 이제 구절 암송이 아니라 스스로의 기도로 변해 있었다. 마음속의 소리에 대답할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만해! 이만큼 한 것도 장한 일이다. 그러나 더 하면 죽게 된다.

“세상을 위하여, 세상을 긍휼히 살피소서!”

너 하나도 간수하지 못해 얼어 죽어 가는 주제에 세상을 어쩐다고?

“저들이 저들이 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어서, 어서 내려 가. 조금이라도 기운이 남아 있을 때!

“스스로, 스스로 고통 속에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있나이다.”

그래, 그렇다면 이대로 죽으렴.

“사탄의 악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마음대로 해라, 하하하!

“그리고 우매한 자들을 위한 힘을, 믿음 없는 자를 구하기 위한…….”

믿음 없는 자들은 구원도 받지 못한다!

“백, 백 마리 양을 버리더라도 한 마리 길, 길 잃은 양은………….”

박 신부의 고개가 풀썩 꺾이면서 얼굴이 땅에 부딪혔다. 눈앞 이 아른거리며 흔들렸다. 장막이 내려진 듯 눈앞이 온통 회색으로 뒤덮였다.


차가운 것이 몸을 두드렸다. 뭘까? 박 신부는 안간힘을 써서 눈을 떴다. 비,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고개를 들자 잘되지 않았 다. 손으로 버티고, 그런데 손이 어디 있지? 움직여야 하는데, 내 몸이 어디로 갔나. 눈동자는 아직 움직였다. 그래, 저기 내 손이 있구나. 퍼렇게 변해 있구나. 비……………. 후두둑거리며 내 몸을 친 다. 오늘은 며칠일까?

기둥 사이로 바람이 몰아쳤다. 그래, 아마 찬바람이겠지. 그러 나 느낄 수는 없었다. 종루, 그런데 내가 여기 왜 와 있지? 여기 서 무엇을 하고 있었지?

박 신부는 힘을 얻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기도를 드리고 있 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랬지. 힘, 구원, 멀고 추상적인 힘 이 아닌 인간의 고통을 스스로 지은 죄 때문이 아닌 알 수 없는 것 때문에 비롯된 고통을 막을 수 있는 힘! 왜 잊고 있었을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렇지. 간구, 염원, 응답이 있을 때 까지는 끝나지 않을 기도를 드리고 있었지.

얼어붙은 근육을 움직여 가면서 박 신부는 힘겹게 고개를 돌 렸다. 눈앞에는 자신이 세워 둔 은 십자가가 흥건히 고인 빗방울 속에서 여전히 서 있었다. 십자가는 어디선가 번득거리는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자신을 비아냥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박 신부는 굳어 버린 혀를 움직여 기도문을 읊으려 애썼다. 그 러나 머릿속이 텅 빈 듯, 생각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 버린 듯, 정신이 아물아물거렸다.

“저, 전능하신…… 천, 천주 성부………… 처, 천지의 창조주 를…………… 믿, 믿나이다…………….”

갑자기 생각이 물에 빠진 듯 허우적거리며 헤매기 시작했다.

사도신경이 기억나지 않는다니!

“그,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본시오 빌라도, 아 니・・・・・・ 십자가에… 아니, 아니…….”

내가 이러고도 믿음을 지녔던 사람이었단 말인가? 사람들을 이끌고 강론을 행하던 사람이었단 말인가?

“동정녀 마리아께………… 으흑………….. 마리아께…………… 이, 잉태되어 나시고………… 흐흑………….. 십………… 십자가에 묻, 묻히… 아 아, 흑흑…………… 기억이, 기억이…….”

박 신부의 눈에서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몸에 물 기가 아직 남아 있었던가? 몸에서 고약한 냄새가 났다. 정신을 잃은 사이에 오물을 내보낸 것이 분명했다. 검은 사제복은 축 젖 어 늘어진 채 몸에 감겨 있었다. 이 추한 모습처럼 자신의 본성 도 추악하고 모자란다는 느낌이 절실하게 스며들었다. 

