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1권 12화 – 우사(雨師)의 길 3 : 수수께끼의 글자
수수께끼의 글자
건물 안에 들어서면서 준후는 깜짝 놀랐다. 그 안에는 생각보 다도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우선 자신을 안내한 도 운과 하꾸운, 그리고 귀자모신이 쪼글쪼글한 얼굴에 미소를 머 금은 채 중앙에 서 있었다. 그 주변에는 세 명이나 되는 다른 사 람들이 있었는데 한 명은 인도인 같아 보이는 외국 사람이었고 나머지 두 명은 동양 사람이었다. 그중의 한 명은 (준후는 미처 몰랐지만) 홍수 사건 때 현암 및 박 신부와 마주친 적이 있었던 모산파의 도사 모(毛) 선생이었다. 그들의 중앙에 커다란 유리구 가 있었고, 그 안에는 도자기의 깨어진 파편이 들어 있었다. 사 람들은 모두 그 유리구를 중앙에 두고 둥글게 둘러서 있었다.
“뭐죠?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은데요?”
준후는 아무래도 긴장이 되었다. 가만 보니, 이들 역시 뭔가 힘을 지닌 인물 같았다. 귀자모신의 능력은 원래 상당한 편이었 고, 도운도 퇴마사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무시 못할 능력자 였다. 두 명의 동양인 역시 도인 같은 기운을 풍기고 있었으며, 인도 사람 같은 서양인도 어딘가 묘한 느낌이 왔다. 그러한 느낌 이 와 닿을 정도라면 하나같이 쟁쟁한 실력자들이라 할 수 있었 다. 한데 이 사람들이 왜 여기에 모두 모여 있는 것일까?
준후가 경계심을 풀지 않는 것 같자 귀자모신이 입을 열었다.
그 말을 하꾸운이 즉시즉시 번역했기 때문에 준후는 마치 귀자모신과 직접 이야기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아이야. 살아 있었구나. 짧은 세월이었는데도 근사하게 자랐 구나 반갑다. 반가워.”
준후는 일 년 사이에 키도 꽤 자라, 나이에 비해 그리 작은 편 이라고까지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도운과 달리 귀자모신 은 그렇게 변한 준후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런 것으로 볼 때 도운이 아무래도 자신을 속인 것 같아서 준후는 찜찜했다. 사실 귀자모신보다는 도운이 자신과 훨씬 자주 만나지 않았던가? 그 런데 못 알아보고 은침을 쏘았다고?
“예. 할머니도 건강하시군요.”
“여기는 너 혼자 왔느냐? 그때 그 청년은 같이 안 오고?”
그 말에 준후는 냉랭히 대답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일행들 모두 다.”
준후는 ‘모두다’라는 말에 일부러 힘을 주고 또박또박 발음했다. 아직 안심할 수 없는 터라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러자 귀자 모신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러면 명왕께서도 오셨느냐?”
“명왕이라뇨?”
“애염명왕의 현신이신 그분 말이다.”
“승희 누나요? 아…………. 음, 아뇨, 누나만 빼고요.’
승희는 이제 더 이상 애염명왕의 현신이라고 부를 수 없었지만 일부러 그렇게 둘러댔다. 승희까지 왔다고 한다면 이 할머니는 필경 그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지도 몰랐다. 준후는 이런 묘한 함정에 자신을 끌어들인 것이 결코 좋은 일 같지 않다는 예감 때문에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런 마음가짐 은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된 주기 선생이 준후에게 남긴 교훈이기 도 했다.
준후는 잠시 돌이켜 옛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주기 선생이 했 던 마지막 말도……
-정의가 정말로 이긴다는 거지? 정말로?
-가! 그리고 십이지신술(十二支神)을 잊지 마라! 절대!
“흠, 그렇구나. 명왕 현신을 다시 뵈올 수 있었다면……………, 모든 의문은 쉽게 풀릴 수도 있었는데…..”
귀자모신이 중얼거리면서 준후에게 다른 사람들을 소개했다. “아이야, 이쪽은 중국서 오신 분들이다. 한 분은 화산파의 황 도인, 한 분은 모산파의 모 선생이시다.”
‘화산파 모산파?’
처음 밀교에 있었을 때 준후가 모신 여러 명의 스승 중 한 사 람은 화산파의 벽공 도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모산파의 술수를 익힌 허허자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 그 화산파와 모산파의 도인들을 직접 만나게 되다니. 잠시 후 귀자모신은 인도인 같은 사람도 소개했다.
“이쪽은 비마. 힌두교의 술사시란다.”
