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4권 20화 – 하르마게돈 14 : 호랑이 입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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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말세편 4권 20화 – 하르마게돈 14 : 호랑이 입안에서


호랑이 입안에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서둘러라.”

아하스 페르츠는 수아를 한 손에 대롱대롱 들고 말했다. 수아 는 입을 꼭 다문 채 아하스 페르츠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정령들이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연희는 물론이고 준호와 아라, 로파무드와 준후까지도 그 자리에서 꼼 짝할 수가 없었다.

이자가 아하스 페르츠라니! 예수 때부터 지상을 헤매 왔던 방 황하는 유대인. 아무도 상대할 수 없고 아무도 당해 낼 수 없다는 자. 일단 그가 모습을 드러내고 인상을 쓰자 그의 온몸에서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위압감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연희 같은 사람은 당장이라도 쓰러져 버릴 듯한 섬뜩하고도 어두운 느낌이었는데, 단연코 이만큼 강한 기운을 뿜어내는 자 는 본 적이 없었다.

“아아…….”

갑자기 실이 끊어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아라가 털썩 쓰러져 버렸고 준호가 놀라며 아라를 부축하려는 순간, 준호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기절해 버렸다. 로파무드는 얼굴에 식은 땀이 송골송골 맺혀 금방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처럼 보였지만 간신히 버티고 있었고, 준후는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음에도 의 연하게 서 있었다. 연희가 어지럼증을 느끼면서 비틀거리기 시 작했을 때, 아하스 페르츠가 천천히 말했다.

“과연 대단들 하군. 좋다. 어서 저걸 뚫어라. 그러면 아무도 해 치지 않겠다.”

다음 순간, 온몸을 쥐어짜듯 하던 숨 막힐 듯한 기운이 사라졌 다. 로파무드는 크게 한숨을 쉬면서 똑바로 섰고, 연희는 어지럼 증을 견디지 못해 체면 불고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준후만이 여전히 똑바로 서서 아하스 페르츠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준후도 어깨와 다리가 조금씩 떨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 었다. 그런데 아하스 페르츠의 손에 들려 있는 수아는 멀쩡한 것 같았다. 그때 돌연 누군가가 뒤에서 아하스 페르츠를 덮쳤다.

“아이를 내려놓아!”

중국어로 크게 외치면서 아하스 페르츠에서 덤벼든 사람은 황 달지 교수였다. 그 모습을 보고 연희는 너무나 놀라 그 자리에 기절할 뻔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황달지 교수 는 수아가 낯선 남자에게 잡히자 용감하게 수아를 빼앗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준후가 재빨리 우보법을 써서 황달지 교수를 그 자리에 멈추 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황달지 교수는 막 몸을 날려 아하스 페 르츠를 덮치려던 참이라 달려오던 관성 때문에 아하스 페르츠의 등에 부딪혀 버렸다.

물론 아하스 페르츠는 어깨만 한 번 흔들거렸을 뿐, 꿈쩍도 하 지 않았고 황 교수는 뒤로 튕겨 날아가 다시 차문에 와당탕 소리 를 내며 부딪힌 다음 땅에 떨어졌다. 황 교수는 이미 준후의 우 보법 주문에 걸린 참이라 몸이 돌처럼 굳어 속으로는 더욱더 심 한 고통을 받았다.

황 교수가 등에 와서 부딪히자 아하스 페르츠의 눈동자가 순 간 번쩍 빛났다. 아하스 페르츠는 곧바로 손에 들고 있던 수아의 몸으로 황 교수를 내려치려고 했다.

“안돼!”

로파무드가 크게 외치면서 등에 지고 있던 간디바를 내렸다.

그러나 수아의 머리가 황 교수의 머리와 부딪혀 박살나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았다. 순간, 무시무시한 바람이 아하스 페르츠의 몸 주변으로 몰아쳤다.

주변의 나뭇가지들이 일제히 뚜두둑 부러져 나가고 차의 유리 창이 와장창 깨어지면서 흙먼지가 용솟음쳤다. 제아무리 아하스 페르츠라 해도 내려치려던 손이 한순간 멈칫했다. 그 순간을 놓 치지 않고 준후가 손을 뻗으며 달려들었다.

준후의 한 손에서는 오행의 멸겁화불줄기가, 다른 한 손에서 는 뇌전의 번쩍이는 기운이 뻗어 나갔다. 연희조차 준후가 양 손 으로 오행술의 각각 다른 기운을 뿜어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불길과 번개가 다가오는데도 아하스 페르츠는 신경조 차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준후의 불길과 번개는 아하스 페르 츠가 아니라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돌개바람과 부딪혀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것을 예측이라도 한 듯, 다음 순간 준후는 한쪽 발에 낙지생근술(地生根術)의 기운을 넣어 단단하게 땅을 고정시키 면서 다른 발로 땅을 크게 디뎠다. 순간 땅이 일렁거리면서 물결 처럼 파도를 치자 황달지 교수가 그 물결에 밀려 저만치로 굴러 가버렸다.

그리고 아하스 페르츠가 휘두른 수아의 머리는 황달지 교수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지나가 허공을 갈랐다. 그때 로파무드가 전설의 활인 간디바를 높이 쳐들고 크게 아스트라를 외우면서 세 발을 연거푸 내쏘았다.

