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2권 17화 – 초치검의 비밀 7 : 초치검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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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국내편 2권 17화 – 초치검의 비밀 7 : 초치검의 정체


초치검의 정체

햇살과도 같으나 뜨겁지 않고, 달빛과도 같으나 시리지 않은 휘황한 황금빛이 사방을 가득 메웠다. 이제 막 중독에서 회복되 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던 백제암의 네 승려들과 차력사 병수, 자영과 안 기자, 승현 사미와 지연보살, 주기 선생 상준과 의식 을 잃어 가던 근호, 그리고 현정과 승희와 홍녀까지 모든 사람들 은 현암의 몸에서 눈부시게 뻗어 나오는 광채에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광채는 사람의 눈을 쏘는 광채가 아니었 다. 그것은 어둠을 밝혀 주는 빛만도 아니었다. 은은하고 차분 한, 그러면서도 묵직하고 향기가 도는 광채였다. 불가뿐 아니라 도가에서도 추구하는 무(無)의 경지, 비어 있되 공허하지 않은 그런 빛이 잠깐 아주 잠깐 동안 사방을 감쌌다. 한빈 거사의 최 고의술수였던 ‘부동심결’이 만들어 낸 빛이었다.

대선사 묘운의 분신들은 빛에 휩쓸려 삽시간에 사라져 버렸 다. 뒤쪽에서 기이한 진을 펴고 있던 다섯 명의 백골들도 땅에 흩어져 버렸다. 다만 묘운 대선사의 본체만이 삭아 버린 모습을 한 채 검을 안고 뒷걸음치고 있었다. 초치검을 안고 있던 묘운의 오른팔이 가루로 변하면서 검을 땅에 떨어뜨렸다.

사람들이 사방을 가득 메운 엄청난 빛의 잔상 속에서 눈을 뜨 지 못하는 동안 현암은 조용히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이미 백골이 되어 버린 묘운 대선사의 몰골은 강한 빛을 쐬자재로 만들어진 것처럼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것 같았다.

“으으으…… 크아악!”

묘운의 백골은 초치검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사방에 돌 풍을 일으키면서 한 줄기의 검은 구름이 되어 진이 펼쳐져 있는 바깥쪽 출구로 휘몰아쳐 사라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적으로는 길지 않았지만 마치 영원과 도 같은 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탈 진한승희가 헝겊 인형처럼 비틀대기 시작했다.

“후후후…………. 양, 양심도 없어……………. 자기 힘 아니라고 이렇게 까지 다 쓰기야? 후후후…….”

승희는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면서 옆으로 고꾸라졌다. 현암은 고개를 푹 떨구었으나 한 발을 앞으로 내민 상태 그대로 서 있었 다. 가장 먼저 눈을 뜬 상준이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땅에 떨어 져 있는 초치검에 가서 멎었다.

“초치검!”

상준은 충격으로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근호를 재빨리 땅에 눕혀 놓고 걸음을 옮겼다. 아직 뻣뻣이 서 있는 현암이 조금은 두려웠는지 조용히 발을 옮기다가, 점차 속도를 내서 힐기보법 으로 냅다 달려가기 시작했다.

“저것 저것만 얻으면!”

초치검에 달려들려던 상준의 앞에 굉음과 함께 거대한 물체가 날아왔다. 하마터면 그 물체에 얻어맞을 뻔한 상준은 재빨리 몸을 돌려 피할 수 있었다. 병수의 철봉이었다. 저만치에서 병수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손대지 마라! 그건 고다이고 천황의 검! 나는 그것이 꼭 필요하다!”

주기 선생 상준은 뒤를 쳐다보면서 씩 웃었다.

“어쩌나? 나도 필요하거든?”

상준은 여유 있게 초치검을 향해 몸을 돌리고는 손을 뻗었다. 

“이크, 이건!”

상준의 코앞으로 뜨거운 불기둥이 확 솟아오르는 바람에 상 준은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섰으나, 뜨거운 열기가 상준의 목줄 기를 따라 다가왔다. 어느새 홍녀가 구마열화검을 빼들고 서 있었다.

“물러서시오. 임자가 따로 있는 물건입니다.”

상준은 힐끗 그녀를 쳐다보았다. 홍녀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구마열화검을 들고 서 있었으나 기세는 대 단해 보이지 않았다. 상준의 눈이 뒤에 있는 현암에게로 향했다. 현암 쪽을 다소 켕기는 눈매로 살피던 상준의 눈이 다시 여유를 되찾았다.

“어, 알았어, 알았어. 손 뗐지? 나 손 뗐다?”

“더 물러서!”

상준은 갑자기 놀란 얼굴을 하며 외쳤다.

“어, 그런데 저기 현암・・・・・・ 죽은 거 아냐?”

홍녀는 상준의 말에 흠칫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현암은 눈 을 부릅뜨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채로 서 있었고, 홍녀의 칼에 맞은 옆구리에서는 계속 피가 주룩주룩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앗!”

홍녀가 방심한 사이 화끈한 기운이 날아왔다. 불덩이였다. 홍 녀는 불덩이를 정면으로 맞으면서 뒤로 밀려나가 현암의 발치에 나가떨어졌다. 허를 찌른 상준의 용(辰) 깃발의 힘이었다.

“아, 짜증난다. 다들 어린애들이냐? 아주 바보야, 바보. 왜 이 렇게 잘 속냐? 응? 하하. 애들이니 애들답게 놀아줘야지, 안 그래?”

상준은 빙글거리면서 이를 악문 홍녀를 내려다보았다. 

“현암 그 친구, 왜 그리 걱정하셔? 사귀셔? 어, 인상 쓰지 마. 현암 안 죽었거든? 그러니 염려 말고 푹 쉬셔. 그리고 현암아! 바보 현암아! 등신 현암아! 이제 싸움 끝났지? 그러니 내가 칼 갖는다? 약속 어긴거 아니………….”

“이놈! 너야말로 방심했지?”

이죽거리던 상준의 등 뒤로 병수가 무서운 힘으로 몸을 날렸 다. 자신의 계략이 들어맞은 것에 희희낙락하던 상준은 달려오고 있던 병수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병수의 거구가 어 깨로 상준의 등판을 밀고 들어오자 상준은 비명을 지르면서 넘 어졌다. 병수의 거구가 달려들던 힘 그대로 상준을 땅에 처박으 며 위를 내리찍었다. 우드득 하고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쿠, 이 자식이!”

병수의 밑에 깔린 상준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부러지지 않은 왼팔을 허공에 휘둘러 댔다. 그러자 병수가 깔아뭉갠 상준의 등 뒤에서 요란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상준이 등에 메고 있던 마지 막 깃발이었다.

