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엄마, 나 죽거든 뒷산에다 묻어주…………….
현주는 고무줄놀이를 하다 말고 흠칫 놀랐다. 뜀을 뛰고 있던 성희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상한 노래를 했기 때문이었다.
“얘, 그게 무슨 노래야?”
현주가 묻자 성희는 멍한 눈초리로 현주를 쳐다보았다.
“뭐가?”
“왜 기분 나쁜 노래를 부르고 그래?”
“내가 언제?”
“방금 말야. 죽으면 뒷산에 묻고 어쩌고…………….”
“내가 언제 그랬어?”
“어머, 얘좀 봐!”
“너 헛것 들은 거 아냐?”
“아냐! 분명히 들었어!”
성희는 피식 웃으면서 고무줄 위에서 깡충깡충 뛰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월계화계 수수목단 금단초단 일! 공주마마…………….”
지긋지긋한 수업종이 울렸다. 현주는 성희와 헤어져서 반으로 돌아갔다.
왁자지껄하던 학교의 운동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바람도 없는데 그네가 삐걱거리며 조금씩 흔들렸다.
해는 중천에 떠올라 사방을 밝게 비쳤다. 조금만 더 있으면 저 학년 아이들은 재잘거리면서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고학년 아 이들은 점심을 후다닥 해치우고 운동장에서 요란스럽게 뛰어놀 것이다. 오전 수업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네는 하염없이 앞뒤로 흔들렸다. 미는 사람도 없고 바람도 불지 않는데 계속 흔들렸다. 흔들리는 폭이 점점 커졌다.
‘으아, 지겨워!’
산수는 정말 싫었다. 특히 동그라미며 사다리꼴이니 뭐니 나 오는데 머리가 나빠서 그런지 도대체 알아먹을 수도 없고, 생김 새마저 지긋지긋했다. 현주는 또 한 자루의 연필을 자근자근 씹 어서 곰보로 만들었다. 집에 가면 엄마에게 혼날 일이지만 졸지 않으려면 이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도 연필을 세 자루나 씹어서 흉악하게 만들어 놓았구나. 빨리 수업 시간이 끝나야 고무줄놀이도 하고 놀 텐데…………. 전에는 별로 재미를 못 느 꼈는데 이모에게 이야기를 듣고 고무줄놀이를 시작했다. 그런 데 하고 보니 정말 재미있었다. 운동도 되니 날씬해지고 좋지 않 니? 이모는 그렇게 말했다. 헤헤, 내가 나이가 얼마라고 벌써부 터・・・・・・ 아니지, 예쁘고 날씬해져서 나쁠 게 뭐가 있어? 적어도 소영이만큼은…..
소영이 생각을 하자 현주는 우울해졌다. 소영이는 도대체 어 디로 간 걸까? 소영이는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고 했다. 그날 소영이와 같이 놀았는데. 같은 반이었다. 소영이 는 무척 예뻤지만 부끄러움을 잘 타서 남 앞에서는 거짓말 하나 안보태고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아이였다. 인신매매범에게 잡 혀간 것일까? 소영이는 아버지도 안 계셨다. 소영이가 없어진 뒤 로 소영이 어머니는 거의 실성하다시피 됐다고 한다. 너무 안됐 지 뭐야. 그러고 보니 소영이가 없어진 지도 벌써 두 달이나 지났다.
“이현주! 무슨 생각하니!”
현주가 놀라서 그만 후다닥 일어났다. 당황한 나머지 연필을 문 채로 일어났다가 뒤늦게 입에서 뺐다. 애들이 와르르 웃었다.
“정신 차려, 정신!”
으이구, 징글맞은 담임 선생님! 4반 담임 선생님은 못생기기 는 했지만 그래도 착한 여선생님이고, 1반 담임 선생님은 멋있게 생긴 분인데 왜 우리 반에 하필 ‘북어’가 걸리나!
아이들에게 북어, 심하면 노가리, 통북어로 알려져 있는 5반 담임 선생님이 현주를 앞으로 불러냈다. 뻔하다. 또 교탁 옆에 서 있으라는 거겠지. 정신 차릴 때까지. 으아, 창피!
현주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 교탁 옆에 가서 섰다. 차라리 몇 대 맞고 몸으로 때우는 게 낫지, 이렇게 사람 피를 말리다니. 그러니 여태 장가를 못 갔지.
“그러니까 평행사변형이란………….”
북어야, 북어야, 뭐 하니…………. 정말 아무리 뜯어봐도 눈도 북 어 눈이고 얼굴색도 제삿장에 올라온 북어와 똑같다. 황달인가 하는 병이 있다던데 그거 아닐까?
