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4권 7화 – 하르마게돈 1 : 현암의 선택
현암의 선택
현암은 며칠 만에 처음으로 안심하고 눈을 붙일 수 있었다. 그 간 무너진 성당 기사단 본부를 치워 생존자들을 구출하느라 몹 시 힘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상외로 그곳에 남아 있던 자들은 장님이 된 키건을 제외하 고는 기사의 수뇌 인물들이 아니었다. 아하스 페르츠가 언약 궤를 지키는 데 어째서 그런 사람들을 두었는지 조금 의아할 정 도였다.
그러나 현암은 사람들을 상당수 구출한데다 해밀튼의 도움으 로 그들에게서 많은 정보를 얻어 냈고, 때마침 박 신부와 연락이 되어 한국에서 벌어진 위기 상황에 자신이 큰 도움을 줄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박신부가 아녜스 수녀에게 말했던 내용은 사실 절반 이상 현암이 추리한 것이었다. 단 한 가지, 자신이 구해 준 키건이 현암과 승희가 같은 편임을 알고 병원에서 사라진 일이 마음에 걸렸다……
한편 박 신부의 말에 의하면, 운명의 날까지는 대략 십오 일 정도가 남았으니 인도에 들를 시간 정도는 있을 것 같다고 했고, 모두 모아서 그리로 가겠다고 했다. 이제 남은 일은 인도로 가 박신부 및 승희 일행과 합류하는 것뿐이었다. 지금 현암은 바로 그 비행기 안에 있었다.
현암은 언약궤를 찾으려는 해밀튼의 집념도 들어줄 겸, 고반 다가 도대체 어떤 자인지도 알아볼 겸 해서 그리로 향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박 신부와 상의한 내용이었는데, 해밀튼이 아는 사실을 아하스 페르츠도 안다고 가정했을 때, 박 신부는 그들이 이미 진짜 점토판의 내용을 해독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지 않은 편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고 현암도 동감했다. 그러므로 현암은 아직도 점토판에 목숨을 건 것처럼 행동해야만 했다.
실로 오랜만에 마음을 푹 놓고 눈을 붙이는 것이라 현암은 아 주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런데 현암의 꿈속에서 현아가 나타나 조 급한 어조로 어서 눈을 뜨라고 재촉했다. 근래 들어 현아가 자주 꿈에 나타나자 현암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이 잘 떠지지 않았으나 현암은 억지로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몸이 뻐근하고 마비된 것 같아, 현암은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그 순간, 현암은 어리둥절함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옆에 앉아있던 백호와 해밀튼은 보이지 않고, 현암의 주변에는 낯선 사람 들이 제법 있었다.
‘뭘까. 아직도 꿈이 안 깬건가?’
현암은 아직도 몸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몸의 균형이 안 잡혔을뿐더러 눈의 초점도 잘 잡히지 않아 주변 사람 들이 갑자기 눈앞에 크게 확대되었다가 저만치 멀어졌다가를 반 복했다. 게다가 어안 렌즈를 통해 보는 것처럼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부풀고 일그러져 보여 누군지 알아보기조차 힘들었다.
현암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무엇인가가 몸 을 단단히 묶고 있는 것 같았다. 현암의 눈앞에는 여러 명의 사 람들이 둘러앉아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촛불인지 램프인지 잘 모를 불꽃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타고 가던 비 행기 안과 어울리는 광경이 아니었다.
‘꿈인가?’
현암은 다시 한번 힘껏 눈을 감았다가 떴다. 순간 저만치 둘러 앉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우사부의 얼굴이 보인 것 같았다. 일렁 거리는 모습이라 확실하진 않았지만 그 중앙에는 해밀튼도, 백 호도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불빛을 발하는 것들과 함 께 붉은 글씨로 쓰인 문양과 오래된 글씨 같은 것들이 보였다. 더구나………………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현암은 몇 번 심호흡을 하고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몸이 움직 여지지 않았다. 좌석에 몸이 단단히 묶인 것 같자 현암은 다시 호흡을 골랐다. 귓전으로 사람들이 읊어 대는 기이한 억양의 목 소리들이 흘러들어 왔다.
그 분위기에서도 주술적인 힘이 짙음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 다. 어지러워 욕지기가 날 지경이었지만 일단 눈을 뜬 이상 다시 감을 수는 없었다.
‘확실히 이 어지럼증은 정상이 아니다. 나는 무엇을 먹거나 마 신 적이 없는데…………. 그렇다면 수면 가스? 하지만 누가?’
어지럼증 때문인지 공력이 잘 모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약간 의 공력이 모이자 현암은 주저하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단번에 몸을 박차고 일어섰다.
우지끈 소리가 나면서 현암이 앉아 있던 의자가 현암의 등에 매달린 채 뽑혀 나왔다. 그 소리에 비행기의 중앙부에 둘러앉아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이 현암 쪽을 돌아보았다.
현암은 다시 몸에 힘을 주었다. 현암을 묶은 끈은 얼마나 탄탄 했는지, 의자가 박살나 부서질지언정 끈은 끊어지지 않았다. 의 자가조각나 바닥에 떨어지자 끈도 저절로 느슨해졌다.
그때 놀란 얼굴의 우 사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얼굴 을 보고 현암은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으려 했지만 우 사부의 기미가 심상치 않아서 그냥 휙 몸을 피했다. 사실 피했다기보다 그저 비틀거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테지만.
그사이에 우 사부는 뭔가에 걸렸는지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두 명의 남자가 벌떡 일어나 현암 쪽으로 달 려왔다. 어느 틈인지 두 사람은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막대기를 뽑아드는 동작만 봐도 보통은 아닐 것 같았다.
‘이거・・・・・・ 안 되겠는데.’
