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4권 16화 – 하르마게돈 10 : 범죄자 장준후
범죄자 장준후
그 시각, 고반다의 아쉬람이 있는 산에 낡아 빠진 트럭 한 대 가 있었다. 트럭의 짐칸에는 낡아 빠진 휘장이 둘러쳐져 있어 안이 보이지 않았지만, 거기에는 짐 대신 사람들이 여러 명 앉 아 있었다.
그들은 준후와 준호, 로파무드와 아라였다. 그리고 트럭 앞 칸에는 바이올렛과 황달지 교수, 그리고 수아를 안은 연희가 타고 있었다. 준후는 산에서 수아와 아라, 준호와 함께 내려온 뒤 수 속 절차를 밟았다. 인도로 가기 위해서였다.
아라는 아버지 최 교수를 따라 해외여행을 몇 번 다녀왔던 참 이라 여권이 있었지만 수아와 준호는 여권이 없었다. 하지만 준 후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그들의 여권을 꺼내어 보여 주었다.
그 여권을 보고서야 준호는 꽤 오래전에 준후가 자신의 신상 에 관한 서류를 부탁하여 가져갔던 것을 기억해 냈다. 벌써 반년 전의 일이었는데, 준후가 그때부터 이날이 오리란 것을 짐작하 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어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준후는 아라에게 비행기 표를 사 달라고 부탁했다. 인 도행 비행기였다. 아라는 아버지인 최 교수가 죽은 후 유산을 물 려받아 대부분의 돈을 친척이 관리하고 있었지만 스스로도 꽤 많은 예금을 지니고 있었다.
준호와 아라는 준후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궁금했 •지만 준후의 눈빛이 너무도 날카로워 겁이 난 나머지 감히 이 야기조차 꺼내지 못했다. 더구나 준후가 한빈 거사를 죽였을지 모른다는 의혹이 그들의 마음에 쌓여서 더더욱 입을 열 수가 없 었다.
이틀 만에 비행기 표와 여권 등이 모두 준비되었다. 그때까지 준후는 꼼짝도 하지 않고 살벌한 눈빛으로 부적 같은 것만 그릴 뿐, 집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막상 인도로 갈 준비 가 되자 준호와 아라는 외국에 나가는 것이 부담스러워졌고, 그 제야 준후에게 자초지종을 물으려 했다. 하지만 그때 준후가 한 말은 단 한마디뿐이었다.
“너희는 내가 말하는 대로 나를 따라야 해. 그럴 수 있겠지?”
하도 단도직입적인 말이라 준호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아라는 잠시 준후를 바라보다가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아는 그저 딴전만 피우고 있을 뿐, 준후의 말을 듣는 것 같지 않았다. 모두의 얼굴을 둘러본 후 준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두 번 말하지 않겠어. 상당히 위험할 수도 있고, 상상도 못한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그래도………… 내 말을 따라야 해. 알았지?”
준후의 말은 부탁이라기보다 명령에 가까웠다. 그런데 준호와 아라가 질문을 하기도 전, 준후가 말을 꺼낸 그 직후부터 그들은 누군가의 추적을 받았다.
추적만 받은 정도가 아니라 어떤 사람들의 습격까지도 받았 다. 그 습격은 준후를 노린 것이었다. 그 사람들은 바로 준후를 잡아가려고 도방에서 파견된 도인들이었다.
그들은 준후에게 한결같이 뭔가를 물으려 했으나 준후는 그들 의 질문에 대꾸하지 않았다. 오히려 준후는 질문이 끝나기도 전 에 무서운 솜씨로 도인들을 쓰러뜨렸다. 도인들이 무엇을 물으려 하는지 준호와 아라는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준후의 편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준후의 다음 행동이 이상했다. 준후는 습격을 받고 있 으니만치 응당 그들을 피하려 하거나 은밀하게 행동해야 하는 데, 그렇지 않았다. 숨거나 몸을 사리는 일이 전혀 없었다. 백주 대낮에 습격을 받으면 사람이 꽤 모인 곳이라 하더라도 술수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대번에 그들을 쓰러뜨리는 데만 전념했다. 준후가 하도 대담무쌍하게 나오자 소문이 날 것이 두려워서인지 도인들이 습격을 꺼리는 듯했다.