속으로 오만가지 욕을 다 하고 있던 현주는 문득 창밖을 내다 보았다. 운동장엔 아무도 없었다.
순간, 현주의 눈이 커졌다. 아무도 없는데 그네가 흔들리고 있었다. 현주가 내다보는 것을 안다는 듯, 그네는 더 크게 흔들리 기 시작했다.
“서, 선생님!”
현주가 소리를 지르자 온 반의 아이들과 북어 선생님까지도 고개를 돌렸다.
“저, 저 그네!”
그네가 앞뒤로 세차게 흔들렸다. 바람에 밀려서는 저렇게 크 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설사 육학년 남자아이가 그네를 타도 저 렇게 크게 움직일 수는 없는 일. 그네는 거의 백팔십 도의 궤적 을 그리고 있었다. 아니, 백팔십 도도 넘어가고 있었다. 빈 그네 가! 아이들이 창가에 달라붙기 시작했고 여자아이들은 소리를 질렀다. 우는 아이도 있었고 겁 없이 떠들어 대는 남자아이도 있 었다.
“그네에 귀신이 붙었다! 귀신!”
그네는 꼭대기를 넘어서서 한 바퀴 돌아 쇠줄이 윗 철봉에 감 겼다. 그네가 거꾸로 뒤집힌 것이다. 옆 반까지 여파가 번져 갔 고 순식간에 아이들이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두바퀴를 한쪽으로만 돌아서 줄이 짧아진 그네가 저절로 풀 리기 시작했다. 반대로 돌기 시작한 것이다. 북어 선생님의 눈도 경악에 질리고, 아이들의 악쓰는 소리가 온 교정에 울려 댔다. 그네는 멈출 줄 모르고 계속 돌아갔다. 용기를 낸 수위 아저씨와 남자 선생님 두어 명이 그네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러자 그네는 흔들거림을 멈추더니 원상태로 돌아왔다.
수위 아저씨와 선생님들이 그네의 줄을 잡고 확인하는 듯했으 나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각 반 선생님은 아이들을 달래느라 진을 뺐다.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수업은 엉망이 되고, 선생님들의 그럴듯한 해명이 한참 동안이나 수업을 대신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선생님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귀신이 나왔다고 믿었다.
현주는 밥도 먹지 못했다. 점심시간이 되어서도 운동장에 나 가는 아이들은 적었다(특히 여자아이들은 하나도 안 나갔다). 그 네는 수위 아저씨가 줄을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해 놓았고, 아이 들은 근처에서 기웃거리기만 할 뿐 감히 다가서는 아이들은 없 었다. 구석에서 소곤거리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럭저럭 시간이 흘러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벌써 다 잊 어먹은 듯 쾌활하게 뛰어가는 아이들도 많았고, 무서움에 쭈뼛 쭈뼛 발걸음을 옮기는 아이들도 있었다. 소영이가 없어진 것도 귀신이 잡아갔기 때문일 거라고 떠드는 소리를 들은 현주는 고 함을 질러 묵살해 버리고는 뛰어갔다. 교문을 나설 때였다. 현주 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엄마, 나 죽거든 뒷산에다 묻어주…..
“아아악!”
현주는 공포에 휩싸여 미친 듯 달렸다. 누가 현주의 어깨를 꽉 잡았다.
“꺄악!”
현주는 비명을 지르면서 몸부림을 쳤으나 어깨를 잡은 손은 돌덩어리 같았다.
“얘, 왜 그러니?”
현주가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는 어떤 청년 한 사람과 흰 한복을 입은 꼬마 아이가 서 있었다.
“이름이 뭐지?”
“혀, 현주요. 이현주.”
현주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한복 입은 꼬마가 말을 던졌다.
“너도 그 소리가 들리니? 엄마, 엄마, 나 죽거든 하는 소리 말이야.”
“아악! 싫어!”
현주는 아이의 입에서 그 끔찍한 소리가 나오자 비명을 올리 면서 도망쳤다. 청년은 흠칫했으나 현주의 뒤를 쫓지 않고 대신 다른 아이들에게 물었다. 현주라고 하는 아이는 바로 맞은편에 보이는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준후야,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것 같다. 지금도 들리니?”
“이젠 안 들려요. 저 아이에게 자초지종을 들어 봐야 감이 잡힐 것 같아요.”
현암은 한숨을 내쉬었다.
“초등학교에서 이게 웬일이람?”
