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2권 6화 – 생명의 나무 6 : 생명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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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국내편 2권 6화 – 생명의 나무 6 : 생명의 힘


생명의 힘

승희는 간신히 서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아득해 지는 느낌이 들다가 다시 몸속에서 폭발하는 듯한 기운이 몰아 쳐 왔다. 그녀는 우두커니 서 있을 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바로 앞에서 박 신부가 무릎을 꿇었다. 현암은 공중에 떠서 허우 적거리고 있었고, 준후는 땅에 누워 급하게 뛰는 것처럼 발을 움 직이고 있었다. 소미가 허공에 뜬 채 서서히 위아래로 오르내리 는 모습도 보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승희는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 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들은 분노한 브리트라와 대적하기 위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렇다. 브리트라! 간교한 지혜의 화신인 뱀, 브리트라!’

승희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과의 대화 같은 것이었 다. 생각을 하면 바로 마음속에서 떠오른다. 지금 일행은 그렇게 시험을 당하고 있었다. 악신 브리트라는 폭력을 쓰거나 직접 모 습을 드러내는 단순한 수단이 아닌, 사람의 마음속에 파고들었 다. 제아무리 막강한 주술사라도 그러한 힘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평소에 가장 두려워했던 일, 자신이 가장 믿는 것에 대한 시험을 받고 있었다. 신념을 꺾거나 그릇된 판단을 할 경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파국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어째서 나는?’

승희는 몸 안에서 폭발하듯 돌고 있는 기운을 생각해 냈다. 애 염명왕……………. 그렇다. 승희에게 답하고 있는 것은 승희 자신이 아니라 애염명왕이었다. 승희의 몸에 잠들어 있다는 애염명왕의 힘이 브리트라의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막은 것이다. 그러나 몸 안에 봉인되어 있는 처지에서는 아무리 신일지라도 외부에 직접 힘을 행사하지는 못한다. 승희의 몸은 밖에서는 브리트라의 힘 이 안에서는 애염명왕의 힘이 서로 밀고 있는 풍선과 같았다. ‘만약 누구 한 사람 시험에 진다면…….

결과는 뻔했다. 시험에 지는 자는 영원히 브리트라의 노예가 되고 만다.

‘그래서는 절대로 안 된다!’

승희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으나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승 희는 지금 마음속의 애염명왕과 교신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힘 을 쓸 수가 없었다. 승희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세 사람을 지켜볼 뿐이었다.

갑자기 박 신부의 몸이 희게 빛나면서 눈부신 광채를 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준후의 몸에서는 노란 광채가 현암에게서는 푸른 광채가 솟아오르면서 세 사람의 몸이 털썩 땅에 처박혔다. 승희의 마음속에서 기쁨이 솟구쳐 올라왔다. 애염명왕의 목소리였다.

그들은 브리트라의 속죄의 시험, 지혜의 시험, 의지의 시험을 각각 통과했다. 마음의 시험을 이겨 냈다.

승희의 몸도 마비에서 풀렸다. 승희는 달려가서 셋을 부둥켜안 았다. 박 신부와 현암은 아직까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준후가 제일 먼저 눈을 떴다. 이윽고 현암과 박 신부도 정신이 들었다. 셋은 모두 어안이 벙벙해 있었다. 승희가 기쁨에 겨워 외쳤다. 

“축하해요, 축하해! 세 분 모두! 정말정말 기뻐요!”

박 신부와 현암, 준후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승희를 쳐다보았다. 승희는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박 신부가 말했다.

“아니, 브리트라는 어디 있지? 어떻게 된 거야?”

현암도 중얼거렸다.

“내가 정신을 잃었던가?”

승희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들은 시험에 대해서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갑자기 준후가 소리쳤다.

“저, 저것!”

일행은 놀라서 옆을 쳐다보았다. 소미의 몸이 허공에 뜬 채 서 서히 모습이 변했다. 몸이 안쪽에서 울퉁불퉁 치솟고, 얼굴이며 손등에 비늘이 돋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괴이한 음성이 울렸다. 그 음성은 귀에 들리는 게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에서 울렸다.

나, 브리트라의 시험을 통과한 자들이여, 기뻐하지 말라. 능력이 합당하여 나의 시험에 의해 나 브리트라를 받아들이게 된 자가 있으니 그를 경배하라. 나는 그의 몸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리라.

현암이 고함을 쳤다.

“천만에, 그렇게는 안 된다!”

박 신부도 분노에 찬 소리를 질렀다.

“악마여, 여인의 몸에서 썩 떠나라!”

준후는 말 대신 양손에 각각 번개와 불을 담고, 브리트라의 화신 이 되어 가는 소미를 향해 쏘려 하다가 멈칫했다. 승희가 외쳤다.

“준후야, 왜 쏘지 않아? 왜?”

준후가 멍하니 대답했다.

“저 아줌마도 착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바보! 저 여자는 이제 사람이 아냐! 브리트라의 화신일 뿐이라고!”

현암이 승희에게 말했다.

“승희야, 그러는 너는 라가라쟈의 화신일 뿐 승희가 아니란 말이야?”

승희는 멈칫했다. 그렇다. 아직 그녀는 하나의 생명이자 인생 을 지닌 인간이다. 승희가 눈을 감고 자리에 앉으면서 날카롭게 외쳤다.

“어떻게든 해 봐요! 힘을 다해서 여러분을 믿을 테니!”