이번에는 병수의 몸이 폭발하듯이 뒤로 날아갔다. 상준의 몸 도 반동을 이기지 못해 땅속으로 한 치쯤 파고 들어갔고, 잠시 후 병수의 거구가 땅을 쿵 울리면서 떨어져 내렸다.


자영은 아까 승희가 썼던 방법대로 손 기자에게 애매한 맛의 알약을 복용시켜서 간신히 그를 구할 수 있었다. 안 기자는 자신 이 뭘 하는지도 모르고 주머니 안에서 몰래 사진기 셔터를 연신 눌러댔다. 백제암의 사천왕 중 세 명은 독 기운이 조금씩 가셔 서 정신을 차리고 몸을 움직였고, 한쪽에서는 지연보살이 광목 화상을 치료했다. 현현파의 네 명은 아직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신음 소리를 냈다. 섬광 같은 빛이 쓸고 지나간 후 돌연히 일어 난 정황의 변화에 아무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초치검은 여전히 땅에 떨어진 채였다. 승희도 현암도, 홍녀와 상준, 그리고 병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쓰러진 상태였다. 그때 두 사람이 미친 듯이 초치검을 향해 달려갔다. 승현 사미와 언제 정신을 차 렸는지 모를 스기노방이었다.

자영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스기노방과 승현, 둘은 각각 다른 방향에서 초치검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자영뿐 아니라 아무도 이 둘보다 빨리 갈 수는 없었다. 자영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큰 소리로 외쳐댔다.

“아기 중아! 빨리, 빨리 칼을!”

승현과 스기노방은 거의 비슷하게 초치검을 향해 달려들었다. 두 사람과 초치검과의 거리는 채 삼십 미터도 남지 않았다.

승현은 죽을힘을 다해 달려갔다. 저만치에서 시커멓게 타고 찢어진 흉한 가사 자락을 휘날리며 비틀거리면서도 빠른 걸음으 로 스기노방이 달려왔다.

스기노방은 어디에 그런 힘이 남아 있었는지 달려오는 자세 그대로 손가락을 튕겼다. 염주 알을 내쏜 것이다. 그러나 뛰면서 는 조준이 잘 안 되는지 총알처럼 날아든 염주 알은 달려오는 승 현을 맞히지 못하고 주변에 흙먼지를 풍기면서 박혔다. 승현은 초치검을 향해 힘껏 몸을 날렸다. 작은 고사리 손에 낡은 초치검 의 검집이 잡혔다.

“잡았다!”

그러나 고개를 든 승현의 눈에는 분노하여 악귀같이 일그러진 스기노방의 얼굴이 들어왔다. 승현은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초치검을 뒤로 돌리고서 조금씩 뒤로 기어갔다. 공포에 질려 다 른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스기노방의 악다문 입에서 격앙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선진 꼬마! 어서 검을 내놓아라!”

승현은 스기노방이 한국말을 하자 깜짝 놀랐다. 한국말을 알 면서도 모른 척하다니. 그러면 모두를 속였단 말인가? 그러고 보 니 홍녀와 한국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 스기노방은 통역하여 대 화 내용을 들려주기 전부터 흥분하여 소리를 질렀었다. 그런데 왜 그 사실을 숨겼을까?

“칙쇼! 어서 내놔! 너 같은 어린것을 죽이고 싶지 않다!” 스기노방의 전신에서 검은 회오리가 일어났다. 마하칼라의 힘 을 부르고 있는 것이리라. 승현이 총명하기는 했으나 이런 힘에 대항할 능력은 없었다. 스기노방이 검은 기운이 무럭무럭 일어 나는 손을 협박하듯 내밀었지만 승현은 입술을 깨문채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작은 눈에 눈물이 흘렀다.

“이, 이, 바카야로!”

스기노방이 큰 소리를 지르며 손을 들어 올리자 승현은 반사 적으로 몸을 일으켜서 스기노방에게 달려들었다. 승현이 뒤돌아 달아날 것으로 생각한 스기노방의 손이 허공을 짚었다. 승현은 몸을 날려서 스기노방의 가랑이 사이로 들어가 있는 힘을 다해 허리를 폈다.

“어어!”

방심한 스기노방은 중심을 잃고 네 활개를 펴며 땅에 넘어져 버렸다. 승현은 와락 소리를 지르면서 다람쥐같이 사람들이 있 는 곳으로 달려왔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백제암의 다문, 증 장의 두 승려가 비틀거리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지국도 달려가려다가 자영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잠깐 잠깐만요!”

“왜 그러십니까?”

“아까 다문 화상님이 지국 화상님에게 물어보라고 하던 말이 있었어요!”

“예?”

“나랏님의 신물, 그게 뭐죠? 그건 단군의 신물이라 했어요. 그리고 저만이 그 신물을 얻을 수 있다고…………. 왜 그런 거죠?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거냐구요!”

지국의 눈에도 놀라움과 당혹감이 흘렀다. 겨우 숨을 돌리기 시작한 손 기자와 안 기자도 지국 화상을 쳐다보았다. 지국은 주 변을 둘러보았다. 저편에서 두 명의 백제암 승려가 스기노방을 맞아 싸우고 있었고, 승현은 정신이 든 광목을 불러 지연보살을 업게 하고 현암과 홍녀에게 달려가는 중이었다. 당장 급한 일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지국의 입술이 미미하게 떨렸다.

“다문, 다문이 그런 소리를…………. 아아, 그 친구는 우리가 전부 죽을 것으로 생각했나보군. 입도 싸지.”

“무슨 내용인지 어서 말해 줘요.”

자영은 머리를 굴렸다.

“다문 화상인가 승현 사미인가가 이야기했어요! 나는 나랏자 손이고, 저만이 단군의 신물을 얻을 수 있다고요. 오직 저만이 말해주지 않으면 협조 안해요! 알겠어요?”

안 기자도 입을 열었다.

“단군의 신물, 그건 우리에게 초치검보다 훨씬 중요한 거예요. 물론 일본인에게는 초치검이 더 중요하겠지만. 그런데 일본인 들, 아니 저 스기노방이라는 자가 단군의 신물을 욕심내는 까닭이 무엇이죠?”

“그, 그건 저도 다는 모릅니다. 저희는 어느 높은 분의 청탁을 받고 온 거예요. 단군의 신물을 찾아 달라는…………….”

손 기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높은 분?”

자영이 눈을 빛냈다.

“그런데 왜 초치검을 그렇게 노렸죠? 아까 싸움까지 하면서도 결코 물러서려 하지 않았어요. 단군의 신물을 찾으면 그만인데 왜 초치검까지 그렇게 가지려 애쓰는 거예요?”