적색, 청색, 흑색의 세 가지 아스트라가 주술의 기운을 담고 아하스 페르츠에게 날아들었다. 그리고 준후는 재빨리 오른손으 로 벽조선을 꺼내고, 왼손으로는 부적 뭉치를 한 움큼 꺼내 허공 에 뿌렸다. 부적들은 만부원진의 술수와 비슷하게 허공에서 일 순 원을 그리는 듯하다가 다시 한곳으로 뭉쳐 총알처럼 순차적 으로 아하스 페르츠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준후는 크게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면서 벽조선을 두 번 휘두 르고, 세 번째에는 벽조선을 던져 버렸다. 두 번 휘둘리며 내뿜 어진 검은색과 은색의 무시무시한 광채는 최후에 던져진 벽조선 과 합쳐져 새와 비슷한 모양이 되더니 아하스 페르츠에게로 덮 쳐들었다.

그러나 아하스 페르츠는 피하지도 않았고 얼굴 한 번 찌푸리 지 않았다. 그냥 잠자코 서 있었을 뿐이었다. 로파무드의 아스트 라와 준후의 무서운 기운들과 부적들은 전혀 아하스 페르츠를 맞히지 못했다.

그것들은 오히려 아하스 페르츠의 앞에서 한데 엉켜 사방으로 마구 튀더니 아무렇게나 폭발해 버렸다. 뭐가 뭔지 알 수조차 없 는 빛과 기운의 폭발이 일어난 다음에도 아하스 페르츠는 멀쩡 히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옆에 있던 트럭은 문짝이 날아가고 유리가 완전 히 깨진 채로 반쯤 시커멓게 그을렸다. 그의 오른편에 있던 큰 나무는 가지가 다 부러지고 잎이 모두 떨어졌으며, 온통 준후의 부적이 박힌 흉한 모습을 하고 있다가 이윽고 우지직 소리를 내 며 넘어졌다. 그 나무의 부러진 부분에는 벽조선이 박혀 있었다. 

“다 놀았느냐?”

아하스 페르츠는 아무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준후는 너무도 큰 술수를 연거푸 사용한 탓에 탈진해 주저앉아 있었고, 코피까지 터져 흘러내리는 상태였다. 그리고 로파무드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한 손으로는 간디바를 끌 어안고 한 손으로는 피가 흐르는 어깨를 잡고 있었다. 그녀의 어 깨에는 준후의 부적이 한 장 박혀 있었다.

“안 돼……………. 상대가 안 돼…………….”

준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중얼거리다가 왁 하고 선혈을 한 움큼 토해 냈다. 로파무드가 째지는 소리를 질렀다. 

“우릴 죽이면 너도 이걸 뚫고 들어갈 수 없을 거다!”

인도어로 소리 지른 것이었지만 아하스 페르츠는 알아들은 듯이 대꾸했다.

“서둘러라.”

아하스 페르츠는 지금까지 아무런 공격을 받지 않은 것처럼 태연했다. 그러다가 로파무드가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것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 

“아, 이거?”

그러면서 그는 선선히 수아를 내려놓았다. 수아는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면서 연희에게 달려가 안겼다.

“좋다. 내가 부탁을 했으니 꼬맹이는 놓아주지. 하지만 날 건드린 건 실수였어.”

아하스 페르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릴 뿐 손은 쓰지 않았다.

“너희, 제법이구나. 나에게 이 정도 힘을 쓸 수 있던 자는 이백 년 이래로 너희가 두 번째야. 나중 일을 생각해 특별히 한번 봐 줄 수도 있다. 저 빌어먹을 것만 뚫어 준다면.”

그때 준후가 입가와 코에서 피를 흘리며 소리를 지르면서 아 하스 페르츠에게 맨주먹으로 덤벼들려고 했다. 그러나 아하스 페르츠가 준후를 쳐다보자, 준후는 알 수 없는 벽에 부딪힌 것처 럼 저만치로 튕겨 데굴데굴 굴러가다가 나무에 부딪혀 멈췄다.

“자만하지 마라, 꼬마야. 이백 년 이래로는 처음이지만 너 정 도 되는 놈들은 백 명도 넘었다. 그중 내 손에서 벗어난 놈은 거 의 없었다. 오늘이 두 번째일 뿐.”

“말이 많군.”

준후가 씹어뱉듯 말했다. 그러면서 준후는 퉤 하고 한 움큼의 피를 뱉었다. 아하스 페르츠는 그런 준후를 조용히 보더니 기분 이 언짢아졌는지 천천히 준후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준후는 즉시 보이지 않는 손이 잡아당기듯 아하스 페르츠 쪽으로 끌려갔다.

준후는 느닷없이 강한 주술을 마구 쓰는 바람에 전혀 힘을 쓸 수 없는 참이라 그대로 목줄기를 잡혔다. 연희는 그 모습을 보고 는 악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무작정 아하스 페르츠에게 달려들 어 주먹을 휘두르려 했지만 아하스 페르츠는 연희의 손목을 간 단히 잡아 버렸다. 로파무드가 급히 간디바의 활줄을 목에 대면 서 소리를 쳤다.

“우리 일행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나는 즉시 자살해 버리겠다!”

“나하고 흥정하자는 건가?”

아하스 페르츠는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연희의 손목을 비틀 어 던져 버리며 말했다. 순간, 로파무드는 눈을 질끈 감고 활줄 을 목에 들이대었다. 선혈이 팟 하고 솟구치는 순간 아하스 페르 츠가 손을 휘저었고 그와 동시에 로파무드는 간디바와 함께 저 만치로 나가떨어졌다.

“대단한 여자군.”

아하스 페르츠는 즐거운 듯 말하면서 준후를 아무렇게나 획 내던졌다. 준후도 이제는 작다고 할 수 없는 키와 덩치였는데도 아하스 페르츠는 먼지라도 털어 내는 것 같은 동작을 취했다.

