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2권 14화 – 초치검의 비밀 4 : 드러나는 윤곽

랜덤 이미지

퇴마록 국내편 2권 14화 – 초치검의 비밀 4 : 드러나는 윤곽


드러나는 윤곽

홍녀는 당황한 표정이 되어 현정의 말을 받았다.

“앞을 막다뇨?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러면 저 앞의 커다란 진은 누가 펼쳐 놓은 것이죠?”

“저희가 펼친 게 아닙니다. 저희도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일본계의 수법이던데요?”

“아니요, 저 정도의 진을 치려면 오래 준비해야 합니다. 알 만하신 분들이니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그런데요?”

“그러나 우리가 여기 도착한 지는 두어 시간밖에 되지 않았어요. 틀림없습니다.”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오의파의 두 사람 중 수염을 좀 더 길게 기른 남자가 나섰다.

“오의파의 제자인 고상렬이오. 제가 한 말씀 올리겠소이다.”

 “말씀해 보세요.”

“저는 여러분이 언제 도착했는지 궁금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 이 진을 친 겁니까? 아닌 겁니까?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진을 칠 수 없었다고 생각하라는 건가요? 여러분이 제가 보는 만 큼 재주가 좋다면 진 치는 시간쯤은 줄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건・・・・・・”

“빙빙 돌리지 마시고 확실히 말씀해 보시죠? 제가 넘겨짚은 것인가요?”

얼굴이며 차림새는 흉악했지만 상렬이라는 오의 제자의 지적은 논리적이었고 정확했다.

“우리가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시군요.”

“저희는 불제자입니다. 거짓을 말하지 않아요.”

홍녀가 대답하자 상렬은 말을 이었다.

“말장난 그만두죠? 꼭 여러분이 진을 쳤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설치한 게 아니라 먼저 도착해서 이곳에 설치되어 있 던 진을 발동시킨 것이라면…”

현현파의 맏이인 근호가 끼어들었다.

“이곳에 설치되었던 진이라고요? 그러면………….”

오의파의 다른 제자인 성곤이 대신 답했다.

“우리 오의파는 원래 산천을 떠돌기를 중시합니다. 전에 이곳 에 와본 적이 있죠. 그때는 이 밑에 그런 무덤이 있으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만, 이곳에 놓인 돌이나 고목들이 진 세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의아해했습니다.”

대머리의 거한인 차력사 병수가 어느새 꺼내 든 철봉을 땅에 쿵 놓으면서 소리를 쳤다.

“보나마나야! 고다이고 천황의 검을 찾아가려고 왜놈들이 술 수를 부린 거지! 그러나 그 검은 내가 점찍었어! 아무도 손대지 말라구!”

홍녀의 안색이 붉어졌다. 창피하기도 하고 화도 나는 모양이었다.

“고다이고 천황의 검이라니? 저는 잘 모르겠군요!”

검사 현정이 벌컥 소리를 질렀다.

“발뺌하지 마시지! 초치검을 찾아 온 것이 아니라면 밀교 술사들이 어째서 이런 시골까지 왔지?”

안 기자가 곁에 있던 현암의 옆구리를 찔렀다. 현암과 박 신부를 비롯한 퇴마사들과 지연보살은 그들의 언쟁에 끼어들지 않았다.

“이봐, 자꾸 초치검이니 고다이고 천황의 검이니 하는 이야기 가나오는데, 대관절 어떻게 되어 가는 거야? 가르쳐 줘!” 자영도 옆에 있던 준후를 잡고 물어보았다.

“정말 저 사람들은 다들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준후가 머쓱한 듯 대답했다.

“투시를 하거나 자기가 모시는 신에게 들은 거죠. 저도 신을 불러 보았는데, 매우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 있으니 가서 힘을 합해야 한다는 내용밖에는……………..”

현암도 입을 열었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게 뭔지는 알아?”

