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2권 18화 – 초치검의 비밀 8 : 홍녀가 남긴 말
홍녀가 남긴 말
박신부는 온몸에서 땀을 비 오듯 흘렸다. 놈들이 무슨 수단을 쓰는지 점점 진문을 막기가 어려워졌다. 아마도 마사토키의 집 념에 의한 것이리라. 박 신부는 계속 기도문을 외우며 힘을 발출 하고 있었지만, 이대로 언제까지나 버틸 수는 없었다. 박 신부는 문득 아까 마사토키와의 영적 대화를 기억해 냈다. 다시 그의 영과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
마사토키의 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영사를 통해 희미하게 분노의 느낌만이 전달되어 왔다.
마사토키! 그대의 집념은 나도 이해한다. 그러나 이미 남조는 망했다. 이제 와서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닥쳐라! 남조의 정신은 아직 망하지 않았다!
그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초치검과 신물이다. 나는 우리 민족이 다시 정신적인 중심을 갖기를 원한다. 그것이 남조의 정신이다.
정신적인 중심이라고?
우리의 중심은 천황이다! 간악한 자들은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북조 놈들은 명목상의 천황을 내세우면서도 천황을 일개 수단으로만 여 겨 왔다. 나는 안다. 내가 여기서 수백 년을 묻혀 지냈어도 잘 알고 있 다. 위대한 고다이고 천황이 승하하신 후, 천황들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 아는가? 노리개! 권력의 노리개일 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싫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신권(權)을 다시 세워야 한다! 그것을 믿기에 나와 나 의 부하들은 모든 것을 그에게 바쳤던 것이다!
신권, 신권이라………….
박신부는 눈을 감았다.
마사토키, 천황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신의 자손이며 일본의 정신적인 지주이다!
그래, 천황은 신의 자손이다. 그리고 당신이나 나, 그리고 모든 사람들 역시 신의 자손이다. 그 후예들이다.
헛소리!
진문으로 밀어닥치는 기운이 엄청나게 강해지면서 생생한 분 노의 기운이 전달되어 왔다. 박 신부의 몸이 급작스러운 기운에 뒤로 밀려나자 오의파 두 사람이 박 신부를 떠받쳤다. 박 신부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믿는 바, 스스로 믿는 바가 허물어지면 누구나 고통을 느낀다. 그러 나 마사토키! 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천황이 왜 일본의 정신적 지주 가 되었겠는가? 당신들은 그것을 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신의 후손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당신이 그렇게 믿도록 길 들여진 것은 아닐까? 내 말 듣고 있는가, 마사토키?
닥쳐라! 그러는 너는 너의 신을 섬기지 않는가? 그것도 같은 이유가 아니겠는가?
천황은 인간이다. 여느 인간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인간이다. 그것 은 천황 스스로도 인정한 바 있다. 왜 그러한 천황을 계속 신격화하려 드는가? 그것은 왜곡이 아닌가? 고대의 신물을 강탈하여 얻었다고 정 통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보는가? 신물을 강탈하고 그것을 날조함으로 써 얻는 정통성이라면, 그것이 언제까지나 유지되리라고 보는가? 그대 도 초치검에 씌어 있는 문구는 알고 있겠지?
그만해라! 그만!
그 때문에 그대들은 진정한 초치검을 분실했다는 이유로 공개하지 않고 모조품을 만들어서 이리저리 혼란하게 만들었지. 천황의 삼종신기 중에서도 유독 초치검만이 분실과 재발견의 일들을 여러 번 겪은 것으 로 알고 있다. 다른 두 가지 신물보다 훨씬 큰 물건이었는데도 찾지 못 했다고 했다. 그랬겠지. 정통성과 실리 두 가지를 모두 추구하기 위해 서는 그 방법뿐이었을 테니까. 대대로 내려온 천황의 보물이면서, 자칫 그 진정한 정체가 공개되면 일본 전체를 한국의 발아래 엎드리게 할 수 도 있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아직 초치검에 쓰인 문구 를 보지는 못했지만 짐작은 할 수 있다. 초치검의 진정한 정체는 무엇이 지? 너는 아는가?
나, 나도 모른다! 그 입 닥쳐라!
진문 밖에서 회오리바람이 몰아치면서 박 신부를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게 만들었다. 박 신부가 발하는 오라 너머로 진 밖에 서 아우성치던 해골 병사들이 마사토키를 향해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상렬이 급하게 소리쳤다.
“저, 저들! 한데 뭉치고 있다! 오백의 영이 하나로!”
모두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사토키가 내지르는 일본어 구 령이 하늘 위에서 울려 퍼지듯, 사람들의 귀에 또렷이 들려왔다. 해골병사들이 하나하나 부스러지면서 땅에 쓰러지고 해골에서 나온 영들은 마사토키의 영에 흡수되어 가고 있었다. 해골 병사 들이 쓰러질수록 마사토키가 가진 영의 힘은 엄청나게 강해졌다.
상렬은 마사토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상렬이 신음하듯이 소리쳤다.
“마사토키가 부하의 혼에게 명령해서 하나로 뭉치게 하고 있어요!”
박신부가 이를 갈았다.
마사토키의 해골 주위에는 이제 형언하기조차 힘든 기운들이 안개처럼 막장을 치고 있었고 그의 해골 말조차도 부스러져 내 렸다. 마사토키가 발걸음을 옮기자 요란한 소리가 울리면서 땅 이 흔들렸다. 오백의 영을 흡수한 마사토키의 엄청난 기운이 다 가오자 박 신부는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박 신부는 안간힘을 다 해오라를 북돋아 무시무시하게 커져 버린 힘을 막았다.
‘죽어도 네 뜻대로 하게 놓아두지는 않겠다!’
쓰러졌던 승희가 의식을 찾았다. 승희는 눈을 들어 주변을 둘 러보았다. 난장판이었다. 곳곳에 사람들이 쓰러져 있고, 그들을 간호하는 사람들이 쓰러진 사람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진문 앞 에는 박 신부가 기도력을 발하며 진문을 막고 있었고, 오의파의 두 사람과 현정이 박 신부의 뒤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밖에 있는 것들은 왜구들의 지박령! 큰일이다! 저들이 뭉쳐서 오고 있다!’
승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아직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았고 투시도 잘되지 않았다.
‘준후는? 그리고 현암 씨는? 스기노방과 홍녀는?’
철기옹이 승현과 손 기자와 함께 현암에게 달려갔다. 그곳에 는 일단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먼발치에서 스기노방이 사람 들에게 둘러싸여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상준 이 비틀거리면서 스기노이 잡아챈 초치검의 검집을 내놓으라 고 하고 있었다. 스기노방의 생각이 승희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초치검의 비밀은 누구에게도 알려져서는 안 된다! 모두, 모두 저세상 으로…………….
“미쳤어! 저자는 전부 같이 죽으려고!”
승희가 놀라면서 후다닥 몸을 일으켜 그쪽으로 가려 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스기노방의 몸에서 먹장과 같은 기운이 한꺼 번에 밀려 나와 폭탄처럼 작렬했다. 스기노방의 주위를 둘러싸 고 있던 사천왕과 병수, 상준 등은 놀라서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 서려고 했으나 급작스럽게 발출하는 기운에 타격을 받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상준이 빼앗으려던 초치검의 검집도 산산이 바스 러져 없어졌다.
“으아! 저, 저자가!”
