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2권 13화 – 초치검의 비밀 3 : 밀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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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국내편 2권 13화 – 초치검의 비밀 3 : 밀법진


밀법진

현암은 말없이 운전대만 잡고 있었고 손민구 기자는 앞자리에 앉은 지연보살에게만 떠들어 댔다. 자영은 눈을 깜박거리면서 지연보살에게서 무슨 말이 나오나 지켜보았지만 지연보살은 여 전히 수줍은 미소만 짓고 입 한번 열지 않았다.

준후는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듯 몇 번 움찔거렸으나 현암에 게 무슨 다짐을 받았는지 눈치를 받고 입을 꾹 다물었다.

현암의 운전은 성격 탓인지 거칠었다. 박 신부가 모는 뒤 차는 어느새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한참이나 뒤처져 있었다.

“서요!”

준후의 외마디 소리와 함께 차가 우뚝 멈춰 섰다. 몸이 왈칵 앞 으로 쏠리면서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가운데 끼어 앉아 있던 준후는 거의 앞창을 뚫고 튕겨 나 갈 뻔했으나, 현암이 손으로 막는 바람에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 다. 손 기자가 시트에 부딪힌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뭡니까?”

현암은 고요히 앉은 채 앞만 보고 입을 열지 않았다. 준후가 흥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밀법진! 누가 여기에 이런 것을…..”

현암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깰 수 있니?”

“해 봐야죠.”

손 기자와 자영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무슨 진이 어떻고 그것을 깬다고? 겉보기보다는 박력이 있는 자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밀법진요? 그게 뭔데요? 아무것도 없잖아요?”

지연보살이 입을 열었다. 놀란 표정은 아니었지만 안색이 다소 질려 있었다.

“있어요. 보이지 않겠지만요.”

손 기자도 끼었다.

“아니, 뭐가 있어요? 그냥 가면…… 어? 내리라구요?”

현암이 어느새 차에서 내린 후 다들 내리라고 손짓을 했으나 손 기자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현암을 쳐다보았다. 일행이 일단 내리자 현암이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차는 더 못 가요. 아예 붙었어요.”

“예? 붙어요? 어디요?”

“땅에요.”

“그・・・・・・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현암은 대답하기 귀찮다는 듯 눈을 돌렸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준후가 그렇다면 그런 거예요.”

“그게 어떻게… 난 못 믿어요.”

“아, 못 믿겠으면 가요.”

“네?”

“조용히 따르든지 아니면 빨리 가라고요.”

“그래도 저런 아이가 뭘…………….”

“저런 아이 아니에요. 준후가 말하는 건 무조건 따라야 해요. 안 따를 거면 돌아가세요.”

“말도 안 따르고 안가면요?”

“에휴, 뭐 죽든지……. 재수 좋으면 식물인간 정도……………”

자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저런 아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손 기자는 미심쩍은 듯 손을 뻗어 차의 키를 돌려 보았다. 시동이 걸렸다.

“아니, 차가 왜 못 간다는 거죠? 엔진이 돌잖아요?”

“엔진이 돌면 뭐해요? 바퀴가 붙어 버렸는데!”

“농담하는 겁니까? 내가 해 볼까요?”

“망가져요!”

현암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손 기자는 운전석으로 옮겨 타고 클러치를 힘 있게 떼었다. 순간 잘 돌아가던 엔진이 뭔가에 걸린 것처럼 픽픽거리더니 죽어 버리고 말았다. 정말 바퀴에 뭐가 끼 어 있는 것 같았다. 손 기자는 머쓱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다. 

“어・・・・・・ 이거 정말 뭐가……………!”

“아, 왜 말을 안 들어요. 정말! 하지 말라니까 왜 그래요? 수리 비 낼 것도 아니면서!”

“예?”

“에휴. 아녜요. 하여간 이제 안 되겠어요. 다들 그냥 돌아가요. 잘못하면 큰일납니다.”

자영이 현암 앞으로 나서려 했다. 그녀의 얼굴은 심각하게 변 해 있었다. 준후가 자영에게 말했다.

“누나! 정말 돌아가는 게 좋아요. 잘못하면 큰일 난다구요. 이 건 정신을 흐트러뜨리는 정도의 보통 진법이 아녜요.”

“잠깐 잠깐! 진법? 그러면 삼국지에 나오는 팔진도(八陳圖)*같은 거 말이니?”

“그 정도가 아녜요! 이건 밀교의 금강계구회만다라(金剛界九陀羅)를 응용한 진 같은데…”

“밀교? 만다라? 설명 좀 해 줄래?”