“대강은 고다이고 천황도 찾아봤고 초치검도 찾아보긴 했는데…………..”

“그건 일본 천황의 신기야. 천황의 삼종신기의 하나인 천총운검(劍)을 말하는 것이지.”

“역시! 두 개가 같은 건가?”

“가능성은 있지만 속단하기는 일러!”

“근데 검이 있는 건 어찌 알고? 발굴도 안 했는데…………….”

현암은 피식 웃었다.

“그 정도 되는 물건이면………… 대강 느껴지는 게 있거든. 아, 일반인은 모르겠지만 저런 사람들이라면 바다 건너에서도 느낄 수 있어.”

“저런 사람이 아니라 너도 포함 아냐?”

“난 그런 거 못 느낀다. 진짜.”

“아직도 빼냐? 그런데 그건 문화재잖아. 그걸 왜…….”

현암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

“저들에게는 단순한 문화재 이상이거든. 그러나 아직은 그 검 이 진짜인지도 알 수 없고, 하물며…….”

“하물며 뭐?”

“그 검과 이곳에 묻힌 오백 왜구 시체가 어떻게 연관된 건지 아 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준후나 승희, 철기옹까지도 신술을 부리 고투시도 해 봤지만 이곳의 내력을 알아내지 못했으니 말이지.” 

“무슨 말이야? 신통력이 있는데도 알 수 없단 말이야?”

“뭔가 먹장 같은 것이 우릴 방해하고 있어. 엄청난 힘이야. 여 기 모인 사람들의 꿍꿍이는 각자 달라. 어떤 이는 천총운검을 뺏 으려고, 어떤 이는 호기심으로, 어떤 이는 자기가 모시는 신이 시켜서 왔겠지. 우리는…………….”

“자네 일행은 왜 왔지?”

“불안해서 온 거야. 흉악한 음모가 있을지 모른다고 해서.”

“음모를 꾸며? 이들 중 누가?”

“아니. 고대부터 내려온 흉악한 음모.”

“고・・・・・・ 고대? 그런 게 가능해?”

“나도 잘 모른다니까? 준후와 승희가 그렇게 말했어. 그들이 그렇다면 그런 거야.”

준후 승희? 그러고 보니 승희라 하는 여자는 가만히 서서 눈 을 감은 채 양손의 집게손가락을 옆머리에 지그시 대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승희가 일종의 레이더로서, 여기 모인 사람들의 속 마음을 읽어 무언가 알아내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기자가 알 리는 없었다. 준후는 끈덕지게 치근거리는 자영에게 질려 거의 포기 상태로 홀려 있었다. 준후는 그들 일행과 여기 모인 사람 들이 천총운검의 자취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자영에게 털어놓았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잡지에 실린 기사의 내용을 보거나 다른 사람에게 소식을 전해 들었을 거예요. 이상한 내용인지라 투시 를 해 봤겠죠. 그러나 투시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제게도 하나도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더 호기심이 생긴 거죠. 투시나 영사가 안 되게 방해하고 있다면 어떤 중요한 물건 을 강한 영이 수호하고 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니까요.”

안 기자도 준후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저쪽에서는 일본인 무리와 오의파, 현현파, 차력사 병수와 및 검사 현정이 한바탕 설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지금은 이쪽의 이야기가 더 중 요하다고 생각했다. 도지 무당과 철기옹도 핏대를 세워 가며 떠 들고 있었다. 그러나 네 명의 우리나라 승려와 어린 사미는 그냥 뒤켠에 서서 번잡한 일에 말려들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든 알고 싶어지는 법이죠. 그래서 여러 가 지 방법을 쓰게 돼요. 다행히 그 기사에는 대강이나마 시대가 나 와 있어요. 역사책을 조금만 조사해 봐도 고려조 말기 무렵 강 화도에 왜구가 큰 규모로 쳐들어온 시기가 주로 1363년경부터 1375년경까지였다는 걸 알 수 있고요. 그 정도만 알아도 당시의 다른 물건들, 예를 들면 근처에서 나온 유물이나 하다못해 나무, 큰 돌, 산신 등을 통하면 단서를 얻을 수 있지요. 전 잘 모르지만 산법(算法)으로 풀 수도 있구요.”

