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4권 13화 – 하르마게돈 7 : 고반다의 정체
고반다의 정체
인도에 도착해 어느 호텔에 투숙한 박 신부 일행은 몹시 초조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분명히 비행기를 타고 이쪽으로 출발했다 는 현암과 백호가 며칠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박 신부는 현암이 걱정되어 얼굴이 해쓱해졌고, 승희도 안달 이 나서 발을 동동 굴렀지만 도무지 손쓸 방법이 없었다. 어떤 비행기를 타고 출발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비행기 사고가 났는 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이반 교수 등이 공항에 가서 알아본 결과, 그즈음에 비행 기 사고가 났다는 소식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현암이 탄 비행기는 정규 항공편이 아니라서 사고가 났다 해도 모를 수도 있었다.
승희는 걱정스러운 나머지 줄기차게 손톱을 물어뜯어 피가 날 지경까지 되었다.
한참을 생각해 보다가 문득 박 신부의 마음의 걸리는 것이 있 었다. 박 신부는 현암에게서 아하스 페르츠의 또 다른 얼굴인 해 밀튼과 함께 여행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만에 하 나. 아하스 페르츠가 해밀튼의 인격을 누르고 나타났다면 현암 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런 이 야기를 승희에게 해 보았자 도움이 될 것이 없다고 여겨 박 신부 는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기로 했다.
박신부는 고심 끝에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만약 현암 군이 사고를 당했다면 조만간 사실이 알려지겠지. 하지만 아하스 페르츠에게 무슨 변을 당했거나 잡혀 있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일단은 아하스 페르츠를 찾아내는 것이 급 선무인데……..’
그러나 아하스 페르츠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난감했다. 바이 올렛이 해밀튼의 얼굴을 잘 알지만 그 얼굴만으로 찾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문득 박 신부의 뇌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렇지, 현암군은 해밀튼과 같이 타보트를 찾으러 인도로 오던 길이었어. 그런데…………… 아하스 페르츠로 인격이 변했다면 그도 타보트를 찾으려 할까?”
그럴 가능성도 있을 것 같았다. 해밀튼이 타보트를 찾으려 한 이유는 그것 말고는 아하스 페르츠를 죽일 방법이 없기 때문이 다. 그리고 그 타보트를 칼키파의 고반다가 빼내 간 것 또한 십 중팔구 그와 비슷한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하스 페 르츠는 자신에게 위험할지도 모르는 그런 물건을 다른 자의 손 에 놓아두고 싶지 않을 터였다.
‘우리는 어차피 고반다를 찾고, 타보트를 찾으려고 온 것이 아 닌가. 일단 현암 군도 찾아야 하겠지만, 타보트를 찾아가다 보면 아하스 페르즈와 마주칠지도 모르겠구나.’
그렇다면 일단 고반다를 찾아 타보트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것 이 가장 빠른 길인 듯했다.
마침내 박 신부는 마음을 굳히고 사람들을 불러서 고반다를 찾자는 의견을 꺼냈다. 그러자 예상했던 대로 승희가 볼멘소리를 했다.
“그런데 현암 군은 어쩌죠? 소식이 없는데……………. 현암 군부터 찾아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마 조금 늦어지는 걸 게다. 별일은 없을 테니까. 만약 무슨 일이 생겼다면 미리 연락을 취했을 거야.”
“늦어진 것 자체가 일이 생긴 거잖아요? 그럼, 현암 군이 아무일도 없는데 연락도 없고 나타나지도 않는단 말인가요?”
“그런 게 아니라, 무슨 급한 일이 생겼을지도 모르지. 지난번 에도 사람들을 구조하느라 며칠씩이나 연락이 끊긴 적도 있지 않았니? 그러니 일단 우리 나름대로 고반다를 찾아보면서 현암 군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하자는 게야.”
박 신부도 승희 못지않게 속이 탔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렇 게 말하는 것이 최선인 것 같았다. 승희는 걱정스런 눈치를 지우 지 못했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박신부가 로파무드에게 물었다.
“로파무드 양, 고반다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가?”
“정확히는 모르지만 대충은 알아요.”
“거기가 어디쯤인가?”
“글쎄요. 칼키파의 사람들을 추적하다 보면 반드시 그가 나타날 겁니다. 칼키파는 근래 들어 갑자기 흥성해져서, 칼키파의 사람들을 거리에서 보는 것이 어렵지 않아요. 허나……………”
로파무드가 말끝을 흐리자 박 신부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지?”
로파무드는 한숨을 내쉬며 되물었다.
“우리가 과연 고반다의 상대가 될 수 있을까요?”
“어째서?”
