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4권 2화 – 용(龍)과 봉(鳳) 2 : 검은 편지 결사
검은 편지 결사
문을 두들기는 자들은 분명 암살자들이었다. 승희는 투시력으로 문밖에 있는 자들의 정체를 대강 짚어 볼 수 있었다. 일단 바 로 문 앞에 서 있는 세 명은 아까 공항에서 만났던 자들이었다. 분명히 추적을 따돌렸는데 그들이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따라온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더구나 승희의 능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는 추적당한 기미를 전혀 느낄 수 없었는데…..
“정말 끈질긴 자들이야. 그런데 어떻게 출입문으로 들어올 생 각을 한 거지?”
퇴마사들의 아지트는 준후가 만든 결계와 진법으로 수호되고 있었다. 악령이 침범하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보통 사람들이 침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좋았다.
그런데 단 한 곳, 진법의 영향을 받지 않고 들어올 수 있는 곳 이 있었는데, 그곳은 출입문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퇴마사들 도 사람인지라 다른 사람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좋지 못한 목적을 품은 자가 설마 출입문을 통해 당당히 들어 올까 싶어 출입문만은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들어올 수 있도록 해 놓았는데, 이자들은 마치 그것을 훤히 아는 듯 출입문을 두들 겨 대고 있지 않은가?
승희가 좀 더 정신을 집중해 보니, 그들은 문을 열어 달라고 두드리는 것이 아닌 듯싶었다. 문의 빗장을 부수려고 연장으로 두들기는 소리였다.
‘이것들이……………? 맛 좀 봐라!’
사태가 파악되자 승희는 즉시 염력을 발휘해 문 앞에 있는 세 사람의 몸을 찔러 나갔다. 예상대로 그자들은 무서운 암살자들 이었지만, 역시 보통 사람이라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염력이 먹혀들었다. 그들은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면서 데굴데굴 굴렀 다.
승희는 염력으로 중추 신경계를 살짝 건드려 그들을 고통스 럽게 만들었다. 살짝 건드렸지만 아마 그들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고통을 맛보고 있으리라.
‘고소하다!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데……………. 어? 이건 누구지?’
순간 승희는 아까의 세 명과는 전혀 다른 사람의 느낌을 흐릿 하게 받았다. 그자는 있는지 없는지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기운이 흐릿했다. 승희로서도 그 느낌이 정말 다른 사람인지, 아 니면 자신이 착각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불안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언니! 뒤쪽으로 이동해 ! 뒷문쪽으로!”
아지트에는 은밀하게 위장해 놓은 뒷문이 있었다. 그쪽은 일 종의 비상구로, 두 종류의 진법으로 수호되고 있었지만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때만 진법이 발동되며, 안에서 밖으로 나갈 때에 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곧바로 연희는 수아를 안은 채 황달지 교수를 밀듯이 하여 좁 은 아지트 내부의 통로를 움직였다. 그 뒤를 준호와 아라가 따라갔다.
“대체 뭐죠?”
준호가 어리둥절해 물었지만 승희가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연희는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제기랄! 뛰어! 뛰어!”
소리만 지른 것이 아니라 승희는 미친 듯이 통로를 달려와 아 라와 준호의 등을 왈칵 밀었다. 그리고 곧바로 그 뒤를 따라오듯 콰쾅하는 폭음이 배 안을 가득 메웠다. 날카로운 바람이 후끈한 열기를 담고 휘몰아쳐 왔다.
정문에서 이곳 통로까지는 직선으로 이어져 있지 않고 꾸불꾸 불해 직접적으로 폭발의 충격을 받지 않았지만 소리 때문에 모 두 귀가 멍해져 버렸다.
“포・・・・・・ 폭탄?”
연희가 놀라서 외치자 승희는 입술을 깨물더니 다시 눈을 감으며 소리쳤다.
“아냐! 이건・・・・・・ 가스야! 가스를 폭발시키고 있어!”
구체적으로 설명할 시간은 없었지만 폭탄은 아니었다. 그리고 문밖에 있던 세 사람 이외의 다른 자가사용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휴대용 부탄가스통을 사용 해 폭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사고로 위장하기 위해 그러는 것이 리라. 그자는 문틈에 구멍을 뚫고 가스를 분출시켜 넣은 다음 폭발시키는 방법으로 문을 부수고 있었다. 아까 들린 문 두들기는 소리는 문의 빗장을 부수고 나서 문에 구멍을 뚫는 소리였다. 그 정도로 상황을 손금 들여다보듯 했지만 그자가 어떤 자인지는 승희로서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빨리 뛰어! 이상한 놈이 하나 있는 것 같아! 가스가 여기까지 오기 전에 피해야 해!”
폭음은 두 번, 세 번, 계속 울려 퍼졌다. 문은 아마도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우리라. 놈이 가스를 사용한다면 내부까지 피해가 미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승희의 염력으로도 가스 폭 발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허둥지둥 뒷문으로 향했다. 그런 데 달려가다 말고 갑자기 승희가 걸음을 덜컥 멈추었다.
“잠깐! 모두 멈춰!”
“왜 그러는거지?”