지국이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단군의 봉인, 그것을 여는 열쇠 중의 하나가 초치검입니다. 그래서 일본인들도 그걸 찾는 것이고, 옛날 왜구도 그래서 초치 검을 가지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초치검이 단군의 신물을 얻는 열쇠가 되죠?”

“그것까지는 저도 모릅니다. 다만 그들은 고대부터 내려오는 정 통성을 얻기 위해, 지금은 그것을 국익에 이용하기 위해서…………….. 안 기자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왜구가 단군의 신물을 얻으러 왔다니! 그 열쇠로 쓰기 위해 초치검을 가지고 여기까지 온 것이라니! 안 기자의 머리에는 비로소 많은 것이 정리되는 듯했다.

“알았다! 드디어 알았어!”

손 기자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안 기자를 쳐다보았다. 안 기자는 빠른 말투로 떠들기 시작했다. 잔뜩 엉켜 있던 실타래가 풀렸다. 

“왜구는 보통 도둑 떼로 여겨져 왔어. 그런데 일개 오합지졸인 도적의 무리들이 왜 남의 나라의 수도에까지 공격해 들어왔을까? 도둑의 목적은 약탈이야! 해안 일대만 약탈해도 되는데 왜 그리 집요하게 타국의 중심부로 나아가려 했을까? 바이킹도, 중 국 해적들도 그런 무모한 짓은 안 했어. 왜 유독 왜구들만 그랬 을까? 그리고 같이 약탈을 해도 중국에서는 해안만 약탈하는데 우리나라는 왜 그리 집요하게 공격했을까?”

“무엇 때문에 그런거죠?”

“저기 보이는 시체 괴물들이 증거야! 그들은 왜구를 가장한 군대였어! 정치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 부대 같은거! 그렇다 면 무엇을 찾는 임무였을까?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정통성, 바로 그 단서가 될 수 있는 신물을 찾는 게 그들의 목적이었다면 말이 되잖아! 그게 단군이 남긴 유물이었고 그것이………….”

손 기자와 자영은 둘 다 숨이 막히는 듯했다. 지국이 나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바로 천부인(印)입니다.”

“철기 어르신 말씀해 주십시오. 저들이 찾으러 온 것은 바로 단군의 신물 아닙니까?”

철기옹은 들고 있던 창을 땅에 거꾸로 꽂았다.

“그렇지요? 저들은 그것을 찾으러 온 것이지요? 초치검은 어떤 필요 때문에 가지고 온 것일 테고요.”

“초치검은 단군의 봉인을 푸는 열쇠일 뿐이여!”

“봉인을 풀려는 열쇠요? 어째서 초치검이…………….”

“단군의 봉인은 지금까지도 겹겹이 쳐져 있어. 그러니 아무도 꺼낼 엄두도 못 내!”

“겹겹이 쳐져 있다고요?”

“원래 단군님이 설치하신 봉인! 그리고 고대에 신라의 화랑도 가설치한 봉인! 그리고 왜구들이 침노하면서 설치한 봉인! 적어 도 세 가지가 있어. 앞의 두 개는 여는 법도 전해졌었는데, 그 이 후 고려 때에 왜구들이 침노하면서 막은 봉인이 있었던 거여. 여 기에 펼쳐진 만다라 진형을 누가 쳤는지 알지?”

“그러면 저 안에 묻혀 있다는 묘운이라는 대선사가 원래의 진을….”

“그래! 그들은 이 단군의 신물을 얻으려고 침노했지만, 결국 헛되이 밀려났지. 그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수법으로 이곳 을 봉해 버린 거여. 자기들이 다음에라도 차지하기 위해서 말이여!”

“그렇다면 그 신물은 무엇이고, 어떤 힘을 가지고 있기에?”

“그것은………… 저게 뭐, 뭐여!”

박 신부에게 말을 하려던 철기옹이 놀라서 소리를 쳤다. 뒤쪽 의 숲 건너편,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에서 엄청난 빛이 순간적으 로 터져 나왔다. 강한 빛은 박 신부와 준후 일행이 있는 이곳까 지 섬광처럼 번뜩였다. 준후가 소리를 질렀다.

“현암 형이에요! 부동심결!”

박 신부도 크게 놀랐다.

“부동심결? 그건 현암군의 최후의 ..”

준후가 발을 굴렀다.

“아이고! 어떡해! 싸움 붙었나 봐요! 저 안에 있다는 묘운인지 뭔지 하는 녀석과…….”

빛이 터져 나오자 뒤쪽에 조용히 도열해 있던 해골 병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멀리서부터 온 빛이지만, 눈깔도 없는 해골 병사들은 현암의 부동심결에서 뿜어 나오는 광채를 보지 않으려 고 눈을 가리고 아우성을 쳤으며, 마사토키가 인솔하던 해골 기 병대도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철기옹은 긴장된 얼굴로 삼천 부 적을 이어 만들었다는 화살을 들어 활을 메기면서 뒤를 돌아보 았다. 그때, 안쪽에서 검은 구름이 튀어나왔다.

철기만이 아니라 박 신부와 준후, 오의파의 두 사람까지도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그림자에 놀라 당황했다.

“요물!”

철기옹은 반사적으로 부적으로 만든 화살을 활에 걸고 튕겨냈다.

쌔애액!

화살은 무서운 기세로 날아가 쳐들어오던 검은 덩어리에 적중 했다. 덩어리는 엄청난 비명을 지르면서 타오르며 불덩이로 바뀌어서는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철기옹을 덮쳤다.

“위험해요!”

박 신부는 기도력을 일으키면서 철기옹에게 몸을 날렸다. 간 발의 차이였다. 닥쳐오던 불덩이가 철기옹의 왼쪽 팔에 걸리면서 손에 들려 있던 활과 충돌하여 폭탄처럼 작렬했다. 준후와 오의파 두 사람도 뒤로 나동그라졌고, 선두에 섰던 해골 병사들도 폭발력에 밀려 우르르 뒤로 넘어졌다. 마사토키가 탄 해골 말도 뒤로 밀려났다.

넘어진 준후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신부님!”

저편 구석에 박 신부와 철기옹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 앞에는 서서히 가루로 변해 가는 백골이 하나 있었다. 백골의 목에는 철 기옹의 활이 얽혀 불에 타들어 갔다. 순간, 해골 장수 마사토키 의 입에서 쥐어짜는 듯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묘운!”

준후는 급히 박 신부에게 달려갔다. 다행히 박 신부는 크게 다 친 곳이 없었다. 그러나 철기옹의 왼팔은 충격을 이겨 내지 못하고 어깨 아래부터 잘려 나가고 없었다. 그것을 본 준후는 놀라 부르짖었다.

“으아아! 도와줘요!”