스기노방의 몸은 고무풍선이 쭈그러지는 것처럼 급격하게 쪼 글쪼글 변해 갔다. 몰려나오고 있는 까만 기운은 스기노방의 혼 (魂)과 백(魄)이었다. 승희는 스기노방이 자신의 목숨을 끊고 생명을 유지하고 있던 최후의 영력까지 모두를 영원히 잠재우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현암과 준후 일행은 먼발치에 있었고, 박 신부와 다른 사람들은 진문의 입구를 수호하느라 여념이 없었 다. 기방의 기습적인 공격은 자신의 생명을 바친 것이니만 큼 엄청났다. 영력을 별로 갖추지 못한 백제암의 사천왕과 병수 는 이미 부상을 당했던 터라 기력이 쇠잔해져서 큰 타격을 입었 고, 상준은 금방 몸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병수와의 다툼에서 받 은 타격으로 힘을 쓰기 어려울 것 같았다. 허공에서 스기노방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 혼자 가지는 않겠다! 일본국의 영예를 위하여 너희 모두를 데리고 가겠다!
스기노방의 영이 얽힌 기운은 돌개바람처럼 소용돌이치면서 진 문으로 향했다. 박 신부의 뒤에 있던 상렬이 그 기운을 눈치챘다.
“물러서!”
상렬은 주문을 읊으며 스기노방의 앞을 막아섰다. 앞으로 튀 어 나가던 기방의 회오리가 상렬이 막 불러일으킨 기운과 충돌했다. 그러자 비명과 함께 상렬의 몸이 튕겨져 날았다. 오의 파의 다른 사람이 상렬의 몸을 받으려 했으나 그들마저도 뒤로 밀려나 버렸다. 스기노방은 최후의 영력을 동원해서 그들의 몸 을 밀어붙여 진문을 파괴하려 했다. 거대화한 마사토키 영의 힘 을 끌어들여 모두를 해치우기 위해 ………. 그들이 밀려난 곳은 청홍검의 검신이 힘을 뻗치고 있는 중앙이었다. 박 신부는 고함을 질렀다.
“안돼!”
지금 박 신부가 발하고 있는 힘은 괴물화된 마사토키의 힘에 도 버틸 정도로 강했다. 발산되는 두 힘의 중앙에 저 두 사람이 부딪힌다면? 박 신부는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마사토키의 엄청 난 힘을 막지 못하면 전부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대로 두면 저 두 사람은 죽게 된다. 박 신부는 탄식을 발하면서 힘을 거두 었다.
“아아, 야훼여! 어찌 우리를…………….”
박신부가 뻗쳐 내는 힘이 순식간에 풀리자 오의파의 두 사람 은 진문에 꽂혀 있던 청홍검을 쓰러뜨리면서 땅에 넘어졌다. 박 신부가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저는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모두, 모두 죽어야 한다! 입막음을 위해! 대일본국을 위해!
스기노방의 영력이 흩어지면서 허공에 여운을 남겼다. 오백 영을 업은 마사토키의 해골은 갑자기 진문이 열리자 잠
깐 주춤했으나 곧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의파의 두 사람은 넘어졌지만 황급히 일어나 몸을 피했고, 현정이 날듯이 달려들어 청홍검을 손에 거머쥐었다. 마사토키는 육중하게 땅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걸어 들어왔다. 박 신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십자가를 꺼내 들었다.
“주여, 힘을!”
뒤에서 정신을 차린 주기 선생 상준과 차력사 병수가 승희와 함께 달려왔다. 백제암의 사천왕은 스기노방에 가까이 있었고, 또 외공 이외에 영력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다시 정신을 잃은 채 였다. 승희는 재빠르게 현암의 마음속을 읽고 사태를 파악했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현암 씨! 어서 단군의 신물을! 여기는 우리가 어떻게든 해볼게!”
현암은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고 망연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진문이 깨어지고 상황은 급박하게 변해 있었다. 준후가 진문 쪽 을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앗! 놈들이!”
준후의 눈에는 보였다. 지박령들은 마사토키를 중심으로 진문 을 뚫기 위해 한데 모였다가 다시 분산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해 골의 육신을 빌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더욱 어려 웠다. 마사토키는 아직 해골의 형상을 한 채 가운데에 서 있었 다. 박 신부는 승희의 힘을 받아 오라를 증폭시켰고 상준은 병 수, 현정과 함께 대치했다. 오의파의 상렬과 다른 한 사람도 주술을 펴고 있었다.
“형, 어서 가요! 나도 막아 볼 테지만 서둘러요!”
“준후, 같이 가자!”
“나는…………….”
“가림토 글자를 알아볼 수 있는 건 너뿐이잖니!”
현암은 진문도 염려되었지만 준후가 꼭 필요할 것 같았다. 자영이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입을 열었다. 자영의 눈에는 지박령들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진문 앞에 있는 사람들을 볼 때 사태가 어떻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단군의 신물을 얻는다고 일이 해결될까요?”
자영이 물었다. 현암은 도지 무당과 지연보살의 말을 떠올렸 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 이외의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수밖에 없습니다.”
철기옹이 비틀거리며 왔다. 철기옹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감히 나랏님의 신물을 캐다니…………… 그건 거기 있어야 하는 건데.”
“왜죠?”
“단군님의 천부인을 지키는 것이 내 소임이여. 벌써 수십 대를 이어 왔어. 그러나……………”
철기옹이 정신없이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진문 쪽을 살펴보았다.
“왜놈들에게 빼앗기느니 차라리”
철기의 인도로 일행은 묘운이 뚫고 나온 구멍으로 향했다. 아마도 바위를 밀치고 나온 듯 깊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아무도 모르지만, 이 밑에 석실이 있고 거기에 봉인이 있어. 잘못 건드리면 천부인은 절대 찾을 수 없는 거여.”
“어째서요?”
“스스로 자리를 옮기고 큰 벌을 내리거든! 천부인은 영이 깃 들어 있는 신물 중의 신물이여! 그래서 누구도 봉인을 감히 깨려 한 적이 없었지. 잘 지켜 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잘못 건드리면 그야말로 큰 해를 입고 말어. 신물은 군신(軍神) 치우의 힘으로 보호되고 있다고 배웠어!”
일행은 좁은 구멍을 통해 석실로 내려갔다. 얼마나 오래되었는 지 짐작조차 하기 힘든 석실, 안기자가 라이터로 불을 밝혔다.
“여기에………… 천부인이?”
석실은 무척 어두웠고 사방이 석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너 무 오래되어서인지 석실은 거의 자연 동굴처럼 보였다. “이게 뭐야!”
자영이 비명을 질렀다. 발밑에는 삭아 버린 수십 구의 백골이 굴러다녔다. 어떤 것은 그야말로 오래 묵어서 건드리면 먼지로 부스러질 것 같은 것도 있었고,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 것도 있었다.
“아아악! 아악!”
자영이 질겁을 하자 철기옹이 버럭 나무랐다.
“이깟 게 무서워? 저 밖에는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흉악한 백골들이 우글대는데, 이깟 보통 뼈다귀가 뭐라고 그려?”
현암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하죠?”
“나도 몰라. 여기 들어온 건 나도 처음이여!”
홍녀는 승현의 손을 잡고 입을 다문 채 우울한 눈초리로 서 있 었고, 다른 사람들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안 기자가 손이 뜨거워 졌는지 라이터 불을 끄자 준후가 야명주를 외워 방 안을 환하게 밝혔다.
머뭇거리거나 망설일 때가 아니었다. 현암은 날카로운 눈매 로 석실 안을 둘러보았다. 벽화도 보였지만 워낙 낡아서 하나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찬찬히 살피던 현암의 눈에 어떤 문구가 들 어왔다. 그 문구는 그다지 오래되지 않아서 읽을 만했다. 현암은 준후를 불렀다.
박 신부는 십자가를 눈께로 끌어 올렸다. 그러자 십자가에서 영적인 푸른 불길이 이글이글 일어나 박 신부의 눈을 쏘았다. 눈 이 화끈했으나 보이지 않는 지박령들을 성령의 힘으로 보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눈을 뜨자 지박령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엄청난 숫자였다. 아까 싸움을 통해서 적잖은 놈들을 소멸시켰을 텐데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마사토키의 주 변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죽은 자들이여, 그대들의 갈 길로 가라!”
