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4권 19화 – 하르마게돈 13 : 겹친 음모
겹친 음모
“성당 기사단, 이단 심판소, 그리고 우리들은 모두 합세하기로 조약을 맺었어요. 물론 임시 조약이지만요. 같이 위험에 빠졌으 니 당분간 조약은 더더욱 확실하겠군요.”
랍비 안나스가벙글거리며 말하자 현암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들은 유대교도요. 성당 기사단과 이단 심판소가 밀약을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당신들과 어떻게 손을…….”
“이건 정치적인 문제예요. 당신들도・・・・・・ 음, 그렇지. 당신, 한 국 사람이지요? 당신들도 북한 사람들과 협상을 하지 않나요? 서로 전쟁을 할 만큼 철천지원수면서도 말이에요.”
현암은 할 말이 없었다. 안나스가 다시 말했다.
“당신이 협조해 주어야 이것을 돌파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를 돕겠어요?”
그에 현암은 주저하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나는 솔직히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합니다. 나는 절대 이것을 돌파할 수 없소.”
안나스가 웃었다.
“나도 알아요.”
“안다고? 그럼 나에게서 뭘 바라는 거요?”
“당신은 비록 이 막을 깰 힘은 없지만, 당신이 협력해 주어야 우리가 이 막을 돌파할 수 있어요.”
현암이 코웃음을 치며 쏘아붙였다.
“인간도 아닌 것의 도움을 받아서 뭘 하려고?”
안나스가 여유 있게 웃으며 되받았다.
“당신에게 협박이 소용없다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당신은 내 말을 들을 거예요.”
현암은 안나스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듣지 않을 확률이 높은 것 같소?” 그 말에 안나스가 다시 웃었다.
“우리를 미워하는군요. 그런가요?”
“굳이 부인하진 않겠소.”
“그렇다면 저 용병들도 미워하나요? 죽이고 싶은가요? 기회만 닿는다면 모조리 죽여 버리겠군요?”
현암은 대답하지 않았다. 용병들은 밉다기보다 불쌍해 보였 고, 물론 현암은 그들을 죽일 수 없었다. 지금은 그럴 능력도 못 되지만,
안나스가 말했다.
“그러면 이단 심판소의 가디언들과 프란체스코 주교는 어떻 죠? 그들이 죽는 것도 바라나요? 성당 기사단의 마하딥과 다른 사람들은? 용화교의 세 노승은? 당신 친구 백호는?”
“협박하는 거요?”
현암이 벌컥 화를 내자 안나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당신에게 협박이 통하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죠.”
안나스는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착한 사람이에요. 그들이 죽는 것을 그냥 보고 있지는 않을 거예요. 물론 우리가 그들을 놓고 협박하는 건 아니 에요. 다만 여기 있으면 그들도 칼키파 손에 다 죽어요. 알겠어요?”
현암은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다시 한번 억지를 부렸다.
“당신들 능력이 뛰어난 것 같은데, 직접 나서서 칼키파를 다 죽이지 그러시오?”
안나스가 순진해 보이는 눈을 놀란 듯이 크게 뜨며 물었다.
“당신, 정말 그러기를 바라나요? 당신은 안 그럴 거라고 생각 했는데?”
그 말을 듣고 현암은 속으로 외쳤다.
‘졌다.’
현암이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안나스는 이내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요. 당신은 착하거든요. 자신과 상관없는 남이 라고 해도 수없이 죽는 모습을 두고 볼 수는 없겠지요. 잘만 해 주면 내가 선물을 줄 수도 있어요.”
현암은 정말, 평생 만났던 모든 적수 중에서 이자가 가장 상대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마스터도 강했지만 이자처럼 자신의 속마음을 전혀 내보이지 않는 자는 아니었다. 게다가 이자에게 는 이상하게도 증오스러우면서도 직접 손을 대기가 꺼려지는 무 엇인가가 있었다. 현암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다 나왔다.
“뼈다귀를 던져 주는 거요?”
“선물이라고 해두죠.”
“필요 없소. 내가 할 일이나 말해 보시오. 한 가지 분명히 해 둡시다. 나는 아직 승낙한다고 말하지 않았소.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면 깨끗이 거절하겠소.”