오의파 두 사람이 준후의 비명을 듣고 달려왔다. 그중 상렬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겁에 질린 눈으로 해골들의 진영을 바라보았다.

“마, 마사토키! 그, 그가……………”

마사토키의 유골은 연신 소리를 질러 대면서 해골 병사에게 고

함을 쳤다. 그러자 해골 병사들이 퀭한 눈구멍을 번득거리면서 녹슨 무기들을 고쳐 잡기 시작했다. 흉흉한 기세는 조금 전과 비 교도 되지 않았다. 상렬의 입에서 두려움이 섞인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순간적으로 영사를 통해 그들의 심리를 읽어 낸 것이다. 

“대, 대선사 묘운의 영이 소멸되어서 저, 저들은 이제 승천도 하지 못하게………… 분노가…………….”

“아저씨, 뭐 해요? 도와줘요!”

준후는 오의 한 명의 도움을 받아 철기옹과 박 신부를 부축 하는 중이었다. 박 신부는 정신을 조금 차린 듯 준후와 오의파 한 사람에게 기대고 있었고, 철기옹은 오의파 사람의 등에 업혀 있었다.

“도망쳐! 어서, 어서!”

“예? 왜?”

“저들, 저들은 이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야! 어서어서 여럿이 있는 곳으로 피해!”

상렬은 소리를 지르면서 미친 듯 달려와서 박 신부를 빼앗듯 이 들쳐 업고 뛰기 시작했다. 준후는 영사를 해 볼 겨를도 없이 오의파의 나머지 사람과 함께 허둥지둥 뒤를 따랐다. 등 뒤에서 함성이 들렸다.

“으앗!”

해골 병사들이 물밀듯 밀려오고 있었다. 수백 년을 기다려온 끝에 비로소 주술로 잠을 깨었는데, 묘운의 영이 소멸되자 그들 을 안식의 길로 보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복수를 위해 사납게 달려들었다. 전세도 규율도 없었다. 노한 함성과 함 께 수백을 헤아리는 해골 군대가 정신없이 달아나는 다섯 사람 의 뒤를 쫓았다.


홍녀는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주기 선생 상준에게 받 은 타격이 커서 아직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일어 설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홍녀는 무심코 현암의 다리를 잡고 일 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손아귀에서 화끈한 열기가 밀려드는 것 을 느끼고는 잡았던 손을 놓고 몸을 후다닥 일으켰다.

현암은 아직 살아 있었다. 다만 뻣뻣하게 몸이 굳은 채 움직 이지 못하고 그대로 서 있기만 했다. 부동심결로 무리한 힘을 쓴 나머지 몸 안에서 기혈이 들끓고 내력이 통제를 잃어 휘몰아치 고 있었다. 자칫하면 주화입마에 빠질지도 몰랐다. 어쩔 줄을 모 르고 있는 홍녀 옆으로 승현 사미와 광목 화상이 지연보살을 업 고 다가왔다. 이제 지연보살은 탈진할 지경에 있었다. 보아하니 광목이 만류하는데도 지연보살은 자꾸만 현암부터 치료해야 한 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어서, 급해요! 이분을 먼저…………….”

“이제 거의 수습되었습니다. 왜 그리 서두르시는 겁니까?”

지연보살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아까 홍녀가 묘운의 압박을 받아 현암에게 상처를 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홍녀는 여전히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명확한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아니, 생각하기도 싫었다.

“아녜요. 더 큰 일이・・・・・・ 계시, 계시가 있었어요.’

다가오던 승현이 걸음을 멈추고 홍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홍 녀는 지연보살을 부축하여 땅에 내렸고 광목은 스기노방과 동료 들이 싸우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지연보살은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홍녀에게 말했다.

“단군님, 단군님의 계시………… 이, 이곳은 성스러운 장소………… 단군님의 뜻을 이분께 맡기면 어기지 않고 잘 해낼 거예요.” 

“단군님의 뜻이라고요? 이분에게?”

“어떻게 될지는 저도 잘 몰라요. 다만 이분에게 전해 주세요. 자신의 의지에 르라고………………”

지연보살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힘겹게 몸을 일으켜 현암의 등에 양손을 갖다 댔다. 순간 두 사람은 몸을 움찔하면서 땀을 비오듯 흘렸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홍녀를 향하여 승현이 입을 열었다.

“아, 아줌마는…………… 아줌마는 어떻게?”

홍녀는 눈을 돌렸다. 승현이 더듬거리면서도 계속 말을 이었다.

“아줌마도 나랏, 나랏자손? 아줌마는 일본인인데 어떻게………….”

순간 홍녀의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내가 나랏자손이라고?

“뭐라고? 내가? 내가 나랏자손이라고?”

“틀림없어요.”

홍녀는 어려서부터 이야기를 들어 왔다. 자신의 성이 권(權)이 었다는 것을. 예전에 흡혈마가 되어 버린 자신의 동생인 오유키, 배다른 동생이었던 오유키를 쫓아 여기에 왔을 때에도 그래서 그렇게 아늑한 기분이 들었던 것일까? 그러나 먼 조상 때부터 자 신의 일족은 일본에 살았다는데, 어떻게 자신이?

현암의 몸에서 엄청난 힘의 기류가 터져 나와서 주위에 소용 돌이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무섭게 몸을 떠는 지연보살의 코와 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홍녀와 승현은 발을 동동 구르고 그 광 경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홍녀는 승현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보 았다. 초치검이었다.

홍녀가 말을 꺼내려는데 엄청난 함성이 들려왔다. 숲 속에서 오의파의 두 사람이 철기옹과 박 신부를 부축하여 뛰어오고 그 뒤에 준후가 달려오고 있었다. 오의파 두 사람은 안 기자가 있는 쪽으로 갔고 준후는 홍녀 쪽으로 달려왔다.

“모두 조심해요! 왜구의 영들, 지박령 군대가!”

절룩거리면서 누가 힘겹게 준후의 어깨를 잡았다. 상처를 입 었던 검사 현정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아직도 청홍검이 들려 있었다.

“너, 우리 의모(母)님을 못 보았니? 그분은 어디 있지?”

그러고 보니 도지 무당의 굿 소리는 들렸는데 정작 모습은 보 이지 않았다. 준후가 망연히 뒤를 돌아보는데 귓전에서 늙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야, 아이야… 나는 이미 저놈들의 손에 죽었단다. 오의파의 두 사람이 귀신이 들릴 때 말이다. 혼백은 사라지지 않아서 저들을 막으 려고 굿을 했으나 힘이 모자라는구나……………

준후의 귀에만 들리는 소리였다. 준후는 도지 무당이 죽었다 는 사실에 불쌍하고 끔찍한 느낌이 들었으나 더 급한 일은 따로 있었다. 이렇게 죽어서까지 현신하여 혼백이 떠나지 않고 뭔가 를 알려 주려 한다는 사실은, 그만큼 중대한 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준후는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어떻게 해야 하죠?

