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4권 1화 – 용(龍)과 봉(鳳) 1 : 예고 없는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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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말세편 4권 1화 – 용(龍)과 봉(鳳) 1 : 예고 없는 방문


예고 없는 방문

늦은 밤인데도 김포 공항 국제선 청사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 로 붐볐다. 탑승 수속을 하는 사람, 비행기에서 내리는 사람, 늦 은 밤에 비행기에서 내릴 사람을 기다리느라 눈이 빨개진 사람 들 등등…….

그렇게 각자 웅성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로 커다랗고 멋 진 선글라스를 낀 여자와 유달리 키가 큰 여자가 기둥에 기대선 채 입국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승희와 연희였다. ‘도대체 오는 거야, 안 오는 거야? 비행기가 연착되는 건가? 아니면…………….

벌써 두 시간 가까이 기다리고 있으려니 지겹기가 한량없었 다. 현암이나 박 신부처럼 아는 사람을 기다린다면 이렇게까지 지루하진 않았을 것이다. 허나 승희가 기다리는 사람은 별 관심이 없던 사람인지라 기다리는 지루함이 더더욱 심했다.

승희는 내심 초조했다. 혼자서 에티오피아로 먼저 떠난 현암 과 연락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승희는 도착하자마자 연희와 아 이들이 겪었던 놀라운 일에 대해 듣느라 현암에 대해서는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다음 날부터 연락이 되지 않았다. 세크메 트의 눈을 통해 연락해 보려 해도 현암에게는 전혀 반응이 없었 다. 사실 이때쯤 현암은 악숨의 성소 지하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다친 사람들을 구조하느라 경황이 없었지만, 당연히 승희는 그 런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아무튼 기다리긴 기다려야 할 텐데…………. 내가 계속 여기 있 어야 하는 건가? 그냥 가 버릴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연희 언 니가 부탁한 일인데 그럴 수는 없고……..’

승희가 짜증을 내면서 그런 표정을 선글라스 속에 감추느라 애쓰는 사이, 또다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 저기…………!”

연희는 마침내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백발이 성성한 한 남자 를 발견하고 그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연희는 그 사람을 알 지만 승희는 그 사람을 직접 만난 적이 없었고 이름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 사람은 중국의 황달지 교수였다.

홍수 사건 때 황달지 교수는 마스터에게 감금되어 거의 생명 이 위독했지만, 연희와 현암에게 구출된 뒤 기적적으로 회복했다. 연희도 그때 미라같이 말랐던 황달지 교수의 모습만 봤던 터라 건강을 회복한 그의 얼굴을 보니 더욱 반가웠다.

그런데 감금 상태였을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지금 그의 안색은 썩 좋지 않았다. 그는 연희를 발견하자 황급히 다가와 중국어 로 말을 건넸다.

“반갑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저희도 반갑습니다. 건강이 많이 좋아지셨군요.”

“다 덕분이지요. 당신들이 구해 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빛 바랜 해골이 되어 있었을 겁니다.”

“천만의 말씀을…… 아, 이쪽은 승희, 현승희라고 해요. 우리 동료죠. 인사나 나누시지요.”

연희가 시원스레 웃으면서 황달지 교수와 승희를 소개시키려 는 순간, 승희가 별안간 퉁명스럽고도 낮은 어조의 영어로 말했 다.

“교수님, 당신 누구를 달고 온 거죠?”

그 말에 황달지 교수는 안색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는 어깨 를 부르르 떨면서, 역시 목소리를 낮춰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아아…………. 역시…………. 누가 날 따라옵니까?”

“하나, 둘, 셋…………. 최소한 세 명이에요. 따라오세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승희는 휙 몸을 돌려 맞은편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황달지 교수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그 뒤를 따랐고, 연희는 영문도 모른채 긴장하며 그 뒤를 막아서듯 따라갔다.

승희는 공항 내의 경비를 돌고 있는 검은 베레 병사들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었다. 공항 내부에는 몇 개 조의 병사들이 순찰을 돌고 있었고, 그들은 잘 훈련된 군견과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승희는 교묘하게 두 경비 팀 사이를 아무 일 없다는 듯 지나쳐 가다가 그중 한쪽으로 걸어가는 경비 팀의 뒤를 따라갔다. 가면 서승희가 황 교수에게 속삭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말아요. 공항 내에서는 저들도 어쩔 수 없을 거예요.”

“도대체 누구지, 희야?”

연희가 묻자 승희는 입술을 한 번 삐죽 내밀고는 중얼거렸다.

“히트맨. 그것도 세 명이나…………….”

“히트맨?”

“암살자들이란 말야. 한 명은 독바늘과 슬링샷, 한 명은 만년필 형 독침 발사기. 한 명은 총알이 나가는 우산을 들고 있어.”

승희가 자세히 말하자 황 교수가 얼이 빠진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걸 어떻게 아시오?”

그러나 승희는 한 번 웃어 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승희의 무시무시한 투시력은 비록 범위가 조금 좁아졌어도 이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각종 총기 및 무기에 대한 지식도 대단했다. 허나 승희는 굳이 황 교수에게 그런 설명을 하 지 않았다. 지금 황 교수를 따라온 세 명은 상당한 수준의 자들 이지만, 주술사나 초능력자 같지는 않았으니 크게 염려할 것은 없을 듯했다.