현암과 준후는 현주라는 아이의 집을 알아냈다. 그러고는 근 처의 제과점에서 시간을 때웠다. 지금 집으로 찾아가 봤자 현주 가흥분한 상태에서는 사정을 듣기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뒤에도 현주는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오 히려 현주의 어머니까지 가세해서, 현암을 이상한 사람으로 몰 아붙였다. 현암은 준후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지시했다. 준후는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현암은 잠시 후 초 등학교로 오라는 말을 남기고 먼저 학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잠시 기다리다가 준후가 벨을 누르자 현주의 어머니가 나왔다.
“안녕하세요, 현주 어머님!”
“누구니?”
“현주 반 친구예요. 현주에게 뭣 좀 빌릴 게 있어서 왔어요.”
현주 어머니는 의아한 눈초리로 준후를 바라보았으나, 준후는 순진한 표정을 지은 채 시치미를 뗐다.
“현주는 지금 몸이 안 좋은데……………. 불러 줄까?”
“아녜요. 제가 들어갈게요. 그래도 되죠?”
준후는 현주가 방에 있다는 말을 듣자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현주 어머니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문을 닫아걸었다. 준후는 현 주의 방문으로 다가갔다.
“어? 너!”
“쉿! 조용해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
“빨리 나가! 엄마를 부를 거야! 엄마! 아빠!”
준후에게는 대비책이 있었다. 간단한 부적으로 문에 주술을 걸면, 안에서 나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면 밖에서 부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단점이 있었지만, 현주는 소리를 높여서 엄마와 아빠를 불렀지만, 준후는 여유만만했다.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르쳐 줘. 중요한 일이니까.”
밤이 되었다. 하필이면 오늘이 북어 선생님의 숙직 날이었다. 다른 학교에서는 웬만하면 선생님들이 숙직을 잘 안 선다는데, 이 학교는 교장 선생님이 워낙 꼼꼼한 분이어서 선생님들에게 학 교 기자재를 일일이 챙길 것을 요구했고 그만큼 숙직도 잦았다. 낮에 괴이한 일을 직접 두 눈으로 본 북어 이영록 선생은 왠지 불안했지만 그렇다고 정해진 일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할 수 없이 이 선생은 수위와 함께 잡담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선생님, 슬슬 순찰을 돌아야 하지 않을까요? 불도 다 꺼졌나 확인해야 하고…”
이 선생은 내키지 않았으나 곧 몸을 일으켰다.
“예, 가야죠.”
수위는 손전등 하나를 이 선생에게 건네주었다.
“저는 학교 문을 잠그고 운동 기구들도 손봐야겠으니 선생님은 기자재를 돌아보세요. 이따 소주라도 한잔합시다요. 헤헤.”
수위는 무서운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 선생은 무서운 그네 옆으로 가지 않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뭉그적뭉그적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전부 빠져나간 학교만큼 허전한 곳이 있을까? 낮에는 그토록 시끌벅적하다가도 밤만 되면 바닷속처럼 고요해지는 곳. 이 선생은 순찰을 돌 때마다 쓸쓸함을 느끼곤 했다.
학교에서 쓸 만한 기자재는 음악실과 자연 실습실에 모여 있 었다. 자연 실습실에 보관되어 있는 포르말린 병에 담긴 갖가지 동물 사체가 오늘따라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으나 이 선생은 눈을 딱 감고 휙휙 지나쳐 버렸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 다. 이 선생은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끼면서 손전등으로 창문 을 비춰 보았다. 창문이 하나 열려 있었다. 이 선생은 한숨을 쉬 며 창문을 닫고 저도 모르게 흐른 식은땀을 닦았다.
어디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복도 구석에 붙은 화장실에서 들리는 소리 같았다.
‘이 시간에 누가?’
이 선생은 소리가 들리는 복도 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애를 써서 현주를 진정시키느라고 준후는 잔재주까지 부려야 했다. 그 보람이 있었는지 현주는 어느새 무섭다는 생각 도 잊어버리고 눈이 휘둥그레진 채 준후의 설명을 듣기에 여념 이 없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준후는 조심스레 본론을 꺼냈다.
“너희 학교에서 요즈음 이상한 일이 벌어진 적이 많지? 그렇지?”
“글쎄, 별로 그런 일은……..”
“그럼 왜 그 노랫소리를 듣고 놀랐지?”
현주는 몸을 움츠리며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준후는 재빨리 진정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몰라. 아무튼 무서워졌어. 그 노래, 아까 들었어.”
“언제?”
“성희가 오늘…………….”
“성희?”
“내 친구야. 소영이하고도 친했는데・・・・・・ 근데, 소영이는?”
“소영이 소영이가 어떻게 되었는데?”
“소영이는 두 달 전에 없어졌어.”
준후의 표정이 심각하게 바뀌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해 줘. 소영이라는 아이에 대해서.”