“정말?”

“아주 약간요. 그 결과 아주 강력한 외부의 힘이 들어와 있다 는 것을 알았죠. 다른 이들도 그랬을 거예요. 그다음은 사람들의 재주에 달린 셈이죠. 투시로 ‘천총운검’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칼 의 형상을 본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신이 모시는 신명(神明)을 불러내 이 고분에 숨겨진 게 바로 천총운검, 즉 초치검이라는 이 야기를 들은 사람도 있을 거예요. 또는 고다이고 천황의 검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도 있을거구요.’

“그랬구나. 나는 역사책을 읽고 추리해서 그런 가설을 세웠는 데 역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방법을 택하네.”

안 기자는 또랑또랑한 준후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손 기자는 열심히 수첩에 메모를 하고 있었고 자영은 귀엽다는 듯 준후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런 거 사람들에게 소문내면 안 좋은데요.”

준후가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안 기자는 간단히 무시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기 묻혀 있다는 고다이고 천황의 검, 아니 초치검, 천총운검은 진짜일까? 투시력으로 그걸 알 수는 없니?”

“못해요. 알 수 없는 힘이 방해하고 있기도 하고, 그런 검이 여 기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는 있지만 검에 대한 내력은 직접 본 후에야 투시할 수 있어요.”

“흠!”

저쪽 분위기는 한층 험악해지고 있었다. 홍녀는 결국 자신들 이 초치검을 찾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긴 했지만, 자기 나라의 유물을 도로 가져가야만 하며 그 이상은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나머지 사람들, 특히 차력사 병수와 검사 현정이 코웃음을 치며 펄펄 뛰고 있었다. 현정이 싸늘하게 말했다.

“흥! 땅에 묻혀 있는 물건이야 그 땅에 사는 사람이 임자지. 우리나라 땅에서 캐낸 것은 우리 거야!”

병수도 길길이 날뛰었다.

“너희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보물을 수없이 가져갔잖냐? 이 병수님께서 그깟 칼 하나 가지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떫어?” 홍녀가 미처 말하기도 전에 일본 승려 도운이 앞으로 나섰다.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분위기를 보고 차력사 병수의 말대 로 떫게 생각한 것이 틀림없었다. 도운이 홍녀에게 뭐라고 중얼 거렸다. 홍녀는 탐탁스럽지 않는지 스기노방이라고 하는 늙은 승려의 눈치를 살폈으나 그는 비웃듯이 빙글거리고 있을 뿐이었 다. 홍녀는 한숨을 쉬면서 말을 꺼냈다.

“여러분, 도운 님이 제안을 하셨습니다.”

“무슨 제안?”

“많은 분들이 고다이고 천황의 검을 찾으러 오셨습니다. 그게 정말 초치검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요. 여러분은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초치검은 하나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물러선 다면 검은 누가 차지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말 그대로 검을 가지고 갈 사람 은 한명 또는 한 문파로 정해야 했다.

오의파의 상렬이 소리쳤다.

“우리는 검에는 욕심 없소! 이곳의 기운이 심상치 않아서 알아보려고 온 것뿐이오!”