비마는 다시 준후에게 마가 호법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마가 호법 또한 자신의 스승 중 하나였다. 자신의 친아버지였던 장호 법과 밀교의 술수를 익혔으니 귀자모신이나 도운과 술법이 비슷 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무속의 기술을 준 을련 호법만 빼고 자신 이 배운 네 가지 계열의 술법을 아는 사람들이 모두 모인 것 아 니겠는가? 말을 바꾸어 보면, 준후를 제압하기 가장 좋은 사람들 만 모여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더구나 아무리 서로를 적대시하는 관계는 아니라지만 도운도 아주 무시할 상대는 아니었고, 귀자모신은 일대일로도 버거운 상대였다. 아무래도 준후는 불안해졌다.
“그런데 나에게 뭘 원하는 거죠?”
“음, 그건 지난번과 비슷한 이유 때문이야. 너는 그때 나에게 서 『해동감을 얻어 가지 않았더냐? 이번에도 또 그 비슷한, 조선 고문자를 해독할 필요가 있기에 그런 것이지.”
“그러면 일 년 동안 이 건물에서 내내 나를 기다리셨나요? 이 사람들 모두가?”
“그럴 수야 있겠니?”
그 말에 준후는 조금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러면 오늘 내가 온 것은 어떻게 알았지요?”
“박물관에는 시시 카메라가 있단다. 거기서 너를 보고 깜짝 놀랐지. 그래서 급히 모이게 된 것이란다.”
준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도운 쪽을 보고 말했다.
“그래서 난 줄 알고 은침을 쏜 거군요. 참 고맙네요.”
하꾸운은 모든 말을 그대로 통역하는 데에만 최선을 기울이는 것 같았다. 그 말을 듣자도운은 당황한 듯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니야! 나는 카메라의 영상을 직접 제대로 본 적은 없어. 다만 네가 여전히 아주 작은 아이일 거라고만 여기다가 그 런 실수를 저지른 거야. 오해하지 말아주기 바란다.”
준후는 무어라 대꾸도 하지 않고 다시 귀자모신에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고문자를 해독해야 하기에 그러는 거죠?”
준후의 질문에 귀자모신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아주아주 중요한 일이란다. 이것은…….”
그러면서 귀자모신은 간략하게 그간의 일들을 준후에게 말해주었다.
구마노 시에 자리한 서복의 무덤은 그간 일본 내에서도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아도, 그와 비슷한 시대에 중국에서부터 도래한 이방인의 무덤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러한 옛 무덤들 중 하나를 뒤지 다가 사람들은 기이한 도자기의 파편 하나를 발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아무도 해독하는 이가 없어서 사람들은 고문 자에 능한 학자를 초빙했다. 그 학자는 진언밀교와 깊은 연관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도자기의 내용을 보고는 대경실색했다.
그 전면에는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기이한 글자가 가득 새 겨져 있었으나, 그 밑에는 한문으로 쓰인 주석이 있었다. 그 한 문조차도 너무 오래된 전자체의 글자였기 때문에 그 학자 말고 는 그때까지 아무도 해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학자는 즉시 그 내용을 밀교에 알렸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겐 자신이 해독한 내용을 철저히 함구한 채. 진언밀교에서는 즉시 학자들에게 손을 써서 그 도자기 파편을 아무런 가치 없는 모조 품이라 단정 짓게 하고 자신들의 수중에 넣었다. 그리고 그와 함 께 그 내용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도자기에 기록된 것은 그것이 아주 중요한 경전의 일부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었으며, 그 내용을 풀이할 수 있어야만 큰 재앙 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내포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 주석의 내용이 뭐죠?”
준후가 묻자 귀자모신이 황도인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그러 자 황도인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준후에게 넘겨주었다.
황도인은 풍채가 당당하고 조금 누른빛이 감도는 수염을 기른 남자였는데 몹시 태도가 의젓하여, 준후는 조금 호감이 가는 것 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종이를 넘겨주면서 황 도인은 암암리에 묘한 기운 같은 것 을 종이에 담아 보낸 듯했다. 공력을 약간 담아 기선을 제압하려 는 것 같아서 준후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그 기운을 같은 수법 의 두 배 정도 힘으로 쳐 내고는 종이를 받았다.
준후는 현암에게서 태극기공을 전수받아 수련을 조금씩 해 왔 기 때문에 그 정도의 공력은 끌어 올릴 수 있었으며, 화산파의 벽공도인에게서 주술 이외의 다른 술수도 약간은 배웠던 것이다. “고맙습니다.”
그러자 황 도인은 갑자기 얼굴빛이 조금 변하면서 뭔가 말할 듯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준후는 돌아보지도 않고 그 종이를 펴서 읽어 보았다. 그것은 전자체의 고문자를 현재 통용되는 한자로 옮긴 것이었다.