“당신이 할 수 없는 일을 시키지는 않아요. 사실 우리도 일에 차질이 생기지 않았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거예요.”
“무슨 차질이오?”
“당신이 알 필요는 없어요. 자, 그러면 당신이 할 일을 알려 주 겠어요. 아마도 당신이 좋아할 만한 일일 거예요.”
“좋아할 만한 일?”
“당신은 지금 당장 친구들과 함께 여기서 나가, 성당 기사단과 이단심판소 사람들을 구하세요. 그러면 되는 거예요.”
현암으로서는 의외의 말이었다.
“나가라고요?”
“그래요. 지금 그들은 위험에 빠져 있고, 우리는 그들을 도울 입장이 못 돼요. 그건 조약 위반이기 때문이죠.”
“무슨 말이오?”
“우리는 서로 힘을 합해 공동의 적을 치기로 했지만, 서로가 믿는 바가 다르니만큼 다른 힘에게 도움 받는 걸 원치 않거든요. 그러니 그들을 도와주면 되는 거예요.”
“정말 그것뿐이오?”
“그래요.”
현암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최소한 고반다를 잡아 오라 든지, 칼키파의 수뇌부를 때려 부수라든지 하는 말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현암은 신중하려고 애썼다.
“그렇다고 주술 막을 돌파할 길이 생기는 것은 아니잖소?”
“그러다 보면 생길 수도 있죠.’
“믿을 수가 없소.”
현암이 고개를 젓자 안나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솔직히, 당신은 지금 아무 힘이 없죠? 더구나 사람을 해치지도 못하니,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잖아요.”
“그렇소. 그러니 나는 칼키파 사람들도 해칠 수 없을 거요.”
“그런 것을 바라지는 않아요. 다만 나는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만 바라는 거예요.”
“사람도 아닌 자들에게 그리 신경을 써 준다는 것이 믿기 어렵군요.”
현암이 쏘아붙였지만 안나스는 고개를 저었다.
“모든 생명은 소중한 거예요. 당신은 지나가다가 뭔가가 보이고 그것이 사람만 아니면, 모두 죽이고 싶어 하나요?”
현암은 할 말을 잃었다. 현암은 논리적인 사람이었고 말도 꽤 잘했지만, 안나스에게는 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현암은 안나스 가 뭔가 흑심을 품고 있다고 믿었다. 어떻게든 속마음을 알아내 고 싶어 질 것이 뻔한 말싸움을 계속하는 것뿐이었다.
“아무 힘도 없는 내가 그 와중에 죽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 오?”
“그러니까 친구들도 같이 보내 드리는 거죠.”
“그렇다면 당신 말은, 내가 이단 심판소와 성당 기사단 사람들 을 구하면서, 여기서 나갈 방법도 같이 찾아보라는 뜻이오?” “할 수 있다면요. 기대는 별로 하지 않지만.”
“만약 내가 방법을 찾으면 그 뒤를 따라갈 거란 말처럼 들리는 군요.”
“당신이 방법을 찾았는데도 여기 남아 있어야 하나요?”
현암은 말문이 막혔으나 이내 대꾸했다.
“내가 방법을 찾아낸 다음, 당신들에게만 알려 주지 않고 당신들을 협박하면 어쩔 거요?”
그러자 안나스가 슬픈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너무 자만심이 강하군요. 그러기는 어려울 거예요. 하지만 만약 그런 상황까지 간다 해도…………….”
안나스는 아주 친한 친구를 대하는 듯이 현암에게 다가와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당신은 그러지 않을 거예요. 나는 당신에게 선물까지 해 줄 수 있는 좋은 사람이니까.”
“선물?”
순간 안나스는 언제 꺼냈는지 월향검을 살짝 들어 올려 보였다.
“이것 말이에요.”
월향검이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간 것을 보자 현암은 순식간에 안색이 변하더니 안나스의 손목을 콱 잡으면서 월향검을 낚아챘 다. 의외로 안나스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월향검을 내주었다.