“그렇다니 다행이로군요. 다른 분들도 검이 탐나서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차력사 병수는 씩씩거렸고 검사인 현정은 입을 꼭 다물고 홍 녀를 쏘아보았다. 현현파의 네 사람도 검에 욕심이 있기는 마찬 가지였다. 그때, 내내 가만히 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큰 체구의 승려들이 언쟁에 끼어들었다. 그중 우두머리인 듯한 승려가 합 장을 하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무아미타불. 우리는 백제암의 지극 증장 다문 광목이라 하 며, 저의 법명은 다문입니다. 저기 있는 사미는 승현이라 하지 요. 숨김없이 말씀드리자면, 저희는 검을 찾아오라는 어느 분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지극, 증장, 다문, 광목은 원래 불교의 사대 천왕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이름을 딴 것으로 보아 네 사람도 필히 범상한 사람 은 아닐 듯싶었다. 다문은 부탁을 한 사람이 누구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몸짓이나 표정만으로 보아도 결의가 확고해 보였다. 도지 무당과 언쟁을 하고 있던 철기옹이 소리를 질렀다. “병신들 육갑하네! 지금 무슨 큰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판인데 도대체 뭣들 하는 짓인지.”

그러나 현현파, 병수, 사천왕, 현정, 일본 승려 등 열네 명은 철기옹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홍녀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 여기서 하나의 약속을 하는 게 어떻습니까? 도력을 겨루어서 가장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검을 갖는 겁니다.”

병수가 이마의 갈매기를 더욱 짜부라뜨리며 소리쳤다.

“시합? 흥! 뭐 좋지. 방법은 어떻게?”

“일대일로 도력을 재어 보는 겁니다. 방법은 아무거나 좋습니다.”

현정이 말했다.

“밀릴 것 같으니 일대일로 하자고? 호호호! 간사한 방법이로군.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없어. 난 그깟 초치검을 얻으러 온 게 아냐. 다만 청홍검으로 그 잘난 칼을 박살 내려고 왔을 뿐.”

현정이 말을 마치면서 어깨를 흔들자 검을 싸고 있던 천이 흘 러내리고 찬란한 검집이 드러났다. 현정이 청홍검을 내려서 오 른손에 들자 뽑히지도 않은 검이 지르릉 울었다. 현현파의 사람 들이 쭈뼛했고, 병수의 입이 벌어졌으며, 일본인들도 움찔하면 서 뒤로 물러섰다.

안 기자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도력 대결 이라니! 요즘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안 기자는 자영과 손기 자에게 눈짓을 했다. 그들의 눈빛도 떨리고 있었다.

현암과 박 신부는 작은 말로 속삭이고 있었다. 투시를 마친 승 희와 준후가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승희가 현암에게 속삭였다. “이봐, 현암 씨! 대부분은 검을 얻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

물론 오의파나 철기옹 같은 사람들은 욕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홍녀라는 여자와 도운이라는 남자는 누군가에서 검을 찾아오라는 사명을 받은 것 같고, 스기노방이라는 늙은이는 다른 꿍꿍이 가 있는 듯해.”

“뭐? 꿍꿍이? 어떤?”

“그것까지는 모르겠어. 다만…………….”

“다만?””

“여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상한 기운과 비슷한 기운으로 마음을 가리고 있어. 저 스기노방이라는 노승이 말이야.’

박신부가 눈썹을 꿈틀했다.

“음? 이곳의 기운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누나가 마음을 읽을 수 없을 정도라면 정말 고수네!”

박신부가 조용히 말했다.

“현암군,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것 같네. 저들은 내버려 두면 싸움을 벌일지도 몰라. 싸우지 않게 할 방법이 없을까?”

현암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승희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예 현암 씨가 모두 눌러 버리면 어떨까? 찍소리 못하게 만 든 다음에, 검 따위는 생각하지 말고 힘을 합쳐서 검보다도 더 중요한 고분의 비밀을 캐 보자고 하는 거야. 저 사람들, 눌리고 난 다음에는 아무소리 못할 것 아냐!”

“눌러 버린다고?”

“말로 해서는 죽어도 안 들을 거야. 그러니 시합을 벌여서 누른 다음에 타이르면 들을 것 아냐?”

“근데 왜 내가……”

“우리 중에 사람과 일대일이라면 현암 씨가 제일 세잖아. 신부님의 기도나 준후의 부적을 사람들에게 쓸 수도 없고.”