“자꾸 그렇게 떨지 말아요. 눈에 띄겠어. 저들은 남의 눈에 띄 지 않으려고 해요. 비행기 안에서도 많은 기회가 있었겠지만 시 끄러워지는 것이 싫어서 그냥 따라온 거예요. 그러니 공항 안에 서도 표적이 되지 않도록 계속 움직이기만 하면 일을 금방 벌이 지는 않을 거예요.”

승희는 그 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과 마음속의 생각을 모조리 읽고 있었다. 그들 모두는 남의 눈에 전혀 띄지 않게 독을 바른 무기를 발사해 황 교수를 죽이려 했다.

하지만 승희가 황 교수를 데리고 경비병들 사이를 오락가락했 기 때문에 그들은 적절한 사격 위치를 잡지 못해 몹시 혼란스러 워했다. 승희가 능력을 발휘하기만 하면 그들을 당장에 쓰러뜨 릴 수도 있었지만 그 전에 승희는 먼저 물어봐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황 교수님, 도대체 무슨 죄를 지으셨기에 이렇지요?”

“죄………? 죄라니……. 나는 그런 죄를 지은 적이 없소이다.”

“그러면 왜 저런 킬러들을 달고 오신 건가요? 그리고 왜 우리 를 만나려 하시는 거죠?”

승희는 이미 그 해답을 알고 있었다. 황 교수를 만나자마자 승희는 황 교수가 어떤 종류의 논문을 최 교수에게 전달하려고 왔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하지만 황 교수가 구체적으로 연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왜 황 교수가 킬러들에게 쫓기는지는 알지 못했다. 제아무리 투시력이 강해도 스스로 연상하지 않는 내용을 읽어 낼 수는 없었다. 그래 서 자꾸 말을 시켜, 그런 내용을 연상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일부러 황 교수에게 겁을 주면서 주위를 빙빙 도는 것이었다. 황 교수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승희의 물음에 대답했다. 

“나도 연유를 모르겠소. 그냥 자꾸만・・・・・・ 자꾸만 이상한 일 들이 일어났소. 정말 나는 무서워 죽을 지경이었소. 나는 정 말…….”

그 순간 승희는 황 교수의 마음속을 읽는 데 성공했다. 그러고나자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알았어요. 그럼 일단 갑시다.”

“어디로 말야?”

연희가 묻자 승희는 툭 내뱉었다.

“아무 데나 저놈들이 못 쫓아올 곳으로 가야지.”

재빨리 승희는 경비병들의 뒤를 지나쳐 공항의 문밖으로 나섰다. 그러면서 승희가 연희에게 속삭였다.

“검은 옷을 입은 노랑머리, 파란 옷을 입은 흑인, 연보라색 옷을 입은 동양인 이 세 명을 주의해.”

아닌 게 아니라 연희가 보니 승희가 말한 세 명의 사람이 보였 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볼일을 보는 것처럼 태연한 듯했지만, 알게 모르게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었는데, 음악을 듣는 것 같아도 그것으로 서로의 위치를 정해 콤비 플레이를 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대단히 뛰어난 자들이었지만 투시력을 지니고 있는 승희 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승희는 그들이 어디로 위치를 잡으며 추 격하는지를 훤히 꿰뚫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의표를 찔러 가면서 이동할 수 있었다. 더구나 지나가는 행인이나 짐, 공항 직원을 적절하게 가리개로 이용하면서 움직이자 그들은 의외의 사태에 놀라 쩔쩔매는 것 같았다.

“정말 괜찮은 거야?”

연희는 아무래도 불안한 듯 승희에게 속삭였지만, 승희는 흥 하고 코웃음을 한 번 치고는 대꾸했다.

“걱정 마. 내가 누군데? 전 세계 수사기관이 쫓았어도 아직까 지 멀쩡한 몸이다. 이거야. 일단 주차장까지만 가면 놈들은 차가 없을 테니까 괜찮아.”

곧이어 승희는 재빨리 방향을 바꿔 가면서 차를 세워 둔 주차장 쪽으로 갔다. 차에 도착하자마자 승희는 후닥닥 서둘러 황교수와 연희를 뒷좌석에 몰아넣다시피 하고 핸들을 잡았다. 분명 그들은 비행기에서 막 내렸으니 차를 갖고 있지는 않을 것이었 다.

당황하는 그들의 마음을 잠깐 들여다보며 승희는 기세 좋게 차를 몰고 공항을 빠져나갔다.

일단 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황달지 교수도 조금 마음을 놓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황달지 교수는 긴장이 풀리는지 그만 눈물까지 솟아 나올 듯한 지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는………… 나는 미칠 지경이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 야하는지, 나는 정말 알 수가 없단 말이오・・・・・・ . 나는 정말………….”

“천천히 이야기해 보세요. 교수님. 어째서 한국에 오시게 된 거죠?”

연희는 상대를 안심시키는 차분한 말투로 이야기를 건넸다. 황달지 교수의 연락을 받은 것은 아라를 통해서였다.

최 교수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다음 사촌 언니가 아라를 돌봐 주고 있었는데, 아라가 친척집으로 간 것이 아니라 최 교수 의 집에 사촌 언니가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아라는 집에 있기보 다 퇴마사들과 같이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고, 지난번 사건 때 중 상을 입었음에도 사촌 언니에게는 알리지도 않았다.

그랬다가 아라가 오랜만에 집으로 전화를 해 보니, 사촌 언니가 어느 외국인이 자꾸 전화를 걸어오더란 말을 전해 주었다. 사촌 언니가 영어가 서툴러 간신히 전화번호 하나만 받아 적어 두 었는데, 이를 궁금해하던 아라가 전화를 해 보기로 했다.