이 선생은 조심스레 화장실로 들어가서 물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전등을 비추었다. 아무도 없었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누가 물을 틀어 놓고 나갔나? 아까까지만 해도 물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이 선생은 수도꼭지를 잠그고 화장실을 나섰다. 그러나 뒤로 돌아선 순간 다시 물이 쏴 하고 쏟아져 나오자 소스라쳐서 자기 도 모르게 손전등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손전등이 데구르르 구 르면서 전구가 깨졌는지 불이 꺼져 버렸다. 이 선생은 털썩 주저 앉았다. 이 선생의 눈에 희끄무레한 형체가 세면기 앞에 서 있었 다. 이상한 노랫소리도 들려왔다. 정말로 들리는지 아니면 들리 는 것처럼 생각될 뿐인지, 꿈결에서 듣는 소리 같았다.
씻어야 해. 깨끗이 깨끗이………………
엄마 엄마 나 죽거든 뒷산에다 묻어주………….
흥얼거리는 것도 같고, 우는 것 같기도 한 소리가 나직하게 울 렸다. 이 선생은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갑자기 무언가 섬광을 뿌리면서 날아왔다. 그것은 눈앞에 서 있는 희끄무레한 형체를 덮치지는 않았으나, 협박하듯이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와 동시에 여자의 비명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 졌다.
‘저, 저건 또 뭐야! 어이쿠!’
뒤에서 누가 어깨를 잡았다. 이 선생은 까무러칠 뻔하다가 뒤 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에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뒤로 물러나세요.”
“소영이는 예쁘고 말이 없는 아이였어. 친구들하고도 말은 별로 하지 않았지. 혼자 흥얼흥얼 노래하기를 좋아했는데, 목소리 가 아주 고왔어.”
준후는 눈을 빛내면서 현주의 이야기에 온 정신을 기울였다.
“우리랑도 잘 놀지는 않았어. 괜히 사람을 슬슬 피하는 것 같 았어. 그리고 혼자 구석에서 아무 노래나 흥얼거리곤 했어. 노래 를 말야.”
갑자기 현주의 몸이 부르르 떨었다.
“그래! 맞아, 그 노래야! 내가 왜 잊고 있었을까!”
“어떤 노래지? 혹시 그…………….”
“응! 엄마, 엄마, 나 죽거든……………”
현주는 덜덜 떨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준후는 듣고만 있었다. 현주가 소리를 쳤다.
“소영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틀림없어! 그래, 바로 그 노래야 소영이가 우울하게 부르던 노래! 소영이가 없어지던 날 에도 그 노래를 불렀어! 왜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을까?”
”기억하고 싶지 않았겠지…………. 이젠 대강 알겠어.”
준후는 눈을 감고 손으로 수인을 맺으며 정신을 모았다. 잠시 후에 준후는 눈을 번쩍 떴다.
“큰일이네! 현암 형과 지금!”
준후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현주를 남겨 둔 채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밖으로 달려 나갔다. 현주 어머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리둥절해서 말을 걸지도 못했다.
준후는 영사를 통해서 소영이라는 아이에 대해 알아낸 것이 다. 그 아이의 영이 지금 현암과 맞부딪힌 것 같았다. 현암에게 는 영의 내력을 읽어 낼 능력이 없었다. 자칫하면 가엾은 아이의 영 하나를 그냥 소멸시키게 될지도 몰랐다. 시간이 없었다.
“누, 누구요?”
이 선생의 어깨를 잡은 청년은 말없이 앞으로 나서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번쩍거리며 날아다니던 것이 청년의 손에 잡 혔다. 작은 칼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희끄무레한 영은 이상하게 도 바들바들 떠는 것 같았다. 새처럼 날아다니는 칼이 나타나도 놀라지 않던 영이 청년이 나타났다고 놀라다니?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현암도 마찬가지였다. 현암은 우선 영 이 학교 선생님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덤벼들지 못하게 멀리서 월향을 날린 다음, 학교를 시끄럽게 만드는 귀신을 날려 보낼 생 각이었다. 그러나 현암이 나타나자 영 쪽에서 먼저 겁에 질린 태 도를 보이는 것이 이상했다. 현암의 내력은 깊이 갈무리되어서 쉽게 알아볼 수 없을 텐데……. 월향을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던 영이 자신을 보고 놀라다니?
영의 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신음 같은 소리였다.
안 돼, 무서워요! 깨끗이, 더 깨끗이……….
현암의 귀에도 그 소리가 들렸다. 현암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월향을 칼집에 꽂아 넣었다.
“무슨 소리지? 너는 누구냐? 대답해!”