황당한 소리였지만 박 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생각이 맞다면 이 고분에 숨겨져 있는 비밀은 초치검 정 도가 아닐 거야. 분명히 그보다 훨씬 크고 무서운 무엇이 있을 거야. 그러니 일단 이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해야지.”

“그러니 아예 여기서 다른 사람들을 눌러 버리라고! 내가 힘 을 보내 주면 현암 씨 상대는 없을 거야!”

현암은 망설였다. 굳이 이런 쇼를 벌여야 되는 건가? 우습기 는 했지만 마땅히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튼 이 사람 들의 분쟁을 속히 수습해야 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온 승려들도 어떻게든 치워 버려야 했다. 그들은 검의 향방에 관심을 가진 것 이 아니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고분에서 나온 오백여 구의 시체 들이 더욱 큰 문젯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 시체들의 내력이 만약 퇴마사들의 생각대로라면………………

현암은 심호흡을 하고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일본인들과 여러 술사 사이에서 언쟁이 끝나고 바야흐 로 실력대결에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도운이 등에서 여러 개의 철추가 달린 쇠줄을 꺼냈다. 도운의 큰 덩치에 걸맞게 철추들은 꽤 무거워 보였고, 쇠줄 또한 검은 윤기를 발하는 것이 모종의 내력이 깃든 물건 같았다. 도운이 일 본 말로 소리를 치자 홍녀가 그것을 통역해서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도운 님은 여러분을 해치거나 상처를 입히시려는 게 아닙니 다. 다만 힘이나 도력을 겨루고자 하는 것이지요.”

“흥! 힘이라고? 감히 병수 님 앞에서 힘이라고 한 거 맞지?”

병수가 예의 철봉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백제암에서 왔다는 승려 중 가장 덩치가 좋은 증장도 걸음을 내디뎠다.

“아미타불, 빈승 증장, 도력은 얕지만 무식하게 힘쓰는 것이라 면 약간 합니다.”

증장의 얼굴은 노지심*처럼 우락부락하게 생겼는데 목소리는 그에 어울리지 않게 높고 부드러웠다. 뒤에서 일본 노승 스기노 방이 홍녀에게 뭐라고 지시하자 홍녀가 다시 이를 한국말로 바꾸어서 말했다.


* 중국의 고전 수호지』에 나오는 호걸 중의 한 사람. 본명은 노달이었고 고급 관 리였으나 성질이 급하여 사람을 죽인 죄로 벌을 피하기 위해 중이 되고 법명을 지심이라 받아서 노지심이라 한다. 온몸에 꽃 문신을 새겨서 화화상(花和尙) 노 지심이라 일컬었다. 키가 10척이고 허리가 열 아름이 되는 거인인데다가 온통 구레나룻을 기르고 육십 근짜리 철선장을 들고 다니며 호쾌한 행동을 많이 한호 걸로 중국에서는 인기가 높다.


“우리는 셋뿐입니다. 그러니 세 분야로 나누어서 겨루자고 스기노방 님이 제안하시는군요. 그러니 일단 한국 측에서 먼저 각 분야의 대표자 세 명을 뽑아서 우리와 겨루기로 합시다. 그래서 저희가 요행히 이기면 초치검을 원래 있던 장소로 가져가고, 저 희가 지면 그쪽의 세 분께 검을 맡기기로 하지요.”

병수가 툴툴거렸다.

“우리끼리 먼저 겨룬다고?”

“어차피 초치검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여러분도 나름대 로의 합의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현파의 맏이인 근호가 소리쳤다.

“그 방법은 공정하지 못해! 당신들의 실력이 우리보다 위라고 는 믿지 않지만 우리끼리 겨루는 데도 내력이 많이 소모될 것 아 닌가? 당신들은 그동안 아무 힘도 쓰지 않고 최후의 지친 사람과 상대해서 쉽게 이기려는 계략이구먼!”