이제야 알았는가? 이 멍청이! 바보 같은 놈!

“으흐흑………… 나, 나는…… 나는……”

구원이란 없어! 없는 거야!

“아냐, 아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구원이란 없어.

“무, 물러가라. 사탄의 유혹이여. 흑흑………….”

나는 사탄이 아니야……………. 나는 너, 바로 너 자신이다.

“나, 나라 해도 좋다. 물러가 모두 모두 물러가라!”

아직도 영웅이 되고 싶은가? 얼빠진 신부.

“흑・・・・・・ 나, 나는 속죄, 속죄라도…. 아니, 기원을………… 하느님이 굽어 살피실 것을 미, 믿・・・・・・

끝장이다. 신부, 멍청한 놈! 안녕, 하하하!

웃음소리와 함께 박 신부의 몽롱한 의식 속으로 뭔가 휙 스쳐 갔다. 그래, 놈의 목소리는 바로 미라에게서 들었던 목소리와 비 슷했다. 예전에 미라에게서 들었던, 남녀를 분간할 수 없는 소리 와 너무도 비슷했다. 그놈은 나에게도 있었던 것일까? 내 안에 도, 사람을 구한다고 떠들어 댔던 내 안에도! 머릿속에 한 줄기 빛이 비친 듯, 돌연 기도문이 떠올랐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 리 주 예수 그리스도, 성신으로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 고,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고성소에 내리시어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그랬다. 길은 마음속에 항상 있었다. 선도, 악도 그의 안에 머 물러 있는 그림자 같은 목소리들에 불과했다. 박 신부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사도신경을 읊으며, 차라리 읊 는다고 생각하면서, 박 신부의 얼굴은 빗물 속에 처박혔고 다시 눈앞은 흐릿해져 갔다.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 하늘이 맑게 개었다. 오랜만에 드는 해사한 볕이었다. 박 신부는 멍하니 햇볕을 바라보았다. 눈이 부셔 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흐릿하여 꼭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았 다. 그러나 눈은 부셨다.

“아저씨? 와, 정신 드셨네!”

어디선가 많이 듣던 소리가 귓전에 들려왔다. 여자 아이의 음 성이었다. 박 신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 를 돌리려고 했다. 서늘하고 부드러운 것이 박 신부의 머리를 받쳤다.

“이런 곳에서 뭐 하고 계세요? 얼굴이 너무 말랐어요. 세상 …….”

조금씩 눈앞이 어릿어릿해지는 가운데 누가 손으로 머리를 잡 더니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거 마셔 보세요.”

박 신부의 입술에 축축한 것이 닿았다. 알 수 없는 액체가 박 신부의 입술에 제대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입가를 줄줄 흘러내렸 다. 우유였다.

“마셔요.”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미라? 아니었다. 조금 달랐다. 그러면

누가? 어디에서 들은 목소리였을까?

우유가 목구멍을 타고 조금씩 넘어갔다. 몇 방울의 액체가 신선의 묘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몸 안으로 퍼졌다. 아직 죽지 않았 구나. 몸속에 불이 지펴지는 듯, 따뜻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눈앞도 조금씩 밝아졌다.

박 신부의 눈에 희미한 얼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 코도 있고, 발그스레한 입술, 그래 보인다. 미소를 짓는, 어린 계집아 이 여자아이. 미라처럼 생긴 아이.

“몹시 아프신 것 같아요. 내려가세요.”

내려간다고?

“다른 아이들은 무섭다고 도망갔어요. 아이고, 무거워라!” 천진한 얼굴. 미라는 아니었지만 귀여운 눈매가 비슷했다. 그 런데 이 목소리는 어디에서 들은 소리인가?

“아휴, 무거워서 못 들겠어요.”