현암은 재빨리 월향검을 살펴보았다. 월향검은 별 이상이 없 어 보였지만 기이하게도 전혀 움직임이 없었고 힘을 쓰지 못하 는 것 같았다. 아마 이 내부의 주술 도형들이 월향검마저도 힘을 못쓰게 만들어 버린 듯했다.
“당신은 너무 급하군요. 당신에게 만약 힘이 있었으면 내 손목 이 부러졌을지도 몰라요.”
이렇게 말하면서 안나스는 손목을 주물렀다. 현암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내 것을 빼앗았다가 돌려주면서 그게 선물이라고?”
으르렁거리는 현암을 보며 안나스가 되받았다.
“저런 저런 나를 도둑으로 몰지 말아요. 십계명에는 분명 도 둑질을 하지 말라고 되어 있는데, 내가 어찌 당신의 물건을 훔치 겠어요? 나는 단지 살펴보려고 한 것뿐이에요.”
그러면서 이내 말을 이었다.
“내가 줄 선물은 그 검이 아니에요. 그 검에는 영혼이 들어 있 지요? 나는 그것을 빼낼 수 있는 방법을 알거든요. 그게 내 선물이지요.”
그 말을 듣자 현암은 사방이 노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검은 편지 결사건 칼키파건 타보트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텅 빈 공간 같은 멍한 충격만이 현암의 온몸을 에 워쌌을 뿐이다.
카르나가 급작스레 기습을 가했지만, 박 신부는 이미 그에 대 해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다. 박 신부의 오라 막이 크게 부풀어 오르면서 네 사람을 감싸자 카르나의 공격은 오라를 뚫지 못한 채 튕겨 나 버렸다. 박 신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카 르나에게 말했다.
“왜 굳이 싸우려 하시오?”
그러자 카르나가 이를 갈면서 외쳤다. 항상 벙글거리며 웃고있던 카르나의 인상이 참혹할 정도로 구겨져 있었다.
“당신・・・・・・ 당신은…………….”
박 신부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들을 전멸시켜야만 속이 시원하겠소?”
그 말에 카르나가 외쳤다.
“전멸당하는 건 우리요!”
“나는 믿을 수 없소.”
박신부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몇 달 전부터 주술 막을 준비해 온 당신들이 그렇게 간단하게 당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소. 당신들은 모두를 함정에 빠뜨렸 고, 나는 그들이 죽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소.”
“무슨 생각이세요?”
승희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속삭이자 박 신부는 윌리엄스 신부와 이반 교수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천천히 영어로 말했다.
“저들은 분명 모두를 전멸시킬 생각이야. 그러니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않겠니?”
“그렇다면요?”
“쳐들어온 사람들도 보통은 아니니, 이 도형을 보여 준다면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거다.”
그러자 카르나가 외쳤다.
“그건 우리 모두를 죽이는 길이오!”
박신부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들은 타보트 때문에 온 것이 아니오? 타보트는 우리가 가 지고 가겠소. 그러면 당신들이 공격받을 이유도 없지 않겠소?”
“타보트를 지니고 간다면 당신들도 살아남지 못할걸?”
“우리가 그들을 구해 주었는데도요?”
승희가 외치자 박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승희야, 하지만 우리가 대비를 한다면 직접 접촉하지 않고도 이 도형을 전하고 타보트도 가지고 나갈 수 있을 거야.”
그 말에 승희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러면 ………… 신부님은 연극을 하신 건가요?”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정신을 잃었던 건 사실이다만, 제정신이 들고 보니 우리는 완전히 갇혀 있었고 누군가가 나를 감시하는 것 같더구나. 그래서 일단은 눈을 감고 있었지.”
“왜요? 만약 공격당했으면 어쩌려고요?”
“아니, 공격하려면 내가 정신을 잃은 틈에 했겠지.”
“그렇군요…… 그래서 ………… 빠져나갈 방법을 알아내려고 그 러셨던 건가요?”
“카르나가 이렇게 쉽게 방법을 알려 줄 줄은 몰랐다. 내 연기 가 쓸만했던 모양이지?”
“그래서 카르나가 신부님이 제정신이 아닌 게 다행이라고 말 했군요. 신부님이 제정신이셨으면 어떻게든 여기를 빠져나가는 방법을 알려고 했을 테니까.”