홍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스기노이 눈짓을 보내자 할 수 없 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끼리의 합의는 어쨌든 필요한 것입니다. 저희는 저희 나름대로 국가적 사명을 띠고 왔으니 일국의 대표라 할 수 있습 니다. 또 여러분에게 꼭 힘을 써서 싸우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 다. 다만 어떤 방법으로든 대표자를 뽑아 주시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상의하셔서 선출해 주시면 그만 아닙니까?”

간사한 방법이었다. 지금 상황으로 볼 때 초치검에 관심을 가 진 사람이 보검 획득을 눈앞에 두고 쉽게 물러서서 양보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알아서 대표자를 뽑 으라는 말을 반박하기도 힘든 형편이었다. 병수, 현현, 사천왕 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고, 현정은 말없이 일본인들만 노려만 보았다.

“치사하구먼!”

철기옹이 나섰다. 사람들이 시선을 돌리자 철기옹과 현암이 보였다. 도지 무당과 오의파 두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홀연히 사 라지고 없었고, 박 신부 일행과 기자 일행은 저만치 뒤에서 관망 하고 있었다. 철기옹이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왜놈들, 잊어버리려 해도 계속 밥맛없는 짓만 하구. 난 저스 기노방이란 자를 알어. 저자는 나를 잘 모르겠지만.”

스기노방의 눈빛이 약간 떨리다가 이내 평정을 찾았다. 철기 옹은 크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좋다. 좋아! 내 이 나이가 되어서 네놈의 과거를 들추지는 않 겠어. 네놈들 수법 참 치사하다. 허나 그러고도 네놈들이 진다면 얼굴에 똥칠을 하는 거겠지? 스기노방 네놈은 강신술에 능하니 까 박수인 나하고 붙어 보자! 여기 현암 군하고 얼굴 허연 계집은 검법으로 겨뤄 봐라! 그러면 나머지 힘쓰는 놈은 어찌 되었든 이 대 일로 우리가 이길 것이니!”

스기노방은 깔깔깔 웃어 젖혔다. 그러고는 홍녀에게 뭐라고 했다. 홍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스기노방 님은 다른 분들이 그 말씀을 받아들일지 모르겠다고 하십니다.”

철기옹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원래 여기 병수하고 백제암의 중들은 외공을 익힌 아이들이니 저 도운이라는 놈과 붙어야 할 거고, 스기노방이란 땡초는 분명 강신술이나 소혼술로 겨루자고 할 테니 지금 이 자 리에는 나밖에 없지. 도지하고 오의파 애들은 이런 일엔 안 끼겠 다고 했고 현현파 네놈들이야 내 친구의 제자뻘밖에 안 되니 쑥 빠져 있거라! 여기 계집애는 보아하니 밀교의 보검을 갖고 있는 듯한데, 그렇다면 당연히 검을 쓸 테니 현암밖에 적수가 없지!” 홍녀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자신은 전에 현암 일행의 도움으 로 목숨을 구원받고 흡혈마를 잡는 임무를 완수하는 데 빚을 진 바 있기 때문이었다. 현암은 그 일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지 만, 눈치 빠른 철기옹은 홍녀가 마음속에서 그때의 기억을 되새 기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까 승희가 읽은 것을 넌지시 물어서 알아낸 결과였다. 승희가 읽어 낸 홍녀의 마음이 사실이라면 홍녀는 보기와는 달리 마음이 약해서 현암과 싸우지 못할 것이란 계산이었다.

홍녀는 손에 든, 막대기처럼 위장한 구마열화검(驅魔烈火劍)을 쳐다보고는 현암이 지니고 다니는 귀검인 월향을 떠올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저는 현암상을 이기지 못합니다. 패배를 인정합니다.”