“고반다는 대성인이신 바바지 님도 어쩌지 못한 자예요. 그만큼 그의 힘은 신비하기 그지없다는 거죠. 그리고 칼키파 사람들이 신처럼 떠받드는 자라 그를 보호하는 강자들이 구름같이 많 아요. 그자들은 고반다의 명령이라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악당에게 왜 사람들이 그리 많이 모이는 거지?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충성스러울까?”
바이올렛이 인상을 쓰며 묻자 로파무드는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런지는 저도 잘 몰라요. 그러나 일단 고반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강력하게 휘어잡고 있어요. 나는…………… 분명 그가 악인이 라 믿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죠. 그래서 어려운 겁니다.”
성난큰곰이 마음속으로 물었다.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니까………… 거의 신적인 존재로 여긴다 해도 과언이 아니 에요. 그가 있는 곳에는 모든 악이 사라진다는 찬가(歌)까지 있을 정도니까요.”
“칼키파의 핵심은 대략 몇이나 될 것 같은가? 특수한 힘을 가 진 자들로…………….”
“그런 것까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대략 수백 명은 넘을 거예요. 고반다가 바바지 님을 해칠 때 그가 동원한 인원은 백여 명이 넘 었고, 그들의 세력은 지금도 계속 불어나고 있으니까요.”
일행 모두는 그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수백 명?”
“예.”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윌리엄스 신부가 중얼거렸다.
“능력자가 그렇게 많다면, 그 사람들도 바보…………… 아니, 범상 한 사람들은 아닐 텐데, 그런 사람들이 어째서 모두 고반다에게 속고 있는 것일까?”
“약점이라도 잡혀서 협박당하나 보죠.”
바이올렛이 건성으로 말하자 윌리엄스 신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게 보기는 어려워요. 협박당하는 자가 목숨을 걸고 서까지 충성을 바치기란 쉽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고반다가 무지무지하게 강한 자여서 모두들 두려워 하는 게 아닐까요?”
“글쎄요. 그렇게 많은 능력자들이 과연 협박이나 두려움 때문 에 복속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고반다에게는 분명 다른 무엇인 가가 있을겁니다.”
“어떤 면에서 말씀이오?”
이반 교수의 질문에 윌리엄스 신부가 조용히 말했다.
“아무래도 내 생각에는…………… 그가 악인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로파무드가 거칠게 소리쳤다.
“아니에요! 바바지 님을 해치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인 그런 자가…………!”
“아, 잠깐잠깐, 진정해요. 내 말뜻은 그런 게 아니에요. 흠, 좀 설명하기 힘든데…………. 말하자면 고반다는 외면적으로는 전혀 악하지 않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 니 상당히 깊이 살펴보더라도 흠잡을 데가 없는 선한 이론을 펴 고 선한 행동을 보여서 음흉한 목적을 가린다고나 할까. 좌우간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악당과는 뭔가 격이 다를 것 같다는 겁니다. 그런 자를 상대하려면 무작정 밀어붙이는 방법으로는 안됩니다.”
그 말에 박 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동감입니다. 나도 예전에 카르나라는 칼키파의 인물을 만났는데, 그도 기이한 이론을 내세우면서 칼키파의 행동을 합 리화하려는 것 같았어요. 그러나 내면으로는 뭔가 불안감을 감 추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거기에 초점을 맞춰야 할 듯합니다.”
박신부가 말하자 승희가 박 신부를 부추기듯 말했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보세요.”
박 신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일단 우리가 여기 온 목적은 타보트를 찾아, 신성하고 강력한 힘을 지닌 그 물건이 옳지 못한 용도로 쓰이는 것을 막는 것입니 다만, 내 생각에는 타보트보다 고반다가 훨씬 더 위험한 존재인 것 같군요. 하지만 지난번 카르나의 경우나, 현암 군이 상대했다는 칼키파의 인물들을 돌이켜 볼 때, 그들은 대단히 강력한 자들 입니다. 성당 기사단원들을 단숨에 제압해 버릴 정도였으니까요. 우리가 비록 여럿이기는 하지만, 그들을 힘으로 이기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을 겁니다. 더구나 여기는 칼키파의 근거지가 있 는 인도잖습니까? 그렇다면 힘으로 상대하는 것보다 고반다의 근본적인 약점을 밝혀내는 것이 그를 무너뜨리는 가장 빠른 길 일 것 같습니다.”
박 신부의 말이 논리 정연하여 모두들 수긍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윌리엄스 신부가 로파무드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고반다에 대해 자세히 조사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요. 그리고 보통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보며, 또 그의 측근들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도 조사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 다. 먼저 로파무드 양이 알고 있는 것을 전부 말해 주세요. 그다 음 모두 흩어져서 나름대로 이삼일 동안 정보를 수집해 보도록 합시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대강 논의가 끝나자 승희가 박 신부에 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사이에 현암 군이 연락하겠죠? 설마 무슨 일이 생기지는……”
승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박 신부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현암 군에게는 무슨 일이야 있겠니? 게다가 혼자 행동하는것도 아닌데.”