안 돼, 안돼! 아아……………
영은 삽시간에 공기처럼 투명해지며 어둠 속으로 녹아들듯 사 라져 버렸다. 뒤에서 이 선생이 불을 켜자 화장실의 하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현암은 이 선생을 쳐다보았다. 이 선생의 얼굴 은 백짓장처럼 질려 입을 열지 못했다. 현암이 걸음을 옮기려는 데, 헐레벌떡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역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아직 삼십 대가 되지 않은 젊고 꽤 잘생긴 미남자였다. 이 선생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유, 유선생! 당신도 들었나요?”
유선생이라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중얼거렸다.
“깜빡 놓고 온 것이 있어서 돌아왔는데 여자 비명 소리가 들려서 올라왔어요.”
유선생이 덜덜 떨며 입을 열었다.
“정말 그 형체가 귀신일까요?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구죠?” \현암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는 여자의 비명 소리 같 은 것을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형체가 나타난 것을 어떻게 알았 고, 귀신이냐고 묻는 것일까? 그가 올라왔을 때는 이미 불이 켜진 뒤였는데 말이다.
“유 선생이라고 했던가요? 저는 지나가던 사람입니다.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알고는 감히 들어와 봤지요. 헌ep…..”
유선생의 안색이 흐려졌다.
“유 선생님은 전부터 영의 모습을 보아왔던 게 아닙니까?”
“무, 무슨 소리요?”
유 선생은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 뒤로 한 발자국 물 러섰다. 현암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유 선생님, 당신은 그 영의 정체를 알고 계시죠?”
유선생은 휘청하면서 벽에 몸을 기댔다. 현암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알고 계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무서워하시지 말고요. 영들 은 대부분 가엾은 존재입니다. 저는 원래 그런 가엾은 영들과 인 간들을 위해 약간 노력을 하는 사람입니다. 방금 나타났던 영은 사악하지 않았습니다. 사연이 있어 보였어요. 아마도 이 학교에 있었던 사람인 것 같고, 목소리로 보아서는 여학생인 것 같군요.”
이 선생이 외쳤다.
“맞아! 나도 그렇게 느꼈어요!”
현암이 다시 말했다.
“유 선생님은 보시지 않고서도 그 영에 대해 잘 아시는 것 같더군요. 전에 여러 번 보신 게 틀림없지요? 자, 유선생님, 제게 가르쳐 주십시오. 누구의 영입니까? 그리고 여기에 왜 자꾸 나타 나는 것입니까?”
유선생의 얼굴은 납빛으로 바뀌고 몸은 와들와들 떨었다. 그 러면서도 이를 악물고는 무슨 생각인지 열심히 하고 있었다. 현 암은 미소를 지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을 겁니다. 염려 마십시오. 저는 다만 영을 편안히 승천시키려 하는 겁니다. 믿어 주세요.”
유선생의 눈이 빛났다.
“저, 정말입니까? 당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습니까?”
“믿으세요. 약간의 능력이 없었다면 여기에 불쑥 나타나지도 않았을 겁니다.”
“정말 귀신을 곱게 보내 줄 수 있습니까?”
“평안하게 쉴 수 있도록 도와줄 수는 있습니다.”
이 선생이 말했다.
“유 선생! 아는 게 있다면 말을 해요! 이분은 정말 대단한 분 인 것 같습니다. 도와 드리세요! 지금 같아서야 이거 어디 애들 이 배우는 학교라 하겠습니까?”
유 선생의 표정이 많이 누그러졌다. 유 선생은 몇 번이나 망설 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마도 저, 저 귀신은 전에 실종된 소영이인 것 같습니다.”
이 선생이 헉 하면서 입을 가렸다. 유 선생은 빠른 소리로 말을 이었다.
“소영이가 틀림없어요. 그 아이는 죽은 것 같습니다. 저렇게 귀신이 되어 자꾸 나오니까요. 그리고 이유도 없이 나를 협박하 고 있어요. 나를 자꾸 유인해 냅니다. 밤에 학교로…………….”
현암이 눈살을 찌푸렸다.
“유인한다고요?”
“밤만 되면 꿈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리고 나를 죽이겠 다고 협박을 합니다.”
이 선생은 유 선생의 이야기에 몸을 떨었다. 현암은 의아했다. 영계란 인과율이 분명한 세계인데 보통 아이의 영이 특별한 이 유없이 사람을 해한다?
“이유가 있나요?”
“이유요? 내가 어떻게 압니까? 귀신이라고요! 터무니없이 날 해치려고 해요. 내가 그 애를 예뻐했는데, 그 때문에 내게 달라 붙으려고 하는 걸 거예요. 틀림없어요. 제발 살려 주세요! 귀신 을 없애 주세요! 흐흑!”