박신부가 서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가 비록 많았지만 물리력이 없는 영혼들은 어떻게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박 신부가 푸른 불길이 이글거리는 십자가를 내밀며 다가오자 지박 령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오의파의 두 사람은 박 신부의 뒤에서 같이 지박령들을 노려 보면서 긴장하고 있었으나, 영적인 투시력이 없는 현정과 병수 는 주위만 두리번거렸다. 승희는 상준과 가까이에 있었다. 승희 가 순간적으로 마사토키의 마음을 읽고 소리를 쳤다.
“조심해요! 저들은 몇 패로 갈라져서 신물이 있는 무덤으로 가려 하고 있어요!”
상준은 몇 번이나 타격을 입은 뒤라 헐떡이고 있었으나 승희의 고함 소리를 듣자 이를 빠드득 갈면서 등에서 십이지의 마지 막 깃발을 꺼내 휘둘렀다.
“아, 제길. 이것까지 쓰게 해? 더러운 놈들! 이거 하나 만들려면 얼마나 드는지 알어? 이 망할…….”
그러면서 상준은 크게 깃발을 휘둘렀다.
“십이지신술 중 최고에 제일 비싼 술수다! 아, 아까워! 작은 것이 큰 것을 이긴다! 십이신장의 맏이인 자(子) 신이여!”
상준이 깃발을 휘두르자 사방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면서 조그마한 아지랑이 같은 기운들이 새까맣게 몰려들기 시작 했다. 쥐! 이름답게 쥐 떼를 방불케 하는 술수였다.
박 신부의 앞에 있던 마사토키 유골의 뒤에서 수십 마리의 지 박령들이 열 개의 집단을 이루어 사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각각 의지박령 무리는 모두를 향해 달려들었다.
“조심해!”
박 신부는 소리를 지르면서 기도력을 펼쳤다. 오라가 둥글게 퍼져 나가자 달려들던 녀석들 중 몇몇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병수와 현정은 등을 마주대고 섰다. 병수는 철봉을 무작정 돌 리면서 소리를 쳤다.
“우라질! 뭐가 보여야 싸우지!”
“보이지 않기는 나도 마찬가지예요!”
현정은 휘청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몸도 움직이기 쉽지 않은 상태였다.
“눈을 감아요! 눈을!”
“무슨 소리요?”
“어차피 보이지 않는 적들! 마음으로 보아야 싸울 수 있어요!”
현정은 날카롭게 외치고는 눈을 감고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청홍이여! 무적의 상징이여!”
현정의 손에 들린 청홍검이 달빛에 희게 빛났다. 병수는 고개 를 젓다가 눈을 감았다. 그러나 마음이 산란한 듯 다시 눈을 뜨 고는 봉을 휘두르는 속도를 높였다. 병수가 휘두르는 봉에 보이 지 않는 것이 부딪혀서 쨍 하며 불꽃을 튕겼다.
“놈들이다!”
현정은 검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내리그었다.
“횡소천군 직췌만마(橫掃軍直俸萬馬)!”
쨍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허공에서 떨면서 사라져 갔고 부 러진 낡은 칼이 땅에 떨어졌다. 위기를 모면한 현정이 안도의 숨 을 내쉬는 순간, 좌우에서 닥쳐오는 기운이 느껴졌다.
“헛!”
현정은 순간적으로 오른쪽으로 검을 휘둘렀다. 금속성의 소리 와 함께 뭔가 잘려 나갔으나, 현정의 왼쪽 어깨에 시큰한 통증이 왔다.
“으악!”
병수도 마찬가지였다. 있는 힘을 다해 철봉을 돌려서 방어를 했으나 전신을 방어하기는 어려웠다. 놈들은 사방에서 칼질을 해 대고 있었다. 재빨리 몸을 피하려 애썼지만 병수의 온몸에는 삽시간에 상처가 늘어갔다.
현정은 이를 악물고 어렴풋이 느껴지는 기운들을 일검에 하나씩 그어 가고 있었으나, 그때마다 몸에 두어 군데씩 상처도 늘었다. 그에 따라 통증은 심해져 견디기 어려웠다.
오의파의 두 사람은 부적도 사용할 줄 알았다. 처음에는 승승 장구였다. 한 사람이 허공에 부적을 휘둘러 허공에 불덩어리가 타오르면 그다음에는 다른 사람이 다른 부적으로 그 불덩어리를 짓눌러 버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열 번 정도 사용하자 부적 이 바닥났다. 두 사람은 허공에 손가락으로 부적 모습을 그리면 서 대항하려 했으나 그런 임시방편은 위력이 반도 되지 않았다. 주기 선생 상준이 불러낸 기운이 몰아닥쳐 왔다. 그러나 그 앞 을 막아선 무리도 있었다. 두 기운이 어지럽게 엉켰다. 자(子)의 기운의 막강함은 수가 많다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적들도 다수 여서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다. 더구나 그 외에도 지박령의 부 대들은 여럿이 있었다. 상준은 눈을 번득이며 하나 남은 진(辰) 의 깃발을 들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승희가 언뜻 보니 오십이 넘 는 놈들이 상준의 주술이 조금은 두려운지 감히 다가서지 못하 고 주위를 뱅뱅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나 이 상태가 언제 깨질지 몰랐고 놈들이 무더기로 덤비면 상준도 대적이 안 될 게 뻔했다. 하지만 승희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박신부는 강한 타격을 느꼈다. 마사토키가 직접 박 신부에게 덤벼들었다. 대부분의 지박령이 사방으로 풀려나고, 백여 명 정 도의 힘이 다시 마사토키에게 엉켜든 모양이었다.
“으윽!”
마사토키가 휘두르는 팔의 힘은 엄청났다. 앙상한 백골 팔목 이 박 신부가 뿜는 오라 막을 후려갈기자 박 신부는 와당탕 뒤로 넘어졌다.
“이・・・・・・ 이런!”
성스러운 오라에 닿은 마사토키의 팔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그러나 마사토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모두 물러서라! 다 죽는다! 혼까지 소멸시켜 버리겠다!
너희야말로 이승과 저승, 두 세계의 질서를 어기는 만행을 그만두어라!
나는 임무가 있다! 승천을 못하더라도 이 일만은 반드시!
마사토키가 다시 박 신부의 오라 막을 후려갈겼다. 박 신부는 기도력을 극한까지 끌어 올렸다. 마사토키의 팔은 오라에 밀려 마치 껍질이 벗겨지듯 거의 부스러져 없어졌으나 가늘어진 백골 손가락 하나가 오라를 뚫고 들어와 박 신부의 옆구리에 박혔다. 박신부의 눈이 질끈 감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박 신부는 뜨거운 통증을 느끼면서도 이를 악물고 기도를 계속했다. 옆구 리에 박힌 마사토키의 손가락뼈는 흩어져서 없어져 버렸지만 박 신부의 상처는 심했다. 이번에는 마사토키가 하나뿐인 팔로 땅 에서 커다란 돌을 집어 들었다. 박 신부는 마사토키를 노려볼 수 밖에 없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현암군! 어서, 어서!’
“여기에는 신령하고 밝으신 단군님이 어지심을 베풀기 위해 남기신 신령한 물건이 있는 곳이니 마땅히 예를 차릴 것이요, 그 어지심과 넓으심에 감복하여야 하리라. 사람 되지 못한 자, 단군 님이 남기심을 뵈올 자격이 없는 자이니. 예를 갖추지 못한 자, 공을 세우지 못한 자, 마음을 갖추지 못한 자, 어여삐 여김이 없 는 자는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는 높고도 높으신 남기심을 지킴 이로써 갖추어 남긴 것이니 명심하리라…………. 해석하면 이렇게 되는데요.”