하지만 박 신부의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겁기만 했다. 비행기 안에서 꾸었던 기이한 꿈이 앙금이 되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 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꿈은 흔히 보는 악몽이 아니라 어떤 예지몽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예지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믿어지지 않는 내용이었다. 아무리 그 기억을 지우려 해도 지울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꿈인데 왜 이리도 마음이 무거운 것일까…………….’
박 신부는 스스로에게 되뇌면서 잡념을 떨쳐 버리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겠는가. 준후와 현암 군과 내가 싸우면서 서로를 죽이려고 하다니……………. 말도 안 돼. 절대로!’
그때 밖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윌리엄스 신부가 룸 서비스인가 하면서 문을 열려고 했다. 순간, 승희가 바싹 긴장된 낯빛으로 급히 손을 내저었다. 뭔가 느껴진다는 신호였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긴장하여 문을 주시하면서 반원형으로 흩 어졌다. 박 신부가 눈짓을 하자 윌리엄스 신부는 조심스럽게 문으로 다가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박 신부에게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실례합니다. 잠시 용건이 있습니다만.”
박신부는 잠깐 기억을 되짚다가 곧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떠 올려 냈다. 지난번에 만난 바 있던 칼키파의 카르나였다. 박 신 부는 윌리엄스 신부에게 눈짓을 하여 뒤로 물러나게 하고 천천 히 나아가 문 앞을 막아선 다음 문을 열었다.
카르나는 상당한 술사인 만큼 어느 정도의 오라력을 모아 만 약의 사태에 대비했으나 문이 열린 다음으로는 아무런 일도 일 어나지 않았다. 다만 빙긋 웃는 표정의 카르나가 문 앞에서 박 신부의 얼굴을 보고는 정중하게 고개를 꾸벅 숙였을 뿐이다.
“또 만나 뵙는군요.”
“무슨 일이오?”
그때, 박 신부의 뒤편에서 비명 소리가 들리면서 누군가가 달 려들었다. 로파무드였다. 그녀는 어느새, 벽에 세워 놓았던 첼로 케이스에서 간디바를 꺼내 들더니 맹렬하게 휘두르며 카르나에 게 내리치려고 했다.
간디바의 윙윙 하는 울리는 소리가 들리자 카르나는 안색이 변하면서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박신부가 얼른 로파무드의 팔을 잡았다.
“로파무드 양! 왜…………?”
“저・・・・・・ ! 저 악당!”
로파무드의 눈이 붉게 변했다. 로파무드는 박 신부가 말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장이라도 카르나를 박살 내 버릴 기세였다.
“진정하게! 그리고 조금만 기다려! 이야기는 들어 봐야 하지않겠나!”
카르나도 당황한 듯 황급하게 말했다.
“이러지 마시오! 나는 단지 …………… 단지 중요한 사항을 전하려 고온거요! 이런 곳에서…………… 이런 곳에서 싸운다면……………!”
그러나 로파무드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성난 황소처럼 간디바 를 휘둘렀고, 카르나는 간신히 피했다. 그러자 쾅 소리와 함께 카르나의 뒤편에 세워 두었던 금속제 조각상이 박살 나 버렸다. 간디바에 살짝 스친 것뿐인데도 조각상이 박살 날 정도이니 직 접 맞았으면 카르나는 죽었을 터였다.
하는 수 없이 성난큰곰과 윌리엄스 신부가 합세해 로파무드를 뒤로 끌어냈다. 그 모습을 보고 카르나는 안심이 되었는지 안으 로 훌쩍 들어와 누가 볼세라 얼른 문을 닫았다.
“너무하는군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당신들의 정 체가 발각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카르나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 모습에 로파무드가 다시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들려 했지만 성난큰곰이 꽉 잡고 있어서 꼼짝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무지무지한 힘을 가진 성난큰곰조차 힘겨워할 정도로 로파무드는 날뛰었다.
“도대체 왜 그러나요?”
바이올렛이 로파무드에게 묻자 로파무드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바바지 님이 돌아가실 때, 거기서 저자를 본 적 있어요!”
평소 온순하기 그지없던 그녀의 눈에서는 붉은빛이 강렬하게 뿜어 나왔으며, 표정 또한 무시무시하기 그지없었다.
성난큰곰과 윌리엄스 신부 등 모두는 약속이나 한 듯이 로파 무드의 표정에서 마스터의 모습을 떠올렸다. 비록 영혼이 정화 되었더라도 본성의 일부분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 을 하면서………….
윌리엄스 신부가 간신히 그녀의 손에서 간디바를 빼앗아 들 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카르나가 로파무드에게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바바지 님을 해치지 않았습니다.”