준후는 슬픈 듯 한숨을 쉬었다.

“제대로 설명하려면 잠도 안 자고 서너 달 걸리거든요?”

“뭐, 뭐?”

“그냥 가세요.”

“난 못가! 난 취재하러 왔단 말이야! 도대체 앞에 뭐가 있다 고 그래?”

자영이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 현암이 갑자기 손을 들어 제지 했다. 인상이 하도 살벌해서 자영은 순간적으로 발을 멈추었다. 

“움직이지 말아요!”

현암이 손을 뻗어 옆에 있던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 자영의 앞에 던졌다. 나뭇가지는 와삭 하는 소리를 내면서 허공에서 부서 지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자영이 놀라서 말했다. 

“아니, 도대체 뭐죠? 마술인가요?”


* 제갈공명이 창안했다는 독자적인 진법을 말한다. 상하좌우 팔팔육십사로 빽빽하게 병사들을 배치한 진형이었다고 전해진다.


“그 나뭇가지처럼 되고 싶어요?”

“아뇨.”

“그럼 제발 가라니까요.”

“못 간대요!”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손 기자가 살며시 호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어 던졌다. 볼펜 역시 와작 부서져 버렸다. 손 기자가 신음을 흘렸다.

“이, 이게 뭐지? 귀 귀신인가보다!”

“귀신이 아니라 귀신을 막으러 온 사람들이 친 진입니다.”

지연보살의 말이었다. 놀란 손 기자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말을 받았다.

“미, 믿을 수 없어. 세상에 어찌 이런 것이… 어찌……..”

준후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니 가세요. 위험해요.”

“준후, 지연보살님, 어서 가십시다!”

현암은 냉랭하게 말했고, 준후는 가는 눈을 더 가늘게 뜨고서 사방을 살폈다. 자영과 손 기자도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주변에 이상한 낌새는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현암 형! 수인을 맺어요. 금강계구회만다라! 첫 번째는 항삼 세삼매야회(降三世三昧耶會)예요.”

“지연보살님, 임(臨)자 부동근본인(不動根本印)입니다.”

“예. 조금 알아요. 그런데 파괴하진 않나요?”

“이유가 있어서 쳐 놓은 것 같아서요. 그러니 이걸 만든 사람 만날 때까지는 그냥 통과해 보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현암은 말을 마치자 자영이 소리쳤다. 현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아직도 안 돌아갔어요? 충분히 경고했으니 내 말 안 듣고 나서 원망 말아요. 우리도 이젠 당신들 신경 못써 준다고요.”

자영은 화가 나서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는데 자기들끼리만………. 손민구 기자는 주춤거리며 물러서려고 했다.

“그냥 돌아갑시다. 자영 씨.”

“나도 갈 거예요!”

자영이 발을 내딛자 몸을 억누르는 듯한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으악!”

자영은 기겁을 하며 발을 뺐다. 그러자 고통은 없어졌다. 눈앞 을 보니 세 사람이 이상한 손 모양을 하고 앞선 준후가 뭐라 뭐 라 중얼거리며 길옆으로 꼬불꼬불 나아가고 있었다. 자영은 다 급한 김에 발을 뻗었으나 다시 고통이 밀려왔다.

“으악! 아이고!”

하도 아파서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오기가 생겼다.

‘아예 확 뛰어들어? 에고, 그랬다간…….’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다. 바보 같은 손 기자는 눈만 데굴 데굴 굴리며 멍청하게 서 있었고 자영의 발은 벌써 심하게 부어 오르고 있었다. 무슨 도깨비장난 같았다.

“으앙!”

현암은 고개를 돌렸다. 자영이 주저앉아서 울고 손 기자는 영 문도 모르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지연보살이 고개를 설레 설레 저었다. 준후가 눈짓을 했다. 시끄러우니 그냥 데려가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의미 같았다. 현암은 내키지 않았으나 울음소 리가 짜증났다. 여자가 우는 건 딱 질색이었다.

현암이 찡그린 얼굴로 되돌아오자 자영은 곁눈질로 현암을 슬쩍슬쩍 훔쳐보면서 더 큰 소리로 울어 댔다.

“아, 그만해요! 다 큰 어른이…………..”

“으아앙!”

분명히 거짓 울음이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상대가 체면을 버리면 대응이 힘들어진다. 현암은 생각했다.

‘이런 여자는 귀신보다 짜증나네.’