“좋다. 내가 신세를 지는 셈이니 파격적으로 한 번 봐주지. 아주 급한 용무가 있어서 말이다. 너희는 나중에 천천히 밟아 주지.”

그러면서 아하스 페르츠는 로파무드를 힐끗 보며 놀랍게도 씩 웃어 보였다.

“전생에는 더 대단했을 것 같은데? 놀랍고도 신비한 여자들이 여기 아주 많군.”

로파무드는 목에서 흐르는 피를 손으로 대충 닦으며 아하스 페르츠를 이글이글 타는 듯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다행히 상처 는 그리 큰 편이 아니었다.

연희는 아하스 페르츠가 로파무드의 전생 이야기를 하자 가슴 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준후는 연희보다도 더 두근두근했다. ‘여 자들’에는 라미드 우프닉스인 연희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하스 페르츠의 입을 막기 위해 준후는 아주 서툰 영 어로 급히 말했다.

“예수가 아냐.”

그 말에 아하스 페르츠는 잠시 멈춰 서는 듯했다.

“뭐라고?”

아하스 페르츠가 생각보다 큰 관심을 보이자 준후는 되레 당황했다.

“예수가 아냐. 너・・・・・・ 그러니까………… 너의 힘은..”

준후는 잘되지 않는 영어를 어떻게든 이어 보려고 했으나 말 이 나오지 않았다. 연희가 옆에서 준후의 말을 번역해서 말했다.

“당신의 힘은 예수의 것이 아니래요.”

준후는 용기를 얻어 다시 한국어로 외쳤다.

“네 힘은 결코 예수의 저주 때문에 생긴 게 아냐! 달라. 아주 달라!”

연희가 준후의 말을 그대로 번역해서 들려주자 아하스 페르츠가 기이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 아니다. 내 힘은 시몬의 것과 비슷할 테지.”

준후는 고개를 저었다.

“시몬도 아냐! 근본적으로 달라!”

그 말에 아하스 페르츠는 고개를 저었다.

“빌어먹을 헛소리. 네가 시몬에 대해 뭘 아느냐?”

“네 힘은……. 네 기운은…….”

준후는 뭔가 말하려 애썼지만 머릿속이 잘 정리되지 않는 듯,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러자 아하스 페르츠가 준후에게 말했다.

“시몬이 나를 가르쳤다. 예수의 저주 때문에 나는 죽지 않는 몸이 되었고, 사도 베드로의 사기로 시몬은 불구의 몸이 되었다. 시몬은 그 때문에 나를 가르쳤고, 나는 지금의 힘을 지녔다. 물 론 나는 죽지 않아. 시몬의 주술이 없었어도 너희가 날 이길 수 는 없을 테지만.”

“네 힘은 시몬의 종파와는 완전히 달라!”

그 말을 아하스 페르츠가 천천히 되받았다.

“시몬이 죽은 지도 이천 년이 되어 간다. 그 이천 년 동안 나는 놀고만 있었겠는가? 너희 …………… 약해 빠진 벌레들은 모른다. 예 수를 이기려면 너희 수준으로 어찌해 볼 일이 아니야.”

“예수・・・・・・ 그리스도를……………?”

연희가 놀란 듯 중얼거리자 아하스 페르츠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헛소리 말고 일이나 햇!”

준후는 지지 않고 되받아쳤다.

“이천 년이나 공부했다면서 저것 하나 못 뚫어? 그러면서 예수를 이긴다고?”

하지만 아하스 페르츠는 화를 내지 않았다.

“저것을 못뚫는 것이 아니다. 뚫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거든.” 

그러고는 다시 감정 없는 목소리로 자신을 타이르듯 말했다.

“옛이야기 할 시간이 아니다. 중요한 순간인데………………”

말끝을 흐리면서 아하스 페르츠가 천천히 덧붙였다.

“한마디라도 더 하면 모두 죽여 버리겠다. 알았나?”

“서둘러요.”

뭐라고 더 말하려는 준후의 입을 어느새 로파무드가 막아 버리면서 연희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진짜예요. 한마디라도 더 하면, 정말 끝장이에요. 어서 저걸 뚫읍시다. 도와줘요.”

아하스 페르츠는 로파무드와 연희를 천천히 바라보더니 슬며 시 뒷짐을 지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아주 약간이 기는 하지만 후회하는 듯한 감정이 엿보였다. 그는 먼 하늘을 바 라보며 중얼거렸다.

“다들 오는군…”

의식 준비를 하는 로파무드는 들을 수 없었지만, 기절한 사람 들을 간호하던 연희와 준후는 그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아하스 페르츠의 협박 때문에 감히 말을 하지는 못했다. 연희는 누가 온 다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준후는 그 말을 듣고는 몹시 착잡한 듯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무슨 고민이 있니? 아까는 왜 그렇게 무작정 덤볐어?”

연희가 조그맣게 묻자 준후가 말했다.

“연희 누나.”

“응?”

“부탁이 있어요.”

“뭔데?”

“나중에 …………… 내 말을 한 번만 들어줘요. 딱 한 번만.”

“무슨 말인데?”

“지금은 말할 수 없어요. 다만…… 딱 한 번만 내가 말하는 대로 해 줘요. 그럴 수 있나요?”

“뭔지도 모르는데?”

한참 뭔가를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준후가 나직하게 말했다.

“누나, 나는 사실 그동안 뭔가 알아낸 게 있어요.”

“뭔데?”

「해동감결요. 거기서 숨겨진 내용들.”

“그래?”

“난・・・・・・ 난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돼요. 하지만…………… 하지만 누나가 보기에 그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래…….”

