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4권 3화 – 용(龍)과 봉(鳳) 3 : 인질 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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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말세편 4권 3화 – 용(龍)과 봉(鳳) 3 : 인질 교환


인질 교환

퇴마사들의 아지트는 무너지지는 않았으나 몇 번의 폭발로 인 해 쑥밭이 된데다 검은 편지 결사에게 발각되었으니 이곳을 오 래 이용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당장은 마땅한 장소도 없고, 아까의 붉은 머리 여자가 인질 교환을 위해 연락을 취해 올 것이므로 그들은 일단 아지트 로 들어갔다. 그리고 죽은 두 사람의 시체를 감추는 일은 성난큰 곰과 윌리엄스 신부 두 사람이 알아서 처리해 주었다. 승희와 맞 섰던 나머지 두 사람은 어디로 도망쳤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진정되자 박 신부는 황달지 교수에게 물었다.

“그런데 ・・・・・・ 그 여자가 말했던 물건이란 게 대체 뭡니까?”

“글쎄요. 점토판인데………… 중요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아무리 봐도 모조품 같던데…………. 허나 지금은 그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큰일이군요.”

황달지 교수가 점토판에 대해 설명하고, 승희가 부가 설명을 하자 박 신부의 안색이 착잡해졌다. 박 신부는 말없이 품에서 세 개의 점토판을 꺼내 보였다. 이번에 교황청 이단 심판소에서 본 의 아니게 얻게 된 물건들이었다.

“이걸로 교환이 가능할지 모르겠군.”

그러자 승희가 화가 나는 듯 쏘아붙였다.

“교환은 무슨 교환이에요? 이렇게 우리 편이 다 모였는데, 그 여자 하나를 못 당하겠어요?”

“그러나 이게 없으면 교환에 응하지 않을지도 모르잖니, 승희 야.”

그때 연희가 박 신부에게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이들은 무사할까요? 아까 그 여자…………… 퍽 잔혹해 보이던데.”

“글쎄다. 나도 걱정이다만……………. 하지만 저쪽도 원하는 게 있 으니 당장 어떻게 하지는 않겠지…..

말끝을 흐리는 박 신부를 보며 승희가 다시 성질을 부렸다.

“에이, 투시라도 되면 당장 찾아서 가만 안 놔둘 텐데.”

“그런데 혹시라도 그들이 원본을 필요로 한다면 어쩌죠? 우리가 지닌 이 점토판이 아니라 황 교수님이 지닌 점토판을 원하는 것이라면…….”

“일단 내가 집으로 전화를 해 보겠소. 난 가족이 없지만, 집을 돌봐주는 사람은 있으니까.”

곧바로 황달지 교수는 중국의 자택으로 전화를 했으나, 전화 는 불통이었다. 불안해진 황 교수는 이번에는 근처에 사는 사람 들에게 전화를 해 보았다. 그런데 그가 확인해 본 바에 의하면, 황 교수가 없는 사이 그의 집에는 불이 났다.

아연해진 황 교수가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그런 사실을 모두 에게 전했다. 그러자 박 신부가 탄식하듯 내뱉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려.”

“그런데 검은 편지 결사가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요? 교수님을 해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던가요?”

“교수님, 그 물건을 어디에다 두셨습니까?”

“예? 아…………… 그건・・・・・・ 나는 원래 성미가 깔끔하질 못해서 잘 기억이…………….”

“교수님, 잘 생각해 보십시오. 혹시 남들이 찾지 못할 그런 곳 에 두셨습니까?”

“아…………! 그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군요. 맞아요. 남들이 찾기 어려운 곳일 겁니다. 생전에 우리 마누라가 귀중품을 보관하던 곳에 두었을 겁니다. 귀중해서가 아니라 나중에 돌려줘야 될 물 건이므로 찾지 못할까 봐 그랬는데…”

“그 장소가 어딥니까? 아니, 아니, 이제는 소용없겠군요. 어쨌 든 불을 지른 것을 보면 물건을 발견한 것 같으니까요.”