“아니 왜 울고 그래요? 애예요? 떼쓰는 겁니까?”

“취재를 해야 한단 말예요!”

“이런 걸 취재해서 뭐하려고요? 사람들이 믿지도 않을 테고, ……”

손 기자도 그제야 눈치를 챘는지 앞으로 나섰다.

“그건 저희가 판단할 문제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기사에 쓰지 는 않겠어요. 다만 고분의 역사적 자료를 찾으려는 것뿐입니다.”

“고분이요? 그게 어떤 건지나 알고 하는 말이에요?”

자영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저 현암이라는 사람은 고분에 대해 뭔가 알고 있나 보다.

“으아앙!”

“아, 제발 그만……!”


결국 현암은 떫은 감을 씹은 얼굴이 되어 준후에게로 돌아왔 다. 간신히 타이르고 어르고 협박까지 해서 두 기자를 떼어 놓고 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예감이 이상했다. 특히 여 기자인지 스크 립터인지가 씹어 먹을 듯한 눈초리로 째려보는 것도 섬뜩했다. 현암은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진 속에서 망상을 갖는 것은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일행은 준후의 인도로 항삼세삼매야회, 항삼세갈마회降三世 羯磨會), 이취회(理趣會), 일인회(一會), 사인회(四印會), 공양 회(供養會), 미세회(微細會) 등의 일곱 단계를 임(臨), 병(兵), 투 (), 자(者), 개(), 진(陣), 열(列)의 수인을 바꾸어 맺으면서 무사히 통과했다.

준후가 잠시 쉬는 동안 설명을 했다. 숲 속으로 한참 들어간 다음이었다.

“이것은 금강계구회만다라를 진으로 옮긴 것으로 아홉 개의 진으로 되어 있어요. 여기까지는 경고용인지, 그다지 강한 방어는 아녜요. 사람이 모르고 들어와도 죽을 정도는 아닌 것 같아 요. 겁을 줄 정도죠.”

지연보살이 말을 이었다.

“진을 친 사람이 마음 씀씀이가 깊군요. 그러나 만다라대로라 면 삼매야회耶會)와 근본성신회(根本成會)의 두 단계가 남아 있지 않은가요?”

“잘 아시네요. 그 두 단계가 문제예요. 대강 보니까, 그 두 진 은 통과가 어려울 것 같아요. 아주 강한 힘이 있어서요. 그리고 여기까지의 일곱 단계도 마지막 두 단계를 잘못 건드리면 변해 버릴 수 있어요.”

현암이 물었다.

“진이 변한다고?”

“예. 그러니까 여기까지는 진법으로 볼 때 사문(門)*은 아녜 요. 경문(門)**에 해당하죠. 그러나 이 진은 지금 잠들어 있는 것 같아요. 잘못 건드리면 생문(門)***이 닫히고 모든 입구가 빙빙 돌게 되어서 길이 사문으로만 통하게 바뀌고 말아요.’


*진법에서 들어가면 들어간 자가 반드시 죽게 되는 문.


“흠!”

“그리고 또 이상한 게 있는데, 이건 우리나라 술법이 아녜요.”

“아니라면?”

“이건 진언종 같은데………….”

“진언종? 그럼 일본 밀교?”

준후가 뭐라 대답하려는데, 뒤에서 여자와 남자의 비명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이건 또 뭐야?”

현암이 짜증을 내자 준후가 말했다.

“그 기자들인데요?”

“에이! 왜 따라오는 거야? 위험하다고 했는데!”

“그래도 일단은 구해 줘야 되지 않나요?” 

“아, 정말 냅두고 싶지만…………”

현암이 마지못해 몸을 돌리자 준후가 말했다.

“수인은 기억하죠? 전진을 좀 더 살필게요!”

“염려 마!”


** 들어가서 죽지는 않으나 호되게 당하고 놀라게 되는 문.

*** 진법에서 들어갔다가 무사히 나올 수 있는 문


지연보살도 현암을 따라가려고 몸을 돌렸다. 상처라도 입었으면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현암은 수인을 고쳐 맺으면서 뒤로 걸음을 옮겼다. 지연보살이 뒤를 따랐고 준후는 그냥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현암이 숲 속으로 사라지자 준후는 사방을 꼼꼼히 살피며 앞 에 쳐진 보이지 않는 힘의 장막을 거둘 방법을 찾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런 준후의 등 뒤로 검은 그림자가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현암은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수인을 고쳐 맺으면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자영의 비명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비명 은 이제 흐느낌으로 바뀌어 있었고 이따금씩 손 기자의 탄식도 섞여서 들려왔다. 분명히 현암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뒤를 따르다가 진 속에서 고통받으며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으리라. 뒤쪽에서 따라오는 지연보살도 입을 꾹 다문 채 걸음을 재게 놀렸다.