“이럴 수가……………. 놈들이 다시 뒷문 쪽으로 가고 있어!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를 아는 거야!”
“뭐?”
연희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믿을 수 없는 표 정을 지은 것은 연희만이 아니었다. 놈들이 어떻게 내부 사정을 알고 뒷문쪽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 승희도 짐작하기 어려 웠다.
‘혹시……………. 놈들 중에도 나 같은 투시력을 가진 자가 있단 말인가? 아이구, 만약 그렇다면 정말 큰일이다!’
승희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현재까지의 상황으로 미뤄 볼 때, 놈들에게 투시력이 없다면 어떻게 아지트의 위치를 알아냈으며, 어떻게 아지트 안의 사람들이 뒷문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까지 알 수 있단 말인가?
지금껏 승희는 막강한 투시력으로 퇴마사들의 레이더가 되어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적들을 곤경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상 대방도 그러한 능력을 갖고 있다면 도대체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승희는 식은땀을 흘리며 연희에게 말했다.
“가만있어 봐, 잠깐만…………. 놈들 중에도 투시력을 가진 자가 있는 모양이야. 우리 움직임을 고스란히 읽고 있어…………”
승희는 다시 차분하게 투시에 몰두했다. 자신의 생각이 옳은 듯했다. 지금 아지트 밖에 있는 자들도 퇴마사들처럼 행동을 멈 추고 있었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정문으로 돌파할지, 뒷문으로 나갈지 번민하고 있는 것까지도 안다는 증거였다.
‘이거 임자 만났군…….’
승희는 다시금 식은땀을 흘렸다. 여태껏 적들을 상대할 때는 생각도 하지 않고 이 능력을 사용했지만, 막상 적에게도 같은 능 력이 있다고 생각하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도무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자 연희가 불쑥 말을 꺼냈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는 없잖아. 그냥 돌파하는 게 어때?”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하지만 저들 중 보통이 아닌 자가 한명……아니, 최소한 한 명이 더 있는 것 같아. 그 사람은 투시가 안 돼!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다고!”
이에 연희도 잠시 궁리해 보다가 말했다.
“그러면 같이 있는 자들의 마음을 읽어 봐. 네가 투시할 수 없어도 그들은 같은 편이고, 행동을 같이하니까 알 거 아냐?”
“맞아! 그렇지!”
승희는 무릎을 치면서 다른 자들의 마음을 읽어 갔다. 연희의 판단은 옳았다. 밖에는 아까 보았던 세 사람 외에도 두 명이 더 있었는데, 그들은 상당한 능력자들인 듯 투시가 되지 않았다. 그 둘은 각각 한 명씩 나뉘어 정문과 뒷문을 지키고 있었다. 나머지 세 사람은 엄호 사격을 하려고 대기하는 것이 분명했다.
“정문과 뒷문에 능력자가 각각 한놈씩 있어! 어떻게 하지?”
“상대할 만한 자들이야?”
연희의 질문에 승희는 눈을 감고 두 사람에게 염력을 보내 보 았다. 하지만 예상대로 승희의 염력은 마치 바다에 물을 쏟아붓 듯 놈들에게 미처 닿지도 못한 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승희는 눈을 뜨고 당혹스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강한 자들 같아. 현암 군이나 신부님이라면 모를까…….”
그때 다시 폭발음이 연이어 울렸다. 이번에는 정문과 뒷문 양쪽에서 거의 동시에 폭발이 일어났다.
“큰일이네…….”
“도대체 뭐예요? 누구죠!”
연희가 답답한 듯 중얼거리자 아라가 화가 난다는 듯이 외쳤다. 그러자 연희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나쁜 놈들이 우릴 포위했나 봐..
승희는 그래도 실전 경험이 연희보다 많았기 때문에 발을 구 르면서도 어떻게든 차분하게 방법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평소와 입장이 거꾸로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승희는 모든 것을 거꾸로 생각해 보았다.
‘가만……………. 내가 놈들에게 투시가 안 된다면 저놈들도 나를 투시하지 못하겠지? 그렇다면 놈들도 나처럼, 여기 있는 다른 사 람들을 통해 내 행동을 파악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 편도 모르게 자신이 행동한다면 저들도 대처하 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승희는 연희에게 거짓으로 말했다.
“뒷문으로 돌파하자고! 알았지? 어서 뛰어!”
승희는 적을 속이려면 먼저 우리 편부터 속여야 한다고 판단 다. 그래서 뒷문으로 가라고 말해 놓고 자신은 출입문으로 달려 가 단숨에 염력이든 뭐든 사용해 적을 제압하려고 마음먹었다.
‘직접적으로 염력이 안 먹힌다면 뾰족한 물건이나 돌멩이라도 집어 던지지, 뭐. 어떻게든 내가 이 난국을 돌파해야 돼!’
승희가 외치자 연희는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이며 뒷문 을 향해 움직였다. 승희는 다시 투시를 행했다. 역시 예상대로 놈들은 뒷문으로 모여드는 것 같았다. 슬링샷을 가졌던 놈만 정 문 쪽을 엄호하려는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승희는 죽을힘을 다 해 정문 쪽으로 달렸다. 그러나 승희는 문을 막 열려는 순간 매 캐한 냄새를 맡았다. 가스 냄새였다.