그러고 나서 준후는 당당하게 아라 일행을 데리고 공항으로 갔다. 그리고 공항 한구석에서 또 한 번 떠들썩한 싸움을 치렀 다. 이번에는 도인들도 준비를 많이 한 듯, 사람들을 풀어 일반 인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한 다음 준후를 공격했고, 준후도 꽤 힘 에 부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든 준후를 살려서 잡으려 했기 때문에 틈이 많았고, 준후는 항상 수아를 데리고 다녔기 때문에 결정적 인 순간에는 정령력이 작용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거기에 준호와 아라도 준후를 도와 상당한 힘이 되어준 덕에 그들은 마 침내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비행기 안에 이르러 준후는 퍽이나 지친 듯 한마디 말도 없이 곯아떨어져 버렸고, 비행기가 도착할 때까지 깨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준호와 아라는 그 비행기 안에도 추적자들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다만 좁은 비행기 안이라 손을 쓰고 있지 않은 것에 불과했다.
인도에 도착하자 준후는 비로소 인도에 있는 일행에게 연락을 취했다. 인도의 연락처는 준호와 아라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 제가 없었지만, 준후가 왜 도착한 다음에야 연락을 취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준후가 연락을 취했을 때는 박 신부 일행이 떠난 직후였다. 전 화를 받은 연희는 뛸 듯이 기뻐하여 그들을 맞았다. 그 순간까지 도준호는 추적자들이 따라붙을까 봐 주위를 경계했다.
그때 준후가 준호에게 무심히 한마디 던졌다.
“지금은 안 와. 이쪽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들은 인도의 호텔에 도착해 황달지 교수와 바이올렛, 로파 무드를 만났다. 준후는 현암이 실종되었다는 말을 듣고도 놀라 지 않았고, 고반다가 타보트를 내준다고 해서 박 신부 일행이 칼 키파를 만나러 간 것에도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니, 듣기만 할 뿐 아예 말을 하지 않았다. 연희와 단 한 번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이다.
“떠날 준비를 해 두세요. 조금 있으면 일이 생길 거니까요.”
“어딜?””
“좀 지나면 알게 돼요. 전부 떠나는 게 좋을 거예요.”
“지금 현암 씨와 연락이 끊겨서 모두들 걱정하고 있는데, 어떻게 전부…….”
“현암 형은 아무 일 없어요. 분명히 다시 만나게 돼요. 그보다 예전의 그 점토판 말인데………… 해석은 다 되었나요?”
“물론.”
“어떤 내용이었죠?”
연희에게는 번역한 점토판의 내용을 종이에 적어 둔 것이 있었다. 번역해 보니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모두 죽으며 흥한 것은 모두 망하는 법.
인간의 세상도 이와 같으니 없어지는 것도 순간일지라
과거의 홍수가 그러했으며 이후에도 느닷없이 세상은 사라진다.
세상이 사라지는 것도 섭리이지만 우리가 살려고 하는 것도 섭리일터.
있는 힘을 다해 그 시기를 늦추고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록을 남기노라.
볼 눈이 있는 자는 보고, 기억할 수 있는 자는 기억하라.
홍수가 세상을 한 번 망하게 하였지만 같은 일이 두 번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이 끝나려 할 때, 고대의 주술이 셋에 의해 깨어지고
이를 막는 자, 막지 않으려는 자, 동방의 땅에서 큰 싸움이 벌어지리라.
그러나 잊지 말라. 잊지 말고 기억하라.
세상의 위기를 가져오는 자는 아직 배 속에 있으며,
그 어미 백만의 눈과 백만의 손을 가진 여인은 먼 동방의 후손이 몰락한 땅 귀퉁이에서
해가 사라지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노라.