마침내 현암은 자영과 손 기자를 발견했다. 두 사람은 멀리 가 지 못하고 겨우 이 단계인 항삼세갈마회의 초입의 위치에 있었 다. 자영의 몸은 허공에 떠올라서 발을 움직여도 나아가지도 물 러서지도 못했고, 손 기자는 코앞에 자영이 있는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이 허우적거리며 겨우 반경 일 미터쯤 되는 원호 속을 눈먼 쥐처럼 맴돌았다. 그들은 지금 진의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함정에 빠져 있었다. 자영은 시각까지 마비되지는 않았는 지 뱅뱅 돌기만 하는 손 기자에게 욕까지 해 대고 있었다. 그러 다가 그녀는 현암이 다가오는 것을 어떻게 알아보고는 목소리를 싹 바꾸며 반가움에 차 소리를 질렀다. 온몸이 풀에 긁히고 여기 저기 찢겨져 있는 것을 보면, 그나마 약하게 쳐 놓은 초입의 진세를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느라 꽤나 고생한 듯했다.

“여기, 여기예요! 도와줘요!”

“정말 도와줘야 할까요?”

“무슨 소리예요! 나 죽어요! 으앙!”

“에휴………… 자! 손가락으로 이렇게 수인을 맺어요! 병!” 현암이 수인을 설명해 주자 자영은 금세 알아듣고 수인을 맺 었다. 그러자 자영의 몸이 털썩 땅에 내려앉았고, 헤매고 다니던 손 기자는 자영이 붙잡고 인장법을 일러 주었다. 손 기자도 비로 소 눈이 트인 듯 온통 땀범벅이 된 얼굴을 흔들어 댔다.

“어휴, 죽는 줄 알았어요.”

현암은 여전히 냉랭하게 말했다.

“내가 안 도와줬으면 당신들 죽을 수도 있었거든요? 그러니 돌아가요. 정말 위험하다고요.’

자영이 금세 살아난 듯 대들었다.

“아니, 또 가라고요? 가라는 게 무슨 주문이에요? 우리가 가면 만사형통되나요? 그럴 순 없어요! 우리도 갈래요!”

“어, 말 잘했어요. 가라니까요.”

“아니! 돌아가는 게 아니라 따라간다구요! 이제는 취재보다도 오기가 생겨서라도 그놈의 무덤인지 뭔지 내 손으로 뒤져 봐 야겠어요!”

“아, 정말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요? 무덤 속 들어가서 후회 할 거예요? 이건 초입의 경고 표시판 같은 건데 거기 걸려 버둥 거려 놓고 그런 소리가 나와요?”

“안 죽었으니 됐죠, 뭐.”

“이봐요. 기자님. 저 안쪽은 훨씬 무시무시하거든요? 그런 걸 그냥 통과하려다가는…………….”

“뭐 그래 봐야…..”

“즉시 사망이에요!”

현암은 손으로 자신의 목을 가로로 긋는 시늉을 하며 대답했다. 그러나 현암의 말에 지영은 겁도 없이 곧바로 대꾸했다.

“뭐 죽기밖에 더하겠어요?”

현암은 코웃음을 치며 겁을 주었다.

“이봐요. 그냥 죽는 게 아니고 엄청난 고통으로 죽어요. 당신들 죽어도 아무도 거기 못 들어가고. 그냥 허공에 매달린 채 썩어버릴 거예요. 보기 좋겠죠?”

손 기자는 안색이 변했지만 자영은 겁 없이 떠들어 댔다.

“여기서 그냥 나간다 해도 안달이 나서 죽을 거예요. 기왕 죽을 거라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죽을래요!”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현암 씨라고 했나요? 당신이야말로 도대체 무슨 권리로 내게 오라 가라 하는 거죠? 내가 가고 싶으면 가는 거지 뭐! 그러니 송장 치우고 싶지 않으면 여기를 벗어나는 방법이나 어서 가르쳐 주세요!”

“뭐, 뭐요? 송장 치운다고요?”

“방금 말했잖아요. 난 무조건 갈 거니까, 내가 허공에 매달린 송장되면 당신 책임이거든요?”

“그건 억지예요!”