현정이의 청홍검, 그건 적장에서 수없이 적을 벤 무적의 상징이란다. 그것으로 진을 치면 일단 저들을 막을 수 있다. 그리고 단군님의 힘을 깨워서 나랏자손…….

예? 나랏자손요?

나랏자손 세 명의 힘을 모아서…… 아아, 이승에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구나. 부디 힘을 모아서…………..

잠시만요! 어떻게요?

나랏자손들, 초치검, 그리고 가장 강한 자의 의지를…………… 아아, 허무하도다…………….

도지 무당의 한 섞인 푸념 소리가 저승으로 빨려 들어가듯 멀 어져 갔다. 도지 무당이 죽었다니……. 도지 무당의 굿거리가 소 리로만 울려오던 것도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상념에 빠질 틈이 없었다. 물밀듯 밀려드는 지박령들을 막아야 했다.

“누나, 그 칼! 청홍검!”

준후가 말하자 현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현정은 무술에는 능 했지만 영력이 없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요! 도지 님의 유지예요! 칼을 진문의 초입에 꽂아요!”

현정은 준후의 말에 답하기커녕 도지 무당이 죽었다는 소리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준후만 쳐다보았다.

“어서요!”

진문을 통해 해골의 병사 몇몇이 뛰어들었다. 준후는 뇌전을 일으켜서 두어 놈을 갈겼다. 그러나 놈들은 아까와는 달리 한이 더욱 사무쳐서인지 쓰러지지 않고 준후의 뇌전을 버텨 내고 있었다.

“어서, 어서 꽂아요! 다 죽을지도 모른단 말예요!”

누가 현정에게 달려들어 청홍검을 와락 빼앗았다. 현정은 충 격을 받아 아무 생각이 없는 멍한 상태에서 반사적으로 저항하

려 했으나, 칼은 이미 상대의 수중에 있었다. 홍녀였다. 준후가 소리를 질렀다.

“홍녀 누나, 뭘 하려는 거예요!”

홍녀는 청홍검을 들고 준후를 쳐다보았다. 홍녀가 만에 하나 왜구의 편을 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 준후는 당황스러웠 다. 홍녀가 말했다.

“이걸로 진문을 막으면 정말 저들이 못 들어오게 될까? 나도 그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그래요. 어서!”

홍녀의 귓전에 누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백제암의 승려들 과 싸우고 있던 스기노방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대선사였던 묘 운의 잔영과 같은 소리도 울려왔다. 현암을 공격하게 만들었던 묘운의 독한 목소리! 일본의 영광을 위해, 과거의 역사를 묻어 두기 위해 모두를 죽이라 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말했다. 이유는 묻지 말라고…………. 권위에 굴복하라고………….

칼을 던져 버려! 아니 꺾어 버려! 지금이 기회야!

홍녀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으로 헝클어졌다. 홍녀는 고개를 흔 들었다. 그 앞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준후의 얼굴이 보였다. 귀여운 아이, 과거에 자신을 구해 주었던 아이……………

“염려 마라.”

홍녀는 있는 힘을 다해 진문 쪽을 향해 청홍검을 던졌다. 그러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나는 사람이다!”

홍녀가 던진 청홍검은 눈부신 궤적을 그린 뒤 진문 앞에 꽂혔 다. 홍녀는 계속 소리쳤다.

“일본인이건, 한국인이건 문제가 안 돼! 이제 더 이상은, 더 이 상은 나를 괴롭히지 마라!”

홍녀가 양손에 수인을 맺고 청홍검을 향해 힘을 가하자 힘을 받은 청홍검 주위로 무서운 열기가 퍼져 나가며 진문을 뚫고 들 어온 몇몇의 해골들을 순식간에 태워 버렸다. 홍녀의 주특기인 번뇌화煩惱)였다.

“케케묵은 역사의 망령들! 남조가 뭐고 과거의 영광은 무엇이 란 말이야! 사라져! 다 사라져 버려! 더 이상 산 사람들을 해치 지마!”

준후는 홍녀의 외침에 기쁨의 함성을 지르면서 부적을 모두 꺼내 허공에 날리고는 눈을 감고 앉았다. 부적들은 새들처럼 떼 를 지어 허공을 날며 불이 붙은 채 뱅글뱅글 맴을 돌면서 청홍검 의 주위로 맺혀 들었다. 폭풍우 같은 기운들이 수없이 많은 피를 뿌렸던 무적의 신검, 청홍검의 검신을 타고 다시 사방으로 뻗어 나가면서 달려들던 해골 병사들을 가루로 만들었다.

마사토키의 해골 말이 크게 울부짖으며 진저리를 쳤고, 마사 토키의 유골은 진격하던 해골 병사들을 정지시키고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바, 바카야로!”

한쪽에서 백제암의 승려들과 대적하던 스기노방은 그 광경을 보고 노한 함성을 터뜨렸으나, 홍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휘청하 면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준후는 행여 진문이 돌파당할까 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현정은 망연히 홍녀를 쳐다보다가 현암에게 눈을 돌렸다. 이제 현암의 옆구리에서 흐르던 피가 멎 고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지연보살은 눈이며 귀에서 피를 계 속 흘리면서도 현암에게서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 현암의 손이 조금씩 떨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박신부는 완전히 정신을 차려 안 기자와 빠른 목소리로 이야 기하고 있었다. 박 신부가 알아낸 것, 그것은 철기옹에게 들었던 단군의 신물에 대한 것이었다. 자영이 입을 열었다.

“구스노키 마사토키, 그는 남조의 대들보인 마사시게의 아들 이었어요. 마사시게의 아들 마사쓰라의 동생이었죠. 역사에는 북조의 물밀듯 밀려오는 군대를 이기지 못하고 형인 마사쓰라와 시조나와테에서 결전을 벌이다가 둘이 같이 자결한 것으로 되어 있고요.”

박신부가 계속 말을 이었다.

“마사토키에게는 임무가 있었소! 고다이고 천황의 마지막 유지가 있었지. 그건 고다이고 천황 자신이 내린 명령이고, 마사토 키의 형인 마사쓰라가 다시 그에게 맡긴 일이었소. 그 일을 위해 마사토키는 죽음을 가장하여 이 땅으로 온 거요! 왜구를 빙자한 정규군 오백 명을 인솔하고서 말이오. 목적은 단 하나!”

지국이 조용히 말했다.

“천부인.”

이번에는 안 기자가 흥분하여 입을 열었다.