물론 아라는 외국어에 능통한 연희에게 부탁해 전화를 했고, 연희는 전화를 한 사람이 바로 과거에 만난 적이 있었던 황달지 교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황달지 교수는 매우 급박한 목소리로 최 교수를 찾았다. 이에 연희는 일단 황달지 교수에게 최 교수의 사망 소식을 알려 주었 다. 황달지 교수는 연희와 통화한 김에 최 교수가 아니라 퇴마사 들에게 꼭 전해 줘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한 다음 곧 한국으로 가 겠다고 했다.

황달지 교수가 너무도 서두르는 것 같아 왜 그런지 물었더니, 그는 자신이 매우 위험한 처지에 있으니 가급적 공항으로 마중 을 나와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연희가 승희와 함께 공항으로 나간 것이었다. 아직 박 신부가 돌아오지 않아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라곤 아이들밖에 없 었으니까. 그러나 황달지 교수가 암살자들에게 쫓기고 있을 줄 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다.

황 교수는 덜덜 떨면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이 말했다.

“정말 기이한 일이 계속 일어났소・・・・・・ . 내가 지나갈 때 아파트 계단이 갑자기 무너져 떨어질 뻔하고, 발을 들여놓으려던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떨어지기도 했소. 결국에는 내 자동차도 불 이 나서 다 타버렸고……………. 도저히 무서워서 견딜 수 없었소. 그 렇다고 중국에 달리 의지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연희는 침착하게 황 교수에게 질문했다. 연희도 이 일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뭔가 있다는 육감 같 은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피신을 하신 셈인가요?”

“물론 나는 전에 당신들의 능력을 들어 알고 있으니 여기 오면 안전하리라 생각하기는 했지. 하지만 꼭 피신하려고 온 것만은 아니오. 이대로라면 나는 언젠가 죽음을 당할 거요. 그래서 그 전에 그간의 내 연구 결과를 꼭 알려 주고 싶어서 직접 온 거요.” 

“연구 결과라뇨?”

역시 황 교수는 연구원 체질이라, 조금 전까지 다 죽어 가는 듯했는데도 자신의 연구 이야기가 나오자 생기를 되찾는 것 같 았다.

“나는 과거 당신들의 신세를 지고서, 당신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연구를 하고 싶었소. 지난번 최 교수와 공동으로 진행한 홍 수 연구는 비록 학계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나는 내 나름 대로 값진 연구를 했다고 믿소. 나는 몇 년 동안 은(殷)나라에 대 한 연구를 했소. 그런데 그 은나라에 대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해 그간 연구에 몰입했던 거요. 그런데 ………… 그런데 내가 이 지 경에 빠지다니…”

“그 연구가 누군가의 원한을 사거나 비밀을 파헤친 것이었나요?”

“그럴 리가! 절대로 아니오. 내 연구는 나 혼자 시작한 것도 아 니고, 이전까지 있던 연구 내용에 조금 독자적인 조사를 덧붙였 을 뿐이오! 그런 내용을 가지고 누가 나를……………!”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그 연구가 아니라면 달리 황 교수님이 남의 위협을 받을 만한 일을 하실 분은 아닌 것 같아 보이는데 요?”

“그건 그렇소. 하지만 도대체…………! 내 연구 내용은 아주 객관 적인 것이고, 아주 오래전의 사실을 다룬 것뿐인데………..” 

“그 내용을 간략하게 알려 주실 수 있나요?”

“그러리다. 내 연구는 학계에서 조금 파격적인 주장으로 여기 는 이론을 택하고 있소. 그것은 용봉 문화(龍鳳文化)*의 원류에 대한 고찰과 이해를 근간으로 하는데, 벌써 수십 년 전부터 여러 학자들이 그에 대한 이론을 내세우고 있소. 특히 은나라의 멸망 으로 봉 계열의 문화가 용 계열의 문화로 바뀌면서 나타난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으로…………….”

연희로서는 황 교수의 이야기를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연 희는 잠시 황 교수의 이야기를 중단시켰다.

“좀 더 쉽게 설명해 주실 수 없나요? 저는 그 분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아…………. 그러면 대담(對)하는 형식으로 들려 드리리다.” 

황 교수의 말에 연희는 미소를 지었다.

“아주 쉽게요.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말씀해 주신다면 고맙겠군요.”

그러자 황 교수가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사실 나는 내 논문을 가지고 왔소. 이걸 읽으면 다 파악할 수 있을 텐데……………..”

연희는 고지식한 황 교수를 미소 띤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 고 바라보았다. 이에 황 교수는 우물쭈물하더니 이윽고 말을 하 기 시작했다.