“그런데 ・・・・・・ 물건을 원하는 거라면 나를 협박하면 그만일 것 을……. 그들은 왜 나를 죽이려 하는 걸까요?”

황 교수의 질문에 박 신부가 조금 생각해 보더니 황 교수에게 되물었다.

“교수님은 그 점토판을 해독해 보셨다고 했죠? 그게 어떤 내 용이었습니까?”

“대강은 기억나지만, 그다지 학술적인 가치가 없는 황당한 내용입니다.”

“일종의 예언 아니었던가요?”

“그렇게 볼 수도 있는 내용이군요.”

“그렇다면 교수님이 목표가 된 것은 그 점토판 때문일 겁니다. 내용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점토판 자체는 찾는다 하더라도, 내 용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다른 점토판이 있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죠.”

“그런 내용이… 도대체 왜 중요한지 ……………. 나는…………… 나 는……”

황 교수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물건 하나 잘못 얻었다가 집을 홀랑 불태우고 목숨까지 위협받고 있으 니 말이다. 그것도 보통 사람이 노리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라고 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자들에게 말이다.

“학술적으로는 가치가 없어도, 다른 용도로 볼 때에는 가치 있 는 내용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나는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있 군요. 교수님, 교수님에게 간 점토판은 모두 몇 개였습니까?” 

“몇 개라뇨? 단 한 개였습니다.”

“한 개의 점토판으로 내용을 해독하셨단 말입니까?”

그 옆에서 연희도 궁금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실상 최초로 얻 은 한 개의 점토판을 해독해 보려고 연희는 무척이나 애를 썼지 만, 한 개의 점토판으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황 교수는 그것을 해독했다니……………

“별문제가 없었는데요. 그러고 보니 글자들이 번갈아 띄엄띄 엄 씌어 있어 읽기가 조금 까다롭기는 했습니다만………….”

“번갈아 읽히는 그 부분들이 깨어진 부분인데요? 정말 황교 수님이 보신 것이 지금 이 점토판과 같은 모양의 것들이었습니 까?”

“아………! 물론 이것과 같은 것이었지요. 그런데 내가 받았던 점토판은 한 개였지만, 온전한 모습을 지닌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은 모두 일곱 조각으로 나뉘어 있으며, 이단 심판소의 가디언들이 죽을 힘을 다해 네 조각을 얻었고, 성당 기사단원들이 세 개의 조각을 모았다.

그래서 지금은 이단 심판소에 박 신부가 돌려준 것이 한 조각, 박 신부가 본의 아니게 가지고 오게 된 것이 세 조각, 그리고 성 당 기사단에 세 조각의 점토판이 남아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황 교수는 깨어지지 않은 온전한 상태의 점토판을 보았다니, 이것 은 또 무슨 소리일까?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요. 내가 직접 해독을 했는데, 왜 내가 모르겠습니까?”

연희가 뭔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황 교수에게 물었다. 

“교수님, 교수님께서 해독하신 점토판은 아무래도 모조품 같 았다고 하셨죠?”

“그렇소.”

박신부가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점토판의 원본을 복원했다는 건가? 하지 만 점토판은 모두 일곱 조각으로 나뉘어 각각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 있는데….”

곁에서 듣고 있던 이반 교수가 입을 열었다.

“황 교수님의 점토판은 모조품이라고 했지만, 중요한 것은 내 용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기도 점토판이 있으니, 부분적이라도 맞춰 봐서 진위를 가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게 좋겠군요. 그렇다면 …………… 저와 함께 이것들을 같이 좀 보도록 해요. 이것들이 정말 교수님이 해독하신 것과 같은 점토 판이라면 비록 전체 해석은 안 되어도 비슷하기는 할 거예요. 아 무튼 우리는 절반 이상의 내용을 가지고 있는 셈이니까요.” 

“하지만 나는 내가 해석한 것의 원본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그리고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는데……………..