준후는 떠듬거리면서 글자들을 읽어 나갔다. 다른 사람은 무 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철기옹은 고개 를 끄덕였다.
“지킴이, 단군님의 유물을 지키는 지킴이시지. 나의 먼 선조님 이시여. 아마 신라 때쯤 새겨 놓으신 걸 게야.”
“신라 때요?”
“그려, 우리 집안에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삼국이 모두 단군님 의 유물을 얻으려 애썼다네. 그걸 얻는 데 성공한 것이 신라였으 나. 뒤에 삼국을 일통한 후는 불교를 더 받들었지. 거기에 분노 한 선조님께서 단군의 유물을 캐어 아무도 모르게 이곳에 안치 하고 대대로 후손들을 지킴이로 삼으셨다네.”
이번에는 안 기자의 눈이 빛났다.
“신라? 그래요, 그래!”
손 기자가 물었다.
“왜 그런가? 뭔가 짚이는 것이 있어?”
“신라 진흥왕 때에 북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그 이후로 신라 의 왕관에는 출出)자 형태가 새겨지기 시작했지. 그것의 의미 는 바로 신라가 고대부터 내려오는 신물의 쟁탈전에서 승리했다 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라 할 수 있어.”
“정말?””
“그런 학설이 있는 정도지만…………… 난 그럴 수 있다고 믿어. 신 라의 무덤은 석실로 되어 있는 고구려의 무덤과도, 단순한 토 인 백제의 무덤과도 달라. 도굴을 방지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수단을 쓴 구조야. 흙, 자갈, 모래, 석회, 돌, 신라의 고분을 만든 사람들은 왜 그렇게 도굴을 겁냈을까?”
“흠…..”
“대개 삼국의 생활 양식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 왕실의 보물이라고 해도 차이는 크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얼마나 중요한 보물을 가지고 있었기에 유독 신라는 도굴당하는 것을 그리도 싫어했을까? 도굴당하면 안 되는 물건을 가지고 있 었던 걸까?”
“그러면 이것 때문이라고?”
“그럴 것 같아. 고대부터 전해지는 상징인 천부인을 지키기 위 함이었을 거야.”
현암은 기자들 말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철기옹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나도 몰러! 나는 이곳을 지키는 사람이니 여는 법을 알려 줄순 없어. 여기 이상은 나는 못 가 가도 도움도 안 되고.”
자영이 소리쳤다.
“안 돼요!”
“또 왜 그러느냐, 계집애야?”
“지금 사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잖아요?”
“중요? 껄껄껄!”
철기옹은 크게 웃고 말했다.
“그래, 너희에게는 중요할 거여. 허나 여기에 모신 단군님의 유지만큼 중요한거여? 이것 때문에 옛날에는 수십 번의 전쟁이 일어났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쳤어. 그런데도 지금 사태가 그렇게 중요혀?”
“그러나…………….”
“자네들 잘 들어. 내가 만약 아까 도지 할망구가 죽어서 한 말 을 듣지 못했다면, 그리고 지금 저 왜놈들이 이곳을 더럽힐지 모 르는 상황만 아니라면, 나는 절대 이곳을 가르쳐 주지 않았을 거여. 그러나 늙은 할망구가 자네들에게 맡기면 결국 단군님 뜻대 로 이루어질 거라고, 뒈지고 난 다음에도 나에게 지껄여 대는 바 람에 어쩔 도리 없이 가르쳐 준 거여. 여기에 있는 백골들이 다 무엇인지 알어? 모두가 왜놈들과 욕심을 부린 도둑들의 것이여f!”
“여기에도 위험이 있다는 말인가요?”
철기옹이 씁쓸히 웃으면서 백골 하나를 밟아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그려! 나랏자손! 세 명 이상의 나랏자손이 같이 들어오지 않으면 이곳은 발을 들여놓자마자 이런 꼴이 되게 되어 있어. 우리 선조님들 도력이 얼마나 높은지 알기나 혀? 그분은……”
현암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는 단군님의 유물을 억지로 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 러나 여러 선배들께서 오로지 이곳에만 길이 있다 했기에 들어 온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살아나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하하하! 초개 같은 목숨들이 뭘 그리 중요혀.”
“중요합니다.”
“자네의, 아니, 밖에 있는 자들의 목숨이 그리 아까운 거여?”
현암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러나 눈은 빛나고 있었다. 현암이 입을 열었다.
“아깝습니다. 모든 목숨은 아깝습니다. 너무도 아까운 것입니다. 이미 두 분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더 죽어야 하겠습니까?”
“세상에는 수많은 목숨이 죽기만 기다리고 있어. 발길에 차이 는 것이 사람이고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하는 것도 사람이여. 그런데도 그들의 목숨이 아까운 거여?”
“단군님도 사람이었습니다.”
철기옹은 얼굴을 붉히면서 소리를 지르려다가 애써 평정을 되 찾는 모습이 역력했다. 현암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철기옹의 얼굴 을 쳐다보았다. 철기옹은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현암이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어르신의 심정은 이해가 됩니다. 저희가 해 보겠습니다. 운이 있다면 성공하겠고 아니라면 여기 백골처럼 되겠죠.”
“나를 약 올려서 길을 알려는 거여? 내가 말할 것 같어?”
“아닙니다. 이곳을 알려 주신 것만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인연에 맡기겠습니다.”
“잘못 들어서면 죽어. 그걸 몰러?”
“단군님의 뜻을 믿습니다.”
철기옹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더니 조용히 땅에 앉았다. 준후가 소리쳤다.
“할아버지, 안돼요!”
현암이 의아해 물었다.
“왜 그러니?”
“하, 할아버지 저분은 이제 몸에 불렀던 신을 거두려고…………… 그러면 돌아가시는데!”
중상을 입은 철기옹이 여태껏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강신술 을 써서 힘을 늘렸기 때문이었다. 몸이 삽시간에 오그라든 철기 옹은 평범한 노인이 되었다. 철기옹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었다.
“내 명은 다했어. 자손도 없으니 이젠 지킴이도 이을 수 없 구・・・・・・ . 자네 뜻대로 혀. 원래 나는 관문을 건드려서 천부인을 풀고 스스로 옮겨 가게 하려 했지만…………… 자네의 말도 옳고 도지 늙은이의 말도 일리가 있구먼.”
“어르신!”
“자네, 잘혀, 착한 사람이니 잘하겠지. 허허….. 나는 성질이 못돼 먹어서 평생을 후회했는데 결국 마지막까지 후회할 짓을 하는구먼.”
철기옹이 가리키는 곳에 문고리처럼 생긴 작은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지금 말을 한 것을 후회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이곳을 가르쳐 준 것을 후회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관문을 건드리지 않 은 것을 후회한다는 것인지, 현암은 짐작할 수 없었다.
“저 손잡이, 당기는 것처럼 생겼지? 허나 당기면 죽어. 그러니 밀어야 혀. 손잡이를 힘주어 뽑아내면 석실은 무너지고…… 무 너지고………… 천부인은………… 다른 곳으로…… 스스로…….”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철기옹은 손짓으로 현암을 불렀다.
현암은 귀를 철기옹에게 댔다.
“천・・・・・・ 천부인은 말을 할 줄 알어. 가. 가까이 가면 자네에게 물을 거여. 솔직하게………… 그리고 착한 마음으로………….”
갑자기 말이 멈추었다. 현암은 의아해서 고개를 돌렸다. 철기 은앉은 채로 어느새 숨져 있었다. 현암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숙연해진 일동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현암은 떨리는 손으 로 철기옹의 눈을 감겼다. 그리고 손잡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준후는 뒤쪽에서 숨을 거둔 철기옹을 보면서 눈물을 주르륵 흘 렸다. 준후의 입에서는 스스로에게 묻는 듯한 혼잣말이 흘러나 오고 있었다.