연희가 애써 쾌활하게 대답했다.

“네가 하는 일이라면 좋아 보이지 않아도 결국은 좋은 일이겠 지. 괜찮아. 그런데 왜 나한테 말하지? 신부님이나 현암 씨에게 왜 진작에 말 안 했어?”

“아뇨. 말할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준후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난・・・・・・ 난 전에 연희 누나를 죽일 뻔한 적이 있어요. 지금”

그 말에 연희는 고개를 저으면서 웃어 보였다. 준후는 과거 일 본에서 박 신부가 죽었다고 생각해, 분노한 나머지 하마터면 연 희를 죽일 뻔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고의로 그런 것도 아닌데,

새삼스레 그 이야기를 왜 꺼내는지 연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난 안 죽었잖아. 다 잊은 옛이야기를 왜 꺼내니?”

그러나 준후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 연희 누나는 날 원망하지 않았어요?”

연희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그건 내가 자초한 일이었잖아.”

말하면서 연희는 준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심각해 보여 자신도 모르게 준후의 코를 잡아 비틀었다. 준후가 놀라서 고개 를 뒤로 빼자 연희가 장난 섞인 어조로 말했다.

“네가 다 큰 것 같니? 내가 보기엔 아직 꼬맹이야. 그러면서 세상 걱정 다 짊어진 표정이나 짓고.”

그러면서 연희는 문득 웃음을 참을 수 없어 킥 웃었다.

“왜 웃음이 나지? 나도 미쳤나 봐. 하긴, 미치지 않는 게 이상 하지. 무슨 동화나 소설 속에 들어온 것 같아. 옛날부터 그랬지 만……………. 이건 다 꿈이 아닐까?”

그러고는 준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골치 아픈 일이 있어도 속 편하게 생각하자고. 이렇게 된 걸 어떡하겠어? 꿈에서 깨기나 기다려야지, 뭐.”

그러나 준후의 표정은 내내 밝아지지 않았다. 그 표정에서 연희에게 갑자기 뭔가 찌르르 마음속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설마…………… 설마………… 그런 일이…? 아니겠지! 절대 아닐거야!’


아하스 페르츠가 이곳에 있을 것이라는 박 신부의 말에 윌리 엄스 신부와 이반 교수는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 두 사람은 아 직까지 아하스 페르츠를 만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가공할 인물인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더욱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지은 자는 카르나 였다. 그의 표정을 보며 박 신부가 조용히 물었다.

“아하스 페르츠가 여기 와 있다는 걸 당신들은 어떻게 알았 소?”

“나는 모르오.”

“우리, 시간 낭비는 하지 맙시다. 어떻게 알았소?”

카르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박 신부가 다시 말했다. 

“지금도 당신이 함정을 파 놓고 있다는 것, 난 눈치채고 있소. 당신들이 무엇을 바라는지도 대강 짐작할 수 있고 말이오. 그러 니 솔직하게 대답해 주시오. 나는 쾌히 당신들의 함정에 빠져 줄 용의가 있으니까.”

그 말에 카르나의 눈이 조금 빛났다.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모르겠소. 당신들은 이미 타보트를 얻었으니, 우릴 죽이건 살리건 마음대로 하시오.”

박신부가 한숨을 쉬며 되받았다.

“우리가 어떻게 당신들을 해치겠소? 그럴 의도도 없지만, 있 다 해도 우리는 당신들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거요.”

그러면서 박 신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고반다를 가리켰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한다 한들 저 사람을 건드려 보지도 못할 거란 건 분명하지 않소?”

“예?”

박 신부와 성난큰곰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 모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저 사람은 꼼짝하지도 못하고 있는데, 왜 겁낸단 말입니까?” 윌리엄스 신부가 묻자 박 신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고반다는 우리를 해칠 수 없을 거요. 그러나 우리도 고 반다를 건드릴 수 없을 겁니다. 그의 몸 주위에 있는 오라를 보 시지 않았소?”

카르나가 껄껄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정말・・・・・・ 당신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군요. 좋습니다. 좋 아요. 제 얄팍한 머리로는 도저히 안 되겠군요. 스승께서 당신과 직접 이야기하시겠답니다.”

별안간 고반다가 카르나와 박 신부 사이에 나타났다. 정말 기 겁을 할 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고반다는 분명 저쪽 모퉁이에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고, 몸을 움직이는 기척조차 전혀 없었는데, 갑자기 몇 미터나 떨어진 자리에 나타났던 것이다. 윌 리엄스 신부가 눈을 크게 뜨며 더듬거리듯 말했다.

“텔레포트…..?”

고반다가 쓱쓱 뭔가를 칠판에 써서 박 신부에게 내밀었다.

‘터놓고 이야기합시다.’

그 말에 박 신부도 정중한 말투로 말했다.

“물론 좋습니다.”

‘난 당신들을 해칠 수 없다.’

“그것 참 다행이군요.”

‘하지만 당신들도 날 어쩔 수는 없을 거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말에 고반다는 잠시 눈을 빛내다가 칠판에 한 사람의 이름을 썼다.

‘아하스 페르츠’

“이 타보트를 가지고 가서 아하스 페르츠를 쓰러뜨려 달라는 겁니까?”

‘그는 결코 좋은 자가 아니다.’

그러자 박 신부가 약간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하스 페르츠만이 당신을 상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를 쓰러뜨려 달라고 부탁하는 겁니까?”