‘아이구!’
승희는 급히 데굴데굴 몸을 굴렸고, 다음 순간 가스가 인정사 정없이 폭발해 버렸다. 비록 가스는 문에 난 작은 구멍으로 들여 보내져 그렇게 많은 양이 아니었지만 승희는 정신이 나갈 정도 로 놀랐다. 여기저기 옷이 그리고 귀가 멍멍했다.
승희는 급히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폭발이 일어난 다음이 라면 놈들도 누가 바로 그 문에서 뛰쳐나오리라고 짐작하지 못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문을 나서는 순간, 승희는 누군가에게 덜미를 잡혀 저 만치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그것은 승희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승희는 눈에 들어오는 잡동사니란 잡동사니에 전부 염력을 발 휘했다. 마구 널려 있던 가스 통들이 우르르 허공으로 날아올랐 다. 그러자 승희를 집어 던진 자가 마구 날아오는 물건들에 맞고 본능적으로 팔을 휘둘러 얼굴을 가렸다.
새같이 생긴 슬링샷을 들고 있는 자가 저만치에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승희는 인정사정없이 그자의 신경계를 쥐어짰다.
그자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지자 승희는 그자가 들고 있던 슬링샷을 염력으로 끌어당겨 간신히 손에 쥐었다.
그때 문 앞을 지키던 자가 다시 승희에게 손을 뻗었다. 승희도 피한다고 피해 봤지만, 어깨를 살짝 얻어맞고 말았다. 비틀거리면 서 한쪽으로 밀려 넘어지면서도, 승희는 슬링샷을 놓지 않았다. 순간 바닥에 굴러다니는 빈 병 한 개가 승희의 손에 잡혔다. 승희는 즉시 그것을 손에 들고 깨뜨리면서 염력을 발휘했다. 쨍 하는 소리와 함께 깨진 유리 조각들이 문 앞을 지키던 자에게 날 아들었다. 유리 조각들은 매우 가벼운데다 날카로워서 승희의 약한 염력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 공격이 되었다.
문 앞을 지키던 자는 사십 대쯤 되어 보이는 땅딸막한 남자였 는데, 유리 조각들이 날아오자 몹시 놀라면서 얼굴을 가리고 몸 을 움츠렸다.
한편, 연희와 아라, 준호 등은 승희의 속셈도 모른 채 뒷문으 로 달려가고 있었다. 연희가 수아를 준호에게 넘기고 제일 먼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그 앞을 아라가 막아섰다.
“언니, 잠깐만.”
아라의 손에는 조요경이 들려 있었다. 그것을 본 준호도 수아를 연희에게 넘겨 주며 말했다.
“누나가 먼저 나가는 건 위험해요. 내가 나가 볼게요.”
그 말에 연희가 고개를 저으며 반색했다.
“아냐. 위험…….”
“괜찮아요. 나도 내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어요. 밖에서 총이나 뭘 쓸지도 모르는데, 난 키가 작으니까 내가 나가면 맞히기 어려 울 거예요.”
그러고 보니 문이 열리는 순간 아이가 맨 먼저 나오리라고는 상대도 미처 예측하지 못할 것 같았다. 연희는 준호가 보기보다 꽤 생각이 깊다고 여겼다.
그때 아라는 밖에 있는 자들의 정신을 분산시키려고 주변의 동물들이나 벌레들까지 모조리 불러내고 있었다. 투시력이 없어 과연 원하는 대로 밖이 난장판이 되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 지만 아라가 앙칼지게 외쳤다.
“말하지 말고 어서 나가! 놈들은 투시력이 있다면서? 말을 많 이 하면 좋을 게 없잖아?”
그러면서 아라는 문에 붙어 서서 왈칵 문을 열었다. 이어 준호 는 연희가 만류할 틈도 주지 않고 데구루루 몸을 굴리면서 밖으 로 나갔다.
그 순간, 과연 준호의 예측대로 총알인지 무엇인지가 준호의 머리 위로 핑핑거리며 날아들었고, 모두 준호의 머리 위로 지나 갔다.
준호는 나가는 즉시 택견의 수법으로 몸을 일으키면서, 비도 오지 않는데 우산을 들고 있는 흑인에게 달려들었다. 그가 들고 있는 우산은 암암리에 총알을 발사할 수 있는 물건이었는데, 몽 둥이 대용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준호가 달려들자 그는 우산을 휘두르면서 방어하려 했고, 솜 씨도 상당했다. 그러나 그자도 문에서 어린아이가 굴러 나와 자 신에게 덤벼들 것이라고는 짐작하기 어려웠던 듯. 평소의 실력 으로 대응하지 않고 엉겁결에 막을 뿐이었다.
그런데 준호의 손이 우산에 닿는 순간, 갑자기 우산에서 퍽 하 는 소리가 들렸고, 준호가 그리 많은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우산 은 두 토막이 나고 말았다. 부러뜨리려고 친 것이 아니라 잡으려 고 움켜쥐었는데, 마치 두부처럼 우산의 중간이 으깨어져 버렸 던 것이다. 준호와 흑인은 다 같이 깜짝 놀랐으나, 흑인의 놀라 움이 한층 더했다.
