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1권 11화 – 우사(雨師)의 길 2 : 함정
함정
여행은 예상외로 순조로운 편이었다. 일본어로 말할 수도, 읽 을 수도 없는 준후였지만 워낙 한자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기에 의사소통은 그럭저럭 해내었다. 눈에 띄는 한복도 진작 배에서 내리기 전에 갈아입어 지금 준후는 평범한 옷차림이었다. 한복 말고는 모든 옷을 불편하게 느끼는 준후지만 이번만은 참고 견 뎌야만 했다. 다만 옷차림은 평범해도 워낙 얼굴이 희고 용모가 출중하여 사람들의 시선이 자주 쏠리기는 했다. 허나 준후는 그 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다만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을 피해 조용한 곳을 찾아다녔다.
준후는 밤이 되면 오락실이나 대합실 같은 곳을 찾아 그곳에 서 잤고, 배가 고프면 편의점에서 빵이나 주먹밥 같은 것을 사다 가 요기를 했다. 일본 음식이 싱겁다고 하지만 준후의 입맛에는 예상외로 짜고 향내가 진했다. 아직도 준후는 육식을 하지 않았고, 고기보다도 비린 생선에 질겁을 하는 편이라 대부분의 일본 음식은 가까이하기도 싫었다.
정작 말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면 몇 마디 주워들은 영어로 어찌어찌 의사소통이 되었다. 일본인도 한국 사람들 못지않게 영어에 대한 공포감을 가지고 있어 이 역시 쉽지 않았지만 말이 다. 그러고도 소통이 안 되면 지니고 다니는 수첩을 꺼내 한자로 뜻을 물었고, 이로써 대부분 최악의 상황은 타개할 수 있었다. 대략 분위기를 보아 젊은 사람에게는 영어를 하는 편이 나았고, 나이 든 사람에게는 한문이 나았다.
그럭저럭 여행에 재미를 붙이면서 며칠 길을 물어 헤맨 끝에 야 준후는 구마노 시에 도착했다. 사실 오래 걸린 셈이지만, 아 무런 사전 지식 없이 온 것치고는 잘 찾아온 셈이라고 내심 뿌듯 해했다. 구마노 시에 도착하면서 준후는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구마노 시는 그다지 큰 도시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곳에 서 최근 새로 발견된 유물의 전람회가 열린다는 낡은 포스터를 발견한 것이다. 그 유물은 바로 서복의 무덤 부근에서 발견된 것 이었고, 전람회는 일 년 이상 계속 열리고 있었다.
“예상보다 일이 쉽게 풀리는 것 같은데? 어째 불안하네……?”
준후는 일단 전람회장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 안을 한번 돌아 보았다. 전람회장은 작고 볼품없으며 날림으로 지어진 것 같았 다. 전시된 유물 중에 물론 우사경』은 없었고 너절한 토기 나부랭이와 몇 개의 관, 단도나 그릇 같은 유물 몇 점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유물 중 하나를 보고 준후는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찢어진 책장의 한 조각이었는데, 몹시 삭고 낡긴 했어도 서툰 신 시 문자가 씌어 있었던 것이다. 책장은 가로로 찢어져 그 내용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신시 문자는 주로 세로쓰기를 한다), 분 명 거기 적혀 있는 것은 신시 문자였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신시 문자가 아니라, 그 문자를 모르는 사람이 흉내 내어 그린 것이었 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이 아랍 글자를 흉내 내어 그린 정도라고 나 할까?
그 앞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었다. 물론 일본어를 모르는 준후로서는 한문만 읽어서 대강 그 내용을 두드려 맞출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대략적으로 보아, 그것은 기원전 2세기경의 물건으로 추정되 었으며 사용 문자는 미상, 내용도 해독 불능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의 완본은 지나친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별관 금고 에 보관되어 있다는 내용도…………. 그 설명을 읽고 준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는 별관이 어디인지 알아볼 생각을 하면서 무 의식적으로 품 안에 넣은 『해동감결의 원본을 만져 보았다. 순 간 준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준후는 후다닥 문으 로 달려 나갔다. 급히 밖으로 빠져나온 준후는 서둘러 인적이 없 는 공원 구석에 몸을 숨겼다.