“거짓말!”
“그 누구도 바바지님을 해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스스로 육신을 태워 사라지셨습니다.”
그 말에 로파무드는 악을 쓰며 대들었다.
“그렇게 만든 건 네놈들이잖아!”
“보지 않고 말을 하니 반박할 수도 없군요. 좌우간 저는 여러분들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절대로………….”
이번에는 박신부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난번 만남을 나는 잊지 않고 있소.”
그 말과 함께 연희의 얼굴을 보고는 뻔뻔스러운 카르나도 약 간 얼굴을 붉혔다. 카르나는 수아 납치 사건 때 박 신부, 연희와 대면한 기억을 떠올렸다.
“지난번에는 제가 실례했습니다. 고반다 님께서도 진노하셔서 나중에 많은 참회와 고행을 해야 했답니다. 이번에 제가 온 것은 지난번 일을 사죄드릴 겸 …………….”
그러자 로파무드가 또 고함을 질렀다.
“사죄하려면 자결해!”
성난큰곰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로파무드를 질질 끌고 옆방으로 가 버렸다.
그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박 신부가 말했다.
“연희 양도 가서 로파무드 양을 좀 진정시켜 주게.”
“예.”
연희가 사라지자 카르나가 박 신부에게 슬며시 말했다.
“정말 지난번에는 잘못했습니다. 저는 벌을 받아야 마땅하죠. 그러나 전달할 것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말해 보시오.”
박 신부의 목소리에서 의심의 기색이 가시지 않자 카르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모두들 여기 오신 목적이 있으시겠지요? 대강은 압니다. 한개의 물건과 한 명의 사람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만…………….”
“그렇소.”
“좋습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 물건도 넘겨 드리 고 만나고자 하는 분도 만나게 해 드리려고 온 것입니다.”
“뭐라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박 신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박 신부 일행은 분명 타보트를 찾고, 또 고반다를 만나러 온 것이다. 그 런데 그쪽에서 오히려 타보트를 넘겨주고 고반다를 만나게 해 주겠다니!
“그게 정말이오?”
“당연하지요. 그렇듯 오래 묵은 궤짝………… 아니 실제로는 돌 덩이지요? 그것을 우리가 무엇에 쓰겠습니까? 그리고 고반다 님 은 누구나 만나십니다.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지요.”
“당신은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소?”
카르나는 그저 빙긋 웃을 뿐,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박신부는 로파무드가 들어간 방쪽을 힐끗 보고는 다시 말했다. “당신도・・・・・・ 바바지 님 일에 관계했소?”
카르나는 그 말에 무안한 듯 얼굴빛이 약간 변했다. 그러나 이내 당당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도 그분을 존경했고, 따른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변했어요. 그분은 고반다 님과 말씀을 나누시고는 스스로 육신을 불살라 사라지신 겁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소?”
“그건 모릅니다.”
그 말에 이반 교수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했는지, 싸웠는지 알게 뭐요?”
“창밖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두 분은 그냥 이야기를 나누었 고, 바바지 님은 곧 육신을 불살라 사라지셨습니다. 절대 다투시 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도 바바지 님을 존경했습니 다. 그분 같은 분을 어떻게 죽일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니, 그런 일 이 가능이나 하겠습니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고반다 님은 한 번도, 단 한 번도 남에게 힘이나 폭력을 쓰신 적이 없습니다!”
열변을 토하는 카르나의 안색이 변했다. 비록 카르나의 속마 음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박 신부는 지금 그의 감정이 거짓 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확실히 그는 잔학한 짓을 저 지른 칼키파의 일원이지만, 악령에 씌었거나 조종을 받는 것 같 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의 힘은 오히려 종교적인 냄새까지도 풍 겼다.
그렇다면 고반다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어떤 자이기에 단시간에 인도 전역을 휘어잡을 수 있었을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박 신부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잠 깐 침묵이 흐르자 이반 교수가 입을 열었다.
“고반다는 우리를 만나서 어쩌겠다는 거요? 우리도 자살하게 만들려고?”
그 말에 카르나는 대번 정색을 하고 되받았다.
“우리가 당신들을 초빙하는 것은 순수한 호의에서입니다. 당 신들이 그리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도 잘 알고 있 는데, 감히 이렇게 나서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도 당신들의 도움 이 필요합니다.”
“어떤 도움 말이오?”
“고반다 님을 만나 뵙고, 그분의 진정한 뜻을 접해 보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분명해질 겁니다. 그분을 한번 뵌다면, 우리를 악인이라고 오해했던 마음이 싹 사라질 테니까요.”
“말은 그렇지만 함정인지도 모르지 않소?”
그 말에 카르나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함정을 파려면 굳이 이렇게 번거롭게 하지 않고 여기를 기습하는 편이 빨랐을 겁니다. 안 그런가요?”