준호도 놀라기는 했지만 우산을 움켜쥐면서 상대에게 한 방을 날릴 계획이었기 때문에 손바닥을 내밀어 상대를 쳐 갔다. 그러 자 상대는 팔을 들어 권투 자세로 방어를 굳혀 준호의 손바닥을 막아냈다.
원래대로라면 방어 자세를 취한 팔을 손바닥으로 쳤으니 아 무런 영향도 주지 않아야 하지만 다음 순간, 흑인은 비명을 지르 면서 바닥을 데구루루 굴렀다. 그 모양에 이젠 준호가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준호의 손바닥을 막았던 흑인의 오른팔은 이미 부러져 덜렁거리고 있었다.
‘이게 뭐지? 어째서 이런 일이…………!’
그때 흑인이 넘어지는 것을 본 다른 자가 준호에게 달려들었 다. 준호는 기세 좋게 다시 한번 손바닥을 휘둘렀지만, 퍽 소리 가 약간 났을 뿐, 그자는 가슴팍에 준호의 손바닥을 맞고도 아무 런 영향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영향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 라 그자는 준호를 대번에 후려갈겨 단 한 방에 코피를 터뜨리고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어 버렸다.
준호는 아까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던 손바닥이 지금은 왜 아 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지 몰랐다.
준호는 지난번 하겐이 죽음의 위기를 맞았을 때, 연희를 지켜 주라고 준호의 손에 자신의 힘을 심어 준 것은 알았지만 그것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는 몰랐다. 두 문양은 서로 암암리에 힘을 주 고받는 기이한 작용이 있었다. 즉 한쪽 문양을 사용해 어떤 것을 파괴하거나 충격을 주면 그 힘이 반대쪽 문양으로 전달되어 반 대쪽 문양도 강한 힘을 내는 것이다.
하겐의 문양은 알 수 없는 고대의 어떤 백마술사와 흑마술사 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두 사람은 형제였기 때문에 항상 같이 지냈다. 그런데 그들 중 백마 술사에게만 자식이 있어서 두 사람은 아이에게 자신들이 쌓아 온 힘을 모두 물려주고자 했다. 그래서 각각 자신의 마력을 집중시킨 문양을 만들어 냈는데, 그 둘은 그 후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약 이 아이가 정령들을 상대한다면 흑마술의 문양을 사용할 것이고, 악령들을 상대한다면 백마술을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악령들을 상대한다면 흑마술의 문양은 힘을 발하지 못할 것이 고, 정령들을 상대한다면 백마술의 문양이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두 가지 힘을 넣어 주는 것이 오히려 실전에서 는 아이의 힘을 약하게 만들 수도 있다.
결국 두 사람은 오랫동안 궁리한 끝에 두 문양이 상호 작용을 갖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즉 정령을 상대할 때 흑마술의 문양은 강한 위력을 가진다. 그러니 그 문양에서 나오는 파괴력을 흑마 술의 문양으로 흡수해 백마술의 문양으로 가게 한다면 백마술의 문양도 정령에게 타격을 줄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악령을 상대할 때는 백마술의 문양이 힘을 흡수해 타격을 준 다음, 흑마술의 문 양은 그 힘을 발출해 타격을 주는 것이다. 이 두 문양은 그 자체 만으로도 강력했지만, 이러한 상호 교감이 있기 때문에 더욱 강 력한 것이었다.
하겐은 그 두 주술사가 키워 낸 아이의 수십 대에 걸친 후손이 었다. 지금껏 하겐은 어떤 상대를 맞아도 양쪽의 힘을 모두 발출 하면서 싸울 수 있었고, 서양에서는 적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 데 하겐은 그러한 내용까지 준호에게 전달해 줄 시간이 없었다.
준호가 으깨 버린 흑인의 우산은 물론 총같이 사용되는 무기 이기도 했지만 어둠의 힘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에 반작용을 일 으켜 단번에 박살 난 것이며, 그 우산의 힘이 흡수되어 흑인을 친 준호의 반대편 손의 문양에 전달되어 단번에 흑인의 팔을 부 러뜨린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 번 손을 휘둘렀을 때에는 흡수된 힘이 없었고, 상대가 사람이라 힘을 흡수할 길도 없어 아무런 충 격도 주지 못했다.
하겐의 문양은 신묘한 것이었지만,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체계 적으로 사용해야만 최상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준 호는 사용법을 잘 알지 못한 채 마구잡이로 휘둘러 댔으니 위력 이 나올 리 없었다. 준호는 얻어맞으면서 생각했다.
‘역시 난 뭔가 안 되는 놈이야.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으니…….’
여느 때 같았으면 준호는 얻어맞아 쓰러지는 즉시 목숨을 잃 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쯤에 아라의 조요경에 반응을 보인 갈 매기 떼가 날아들어 적들이 몹시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연희와 아라가 달려 나와 나름대로 그동안 갈고 닦은 호신술을 발휘하고, 준호도 다시 일어나 택견의 수법으로 흐늘 흐늘하게 싸우기 시작하자 그들은 더더욱 열세에 몰렸다.