‘함정이야! 틀림없어!’
준후의 눈은 날카롭게 빛났지만 가슴은 쿵당거리며 뛰었다. 맨 처음에는 준후도 그 종잇조각이 고대의 물건이라 여겼다. 그 러나 품 안에 있는 「해동감 원전의 바스락거리는 책장을 만지 는 순간, 그것이 조작된 물건이란 것을 깨달았다.
『해동감결』 원전은 천 년 정도 된 고서였고, 그나마도 수없이 새로 쓰이고 복원되기를 반복했으며, 모든 것과 차단되어 밀교 의 금고에 보관되어 온 것이었는데도 책장이 바스락거리며 부서 질 듯했다. 그런데 저 책은 기원전 2세기에 쓰인 것이라 하지 않 는가? 그렇다면 벌써 이천 년이 훨씬 더 지난 책이다. 그런 책이 어떻게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천 년 전이라 면 모든 책들이 죽간이나 목간, 혹은 비단 두루마리로 만들어지 던 때인데, 결국 무슨 의도에서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조작된 것이 틀림없었다. 무엇보다 정말 기원전 2세기의 종이로 된 책이 라면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서가 되는 셈인데, 이런 변 두리 전람회장에 처박힐 리가 없었다.
‘도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준후는 무서워졌다. 책은 위조된 것이 분명하지만, 틀림없는 신시 문자로 씌어 있었다. 세상에 신시 문자를 아는 것은 자신밖 에 없는 줄 알았는데……………. 연희가 그에 대해 약간의 지식을 가 지고 있었지만 준후만큼 능란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기에 가짜 책을 놓은 자는 무엇을 노리고? 설마 나를?
‘아냐, 아냐…….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이 아닐까? 누군가가 신시 문자로 된 저작을 발견하고, 그 글자를 아는 사람을 찾기 위해 그런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어떤 악령이나 악인이 덤벼들어도 무섭지 않은 준후였지만 보 이지 않고, 정체도 알 수 없는 적은 두려웠다. 준후는 애써 두근 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생각할수록 이상하기만 했다. ‘아냐. 역시 아냐. 신시 문자를 해독하기 위해서 저런 것이라 면, 이런 변두리에 진열할 이유가 없어. 좀 더 사람이 많이 드나 드는 곳이라야……………. 으음. 이건 도대체 ……………..
준후는 심호흡을 몇 번 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 무도 준후를 미행한 것 같지 않았고, 누군가가 숨어 있는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준후는 애써 머릿속을 가다듬으려 했다. 현암 형처럼 냉정하게 정황을 분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 만 지금은 철저하게 혼자다.
‘차분히 생각해 보자. 차분히 …………’
이 전람회는 일 년 전에 시작되었다. 일 년 전이라면 준후와 퇴마사들이 홍수를 막아 낸 직후였다. 그 이후부터 이 전람회는 내내 열렸고, 그 종잇조각 또한 내내 전시되고 있었을 것이다. 왜 하필 서복과 관련된 여기에서 정말 서복이 이곳에 왔는지 오 지 않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다고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만은 사실 아닌가? 더욱이 서복과 신시 문자의 연관은 아무리 봐도 우사 이외에는 없을 것 같았다.
‘어쩔 방법이 없구나…………….’
준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것은 함정이 분명했다. 모든 준후 의 감각과 이성은 틀림없는 함정이라고 외쳐 댔다. 그러나 또한 모든 정황은 『우사경』을 찾을 수 있는 열쇠가 여기 가까운 곳에 있음을 외치고 있었다. 일단 우사경』에 대해 어떤 단서를 얻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비록 함정일지라도 발을 들 여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누굴까? 누가 무슨 의도로…………..?’