“예를 갖추지 못한 자, 공을 세우지 못한 자, 마음을 갖추지 못 한 자, 어여삐 여김이 없는 자는 들어가지 못하리라. 들어가지 못하리라…………….”
준후는 지금 이 무덤에 설치된 관문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 느라 여념이 없었다. ‘공을 세운다’는 초치검과 관계가 있을 것 같았다. 신라의 장수 닭우가 초치검으로 일본을 평정했다면 관 문 역시 신라 때에 만들어진 것이고, 초치검이 열쇠라는 말이 있 었던 만큼 초치검은 공을 상징하는 열쇠일 것이다. 그러나 나머 지 세 가지는 수수께끼였다. ‘예와 공과 어여삐 여김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현암이 조용히 손잡이를 밀고 재빨리 뒤로 물러서자 석실의 한 귀퉁이가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관문 건 너편에는 오래되었으나 그다지 낡지 않은 휘장이 쳐져 있었다. 휘장에는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조그 마한 사람의 모습들이 몸을 쭉 뻗어 엎드려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자세였다. 잔뜩 긴장했던 일행은 문이 올라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느릿하게 문이 올라가기 시 작했다. 뒤편에 있는 휘장의 모습도 점차 똑똑히 그들의 눈에 들 어왔다. 아직은 상체까지만 보이는 커다란 인물의 주위로 세 명 의 작은 사람이 떠 있었다. 그들은 칼과 거울과 방울을 들고 있 었다.
준후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풍백, 운사, 우사. 단군, 단군님의 화상이구나!”
사람들은 문이 완전히 열리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안 기자 는 허리를 굽혀 들어가려 했으나 현암이 제지했다. 예감이 이상 했다. 홍녀와 자영, 승현은 옛 조상의 그림을 숙연하게 바라보았 다. 서서히 사람의 수염이 보이기 시작했다.
순간 준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예! 예를 갖춘다! 단군님은 고대의 제황! 제황에게 예를 갖추려면………….”
*불교에서 유래된 경례하는 법의 하나. 먼저 두 무릎을 땅에 뚫고, 두 팔을 땅에 대고 그다음에 머리를 땅에 닿도록 절을 하는 것으로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방법이다.
준후는 반사적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방의 돌벽에서 무언 가 느껴졌다. 준후가 몸을 날리면서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엎드려요! 얼굴도 들지 말고! 단군님의 얼굴을 보면 안돼요!” 준후의 소리를 듣고 자영이 제일 먼저 엎드렸고 홍녀가 승현 을 누르면서 몸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손 기자와 안 기자는 당황 하여 머뭇거렸다. 사방의 벽에 갑자기 수없이 많은 구멍들이 열 렸다. 현암이 두 기자에게 몸을 날리자마자 사방의 벽에서 짧은 화살들이 빽빽하게 쏘아져 나왔다.
“으윽!”
박 신부는 마사토키가 던진 바윗덩이가 오라 막에 부딪히자 충격을 받고 뒤로 주르륵 밀려 났다. 간신히 바위를 튕겨내기는 했지만, 놈의 힘은 강했다. 눈앞이 아찔해지면서 다리가 휘청거 렸다.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면서 고개를 돌려보니 오의파 두 사 람과 병수, 현정도 몸에 많은 상처를 입고 뒤로 밀리고 있었다. 박 신부는 입술을 깨물면서 현암 일행이 들어간 구멍으로 몸을 돌려 뛰었다.
“이쪽으로! 무덤을 지켜야 해! 여기로 모여!”
박 신부의 고함 소리를 듣자 현정을 비롯한 네 사람은 간신히 몸을 떨쳐서 박 신부 쪽으로 뛰어왔다. 그러나 포위되어 있던 상준과 승희는 그럴 수 없었다. 승희가 상준에게 힘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의 힘을 늘려 주면 우리도 일단은 빠져나갈 수 있겠지!’
승희는 눈을 감고 상준에게 힘을 집중했다.
“어어………… 이거 뭐야! 무, 무슨 짓이야!”
상준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면서 들고 있던 깃발을 떨어뜨 렸다. 영의 파장이 맞지 않아 승희가 보내는 힘이 도리어 상준의 힘과 충돌한 것이다. 승희는 깜짝 놀라서 힘을 보내던 것을 멈추 었으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지박령들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너 나 죽이려고 한 거야? 엉? 이 망할!”
“아….. 아니….. 아악!”
승희와 상준은 온몸에 무수한 타격을 입고 땅에 뒹굴었다. 그 러더니 두 사람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들 둘을 포로로 삼으 려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몸은 허공에 들린 채 마사토키에게 서서히 끌려갔다. 상준이 정신을 잃자 그나마 한편에서 지박령 의 많은 수를 붙잡아 두고 있던 쥐의 기운마저 사그라져서 그쪽 의 지박령들마저도 다가왔다. 박 신부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 이런! 하느님!”
“괘, 괜찮아?”
“당연히 괜찮지!”
현암은 퉁명스럽게 안 기자의 말에 대답하면서 몸을 일으켰 다. 그러나 안 기자를 내리누르느라 현암의 몸은 바닥에 딱 붙어 있지 못하는 바람에 등에 화살이 여러 개 스치고 지나가서 옷이 찢어지고, 붉은 핏줄기가 채찍 자국처럼 나 있었다. 안 기자가 몸을 떨면서 입을 열려고 했지만 현암은 무표정하게 뒤로 돌아 섰다.
단군의 휘장은 언제 위로 말려 올라갔는지 사라지고 건너편 에는 또 하나의 작은 석실이 보였다. 준후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 다. 일행이 쭈뼛거리며 다음 방에 들어가자 준후는 벌써 벽에 씌 어 있는 문구를 읽고 있었다.
“천부인은 여러 단군님들의 덕과 힘과 영험을 모은 물건이라. 그 힘을 얻으면 수월히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으리라. 그러나 이 미 여러 번 마음이 올바르지 못한 자들이 천부인을 얻어 힘을 써도 천부인의 너그러움은 누구에게나 덕을 베푸시었다.”
안 기자가 중얼거렸다.
“신라가 가장 열세이면서도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 천부인의 힘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손 기자가 고개를 저었다.
“안 기자, 자네의 비약은 정도를 넘었어.”
“하지만 비약하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
“그래도 흥분은 하지 말라고. 아무리 영험한 것이라도 물건 하나가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기는…………”
둘이 중얼거리는 동안에도 준후는 읽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물건의 지킴이로서 그릇된 일에 인(印)이 사용되는 것을 두 고 볼 수는 없는 일. 나는 한님만큼 마음이 넓지 못하다. 그래서 관문을 설치한 것, 여기 두 번째 관문이 있다. 그대들이 여기에 왔다는 것은 나랏자손 세 명과 함께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 고 그대들이 천부인의 힘을 얻으려 한다는 것은 생사나 국운이 걸린 중대한 일 때문일 터. 그대들의 성의를 보아야 한다.”
“어서 계속 읽어 봐!”
“신라의 왕은 백제를 공격하여 이 방의 열쇠가 되는 천총운검 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것을 왜(倭)를 징벌하는 데 보냈다고 하 니 그 검을 지녀야 하리라.”
안 기자가 무릎을 쳤다.
“그래서 천총운검이 일본으로 갔구나! 신라의 마립간은 천총 운검을 빼앗았지만, 혹시나 되빼앗겨 백제가 천부인의 힘을 사 용하면 어쩔까 염려했을 거야! 천부인이 있는 이곳은 당시 백제 의 땅이었으니! 그러나 천총운검을 가져간 장수 닭우는 무슨 이 유에서인지 일본에 남아 영웅이 되었고, 천총운검은 초치검으로 바뀌어 그곳의 신물이 되었을 거야.”