*용은 중국 민족을 상징하며, 봉은 (포괄적 의미에서의) 한민족을 상징한다. 이 용봉문화의 이해가 중국 문화의 이해라고 하는 중국 학자들이 많이 있으며, 본 문에서 설명한 용봉 문화의 원류나 동이족(東夷)이 은나라 멸망 이후 바다를 건너 잉카나 마야나 인디언의 원조가 되었다는 것은 저자의 상상이 아니라 실제 로 중국에서 제기되는 학설이다. 대표적인 학자는 왕대유(王大有), 송보충(宋寶 忠), 왕쌍유(有) 등등인데, 이 중 왕대유의 저서 「용봉문화원류(龍鳳文化原 流)는 국내에도 출간되어 있다. 이 용봉 문화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분은 그 책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내가 그런 쪽으로는 좀 말재주가 없어서…………. 그럼 이야기하리다. 과거 중국 대륙에는 은나라가 있었소. 상)나라라고도 불리는 제국이었지. 그러니까…………… 흠, 그렇지. 혹시 주왕(紂王)* 과달기(己)의 이야기는 들어 보셨소? 포락지형(炮烙刑)***이 나 주지육림(池肉)****이니 하는 이야기들 말이오.”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은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대명사로 유명한 달기의 미색에 홀려 포락지형이나 주지육림 같은 폭정과 악행을 일삼았다. 이에 덕이 있는 희창(姬昌)*, 희발(姬發)**을 중 심으로 새로이 일어선 주(周)나라는 원래 은의 한 제후국에 불과 했지만, 강태공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태공망(太公望) 여상( 尙) ***을 재상으로 얻어 은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이 후 춘추 전국 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대륙은 주나라가 다스리 게 된다. 그런 내용은 연희도 약간은 들어 알고 있었다.


*은나라의 마지막 왕. 총명함이 비할 바가 없었고 용력이 과인하여 호랑이를 맨 손으로 때려잡을 정도였지만 자만심에 빠지고 또 주나라 무왕이 파견했다고 할 수 있는 미녀 달기의 유혹에 빠져 국사를 그르치고 끝내는 나라를 망하게 한폭 군의 전형처럼 알려져 있다. 주지육림(酒池肉), 포락지형(炮烙刑), 채분지 형(刑), 장야지음(長) 같은 말은 모두 주왕과 달기에게서 나온 것 이다. 주왕은 최후에 도성이 함락되자, 자신이 건립한 호화로운 누각인 녹대에 올라가 불을 지르고 스스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 주왕의 총애를 받아 은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전설적인 미녀 역시 악녀의 대명 사처럼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바쳤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은나라의 최후 때 주왕과는 달리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주 나라 군대의 포로가 되었지만 처형당했다.

*** 불에 달군 속이 빈 쇠기둥에 사람을 넣고 기둥 속에 숯불을 지펴서 사람을 산 채로 태워 죽이는 잔인한 형벌.

* 환락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주지육림은 주왕과 달기가 연회를 베풀기 위해, 술 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를 숲에 걸어 놓아 그야말로 낭비의 극을 달렸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조금 더 심한 설에 의하면 술로 연못을 만들고 나체의 궁녀들을 세 워 글자 그대로 육림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으며, 나아가서는 맹수들을 술에 취하 게 하여 산 채로 사람을 물어 죽여 흩어 놓게 한 데서 유래되었다는 엽기적인 이 론까지도 있다.


“예, 조금은요.”

“좋소. 그런데 조금만 조사해 보면, 은나라는 동이족(東夷族), 즉 당신들의 혈족들이 세운 나라라는 것이 학설이 있소.’

“어머, 그런가요? 중국인들의 나라로 알고 있었는데……. 중 국 역사에서 주로 다루어지잖아요.”

그 말에 황 교수는 웃어 보였다. 공항에서 나온 뒤, 처음 보이 는 미소였다. 아마 이 꽁생원 학자는 연구 외에 잘 아는 일도, 좋 아하는 일도 없으리라.

“원래 중국인들은 중국 대륙을 다스린 자들을 모두 중국인으 로 친다오. 따지고 보면 오호 십육국이나 금(金), 요(遼), 원(元), 청(淸) 등의 나라들은 모두 중국인이 세운 나라가 아니었지. 하지만 그 모든 나라는 중국 대륙에 세워진 나라였고, 중국 인민이 그 나라의 근간이 되었기에 우리는 그들을 모두 중국의 역사로 본다오.”

“그런가요? 그나저나 악행을 많이 한 왕이 우리 선조였을지도 모른다니 기분이 묘하군요.”

“그건 그렇게 믿을 바가 못 되오. 멸망한 왕조의 마지막 왕치 고 황음무도(無道)했다는 기록이 나지 않은 왕이 없으니까. 새 왕조가 세워지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인 정받으려는 작업이고, 그러려면 구왕조의 악행을 널리 선전해야 하니까 말이오.

솔직히, 은의 주왕은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지만 바로 그 때 최초의 지배층 교체, 즉 봉(鳳)과 용(龍)의 교체가 일 어났기 때문에 그러한 나쁜 소문도 그만큼 강렬하게 남았던 것 으로 나는 추측하오.”

“그런데 계속 봉족, 용족이라 하시는데, 그건 뭐죠?”

“아, 그걸 모르셨소? 봉황은 동이족, 즉 당신네 한민족의 상 징이오. 그리고 용은 당연히 중국의 상징이고 말이오. 물론 이건 하나의 가설이고, 아직 정설로 인정되지는 않은 것이오.”

“그랬던가요? 단군 신화에는 곰의 자손이라고 되어 있는 데 솔직히 연희는 그런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황 교수가 의아한 듯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 주(周)나라 문왕(文王)으로 은나라의 서백(西)이었으며 큰 뜻을 품고 힘을 길렀지만 은나라를 쓰러뜨리지 못하고 죽었다.