“부분적이라도 해독 작업을 반복한다면 기억이 더 생생하게 날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러면서 연희는 박 신부가 얻어 온 점토판과 예전의 점토판 탁본을 같이 들고 황 교수와 함께 조용한 옆방으로 갔다. 다른 사람들은 암호 해독 같은 골치 아픈 작업에 참여하고 싶지도 않 았을뿐더러 끼어들 만한 지식 같은 것도 없었으므로 두 사람을 내버려 두고 준호와 아라를 구할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로 했다.

그러나 성난큰곰과 윌리엄스 신부가 돌아오지 않았고, 상대방 에게 연락도 오지 않아 어떻게 대처할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그 래서 나중에 상의하기로 하고 일단은 화제를 바꿔 한담을 나누 었다.

먼저 사람들은 여자와 맞서서 엄청난 위력을 보였던 주술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그것이 아직 어리기만 한 수아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는 박 신부의 대답에 무척이나 놀랐다. 그리고 수아에 게 직접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령들의 보호로 그런 힘을 가지 게 되었다고 박 신부가 찬찬히 설명하자 더욱 놀라워했다. 그러 다 보니 화제는 자연스럽게 수아에게서 붉은 머리의 여자에게로 넘어갔다.

그때까지 잠자코 상황을 보고 듣기만 하던 바이올렛이 이제야 말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 반가운 듯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검은 편지 결사가 급속도로 전 세계의 공포의 대상 이 된 것이 이해되네요. 투시력에다가 그런 정도의 여자가 있으 면 누군들 해치우지 못하겠어요? 그런 자들이 검은 편지 결사에 많을까?”

그 말을 이반 교수가 되받았다.

“그건 아닐 거요. 듣자 하니 지난번 검은 편지 결사와 어새신 이 여기 파견되어 백호 씨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했다더군. 그러 니 그들도 한국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알고, 이번에는 가장 강한 자를 보냈다고 봅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들 모이시게 된 거죠?”

승희의 질문에 박 신부가 조용히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일이 커질 것 같고, 우리에게 맞설 사람 들도 너무 많을 것 같아서 내가 모두에게 도움을 청했다. 원래는 우리끼리 해결하려 했지만, 교황청에 가 보고 난 뒤 마음을 바꾸었지. 그래서 가급적 많은 분들께 연락을 드리고 합세하기로 해서 시간이 이리 오래 걸린 거란다.”

박신부는 교황청에서 돌아오는 길에 성난큰곰에게 연락을 취 하고, 인도의 시타 교수에게도 연락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 자승희가 물었다.

“왜 시타 교수에게 연락을 했죠? 로파무드의 집에 안 하시고?”

“예전에 보내왔던 편지에 연락처가 그쪽으로 되어 있었으니까 그랬단다.”

“왜 그리로? 결혼이라도 한 건가요?”

승희가 웃으며 묻자 로파무드가 차분히 대답했다.

“정말 갈 곳이 없었어요. 아버님도, 마을 사람들도 모두 돌아 가셨고요. 칼키파 때문이죠. 그리고・・・・・・ 바바지 님도 세상을 떠 나셨어요.”

로파무드의 말에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성인인 바 바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어떻게 그런 분이?”

로파무드는 자신도 모른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몰라요. 이야기만 들었어요. 언뜻 듣기로는 누군가에게 습격을 받았다고도 하고, 세상이 싫어져 몸을 버리고 천상으로 가셨다고도 하는데 잘은 모르죠. 그러나 아무튼 이 세상에 안 계신 것만은 확실해요. 그분을 직접 모시던 분께서 그분이 돌아가셨다고 했으니까요. 그리고 그분의 아쉬람(인도에서 수도자가 쉬는 소박한 거처나 휴식처를 일컫는 말)이 불타 버린 것으로 보 아 저는 칼키파가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해요.”

“칼키파가 속세를 떠난 성인을 왜……..?”

“바바지 님은 인도 제일의 대성인인데,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짓거리가 아무래도 켕긴 것이겠죠. 바바지 님께서 그들을 용납 하시지 않을 것 같아 미리 선수를 친 것 같아요.”