“억지 아니에요! 우리를 떼 놓기 위해서 사지에 내버려 두 고 방관하겠다는 소리잖아요! 그리고 시체를 아무도 못 찾는다 구요? 당신은 우리 죽으면 어디서 죽었는지 알잖아요. 안 그래요?”

현암은 겁 한번 주려다 말꼬투리를 잡히자 답답해졌다. 자영 은 계속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흥! 내가 그렇게 죽어 봐요. 그 몰골로 매일 밤 꿈에 나타나서 원망해 줄 거예요! 내가 그냥 죽을 줄 알아요? 복수할 거라고요! 오호홋!”

“아니, 대체 목숨 걸고 들어가겠다는 그 심보는………….”

“나 원래 심보 나쁜 여자거든요?”

자영의 눈이 또다시 곱지 않게 변했다. 자영이 현암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길을 가르쳐 줄래요, 아니면 그냥 여기서 죽을까요?”

억지도 보통 억지가 아닌데다가 찡그리고 있는 자영의 눈에 장난기까지 보였지만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어쩔 줄을 모르고 있던 현암이 막 입을 열려는데 뒤쪽에서 껄 껄껄 하는 웃음소리가 울려왔다. 박수 철기옹이 박 신부와 승희, 안 기자를 끌고 수인을 맺으며 들어왔다.

“여보게 젊은 친구! 귀찮으니 그냥 데리고 가세그려! 그 안에 는 사람들에게 알려 줄 것도 있으니…….”

“철기옹이시군요.”

자영은 박수철기옹이 자기를 거들며 나서자 반가워서 그쪽으 로 다가가려고 했다. 그러나 철기옹은 낌새를 알아채고 벼락같 이 소리를 질렀다.

“예! 가까이 오지 마! 부정 타! 요즘 젊은 것들은 왜 이리 법도가 없지?”

자영은 흠칫했으나 까놓고 대들려고 하던 승희보다는 훨씬 사회 경험이 많은 베테랑답게 그 자리에서 꾸벅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경거망동했습니다.”

승희는 삽시간에 요사를 떠는 자영이 못마땅했으나 안 기자와 박 신부는 그저 웃을 따름이었다. 철기옹은 껄껄 웃으며 말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지연보살이 뒤를 따르면서 자영을 툭 치며 따라오라는 눈짓을 했다. 안 기자가 현암에게 다가왔다. 

“이봐, 현암, 믿을 수가 없군. 진법이라는 게 정말 세상에 있다 니, 그리고 자네가 고수 중의 하나였다니 말이야.”

“그런 소리 말라고. 내가 무슨 고수야, 고수는 너, 여기 오면 안 되는 거였는데. 네가 죽건 말건 따라오는 게 아니었는데………….” 

“야야, 친구잖아.”

“나, 지금 무지 후회중이다. 어쨌든 입 꼭 다물고 있어.”

“그런데 저 노인이 말했던 건 뭐야? 사람들에게 뭘 알려?”

“서두르지 마라. 차차 알게 될 테니.”

“아니, 궁금해 죽겠다고. 알게 될 거라면 말해 줘도 좋잖아?

여기 모인 사람들은 분명 뭔가 알았기에 온 거 아냐?”

“전부 아는 사람은 없어. 다만……………..”

“다만?”

“여기가 초치검과 고대의 신물에 얽혀 있는 곳이라는 사실 말고는”

“초치검과 고대의 신물? 아니 그러면 일본 천황의 삼종신기 중에 하나라는 초치검 말고도 다른 신물이 있다는 건가?”

“그럴 수도…… 오백 구가 넘는 왜구들의 시체, 그건 아마도………….”

“아마도 뭐지?”

“원정대였을 거야. 우리나라에 숨겨져 있는 고대의 신물을 찾으러 온 원정대.”

현암이 말을 이으려는데 행렬이 갑자기 멈추어 섰다. 아까 통 과할 때는 없었던 불기둥이 오솔길 위에 이글거리고 있었다. 불 기둥은 뜨거운 열기를 뿜고 있었으나 주변을 태우지는 않았다.

“저건 또 뭐야?”

“진법이 변했어! 누가 진을 건드린 것 같아.”

앞쪽에서 철기옹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놈이 수작을 부리는거여?”