준후는 신시 문자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 까 정리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현암 형, 신부님, 승희 누나, 연희 누나, 백호 아저씨, 최 교수 님, 아라……………. 여기까지는 물론 아니겠고…………. 으음??’
문득 한 명이 떠오르자 준후는 눈을 크게 떴다. 순간적으로 머 릿속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 같았다. 틀림없었다. 그렇게 따지면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었다.
밤이 깊어 어둠이 사방에 드리워지자 그렇지 않아도 초라해 보이던 전람회장은 더욱더 스산해 보였다. 그런데 전람회장의 뒤편에는 전람회장보다 훨씬 웅장해 보이는 건물 한 채가 있었다. 금고가 있다는 별관이 틀림없었다. 그 건물은 창문도 없었고 벽도 무척이나 육중하고 두툼해 보였다. 문은 건물의 모양새와 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두꺼운 철문이었다. 그곳이 건물의 유 일한 출입구였다. 준후는 그 건물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함정. 잡다한 유물의 단편을 보관하는 작은 전람회장의 별관을 저토록 거대하게 지을 이유가 없었다. 별관이라기보다는 거의 감옥과 같은 분위기, 너무나 뻔히 보이는 덫이었다. 그런 뻔한 덫에 제 발로 뛰어들어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우스워 준후 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어차피 각오한 길이었다.
준후는 당당하게 뚜벅뚜벅 걸어서 별관의 철문 앞에 섰다. 잠 시 살펴보니 예상대로 철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문고리를 위로 들어 올리기만 하면 열릴 것 같았다. 준후는 눈살을 찌푸렸다. 수상한 느낌이 더 강해지면서 좀 더 신중해져야겠다 싶었다. 신 중한 박 신부님이 떠올랐다. 그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순간 철 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면서 위로 휙 열렸다. 그리고 철문 안쪽에 서 휙휙 하고 머리칼만큼이나 가느다랗고 뾰족한 것이 쏟아져 나왔다. 역시나 이 별관은 함정이었고 매복이 있었던 것이다. 하 지만 이미 그 자리에 준후는 없었다. 대신 반투명한 몸체를 지닌 형상이 크어 하고 포효하더니 철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준후가 불러낸 리매였다. 문 안쪽에서 삽시간에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 면서 퍽퍽 하고 누군가를 두들겨 패고 집어 던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준후는 별관 벽에 기대어 서서 느긋하게 그 소리를 들으며 중얼거렸다.
‘첫 관문 돌파!’
안쪽이 잠잠해지자 준후는 아까 날아와 벽에 박힌 가느다란 은침을 하나 뽑아서 살펴보았다. 뭔가 요상한 냄새가 났지만 독 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그 냄새를 맡으니 아주 조금이 기는 했지만 정신이 흐려지고 눈이 감기는 것 같았다. ‘마취약? 그럼 날 산 채로 잡을 생각이었나?’
그때 별관 안쪽에서 으헝 하고 리매가 부르짖는 고통스러운 소리가 울려왔다. 준후는 의아해하면서 주문을 외워 리매를 사 라지게 하고, 직접 철문 쪽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안을 보자 놀랍게도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거기에는 진언밀교의 승려인 도운이 있었던 것이다. 도운은 선장(禪)을 들고 있었는데 리매 를 몰아붙인 것은 도운인 듯싶었다.
준후로서는 너무 뜻밖이었다. 분명 사악한 무리들이 있으리라 여겼는데 도운은 비록 퇴마사들과 맞서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함께 일을 해결했던 사람 아닌가?
준후가 놀란 표정을 짓자 도운도 선장을 세우고는 준후에게 합장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손짓을 하자 다른 승려가 걸 어 나왔다. 마른 체구에 키가 자그마한 승려였는데, 준후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 사람이 앞으로 걸어 나와 준후에게 합장을 해 보이면서 한국어로 말했다.