로파무드는 시타 교수와 만난 이후 그의 집에서 지내는 이유 는 달리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과거 칼키파가 학살을 감행 한 마을에서 로파무드가 해골존의 힘을 빌려 혼자 항거했던 것 도 그러한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박 신부는 유럽에서 돌아오는 길에 봄베이에 잠시 들러 로파 무드를 만나서 아예 함께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윌리엄스 신부와 이반 교수와는 처음부터 동행했으며, 성난큰곰과 바이올 렛은 비행기 도착 시간을 맞춰 김포공항에서 만났다.

아무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지금 잠시 현암과 함께 떠나 있 는 백호와 잡혀간 준호, 아라를 제외하면 열 사람의 조력자가 한 데 모인 셈이었다.

그러나 박 신부는 준후가 어디로 갔는지 소식이 없는 것에 다 소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박 신부는 승희와 연희에게 준후가 어디로 갔는지 아느냐고 물어보았지만 그들도 준후와 다툰날 이후로는 준후를 보지 못했다. 박 신부는 더 이상 준후의 이 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승희는 현암이 몹시 걱정되는 듯, 세크메트의 눈을 만지작거 리면서 계속 현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주머니 에 뭔가가 들어 있는 것을 깨닫고 그 물건을 꺼내 보았다. 그것 은 아까 무심코 빼앗은 슬링샷이었는데, 무기 전반에 대해 정통 한 지식을 가진 이반 교수가 그것을 보고 말했다.

“상당히 좋은 물건이군. 기왕 당신이 손에 넣었으니, 잘 사용 하면 쓸만할 거요.”

“내가요?”

“슬링샷은 다루기가 그리 어려운 편은 아니오. 그리고 많은 힘 이 필요하지도 않고.”

“뭐, 굉장한 활을 쏘는 분이 있는데 내가 이걸 배워서 뭘 하겠어요?”

그러고는 승희는 로파무드를 보며 물었다.

“당신이 아까 활을 쏘았지요?”

“맞아요.”

“참 신기하던데……………. 화살도 없이 어떻게 활을 쏘죠?”

승희는 자신과 똑같은 모습의 로파무드와 이야기하는 것이 재 미있어 쓸데없는 질문을 한 것이었지만, 로파무드도 재미있는지 웃으며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사실 승희는 아까 결혼이라도 한것 아니냐는 식의 경솔한 말로 로파무드의 신경을 건드린 것 같 아 미안해서 기분을 전환시켜 주려고 말을 걸었던 것이다.

로파무드의 영어 솜씨는 상당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의식 없는 갓난아기였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빨리 세상일과 말을 배운 것이다.

“그건 아스트라라고 해요. 고대 인도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투 주문이죠. 화살을 메겨서 쏘면 훨씬 더 막강하지만, 화살을 가지고 다니기도 그렇고, 활을 제대로 당길 힘이 없어서…………….” 

그 말을 듣고 승희는 로파무드의 활을 눈여겨보았다. 그 활은 아주 크지는 않았지만 정말로 강해 보였으며, 고색창연한데다가 느껴지는 기운 또한 심상치 않았다.

“그 활도 대단한 것인가보죠?”

“맞아요. 보는 눈이 있네요. 이건 간디바”라고 해요.”

“간디바요? 활에 이름이 있는 건가요?”

“예, 유서 깊은 활이니까요. 승희 씨, 과거에 수다르사나를 찾아 인도에 오셨죠?”

“어… 그 일을 아시네요?”


* 「마하바라타」의 영웅인 아르쥬나가 사용했다는 활. 마하바라타」의 내용에는 간디바의 활 소리가 특이하고 멀리까지 울려서 그 소리만 듣고도 아르쥬나가 어 떻게 싸우는지 알 수 있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때 나는 아무 기억도 없었지만, 나중에 아버님께 들었어요.

이건 당시 수다르사나를 쓰던 크리슈나의 친구 아르쥬나가 사 용하던 활이에요.”

“그래요?”