철기옹은 등에 메고 있던 말굽 모양의 나무 막대를 내렸다. 그 막대를 당겨 줄을 걸자 활이 되었다. 시위를 푼 활을 본 적이 없 던 안 기자로서는 그게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말굽 모양의 나무 막대는 시위를 끌러 놓은 국궁(國弓)이었다. 철기옹은 수인을 풀 고 움직이는데도 일단 활을 잡자 주위의 진법에 영향을 받지 않 았다. 철기옹이 중얼중얼 소리를 읊으면서 활을 쥐자 조그마한 영감 같았던 철기옹의 몸이 쫙 펴지면서 기운이 넘쳐흘렀다. 철 기옹이 빈 활을 힘 있게 당겨서 줄을 연속으로 두 번 튕기자 눈 앞의 불기둥이 퍼석하고 흩어져 사라지고, 저쪽에서 조그마한 노란 깃발이 날아오다가 무언가에 부딪힌 듯 땅에 툭 떨어졌다. 안 기자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빈 활인데?”

“영력으로 쏘는거야. 옛날 조선 태조 이성계나 명장들이 썼던 술수지*.”

“저 깃발은?”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철기옹이 소리를 질렀다.

“썩 나와!”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한 남자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주기 선생 상준이었다. 다시 사방에서 불기둥이 일어나고 수 상한 회오리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힘이 사방을 채워서 자영과 손 기자는 말도 제대로 이을 수가 없었다.

“철기 어르신, 그간 별래무양(別來無)하였소이까?”

“관둬!”

“어르신은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네놈이야말로 뭣하러 왔어? 초치검 때문에?”

“저 같은 놈이 무슨 복이 있어서 그런 귀한 것을 가질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냥 구경 삼아 나왔습니다.”

“이놈, 구경 왔다는 놈이 열두 깃발을 다 메고 왔어?”


*고려 태조 왕건이나 조선의 태조 이성계, 그의 수하 장수 통지란 등은 모두 빈 줄로 활을 당겨 솔방울을 떨어뜨리거나 물동이를 뚫는 등의 능력을 가졌다고 전 해진다.


철기옹과 주기 선생이 싸움하듯 떠드는 동안 안 기자가 뒤에서 현암을 쿡 찌르며 말을 했다.

“저 사람, 도력이 높아? 열두 깃발은 뭐고?”

“십이지신술이란 거야. 저 사람 기술이라던데 나도 처음 봐.”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글쎄. 사파에 가까워. 사리사욕을 챙기는 사람 같아.”

주기 선생은 뭐라 대꾸를 하다 말고 별안간 등에서 깃발 하나 를 빼내 휘둘렀다. 펄럭 하고 펼쳐진 깃발에는 부적처럼 이상한 글자가 금색으로 그려져 있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어르신. 이 진은 왜놈들이 쳐 놓은 게 분명합니다.”

“나는 눈이 없을까?”

“게다가 진세가 바뀌고 있어요. 많은 사람이 들어와 진을 부수 고 있어서……………..”

“부숴?”

“예. 현현파, 오의파, 청홍검을 든 여자 모두가 사방에서 진으 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진세가 무너질 것 같습니다. 우리도 여기서 만나게 되었으니 힘을 합치는 것이 어떨까요?”

“너 같은 녀석은 소용없다! 구경이나 해라!”

철기옹이 소리를 지르는 순간 저쪽에서 자그마한 아이가 뛰어 나왔다. 준후였다. 이제 숲 속은 광풍이 휘몰아쳐 금세라도 귀신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번뜩이는 불기둥이 사방에 일어나 돌아다니는 기이한 풍경 속에서 아이가 뛰쳐나오자 안 기자와 자영, 손 기자는 흠칫했다.

“현암 형. 저, 저기!”

현암이 소리를 쳤다.

“뭐니 준후야?”

“사람들이 싸워요!”

“누가?”

“진을 깨는 사람과 진을 친 사람들이……”

“아, 벌써……..

준후는 급하게 덧붙였다.

“우리가 아는 사람도 있어요!”

“누구?”

“홍녀 누나!”

그때까지 말이 없던 박 신부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홍녀가 어떻게 알고 여기에 왔단 말인가?

주변에 몰아치는 바람은 걷잡을 수 없이 위세가 더해졌고, 검 은 기류와 함께 불덩이들도 날아다녔다. 진이 본격적으로 발동 한 것이다. 박 신부는 조용히 자영과 손 기자, 안 기자를 자기 뒤 로 물러서라고 손짓하고 기도력을 발했다. 오라가 둥글게 퍼져 나가면서 바람과 다른 힘들을 밀어내자 진세의 압박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와, 이………… 이거…..”

안 기자와 자영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러나 박 신부는 아 랑곳 않고 현암과 승희에게 눈짓을 했다. 진을 깨 버리자는 신호였다.