고반다가 타는 듯한 눈으로 박 신부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를 해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당신이 직접 아하스 페르츠를 상대하지 않는 겁 니까? 그는 정말 대단한 자라, 우리도 상대가 되지 못할 겁니다. 우리가 패하고 타보트를 그에게 빼앗기기라도 한다면 어쩌려고 요?”

‘타보트만 있으면 누구든 아하스 페르츠를 상대할 수 있다. 내 가…………..?

고반다는 더 쓰려고 했으나 칠판이 작아 쓸 자리가 없자 칠판 을 지우고 글을 썼다.

‘・・・・・・ 겁내는 것은 그가 아니다. 다른 자들이 타보트를 손에 넣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하스 페르츠를 만나기 전에 검은 편지 결사나 이 단 심판소 사람들이 타보트를 빼앗아 가는 것을 염려하는 겁니 까?”

‘그렇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술 막을 빠져나갈 수 있는 도안을 준 것은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그들이 싸우지 않고 먼저 도망가게 하기 위해서.

그제야 박 신부는 고반다의 깊은 계략을 눈치챌 수 있었다. 카르나는 아까 박신부가 제정신이라면 도안을 주지 않았을 것이라 말했지만, 그것은 즉석에서 생각해 낸 핑계에 불과했다.

고반다가 진정으로 상대하려는 것은 아하스 페르츠였다. 그리 고 아하스 페르츠는 타보트가 있어야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근방에 많은 자들이 깔려 있기 때문에 아하스 페르츠를 만나 기 전에 다른 자들과 마주치면 일이 복잡해질 터였다. 그래서 그 는 다른 자들을 미리 도망치게 만들어 아하스 페르츠를 직접 타 보트와 마주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우리입니까?”

‘그들은 우리의 부하들을 믿지 않을 거다.’

그 글을 보고 승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긴, 칼키파의 부하들이 자신들을 공격한 적을 풀어 준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

“처음부터 우리를 그렇게 이용하려 했습니까?”

그 말에 고반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박 신부가 덧붙였다.

“당신들은 타보트를 훔쳐 낼 때부터 아하스 페르츠와 다른 자 들이 이곳으로 쳐들어올 것을 예측했겠죠? 그래서 주술 막도 미 리 준비했을 테고요. 모든 것이 계획적이었나요?”

‘그렇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발각될 줄은 몰랐다. 주술 막은 준비되었지만 다른 준비가 부족했다.’

“그 부족하다는 것은 타보트를 들고 나가서 다른 자들을 상대 할 사람이 부족했다는 뜻입니까?”

‘비슷하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지금 오고 있는 중이겠군요? 어쩌면 이미 도착했는지도 모르고.”

‘그럴 수도 있다.’

“당신들은 주술 막을 한 번 쳤으니 또 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런 대단한 힘을 지녔으면서 뭘 두려워하는 거죠?”

그 말에 고반다는 괴로운 듯이 갈겨썼다.

이건 두 번 다시 쓸 수 없다.’

“다시 사용 못한다고요?”

‘사용자들도 목숨을 바쳤지만 고대의 장치가 이미 사용되어 부서졌기 때문이다.’

박 신부는 그 말에 그나마 안도했다. 이 엄청난 주술은 알고 보니 고반다나 칼키파 자체의 힘으로 펼친 것만이 아니라 고대 의 알 수 없는 장치에 의존한 것이 분명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수다르사나나 간디바 정도의 물건 같았다.

그리고 사람의 목숨을 바쳐야 하는 장치이니만큼 박 신부의 관점에서 볼 때 절대 좋은 물건이 아니었다. 그 장치가 부서져 버렸다면 이런 엄청난 주술을 다시 쓸 수는 없을 테니 오히려 안 심이 되었다.

고반다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박 신부는 조금 안심이 되어 말머리를 돌렸다.

“우리가 아하스 페르츠를 찾지 못하면 어쩌죠?”

‘타보트를 들고 있으면 아하스 페르츠가 당신들을 먼저 찾아낼 거다.”

“그거 반갑군요. 그런데 만약 타보트가 엄청난 힘을 지녔다면, 그것이 보이는 순간 우리도 전멸할 테죠? 아하스 페르츠와 함께?”

‘당신이 그 정도로 바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상자 의 뚜껑은 특별히 크게 만들었다.

“그 뒤에 숨어서 보이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군요. 정말 세심하군요.”

그 말에 고반다가 한마디를 썼다.

‘당신도 아하스 페르츠를 그냥 두고 싶지는 않겠지?’

“그는 너무도 위험한 존재죠.”

‘동감이다.’

“하지만 당신도 위험한 존재이기는 매한가지요.”

그러자 고반다는 익살스럽게 쓱쓱 몇 자를 썼다.

‘아하스 페르츠는 사람을 해치는 무서운 힘을 지녔지만, 나는 아무도 해치지 못한다. 왜 나를 위험한 존재라 하는가?’

“내가 만약 지금 타보트를 당신에게 사용한다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박 신부의 말을 듣고 고반다가 태연하게 몇 자를 쓱쓱 썼다.

‘내가 타보트를 볼 만큼 바보 같다고 여기는가?’

“텔레포트를 사용할 거요?”

‘자신 있다면 해 보라. 나와 아하스 페르츠 둘 다 적으로 삼게 될 것이다.’

“나는 당신에 대해 조금도 자신이 없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겠군요.”

‘그렇다’

돌연 박 신부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당신은 정말 거짓말을 하지 못합니까?”

그 말에 고반다가 몹시 화가 나는 듯 필체로 거칠게 갈겨썼다.

‘절대 못한다.’

그러다가 고반다는 재빨리 다시 한마디를 썼다.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알겠습니다. 두 가지만 더 묻죠. 이 도안은 정말 주술 막 밖으로 사람을 나갈 수 있게 해 줍니까?”