승희는 잘 몰라 심드렁하게 대답했지만, 곁에 있던 바이올렛 이나 이반 교수는 얼굴색이 눈에 띄게 변했다. 아르쥬나라면 크 리슈나와 함께 마하바라타의 주인공이며, 전쟁에서 무적의 영 웅이었던 인물이었다. 신이었던 크리슈나보다는 못해도, 아르쥬 나도 이 간디바를 들면 천하무적이 되었다.

그것이 정말 그 간디바라면 놀라울 정도로 강력한 물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이올렛은 벌써 반쯤 눈이 뒤집혀 로파무 드에게 물었다.

“아니.. 아니, 이걸 어디서 얻으셨죠?”

놀라움을 실은 바이올렛의 질문에 로파무드가 태연히 대답했다.


* 「마하바라타』의 주인공 중의 한 명. 크리슈나의 친구이며, 그의 도움을 받지만 사실상 마하바라타」의 많은 부분은 그가 거의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전쟁 이야 기이다.

**비야사가 지었다는 고대 인도의 대서사시로서 라마야나와 더불어 인도 고대 문학의 양대 산맥을 이룬다. ‘마하바라타’는 ‘대(大)바라타족’이라는 뜻이며 한 종족의 흥망성쇠를 다루고 있지만 역시 그 백미는 아르쥬나를 크리슈나가 깨우 치는 바가바드기타」와 환상적인 고대의 전투 장면이라 할 것이다.


“바바지 님에게서요. 저에게 아스트라를 가르쳐 주신 것도 바 바지 님이세요. 저는 아스트라만 배웠는데, 나중에 바바지 님을 모시던 분이 바바지 님이 생전에 당부하셨다고 이걸 전해 주셨어요.”

“아…..”

과거에 수다르사나를 바바지가 가지고 있었으니, 간디바도 그 가 가지고 있었을 성싶었다. 더구나 대성인인 바바지에게서 직 접 배웠다면 로파무드가 짧은 시간 내에 이토록 강력한 주문을 쓰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로파무드는 전혀 꾸밈없고 거짓 없는 태도로 승희에게 말을 건넸다.

“사실 이 물건도 승희 씨가 사용하시면 훨씬 더 잘 이용하실 수 있을 텐데요.”

“아뇨, 아뇨! 내가 그렇게 귀한 걸 어떻게 받아요!”

“이게 귀중한 물건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물건일수록 더 잘 사용할 수 있는 주인에게 가야 하지 않겠어요? 승희 씨가 사용하 신다면 저도 기쁘겠어요.”

“아뇨, 난 됐어요. 내가 그걸 가져서 무엇하게요. 그………… 아스 트란가, 그런 주문도 하나도 모르는걸요?”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당신은 특별한 분이시잖아요. 당신이 사용하시면 저보다는 훨씬 나을 거예요.”

로파무드는 마스터의 영혼이 다시 정화되어 재생한 것이라고

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선량하고 공손했다. 그러나 주술에 대한 마스터의 무서운 능력은 타고난 것인 듯, 그녀는 인도의 비전인 아스트라를 몇 년 만에 수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평소에는 이렇게 공손하고 예의 바르며 화를 잘 내지 않았지만, 한번 화가 나면 과거의 마스터만큼이나 사나 워져 아무도 그녀를 말릴 수 없었다. 아무튼 그녀는 아스트라를 배운 것을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했으나, 이것은 극도로 무서 운 위력을 지니고, 또 까다롭기 그지없는 전투용 주술이었다. 승희는 그 내막까지는 잘 몰랐지만, 구태여 지금 와서 그렇게 힘든 주술 공부 따위를 하고 싶지는 않아 극구 사양했다.

그때 바이올렛이 혼자 중얼거렸다.

“정말 저것이 진짜 간디바고, 로파무드가 아스트라를 자유롭 게 쓸 수 있다면 그녀는 이제 현암 씨나 준후 군에게도 크게 뒤 지지 않을 거예요.”


승희와 로파무드를 비롯한 아지트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시체를 처리(?)하러 나갔던 성난큰곰과 윌 리엄스 신부가 돌아왔다. 성난큰곰은 시체를 처리하고 윌리엄스 신부는 그 가련한 죽음을 추도하기 위해 갔던 것이다.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대뜸 박 신부에게 말했다.