천하의 안온을 구하는 자는 자신의 위험을 마다하지 않으며 천하의 근심을 없애는 자는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 우사의 길이 바로 그러하여 수천 년을 남았으니 세상의 그 무엇이 그러한 마음에 비할 바가 있겠는가?
나의 이름은 여기에 남길 것이 되지 못하나 이러한 신비는
풀길이 없음이로다. 세상에 어떤 재인이 나와서 그것을
적을 수 있으며, 세상이 얼마나 바뀌어야 그때가 올 것인가?
세상이 흥하고 망함이 앞에 적은 글에 달려 있으며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 또한 앞에 적은 글에 달려 있으니 인연이 닿고 재주가 있는 자, 이것을 풀이하리라.
이것이 없어지는 것을 저어하여 도자기 가마의 불을 지폈으니 때가 되면 썩지 않고 나와 전해질 사람에게 전해질 것이다. 걱정하고 근심하라. 걱정하고 근심하라.
그때가 오면 모든 것이 끝날진저. 이것만이 다시 한번
세상을 구원할 기회가 될진저.
준후는 다른 내용보다도 ‘우사’라는 두 글자를 보는 순간 심장 이 멎는 것 같았다. 역시 이것은 『우사경과 연관이 있는 무엇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모산파의 모 선생이 다시 준후에 게 한 장의 종이를 건네주었다. 그것을 보고 준후는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풍백 비렴이 「해동감결」 원전에 남긴 것과 거의 똑같은 말이 씌어 있었던 것이다.
옛 글자를 읽을 줄 아는 자가 거의 남지 않게 되고
사람의 색이 갈라지고 사람이 모두 같아지고
한 사람이 자기 집에 선 채 백만 명을 죽일 수 있게 되며
자연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들이 걸어 다니고 날아다니게 되며
물이 검게 물들고 별이 떨어지며 세상이 좁아질 때.
그때가 오기 전에는 이 내용은 풀이되어서는 아니 된다.
준후의 안색이 크게 변하는 것을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 귀자모신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것은 분명 말세에 대한 말이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그 시기가 틀림없다.”
귀자모신이 준후에게 다가오며 계속 말했다.
“이 옛 글자를 읽을 줄 아는 자는 물론 거의 남지 않았으며, 사 람의 색이 갈라진다는 것은 여러 인종의 사람들이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모두 같아진다는 것은 만민이 평등하다는 것 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한 사람이 자기 집에 선 채 백만 명이 아니라 천만 명도 죽일 수 있으며, 자 연에서 태어나지 않은 자동차나 비행기가 굴러다니고 날아다니 고 있다. 물은 검게 오염되고 인공위성이 별처럼 떨어지고 세상 은 좁다고 아우성이다……………..”
귀자모신은 준후의 바로 앞에서 천천히 말했다.
“때가 온 것이다! 이 내용을 해석할 때! 그래서 우리는 그 글 자를 알아볼 사람을 찾았다. 나는 예전에 네가 가져간 해동감 』을 읽을 순 없었지만, 그 글자 모양은 눈여겨보았지. 그래서 그것과 우리가 가진 것이 같은 글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내용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은 것이고, 결국 여 기에 네가 온 것이다.”
귀자모신의 전신은 확신에 가득 찬 모습으로 무시무시한 위압 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준후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말했다.
“결국 말세가 다가오고 있다는 건가요?”
“그렇다! 모든 것이 그것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은 모 선생의 말이었다. 하꾸운은 각개 국어에 어느 정도 능통한지 귀자모신 외에 다른 사람의 말들도 바로바로 통역하고 있었다.
“도가의 비급에도 비슷한 예언들이 얼마든지 있다. 인간 세상 은 이제 썩을 만큼 썩어 들어갔다. 그리고 하늘의 섭리마저도 저 버린 상태다. 말세가 벌써 오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다.”
곧바로 황도인도 말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으며, 보이지 않는 것 은 우습게 여기고 있다. 그리고 자존망대(自尊望大)하고 있어. 우주의 어떤 것이든 난 것은 반드시 쇠하여 멸망하게 마련. 인간 의 멸망도 이미 정해진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그것을 늦추고 막아야 한다.”
인도에서 온 비마도 한마디 하는 것 같았다.
“힌두교의 오랜 가르침에도 지금은 칼리 유가(Kali Yuga)*라고 되어 있답니다. 세상은 곧 종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사랑과 성애(性愛)가 분리되고, 진실은 감추어지며, 정의가 아닌 재물 이 지위를 가져다주고, 외적인 가식이 내적인 종교와 혼돈되는 시기. 지금 세상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칼리 유가로 보아도 마지막 시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준후는 주위를 둘러본 다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이 도자기 조각에 그토록 집착하는 건가요? 밀교 의 경전, 도교의 비급, 힌두교의 고전, 그 모든 것들보다 여기 새 겨진 말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건가요?”