이반 교수도 그 말에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카르나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일이 급하니 시간은 가급적 빠르게 정합시다. 내일은 어떻습니까?”
“내일? 그건 너무..
그 말이 떨어지자 카르나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서두를수록 좋을 텐데요.”
그 말에 박 신부는 정색을 하고 되받았다.
“우리는 지금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라…………….”
카르나는 고개를 저으며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 물건을 노리는 자들이 많습니다. 오래 끌면 우리도 힘들 고, 당신들도 귀찮아질 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모레는 어떨까요? 그 이상은 안 됩니다. 그리고 만나는 장소는 그쪽에서 정하셔도 됩니다. 아무 곳이나 상관없지요.”
딱 잘라 말하면서 카르나가 휴대 전화를 꺼내 박 신부에게 내 미는 순간 이반 교수가 대뜸 가로채듯이 받았다.
이반 교수의 갑작스런 행동에도 카르나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말했다.
“그러면 그 전화로 오늘 밤까지 만날 장소를 정해서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저는 이만…”
그 말을 끝으로 카르나는 유유히 문을 나섰다.
카르나가 사라지자 이반 교수는 재빨리 주머니칼을 꺼내 휴대전화 케이스를 열어 보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폭발물이나 도청 장치 같은 것은 없군요. 그냥 전화기입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윌리엄스 신부가 박 신부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 말에 박 신부는 결정하기 어렵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일단 생각을 좀 해 봅시다. 로파무드 양과 이야기도 나눠 보 고・・・・・・ 현암 군 소식도 알아봐야 할 테니까요.”
그러나 현암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하다못해 해밀튼과 그 밖의 사람에게서도…………….
“도로 데려다 주마.’
도인들 및 기이한 사람들과 함께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던 승현 화상이 준호와 아라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러자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아라가 비로소 정신을 차린 듯하더니 돌연 사나운 소리로 내뱉었다.
“필요 없어요!”
“무슨 소리냐? 돌아가야지. 거사님도 안 계신데…………….”
“우리가 무슨 장난감인 줄 알아요? 마음대로 들고 왔다가 돌 려놓으면 그만인가요?”
옆에서 준호가 보아하니 아라는 이 사람들에게 적의를 가져 도 단단히 가지게 된 것 같았다. 이 사람들이 준후를 잡을 궁리 를 하니까 그럴 수도 있다 싶기는 했다. 그러나 본디 우유부단하 고 마음이 약한 준호는 아직까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사부가 그럴 리가 없는데……………. 하지만 정말 그랬다면……………나는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지?’
준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아라는 승현 화상 일행에게 바락바락 대들었다. 그 기세에 승현 화상 일행은 더 이 상견디지 못하고 좋을 대로 하라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빈 거사의 시신을 수습한 후 산을 내려갔다. 한빈 거사는 과연 대도 인답게 시신 역시 기이하리만큼 가벼워 종이 뭉치 정도의 무게 밖에 나가지 않았다.
준호는 아무리 아라가 대든다고 해도 아이들인 자신들을 깊은 산속에 내버려 두고 가는 승현 화상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승 현 화상도 어찌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이었다.
승현 화상 일행은 아라와 준호가 준후와 아주 가까운 관계라 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현현파 사람들이나 오의파 등의 사람들 은 그런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근호와 병수는 수아를 한 번 본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박 신부와 함께 있을 때였고, 또 수아 가 워낙 어리기 때문에 굳이 그 아이에게 준후의 거처를 물어봐 도 소용없다고 생각되어 그런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러나 아라가 자꾸 시비를 거는 것으로 보아 준후를 잡는다 는 것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기는 모양이라, 승현 화상까지 나서서 자꾸 따지고 들다가는 아라가 준후와 가까운 사이라는 것이 들통 나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다른 도인들이나 술객 들은 필경 아라와 준호를 닦달할 터였다.
아이들을 괴롭히는 짓 같은 것은 도인들이 할 바가 아니었지 만 워낙 사건이 크다 보니 그들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 도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차라리 산에 남겨 두고 아이들 스 스로 길을 찾아가는 편이 어른들에게 닦달을 당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던 것이다.
더구나 이 아이들은 평범하지 않고 나름대로 재주가 있는 아 이들이니 별일이야 있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고. 그래서 승현 화 상은 급히 다른 사람들을 채근하여 아이들에게서 관심을 돌리려 고 배려한 것이지만 거기까지는 알아채지 못한 준호는 승현 화 상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아라의 표정을 보니 말을 걸었다가는 당장에 기관총처 럼 험한 말이 쏟아져 나올 분위기였다. 사실 준호도 준후가 몹시 걱정되었으나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아라는 어떻게 된 건지 돌연 울기도 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도 하면서 준호 같은 아이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한 분위기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준호는 말도 하지 못하고 아무 생각 없는 듯한 수아를 달래고 놀아주기나 하면서 아라 주변을 얼쩡거리기만 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어느덧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돌연 아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자.”