주기 선생은 깃발을 휘저어 바람을 일으켰고, 철기옹은 허리 를 쭉 편 채 지연보살을 등 뒤에 숨게 하고 당당히 버티고 섰다. 그의 입에서는 나직하게 주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뭇가지와 잔돌들이 사납게 이는 바람에 떠올라 빗줄기처럼 퍼부어 내렸다. 이제 진을 통과하든가 아니면 파괴해야 했다. 현 암은 입을 꾹 다물고 기공력을 모아 아까 돌아섰던 여덟 번째 삼 매야회의 진문 쪽으로 달려갔다. 승희와 주기 선생이 뒤를 따랐다.

바람이 점점 심해지자 흙먼지를 일으켜서 주변이 먼지로 자 욱했다. 공기 속에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서서히 뭉치기 시작했 다. 기공으로 몸을 닦은 현암으로서도 점점 버티기 힘들어져 갔 다. 진이 본격적으로 발동되고 있으니, 이대로는 오래 버틸 수 없었다. 진을 파괴하는 방법 밖에는.

현암은 호신부(身符)를 쥐고 뒤따라온 준후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어디를 깨야하지?”

준후가 소리를 질렀다. 이제는 옆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마저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왼쪽! 소나무요! 그게 삼매야회의 핵이 있는 자리예요!”

눈앞의 검은 기운이 짙어지면서 바람 소리가 귀를 세차게 때 렸다. 현암도 덩달아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삼매야회는 재(在)의 무드라로 나타나요. 자연력을 지배하는 힘이죠! 대일여래의 자제력을 나타내는 중심의 자리! 그 힘이 씐 게 저 소나무라니까요!”

“어떻게 하느냐고!”

“꺾어요!”

진은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듯, 현암이 월향을 꺼내자 먹장과 같은 구름 더미가 밀려와 몸을 덮쳤다. 준후가 뒤에서 부적 두 장을 꺼내어 허공에 띄우자 부적이 확 타오르면서 구름의 위세 가 약간 줄어들었다. 현암은 월향을 쥔 오른손에 기공력을 집중 했다. 검기가 길게 뻗어 나왔다.

“오, 검기!”

옆에 서 있던 주기 선생이 신음 소리를 냈다. 현암은 월향을 날렸다.

꺄아아악!

귀곡성과 함께 월향은 앞을 가리고 있는 구름 더미를 뚫고 준후가 가리킨 소나무에 박혔다. 그러나 나무는 꺾이지 않았다. 진 의 힘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도움을 주려는 듯 철기옹이 잇달아 활시위를 튕기자 소나무의 굵은 가지들이 툭툭 부러져 나갔다. 현암은 태극패를 꺼내 기공을 월향에 비추었고 준후도 승희의 힘을 끌어서 인드라의 뇌전을 발했다.

준후의 손에서 뻗어 나간 두 갈래의 번개와 태극패에 비추어 진 현암의 기공력이 월향에 집중되자 월향이 꽂혀 있던 소나무 가 펑 소리를 내면서 폭발하듯 산산이 부서졌다. 소나무 가지가 사방으로 후두둑 떨어지면서 광풍과 검은 안개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잦아들었다. 그때까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주기 선생이 경망스럽게 박수를 쳤다.

“대단하시오, 대단해. 귀물을 부려 저 굵은 나무를 박살 내다 니. 명불허전이로군.”

현암은 그 소리가 고깝게 들렸으나 접어 두기로 하고 뒤를 돌 아보았다. 안 기자와 일행이 무사한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박 신부가 서서히 기도력을 거두었고 셋은 얼이 빠져 와들와들 떨 고 있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어 보였다. 자영이 김빠지는 소리를 했다.

“저, 저 사람들 귀신인가 봐.”

현암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주기 선생이 앞으로 나섰다.

“아홉 번째 근본성신회는 내가 처리하겠습니다. 좀 쉬시지요.”

뒤에서 철기옹이 소리를 질렀다.

“야 이놈아! 벌써 성신회는 안에서부터 붕괴되었다. 진이 뭉개진 것을 몰러? 뻔뻔한 녀석 같으니.”

주기 선생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니, 몰랐습니다. 철기 어르신, 왜 그렇게 저를 몰아붙이십니까?”

“아, 없는 재주를 자랑하려는 네 속이 하도 빤해서 그랴!”

“너무하시네.”

주기 선생이 씩씩거리며 철기옹에게 가려는데 준후가 잡았다. 