‘틀림없다.’

“좋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박신부는 한참 고민하는 듯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타보트는 정말로 아하스 페르츠를 쓰러뜨릴 수 있습니까?” 

그 질문에 고반다 역시 한참 고민하는 듯하다가 마침내 칠판에 한마디를 적었다.

‘모른다’

그 글을 보고 윌리엄스 신부와 승희의 안색이 변했다. 하지만 박 신부는 그 글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안심이 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당신이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믿겠습니다. 좋 습니다. 우리끼리 조금만 상의해 보아도 될까요? 혼자 결정을 내 릴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좋다’

고반다는 카르나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 그러자 카르나가 박 신부 일행을 방 한쪽 구석의 문으로 안내했다.

“여기서 쉬시면서 의논해 보시기 바랍니다. 단, 너무 오래 걸 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거든요. 우리를 위해 서도, 우리의 적들을 위해서도 말이죠.”

박 신부 일행이 들어가자 카르나가 문을 닫았다. 일단 안에 들 어온 이반 교수는 묘한 기계를 하나 꺼내 들고 사방을 유심히 살 피더니 말했다.

“도청 장치 같은 건 없는 듯합니다.”

승희도 말했다.

“엿듣는 사람도 없는 것 같네요.”

이내 윌리엄스 신부가 한마디 거들었다.

“엿들을 필요도 없겠지요.”

그 말에 박 신부도 동의했다.

“그럴 것 같군요.’

박신부가 모두의 얼굴을 둘러보며 물었다.

“어떻게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까?” 

주변이 조용해지자 승희가 박 신부에게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뭐가 어떻게 된 거죠. 신부님?”

“사실 갈피를 잡기 힘든 건 나도 마찬가지란다.”

박신부가 우울하게 대답했다.

“너무 모순이 많고, 이해하기 힘든 점이 많아.”

“신부님, 몸은 괜찮으세요?”

“박 신부님, 아프신 곳은……?”

승희와 윌리엄스 신부가 거의 동시에 박 신부에게 물었다. 박 신부는 괜찮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그러나 승희 는 안심이 되지 않는다는 듯 다시 다그쳐 물었다.

“하지만 아까 갑자기 쓰러지셔서……………. 무척 고통스러워하시 는 것 같았는데……. 왜 그러셨어요?”

“정말로 아파서 그런 것은 아니었으니 염려할 것 없단다.”

“그럼 대체 왜……..”

그 말에 박 신부는 슬픈 듯한 표정으로 승희에게 말했다.

“아주 과거의 일이 생각났단다. 아주 과거의 일…………”

“과거의 일요?”

“내가 처음 이쪽 세계에 들어섰을 때의 일 말이다. 나는 처음 부터 신부는 아니었단다. 그건 알고 있지?”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그리고 미라의 일을 겪으면서 성직에 들 어가셨다고……………!”

“그 이전의 일이란다. 나는 처음 군의관으로 월남전에 종군했 었는데, 그때 부상자들의 고통이 내 몸에 그대로 전해지는 것을 느꼈었지. 그래서 월남에 오래 있을 수 없었단다. 그런데 …………… 그때와 같은 일이 다시 생겨서………….”

승희는 놀라서 박 신부를 쳐다보았다. 부상자들의 고통이 그 대로 전해진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이구, 그러면 어떻게 해요?”

“지금은 괜찮단다. 그동안 쭉 괜찮았는데, 왜 하필 오늘 이렇 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만….”

박 신부는 뭔가 깊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이반 교수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지금은 일단 공통된 이야기를 좀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박 신부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 았다.

“그렇죠. 일단 그게 급한 일이군요. 좋습니다. 같이 잘 고민해봅시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한 인도인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거기에는 난(인도식 밀빵)과 기이(인도의 버터), 카레 냄새가 나는 음식 등이 쌓여 있었다. 인도인은 그것을 내려놓고는 인사를 꾸 벅하면서 나갔다.

사실 박 신부 일행은 아침부터 굶은 터라 음식 냄새가 풍기자 모두들 심한 시장기를 느꼈다. 그 음식을 보며 박 신부가 미소를 지었다.

“친절도 하군. 그러면 식사를 좀 할까요?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정말 우리가 풀려난 건가?”

검은 편지 결사와 칼키파가 대치하고 있는 곳을 북쪽으로 빙 돌아 한참이나 멀어져 간 다음에야 무색이 입을 열었다. 세 노승 •과 백호, 현암과 마하딥까지 모두 동행한 채였다.

마하딥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해 백호의 등에 업혀 있었다. 현암은 자신이 업으려 했지만 백호가 만약의 경우 현암은 싸워 야 할지도 모르니 자신이 업겠다고 한 것이다. 용화교의 세 노승 은 안나스가 자신들을 풀어 준 것을 도무지 믿지 못하는 것 같아 현암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분명 내가 짐작도 못하는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스님들께서는 짐작 가시는 바가 없습니까? 백호씨도요?”

그러면서 현암은 안나스와의 대화 내용을 세 노승과 백호에게 들려주었다. 백호가 수상쩍다는 듯 말했다.

“그들의 의도가 결코 좋은 것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랬다 면 왜 우리를 그렇게 엄중히 감금했겠습니까? 무슨 꿍꿍이가 있 는 게 분명합니다.”