그러나 그들은 프로들인 만큼, 조금 시간이 지나자 갈매기 떼 의 공격 같은 것은 무시하고 사람을 공격하는 데만 정신을 집중했다. 그렇게 되자 연희와 아라, 준호 등은 다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흑인은 준호에게 맞아 중상을 입은 뒤 꼼짝 못하게 되었고, 금 발의 슬링샷을 들고 있던 백인은 승희에게 당해 맞은편 정문 앞 에 쓰러졌지만, 아직 연보라색 옷을 입은 동양인과 검은 옷으로 온몸을 감싼 정체불명의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
그는 전신을 검은 옷으로 둘러싼데다 검은 모자에 마스크 하고 있어, 키가 크고 몸매가 후리후리하다는 것 말고는 남자인 지 여자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는데, 무술뿐만 아니라 음습한 주술적인 기운까지 풍기고 있었다. 한 방에 사람을 죽일 만큼 악 랄하지는 않았지만, 그자의 기운에 한 번 맞을 때마다 몸서리가 쳐지고 저절로 몸이 떨리는 한기를 느껴 힘이 점점 줄어들 수밖 에 없었다.
그런데 연희 등은 자신들의 상황에 정신이 팔려 승희가 그들 과 함께 있지 않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승희는 연희 등이 자신의 뒤를 따라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몸을 빼 뒷문 쪽으로 달아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승 희는 깨진 유리 조각들에 염력을 발휘해 아직까지 상대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이 자 신의 주변을 맴돌면서 살아 있는 것처럼 달려들자 땅딸막한 남자는 그것을 막아내는 데만도 급급해했다.
아까 자신을 집어 던진 수법이나 염력이 직접 남자의 몸에 먹 혀들지 않는 것을 볼 때 승희도 남자가 상당한 고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경솔하게 남자에게 접근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가 승희는 슬링샷을 손에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것을 들어 일단 돌멩이를 하나 집어 그 안에 끼웠다. 슬링샷은 조그마한 새총 모양의 무기라 마치 장난감 같아 보였지만, 실제 로는 탄력이 상당해 제대로만 적중시킨다면 한 방에 사람을 죽 일 수도 있는 무서운 무기였다. 다만 슬링샷의 탄환은 반드시 둥 글고 매끈하게 잘 연마된 구형의 물체여야 했으며, 그렇지 않으 면 공기의 저항을 심하게 받아 제대로 명중시킬 수가 없었다. 허나 승희는 앞뒤 가리지 않고 주변을 굴러다니는 잔돌멩이를 넣어 슬링샷을 쏜데다 슬링샷의 반동을 충분히 이용하지 않았으 므로 그다지 위력적이지 못했다.
남자는 유리 조각에 얼굴을 조금 찢길지언정 그 돌멩이만은 피하려 했다. 그래서 승희는 세 번 연속으로 돌멩이를 재어 남자 에게 쏘았고, 남자는 모두 그것을 피했지만 덕분에 얼굴에 상당 히 많은 상처를 냈고, 승희와의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승희는 남자의 얼굴에서 피가 흐르자 더더욱 남자가 무시무시 하게 느껴졌고 연희 등이 걱정되는 터라, 충분한 거리를 두었다 고 여겨지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남자는 승희의 뒤를 무섭게 달려 쫓아왔는데, 승희가 염력으 로 남자의 발을 향해 가스통 하나를 굴려 넣자 남자는 요란스럽 게 넘어지고 말았다. 어찌나 심하게 정면으로 얼굴을 박고 넘어 졌는지, 남자는 한참이나 신음 소리만 낼 뿐 일어나지 못했다.
‘쌤통이다. 아예 머리가 깨져 버리면 더 좋을 텐데.’
승희는 속으로 혀를 날름하면서 재빨리 연희를 도우러 뒷문 쪽으로 돌아서 갔다.
그 시각, 연희와 아라, 그리고 준호는 이제 더 이상 버티기 어 려울 정도로 지쳐 있었다. 공항에서부터 따라왔던 세 사람 중동 양인마저 연희에게 필살의 돌려 차기로 턱을 얻어맞고 쓰러진 상태였지만, 전신에 검은 옷을 걸친 사람만큼은 몹시 상대하기 가 어려웠다.
그는 몸놀림이 귀신같을 뿐만 아니라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 때문에 손을 댈 수 없었고 접근하기조차 힘에 겨웠 다. 연희와 아라, 준호가 죽을힘을 다해 대적했지만, 결국 셋은 모두 지쳐 금방이라도 쓰러질 지경이었다. 특별히 얻어맞지는 않았는데도 온몸에 느껴지는 한기와 피곤함 때문에 서 있을 기 력마저 없었다.
“나・・・・・・ 난 안 되겠어…………….”