“아미타불……………. 저는 하꾸운이라 합니다. 준후 군. 맞습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준후는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놀라지 않았어요. 도운 스님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했으니까요.”
“그래요?”
“신시 문자가 무엇인지, 누가 해독할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은 두 사람뿐이죠. 도운 스님과 귀자모신 할머니.”
그러자 도운이 뭐라고 하꾸운에게 말했고 하꾸운은 도운의 말을 통역했다. 하꾸운은 한국 사람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한 국어에 능통하여 발음이나 억양조차 전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 았다.
“그런 것은 아니랍니다. 도운 스님은 준후 군이 돌아가신 걸로 알았답니다. 결코 준후 군을 노린 것은 아닙니다. 좌우간 놀라지 않았느냐고 도운 스님이 물으시는군요. 남의 이목이 무서우니 얼른 안으로 들어오시랍니다.”
준후는 그 자리에 서서 도운을 잠자코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들어가고 싶지 않군요.”
“어째섭니까? 도운 스님과는 구면이 아니십니까?”
“다짜고짜 이런 마취제 묻힌 침을 내쏘는 판인데…………. 아무리 구면이라도 날 잡아 줍쇼 하고 들어갈 수는 없잖아요?”
하꾸운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준후 군인지 모르고 한 것입니다. 용서하십시오.”
하꾸운이 도운에게 일본어로 뭐라고 하자 도운도 미소를 띠며 하꾸운에게 말을 했다.
“정말 도운 스님이나 모든 분들은 준후 군이 돌아가신 줄 알았 습니다. 준후 군이 고작 일 년 사이에 그렇게 훌쩍 커 버려서 못 알아봤답니다. 다만 수상한 사람이라고 여긴 것뿐이랍니다.”
그래도 준후는 의심을 풀지 않았다.
“수상한 사람이면 저런 것을 다짜고짜 던져도 되나요?” “저건 사람을 해치거나 고통을 주려고 내쏜 것이 아닙니다. 다 만 이곳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랍니다. 준후 군 은 저 침 끝에 마취제가 묻어 있다는 것을 아시면서, 어떻게 그 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무슨 엄청난 비밀이 있기에 그러는 거죠?”
하꾸운은 뭔가 생각해 보는 듯하다가 도운을 바라보았다. 도 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비로소 하꾸운도 고개를 끄덕이며 준후에 게 말했다.
“일단 들어와서 말씀하시지요. 준후 군이 이곳에 올 줄은 도운 스님도, 노호법 님도 모르셨답니다. 다만 조선의 고문자를 알아볼 사람을 찾기 위해 이런 일을 꾸민 것일 뿐, 다른 뜻은 없답니 다.”
“역시나……… 그런데 무엇이기에?”
준후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하꾸운이 냉큼 대답했다.
“일 년이나 그 글자를 아는 사람을 찾아서 이곳을 만들고 사람 들을 모은 것이랍니다. 좌우간 여기서는 말하기 어려우니 들어 가서 말씀하시지요.”
하꾸운의 말에 이어 도운도 뭐라고 하면서 손가락으로 안쪽을 가리켜 보이며 히죽 미소를 지었다. 그에 하꾸운이 말했다.
“저 안쪽에 또 준후 군을 보시면 반가워할 분이 계시답니다. 노호법 님이시죠.”
“노호법 님이라면?”
“아…………. 과거 명왕교에 계셨던, 귀자모신님 말입니다.”
준후도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했던 일이기는 했다. 귀자모신 도 이 일에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도운과 귀자모 신이 둘 다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귀자모신이라면 과거 명왕교의 호법이었던 할머니 아닌가. 비 록 맞서 싸우기도 했지만 그 할머니 정도라면 원리원칙이 분명 한 사람이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준후는 도운과 하꾸 운과 함께 들어가기로 했다. 다만 경계심을 완전히 푼 것은 아니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