무색도 백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랍비 안나스는 대단히 무서운 자일세. 그런 그가 우리를 그냥 풀어 주었다고는 믿기 힘들군. 사실 우리 용화교가 지목한 위험 인물들 중에서 아하스 페르츠와 고반다가 으뜸이기는 하나, 랍 비 안나스와 가야바도 그에 못지않은 위험한 자들이라네. 우리 가 그들과 적대시하고 있는데도 우리까지 풀어 준 것은…………”

“무슨 의도 같습니까?”

“…모르겠네.”

마침내 현암이 한숨을 쉬면서 입을 열었다.

“별수 없지 않을까요? 어차피 여기서 빠져나가는 방법을 찾아 야만 합니다. 우리 또한 칼키파의 주술 막에 갇힌 것은 매한가지 니까요. 그리고 가급적 피를 적게 보도록 할 수만 있다면 한 번 쯤 함정에 빠져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요. 도움을 주시기 바 랍니다.”

“어떻게 도와 달라는 건가?”

“나는 지금 전신의 공력이 모두 빠져나가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며칠이 더 있어야 간신히 본래대로 돌아올 겁니다.” 

“안나스가 수작을 부린 것은 아닌가?”

현암은 자세한 설명을 하고 싶지 않아 그냥 얼버무렸다. 

“그건 아닙니다. 이것은 안 좋은 현상은 아니지요. 제가 연마 한 공력이 좀 특별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필 시기가 좋지 않 았군요. 좌우간 지금 나 혼자의 힘으로는 아무래도 너무 위험할 것 같습니다. 세 분의 공력은 회복되셨나요?”

“거의 회복되었다네. 아까까지는 거의 힘을 쓸 수 없었네만. 안나스의 수법은 너무도 무섭더군.”

그러다가 무색은 무성과 무음을 잠시 바라본 뒤 말을 이었다.

“어쨌든 우리 목숨은 자네가 구해 준 것이니, 여기서 벗어날 때까지 우리는 자네의 말에 따르도록 하겠네. 그래, 어쩔 셈인가?”

“일단 마하딥은 중상을 입었고 성당 기사단 사람이니 그쪽에 인도해야겠죠.”

“그렇겠지. 헌데 그다음은? 그들을 도와 칼키파와 싸우고 싶 은가?”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군요.”

“그렇다면 어쩔 건가? 칼키파 사람들은 성당 기사단 사람들을 공격할 텐데?”

“가급적 그러기 전에 그들을 도망치게 만들고 싶군요.”

“주술 막을 뚫을 방법을 찾겠다는 건가?”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무색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방법을 어떻게 알아낸단 말인가? 랍비 안나스 같은 해박한 자도 알지 못하는데……..”

백호가 끼어들었다.

“결국 주술 막을 깨뜨릴 방법을 아는 자는 고반다 밖에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걸 우리에게 알려 주려고 할 까요?”

“알려 줄 리가 없을 텐데.”

무색이 비관하며 중얼거리자 현암이 말했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호랑이 새끼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무색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그리로 쳐들어가겠다는 건가? 우리 힘만으로 그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우리 힘만으로는 역부족일 테죠.”

“그렇다면?”

무색이 되묻자 현암은 힘없이 웃어 보였다.

“하지만 우리들만이 아니라고 한다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릅 니다. 사실 확률이 좀 낮은 도박입니다만.”

현암은 칼키파의 본거지인 마을 쪽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 편이 이미 와 있을지도 모르니, 거기에 모든 것을 걸어 보는 수밖에요.’

“우리 편?”

“나는 원래 우리 편과 합류하려고 인도로 오던 길이었습니다. 나는 가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미 저기에 와 있을지도 모 르죠.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나, 잘하면 만날 수도 있을 겁니다. 만약 만난다면 가능성이 좀 생기는 거겠죠.”

“만약 만나지 못한다면?”

그러자 현암이 힘없이 웃었다.

“그럼 아무런 방법이 없습니다. 조용한 구석에 처박혀 숨어 있든지 해야겠죠.”

“무슨 신호를 정한 것이 있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왔는지, 오지 않았는지 알려면 칼키파로 들어가 보아야 할 것 아닌가?”

그 말에 현암은 멋쩍은 듯 대꾸했다.

“조금은 난리를 피워야 할 겁니다. 그래야 그들이 알아볼 수있겠죠. 그래서 스님들의 도움이 필요한 겁니다. 저는 공력이 반푼어치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만약 그들이 있다면 제가 온 줄을 알아볼 겁니다. 반응이 없다면 와 있지 않은 것이니 도망쳐야겠군요.”

무색은 뭔가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런데 자네는 정말 지금 공력을 쓸 수 없는가?”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좋아. 그러면 우리가 앞장을 서겠네.”

그렇게 말하고 무색은 무음, 무성과 함께 앞으로 나갔다. 그것 을 보면서 백호가 현암에게 물었다.

“현암 씨는 혹시 박 신부님이 칼키파로 가셨을 거라 보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타보트가 여기 있는 이상, 신부님도 반드시 오셨 을 겁니다.”

“하지만 며칠의 공백이 있었는데….. 이미 다녀가신 건 아닐까요?”

백호의 말에 현암이 애써 쾌활하게 웃어 보였다.

“그렇지는 않았을 것 같군요.”

“어떻게 아시죠?”

“신부님 일행이 진작 타보트를 얻어 갔다면, 지금 이렇게 난리 가 벌어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검은 편지 결사나 이단 심판소 사 람들이 바보는 아니죠. 그들이 이 난리를 치는 것은 모두 타보트 때문이잖습니까? 타보트가 신부님에게 넘어갔다면 이렇게 난리를 피우면서 칼키파를 공격할 이유가 없지요.”