“이런 것이 문 앞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검은색 편지였다. 아마도 아까의 여자가 귀신같은 솜 씨로 되돌아와 써 붙이고 간 것이리라. 지금 이 자리에서 현암과 준후만 빼고 세상에서 가장 능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 이 모여 있는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대단하군.”

“세상에 어떻게 그런 여자가 있을까? 그렇게 지독한 여자는 처음이군요.”

이반 교수와 바이올렛의 말에 성난큰곰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의 뜻을 전했다.

지금껏 내가 눈으로 본 최고로 강한 사람 중 한 명이다.

곧이어 이반 교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까 그녀는 우리 모두가 공격했는데도 모조리 피해 버렸소. 우리는 적수가 못 될 것 같소. 다음에 만나면 인정사정 두지 말 고 총기를 써야겠소.”

“총이 과연 소용 있을까요? 뭐, 그럴 것까진 없다고 봅니다만…..”

윌리엄스 신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자 바이올렛이 자신 있게 대꾸했다.

“그 여자가 아무리 강해도 신부님을 당할 수는 없을 거고, 만약 신부님과 현암 씨가 같이 있다면 삼분을 버티지 못할 거예요. 게다가 준후 군까지 합세한다면 일 분도 못 버틸 겁니다. 내 장담하죠.”

그 말에 이반 교수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농담을 했다.

“입씨름으로는 당신에게 이십 초도 못 버틸 거요. 아무튼 그 여자는 아까 내 성수 수류탄에 놀라는 것 같던데……………. 흑마술을 사용하는 것이 분명하오.”

그러나 윌리엄스 신부와 성난큰곰이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꼭 그렇다고는 볼 수 없소.”

“어째서요?”

이반 교수가 의아해하자 윌리엄스 신부가 말했다.

“나는 아까 그 여자와 한 번 직접 부딪쳤소. 그런데 그 여자의 냉기는 흑마술에서 비롯된 것 같지 않았소. 성령의 기운 같은 것 도 아니었지만 사악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그야말로 담 담한 것이었소.

성난큰곰은 뭐라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바이올렛이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원소력이 아닐까요? 자연력을 사용한다면 그런 느낌을 줄 거예요.”

그 말에 이반 교수가 고개를 저었다.

“원소력과는 조금 다른 것 같소. 지(地), 수(水), 화(火), 풍 (風)의 네 원소가 서양의 주술에서는 일반적이며, 보다 심화된 다고 해도 아스트랄이 추가될 뿐이오. 그러나 그 여자의 냉기는 네 원소 중 그 어느 것과도 같은 것이 없더군요.”

“하지만 네 원소의 기운을 응용하면 그런 냉기를 만들어 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아요!”

목소리를 높이며 바이올렛이 자신 있게 말하자 이반 교수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받았다.

“하지만 네 원소의 기운을 응용할 수 있을 정도의 여자라면 아 까 왜 냉기만 사용했단 말이오? 물론 냉기의 힘도 막강했지만, 만약 원소력을 응용해 복합할 만한 힘이 있다면 왜 원소를 직접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그녀의 능력으로 불을 쏘아 댔다고 상상 해 보시오. 신부님은 몰라도 우리는 단번에 새카맣게 타 버렸을 거요.”

그때 편지를 보고 있던 박 신부가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잠시 주목해 주십시오.”

박신부의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 광(光)이라고 하며, 서양의 4대 정령(지, 수, 화, 풍)이 하나로 집중되었을 때 나타나게 되는 지고무상의 힘이라고 한다. 서양의 마법사들이 흔히 사용하는 오 각형의 별 모양인 펜타그램(오망성)의 다섯 개의 돌기는 각각의 4대 정령과 이 아스트랄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건 역시 그 여자가 보낸 편지가 맞는 듯합니다. 그리고 내일 오후 여덟 시에 과천의 놀이동산에서 아이들과 점토판 세 개 를 모두 바꾸자고 하는군요……………..”