준후가 읽기를 마치자 연희가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어. 신부님은 뭔가 짐작 가시는 데가 있는 듯하지만 말하시진 않고 말야. 넌 짐작이 가니?”
준후가 천천히 대답했다.
“나도 잘 모르겠군요. 다만 이 내용은 징벌자의 탄생을 암시하 는 것이 분명한 것 같아요. 그런데 해가 사라진다는 건・・・・・・ ” “그것만은 우리도 의견이 일치했어. 일식을 의미하는 게 분명 해.”
“그렇다면 날짜가 정해진 거라 할 수 있군요.”
“맞아. 이제 일식까지는…………… 고작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 았어. 그리고 신부님은 이 내용이 이단 심판소에 의해 온 세상의 주술사나 능력자들에게 알려진다고 하셨어. 정말 초조해. 더구 나 동방의 땅이라는 건…………… 메소포타미아에 비해 여기는 동쪽이라 할 수 있어. 혹시 여기서 큰 싸움이 벌어지는 건 아닐까? 준후야 솔직히 나는 무서워.”
“글쎄요. 꼭 여기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죠.”
“혹시 『해동감결』에 이와 비슷한 어떤 말이 씌어 있지 않았니? 좀 일러 줄 순 없겠니?”
해동감 이야기는 그만두세요. 이미 다 말했는걸요.”
그 말만 남기고 준후는 일어나서 방으로 들어가 문을 꼭 걸어 잠그더니 밖으로 일절 나오지 않았다. 연희는 준호, 아라와도 이 야기를 나누었지만, 뭐가 뭔지 전혀 모르는 것은 준호나 아라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준후가 이렇듯 확신에 찬 행동을 하는 것은 『해동감결에서 뭔가를 알아냈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 해볼 따름이었다.
준후의 태도는 마치 모든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고, 너무도 자신만만했다. 그러면서도 접근하기 힘든, 눈에 보이지 않 는 얼음의 벽 같은 것이 준후의 주위에 둘러쳐져 있는 것 같았다. 연희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잠자코 있었는데, 얼마 지나자 준후 는 자신도 그곳에 가야만 한다고 말했다. 이반 교수는 원래 꼼꼼 한 성격이라, 고반다를 찾아가면서도 행선지를 계속 알려 왔던 까닭에 그리로 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갈 필요가 있느냐고 묻자 준후는 반드시 모두 가야만 한다고 잘라 말했다. 고반다가 미워서 안달이 나 있던 로파무드도 대번에 좋다고 우겨서 결국 그들은 모두 떠나기로 했다. 모두 떠나는 편이 차라리 안전하다고 주장한 사람은 바이올렛이었다.
“만약 고반다이 우릴 배신하기로 했다면 우린 적지에 있는 거나 다름없죠. 이런 상황에서 흩어져 있는 것은 도움이 안 돼 요. 미스터 현암에게서 연락이 온다는 보장도 없고, 준후 군도 와 있으니 모두 힘을 합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 합니다.”
“하지만 신부님은 우리보고 기다리라고…………….”
“너무 위험하니까 우리를 남겨 둔 거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준 후군과 아이들도 왔으니, 겁낼 것 없어요.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고요. 우리는 복병이 되는 셈이지요. 근사하지 않아요?”
사실 박 신부가 그들을 떼어 놓은 이유는 연희 때문이었다. 지 난번에도 카르나는 연희가 라미드 우프닉스라는 사실을 알릴 뻔 했으니 지금도 그러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바이올 렛은 그 사실을 몰랐으므로 따라나서겠다고 강하게 주장했던 것 이다.
그들은 로파무드의 도움으로 시타 교수에게 연락해 급히 트럭 한 대를 빌렸다. 시타 교수는 지난번 로파드에게 신세를 진 후 그녀를 가족처럼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연유도 묻지 않고 두말 없이 저금을 탈탈 털어 차를 사주었다.