준후는 계속 읽어 갔다.
“이 방의 문을 열려면 나랏자손 한 명이 천총운검으로 자신의 피를 바쳐야 한다.”
일행의 얼굴이 휘둥그레졌다. 글을 읽던 준후의 얼굴도 파래졌다. 현암이 소리쳤다.
“준후야! 제대로 해석한 거야? 잘못 읽은 거 아냐?”
준후는 눈을 돌려 빠른 속도로 중얼거리면서 읽었다.
“나랏자손 한 명이 천총운검으로 자발적으로 목숨을 바쳐야…….”
사람들은 얼굴이 해쓱해진 채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 다. 나랏자손의 목숨이라고? 자영, 승현, 홍녀…………… 현암이 소리를 질렀다.
“그건 아니야. 안 돼, 준후야! 더 읽을 필요 없다. 어서 나가자!”
안 기자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에서는 입 다물지?”
현암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우리는 사람 살리러 온 거야. 죽이려고 온 게 아냐! 근데 뭐?
사람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도 안 돼!”
홍녀가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두 죽습니다.”
현암이 거칠게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싸우자고! 싸워서 이기면 될 것 아냐! 자, 어서 나가! 전부 나가!”
승현이 조용히 앞으로 나왔다.
“저, 저……..”
“맞기 전에 비키지?”
현암은 험악하게 소리를 지르자 승현은 움찔 뒤로 물러섰다. 자영은 큰 눈을 토끼같이 뜬 채 오들오들 떨었다. 안 기자와 손 기자, 준후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현암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뭐? 조상님? 후손 죽이라는 조상도 있더냐? 그래, 이놈의 벽 을, 모조리 깨부수고・・・・・・!”
현암은 기공을 끌어 올려 한쪽 벽을 후려갈겼다. 석벽은 쇳소리를 내면서 현암의 공격을 가볍게 튕겨 냈다. 두 번, 세번…………. 그러나 마찬가지였다. 홍녀가 앞으로 나섰다.
“그만, 소용없어요. 결단을………….”
“지금 뭐라고 했죠? 저 헛소리를 믿는 거예요?”
“그・・・・・・ 그러나 방법이………….”
“방법? 방법? 하하하!”
현암은 미친듯 웃었다. 그의 눈에서는 물기가 반짝였다.
“현암 상, 저라도………… 어차피 죽을 바에야…………………”
“물러서시죠?”
현암이 정색을 하며 초치검을 꺼내 들었다. 일행은 긴장했다.
현암의 얼굴이 파르르 떨리면서 초치검에 기공이 주입되는 듯 푸른 검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준후가 소리를 질렀다.
“혀, 형! 뭐 하는 거예요!”
“목숨을 바치라고? 흥! 우리가 안 해도 칼이 남아 있다면 어느 놈인가는…………….”
기공을 받은 초치검의 낡은 검신에서 녹이 우르르 떨어져 나 가면서 시초의 모습을 보였다. 검기가 두 자를 넘어서기 시작했 다. 그러나 현암은 계속 기를 써서 공력을 늘렸다.
“나랏자손의 피를 바쳐서라도 힘을 얻으려 하겠지? 그건 싫거든?”
힘을 과하게 받은 초치검에 금이 쫙 퍼졌다. 안 기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
“뭐, 뭐 하는 거야? 그, 그건 중요한 물건이라구!”
원래 현암은 영력이 깃든 월향을 통해서만 넉 자의 검기를 만 들어 낼 수 있었으나, 극도로 흥분한 현암은 그렇지 않은 초치검 을 통해서도 석 자가 넘는 검기를 만들었다.
“중요한 게 아니라 망할 물건이야! 야압!”
현암의 고함이 좁은 석실 안에서 쩌렁쩌렁 울리더니 검기를 이겨내지 못한 초치검이 폭발하면서 가루로 변했다.
일행은 순식간에 일어난 사태에 어안이 벙벙해서 검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는데도 피하지 않았다. 현암의 손에는 칼자루만 남 아 있었으나 현암은 그것마저도 기공력으로 뭉개 버렸다. 현암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미소가 어렸다.
“이제 됐지? 힘이니 희생이니 무슨 빌어먹을……”
안 기자가 비로소 정신이 든 듯 소리를 질렀다.
“자네, 이게 무슨 짓인가! 그건 역사의 유물이야!”
“그냥 흉물이야.”
“꼭 피를 보지 않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엄청난 용기를 심어 줄 수 있는 물건이란 말이야! 역사적인 증거!”
“그 대신 누가 죽을지도 모르잖아. 힘을 얻으려는 자 때문에 말이야.”
“그런 짓은 안 하면 되지…………. 그리고 모든 민족에게………. 현암이안 기자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눈이 불타올랐다. “잘 들어! 민족 전체를 위해 한 사람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영 광스러운 일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민족 전체가 그걸 핑계로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건 추악한 일이야!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민 족이 조금 손해를 보면 안 되나? 유물이 많은 사람에게 용기나 정신적인 위안을 줄지는 몰라도, 한 사람에게는 생명이 걸린 문 제라고! 너를 한번 바쳐 볼까? 웃으며 승복할 수 있어?”
안 기자는 대답할 수 없었다. 현암은 멱살을 놓았다.
“자, 뭐 해? 죽으러 가자고………………”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현암은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생각했다. 자기가 무리한 공력을 썼다는 것을 잊고 있었기 때문에…………. 정신이 핑 돌았다. 등의 상처도 말할 수 없이 쑤시고 아팠다. 현암은 석실이 왜 빙글빙글 돌까 생각하면서 의식을 잃었다. 흙바닥이 얼굴을 덮쳤다.
모두 길을 비켜라! 그러지 않으면 이 둘을 갈가리 찢어 버리겠다!
박신부와 오의파, 현정과 병수는 구멍을 둥글게 에워싼 채 몸 을 떨었다. 마사토키의 해골은 정신을 잃은 승희와 상준을 들고 있었고, 주변에는 수없는 지박령들이 웅웅거리며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박신부가 외쳤다.
“풀어 줘!”
길을 비켜라!
박신부가 한숨을 쉬었다.
“모두 비키세.”
현정이 소리쳤다.
“안 돼요! 저들에게 단군의 신물을 내주면!”
“길을 내주게. 목숨보다 중요한 건 없어.”
“무슨 소리예요!”
“어서 비키게!”
“못 비켜요!”
박 신부는 고개를 저으면서 오라로 현정을 밀어냈다. 현정은 오라에 주르륵 밀려 저만치까지 뒷걸음쳤다. 오의파의 두 사람은 조용히 자리를 옮겼고 병수는 철봉을 쥔 채 몸을 떨었다. 박 신부가 말했다.
“길을 막진 않겠네. 그러나 안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나올 때까지는 기다려 주게.”
안 돼! 놈들이 먼저 천부인을 얻으면 나는!
박신부가 눈을 부릅떴다.
“뭐? 그렇다면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해치겠다는 건가? 마사토키, 그건 안 된다!”
여기 둘은 죽어도 좋은가?
허공에 뜬 상준의 몸이 사방에서 심한 힘으로 당겨지는 모양 이었다. 정신을 잃고 있던 상준이 비명을 질렀다.
“그, 그만해! 그만!”
갑자기 병수가 와락 고함을 지르면서 마사토키의 백골을 향해 달려 나갔다. 현정도 몸을 날렸다.
병수의 몸이 마사토키의 허리를 껴안았다. 현정은 마사토키의 목이 있는 곳을 향해 청홍검을 휘둘렀다.
“으악!”
“아악!”