유 선생은 눈물을 흘렸다. 현암은 입술을 깨물었고 이 선생은 유선생을 달랬다. 아까 현암이 느낀 영의 기운이 그렇게 사악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 개운치 않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운동장 에서 남자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으악!”
“수위 아저씨다!”
현암은 서둘러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 운동장을 내다보았다. 그네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네 위에는 희뿌연 형체가 앉아 있었 는데 그 앞에 수위가 쓰러져 있었다.
“이런!”
현암은 몸을 날려 계단을 내려왔다. 이 선생과 유 선생도 현암 의 뒤를 허둥지둥 따라왔다.
계단에서 뛰어내리다시피 몸을 날려 운동장으로 접어든 현암 의 눈에 흰옷을 입은 사람이 수위를 일으키는 모습이 보였다. 준후였다.
현암은 그네 쪽을 유심히 살피면서 일부러 걸음을 늦춰 준후 에게 다가갔다. 준후는 수위의 몸을 다시 눕히고 있었다. “준후야, 이 사람은 어때?”
“기절한 것뿐이에요. 에고, 술 냄새…………. 별일은 없으니 안심 해도 돼요.”
수위는 어디선가 술을 한잔 걸치고 오는 길에 흔들리는 그네 를 보고 기절한 것 같았다. 차라리 이럴 때는 기절해 있는 편이 낫긴 했다. 현암은 그네를 타고 있는 영에게 눈을 돌렸고 준후가 그 앞으로 갔다. 영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이 선생과 유 선생은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 현암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현암이 조용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내고 준후가 말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준후의 표정으로 보아서는 이야 기가 잘 진행되는 것 같지 않았다.
“왜 그러니, 준후야?”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기가 어려워요. 횡설수설하는데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제정신이 아니라고?”
유선생이 불쑥 끼어들었다.
“맞아요! 제정신이 아니라고요! 까닭 없이 나를 괴롭히는 걸보면!”
준후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저 남자를 무서워하고 있어요.”
“무서워한다고?”
현암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유 선생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런데 준후의 말에 의하면 오히려 영 쪽에서 유 선생을 무서워하고 있다지 않은가?
“자, 준후야, 차근차근히 내 말을 전해 줘.”
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소영이가 맞나 물어봐.”
준후가 잠시 눈을 감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대요.”
“죽은거겠지?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고……………. 맞니?”
“예.”
“그러면 자신이 죽은 사실도 알고 있나 물어보렴.”
준후가 조금 힘들어하는 것 같더니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 것 같대요.”
“이제 갈 곳으로 가야 하지 않느냐고 물어봐.”
준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학교에 계속 나오고 싶대요.”
“학교는 더 다닐 필요가 없어. 친구들도 당분간 만날 수 없을테고.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얘기해.”
“아니래요. 매일 친구들을 볼 수 있는데 왜 만날 수 없냐는데요?”
“그러나 친구들은 자신을 보지 못한다고 전해.”
“아니래요. 자기가 그네를 타면 봐 준대요. 신기해하면서요. 더 크게 그네를 탈 수도 있대요.”
“아아!”
뒤에서 이 선생이 나직이 말했다.
“소, 소영이는 워낙 수줍음을 타서 체육 시간에도 그네를 제 대로 타지 못했어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기도 했는 데………… 아, 가엾은 것………….”
고개를 끄덕이는 준후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현암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러나 현암은 아직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다.
“소영이에게 왜 자꾸 노래를 부르느냐고 물어봐.”
“그건……”
준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엄마가 들으라고 부르는 거래요.”
“엄마가 들으라고? 무슨 일이 있었니?”
준후가 흠칫했다.
“이야기를 안 해요!”
“말하라고 그래!”
“싫대요!”
유선생이 또 다시 나섰다.
“이제 됐어요. 왜 아이를 괴롭히는 거요? 당신, 능력이 있다면 빨리 저 귀신을 보내 버려야 할 것 아니오?”
준후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아요.”
현암이 고개를 저었다. 현암의 눈이 빛났다.
“아직 안 돼. 왜 죽었지?”
“그건…….””
“왜?”
“뒤, 뒷산에서……”
“말하라고 그래!”
“굴러떨어졌대요! 그게 전부래요! 현암 형, 울려고 해요!”
현암을 쳐다보는 준후의 눈에 노여움이 깃들어 있었다. 현암은 심호흡을 했다.
“준후야, 비록 당장은 고통스러워도 알아야 할 일이야.”
“하지만 저 애는…………….”
“내가 직접 저 아이와 이야기할 수 있게 해 주겠니?”