바이올렛은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점토판 세 개라뇨? 황달지 교수가 보았던 건 한 개뿐이고, 그나마 지금은 가지고 있지도 않잖아요?”

그러자 승희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그 여자와 한편인 자 중에 투시력을 지닌 자가 있어요. 아마 그자가 아이들을 통해서나, 아니면 황 교수나 연희 언니를 투시 해서 모두 알아냈을 거예요.”

“아무튼 더 들어 주십시오. 점토판 세 개를 모두 주면 아이들 을 풀어 주고, 황 교수의 목숨도 더 이상 노리지 않겠다고 하는 군요. 그러나 속임수를 쓰려고 하면 아이들의 목숨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박 신부는 고개를 약간 갸웃거리며 덧붙였다.

“그런데 이상하군.”

“뭐가요?”

“검은 편지 결사에서 왜 점토판을 얻으려 하는 걸까?”

“예?”

승희가 이해를 못하자 박 신부는 차분히 그 의문을 설명했다.

“이미 황 교수의 집을 습격해서 해독본이나 점토판을 찾았다면, 지금에 와서 굳이 점토판을 달라고 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나? 그리고 점토판을 원한다면서 왜 황 교수를 죽이려 한 거지?”

“황 교수님이 내용을 기억할까 봐 목숨을 해치려 한 것이겠죠. 아까 그렇게 결론을 내렸잖아요.”

그러나 박 신부는 아무래도 뭔가가 찜찜한 듯했다.

“아무래도 이상해…………. 뭔가 마음에 걸려. 연희 양이 어서 해 독을 해 주었으면 싶은데…………….”

그때 연희와 황 교수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다시 방으로 돌아 왔다. 황 교수는 여독이 쌓이고, 집이 불타고, 기이한 사람들의 초인적 격투에 휘말린데다가 잘 생각나지도 않는 기억을 더듬어 가며 힘든 작업을 한 끝이라 거의 기절할 듯 창백한 안색이었다. 그러나 연희는 기이하다는 듯이 급히 박 신부에게 말했다. “조금 이상해요. 이 점토판과 황 교수님이 해독한 점토판의 내 용은 거의 다 같지만, 상세한 부분은 약간 다른 것 같아요.”

곧이어 황 교수는 피곤한 눈에 쌍꺼풀을 짙게 드리우면서 억 지로 눈을 뜬 뒤에 말을 이었다.

“내가 잘못 기억하는지도 모르지만 두 개가 좀 다른 것 같은 느낌이에요. 가령 나는 분명 ‘해와 달의 어머니’라는 구절을 본 것 같은데, 이것, 그리고 이것의 순서를 볼 때 절대 해와 달이라 는 단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말입니다.”

황 교수는 연습지 위에 마구 그려진 기이한 모양의 문자들을 가리켜 보이면서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아무도 그 해독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단 황 교수의 기억이 맞는다면 황 교수가 해독한 점 토판은 복사본이며, 누군가가 원본에 약간의 손을 대어 복사본 을 새로 만든 것이라고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황 교수의 몰골이 너무나 안돼 보여, 사람들은 황 교수에게 그 만 쉬라고 권했다. 황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옆방으로 들어간 뒤 오 분도 되지 않아 코 고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데 내일은 어떻게 하죠? 하필이면 놀이동산이라니…!”

이반 교수가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렸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웃으며 말했다.

“왜 그러시죠? 놀이동산이 뭐 어때서요?”

“생각해 보시오. 내일은 일요일이니 놀이동산은 아이들로 가 득 찰 거요. 게다가 놀이동산에 내 발칸포나 벨지움콘바인, 햄머 핸드를 지니고 갈 수는 없지 않소?”

묵묵히 있던 성난큰곰도 거들었다.

나도 그런 곳에 가기에는 너무나 눈에 띈다. 드러내 놓고 가기는 어 려울 것 같다. 더구나 아이들이 많은 곳에서는 주술을 사용할 수도, 싸울 수도 없지 않은가? 아이들이 다칠 우려가 있으니………….