** 주나라 무왕으로 문왕의 뒤를 이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건국한 왕 이다.

#강태공으로도 알려져 있는 태공망의 이름, 강상(尙) 또는 강자아(牙)라 고도 불린다. 주 무왕을 도와서 은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허허. 그것은 지엽적인 일이오. 예전에 들은 바에 의하면, 최 교수는 그 ‘곰’이 한국어의 ‘금’, 즉 땅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 디다. 일본의 군국주의 사학자들이 한국 사람들에게 식민사관을 심어 주려고 그렇게 고의로 해석했다는 이야기를 최 교수가 하 던데. 나는 그것까지는 모르겠소만, 한민족의 상징은 절대 곰이 아니오. 봉황이오.

한국의 국장(國), 그러니까 대통령만이 사용하는 무늬가 두 마리의 봉황이지 않소? 지금까지도 그 전통을 지키고 있는데, 모 르는 국민들도 많은가 보구려. 당신들의 조선 시대 때에도 상감 (上監)은 오조룡(五爪龍)*과 봉황의 흉배를 사용했는데, 오조룡은 중국의 관복을 따른 것이지만 봉황은 조선의 독자적인 것이었소.

나아가 한국의 옛말에는 솟대, 수두, 소도라고도 불리는 것이 있지 않았소? 새 모양의 장식을 높은 기둥 위에 세운 것 말이오. 그 외에도 얼마든지 예를 들 수 있지만……………. 좌우간 당신네 한 민족은 봉황, 즉 신성한 새를 숭배하는 민족이었소. 우리 중국과 도 맞먹을 만큼 오랜 옛날부터 말이오.”


* 발가락이 다섯 개인 용. 과거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황제나 왕을 나타내는 상 징으로 사용되었다.


연희는 몹시 부끄러워졌다. 아무리 황달지 교수가 전문적인 연구를 하는 사람이라지만, 정작 우리 조상의 과거에 대해 자신 이 이토록 무지했다니 창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우리 중국인이 숭상했던 것인 용이오. 아주 특이하지 용은 상상의 동물이지만 종류를 나눈다면 파충류라 할 수 있소. 용은 전 세계적으로 흉악한 혐오의 대상물이었소. 그런데 중국 에서만 그 동물이 신성하고 신적인 존재로 떠받들어지고 있으니 특수하지 않을 수 없소.

그 유래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분분하지만, 황제(黃帝)가 치우 (蚩尤)와 싸울 적에 응룡(鷹龍)*의 도움을 받아 승리했기 때문에 감사의 뜻으로 용을 숭배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소. 그것만 보더라도 주나라 이전의 중국 고대 역사는 용과 봉족의 투쟁 의 역사라 할 수 있지. 정설은 아니더라도 나는 그 설을 지지하 는 입장이오. 황제와 치우의 싸움이나, 은나라와 주나라의 싸움 같은 것이 그 실례이고 말이오.”

“그런데 그것이 연구의 주안점이었나요?”


* 황제와 치우가 싸울 때에, 치우가 폭풍을 일으키고 안개가 자욱하게 만들어 황 제는 이길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황제는 응을 불러와서 천둥과 번개를 막아 보려고 했다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응룡은 치우 쪽의 우사, 운사 등의 힘에 눌려 제힘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 아니오. 이건 서론에 불과하오. 중요한 것은 다른 데 있 소. 물론 이 학설은 서양 학계에서 대단히 배척받는 설이지만, 나는 그 중요성과 타당성이 충분히 검토할 만하다고 생각하오. 은나라 멸망 이후에 벌어진 사건이 내가 다루는 핵심이 되는데…”

“은 멸망 이후에요?”

“그렇소. 은은 동이족의 나라였고, 은이 망할 때 대학살이 벌 어졌소. 아마도 칭기즈 칸이나 나치스를 능가하는 대학살이었을 것이오. 솔직히 그것은 아픈 기억이니 고대의 전쟁 이후에는 흔 히 있었던 일이라고 여기고 넘어갑시다. 은나라를 세운 동이족 계열은 구이(九夷)라 하여 아홉 개의 지파로 갈라져 있었는데, 그 아홉 지파는 은의 멸망을 깨닫고 학살을 면하기 위해 아주 머 나먼 도피의 길을 떠나게 되었소.”

“어디로 갔나요? 한반도로 왔나요?”

“아니오. 당시 한반도나 만주 등은 다른 국가가 확고히 자리 잡고 있어서 그러한 유민들이 들어가기에 적합하지 않았소. 지 금의 역사로는 은이 당시 동북아의 중심으로 묘사되지만, 나는 다른 고대 국가가 은보다 훨씬 강성했을 수도 있다 봅니다.” 

이야기가 또 길어질 것 같자 연희는 다시 말을 끊었다.

“그들이 그래서 어디로 갔다는 거죠?”

“이미 세상이라고 알려진 곳에 그들이 딛고 설 땅은 없었소.

결국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땅, 새로운 세상을 찾는 것이었소. 그들은 배를 타고 대항해에 나섰지. 그리고 그들은 발 견한 거요.”

“무엇을요?”

그러자 황달지 교수가 의기양양하게 대꾸했다.

“아메리카 대륙을……..”

“예?”

연희는 너무도 믿어지지 않아 눈을 크게 떴다. 황달지 교수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황달지 교수는 의기양양한 어조 로 아주 진지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은에서 탈출한 동이족들은 목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아메 리카 대륙으로 갔소. 그중 일부는 얼어붙은 베링 해협을 건너 시 베리아로부터 알래스카로 넘어갔다고도 추정되오. 그래서 걸어 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간 사람들은 혹한 때문에 더 이동할 길을 찾을 생각을 버리고 지혜를 짜내 그곳에 정착했소. 그들이 에스 키모요. 그러나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오.”