현암은 이야기를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신부님 일행이 우리를 기다리느라 아직 오지 않았을 경우인데…………….”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갑자기 앞에서 휙휙 하는 소리가 들 려왔다. 그리고 비명 소리 같은 것도 조금 들렸다. 현암과 백호는 급히 몸을 숙였다. 현암이 월향검을 꺼내면서 백호에게 말했다. 

“여기 꼼짝 말고 계세요.”

그러나 그럴 것도 없이 무색이 저쪽에서 걸어오면서 말을 건넸다.

“괜찮네. 우리가 처리했다네.”

무색의 말을 듣고 현암이 고개를 들면서 물었다.

“칼키파 사람들입니까?”

그 말에 무색이 얼굴빛을 흐렸다. 현암과 백호는 일어나서 무 색과 함께 걸어갔다. 몇 발짝 걸어가니 무음과 무성이 서 있었는 데, 그 주변에는 서너 명의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쓰 러져 있는 자들은 칼키파 사람들 같지 않았다. 현암은 의아해하 면서 무색에게 말했다.

“이들은…………….”

그러자 무음이 쓰러져 있는 한 사람의 손목을 걷어 올렸다. 순간 팔에 새겨진 조그마한 문신이 보였다. 그것을 보고 무색이 입을 열었다.

“어새신일세.”

현암과 백호는 모두 깜짝 놀랐다.

“어새신? 아니, 그들이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그 말에 무성이 다른 사람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손끝을 보며 무색이 깜짝 놀라더니 말끝을 흐렸다.

“갈수록 태산이군. 저자는 검은 지하드에 속하는 자라는데…”

“예?”

현암과 백호는 놀란 나머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새 신은 이미 백호를 노린 적이 있었고, 검은 지하드는 수아를 노리 고 왔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자들까지 이곳에 있단 말인가?

“이자들도 왔단 말입니까?”

“그런 것 같군.”

“일이 아주 커지는군요.”

“그런 것 같네.”

무색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이제 알겠군. 칼키파가 아무리 크고 고반다가 아무리 대단한 자라고 해도, 세 곳의 세력을 모두 상대할 만큼 크지는 않다네. 이제 보니 그들도 다른 곳과 연합을 한 모양이군.”

“어새신은 검은 편지 결사와 손을 잡고 있지 않았나요?”

백호가 묻자 무색이 고개를 저었다.

“산중인 하산이 어새신을 창설한 이래 지금까지도 그들은 청부 집단일 뿐이네. 검은 편지 결사가 그들을 고용할 수 있다면 칼키파도 고용할 수 있지.”

“그러면 검은 지하드는…………? 그들은 회교도이고, 칼키파는 힌두교도인데…….”

“이단 심판소와 검은 편지 결사가 손을 잡은 것처럼, 그들도 손을 잡은 것 같네. 고반다도 정말 상당한 자로군.”

그러자 무성이 무색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순간 무색은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현암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칼키파는 전적으로 검은 편지 결사를 상대하고 있 겠고. 이단심판소와 성당 기사단 사람들은 이들의 공격을 받고 있을 걸세. 지금 우리가 그 한복판으로 뛰어든다는 건 자살행위 일세. 아무래도 여기서 나갈 방법을 먼저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네. 시간이 없으니까.”

“그렇다면 마하딥은요?”

“일단은 힘들더라도 업고 가세.”

그리고 무색은 무음, 무성과 함께 재빨리 방향을 바꾸어 전진 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 같은 동작이었다. 현암이 멍하니 그 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백호도 그들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정말 손발이 척척 맞는군요. 말도 못하고, 귀도 안 들린다면서 어찌 저렇게 의사소통이 잘될까요?”

“그거야 전음술이란 걸 할 줄 아니까 그렇지요.”

“전술이라는 게 뭐죠?”

“그건…………. 흠, 남에게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전달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죠.”

“텔레파시 같은 건가요?”

“그런 초능력은 아니고, 그냥 말과 비슷한데 높은 공력으로 목소리를 감싼다고 할 수 있는 거죠.”

“나 같은 경우는 그림의 떡이군요.”

그 말에 현암이 갑자기 화들짝 놀라면서 백호에게 물었다.

“백호 씨, 지금 뭐라고 했나요?”

현암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백호가 약간 놀라며 대답했다.

“예・・・・・・? 아니, 난 그냥…….”

“아까 내가 안나스와 이야기할 때 백호 씨는 노승들과 같이 있었습니까?”

“아뇨, 그들은 다른 곳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이 백호 씨에게는 무슨 질문을 했나요?”

“내겐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습니다.”

현암은 뭔가 생각해 보는 듯하다가 무릎을 탁 쳤다.

“그렇군!”

“뭐가 그렇죠?”

그러나 현암은 백호의 말을 듣지 못한 듯 중얼거렸다. 현암의 눈이 반짝거리며 빛나는 듯했다.

“그렇구나……. 그래서 ………! 그러면 모든 것이 다……………..”

거기까지 중얼대다가 현암은 백호의 의아해하는 눈빛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나중에 알게 될 겁니다. 어서 서두릅시다.”

“도대체 ………….”

말끝을 흐리는 백호를 현암이 재촉했다.

“나중에 알게 된다니까요. 어서 갑시다. 저들의 뒤만 따라가면 될 겁니다.”

“따라가면 어떻게 된다는 거죠?”

“어떻게 되든 간에, 가장 핵심적인 곳으로 가게 될 겁니다.”

현암은 거리낌 없이 세 노승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백호는 영 문을 알 수 없었지만 마하딥을 업고 현암의 뒤를 따라 애써 달음 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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