로파무드의 활도 가지고 나가기에는 너무 거추장스러웠고, 수 아도 정령들이 아무 때나 힘을 쓸지 모르니 역시 데리고 나가기 는 위험했다. 장소 때문에 절반의 전력이 꺾인 것이나 다름없는 터였다.

그에 동의한다는 듯이 윌리엄스 신부도 한마디 했다.

“정말 교묘한 함정입니다. 그 여자는 사람을 마구 해칠 수 있 겠지만, 우린 그럴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 여자는 자기 혼자서 는 우리를 상대하기 힘들다고 보고 일부러 사람들이 많은 장소 를 택한 겁니다. 만약 그 여자 쪽이 강하다면 한적한 장소를 골 라 우리를 기습했겠지요.”

걱정 어린 모두의 말에 박 신부가 웃으며 이렇게 설명했다. “그 여자가 마지막으로 적은 말은 이겁니다. 좀 쑥스러운 내용 이지만, 그냥 솔직하게 그대로 읽지요. 흡혈귀 같은 자가 있던데 그자가 점토판을 가지고 와라. 혼자 오라고 한다고 해도 혼자 오 지 않을 줄은 안다. 몇 놈이 오건 신경 쓰지 않겠지만, 덩치 큰 신 부는 절대 끼어들면 안 된다. 약속을 어기면 아이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윌리엄스 신부는 ‘흡혈귀 같은 자’라는 말에 유머스럽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말했다.

“박 신부님이 무서운 줄은 아는 모양이군요.”

“글쎄요・・・・・・”

“좌우간 그렇다면 그 여자가 딴짓을 하더라도 우리는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잖습니까? 그 말대로 할 수는 없을 듯한

……”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군요. 그 여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 으면 아이들을 구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 여자도 정말 점토판 을 가지고싶다면 일단 순순히 교환에 응하겠지요.”

“그 여자가 냉기를 마구 발휘한다면 우리 편 아이들이 문제가 아니라 그곳에 있을 수많은 아이들이 위험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그 여자 자신도 빠져나가기가 어려워질 테죠. 그 런 짓을 하는데도 우리가 정체를 감추고 좌시할 수만은 없지 않 겠습니까? 혼전이 벌어지면 그 여자도 이번에는 무사하지 못할 것을 알 테니까요.”

“그 여자도 자기편을 우르르 달고 나오면 어쩌죠? 아니면 다 른 아이를 잡아 인질로 삼는다면…………?”

“자기편을 우르르 달고 나올 수 있다면 그런 복잡한 장소를 고 를 이유가 없겠죠. 아무래도 나는 일단 그 여자의 말대로 응해 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난리를 벌이 는 짓은 그 여자도 좋아할 리 없습니다. 그러니 편지에 적힌 이 말은 그 여자가 싸울 의사가 없거나, 가급적 싸우지 않고 넘어가 겠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모두들 다른 방법이 없었으므로 박 신부의 말에 동조했지만, 만에 하나를 대비하여 모든 장비를 준비해야 한다는 데에 의견 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고 난 뒤 다른 사람들은 내일 있을지도 모르는 격전에 대 비해 휴식을 취했지만, 이반 교수만은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공항에서 발각되지 않으려고 조각조각 분해한 자신의 장비를 두 들겨 맞추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

박 신부는 뭔지 모를 불안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 정체 불명의 여자가 두렵다기보다는, 지금까지의 일들이 뭔가 앞뒤가 잘 들어맞지 않는 것 같은 데서 오는 불안감이었다.

문득 박 신부는 현암이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만약 논리력이 뛰어난 현암이 있었다면 이 미심쩍은 꼬투리를 밟아 진실을 찾 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박 신부 역시 총명한 사람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추리해 나가 는 데에는 자신이 없었다. 더구나 상대가 투시력이 있다면 경솔 하게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결국 박 신부는 혼자 차근차근 짚어 보기로 하고, 미심쩍은 생각을 일단 접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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