그 정도만 들어도 연희는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에스키모 가 우리의 혈족이었다고?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이 콜럼버스가 아니라고?

황달지 교수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배로 이동한 구이족은 대륙을 발견한 후, 각각 부족에 따라 나뉘었소. 그들 중 정치적 열망이 강한 편에 있던 자들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자고 했으며, 평화로운 부족은 중국에 은이 다시 일어날 것이니 그때 고향으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했소.

결국 그들은 새로운 땅에 흩어져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들 중 평화를 주장해 은으로의 귀환을 기다리던 부족은 북미의 인디언 이 되었으며, 정치적 열망이 강했던 부족들은 그들의 뜻대로 제 국을 건설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갔소. 그 제국이 아스텍, 잉 카,마야 등이오. 물론 그들이 그 아메리카의 주민 전부라는 뜻 은 아니오. 그러나 적어도 베링 해협을 건너갔던 선주민들에 융 화되어 그 일부는 되었을 거요.”

연희는 그 말을 진심으로 믿을 수가 없었다. 잉카나 마야, 아 스텍을 건설한 사람들 중에 바로 우리의 일족도 있다고? 도무지 실감 나지 않았을뿐더러, 그런 이야기를 남에게 했다가는 필경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 같았다. 자신의 민족을 미화시키는 데 혈안이 된 국수주의자라고 욕먹을지도 모르고, 유에프오를 믿는 사람과 비슷한 허무맹랑한 공상을 하는 사람 정도로 취급받을지 도 몰랐다.

황달지 교수는 연희가 놀라면서 조심스러운 인상을 보이자 의 아해하며 말했다.

“물론 이 학설은 정식으로 채택되진 못하지만, 정말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소? 중국에서는 벌써 사오십 년 전부터 빈번하게 연구되고 발표된 학설인데…………. 종주국에서…………….”

황 교수는 자신의 말이 조금 결례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말꼬리를 돌렸다.

“사실 이 학설이 정식으로 받아들여지기에는 문제가 많으리라 여겨집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나 콜럼버 스가 미 대륙에 발을 디뎠을 때 그곳에는 고도의 문명을 지닌 사 람들이 버젓이 살고 있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신대륙 을 발견했다고 광고했으며, 지금은 우리 동양인들마저 모두 그 렇게 믿고 있소. 사실 당시 서양인들은 동양인들이나 그곳에 사 는 원주민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으니까. 흑인 노예가 폐지된 것이 불과 백여 년 전이니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지. 더구나 코르 테스 같은 이들은 남미 인디오들을 완전히 멸망시키시다시피 했 고, 미국의 이주민들도 인디언들을 무차별 학살했소.

그런데 만약 이 학설이 인정되면 그들은 중국인과 한국인을 대량 살육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큰 문제가 발생하겠지. 때문에 그쪽 학자들은 이 학설을 입증할 만한 자료들을 없애고 무시하 는 데 심혈을 기울여 왔소.

미주 대륙에서 발견된 한자가 새겨진 토기는 그런 말살과정을 거치고도 아직까지 이천 점 이상이나 보존되어 있지만, 미국 정부 등은 단 한 조각의 토기도 공개하지 않고 있소. 서양 학자 들은 콜럼버스가 인도에 도착한 줄 알고 그곳 주민들을 인디언 이라 불렀다고 하지만, 보다 자세히 조사해 보면 그것은 은지안 (地), 즉 ‘은나라는 과연 안녕할까’ 하는 망국의 설움을 담은 그들의 인사말을 듣고 그들이 인디언이라고 오해한 것이라는 주 장까지도 있소. 물론 주류는 베링 해협을 건너간 사람들일 테지 만, 구이의 후예들이 나름의 가르침을 보존하고 있었을 수도 있 는 거요.

당신네 한국인들은 일본의 역사 왜곡에 분노를 느끼는 모양이 지만, 실제로는 미국이나 기타 서양 제국들도 마찬가지였소. 미 국에 최초로 중국 대사관이 개설되었을 때 많은 인디언 추장들 이 찾아와 자신들을 고향으로 보내 달라고 했다고 하오. 그들은 수천 년에 걸쳐 그 가르침을 보존하고 있었던 것이오.

그러나 미국 정부는 그러한 사실을 묵살하고, 인디언들을 보호 구역에 감금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가르침을 전해 듣고 신봉하는 많은 인디언 원로들을 암암리에 살해하기까지 했다고도 하지. 기병대에 의해 제일 먼저 말살된 부족들은 고대의 전통을 가 장 많이 갖고 있던 부족이었을 공산이 크오. 북미 인디언들도 대 단히 발달된 문화를 지니고 있어 토루(樓)라 불리는 인디언 고 분군은 피라미드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고대사의 보고라 할 수 있는 것이었소. 그러나 이만 개에 달하는 그 하나하 나가, 만주에 있는 당신네 장군총을 능가했던 그 고대 건축물들 이 미국 정부에 의해 ‘자연적 우연으로 형성된 흙더미’라는 성명 과 함께 한꺼번에 모조리 파괴되어 버렸소. 이제 와서야 간신히 조금씩 연구가 진행되는 모양이지만, 진실이 밝혀지기는 힘들 거요.”