준후의 말은 상당히 무례하다면 무례하다고 할 수 있는 말이 라. 모든 사람들이 약간 노기를 띠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 수양이 깊은 사람들이라 대놓고 굳이 뭐라고 탓하지는 않았다.
* ‘유가’는 힌두교의 우주론에 따른 세계기(世界)의 구분을 의미한다. 세계기 는 4대 시기로 구분되는데 1기는 크리타 유가(Krita Yuga), 2기는 트레타 유가 (Treta Yuga), 3기는 드와파라 유가(Dwapara Yuga), 4기는 칼리 유가(Kali Yuga)이다. 크리타 유가는 4000신년, 트레타 유가는 3000신년, 드와파라 유가 는 2000년, 칼리 유가는 1000신년 동안 계속된다고 하며, 지금의 세상은 칼리 유가의 마지막 부분이라고 전해진다. 이 유가를 합한 기간을 마하유가라고 하며, 2000 마하유가가 모여 브라흐마의 1주야인 칼파를 형성하고 그러한 칼파를 1주 야로 따져 1세기에 해당하는 것이 파라이다. 브라흐마의 생애와 우주의 지속은 1 파라 동안 이어지며, 파라가 끝나면 브라흐마를 포함한 우주의 재창조 및 순환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칼리 유가는 기원전 3102년에 시작되어 427세기 동안 계속 된다고 하였으니 그 끝점은 아직 멀었다고 할 수 있으나 인간은 칼리 유가가 끝 나기 전에 완전히 종말을 맞는다고 전해진다. 남은 기간은 영혼의 종말이 이루어 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내용은 중요한 것이다. 네가 직접 보고도 모르느냐?” “이 내용이 현실적으로 구원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인 가요? 다른 경전들처럼 비유적이고 알아보기 어렵게 되어 있지 않고 세상을 구원할 기회가 있다고 확실하게 명기해 놓았기 때 문에요?”
“그렇다!”
준후는 눈을 조금 가늘게 뜨면서 귀자모신을 보았다.
“다만 그것 때문이라면, 어째서 서복의 무덤에서 찾아내려고 그토록 애를 썼나요? 애초부터 목적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요?”
귀자모신의 눈동자는 몹시 차분했고 조금도 눈빛이 변하지 않 았다. 늙은 나이답지 않게 너무도 맑고 또렷한 눈동자였다. 준후 는 그 눈동자를 보자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결국 준후는 마음속 에 있던 이야기를 확 꺼냈다.
“나는 『해동감결』을 당신에게서 얻었죠. 당신은 그 책을 나에 게 넘겨주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그때 정말 『해동감결의 복사본을 만들어 두지 않았나요?”
그 질문에 귀자모신은 눈을 크게 떴다. 그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준후는 결정적인 말을 던졌다.
“그리고・・・・・・ 당신은 물론 『해동감결』 마지막 장의 이름을 아 직도 기억하고 있겠죠? 「불사의 장!”
그 순간 준후는 귀자모신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는 것을 놓치 지 않고 보았다. 준후는 번개같이 벽조선을 품에서 꺼내 들며 외 쳤다.
“넌 누구냐!”
준후가 벽조선을 휘둘러 검은 기운을 쏟아내자 모 선생과 황 도인, 그리고 비마가 번개같이 앞을 막아서면서 각각 양손을 떨 쳤다. 황도인은 도목검(桃木劍)*을 꺼내 휘둘렀고, 모 선생은 마 치 깃발에 다는 기 같은 커다란 부적을 품 안에서 주욱 늘여 막 았으며, 비마는 금빛과 칠보로 번쩍이는 차크라**를 뽑아 휘둘렀 다. 세 사람이 한꺼번에 무기와 힘을 합하여 준후가 내쏜 기운을 쳐 내자 폭음이 방 안을 메웠다. 순간적으로 준후는 뒤로 두 발 자국 물러섰고, 세 사람은 다 같이 어깨를 한 번씩 들썩했다. 그 러자 도운이 뭐라고 외치면서 준후의 앞을 막아서려 했다. 그의 얼굴에는 놀란 표정이 완연했다.
* 쇠로 만들어진 날 선 검이 아니라, 복숭아나무를 칼 모양으로 다듬은 검, 복숭 아나무는 고대부터 귀신을 쫓는 힘이 있다고 믿어져 이를 다듬어 만든 도목검은 축귀(鬼)를 전문으로 하는 도사들의 상징과 같이 알려져 왔다.
** 원래는 힌두교에서 전해지는 인체의 기를 전달하는 주요한 부분이자 상징물이 지만, 여기에서의 차크라는 둥근 고리 모양의 무기를 뜻한다.
준후는 도운에게 손을 번쩍 들어 보여 도움을 제재하고는 냉랭하게 외쳤다.