승희는 유쾌한 듯이 짐짓 큰 소리로 떠들어 댔다. 카르나의 얼 굴이 우거지상이 된 것이 고소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흘끗 고반다도 쳐다보았지만 고반다는 여전히 구석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 사람은 왜 꼼짝도 안 하죠?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승희가 중얼거리는데 윌리엄스 신부가 고개를 끄덕이며 박 신부에게 말했다.
“그랬군요. 마땅히 사람의 목숨을 일단 구하고 봐야죠. 아멘. 그럼 빨리 나갑시다.”
그때 이반 교수가 찌푸린 얼굴로 뭔가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난 아직도 믿을 수 없소.”
“뭘요?”
승희가 묻자 이반 교수는 바닥에 놓여진 타보트 상자를 가리켰다.
“이게 진짜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소?”
그러자 박신부가 나섰다.
“가짜는 아닐 겁니다.”
“어떻게 아십니까? 저것은 아무도 열어 볼 수 없는 것이니, 그 누구도 확인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 박 신부는 카르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도 여유있게 말했다.
“가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속더라도 절대 속지 않을 사람이 있으니까요.”
“그게 누구죠?”
“아하스 페르츠. 아마 틀림없을 겁니다.”
“정말・・・・・・ 당신, 정말 그럴 수 있습니까?”
현암은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과거 색귀와의 싸움 때 색귀의 마지막 저주로 월향이 봉인된 이후 그 누구도 그 봉인을 풀 수 있다는 사람은 없었다. 한빈 거사 같은 대도인조차 아무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랍비 안나스가 그 방법을 안다 는 것은 정말로 뜻밖이었다.
“아니 ・・・・・・ 그럴 리가 없소. 당신은 지금 거짓말을 하는 거요.”
현암은 잠시 후 냉정을 되찾으려 애쓰면서 말했다. 그러자 안 나스가 웃어 보였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그건 십계명에 명명백백하게…….”
“아니오. 이건 동방에서 걸린 주술이오. 그걸 당신이 알아본다는 것은…….”
현암이 따졌지만 안나스는 여전히 태연했다.
“그래요? 그러면 당신과 저 노승들은 동방에서 온 사람들인데도 왜 내 마법진 안에서 힘을 모두 잃었지요?”
현암은 말문이 막혔다. 안나스는 빙글빙글 웃으며 현암과 월 향검을 번갈아 보면서 말을 이었다.
“나는 이 칼에 영혼이 어떤 방법으로 봉인되었는지는 알지 못 해요. 하지만 세상의 모든 주술이나 술법은 모두 어느 정도 공통 된 점을 지니고 있는 법이에요. 백마법사들이 말하는 사대 원소 지, 수, 화, 풍은 도교에서 말하는 오행 화, 수, 목, 금, 토와 똑같 지는 않아요. 하지만 어느 정도는 흡사하지 않은가요?
중세 마녀들이 사용했던 저주 수법이나 부두교의 저주 수법 또한 놀랄 만큼 유사하죠. 아니, 인형을 빌려 저주를 거는 방법 은 동양에도 각 나라마다 있고, 인디언들도 그런 주술을 알아요. 나라마다. 문화마다 주술의 종류나 사용법은 천차만별이지만 모 든 주술들은 거의 비슷한 힘의 원천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 지요.”
현암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현암도 동감 하는 바였다. 안나스는 현암에게 미소를 지으며 같이 고개를 끄 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봉인이 어떤 것인지 알지는 못해도, 그 봉인을 풀 수도 있을 거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나는 지금 껏 수십 년 동안 주술과 저주, 마법과 초능력에 대해 공부해 왔 어요. 그중에서도 주술을 무력화시키거나 깃들여 있는 주술력을 깨뜨리는 종류를 전문적으로 연구했죠.”
“그러면 공격적인 주술은 쓰지 않는단 말이오?”
“그건 내 전문이 아니에요.”
그 말을 듣고 현암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공격 전문은 랍비 가야바가 아닐까? 이자의 능력이 이토록 대단하니, 랍비 가야바도 반드시 대단할 것이다. 조심해 야겠다.’