제일 먼저 아라가 비틀거리면서 풀썩 무릎을 꿇었다가, 만사를 포기한 듯 땅바닥에 납작 엎어져 버렸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자 연희가 헉헉거리면서 뒤로 주춤거리다가 더 이상 서 있지 못하고 털썩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그 와중에도 준호는 죽을힘을 다해 버티고 있었지만, 결국 더 버티지 못한 채 그자의 손바닥에 따귀를 맞고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따귀 한 방에 기절해 버린다는 것은 평소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자의 손이 몸에 닿는 순간, 준호는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는 허탈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세 사람이 모두 쓰러지고 무력화되자 검은 옷은 가볍게 코웃 음 치더니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뒷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때 황 교수는 수아를 안은 채 몸을 덜덜 떨면서 뒷문에 바싹 붙은 채 숨어 있었다. 제아무리 힘없는 황 교수라도 수아만 아니 었다면 덤벼드는 시늉이라도 냈을 테지만, 수아를 안고 있어 그 럴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언뜻 밖을 보니 세 사람은 모조리 쓰러져 있고, 검은 옷을 입은 자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황 교수는 이제야말로 죽었구나 싶었다. 그리고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을 말려들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 황 교수는 수아를 내려놓고 용감하게 문밖으로 나갔다. 비록 어 깨와 다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황 교수로서는 최대한 용기를 낸 것이었다.
수아는 땅에 내려서자마자 쪼르르 문으로 먼저 달려가 밖을 내다보더니 소리를 질렀다.
“언니! 언니! 누가그랬어! 언니, 왜 그래!”
수아가 소리를 지르자마자 갑자기 주변에 미친 듯한 바람이 몰아쳤다. 소용돌이 같은 무서운 바람이었다. 검은 옷은 여유 있 게 다가오다가 무시무시한 바람이 자신에게로 몰아치자 깜짝 놀 라면서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방어 자세고 뭐고 할 것 없이 몰아쳐 오는 바람은 순식 간에 회오리 형상으로 거대해지더니 주변의 모든 잡동사니들을 한데 휩쓸면서 무시무시한 기세로 검은 옷을 덮쳤다.
수아는 정령들의 여왕이었다. 정령들은 수아의 안위에 직접적 으로 관계되거나 명령이 있을 때에만 힘을 발휘할 뿐, 다른 사람 은 죽거나 살거나 신경도 쓰지 않았다.
더구나 퇴마사들의 아지트에 세워진 진법과 결계는 악령들을 모조리 방어할 수 있을 만큼 훌륭했지만, 반면 정령들도 그 결계 안에서는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전전긍긍하다가 수 아가 분노의 기색을 표시하자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수아가 미 워하는 사람을 공격한 것이었다.
정령들이 일으키는 돌개바람은 예전에 박 신부로서도 감히 감 당하기 힘들었을 만큼 맹렬하고 무시무시했다. 자신에게 불어오는 것이 아닌데도 황 교수는 숨을 쉴 수도 없고, 눈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주변에 서 있던 물건들 중 바람에 휩쓸리지 않은 것 은 하나도 없었으며, 나무들마저 우지끈거리며 순식간에 가지가 모조리 부러져 앙상한 몰골이 되어 갔다.
그럼에도 검은 옷은 꼿꼿이 버티고 서 있었다. 얼마나 바람이 거셌는지 몸에 두른 검은 옷이 다 찢어져 나갈 지경이었는데도 그는 빈틈없이 팔을 둘러 몸을 보호하며 서 있었다.
그러다가 바람이 한층 더 거세어지자 그의 검은색 모자가 휙 날아갔다. 모자가 날아가자 그 속에 감춰져 있던 붉은 머리가 마 치 파도처럼 출렁거리며 바람에 휘날렸다. 그 사람은 여자였다. 그런데 머리가 드러나자 그 여자는 미친 듯이 분노를 터뜨렸다.
“아…핫!!”
그녀가 앙칼진 소리를 지르자 갑자기 그녀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솟구쳐 나왔고, 그렇게도 거세던 돌개바람이 뒤로 밀려 버렸다. 여자는 마스크를 집어 던지고, 몸을 덮었던 검은 외투마 저 벗어 팽개쳐 버리더니 수아를 보고 물었다.
“내 머리를 봤니?”
그 여자는 특이하게도 불어로 이야기했는데, 수아는 당연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 말을 알아들은 사람은 기운을 잃고 넘어 져 있던 연희뿐이었다. 연희는 기진맥진해 있었지만, 수아가 정 령들의 힘을 불러내는 것을 보고는 이제 걱정 없겠구나 싶어 안심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여자가 한 말이 너무나 뜻밖이라 연희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머리가 어떻다고? 눈이 있으면 다 봤지, 못 보겠어?”
그러자 붉은 머리의 여자는 흐흐 하고 음울한 웃음소리를 내 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 머리를 본 자는 다 죽어야 해….!”
그러더니 여자는 난데없이 몸을 날려 곁에 넘어져 신음하고 있던 흑인 옆으로 훌쩍 뛰어들었다. 이어 약간의 주저함도 없이 손가락을 펴 세우더니 흑인의 머리를 단번에 뚫어 버렸다. 머리 를 박살 내지도 않고 손가락을 세워 뚫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 을 만큼 무서운 힘을 가졌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수아는 그 광경을 보고 너무나 놀라 크게 비명을 지르면서 울 음을 터뜨렸다. 질려 버린 것은 황 교수나 연희도 마찬가지였다. 다음 순간, 정령들의 폭풍이 아까보다 더 거센 기세로 여자에 게로 휘몰아쳤다. 하지만 여자가 다시 허공에 손을 휘젓자 얼음 같은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주변이 순식간에 영하 수십 도로 내 려간 것 같았다. 여자의 냉기와 정령들의 폭풍은 서로 무시무시 하게 대치하면서 지옥도 같은 광경을 연출했다.