그러나 시타 교수는 동행하지 않았다. 황 교수를 시타 교수에 게 맡길 수도 있었지만 황 교수는 점토판 때문에 모든 일이 벌어진 것이니 자신도 책임이 있고, 타보트를 한번 구경해 보겠다고 고집을 부려 동행하게 되었다. 이반 교수의 설명만으로도 길을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곳은 오지라 나 있는 길이 그리 복잡하지 않았던 덕분이었다.
어쨌든 그런 우여곡절을 겪은 일행은 근방에서 지도를 구하 여 확인해 보고 대강의 위치 파악을 하자마자 달려갔다. 지금 현 암의 소식이 끊기고 박 신부 측도 문제가 생긴 듯 걱정되는 상황 이라 연희나 바이올렛 등은 준후를 마음 든든히 여기고 있을 뿐, 준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신경조차 쓰지 못했다.
하지만 모든 일을 대강 지켜본 준호와 아라는 달랐다.
“사부, 내 진정으로, 한 가지만 물어볼게.”
풀죽은 표정으로 차 뒤 칸에 앉아 있던 준호가 준후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준후는 좋다 싫다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준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준후의 눈빛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슬픈 기색을 띠고 있는 것 같아 준호는 잠시 흠칫했지만 이내 용기를 내었다.
이 기회를 잡으려고 준호는 일부러 차 뒷자리에 타기를 자청 하고 연희와 바이올렛, 황 교수 등을 앞자리로 몰아넣었다. 물론 준호가 용기를 내기까지는 아라가 뒤에서 준호에게 남몰래 가한 협박과 잔소리도 많은 역할을 했다.
지금 이 자리라면 로파무드밖에 없었고, 그녀는 한국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할 테니까 걱정될 일이 없었다. 로파무드는 상냥 하게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애 당초 말이 통하지 않았고 분위기도 어딘지 모르게 묘하다는 것 을 느끼고는 간디바를 옆자리에 내려놓고 요가 자세를 취한 채 명상에 들어가 있었다.
“사부, 사람들이 왜 사부를 그렇게 쫓고 있는지 알아? 아니, 아 니……. 물론 알겠지. 알고 있을 테지만…………… 내 말은 그러니 까………….”
준호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러자 준후 가 간단하게 딱 잘라 말했다.
“물론 알아.”
“사부…………. 난 사부를 믿어. 그런데 도인들은 사부를………… 사 부를 의심하고 있어…………. 그러니까…………….”
그 순간 준후는 약간 슬픈 듯하게 들리는 비웃음 소리를 내더 니 준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물었다.
“왜 나를 의심하는거지?”
“그………… 그러니까…………… 그…………… 한빈 거사님이시던가? 그 래…………. 사부가 그분을 모시고 있었고………… 그분이 돌아가신 주변의 자취가 마치 ・・・ 오행술을 큰 규모로 펼친 것 같은 흔적이 남아서…………….”
준호는 준후와 눈이 마주치자 더 횡설수설하면서 말을 잘 잇지 못했다. 보다 못한 아라가 답답한 나머지 준호의 허벅지를 있는 힘껏 꼬집어 버렸다. 준호는 차마 비명을 지르지는 못했지만 너무도 아파 몸을 비비 꼬고 엉덩이를 들썩이며 자리에서 일어 나다시피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준후가 맥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들이 맞아. 그건 내가 술수를 펼친 자취야.”
준호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아픈 것조차 잊고 다시 비명을 지 를 뻔했다. 그 말에 그때까지 주저주저하며 차마 준후에게 말을 하지 못하던 아라가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질렀다.
“그럼 ………! 오빠가 그 노인을………!”
준후는 천천히 놀라움에 부릅떠진 준호의 눈과 아라의 놀란눈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희는…………… 내가 그랬으리라 믿니?”
준후의 말이 떨어지자 준호와 아라는 거의 동시에 떠들어 댔다.
“아………… 아니지? 그렇지, 사부? 사부 같은 의인(人)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아냐! 안 그래! 절대 안 그래! 그렇지? 그렇지, 응?”
앞다투어 확인하려는 준호와 아라의 말에 준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솔직하게 말할게. 난 그분을 해치지 않았어. 됐니?”