뒤에서 유선생이 외쳤다.
“그만하면 충분하지 않소! 이제 그만! 그만하시오!”
현암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이유 없는 행동은 없습니다. 특히 영의 경우에는……………. 아직 몇가지 궁금한것이 남아 있습니다.”
“다 들었지 않소? 저 아이가 그네를 타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이유, 노랫가락인지 뭔지 흥얼거렸던 이유, 죽은 원인까지 다 나 오지 않았소?”
이 선생이 중얼거렸다.
“그래요. 가엾은 것………. 혼자 조용히 지내고, 놀림당하고, 거 기에 실수로 뒷산에서 떨어지다니. 쯧쯧…………… 내일이라도 뒷산을 조사해 봐야겠군요. 거기에 분명 소영이의 유해가 있을 겁니다.” 현암은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그렇습니다. 제 생각도 그래요.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닙니다. 그냥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아이는 이런 영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아요.”
“자기가 죽은 사실을 알리려 한 것이라 하면 그만이지 않소!” “아니, 나는 다른 것도 보았습니다. 깨끗이 씻는다고 했죠? 그 이유가 뭘까요?”
이 선생은 불길한 생각에 가슴이 철렁했다. 유 선생의 얼굴도 파랗게 질렸다. 현암은 매서운 눈초리로 준후에게로 시선을 돌 렸다.
“준후야, 내게 맡기렴. 부적을 주고 너는 물러서.”
“싫어요! 내가 있으면 안 되나요?”
현암이 미소를 지었다.
“아직 너는 어려.”
“내가 뭐가 어려요? 열네 살이나 먹었는데!”
“말 들어.”
현암이 조용히 쳐다보자 준후는 구시렁거리면서 걸음을 옮겼 다. 준후가 먼발치로 물러서자 현암은 부적에 불을 붙였다.
예쁘게 생긴 여자 아이의 모습이 현암의 눈에 또렷이 비쳤다. 초등학생인데도 키도 꽤 크고 성숙한 편이었다. 그네 위에 앉아 조금씩 그네를 앞뒤로 흔들고 있는 모습이 슬퍼 보였다. 현암은 아이가 놀랄까봐 조용히 물었다.
“소영이 소영이가 맞지?”
네.
“뒷산에서 떨어졌다고 했지?”
네…….
“왜 떨어졌지? 혹시 누가?”
아녜요! 혼자 떨어졌어요. 너무 놀라서 그만…………
영이 비명을 지르자 사방에 싸늘한 바람이 몰아쳤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무 것도 아니었다고요.
현암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소영의 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 그래. 믿는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리 놀랐지?”
그, 그건…..
“무엇이 너를 그렇게 놀라게 했지? 그리고 뒷산으로 올라가게 했고, 거기서 떨어질 정도로 놀라게 했던 거지?”
소영의 영이 금방이라도 꺼져 버릴 듯 희미해지면서 슬픈 표 정을 지었다. 아니, 뭔가를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잊고 싶은 자신의 기억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빨려드는 것 같았다. “말을 해 말을 하는 것이 옳은 거야. 솔직하게.”
안 돼요. 안 돼요……..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너는 피해자야. 가엾은 것은 너야. 목숨을 잃은 것도 너고, 혼자 남아서 고통받고 계신 것도 너의 어머님이야!”
뒤에서 유 선생이 돌진해 왔다.
“그만둬!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저 애는 이미 죽었어!”
그러나 현암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현암이 오른손으로 가볍게 건드리자 유 선생은 땅바닥에 뒹굴었다. 그것을 본 이 선생이 소리쳤다.
“뭐 하는 거요! 왜 사람을 치는 거요!”
유 선생도 떠들어 댔다.
“귀신을 잡는다면서 사람을 치다니!”
현암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나는 주로 악한 영들을 다루지만 때에 따라서는 사람이 더 악하더군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현암은 유 선생의 발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영은 그네에서 내려 뒷걸음질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경악과 슬픔, 부끄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영은 두 팔로 몸을 가리려 애쓰고 있었다. 벌거벗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현암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아, 역시…….”
이제 소영의 영은 그 자리에 웅크리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짐 승처럼 몸을 덜덜 떨면서. 현암은 그 동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소영의 영은 제정신이 아니었고, 아직 죽은 것을 완전히 인식하지 못한 채 생전에 겪었던 일들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놀려 대던 그네를 타고, 노래를 부르고, 몸을 씻고, 그리고 지금은……………. 현암은 자기의 상상을 믿기 싫었다. 그러나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소영아, 무서워하지 마라. 너는 왜 씻으려 하지?”