“아저씨, 싸우지 말아요. 예?”

주기 선생은 말똥말똥 자신을 쳐다보는 준후를 바라보더니 한 숨을 쉬고는 껄껄 웃으면서 숲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안 기자가 중얼거렸다.

“엄청 빠르네! 힐기보법이라고 했든가? 저 사람을 마라톤에 내보내면…………….”

현암이 째려보자 안 기자는 얼른 입을 닫았다. 현암은 말없이 일행에게 손짓을 했고 사람들은 진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문의 출구는 숲이 끝나는 지점이었다. 숲에서 나오자 사방 이 사오백 제곱미터는 됨 직한 붉은 황무지가 운동장처럼 펼쳐 져 있었다. 한복판에 십 수 명의 사람과 세 사람이 마주보고 서

있었다. 한편에는 안 기자가 보았던 현현파의 검은 옷을 입은 네 명, 병수라고 하던 대머리 차력사, 오의파의 두 사람, 청홍검의 보따리를 등에 메고 있는 가냘픈 여자와 그 뒤에 서 있는 평범한 노파, 체구가 큰 네 명의 화상과 작은 사미(彌가 한 명, 이렇 게 열네 명이었다. 반대편에는 남색의 일본 승려 복장을 한 거한 과 빼빼 마른 노승, 그리고 낯익은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홍녀였다.

지금 청홍검을 멘 여자와 일본 승복을 입은 거한이 앞에 나서 서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들도 현암 일행이 진문 속에서 우르 르 달려 나오자 눈길을 돌렸다. 먼저 간 주기 선생은 어디로 갔 는지 그 자리에 없었다.

준후가 소리를 질렀다. 

“홍녀 누나!”

먼발치에서 준후를 알아본 홍녀가 잠시 웃어 보이더니 곧바로 특유의 매서운 얼굴로 돌아갔다. 전후 사정을 잘 알 수는 없었지 만 양편이 대립하고 있는 듯했다. 철기옹이 앞으로 나서며 카랑 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이! 도야지 할멈! 안 죽고 살아 있었구먼그려!”

청홍검을 멘 여인의 뒤에 있던 노파가 움찔하면서 화난 얼굴로 노려보았다.

“저 쭈그렁바가지 영감은 아직도 안 뒈지고 깨깨 걸어다니누먼! 얘, 현정아! 저 영감부터 쳐 버려라!”

현정이라는 검을 멘 여인은 노파의 난데없는 말에 어리둥절 해했다. 철기옹은 깔깔 웃으면서 걸음을 옮겨서 노파에게 다가갔다.

“어이, 도지, 도야지라고 혀서 화났나 부지? 깔깔깔!”

노파는 웃지도 않고 얼굴을 돌려 버렸다. 예기치 못했던 사태 에 당혹한 것은 두 일본 승려와 홍녀였다. 박 신부가 우렁찬 목 소리로 홍녀에게 인사를 했다.

“홍녀 님! 안녕하셨소? 여기는 어쩐 일로?”

“예. 신부님도 안녕하신지요? 현암 상도, 준후 상도?”

홍녀는 거의 정확한 한국말로 대답했다. 얼굴은 여전히 긴장 한 상태였다.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이 그들과 맞서고 있던 일본인들과 아는 척을 하자. 현현파의 네 사람이 쑤군거렸고 대머리 도인 병수도 인상을 찌푸렸다. 병수의 이마에 박힌 갈매기가 더 또렷해졌다. 승려들과 오의파의 두 사람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박 신부는 그 들을 무시하고 말을 이어 갔다. 안 기자는 자영과 손 기자에게 자신의 앞을 가리도록 하고 숨어서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소 형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대놓고 사진을 찍다가는 좋지 않은 일 이 생길 것 같아서였다.

“같이 오신 분들 소개를 해 주시지요.”

홍녀가 뒤의 두 사람에게 일본말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덩치 큰 승려가 먼저 퉁명스럽게 한마디 했다.

“도운(道)데스.”

그러자 뒤쪽의 빼빼 마른 노승도 합장을 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스기노방 데스.”

홍녀가 덧붙였다.

“두 분은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합니다.”

홍녀가 차분하게 말을 전해 주자 사람들 사이의 긴장감이 조 금 풀어지는 것 같았다. 청홍검을 메고 있던 현정이 보퉁이를 어 깨에서 내려 손에 옮겨 쥐면서 말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왜 남의 땅에 와서 앞을 막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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