홍녀의 난데없는 말에 도운은 물론 스기노방의 눈마저도 크게 벌어졌다. 홍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뒤로 물러섰다. 스기노 방은 낮은 목소리로 홍녀에게 빠르게 떠들어 댔다. 질책하는 듯 했으나 홍녀는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현암의 마 음도 무거워졌다. 실력으로 말하자면, 홍녀에게 제아무리 구마 열화검이 있다 하더라도 자신에게는 그동안 갈고 닦아 자유자재 로 공중에서 부릴 수 있는 월향검이 있어서 뒤떨어지지는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한번 겨뤄 보겠다고 단순히 생각하고 있 었는데 느닷없이 홍녀가 기권을 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현암 과 홍녀를 번갈아 보았다. 그들도 뭔가 알아차렸다는 눈빛으로 현암을 보았다. 철기옹의 계략은 스기노방의 술수를 역이용하여 그를 엎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현암은 계략으로 문제를 해결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원 세상에! 날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라고요. 홍녀 님, 우리 정당하게 실력을 겨뤄 봅시다! 홍녀님도 임무가 있지 않습니까?”

홍녀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현암 상의 상대가 못돼요. 여러분 중 누가 전설로 내려

오는 어검술(御劍術)을 익히고 있습니까? 아니, 보신 적이라도 있습니까?”

여러 사람들이 흠칫 놀랐다. 어검술이라면 원래 중국 전설상 의 인물인 팔선(仙) 중 한 명인 여동빈이 창안한 것으로, 정신 력으로 칼을 조종하여 멀리 떨어진 사람의 목도 벨 수 있다는 전 설적인 기술이었다. 그 때문에 여동빈은 팔선 중에서도 검선( 仙)이라 불렸고 이것은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신선들에게나 가 능한 전설상의 이야깃거리일 뿐이었다.

현암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비록 월향을 조종하지만 이건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아니, 어검술 아닙니다. 그런 게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냥 간신히 칼을 조종할 수 있을 뿐…….”

“그게 그거죠. 이현암 씨!”

또랑또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현정이었다.

“저는 스승님인, 그리고 청홍검을 물려주신 도지 님의 전인이 기도 합니다만, 아미파의 검법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철기 어르신이 내세우신 분이니만큼 나서지 않으려고 했습니다만, 현암 씨와 한번 대련해 보고 싶군요!”

느닷없는 말이었다. 현암은 여자가 퍽 당돌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대련인가요? 이 판국에.”

“제게는 이보다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어검 능력을 지닌 분을

언제 다시 만나보겠습니까?”

현정은 겨뤄 볼 상대를 만나 기쁘다는 얼굴로 청홍검을 스르 르 뽑아 들었다. 현암은 당혹해했고 철기옹도 사태가 예기치 못 한방향으로 흐르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철기옹이 소리쳤다. “이봐, 이봐! 여자가 그렇게 설치는 게 아냐! 기다려. 일단 일 본 애들과 일을 마무리한 다음에도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현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돌연 자신의 옆으로 칼을 그었 다. 옆에 있던 큰 차돌 바위가 두부처럼 조각이 나 버리자 현정은 칼을 집어넣었다.

“기다리죠. 청홍검은 뽑은 후 그냥 집어넣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실례한 것이니 용서를…………..?”

현현파의 태현과 윤섭이 돌을 만져 보았다. 그들은 돌의 잘라 진 면이 마치 종잇장처럼 매끈매끈한 것을 보고는 탄성을 발했 다. 철기 되었다 싶어서 병수와 증장을 향해 소리쳤다. 

“아무튼 지금은 이쪽이 한 번 이긴 걸세. 자네들은 나와 스기 노방이 겨룬 뒤에 저 도운인가 하는 아이와 겨루도록 하게. 힘을 아껴야 해. 내가 이기면 우리가 두 번을 이겨 승부는 끝난 것이 고, 혹 내가 지면 그때 싸워도 늦지 않으이.”