“그래요! 일본의 남조는 힘은 미약했지만 일본 천황의 삼종의 신기를 가졌다는, 정통성으로 북조를 이겨 보려 많은 애를 썼죠. 물론 당시 북조의 일인자인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삼종신기 따위 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요. 그런 다카우지를 승복시키기 위 해서, 고다이고 천황은 그보다 훨씬 더 높은 신물을 필요로 했던 겁니다! 그게 단군의 천부인이었어요!”

의식을 회복한 손 기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일본인과 단군의 천부인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야?”

“아냐! 일본인의 시조는 바로 이 땅에 있었던 한민족이었고, 그들의 시조는 모두 한민족의 후예였어! 그 시절까지만 해도 그 들은 그들의 정통이 한반도에 있다는 사실을 암암리에 수긍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래서 그 신물을 내세우면 방계가 아닌, 정통 성의 대를 잇는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

“방계?”

“맞아! 일본을 개척한 것은 삼국의 유민이었다는 설이 있어. 원래 일본의 토착민은 아이누족이야. 그러나 현재 일본에 거주 하는 일본인은 아이누족과는 전혀 다른 피의 사람들이야 언제? 어떻게 다른 민족이 일본을 점령했겠나? 아메리카에서 태평양을 건너서 해군을 육성한 적이 없는 중국 대륙에서? 아냐! 바로 이 땅의 후예야! 그들은 한반도 땅에 살던 사람들의 후예였어. 그래, 식민지 백성! 삼국의 식민지 후예였단 말이야!”

“하, 하지만…….”

“식민지 사관! 그건 우리가 그들에게 세뇌당한 것이지만 그들 의 뇌리에 박혀 있는 것이기도 해. 맞아, 지금의 증거로는 부인 할 수 없어! 그들은 우리의 방계였고 백제가 망한 뒤 정통성을 찾기 위해 징표인 신물을 찾으려고 그렇게 자주 침략해 온 거야. 남조 부흥을 꿈꾸던, 그러나 쇠망해 가던 고다이고 천황이 마지 막 기대를 건 것도 바로 이런 점이었어. 고대의 정통을 잇는 징표를 보인다면 행여 모두가 복속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야.” 

박신부의 얼굴이 굳어졌다.

“마사토키는 반드시 수행해야 할 과업이 있다고 했네. 아무도 장담할 수 없지만 안 기자의 추측이 맞을지도……………..”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건 매우 중요한 사건이야. 그러나, 그러 나 증거가 없잖아? 나는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귀신이니 영 이니 주술이니 하는 것은 전혀 믿지 않았어. 이제는 조금 다르지만. 그러나 영들의 이야기를 증거로 내세울 수는 없지 않나?”

여전히 신중한 손 기자가 말했다. 아직도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안 기자의 눈이 빛나며 소리를 질렀다.

“초치검! 초치검이 있잖아! 거기에 비밀이 있을 거야!”

일동은 눈을 돌려 초치검의 행방을 확인했다. 초치검은 먼발 치에 있는, 현암의 곁으로 가고 있는 승현 사미의 손에 들려 있었다.


현암의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다. 부상을 입은 몸으로 부동심 결을 시전한 까닭인지 반쯤 혼절한 상태였다. 꿈, 그리고 그 속 에서 오락가락하던 세계. 찰나에 불과한지도 모르고 몇 시간이 경과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속에서 비치던 눈부신 빛, 빛의 나라, 거기에 있던 그분……………

현암은 눈을 떴다. 갑자기 눈앞에 닥치듯 밀려오는 주위의 풍 경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나는 누구지? 그리고 왜 여기에 있지? 여기는?’

고개를 돌린 현암의 시선 끝에 땅에 털썩 쓰러지는 지연보살 의 모습이 들어왔다. 땅에 쓰러진 채 꿈틀거리는 주기 선생 상 준, 조금 먼 곳의 차력사 병수와 검사 현정, 홍녀와 땅에 가부좌 를 틀고 있는 준후.

‘맞다. 그랬지. 음? 그런데 지연보살님은 왜?’

현암은 지연보살이 마지막 기운을 발휘하여 자신을 치료해 준 사실을 모르고 땅에 쓰러진 지연보살을 부축해서 일으켰다. 지연 보살은 완전히 탈진한 듯 숨을 몰아쉬면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혀, 현암 선생. 저, 정신을 차렸으니 다. 다행………….

“왜 그러십니까? 왜 이런 모습으로?”

“아, 모, 모든 게 잘될 거예요. 내 명이 길어 할 말을 다 하고 가는군요.”

“가시다뇨? 그런 말씀 마세요! 무슨 말씀을!”

“아녜요. 아까도 홍녀 님에게 말해 두었지만…… 자신의 의지 를 자신의 믿음을…………… 그것이 바로 단군님의 뜻…”

지연보살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현암의 몸에 돌던 기운을 바 로잡기에는 지연보살의 능력이 모자랐던 것일까? 아니면 너무 많은 사람들을 치료했기 때문에 탈진이 정도를 지나친 것일까? 지연보살은 서서히 숨을 거두고 있었다. 죽음의 기운이 그녀의 순박한 얼굴을 덮어 갔다.

“정신을 차리세요! 정신을!”

“아, 모든 사람들・・・・・・ 고통이 없게・・・・・・ 아직 고쳐 주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도 잊지 마시고……”

자신의 죽음에 직면해서도 남의 작은 고통을 말하다니……………

현암은 지연보살에게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했다.

“눈을 떠요. 눈을! 어서, 어서요!”

“아, 아무도 죽지 않게……… 아무도 고통을 당하지 않게…………”

지연보살의 눈이 닫히면서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현암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에 충격을 받고 멍하니 입을 벌리고 초점 없는 눈초리로 먼 곳을 쳐다보았다.


“아저씨, 아니 형!”

현암은 귓전을 울리는 다정한 소리에 망연히 헤매던 망상의 세계에서 벗어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승현이 있었고, 그 뒤로는 탈진하여 비틀거리는 홍녀가 보였다. 준후는 진문의 힘을 강화 시켜 해골 병사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느라 온 힘을 쏟고 있었 고현정은 쓰러진 주기 선생 상준과 병수를 끌어 편히 눕혔다. 자 기를 해친 자일지라도 보살펴 주는 현정의 세심한 마음씨가 느 껴졌다. 이제 사태는 수습이 되어서 죽은 지연보살과 실종된 도 지 무당을 제외하고는 생명을 잃을 것 같은 사람은 없었다. 현현 파의 윤섭은 중독된 상태였으나 도운의 몸에서 찾은 약으로 간 신히 위기를 벗어났다. 현현파의 네 명은 기자들에 의해 모두 먼 발치에 가지런히 눕혀져 있었고, 도운은 그 곁에 쓰러져 있었다. “현암 상 받으세요.”