황달지 교수가 다소 흥분된 목소리로 긴 이야기를 마치자 그 때까지 조용히 들으며 운전만 하고 있던 승희가 입을 열었다. 

“교수님 연구는 충분히 다른 사람의 표적이 될 만하군요. 서양 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교수님의 연구가 발표되는 것은 큰 피 해가 되지 않겠어요?”

“그럴 리가. 이건 오로지 학술적인 연구일 뿐이오. 이 연구를 하는 것은 나뿐만 아니며, 중국에서는 수십, 수백 명의 학자들 이 이 분야의 논문을 발표하고 있소. 그리고 저서들도 아무 문제 없이 유통되는 판인데, 왜 하필 나겠소? 더구나 연구 때문에 나 를 노린 거라면 나를 해치기보다 학설을 부정하는 게 더 쉽고 문 제를 발생시키지도 않겠지. 지금까지 세계적 규모의 학회에서 이 학설은 한 번도 주목받지 못했으니까 말이오. 사실 입증되기 에는 너무도 비약이 많고, 물증은 거의 없다시피 한 것도 사실이 지. 모든 아메리카 선주민이 동이족이라는 건 비약이겠지만, 적 어도 그 일부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거요.”


* 콜럼버스에 이어 아메리카 대륙에 가서 그곳이 인도가 아님을 확인하고 아메 리카라는 이름을 붙인 탐험가


“하지만 그것 말고는 달리 의심이 가는 일이 없잖아요?”

“그건 그렇소만……”

“그렇다면 혹시 교수님, 근래에 그 학설에 새로 발견하신 게 있나요?”

“글쎄, 그렇게 내세울 만한 발견은 아직 하지 못했는데……………”

그러자 승희가 웃으며 되받았다.

“아마 발견하셨을 거예요. 누군가가 교수님을 노리고, 또 따라 붙었을 정도니까 말이에요. 안전벨트나 꼭 매세요.”

이번에 그들의 뒤를 따르는 것은 한 대의 은색 트럭이었다. 겉 으로 보기에는 수상한 점이 전혀 없는 일반 컨테이너 트럭 같아 보였지만 승희의 투시력을 속일 수는 없었다. 승희는 열심히 차 사이를 비집으며 덩치 큰 트럭을 따돌려 보려 했으나 트럭은 끈 질기게 따라왔다.

별안간 컨테이너 안에서 이쪽으로 총을 쏘아 댈 것이라는 느 낌이 왔다. 총의 위치가 정확하지 않아 순간적으로 총을 무력화 시키기는 쉽지 않았다. 급한 나머지 승희는 트럭 운전사에게 염 력을 쏘아 보냈다.

그 순간 트럭이 돌연 끼이익 하는 타이어 긁히는 소리와 함께 급정거해 빙글빙글 돌다가 뒤에서 달려오던 차와 두세 번 부딪 힌 다음 옆으로 처박혀 버렸다. 불이 나거나 뒤집힌 차는 없었지 만사고가 커진 것 같았다.

황달지 교수는 의외의 사고에 신경 쓰이는지 다시 약간씩 어 깨를 떨며 자꾸 뒤를 돌아다보았고, 그때부터 승희와 연희는 도 착할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비록 위급한 상황에서 할 수 없 이 그랬다고는 하지만, 관계없는 사람들까지 사고에 말려들게 해 승희는 무척이나 마음이 아팠다.


우울한 마음으로 승희와 연희는 황달지 교수를 데리고 일단 퇴마사들의 아지트에 도착했다. 황달지 교수는 호텔을 잡아 두 었지만 암살자들이 뒤쫓는 마당에 호텔로 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황 교수도 그런 것을 짐작했는지 매우 고맙 다는 말을 수십 번이나 되풀이했다.

승희도 그들이 황달지 교수를 목표로 한다는 것만 알고 있었 을 뿐 그들이 누구의 사주로,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아지트에 도착한 승희와 연희는 조금 안심했다. 출입문을 제 외한 이곳은 준후가 겹겹이 주술적인 방어진을 설치해 둔 까닭 에 능력이 없는 사람은 들어오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라와 준호와 수아가 모두 함께 있었다. 지 난번 사건을 겪고 난 후 아직 며칠이 지나지 않은 참이라 모여 있는 편이 심리적으로 안정이 될 것 같아 그랬던 것이다.

아라는 금세 황달지 교수를 알아보았고, 황달지 교수도 아라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황 교수는 최 교수의 죽음에 대해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시했다.

황달지 교수는 연희의 통역을 거쳐 아라에게 물었다.

“그런데………… 혹시 무슨 소포 같은 걸 받지 않았니? 논문 같은 건데.”

“아뇨. 그런 건 온 적이 없는데요?”

“주소가 바뀌지는 않았고?”

“아뇨, 집 주소는 그대로예요. 제가 집에 잘 없기는 하지만.” 

“역시 그렇구나.”

황달지 교수는 불안해 보였다. 왜 그런가 하고 연희가 묻자 황 달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최 교수의 죽음을 몰랐고, 그래서 그에게 줄곧 작성 중 인 논문과 자료를 보냈소. 그런데 답장이 전혀 없어서 이상하다 했는데, 아예 배달이 되지 않았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긴 걸까요?”

연희가 말하자 승희가 간단히 딱 잘라 말했다.