“저 사람은 귀자모신님이 아니에요!”
그 외침에 도운이 가장 놀란 표정을 지었고, 그때까지도 냉정을 잃지 않고 기계적으로 통역을 하던 하꾸운 역시 놀라서 입을 벌렸다.
“나・・・・・・ 난토? (뭐・・・・・・ 뭐라고?)”
“저 사람은 남자입니다!”
준후가 외치자 귀자모신은 갑자기 하하하고 큰 소리로 웃으면 서 얼굴과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러자 주름 잡힌 얼굴과 삼대같 이 희게 헝클어진 머리칼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며 남자의 얼굴 이 나타났다. 그 모습에 도운과 하꾸운도 놀라서 한 발자국씩 뒤 로 물러서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새로 얼굴을 드러낸 그 남자는 조금 서툰 한국어를 직접 구사하며 준후에게 말했다.
“어찌 알았소까. 내가 변장한 것을…?”
눈동자였다. 준후는 눈동자로 그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아무 리 변장을 기가 막히게 했다 해도 동공까지 변장할 수는 없었다. 귀자모신의 눈동자는 구십이 가까운 할머니의 눈동자치고는 지 나치게 생생했고 기운이 넘쳤던 것이다. 거의 반쯤은 느낌으로 맞힌 것이기는 하지만 준후는 구태여 그런 것을 설명하지는 않 고 이렇게 말했다.
“말세의 예언이나 계시는 어떤 종교의 경전이나 비급에도 얼 마든지 있어. 그런데도 이렇게 전람회장을 만들기까지 하고 일 년 이상씩이나 기다렸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더구나 사람을 잡 으려는 식의 함정을 만들어 두는 것은…….”
남자는 하얀 얼굴에 기분 나쁘게도 여자 같은 미소를 지으며 준후에게 물었다.
“그러면 왜 왔소까?”
“한국에 이런 속담이 있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 어가야 한다고…………. 너도 「불사의 장에서 뭔가 얻으려는 게 분 명하지? 하필 서복의 무덤을 뒤진 것도 그렇고, 신시 문자를 해 독하려고 수작을 부린 것도 그렇고 말야. 너 또한 서복처럼, 진 시황처럼 불사신이 되려는 꿈을 꾸고 있는 놈이 아니냐?”
다음 순간, 준후의 뒤로 갑자기 세찬 기운이 몰아쳐 왔다. 준 후는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벽조선을 화 르륵 펼쳐서 막았다. 그러자 슈리켄 하나가 벽조선에 막혀 옆으 로 튕겨 나갔다. 슈리켄은 물리적인 힘을 쓰는 무기였지만, 습격 자는 슈리켄에 법력을 넣은 터라 벽조선의 힘에 밀려나 버린 것 이다.
“도운 스님・・・・・・ 기습을 하려면 조금 더 일찍 했어야죠.”
준후를 습격했던 도운이 깜짝 놀라면서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준후는 벽조선을 뒤로 돌린 자세 그대로 다른 손으로 부적 뭉치를 꺼내 들며 말했다.
“내가 저 남자가 귀자모신이 아니라고 했을 때 너무 놀라는 척 하셨어요. 오버액션이라 하던가요? 도운 스님은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걸로 알았는데 말이죠……………. 변장은 이제 벗어 던지시는 게 어떤가요?”
그러자 귀자모신으로 변장했던 남자가 다시 기분 나쁜 목소리 로 호호거리며 여자처럼 웃었다.
“아주 영특하군! 아주 영특해! 과연 신동이군그래!”
“나………… 나는…….. 나는…….”
하꾸운이 덜덜 떠는 것을 보고 준후가 조용히 말했다.
“하꾸운 스님은 물러서요. 다치고 싶지 않으시면.”
그 말에 하꾸운은 몸을 덜덜 떨면서 구석으로 바싹 등을 대고 붙어 섰다. 그러자 하꾸운을 뺀 나머지 다섯 사람이 준후를 중심 으로 둥글게 둘러서서 포위하는 자세를 취했다. 준후는 오른손 을 뒤로 돌려 벽조선을 등에 대고 왼손으로는 부적 뭉치를 들어 앞을 막은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귀자모신으로 변장한 남자가 등에서 기다랗고 끝이 아주 날카 로운, 휘청거리는 회초리 같기도 하고 낚싯대 같기도 한 무기를 꺼내 쌕 하고 허공에 휘둘러 보더니 말했다.
“좋다. 너를 속인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왜 그리 경계를 하는 거지? 여기 있는 도자기의 내용은 거짓이 아니야. 그것만 해독해준다면 탈 없이 돌려보내 줄 수도 있는데 말이야.”