현암은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케케묵고 낡은 길쭉한 물건이 작은 고사리 손에 들려 있었다. 바로 ‘천총운검’의 네 자가 박혀있는 초치검이었다.

현암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환히 웃는 승현의 얼굴과 그 뒤에 긴장한 얼굴의 홍녀의 모습이 보였다.

“이, 이걸 내게?”

“예. 형이 제일 결단을 잘 내리실 것 같아요. 느낌으로요.”

승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홍녀가 설명을 했다.

“현암 상은, 아니 현암 님은 아까 검을 얻기로 내정되었던 분 이에요. 약속을 지키는 겁니다. 다만……………”

현암은 승현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고 홍녀의 마음도 고맙게 여겨졌다. 스기노방이었다면 그랬을까? 아니다. 당장에 힘없는 승현에게서 초치검을 빼앗았을 것이다.

“저는 염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잠시 검을 봐도 되겠습니까?” 

왜 굳이 지금 보려는지 이상했지만 현암은 승현에게 검을 받 아 홍녀에게 내밀었다. 홍녀는 검을 받자 뒤로 돌아서 검집에서 검을 빼 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터졌다.

“오오오!”

현암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승현 또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 었다. 그때 저편에서 세차게 달려오는 시커먼 그림자가 있었다. 스기노방이었다.

“칙쇼!”

미처 뭐라 할 사이도 없었다. 스기노방은 어느새 백제암의 네 승려들을 뿌리치고 미친 듯 달려들었다. 그의 손에서 검은 기류가 튀었다. 스기노방의 손에서 떨쳐 나온 기류를 그대로 맞은 홍 녀는 쓰러지면서 초치검을 떨어뜨렸다. 스기노방은 날듯이 덤벼 들면서 초치검을 낚아채려 했다.

“어딜!”

현암은 몸을 날려 왼손으로 초치검을 집어 들며 오른손으로 월향을 꺼내 던졌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쏘아 져 나간 월향검은 스기노방의 오른편 반신(半身)을 꿰뚫으며 허 공에서 원 모양의 큰 궤적을 그렸다. 스기노방은 그 와중에도 초 치검의 검집을 잡아챘다. 초치검의 자루는 현암이 왼손으로 쥐고 있었다.

“으아악!”

스기노방이 비명을 지르면서 데굴데굴 굴렀다. 그의 손에는 초치검의 검집이, 현암의 손에는 초치검이 들려 있었다. 현암은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에 망연해져서 검을 들여다보았다.

“겨우…… 이 따위 것 때문에?”

잔뜩 녹이 슨 칼・・・・・・ . 이것이 무슨 신물이고 신검이란 말인 가! 허망해졌다. 아무런 영력도 초자연적인 능력도 느껴지지 않 았다. 이것이 무엇이기에 일본에서 사람들을 파견하고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서로 싸웠단 말인가!

데굴데굴 구르던 스기노방의 몸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조그마한 푸른색 깃발이었다. 현정의 간호를 받고 몸을 일으키던 상준과 병수가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어!”

“저, 저자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병수와 상준은 동시에 고함을 쳤다.

“너였구나! 날 중독시키고 고다이고 천황의 검을 찾아 오라던 놈이…………!”

“초치검에 상금을 걸었던 게………!”

말을 내뱉다가 상준과 병수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둘은 같은 자의 농간에 의해 서로 초치검을 탈취하려고 했던 것이다. 월향 검에 적중되어 땅에 쓰러진 스기노방은 다시 힘을 쓰지 못할 것 같았다. 상준이 병수에게 말했다.

“이봐, 잠깐. 그럼 너도 저자에게…………? 중독이라고? 그러면 저자가 무슨 수작을 부렸나?”

병수가 씩씩거리며 대꾸했다.

“그래, 며칠 전에 독에 중독됐는데, 병원에서도 모르더라고. 그런데 누가 편지를 보내 고다이고 천황의 검을 해독약과 바꾸 자고 하더군. 그게 저자일 줄은 정말…………….”

“나에게는 현상금을 걸었지. 오억.”

상준이 씁쓸하게 대꾸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 좋은 놈은 못 돼. 그래도 말야, 최소한

의 분별은 있어. 왜놈이 시킨 거라면・・・・・・ 아, 난 정말 그건 몰랐다.”

상준이 말을 멈추고 스기노방에게 다가갔다. 스기노방의 눈빛은 떨리고 있었다.

“쪽발이 한국말을 잘할 텐데 왜 감추고 있었지? 내게 목소리 를 들려주면 걸릴까봐?”

“그것만이 아닐세!”

뒤에서 칼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현의 부축을 받고 걸어 오는 철기이었다. 철기옹은 팔이 잘려 나가는 중상을 입은 터 라 금방이라도 까무러칠 것처럼 보였으나 목소리만은 아직도 칼칼했다.

“이놈. 나는 이놈을 잘 알지. 일제 시대 때 이 땅의 맥을 끊으려 날뛰던 놈이여!”

사람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일제 시대에 한반도의 기를 꺾고 맥을 끊는다고 산천의 곳곳에 쇠말뚝을 박았던 이야기는 다들 들 어서 알고 있었다. 바로 이자가 장본인 중의 하나였다니…………… 

“이놈도 주술사였지. 옛날에 자기 재주를 자랑하다가 내 박수 형님께 호되게 당한 일이 있어! 그 뒤로 그런 짓들을 저지른 거여! 옛일이어서 웬만하면 발설하지 않으려 했지만…………..” 

스기노방의 입에서 흰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우리나라를 위해서 그렇게 했다. 너희가 너희 나라를 아끼듯이 나도 우리 대일본국을 위하고 있다!”

병수가 코웃음을 쳤다.

“흥! 나라를 위한다고? 그래, 너희 족속은 그렇게 간악한 방법 말고는 나라를 위하는 방법 모르냐?”

“나에게 뭐라고 욕을 해도 상관은 없다. 그러나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광목이 소리쳤다.

“약하니까 간사한 수단을 부리는 것이지! 우리를 두려워하니 까 어떻게든 분열시키고 약점을 들추어내려는 것이지! 그게 옳은 짓인가?”

스기노방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홍녀와 현암이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현암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칼이 무엇이기에? 

현암이 무심코 초치검을 들여다보려고 하자 홍녀가 현암을 말렸다.

“현암상! 칼을 보면 안 됩니다.”

“무슨 소리요?”

“어서, 다른 일보다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나랏자손의 힘을 모으세요.”