“누군가 빼돌린 것 같은데? 한 번이라면 우편 발송상의 실수 일 수도 있지만, 보내는 족족 그랬다면 누군가 고의로 그런 게 분명하잖아.”

그러면서 승희는 단도직입적으로 덧붙였다.

“황 교수님, 그것만 보더라도 교수님을 노리는 자들은 분명 교수님의 연구 내용에 관심을 갖고 있어요. 아마도 논문이 계속 없어진 것도 그자들의 짓일 거예요.”

“허 참……………. 하지만 내 연구가 어째서 그럴 정도로 문제가 된다는 거요?”

“교수님, 정말 학문적이고 일반적인 연구 외에는 더 들어가지 않으셨나요?”

“당연하오. 내가 왜 그러겠소?”

이번에는 연희가 말했다.

“하지만 연구가 아니고서야 누가 이토록 집요하게 교수님을 노리겠어요? 아무래도 심상치 않군요. 아까 승희 말대로 근래에 얻은 발견이라거나 연구 성과가 있으신지요?”

“그리 특별하다고 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

“새롭게 어떤 특별한 사람과 접촉했다던가 하는 일은요?”

“나야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사는 사람인데, 그럴 만한 사람을 만난 적도 없소.”

“그렇다면 꼭 연구가 아니더라도 근래에 새로 얻은 물건 같은 것은 혹시 있나요? 귀중한 물건이라거나 아주 내력이 깊은 물건 같은…….”

“흠・・・・・・ . 그러고 보니 ・・・・・・ 한가지 있기는 있는데…………….”

“그게 뭐죠?”

“별것은 아니오. 신기하게도 내가 조사하는 내용과 연관이 있는 물건이었는데…………. 아무래도 너무 황당한 내용이 담겨 있는것 같았소. 그래서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처박아 버린 물건이 있기는 하오만.”

“그게 뭐냐고요?”

“점토판이었소.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온 것인데, 무슨 황당한 예언 같은 내용을 담은 것으로 보이는 점토판. 그렇지만 그게 무 슨 중요한 물건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승희와 연희는 황 교수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있지 않았다. 메 소포타미아의 점토판이라니! 현암과 박 신부와 준후를 비롯해 전 세계의 모든 능력자들이 그것에 매달려 목숨을 걸고 있지 않 는가? 만약 황 교수가 지닌 물건이 그 점토판의 일부가 확실하다 면 황 교수가 지금까지 목숨을 잃지 않은 것이야말로 신기한 일 이라 할 수 있었다.

“교수님! 분명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이라고 하셨나요? 혹 x……. “

“혹시…………!”

승희는 허겁지겁 서랍 속을 마구 뒤져 박 신부가 떠나기 전에 여벌로 떠 놓은 점토판의 탁본을 꺼내 보였다.

“이렇게 생긴 건가요?”

황달지 교수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탁본을 들여다보았다.

“어? 그렇소. 아주 비슷하군. 이게 왜 여기에도 있는 거요?” 

“맙소사! 그걸 어디서 얻으셨죠?”

승희는 어이가 없어 소리를 질렀다. 이에 더더욱 어리둥절해진 황달지 교수가 머리를 긁으며 대꾸했다.

“그냥 그게・・・・・・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서 배송되어 왔소. 정말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오. 다만 그걸 보내면서 내용을 해독 해달라고 부탁한 쪽지가 왔을 뿐이오. 나는 메소포타미아의 설 형 문자도 연구를 좀 했거든. 가만있어 보자…………. 그 겉봉에 적 힌 글들은 내가 보관해 두었는데…..”

황달지 교수는 들고 온 서류 가방을 뒤적이며 뭔가를 찾았다. 그러다가 종이 틈바구니에서 뭔가를 꺼냈는데, 그것을 보는 순 간 승희는 또다시 얼빠질 정도로 놀랐다.

“교 교수님! 이건 뭐죠?”

“어? 이건 나도 모르오 버린 줄 알았는데, 거기 끼어 들어갔군.”

“이게 뭔지 아시냐구요!”

“뭐냐니?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고, 내 사진 한 장만 달랑 들 어간 편지가 아니오? 겉봉투부터 속에 든 것까지 몽땅 시커먼 종 이로 되어 있어서 기분 나빠 버리려고 했는데………….”

승희는 전에 백호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황달지 교수가 아 무것도 모르고 처박아 버린 그 종이는 근자에 세상을 떠들썩하 게 만들고 있는 검은 편지, 즉 검은 편지 결사가 보내는 사형 선 고장이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탕탕탕 하며 아지트 입구의 문 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왔다. 지금 퇴마사들의 아지트는 뭍으로 끌어 올려진 낡은 배를 개조한 것이었고, 겉으로 드러나 있는출입구는 하나뿐이었다. 그 문은 철문이라 그것을 두드리는 소 리가 내부에 울려 퍼졌던 것이다.

“누굴까?”

연희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승희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안색이 변해 황급히 말했다.

“제길! 언니! 어서 애들을! 놈들이야!”

그때 수아와 준호는 자고 있었고 아라도 어른들이 나누는 이 야기에 별 관심 없이 잠들려는 찰나였다. 승희의 다급한 말에 아 라는 즉각 눈치를 채고 아이들을 깨웠다.

황달지 교수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허둥지둥했다. 승희는 재빨리 일어서서 출입문 앞으로 달려 나갔고, 연희는 수아를 들 쳐 업으면서 물었다.

“어쩌려고?”

그러자 승희는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혼쭐을 내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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