준후가 나지막이 말했다.
“난 아무도 믿지 않아………….”
준후는 애초 이 사람들을 믿지 않았다. 믿고 싶지가 않았다. 준후는 다시 주기 선생의 말이 떠올렸다.
-난 못된 놈이야. 세상에서 나 혼자만 잘난 줄 알았지. 그러 나 널 보니…………. 하하하, 넌 참 착한 아이다. 그러나 세상은 착 한 것만 가지고는 제대로 살 수 없어.
홍수 사건 때 거의 죽을 뻔하고 나중에 의식이 든 후, 준후는 주기 선생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몹시 슬퍼하며 며칠을 울었 다. 현암이 죽은 것만큼이나 슬퍼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준후는 틈이 날 때마다 주기 선생이 남겨 준 십이지번술 요결 (十二支幡術要訣)』을 보았다. 그때마다 그 책을 넘겨주면서 주 기 선생이 했던 말을 돌이켜 보곤 했다.
여태껏 준후 자신은 한 번도 이치에 그르게 힘을 사용한 적도 없었고 어떤 경우에도 선한 생각을 잃지 않으려 했지만, 자신과 는 다른 주기 선생의 가치관도 상당히 괜찮게 다가왔다. 주기 선 생을 알게 되면서 점점 그랬다. 그것은 주기 선생도 마찬가지였 다. 그래서 그는 술사로서 목숨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는 십이지 신술의 비급을 준후에게 주었으며, 준후를 위해, 준후의 소망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 후 준후는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 고민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청소년기의 격렬한 갈등과 합해져서 준후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아무나 믿지 마라. 자기 목숨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람만 믿어라.’
이 말은 주기 선생이 『십이지번술 요결』의 첫 장에 볼펜으로 커다랗게 써 놓은 말이었다. 그렇게 낙서처럼 적어 놓은 말들은 장을 넘길 때마다 계속 이어졌다.
‘남의 고통을 자기 고통처럼 받아들이는 것도 좋다. 그러나 남 의 고통이라도 묵살할 줄 알아야 할 때가 있다.’
‘지는 것은 바보짓이다. 비굴해지는 것은 더 바보짓이다. 그러 나 죽어 버리는 것은 더더욱 바보짓이다.’
‘남을 위하는 만큼 자기도 위할 줄 알아야 하는 게 사람이다. 안 그러면 대부분의 경우 위선이 된다.’
준후는 십이지신술뿐만 아니라, 그러한 주기 선생의 전언까 지도 열심히 읽고 그 뜻을 곰곰이 되새겼다. 생각해 보면 과거에 자신의 약한 마음 때문에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위기를 맞았 던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한 마음이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현암이나 박 신부가 누누이 타일러 왔지만 준후는 점점 자신도 모르게 변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에게 전혀 주술을 쓰지 못하던 때도 있었다. 그다음에는 할 수 없이 자기 방어를 위해 사람에게 주술을 쓰기도 했다. 나중에는 분노와 상황에 떠밀려서 사람을 죽여 버릴까 마음먹었던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과연 그랬다 해서 그 모든 것이 잘못이었을까? 오히려 자신의 마음이 강했다면 더 쉽게 위기를 넘어갈 수 있지 않았을까? 그 렇다면 작은 동정은 이제 그만 버리고 보다 큰 목적을 위해 눈을 감고 지나쳐야 하는 일도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준후가 근래 에 하고 있는 생각이었다. 더구나 홍수 사건으로 퇴마사들 모두 가 저승 문 앞에까지 갔다가 돌아오자 준후는 남을 믿지 않는 습 성이 몸에 배고 말았다.
‘신부님, 현암 형, 승희 누나, 연희 누나, 백호 씨, 성난큰 곰・・・・・・ . 난 그 몇 명 이외의 누구도 믿지 않는다. 절대로…………… ‘
준후는 다시 한번 속으로 외치면서 온몸에 힘을 모았다. 준후가 몸에 기운을 주입하자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이글이글 넘쳐서 몸이 마치 불붙은 시퍼런 칼날 같아 보였다. 그 기세에 다섯 명의 술사들은 놀라는 것 같았지만, 크게 당황한 듯이 보이 지는 않았다. 귀자모신으로 변장했던 남자가 그런 준후를 자세 히 보더니 기분 나쁜 어조로 말했다.
“대단하구나, 대단해. 전설의 영웅이 나타난 것 같구나. 그런 데 말이다…………….. 너 사람을 공격할 수 있니? 네가 지닌 주술은 사 람에게 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잖아? 잊었느냐?”
준후는 흥하고 웃으며 대꾸했다.
“나에 대해 연구나 하셨나 보군.”