마사토키가 손을 한 번 떨치자 병수의 팔이 우두둑 소리를 내 면서 길게 늘어져 버렸고, 현정은 허공에서 뭔가에 부딪혀 뒤로 떨어져 뒹굴었다. 오의파의 둘이 주문을 외우려 했으나 그들마저도 폭풍처럼 밀어닥친 기운에 우르르 넘어져 버렸다. 박 신부 가 오라를 뿜어 보호하려 했으나 사방에 놈들이 가로막고 있는 지 오라가 퍼져 나가지 않았다.
“이 이놈들!”
박 신부는 노한 호통을 지르면서 양팔을 움츠렸다가 벼락같이 폈다. 박 신부의 오라를 압박하고 있던 지박령들이 무더기로 튕 겨져 날아가면서 오라가 퍼져 나갔다.
“마사토키, 멈춰!”
박신부가 마사토키를 향해 달려 나가려 했다. 그때 박 신부를 향해 다가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엇!”
그들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던 현현파의 네 사람이었다. 백 제암의 사천왕, 그리고 도운까지도 함께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 나 아홉 사람의 눈은 풀린 상태였고 이상한 기운을 몸에서 발산 하고 있었다.
“마, 마사토키! 이 지독한 놈! 부상자를 빙의시키다니!”
이제는 박 신부 혼자였다. 오백 대 일.
물러서라! 너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하느님이 함께하신다!”
물러서라!
박신부는 물러서기는커녕 구멍 바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주여, 함께하소서………….’
마사토키의 목소리가 마음속으로 들려왔다.
죽여라!
준후는 현암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모두 나가요, 이제.”
누구도 입을 열 수 없었다. 초치검이 가루가 되어 없어진 이 상, 관문을 돌파할 방법이 없었다. 묵묵히 일행이 몸을 돌리는데 자영이 별안간 소리를 질렀다.
“저, 저, 저기!”
놀란 준후가 고개를 돌렸다. 뒤에는 홍녀가 벽 쪽을 향해 무 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리며 몸이 천천히 늘어져 갔다.
준후는 눈을 부릅뜨고 홍녀에게 다가갔다. 달음질쳐서 가고 싶었지만 몸은 느린 화면처럼 재빨리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악! 누나!”
홍녀는 구마열화검으로 자신의 배를 깊이 그어 내렸다. 피는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홍녀의 얼굴은 고통에 못 이겨 하얗게 질려 있었으나 입은 간구하는 듯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준 후는 홍녀가 마음으로 기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천부인이시여. 모르고 있었으나 저도 당신의 후손이라 합니다. 검은 없어졌으나 마지막으로 기원을 들어주소서. 힘을 베푸소서. 제발 힘을…………. 모두를 살리기 위한 힘을…….
“누나! 뭐 하는 짓이야! 그만!”
준후는 악을 썼다. 준후에게 홍녀의 목소리가 전달되어 왔다.
나는 내가 일본 사람인 줄로 알고 있었어. 죄를 많이 지었지. 현암 상 에게 미안하다고 전해 줘. 아까 내가 칼질을 한 것…………… 그러나 현암 상 은 내게 왜 그랬느냐고 묻지도 않았어.
“그만, 그만둬요! 제발!”
준후가 외치는 사이에도 홍녀의 메시지는 폭포수처럼 준후의 마음속에 흘러들어 갔다.
나는 바라는 것이 있었어. 나는 일본인이 불쌍하다고 생각해. 진실이 바로 앞에 있는데. 그러나 그들은 진실을 받아들일 만큼 속이 넓지 못 해.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가엾은 족속이야. 나라는 부강하지만 그들의 생활은 그렇지 못해. 아니 그만…… 하지만 그들은 착해. 일본이 죄를 많이 지었지만 모든 일본인이 그런 것은 아니야. 나는 아까 초치검을 빼 앗아 없애려 했어. 그래서 여기로 들어왔어. 일본을 위한다는 좁은 생각 으로…………. 그러나 현암 상이, 그분의 마음 씀씀이가 더 넓었어……………. 전 해줘, 꼭……. 언젠가는 모든 것이 밝혀질 터이니, 언젠가는…………… 현암 상은 현명했던 거야…………. 지금 천부인의 목소리가 들려. 너도 들리지? 지킴이의 관문은 그냥 있지만 천부인은 내 소리를 들었어. 그리고 말을 걸고 있어. 너도 들려? 들려? 들….
홍녀의 몸이 서서히 식었다. 준후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 이 쏟아져 나왔다. 순간, 석실 전체가 우르릉거리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진이 난 것처럼 천장부터 바닥까지 흔들려서 일행 은 모두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거나 무릎을 꿇었 다. 어디선가 장엄한 목소리가 울렸다.
매무새를 다듬고 무릎을 꿇어라.
홍녀가 마주 보고 있던 석실의 벽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거기 서 언뜻 보인 것은 밝은 광채였다. 아무도 눈을 뜰 수 없었다. 눈 을 감아도 광채는 그대로 눈을 파고들듯이 비쳐 들어왔다.
나는 한님의 목소리고 한님의 밝음이며 한님의 마음이로다.
자영과 승현이 눈을 조금 뜰 수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광채 가 어떤 물건인지는 볼 수 없었다.
그대들은 지킴이의 시험을 모두 이겨 냈구나. 그대들은 이제 한님의 뜻대로 다 이룬 것이다.
자영은 놀랐다. 그러면 천총운검을 부순 것, 홍녀가 무모하다 는 것을 알면서도 자결한 것이 모두 계획된 일이었단 말인가? 준후에게는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곳의 관문을 처음 만든 지킴이다. 이곳의 관문은 내가 설치한 것이 아니며 천부인에 욕심을 내고 힘을 얻은 자들이 그때마다 관문을 늘린 것이다. 그 관문들은 천부인이 세상에 나가는 것을 막고 힘을 가두어 자기들만이 이용하려 한 사악한 자들이 만들었다. 나는 힘을 다해 관문을 없애려 했으나 천총운검을 찾을 수 없었고, 또 나랏자손의 희생이 필요했다.
준후는 비로소 모든 것을 깨달았다. 천부인을 땅에 묻어 두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었다. 천부인은 한님의 목소리, 한님의 밝 음, 한님의 마음이지 물건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러나 힘을 자기 의 것으로만 하려는 자들이 천부인을 봉인했고, 지킴이는 봉인 을 다시 봉인했다. 결국 지킴이의 봉인은 봉인을 깨기 위한 역봉 인이었고, 원래의 봉인을 깨기 위한 열쇠가 초치검과 나랏자손 의 희생이었던 것이다. 지킴이의 글은 봉인을 해소시키기 위한 방법을 원래의 뜻을 감춘 채 적어 놓은 것이었다.
현명하구나, 어린아이야. 너희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잘해 주었 다. 원래 천총운검으로 나랏자손이 해를 입으면 검은 부서지게 되어 있 었다. 그러나 내 생각보다도 너희의 착한 마음이 더 좋은 쪽으로 해결을 본 것이구나. 천부인은 이제 세상으로 나갈 것이다. 널리 모든 사람을 위해 주고 모든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 줄 것이다. 한님의 뜻은 하나의 나라나 작은 일들에 편협하게 쓰이기에는 너무 크다. 모든 이들 에게, 비록 적이나 모르는 자들에게도 널리 미쳐 고루 퍼질 것이리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광채가 밝아졌다. 그리고 천둥과 같은 울림이 느껴지더니 광채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준후의 마음에 지킴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천부인은 갈 곳으로 가셨다. 너희에게는 문제가 있었지? 내가 도와주마. 그런 뒤에 나도 쉬러 가련다. 얼마만인가. 하하하…….