“가다니? 어디로 가?”
아라는 여전히 정신이 몽롱한 듯 중얼거렸다.
“맞아. 그럼 가지 말고 여기 있자.”
그러더니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준호는 어이가 없어서 아라에게 다가가 슬며시 말했다.
“왜 여기 있는 거야?”
“준후 오빠가 올 거 아냐?”
“사부가 사부가 여길 왜 오겠어?”
“다시 올 거야. 오빠가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어. 아마 ………… 아 마준후 오빠도 일이 이렇게 된 줄 모르고 있을 거야. 그래, 다시 올거야. 그냥・・・・・・ 무슨 일이냐는 듯이 나타날 거라구……………”
아라는 억지로 굳센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리고 일어설 기미도 없이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준호는 답답해졌다. 준호는 깊은 산속에서 아무 런 준비도 없이 밤을 지새우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라에게 그런 말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밤이 되면 추워질 거야. 그러면 내려가자고 하겠지.’
그렇게 한참 동안 더 앉아 있자 준호는 좀이 쑤셔서 아예 드 러누워 버렸다. 그러고 보니 수아는 벌써 낙엽 위에 쓰러져서 잠 들어 있었다. 그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던 아라가 벌떡 고개를 들고 품에서 조요경을 꺼내 들었다.
“맞아! 이거!”
“그게 왜?”
준호가 심드렁하게 물었으나 아라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이걸 쓰면 잘하면 준후 오빠가 어디 있는지 보일지도 몰라. 전에도 한 번 그런 적이 있었거든!”
그러나 준호는 쩝 하고 입맛을 다시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아냐! 정말이라고! 정신을 잘 집중하면 될 거야. 한 몇 시간만…….”
“몇 시간?”
준호는 참다못해 불만스럽게 덧붙였다.
“조금 있으면 날이 어두워질 거야. 그런데 너, 이런 첩첩산중 에서 밤을 보내는 게 어떤지나 알고 그러는 거야? 산짐승이 나올 지도 모르고…..”
“짐승?”
“그래! 호랑이는 없더라도 멧돼지나 늑대, 살쾡이라도…….”
아라에게 겁을 주려고 한 말이었는데 아라는 오히려 여유 만만해 보였다. 준호가 생각해 보니 그도 그럴 것이, 조요경이 있 는 한 모든 동물은 아라의 부하나 다름없었다.
“흠・・・・・・ . 그리고 밤이 되면 산속은 말도 못하게 추워진다구. 초가을에 동사할 수도 있고.”
“난 안 추워!”
“너는 그렇다 해도 수아는 어떻게 할 거야!”
준호가 평소보다 약간 크게 소리치자 아라는 움찔했다. 아라 역시 수아가 낙엽 더미 위에 쓰러져서 잠들어 있는 것을 보자 안 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럼………… 내려갈까?”
“그래, 그러자구. 사부가 여기 나타난다는 보장도 없고 말야. 좌우간 여기서 이렇게 기다리는 건 그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 는 짓이란 말야.”
준호는 그제야 잠든 수아를 안아 들고 아라를 달래서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러나 아라는 영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듯 머뭇 거리다가 문득 한쪽을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이미 해가 서산 저편으로 넘어가고 있어 눈부신 석양빛이 온 산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데 저만치에 누군가가 서 있는 듯,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저………… 저거……………!”
준호도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붉은 석양빛을 등에 지고 나뭇가지를 헤치면서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사람은 바로 준후가 아닌가.
아라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준 호는 준후를 보고 처음에는 반가워하다가 곧 한숨을 길게 내쉬 면서 말했다.
“사부…………..! 아….. 어떻게 된 거야, 대체?”
그런데 준후의 얼굴은 화난 사람처럼 굳어 있었고, 눈빛은 몹시 번쩍였다.
준후는 준호, 아라와 수아를 쓱 훑어보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날 좀 따라와. 너희가 도와줄 것이 있어.”
준호는 느닷없는 준후의 말에 조금 놀라서 중얼거렸다.
“뭐? 아니 뭔데? 그리고…………… 그리고 사부! 여기서 일어났던 일은 대체…….”
얼버무리는 준호의 말을 끊고 준후는 차갑게 말했다.
“가면서 이야기해 줄 테니 따라와.”
준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솔길을 따라 산 저편으로 걸어 갔다. 아라는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그 뒤를 따라갔고 준호는 수아를 들쳐 업고 잠시 안절부절못하다가 그 뒤를 따라 달려 갔다.