안나스는 계속 말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 내가 전혀 손대지 못하는 주술 이 있다고는 믿지 않아요. 이 칼도 그중 한 가지지요. 물론 대단 히 강력한 속박이 이 칼을 얽어매고 있지만, 나는 이 칼의 속박 을 풀 수 있을 것 같군요. 장담할 수 있어요.”
“정말 장담할 수 있소?”
“그래요. 당신, 나를 못 믿는 모양이군요. 생각해 봐요. 용화교 의 세 노승은 주술사도 아니고 당신들이 이야기하는, 그………… 그 렇지. 기를 쌓은 사람이지만 나는 그들조차 무력화시킬 수 있어 요. 그렇지요?”
현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야. 스스로의 힘으로 공력을 쌓은 사 람조차 꼼짝 못하게 하다니. 내가 공력을 쓸 수 없는 입장이었기 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나도 꼼짝 못했을 거다. 아하스 페르츠도 무섭지만 이자들도 만만치 않구나.’
“그러니 나는 이 봉인을 해제할 방법도 알 수 있는 거예요. 무 슨 주술이 어떻게 쓰였는가는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이 칼에 씐 힘이 어떤 것인지, 그것뿐이니까요. 이제는 믿겠어요?”
하는 수 없이 현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허전하구나. 월향이 없어진다면 ・・・・・・ 무척 아쉽겠지. 월 향검도 이제 더 이상 무기로 사용하지 못할 테고………….. 하지만 월향을 저렇게 가두어 둘 수는 없다.’
현암은 자신도 모르게 월향검을 손에 꽉 쥐었다. 월향검은 금 제를 당했는지, 아무런 기척도 전해 오지 않았지만 낯익은 촉감 은 마치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 듯했다.
나는 가고 싶지 않아요.
월향검은 그 촉감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현암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어. 이건 순리에 따르는 거야. 자유로워져야 해. 반드시 …………….”
자유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돌아가야 해요. 내 은원은 이 미 해결되었으니 더 이상 이 세상에는 있을 수 없어요.
월향검이 다시 속삭이는 것 같았다. 순간 현암은 감정이 복받 쳐 올랐지만 애써 고개를 지었다.
‘안 돼. 그렇다고 모든 게 끝나는 것도 아니잖아. 언젠가는 나도 죽을 거야. 그러니 ………….’
현암이 월향검을 반드시 해방시켜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은 월향에 대한 배려 때문만은 아니었다. 현암은 인간이니, 싸우 다가 죽든 늙어 죽든 언젠가는 수명을 다할 것이다.
현암이 죽고 나면 월향검은 더 이상 아무도 사용할 수 없게 될 테고, 아무도 월향검과 대화를 한다거나 마음이 통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월향은 영원히 칼 안에 갇힌 채로 있어야 한다. 그래서 현암은 월향을 반드시 해방시켜 주어야만 자신이 죽고 난 후에 다시 만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봤다. 그러려면 어느 정 도의 기다림은 불가피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현암의 결정이었 다. 그렇게 된다면…………. 만약 그날이 다시 온다면……………. 하지만 현암의 마음속에는 애써 잊으려 했던 사실이 앙금처럼 다시 떠 올랐다. 바로 승희의 문제였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무슨 생각을 하시죠?”
랍비 안나스의 말에 현암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물론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랍비 안나스가 알 리는 없었지만 현암은 자 신도 모르게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랍비 안나스는 현암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쨌거나 당신이 도와주길 바라요. 당신더러 사람을 해치라 는 것도 아니고, 고반다를 잡아 오라는 것도 아니에요. 다만 당신이 우리 일에 방해하지 말아 주기를 바라는 거고, 조금 더 바란다면 우리 편을 도와주기를 바라는 정도지요. 당신, 그러면 응낙하겠어요?”
현암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랍비 안나스는 분명 위험한 자이고, 절대로 그의 의도에 도움이 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거부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아무리 궁리해 보아도 그렇게 나쁜 짓을 시킨 것 같지 는 않기에 현암이 응낙한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좋지 않은 의 도가 엿보였다면, 현암은 죽으면 죽었지 협조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자 안나스가 기쁜 듯이 말했다.