“도운과 귀자모신이 말해 줬지. 상당히 발악을 하긴 했지 ……”
남자는 은근히 위협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그 두 사람은 이들에게 한 발 먼저 당했구나. 준후는 애써 냉랭하게
말했다.
“그 사람들이 어찌 되었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정말 그럴까?”
준후는 남자의 비꼬는 듯한 목소리에 가슴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놈들이 두 사람을 인질로 잡은 것은 아닐까? 진 언밀교 자체를 풍비박산으로 만든 것은 아닐까? 준후는 마음을 다잡았다.
‘난 상준이 형의 후예야. 주기 선생의 전인(傳人)이야……..’
생전의 주기 선생이었다면 이런 위협 따위는 코웃음을 치며 흘려버렸을 것이다. 준후는 다시금 주기 선생을 떠올리며 몸과 마음을 꼿꼿이 했다.
예상외로 준후의 태도가 흐트러지지 않자 남자는 조금 고개를 갸웃하더니 화제를 바꿨다.
“너, 나에게 주술을 쓸 수 있겠니? 사람에게 주술을 쓰는 건 죄악이고…………… 너 같은 정의파가 할 일이 아닐 듯한데.”
준후가 씩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물론 그렇지. 하지만 너희를 사람이라 부를 수 있겠어?”
그 말에 도운으로 변장했던 자가 노한 소리를 내면서 본색을 드러냈다. 그자의 모습을 힐끗 보고 준후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자의 얼굴은 심한 화상이라도 입은 듯 엉망진창으 로 짓뭉개져 있어서 추악해 보였다. 그러나 준후를 놀라게 한 것 은 용모가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그자는 명왕교의 팔대 명왕 중 하나였던 항삼세명왕이었던 것이다.
지난번 명왕교 사건 때 준후는 승희가 현암 대신 총을 맞는 것 을 보고는 분노에 못 이겨서 항삼세명왕에게 강력한 뇌전술을 썼다. 온몸이 불에 탄 것처럼 되었던 항삼세명왕을 그냥 내버려 두었는데, 그자가 도운으로 둔갑하여 이 자리에 서 있을 줄이야. 항삼세명왕은 준후를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노려보다가 조 금 서툰 억양으로 떠듬떠듬 말했다. 그사이 어떻게 한국어를 배 운 모양이었다.
“너・・・・・・ 이 가증스런 꼬마……………. 사람에게………… 주술을 안 쓴 다고? 나를 이 꼴로 만들어 놓고서도 말이냐? 난 오늘………… 너를 없애서 원한을 풀겠다!”
준후는 다시 마음이 아려 옴을 느꼈다. 그래, 분명히 주술을 썼지, 그때는……………. 준후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주기 선생을 생각 하면서 다잡으려 애썼다.
“싸우지도 않던 여자에게 총질을 한 녀석이 과연 사람일까?” “헛소리 마라……………. 그리고…………… 그리고 너희 놈들은 내 친구 인 군다리명왕의 두 팔을 잘라 버렸다…………. 그 친구는 평생 불 구자가 된 거다.”
준후는 그 말도 한 귀로 흘려버렸다. 만약 이 자리에 주기 선 생이 서 있었다면 뭐라고 했을까를 상상하자, 말이 술술 잘도 나 왔다.
“안 죽인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지는 않아? 그때 너희가 이겼 으면 우리를 팔 두 개로 놓아두었겠어? 고맙다는 소리는 안 하고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정말 왜놈들 심보 그대로구나. 자기네가 한 짓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네가 당한 건 죽어도 안 잊는군.”
그때 귀자모신으로 변장했던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뭔가 말하 려 했다. 그러나 준후는 버럭 소리를 질러 그자의 말을 끊어 버 리며 외쳤다.
“남자 같지도 않고 여자 같지도 않은 네놈의 이름은 뭐냐? 이 름이나 알아야 욕을 해도 할 거 아니냐?”
남자는 깔깔거리고 웃더니 대답했다.
“그냥 편하게 겐조라고 하려무나. 좌우간 입씨름하지 말고 마 지막으로 내 제안하겠다. 저 도자기의 문구를 나에게 알려다오. 그러면 즉시 보내 줄 뿐만 아니라 보상금도 줄 수 있다.”
“흥! 너희들 말고 불사의 비밀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을 용납할 만큼 네 마음씨가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그리고 아까 내가 말했지? 난 아무도 안 믿는다고!”
“네가 수단이 좋고 총명한 건 인정하겠지만………. 너 혼자 다섯 명을 이길 것 같으냐?”
겐조가 이죽거리자준후는 자신 있게 말했다.
“단언하건데, 그 글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너 희도 그 내용을 알고 싶어 안달이잖아? 그렇다면 결코 나를 죽일 수 없을 텐데?”