현암은 서서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눈꺼풀이 천근같이 무 거워 눈을 뜰 수는 없었지만 눈꺼풀 사이로 밝은 빛이 느껴졌다. ‘여기가 어디지? 아니, 내가 지금 살았나 죽었나?’
힘겹게 눈을 뜨자 낯선 풍경이 보였다. 파란 하늘, 처음 보는 기이한 모습의 나무들, 그리고………….
“정신이 드십니까?”
백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가운 목소리였다.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천당은 아닌 듯했다.
“여기가…………… 어딥니까?”
현암이 간신히 입술을 달싹거리자 백호가 대꾸했다.
“저도 모릅니다.”
현암은 꿈틀 몸을 움직이며 먼저 몸 구석구석에 가만히 힘을 주어 보았다. 부서지거나 잘려 나간 곳이 없나 싶어서였다. 그러 나 중상을 입은 부위는 없는 듯했다.
현암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백호의 모습이 눈에 잡혔다. 그 리고 저만치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큼지막한 모닥불을 둘러싸 고 앉은 세 노승과 쪼그려 앉아 있는 마하의 모습도 보였다. 마하딥은 없어진 팔에 옷을 찢어 만든 듯한 천을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모두・・・・・・ 빠져나왔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나는 도무지 ………….”
백호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블랙 엔젤이 그들을 모두 옮겨 준 것이겠지만, 그런 내용을 백호에게 말할 수 없어 현암은 말꼬리를 돌렸다.
“그런데 여기는 어딜까요?”
“모르겠습니다. 외딴 무인도 같습니다만………….’
“무인도?”
“이미 며칠이 지났습니다. 주변을 좀 돌아보았는데, 여기는 별로 크지 않은 작은 섬이더군요.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도 없 고・・・・・・ . 그래서 연기를 피우고 있습니다만…………….”
“다른 사람들은 괜찮습니까?”
“마하딥 외에는 특별한 부상자가 없습니다. 마하딥도 중상 이지만 잘 견뎌내고 있고요. 그러나 여기는 물도, 식량도 없어 서・・・・・・ 상당히 힘들어질 것 같습니다.”
현암은 몸을 일으켜 일단 월향검을 찾아보았다. 월향검은 자 신의 손목에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청홍검은 보이지 않았다. 현 암은 한숨을 한 번 쉬고는 세 노승 쪽으로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그러자 약간 영어를 할 줄 아는 긴 눈썹의 노승이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이며 말했다.
“아하스 페르츠는?”
“모릅니다. 나는 그를 당할 수 없어서………… 비행기에서 뛰어 내렸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왜 이리로 옮겨진 것이오? 그리고 당신은 또 왜?”
“나중에 설명드리겠습니다.”
“아니, 나는 대강 알고 있소. 적어도 우리가 왜 이리 옮겨졌는 지 말이오. 당신에게 감사드리오.”
그러면서 노승은 현암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합장을 하려 했 다. 현암은 당황하여 노승을 만류하려 했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아니오. 은혜를 입은 것은 분명한 일이니까요. 우리는 당신과 다른 길을 걷는 자들인데도 당신은 우리를 위해 큰 희생을 했소. 불도를 믿는다는 우리가 부끄럽소이다.”
그러면서 노승은 자신들을 처음으로 현암에게 소개했다.
“나는 무색(無色)이라 하고, 이들은 무음(無), 무성(無聲)이 라 하오.”
작달막한 노인은 무성이라 했고, 뚱뚱한 노인은 무음이라 했 다. 눈썹 긴 노승은 그들의 법명을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긁어 써 보여 준 다음 다시 그것을 지웠다. 그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 고 했으면서도 글씨를 쓰는 것이 매우 능숙했다.
“우리 셋은 같은 사형제들이오. 나는 눈이 잘 보이지 않고, 무음은 말을 하지 못하며, 무성은 귀가 잘 들리지 않소. 은사께서는 우리의 그런 단점을 석존의 가르침을 깨우치는 데 보다 가까 이하라는 계시로 알라고 그러한 법명을 지어 주셨다오.”
현암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은사라면…… 혹시 소림의 분이 아니십니까?”
“아니오. 하북(河北) 관음사(寺)에 계신 분이시오. 나는 소림에도 좀 있었소만……………”
현암은 소림사 외에는 잘 알지 못했지만 관음사는 중국 선종 의 고승들 한 분인 조주 스님이 있던 곳으로, 유서가 깊은 곳이었다.
“그런데 당신들은 어째서 용화교에 …………..”
그러자 눈썹 긴 노승은 손가락을 하나 세워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길이 있는 법. 지금 그것을 놓고 논쟁할 필요는 없다고 보오. 그리고 당신은 용화교에 대해 너무도 잘못 알고 있는 듯하오.”