신기하게도 박 신부의 손이 움직였다. 그리고 아이에게 손을 저었다.

“예? 내려가기 싫으세요?”

손을 많이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다 알아들을까? 박 신부의 입이 저절로 미소를 머금었다.

“신부님이세요? 무슨 중요한 일을 하시고 계시는 거예요? 추우니까 그냥 저랑 내려가요.”

박신부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울지 마세요. 네? 그러지 마세요.”

아이도 따라서 울기 시작했다. 아이는 나 때문에, 내가 불쌍하 다고 울고 있다. 미라도 울었을까? 그러지 마. 더 이상, 더 이상 눈물은 싫다. 아이야, 너는 제발 울지 마라. 난 세상에서 눈물을 없애고 싶단다. 아, 나 하나의 눈물이 온 세상 사람들이 눈물을 대신할 수 있다면………………

몸에 조금씩 힘이 돌아오고 있었다. 박 신부는 안간힘을 다해 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아이가 옆에서 거들었다. 아이는 까닭 없이 울고 있었다. 이유 없는 눈물. 아이는 나를 가련히 여기고 있었다. 추한 몰골로 아무도 없는 장소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 같 은 나를 도와주었고, 이제는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박 신부는 이를 악물었다. 아이가 몸을 받쳐 주었다. 작은 몸으 로, 비에 젖고 먼지와 오물에 찌든 박 신부의 몸을 받쳐 올리고 있었다. 누가 시켰을까? 이러면 무슨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일까? ‘오오, 하느님! 사람은 선합니다. 모든 사람은 선하옵니다!’ 발이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자꾸만 발목이 꺾여 휘청거렸다. 고통은 없었지만 중심을 잡기 힘들었다. 온몸에서 뼈마디가 와 드득거렸다. 아이는 입을 다문 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 다. 그래, 인간은 나처럼 추할 수도, 이 아이처럼 맑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힘이 나지 않았다. 실낱같은 힘도 없었다. 신통한 능력이 주어지기는 커녕, 몸 하나 가눌 힘이 없었다. 박 신부는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기댔다. 몸이 바르르 떨렸다. 기대자. 이 작고 힘없 는 아이에게라도…………….

아이는 휘청거리는 박 신부를 힘껏 부축하여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척 힘들 텐데도 힘들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박 신부는 아이의 눈을 내려 보았다. 맑고 슬픔에 찬 눈. 미라와 같은 눈. 아, 그것은 성모님의 눈매이기도 했다. 독생자 를 안고 슬픔에 잠긴 눈, 마리아, 그리고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님의 눈. 목소리. 기억이 났다. 그건 몸 살로 몸이 끓고 있던 당신의 아들을 내려다보시던 어머님의 눈 매, 어머님의 목소리였다. 아아!

박신부의 눈에서 눈물이 터질 듯 흘러나왔다. 박 신부는 끝없 이 이어진 계단을, 자그마한 아이의 부축을 받아 휘청거리며 내 려갔다. 자신은 남을 도울 수 없었다. 오히려 남의 도움을 받고 있다.

“울지 마세요. 자꾸 우시면 싫어요.”

아이가 훌쩍거리며 말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도박 신부는 참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말문이 트였다.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름, 이름이 뭐지?”

아이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박 신부를 돌아보았다. 이름을 물어본 것이 반가웠던지 얼굴에 기쁜 빛이 흘렀다.

“나희예요. 신나희.”

“나희? 예쁜 이름이구나.”

“후훗.”

천국은 거기 있다고, 아이들의 웃는 얼굴에 있다고 박 신부는 생각했다. 박 신부의 눈에서 눈물이 멎었다. 박 신부는 무력감을 느꼈다. 자신은 또다시 실패했고, 어린 아이의 힘으로 겨우 살아 난 셈이었다. 다만 나희의 밝은 얼굴에서, 희망의 실마리를 발견 한 것 같아 약간은 위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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