연희는 퇴마사들의 무시무시한 싸움을 여러 번 봐 왔어도, 이 렇게 초자연적이고 마법 같은 싸움은 본 적이 없었다.
수아는 무서워서 연희에게 가고 싶었지만, 연희는 그 무시무시한 냉기와 폭풍 건너편에 있었다. 반사적으로 수아는 황 교수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여자와 대치하던 정령들의 힘은 여자를 내버려 두고 수아에게로 몰려가 수아의 주변을 빈틈없이 방어하듯 무서운 기세로 맴돌았다.
이에 여자는 약이 오른 듯, 붉은 머리를 넘실거리면서 수아에 게 달려들려고 했다. 그러자 수아를 안고 있는 황 교수의 주변에 서 무시무시한 불기둥이 솟구쳐 황 교수를 에워쌌다. 황 교수는 너무나 놀라 수아를 안은 채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렸지만, 불기 둥은 수아나 황 교수의 터럭 한 올 태우지 않고 여자에게로 휘몰 아쳐 갔다.
“이프리트?”
여자도 무시무시한 불기둥이 용트림하며 다가오자 몹시 놀라 면서 뒤로 날렵하게 공중제비를 넘어 피했다. 그러면서도 여자는 지지 않고 냉기를 있는 대로 뿜어내 불기운에 저항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마른 밤하늘에서 뇌성이 번쩍하면서 번개가 내리꽂혔다. 벼락이 떨어지는 폭발 같은 파열음이 주위 를 메우는 순간, 여자는 비틀거리면서 몇 발자국이나 뒤로 물러 섰는데, 본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던 여자의 붉은 머리카락이 전 기 충격에 의해 반쯤 그슬린 채 뻣뻣하게 일어서 있었다.
“이… 이런 지독한…………!”
여자는 불어로 마구 욕설을 내뱉더니 화풀이라도 하듯, 아까 넘어졌던 동양인의 얼굴을 발로 냅다 걷어찼다. 퍽 하고 남자의 머리가 박살 나면서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고 나자 여자의 냉기는 더더욱 기세가 강해졌다. 보고 있던 연희의 몸마저 떨리 다 못해 얼어붙어 버릴 기세였다.
‘같은 편을 저토록 참혹하게 죽이다니! 아냐, 사람을 죽일 때 마다 저 여자의 냉기가 강해지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혹시 무슨 사악한 주술을 사용한 건 아닐까?’
그러나 주술이고 뭐고 고민할 겨를도 없이 이대로라면 황교 수나 수아는 정령들의 힘으로 무사할지 몰라도 연희나 쓰러진 아라, 준호 등은 얼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느닷없이 한 줄기 빛 같은 것이 날아와 여자의 바로 앞에 박혔다. 그것이 땅에 박히는 순간 더더욱 밝은 광채로 확 하고 주변을 밝히자 여자는 깜짝 놀라면서 뒤로 물러섰다.
다음 순간, 또 다른 빛줄기가 날아왔다. 이번에는 녹색이었는 데, 그 빛줄기는 여자의 부근에 도달하자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리 면서 여자의 몸을 감아 묶으려 했다. 재빨리 여자는 팔을 잔뜩 움츠렸다가 냉기를 뿜으면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여자 를 묶으려던 녹색 기운이 얼어서 박살 나는 듯한 모양으로 사라 졌다.
“나가스트라(Nagastra)*? 도대체 누구냐!”
이번에는 두 개의 빛줄기가 연이어 날아왔다. 하나는 붉은 화염 같았고, 다른 하나는 푸른색의 기운이었는데, 그것을 보자 여자의 안색이 변했다. 그러더니 여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땅이 쓰 러져 있던 아라와 준호를 잡아 양손에 한 명씩 들고 외쳤다.
“누구냐? 더 가까이 오면 이 아이들을 죽여 버리겠다!”
곧이어 저쪽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것이 연희의 눈에 보였다. 모두 세 명이었는데, 그중 앞선 사람은 박 신부였다. 박 신부의 몸에는 연녹색 오라가 선명하게 구체를 이 루며 피어올라 있었다.
“잠깐! 잠깐!”
박 신부는 불편한 다리를 끌면서 급히 달려오느라 몹시 숨이 찬 듯했다. 그리고 박 신부의 뒤를 두 사람의 승희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것을 본 연희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승희가 두 명이 된 것일까?
여자는 박 신부와 두 사람의 승희를 힐끗 보더니 안색이 변해 아라와 준호를 든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박 신부는 여자의 뒤를 쫓아가면서 계속 외쳤다.
“아이들을 두고 가시오!”
그러자 여자는 두 아이를 옆구리에 끼고 달리면서 소리쳤다.
* 나가(naga, 인도 신화에서 용과 뱀의 중간 정도 되는 존재)의 힘을 넣은 아스 트라(Astra),
“저 늙은이가 가진 물건과 바꾸자. 나중에 연락하겠다!”