노승은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말을 이었다.
“좌우간 일단 이 섬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소?”
현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이 노승들이 조금 특이 하다고 생각했다. 보통의 승려들이라면 부지불식간에라도 아미타불 같은 불호를 읊조리게 마련이었는데, 이 노승들은 그런 말을 전혀 꺼내지 않았다. 겉모습은 승려들이지만 용화교도의 행 동은 확실히 다른 데가 있는 듯했다.
여하간 현암은 공력이 회복되었는지 살피려고 가만히 힘을 주 어 보았다. 하지만 다 꺼내 쓴 저금통처럼 단전이 텅텅 비어 조 금의 공력도 끌어낼 수가 없었고, 오히려 통증만 느껴졌다. ‘만 하루가 지났다니, 앞으로 엿새 동안 공력은 사용조차 할 수 없구나.’
현암은 막막한 기분에 일단 승희와 연락이라도 취해 보려고 세크메트의 눈을 찾아보았다.
“어!”
현암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크메트의 눈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현암은 몸의 여 기저기를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세크메트의 눈을 찾을 수 없었 다. 현암은 허망한 나머지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하스 페르츠와 옥신각신할 때 떨어뜨린 것일까, 아니면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때 잃어버린 것일까? 이거 큰일이다!’
그때 백호가 다가와 슬며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현암이 세크메트의 눈을 잃어버렸다고 이야기하자 백호도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 노승들 중 무음이라 불리는 벙어리 노승이 천천히 일어 나더니 바닷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목까지 잠길 만큼 물속으 로 들어간 무음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잠겨 있던 양손을 휙 위로 쳐들어 올렸다. 그러자 두 마리의 커다란 물고기가 허공으로 날 아오르더니 백사장에 툭툭 떨어졌다.
그런 식으로 무음은 열 마리의 물고기를 간단히 잡아서 던진 다음 다시 물에서 걸어 나왔다. 노승들 정도의 높은 공력이라면 물고기를 잡는 것쯤은 쉬운 일이겠지만, 현암과 백호는 승려인 무음이 거리낌 없이 물고기를 잡는 것을 보고는 조금 놀랐다. 그러나 무성은 망설임 없이 그 물고기들을 주워서 나뭇가지에 꿴 다음 불에 올려놓았다. 그 광경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백호 가 약간은 거북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이라면 내가 해도 될 텐데…………….”
그 말에 무색이 빙긋이 웃으며 조용히 말했다.
“살생을 하고 육식을 하는 것은 불도에서 금하는 일이고, 용화 교에서도 권하는 바가 아니오. 허나 지금의 처지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 우리는 재미를 위해 살생을 한 것도 아니고, 돌봐야 할 병자도 있으며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지 않소?”
그러는 사이 무성은 마하의 짓이겨진 팔에 약초를 개어 만 든 고약 같은 것을 발라 정성껏 치료해 주었다. 이 노승들은 자 연 속에서 살아가는 일에 박학다식한 것 같았다.
그들은 한데 모여 말없이 물고기를 먹었다. 그러면서 현암은 속으로 이 노승들과 다시 맞설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시간을 보내던 중, 갑자기 무색이 고개를 번쩍 들면서 현암에게 말했다.
“배요.”
“배?”
현암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무색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잠시 후 저만치 수평선 너머에서 조그마한 점이 나타났 고, 현암의 귀에도 어렴풋이 배의 힘찬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상당히 속도가 빠른 쾌속정인 것 같았다.
현암은 반갑기는 했지만 왠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배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그 의심은 더욱 커졌다.
“똑바로 이쪽으로 오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 있는 걸 미리 알고……?”
현암의 말을 듣고 무색이 조용히 대답했다.
“아하스 페르츠일지도 모르오.”
그 말에 현암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무색은 다시 평안한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지금 만나든 안 만나든, 언젠가는 한 번 만날 사람이 아니겠소?”
배는 점차 해안에 가까워졌고 수심이 닿을 수 있는 곳까지 접 근하고는 빙글 돌면서 멈추어 섰다. 그리고 조그마한 보트 한 척 이 내려지더니 몇 명의 사람들이 그것을 타고 해변으로 노를 저 어 왔다. 만약 우연히 온 사람들이라면 근해에 사는 인도인들이 어야 할 텐데, 그들 중 인도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몇 되지 않 았다.
현암뿐 아니라 노승들도 수상하다고 여겼지만, 저들이 없이는 어차피 섬에 갇혀 버릴 판이니 어찌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서슴없이 현암과 노승 일행이 있는 곳으로 미소를 띠 며 다가왔다. 그런데 예감대로, 그들은 다가오면서 가려진 겉옷 속에서 총부리를 내밀었다.
현암은 한숨을 내쉬면서 발밑의 모래를 힘없이 걷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