그, 그건・・・・・・
“왜 그랬지? 무엇이 묻어서?”
소영의 영이 고개를 저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그래, 알았다. 그런데 누구를 무서워하는 거지?”
소영의 영이 우는 듯했다. 그러나 영이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 으니 단순히 우는 동작만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자, 너는 아까 그네도 타고 수도꼭지도 혼자 틀었지? 이 칼 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어. 그런데 지금은 무서워하고 있어. 누구 지? 아끼는 없었던 사람, 여기 있는 유 선생님이 무서운 거지? 맞지?”
넘어져 있던 유선생이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이 선생이 유선생을 잡았다. 둘에게는 소영의 모습도 희미한 안 개처럼 보였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현암의 목소리 에서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맞니 소영아?”
초점을 잃은 소영의 큰 눈이 현암을 향했다. 현암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약간 비틀었다. 그도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몸이 떨려 왔다. 저 순진한 아이를 더 괴롭혀야 할까?
“맞니?”
소영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이면서 소영의 영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현암이 별안간 몸을 날렸다. 그러고는 놀라운 힘으로 유선생의 멱살을 잡고 위로 끌어 올렸다. 유선생은 발버둥을 쳤다. “무, 무슨 짓이야!”
현암의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얼굴은 분노에 가득 차서 마치 악귀처럼 변해 있었다.
“너, 너…… 이 애에게 무슨 짓을 했어, 말해!”
이 선생이 미처 말릴 틈도 없이 현암은 유 선생의 큰 덩치를 그대로 집어 던졌다. 유 선생의 몸은 십여 미터를 날아가 담벼락 에 육중한 소리를 내면서 처박혔다.
현암은 날듯이 달려가서 유 선생의 멱살을 다시 잡았다.
“너 무슨 짓을 했어. 이 짐승만도 못한………!”
유 선생의 몸이 공중을 날아 아까의 자리에 처박혔다. 멀리서 준후가 달려왔다. 현암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소영이라는 아이 는 욕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유 선생은 아직도 대답하지 않았다. 현암은 이를 갈면서 유선생을 들어 올렸다. 이 선생과 준후가 말리려 애썼다.
“전부 말하지 않으면 내 손에 죽는다. 지금 당장!”
“안돼요, 형! 그런 짓은!”
“말해!”
순간, 현암의 눈에 흰 섬광이 보였다. 아니, 이번에는 이 선생 과유 선생의 눈에도 보이는 것 같았다. 소영의 영이었다. 소영 이가 외치고 있었다.
그만해요! 우리 선생님을 때리지 말아요. 선생님인데…………
현암은 으아아 하고 괴성을 지르며 그네가 달려 있는 철 기둥 을 있는 힘을 다해 후려쳤다. 두꺼운 쇠파이프로 된 기둥이 구부 러지면서 그네가 와당탕 무너져 버렸다. 준후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땅에 떨어진 유 선생의 입에서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소, 소영아…… 내가………… 으흐흐…………… 내가 잘못했다. 내 가…………….”
이 선생의 표정이 변했다. 철썩 하면서 이 선생이 유 선생의 따귀를 갈기는 소리가 들렸다. 유 선생은 쓰러진 채 울부짖었다. “내가………… 으흐흐…………… 내가 잘못했어…………. 내가 미쳤어……. 으흐흑!”
이 선생이 현암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 선생의 목소리가 떨고 있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니……. 유선생의 일은 제가 책임지고 대가를 치르게 하겠습니다. 소영이의 시 신수습 문제도요.”
현암도 감정을 억눌렀다. 울거나 더 이상 소리치지 않으려고 악문 현암의 입술에서 피가 한 방울 떨어졌다. 현암은 고개를 간 신히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 선생은 밤하늘을 쳐 다보며 탄식했다.
“아아, 세상이 어찌 되려는 것인지. 어째서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인지…….”
이 선생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밝혀졌으니 소영이를 편히 쉬게 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영악한 꼬마는 먼발치에서도 사 정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준후의 눈에도 눈물이 언뜻 비쳤다. 수위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대로 누워 있었다.
오열하는 유 선생과,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는 이 선생, 그리고 현암이 보는 가운데 준후의 인도로 소영의 영은 희미해지기 시작 했다. 소영이가 다시 웃을 수 있을까? 현암은 씁쓸한 기분을 지 울 수 없었으나 얼빠진 것처럼만 보이던 이 선생의 북어 같은 모 습이 조금은 든든해 보였다. 잠시 후, 현암과 이 선생은 현암이 후 려쳐 넘어뜨린 그네의 쇠기둥을 다시 세웠다. 찌그러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그네는 아이들을 태우고 구를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