그 말에 준호와 아라는 둘 다 기쁜 표정으로 변해 입이 헤벌어졌다. 그러다가 준호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나는 듯 말했다.
“그런데 사부는 왜 그랬어?”
“뭘 말야?”
“도인들이 오해하고 있잖아. 오해를 풀어야지.”
그에 아라도 맞장구를 쳤다.
“맞아! 의심받는거 기분 나쁘지 않아, 응?”
그러나 준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제 긴장이 풀렸는지 준호가 수다스럽게 말했다.
“이봐, 사부. 혹시 그 사람들이 믿어 주지 않을까 봐 그러는 거 야? 사실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건 나도 알아. 그래, 난 사부를 믿 어. 오행술 자국이 남은 건 무슨 이유가 있는 거겠지. 하지만 사 부가 그분을 안 해쳤으면 그만 아니겠어? 그 도인들 중에는 남의 말이 정말인지 거짓인지 판별하는 사람도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 도 될 거야. 이렇게 무턱대고 도망치는 건 아무래도 현명한 일이 라고 볼 수 없을 것 같아. 그러니까…?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준후가 돌연 준호를 향해 눈을 부 릅떠 보였다. 그 기세가 무서워 준호는 입을 딱 다물었다. 그에 준후는 눈빛을 풀었고, 그러다가 천천히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조용히 해. 다 이유가 있는거니까.”
“이유? 누명을 쓰는 데도 이유가 있어?”
옆에서 아라가 대신 나서자 준후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내 누명이 한두 가진가, 뭐…………….”
준후는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 고는 무심코 혼잣말로 무어라 중얼거렸는데, 작은 소리였지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아라는 그 말을 똑똑히 들었다. 그리고 그때 슬쩍 본 준후의 눈동자가 말할 수 없을 만큼 슬픈 빛을 띠 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래야만 했는걸……. 그래야만…………….”
아라는 그러잖아도 준후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여기던 참이라 준후와 더 이야기를 해 보려고 했다. 그때 로파무드가 눈을 번쩍 뜨더니 한쪽을 가리키며 인도어인 듯,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커 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놀란 아라와 준호 등도 그쪽을 바라보았는데, 눈앞 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로파무드가 가리킨 쪽에 는 상당히 높은 산이 있었는데, 그 산 전체가 무엇인가에 둘러싸 여 있었다. 안개나 구름과 흡사했지만 그 빛은 검고도 붉었다.
“저, 저게 뭐야?”
아라가 깜짝 놀라 외치자 준호가 멍하니 되받았다.
“안, 안개 아냐?”
“저런 색깔의 안개가 어디 있어?”
삽시간에 산 전체가 거대한 돔에 씐 듯이 반구형(半球形)의 안개에 뒤덮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마치 누군가가 만들어 낸 것처럼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더니 그 주변을 덮었고, 그 붉은 반구조차 보이지 않게 되고 말았다. 그 붉은 반구가 생기는 광경을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산이 그저 짙은 구름에 뒤 덮인 것처럼 여겼을 것이다.
“저게………… 저게 뭐야, 사부?”
준호가 떠듬거리면서 준후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 준후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준후는 잠시 입술을 깨물고 무 엇인가를 생각하다가, 트럭의 뒤 창문을 두들겨 연희를 불렀다. 연희 역시 창백한 얼굴로 준후를 돌아보며 말했다.
“네 생각이 맞았어. 이반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무언지 대단히 위험한 일이 벌어진 것 같아. 비명 소리와 총성도 들리 고…….”
“전화는요?”
“그냥 지지직거리다가 끊어졌어. 급한 것 같아.”
그 말에 준후는 입술을 깨물면서 산 쪽을 다시 바라보았다. 방 금산을 뒤덮었던 반구의 형체는 어느새 사라져 버렸지만, 그곳 에 강력한 결계가 쳐져 있다는 것을 준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준후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들어갈 수 있을지가 문제구나…………. 시간이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