여자는 두 아이를 안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서운 속도로 박 신 부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 순간 느닷없이 튀어나와 여자의 앞을 가로막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는 엄청난 덩치의 남자였는데, 여자를 보자마자 팔을 휘둘 러 공격했다. 팔에서 바람이 일 정도로 무시무시한 공격이었지 만, 여자는 놀랍게 몸을 훌쩍 날린 다음 허공으로 높이 솟아올라 그 공격을 간단하게 피해 버렸다.
여자가 허공으로 솟구치자 또 다른 그림자 하나가 날아와 여 자를 덮쳤다. 그 그림자 같은 사람은 무서운 기운을 여자에게 뿜 어냈는데, 여자도 지지 않고 냉기를 뿜어냈다. 여자도 공중에서 조금 뒤로 물러서긴 했지만, 그 그림자 같은 남자는 더욱 심하게 뒤로 밀려 거의 땅에 처박히다시피 했다.
이어 여자가 땅에 발을 딛는 순간, 또 다른 누군가가 여자에게 무엇인가를 던졌다. 여자는 흥하는 코웃음과 함께 냉기를 쏘아 보냈고, 던져진 물건은 허공에서 퍽 하고 깨져 버렸다.
그 물건 안에는 무슨 액체가 들어 있었던 것 같았다. 그 액체 는 허공에 흩날리면서 여자의 냉기 때문에 순식간에 얼어 버렸 는데, 얼음 조각이 여자의 머리 위로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뜻밖에도 그 얼음 조각에 닿자 여자는 깜짝 놀라는 것 같았다. 이어 여자는 자신의 등 뒤로 무시무시한 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바람의 도움을 빌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치 허공을 날다시피 하여 순식간에 사라졌다.
여자가 아라와 준호를 낀 채 사라지자 박 신부는 쫓아가던 것 을 멈추었다. 그는 몹시 힘이 들었는지 헉헉거리면서 연희에게 다가왔다. 박 신부의 오라에 감싸이자 얼어붙는 듯하던 연희의 몸이 삽시간에 훈훈하게 풀렸다.
“신부님! 아이들이 …………….”
연희는 거의 울듯이 박 신부를 바라보았다. 이에 박 신부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괜찮네, 괜찮아. 반드시 구할 수 있을 거야. 반드시….. “
박신부는 연희의 어깨를 커다란 손으로 다독여 주었다. 곧이 어 두 사람의 승희가 다가왔다. 그것을 보고 연희가 고개를 갸웃 하자 승희가 웃으며 말했다.
“이쪽은 로파무드야. 나랑 정말 똑같지?”
그제야 연희는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승희와 로파무드는 원래 똑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연희로서는 지금 로 파무드가 나타날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한데다 우연의 일치인 지, 두 사람의 헤어스타일이 거의 비슷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헛갈린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의 옷차림은 상당히 달랐고, 로파무드의 얼굴이 좀 더 검은 편인데다 작은 코걸이를 하고 있어 누가 승희이고, 누가 로파무드인지 분간하기는 어렵지 않을 듯했다.
저만치에서 여자를 막으려 했던 세 사람이 또 다른 한 사람을 대동하고 다가왔다.
덩치가 큰 사람은 성난큰곰이었고, 공중으로 뛰어올라 여자를 공격했던 사람은 윌리엄스 신부였는데, 윌리엄스 신부는 흡혈귀 의 힘을 사용해서 그런지 성난큰곰의 팔에 안겨 있었다. 안 그래 도 거대한 성난큰곰의 덩치는 강신술을 사용했는지 더더욱 커 져 있어 품에 안긴 윌리엄스 신부의 몸이 마치 헝겊인형 같아 보 였다.
그리고 그 뒤를 흡혈귀처럼 창백한 얼굴의 이반 교수와 뚱뚱 한 바이올렛이 따르고 있었다. 승희는 뚱뚱한 남자를 따돌리고 뒷문쪽으로 오다가 우연히도 로파무드, 성난큰곰 등과 같이 오 고 있던 박 신부를 만났던 것이다.
“모두・・・・・・ 모두 오셨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박 신부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래, 모두 모여서 오느라고 며칠 걸렸지. 이런 일이 생긴 줄 도 모르고…………. 미안하네. 고생 많았지?”
그러면서도 박 신부는 황달지 교수에게서 수아를 받아 안았 다. 수아도 박 신부의 얼굴을 보자 몹시 좋아하면서 박 신부에게 폭 매달렸다. 로파무드는 승희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마 거울을 보고 이야기하는 기분일 것이었다. 연희를 보니 그녀의 등에는 아주 기다랗고 고색창연한 활 한 자루가 메여 있었는데, 아까 날아왔던 빛줄기 같은 것이 아마도 로파무드가 쏜 것인 듯싶었다. 자세히 보니 로파무드는 화살통 같은 걸 지니고 있지 않았는데, 화살 없이 주술만으로 활을 쏜 것 같았다.
연희로서는 신기할 따름이었고 마음 든든하기도 했지만, 아이 들 생각에 우울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