“하하……. 양팔, 양다리가 없어도 해독은 할 수 있을 거야. 눈도 하나면 되고, 코나 귀도 해독하는 데는 필요 없는 것 아닐 까? 더구나 여기 다섯 명은 네 술법 정도는 모두 꿰뚫고 있는 데……. 그리 만만할까?”
준후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겐조의 악랄함을 한마디로 나타 내는, 소름이 오싹 끼치는 소리였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다. 항삼 세명왕과 겐조는 밀교 계통이니 자신의 주술이나 수인을 다 알 아볼 것이고, 마가 호법에게서 배웠던 힌두교 정통의 술수는 비 마가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벽공에게 배운 화산파의 수법과 허 허자에게서 배운 모산파의 술법은 황 도인과 모 선생이 알아볼 확률이 높았다.
한 사람도 아니고 여럿을 혼자 상대하는 싸움에서 자신이 쓰 는 수법을 모두 읽힌다면 말할 수 없이 불리해진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지금 저들에게 통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우리나라 무속의 주술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그 술수는 결코 사람을 상대하는 주술이 아니었다. 그래도 준후는 오기를 부렸다.
“그래, 누가 더 센가 한번 해보자.”
준후의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는 조용히 옷의 앞섶을 펼쳤다. 이어서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로 옷을 펼쳤다. 그러자 모든 이들 이 그 안에 또 기이한 옷을 입고 있는 것이 보였다. 범자(梵字)와 기타 이상한 도형이 가득 그려진 옷이었다. 그것을 보고 준후는 등골이 오싹해지며 아연한 기분이 되었다.
“깔깔이 범자들과 도형들이 네 주술을 다 막아 줄 텐데……………. 그래도 네가 이길 수 있을까?”
그 범자와 도형은 모두 밀교나 도교의 일파에서 비롯된 것이 었다. 그것은 주술의 효력을 없애는 것으로, 저들이 저렇게까지 준비를 했다면 준후가 아무리 술수를 부려 보아도 소용이 없을 것이었다. 준후의 법력이 그들보다 훨씬 강한 것은 사실이었지 만, 아무리 최대한으로 힘을 쓴다고 해도 주술은 저 글자와 도형 에 막혀 절반의 위력도 나오지 않을 것이었다. 준후가 자주 쓰는 우보법도 저것들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상 대는 다섯 명이었고, 여기는 도망칠 길조차 없는 밀폐된 건물 안 이었다.
‘이거 큰일이구나…………….’
준후는 십이지신술을 떠올렸지만 깃발을 만들어 가지고 오지 않았다. 너무 눈에 띄고 거추장스러웠기 때문이다.
준후는 당황하여 조금씩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겐조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선선히 말을 들어라. 네 재주가 아까우니 나도 굳이 너 를 해치고 싶지는 않아. 해독만 해 주면 모든 게 잘될 거다.”
그러면서 그는 유리구 앞을 막아서 버렸다. 사실 겐조가 아까 부터 준후가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유리구 앞을 막고 있어서 준 후는 도자기에 새겨진 글씨를 볼 수 없었다. 겐조가 비켜서서 자 신을 그 앞으로 인도해야만 볼 수 있었다. 준후는 겐조를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여기 있는 그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지만, 일단 죽을 때 죽더라도 그 내용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준후가 겐조에게 말했다.
“그럼 어서 보여 줘.”
겐조가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려면 우선 네 무기와 부적을 모두 버려라.”
다음 순간, 아악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구석에 서 있던 하꾸 운이 쓰러졌다. 그리고 항삼세명왕이 흉측한 얼굴에 미소를 띠 면서 준후에게 말했다.
“비밀을 아는 사람이 많으면 곤란하지.”
준후는 이를 갈았으나 곧 체념한 듯, 벽조선을 던져 버렸다.
그리고 부적 뭉치를 바닥에 버리고, 품을 뒤져서 다른 부적 뭉치들도 꺼내어 바닥에 버렸다. 그러나 겐조는 냉소를 흘렸다.
“숨겨도 알 수 있어. 법력이 아직 느껴지는걸? 나를 속일 생각 은 마라. 나도 신안(神)이 트였으니까.”
준후는 몸을 부르르 떨고는 장 호법의 유품인 방울과 자그마 한 호리병, 그리고 동경(銅鏡)과 조그마한 신칼까지도 모조리 꺼 내어 바닥에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단지 「해동감결」 원전뿐인 데, 이것만큼은 죽어도 내놓을 수 없었다. 겐조가 신안이 트였다 고는 하지만 법력을 지닌 물건만 알아보는 터라, 다행히 법력의 기운이라곤 전혀 없는 『해동감결』만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 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