현암이 깜짝 놀라 얼떨결에 초치검을 내려놓았다. 바로 그때, 엄청난 굉음이 울리면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준후가 뒤로 와당탕 넘어졌다. 해골 병사들이 진을 부수고 있었다. 놀란 박 신부와 기자 일행이 힘껏 달려오기 시작했고, 상준과 병수는 쓰 러진 스기노방에게 다가갔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쇠 구슬이 구르는 소리 같 기도 하고 철판이 떠는 것 같기도 한 소리였다. 쓰러진 준후에게 달려가던 박 신부와 기자들, 그리고 오의 사람들은 귀를 틀어 막았다. 검사 현정이 소리를 질렀다.

“청홍검, 청홍검이 버티지 못하고 있어! 이건 검이 지르는 소리야!”

진문의 초입에 꽂혀 있던 청홍검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 졌다. 해골병사들은 강력한 힘으로 진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박 신부가 소리를 쳤다.

“사악하도다! 죽은 자들이여!”

박신부가 달려들면서 오라의 기도력을 검에 집중하자 진 바 깥쪽에서 엄청난 고통의 비명이 들려왔다. 원래 방어나 사악하 게 죽은 자에 대한 영력을 발휘하는 데는 박 신부가 퇴마사 중에 서도 으뜸이었다. 박 신부가 눈을 감고 청홍검 앞에 앉아 기도를 하며 힘을 발하자 오라가 둥글게 퍼져 나가면서 주변을 환하게 만들었다. 바깥쪽의 해골 병사들이 발광을 하고 있었지만, 잠시 동안은 박 신부의 힘으로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을 일으킨 준후는 그곳을 박 신부에게 맡기고 홍녀 곁으로 뛰어갔다.

“혀, 현암상!”

현암은 눈을 부릅뜨고 홍녀를 내려다보았다.

“현암 상, 제발 제 부탁을 들어줘요. 초치검을 보지 마세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홍녀 님, 무엇이 그리도 중요한가요?”

뛰어온 준후가 소리를 질렀다.

“홍녀 누나? 괜찮아요?”

“응. 괜찮아. 하지만 저, 저건……”

홍녀가 박 신부가 버티고 있는 진문을 가리켰다. 얼핏보기엔 끄떡없는 것 같았지만 사실 박 신부의 몸도 미미하게 떨리고 있 었다. 홍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수백의 원혼들, 저들의 수가 너무 많아요. 도저히 우리의 힘 만으로는 상대할 수 없습니다.”

준후가 외쳤다.

“맞아, 도지 님이 그랬어요. 나랏자손 세 명의 힘을 모아야 한다고…….”

도지 무당이 죽어서까지 준후에게 전해 준 말이라면 확실했 다. 아니, 그 방법이 아니라면 어떻게 저 수많은 지박령을 상대 로 싸울 수 있다는 말인가? 하나둘이라면 여기 있는 누구라도 쉽 게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저렇게 압도적인, 그것도 군대의

조직을 갖추고 있다면 문제가 달랐다. 개개인이 아무리 뛰어나 도 밀릴 것이 뻔했다. 현암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람들은 우왕좌 왕하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하라는 것이 이 상황인지 아닌 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뭔가를 해야만 했다. 기자 일행이 뛰어왔 다. 짧은 시간 사이에 믿지 못할 일들을 너무나 많이 보아서인지 이제 그들은 무슨 일을 보아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세 명이 누구누구지?”

“자영 누나하고, 승현 사미, 그리고 철기옹이 있는데…………. 여기 홍녀님도 나랏자손이지만…………….”

“그러면 어서 사미하고 어르신을 불러와라! 철기 어르신은 크게 다치셨으니 괜찮으신가 살피고!”

“제가 다녀오죠. 어차피 도움도 안 되니까.”

손 기자가 철기옹을 부르러 뛰어갔다. 자영이 말했다.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뭐든지 하겠어요. 살고 싶다고요!”

안 기자는 현암의 손에 들린 초치검을 갸우뚱하며 쳐다보고 있었다.

홍녀가 휘청이며 몸을 일으켰다. 스기노방에게 받은 타격이 꽤 큰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저도 가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현암은 준후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단군의 유물이 어디에 있지?”

“저기………… 뭔가……….”

준후가 조용히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묘운의 백골이 땅을 뚫고 나온 구멍이었다.

“운인가 하는 자가 기어 나오면서 봉인이 깨진 것 같아요.뭔가 느낌…………….”

현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에 들린 초치검을 무심코 치켜 올리려는데 안 기자가 말없이 현암의 어깨를 탁 치며 검을 가리켰다.

“음? 이건?”

현암의 눈에 초치검에 새겨진 문양이 들어왔다. 한문과 이상 한 도안 무늬와 한글 비슷한 글자도 섞여 있었다. 현암은 무슨 무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준후가 현암을 돌아보고 무슨 말을 하려다가 초치검의 검신에 새겨진 문자를 보았다.

“어? 저건 가림토! 이게 왜 여기 새겨져 있지?”

“준후야! 너 이 글자를 읽을 줄 아니?”

“예. 밀교에서 배웠어요. 단군 때부터의 글자라고…………….”

“읽어 봐!”

“아, 안 돼요!”

홍녀가 갑자기 소리를 치더니 눈물을 터뜨렸다.

“왜 그러는 겁니까, 홍녀 님?”

“현암 형…….”

준후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현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현암 도 망설이고 있었다. 홍녀가 왜 문구를 보지 말라고 하는 걸까? 홍녀가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입에 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차피 알게 될 것이라면 보세요. 그러나 그 글을 본 다음에 내, 내 말을…….”

준후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가림토와 고한문 비슷한 글자들을 읽었다. 현암과 기자 일행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뭐지? 읽을 순 있는데 의미를 모르겠어요.”

“준후야, 무슨 내용이지?”

“마립간이 닭우・・・・・・ 닭우가 맞을 거예요. 닭우라는 장수에게 귀한 칼을 신물로 전달하니 오랑캐들을 평정하는 데 도움이 되라는……………”

“닭우?”

아무 내용도 아닐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현암의 머리에 벼락처럼 번쩍이는 것이 있었다.

“마립간? 틀림없이 마립간이냐?”

“예.”

“마립간! 그건 신라의 왕을 호칭하는 말이었어! 그러면!”

안 기자가 소리를 쳤다.

“마립간이라구? 이 문구대로라면 애당초 초치검을 내려 준 것 은 신라의 왕이었단 말인가? 『일본서기』에서는 초치검의 기원을 이세신궁에서 왜희라는 여자가 일본무존(日本武尊)인 다케루에게 전해…….”

자영도 무릎을 쳤다.

“다케루! 닭우! 그렇다면 일본무존이라는 다케루가 바로!”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일본 전역을 평정했다는 일 본 고대의 영웅 다케루가 신라 마립간 휘하의 장수였다는 말인 가? 토벌군의 선봉장이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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