“좋아요. 그럼 내가 먼저 당신에게 상황을 알려 주죠.”
안나스는 현재의 상황을 소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현암은 말 을 들으면서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안나스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칼키파에 대한 공격은 세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어요. 하나 는 우리이고, 또 하나는 프란체스코 주교와 가디언들이 주축이 된 이단심판소 사람들, 마지막 하나는 성당 기사단 사람들이죠. 사실 우리가 가장 주축에 있어요. 우리 앞에 있는 저 건물에 아 마도 고반다가 있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절대 섣불리 쳐들어갈 수 없죠. 아니, 쳐들어가기는커녕 우리가 어떻게든 도망쳐야 할 판이죠. 좌우간 저쪽도 경솔하게 치고 나오지는 못할 거예요. 그 정도 준비는 하고 있으니까요. 내가 보기에 당신과 당신 친구들이 겁낼 만한 상 대는 고반다뿐일 텐데, 고반다는 우리가 잘 지키고 있을 테니 안 심해도 될 거예요.”
“그러면 이단 심판소와 성당 기사단 중 어느 편을 도와야 하 오?”
“생각해 보죠. 흠…………… 이단 심판소 측은 사람 수는 적지만 세 븐 가디언이 있어요. 그들은 하나하나가 상당한 사람들이죠. 특 히 아녜스 수녀는 대단해요. 아마 칼키파 사람들도 쉽게 건드릴 수 없을 거예요.”
“그러면 성당 기사단을 도우라는 거요?”
“그게 좋겠어요. 성당 기사단원들은 장미 십자회나 프리메이 슨 비밀 결사원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그 수가 아주 많아요. 하지 만나이트 템플러들이 거의 전멸해 버려 이렇다 할 능력자가 없 는 상황이죠. 그러니 희생자가 많이 생길지도 몰라요. 그쪽으로 가시는 것이 좋겠군요.”
“그렇겠군요. 그런데 혹시…………… 아하스 페르츠는?”
현암의 질문에 질문에 안나스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아하스 페르츠가 이곳에 와 있나요?”
“그건 모릅니다.”
현암도 아하스 페르츠가 여기 왔는지의 여부를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하스 페르츠는 비행기 안에서의 마지막 대화 때, 분명 고반다를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자의 성격으로 미루어 반드시 이곳에 와 있거나 올 것 같았다. 그 사 실을 아는 사람은 현암 혼자였다. 하지만 현암은 안나스를 진정 으로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안나스는 아까 내가 어떤 방법으로 아하스 페르츠에게서 도망 쳤는지 물었다. 아하스 페르츠의 행방을 모르는 게 분명해. 성당 기사단이 와 있다고 하지만, 그건 해밀튼의 부하들이지. 아하스 페르츠의 부하들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니 모르는 게 당연하 지. 만약 아하스 페르츠가 나타난다면 필경 고반다를 상대하려 할 테니, 이자들은 순순히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칼키파를 급습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 말을 하지 않는 편이 좋겠구나.’
“그가 와 있다면…. 일이 좀 이상하게 돌아갈지도…………..” 안나스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다시 현암에게 고개를 돌 렸다.
“결정을 내렸으면 빨리 행동하세요. 그리고 만약 이곳을 벗어 날 방법을 알게 된다면 꼭 알려 주기를 바라요. 그러면 나도 보 답을 할 테니까요.”
안나스의 말을 들으며 현암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월향검 을 조심스럽게 꽂아 넣은 다음 말했다.
“여기서 나가면 노승들의 공력도 회복되고, 이 칼도 다시 움직일수 있소?”
“물론이죠.”
“좋소. 그럼 한 가지만 더 말하겠소. 지금은 당신을 돕겠지만, 이후에 만날 때는 결코 오늘같이 차분히 끝나지는 않을 거요. 나 는 당신의 생각에 조금도 찬동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안나스는 태연히 웃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겠죠.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어요. 피차 입장이 다르니까 각자 믿는 바를 추구해야겠지요. 그러면 어서 가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