철기옹은 말을 마치자마자 등에 졌던 활을 내려 손에 들고 하 늘을 향해 주문을 외우며 묘한 몸짓을 했다. 스기노방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철기옹은 그런 스기노방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주문을 외웠다. 철기옹의 굽은 허리가 쭉 펴지고, 노쇠한 몸에 활 기가 돌아오고 있는 것이 눈으로도 보였다. 어깨가 점점 벌어지 고 키까지 쑥쑥 늘어나고 있었다. 혼을 불러서 스스로의 몸에 씌 운 것이 분명했는데, 혼도 보통의 혼이 아니라 유명한 장군의 혼 쯤 되는 듯했다. 철기옹의 목소리가 걸걸하고 우렁차게 바뀌어 입에서 터져 나왔다.

“허허, 왜놈들! 김덕령 장군의 현신이다. 어디 재주를 한번 피 워 보아라!”

철기옹의 눈에서 마치 호랑이의 눈처럼 환한 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스기노방은 움찔했으나 지지 않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 했다. 스기노방의 몸도 말라비틀어진 형상이 고무풍선처럼 늘어 나고, 얼굴이 검은색으로 물들면서 험상궂은 형상이 되어 갔다. 뒤에서 보고 있던 백제암의 승려 다문과 현현파의 우두머리 격인 근호가 동시에 다급한 소리를 질렀다.

“앗, 마하칼라*다!”

박신부와 준후는 팔짱을 끼고 관망하면서 주위를 살폈다. 승 희는 철기옹을 돕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안 기자와 자영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믿기 힘든 일에 주목하고 있었는데, 손 기자가 문득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 대흑천 또는 대흑(大)이라고도 한다. 힌두교에서는 세계의 파괴자로서 시바 신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며, ‘칼라’라는 의미에서 볼 수 있듯 죽음의 신이기도 하다.


“안 기자, 아무래도 이상해.”

“뭐가?”

“초치검 말이야. 그게 왜 여기에 있을까?”

“난들 그걸 어떻게 알겠어?”

“문득 생각났는데………… 왜구들이 여기에 초치검을 들고 올 하 등의 이유가 없잖아? 필시 곡절이 있을 거야. 그걸 알아내면 고 분의 수수께끼도 풀릴 것 같아.”

“왜 초치검을 들고 왔냐고? 그건….”

순간 안 기자의 머리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초치검은 강력 한 힘을 지녔다는 천황의 상징이었다. 혹시 초치검이 아니면 상 대할 수 없는 무엇이 여기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주술력을 지닌 초치검이 아니면 깰 수 없는 것. 그러니까 일종의 봉인이라고 할 수도 있고…………… 가만, 봉인을 깬다고?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 고 있는 거지?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생각에 휘말리고 있 는데, 갑자기 승희가 눈을 번쩍 뜨면서 소리쳤다.

“알았어요!”

박신부가 놀라면서 승희에게 물었다.

“뭐지? 승희야, 철기옹을 도와야잖아?”

승희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안 기자의 생각이 맞아요. 내게 안 기자의 생각이 들어오고 저 스기노방이라는 중의 생각도・・・・・・ . 싸움을 앞두고 잠깐 고삐 가 풀렸는지 살짝 새어 나온 생각을 읽었는데, 맞아, 맞아요!”

“뭔데? 승희 누나?”

“초치검이 여기 있는 건 우연이 아냐! 그건 그건 더 중요한 뭔 가를 얻기 위해 ・・・ 그래, 봉인을 풀기 위한 거였어!”

“초치검보다 더 중요한 거라고? 아니, 그러면……”

“단군, 단군의 유물이야. 맞아! 저들이 진정으로 노리는 것은 바로…………….”

미처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말들이 승희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자 일동은 아연실색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종 잡을 수가 없었다.

한편, 저 아래 둔덕에서는 김덕령 장군의 혼을 업은 철기옹과 마하칼라의 힘을 빌린 스기노방이 격돌하려 하고 있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