박 신부가 기다란 고함을 발하면서 십자가를 쳐들었다. 십자 가에서 솟아 나오는 성령의 불길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허공에 커다란 십자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현암은 이를 악물고 두 주먹 을 앞으로 뻗었다. 현암의 몸에서 붕대를 뚫고 피가 분수처럼 솟 아나왔다. 섬광 같은 기류가 박 신부의 등에 모이면서 십자가가 더욱 커져갔다.

“신들이여! 힘을 베푸소서!”

준후가 찢어지는 고함을 지르며 왼손 식지를 깨물고 오른손으 로 한 무더기의 부적을 뿌렸다. 부적들은 허공에 둥글게 구형을 그리며 무서운 속도로 돌기 시작했고, 거기에 준후가 식지 끝에 서 나온 피를 뿜어내자 구형이 핏빛으로 변하며 현암의 등에 부 딪쳤다. 현암의 손끝에서 뻗어져 나오던 기류가 주변을 가득 채 우고, 박 신부의 십자가가 천장에 닿을 듯 불어나기 시작했다. 승 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몸 안에서 폭풍우와 같은 기운이 빠져나가 셋의 기운을 밀어붙였다. 소미가 눈을 뜨자 불길이 이 글거리는 뱀 눈동자가 보였다. 눈앞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십자가 를 본 소미의 눈은 크게 벌어졌다.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십자가의 불길이 뱀으로 변한 소미에게 날아갔다.

“저 생명을 구원하시어 다만 악과 멀어지게 해 주소서.”

뱀의 검은 기류가 박 신부가 쏜 성령의 십자가를 통과하여 넷 을 향해 덮쳐들었다. 박 신부의 십자가도 그대로 소미에게 날아

갔다. 소미의 입에서 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희는 이 여자를 해치려 한 것이 아니라…………….”

박 신부는 소미를 해치려 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소미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사악한 기운을 없애려는 것일 뿐이었다. 현암이 몸을 날려 박 신부와 준후를 양손으로 밀어내고는 승희를 발로 걷어찼다. 소미의 입에서 나온 검은 기류가 아슬아슬하게 현암 과 승희를 비껴 벽을 뚫고 사라졌다. 소미, 아니 브리트라의 어 깨에 박 신부의 십자가가 정통으로 작렬했다. 순간 소미의 몸이 자지러지듯 뒤로 꺾이면서 처절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아아악!”

박신부가 벽에 머리를 부딪히면서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면 서도 박 신부는 계속 기도를 하고 있었다. 의식을 잃을 때까지.

“세상에 악이 창궐하지 말게 하옵시고 가련한 생명들….”

박 신부의 십자가에서 나온 푸른 불길이 점차 소미의 몸 안으 로 파고들었다. 소미는 이를 악물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뱀 눈동 자를 한 채 몸을 뒤틀었다. 현암은 피를 한 움큼 토하며 주술을 쓰던 자세 그대로 땅에 쓰러졌다. 승희도 모든 힘을 소모한 듯 기력을 잃어 갔다. 준후 혼자만 아득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쓰며 눈을 뜨고 있었다. 갑자기 소미가 눈을 번쩍 뜨며 기합성 을 발하자 온몸에서 섬광이 솟구쳤다. 그녀의 입에서도 선혈이 흘러내렸다. 브리트라가 인간의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고약한…… 하찮은 인간의 몸으로 생명의 비밀을 아는 신, 나 브리트라의 힘에 대적하려 하다니………….”

소미의 몸이 스르르 다가왔다. 이제 하반신까지 거의 뱀으로 변해 있었다. 준후는 더 이상 저항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 다. 모든 것이 인간의 죄에서 비롯되었으니 그 대가는 인간이 치러야 했다.

“으윽!”

별안간 브리트라가 몸을 뒤틀었다. 왜 저럴까? 준후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으으윽! 아니 이, 이것이……………”

소미의 몸이 다시 한번 뒤틀리면서 중심을 잃고 땅에 풀썩 쓰 러졌다. 준후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누가 돕는 것일까? 준후는 마지막 힘을 모아 투시를 행했다. 브리트라의 화신이 되어 버린 소미를 향해.

“으으윽! 아, 안 돼!”

브리트라의 비명과 함께 소미의 몸에서 사악한 기운이 밀려 나가고 있었다. 아무리 싸움으로 힘을 소모한 브리트라일지라도 감히 누가 대적할 수 있다는 말인가. 순간, 준후의 입에서 아! 하 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겨우 손가락만한 크기지만 소미의 몸속 에 생명이 숨 쉬고 있었다. 아기였다. 아무 힘도 없는, 이목구비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아기. 그러한 아기가 저항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브리트라가 안심하고 들어간 바로 그 몸속 에서 자신이 살아갈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자신이 살 권리를 지키기 위해 대항하고 있었다.

준후의 눈에는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브리트라가 생명의 비밀을 안다고? 그 비밀을 남에게 가르쳐 줄 수 있다고? 눈에 맺 히는 눈물과 어울리지 않게, 준후의 입에서는 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웃음소리는 아이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천진함으로 사방을 메웠다. 지금 이 순간, 대악신 브리트라는 작디작은, 어 린 생명의 힘에 밀려 소미의 몸을 떠나고 있었다. 차갑고 어두운 세계로…………….

준후의 웃음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소미의 모습이 원래의 형 체를 서서히 되찾아 갔다. 또 하나의 새 생명을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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