엄청난 폭풍 같은 바람이 소용돌이치며 퍼져 나갔다. 그러나 그 바람은 일행이 땅에 엎드려 있는 곳은 교묘하게 피해 가고 있 었다. 또다시 목소리가 울렸다.
치우의 바람이 사방을 잠재우리라.
준후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치우의 삭풍!”
박 신부의 뒤쪽 구멍에서 돌연 엄청난 바람의 소용돌이가 밀 려나왔다. 박 신부는 피할 사이도 없이 앉은 채로 앞으로 거꾸 러져 흙에 반쯤 묻혀 버렸다. 폭풍과 같은 바람은 안에 날카로운 발톱을 수없이 감춘 듯 거칠 것 없이 쓸고 나갔다. 나무에 닿으 면 나무가 톱밥처럼 부스러져 버렸고, 돌에 닿으면 돌이 모래처 럼 갈려 사라졌다. 그러나 사람의 몸에는 생채기를 내지 않았다. 으아악!
아악!
어억!
수백을 헤아리던 지박령들은 엄청난 바람에 휘말려 정신없이 흩어져 뱅글뱅글 돌았다. 빙의되었던 사람들과 승희, 상준 등 사 람들의 몸도 가랑잎처럼 날아갔고, 땅에 흩어져 있던 백골마저 가루로 변했다. 마사토키의 백골은 몸이 조금씩 닳아져 없어지면서도 억지로 버티며 앞으로 나왔다.
아아아……. 신물, 신물! 나, 나, 나는!
마사토키, 이제 너의 임무는 끝났다.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게 바로 천부인의 힘이다.
아, 아냐! 나는, 나는 죽어도!
너는 이미 죽은 몸이었어. 편히 쉬어라.
박 신부는 놀라움에 크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마사토키의 백골을 향해 십자가를 갖다 댔다. 지박령들이 흩어지자 마사토 키는 힘을 쓰지 못했다. 마사토키의 백골에 집요하게 달라붙어 있던 그의 영은 크게 비명을 지르면서 서서히 무저갱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사토키의 백골도 가루로 변해 바람에 흩어졌다.
마사토키의 백골이 흩어지자 박 신부는 한숨을 내쉬면서 몸에 서 힘을 뺐다. 그러자 박 신부의 몸도 바람에 밀려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 신부는 이제 꼼짝도 하기 싫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이젠 오직 쉬고 싶다는 생각뿐……….
현암은 정신을 차리고 홍녀를 부축했다. 준후는 울먹이면서 홍녀가 남긴 말들과 그간의 일들을 일행에게 이야기해 준 터였 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숨을 거둔 홍녀의 얼굴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홍녀는 숨지기 전에 천부인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일까? 모든 것을 깨달았다는 듯 홍녀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지없이 평온한 얼굴이었다.
일행은 굴 밖으로 나왔다. 현암은 마지막으로 나가기 전에 관 문의 손잡이를 뽑아 버렸다. 모두 구멍에서 나가자 땅이 흔들리 면서 흙더미가 구멍을 메웠다.
박신부가 현암에게 물었다.
“천부인은 찾았나? 어디에 있지?”
준후가 손가락을 들었다.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해는 곱 디고운 황금색과 붉은색을 영롱하게 발하고 있었다. 준후의 얼 굴이 환한 미소로 빛났다.
“저기, 저기에 있어요.”
박 신부는 흙먼지 낀 안경을 치켜 준후가 가리키는 아침 해를 쳐다보았다. 현암도, 승희도, 기자들과 정신이 든 다른 사람들 도…………. 서서히 올라오는 아침 해의 광명은 세상을 고루 밝히며 환하게 온 누리를 물들이고 있었다. 박 신부가 흐뭇한 미소를 지 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잘되었어! 모든 것이 잘되었어!”
사람들은 각자 갈 길로 흩어졌다. 아무것도 얻은 게 없었으나 준후의 설명을 들은 모두의 마음은 흡족했다. 상준과 병수는 그 동안 사리사욕을 위해 살아왔던 지난 일을 뉘우치고 남을 위해 살도록 애쓰겠다고 약속하고 떠났고, 현정은 도지 무당의 시신 을 수습한 뒤 그 와중에도 현암에게 언젠가 꼭 대련하자는 말을 남기고 청홍검을 멘 채 떠났다. 현현파는 철기의 시신을, 백 제암의 승려들은 지연보살의 시신을 수습했다. 고인의 믿던 바에 맞게 장례를 치러 주려는 것이었다. 일본 승려 도운에게는 오 의파의 상렬이 설명을 해 주었고, 도운은 말없이 떠났다. 홍녀의 시신을 가져가려 했으나, 후가 홍녀는 이 땅에 묻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려서 홍녀는 퇴마사들이 장례를 치러 주기로 했다. 모 두 떠나고 기자들만 남았다. 안 기자에게 현암이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줘.”
“음? 뭐・・・・・・ 뭘?”
“자네가 숨긴 카메라로 우리 모습을 계속 찍었다는 것, 알고있어. 필름 줘.”
“그, 그건・・・・・・”
“이런 일을 세상 사람들이 알아서 좋을까?”
“하, 하지만 역사적인 사실은 밝혀져야 할 게 아냐! 일본과의 관계도 그렇고 또………….”
“증거는 하나도 없어.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을 테고.”
“그렇지만………….”
현암은 고개를 저으며 하늘을 가리켰다. 해는 환하게 땅을 비추었고 산허리에서 내려오는 바람도 맑았다. 상쾌한 날씨였다.
“구름이 낀다고 해가 없어지는 건 아니야. 금방 다시 나타나는 법이지. 진실도 마찬가지야. 억지로 밝히려 할 필요가 없어.” 현암은 어느새 안 기자의 주머니에 손을 넣어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주저함 없이 필름을 주욱 빼 버렸다.
“이 이봐!”
안 기자가 뭐라 말을 하려 했으나 현암은 빈 카메라를 돌려주고는 뒤로 돌아섰다.
“재민아 꿈 한번 잘 꿨지? 개꿀이니 다 잊어라. 하하하!”
현암은 껄껄 웃으며 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왜구들이 쳤던 만다라의 진은 치우의 삭풍에 쓸려 완전히 없어져 버렸고, 사방 은 고요한 아침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자영과 손 기자는 멀어 져가는 현암 일행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자영이 외쳤다.
“담에 술 한잔 사요!”
저쪽에서 승희가 대꾸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린 술 끊었어요!”
안 기자는 중얼거리더니 볼멘소리를 냈다.
“손 좀 그만 흔들어요! 제기랄! 자기만 잘난척하고!”
자영이 해맑게 웃었다.
“왜요? 특종을 놓쳐서 아쉬워요? 호호호!”
“놓쳐요? 아직 안 놓쳤어요! 바보 같은 놈! 두고봐라!”
안 기자가 품에서 필름을 한 통 꺼냈다. 자영과 손기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까 카메라 필름을 갈았다고요! 이게 진짜인데, 괜히 생필름을 버려 놓고.”
안 기자는 필름을 들고 조용히 뭔가를 생각했다. 자영과 손기 자는 둘 다 말을 못하고 조그만 필름을 들여다보았다. 안 기자가 중얼거렸다.
“망할 놈! 필름은 여기 있단 말이다! 전부 다 찍었어! 이걸, 이 걸 밝혀서는 안 된다고? 안 된다고? 난 기자란 말이다! 필름을 버릴 수 없어! 절대로 버릴 수 없다구!”
자영과 손 기자가 머뭇거리는 사이 안 기자는 갑자기 벼랑으 로 달려가서 있는 힘을 다해 필름을 힘껏 던졌다. 필름은 멀리 날아가 자그마한 파문만 남기고는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안 기 자가 다시 볼멘소리로 뭐라 중얼거리더니 돌아와서 말했다.
“실수로 필름을 떨어뜨렸어,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