공력이 점차 회복되고 있었지만 현암은 몸 상태가 정상이 아 닌 데다 중심마저 잡기 어려운 상태였다. 하지만 그대로 물러설 수 없는지라 현암은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써 보았다. 그때 넘어졌던 우사부가 외쳤다.
“잠깐! 당신은 끼어들지 마시오!”
우 사부가 외치자 달려들려던 두 남자는 즉시 공격 동작을 멈 추고 재빠르게 경계 자세가 되었다. 그제야 현암은 두 사람의 모 습을 볼 수 있었는데, 둘은 납작한 모자를 눌러쓴 동양인이었다. 언뜻 보기에 중국인 같아 보였다.
“무슨 소리요?”
현암이 간신히 묻자 우사부가 대답했다.
“지금 당신과 우리는 목적이 같소. 그러니까 방해하지 말라는 이야기요.”
“이 사람들은 어떻게 이 비행기를 탔소?”
현암이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우사부는 피식 웃었다.
“이 비행기가 악숨 공항에 그냥 서 있은 지 며칠 되잖소? 이안에 들어오는 것 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
현암은 조금 몽롱한 기분에서 깨어나 다시 물었다.
“방금 목적이라고 했소? 지금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는 거요?”
현암의 날카로운 질문에 우 사부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간단하오. 아하스 페르츠라는 자를 잡으려는 거요.”
그 말에 현암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성큼 한 걸음 내디디 며 우 사부를 밀쳐 내려 했다. 그러자 양쪽에 서 있던 막대기를 든 자들이 철컥하면서 막대기를 교차시켜 현암을 막았다.
우사부가 말했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요. 사실은…………….”
우사부가 말끝을 흐리자 현암이 대답했다.
“아니, 나는 알고 있었소.”
“예? 그렇다면…….”
“하지만 이런 식으론 안 됩니다. 나는 용납할 수 없소.”
“당신・・・・・・ 아무것도 모르면서………….”
우 사부가 뭐라 말하려는 것을 현암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막았다.
“난 안다고 했소. 해밀튼 씨가 바로 아하스 페르츠 아니오? 내말이 틀립니까?”
현암은 간신히 일어서 있기는 했지만 눈이 빙빙 돌아 금방이 라도 넘어질 판이었다. 공력은 어느 정도 발휘할 수 있었지만 싸 움은 무리였다. 더구나 지금 훑어보니 우사부 말고도 비행기 안 에는 여러 명이 있었고, 모두가 보통 사람 같지 않았다.
막대기를 든 두 사람 외에 다른 세 명의 노인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키가 작달만하고 아주 마음씨 좋아 보이는 인상이었고, 한 명은 아주 뚱뚱하고 배가 불룩 나온데다 몹시 눈이 가늘어 표 정을 읽을 수 없는 노인이었으며, 한 명은 깡말라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체구에 백발이 성성한 긴 수염과 특이하게도 한 뼘 이 넘어 보이는 흰 눈썹을 지니고 있었다.
제대로 정신만 돌아오고 균형이라도 잡을 수 있다면 몰라도 지금 상태로 이런 자들과 상대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 였다. 처음에는 그냥 해볼까 하다가 승희가 남긴 당부 탓에 현암 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떻게 그걸 알았소? 원래 알고 있었소?”
우 사부가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현암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근래에 알게 되었소.’
돌연 우사부의 눈빛이 빛났다.
“알면서도? 좋소. 허나 당신에게 말하겠소. 그런 사실을 다 안다면 더 이상 우리 일을 방해하지 마시오.”
“아니, 그건 안 되오.”
“대체 무슨 말이오?”
“세 가지 이유가 있소. 첫째, 나도 이제는 언약궤를 얻어야겠소.”
“그렇다면 당신도 아하스 페르츠를 상대하려는 거요?”
“언약궤가 아하스 페르츠조차 죽일 수 있다면, 누구든 죽일 수 있을 거요. 난 그것을 사용하고 싶지는 않지만, 칼키파에서 그런 물건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걸 놓아둘 수 없소. 둘째, 해밀튼 씨 는 비록 그 자신이 아하스 페르츠라고 하더라도, 진정으로 아하 스페르츠를 없애고 싶어 하오. 그러나 아하스 페르츠는 분명 죽 지 않는 괴물이오.
나는 지금 여기서 우리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를 없앨 수 있 다고는 보지 않소. 오히려 선한 마음을 지닌 해밀튼 씨만 피해를 입을 것이고, 우리는 우리의 우군 하나를 줄이는 피해를 볼 거 요. 더군다나 우리는 칼키파의 소굴로 가는 중이지 않소? 거기는 아하스 페르츠에 필적하는 고반다라는 자가 있소. 해밀튼 씨는 분명 큰 도움이 될 거요.”
“당신은 지금 해밀튼과 아하스 페르츠를 다른 사람으로 여기는군!”
“그렇소.”
“제정신이오?”
“분명 제정신이오. 당신은 확신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며칠 전에 나와 같이 있던 여자 친구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소. 물론 해밀튼 씨나 아하스 페르츠같이 강한 정신력을 지닌 사람 의 마음을 그대로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그가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정도는 대강이나마 분간할 수 있다는 거요. 나 는 그 친구의 능력을 믿소. 그렇기 때문에 해밀튼 씨는 아하스 페르츠와는 다른 사람이라 말할 수 있는 거요.”
“모든 것이 속임수일 수도 있소!”
“당신이야말로 스스로를 속이는 거요. 당신은 지금 해밀튼 씨 가 정말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려 한다고 생각하오? 그가 그렇게 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한 술책을 썼을 거요. 나는 그렇게 믿을 수 없소. 그는 둘로 분열된 사람이오.”
현암의 단호한 말에 우 사부는 한숨을 쉬었다.
“당신, 혹시 정신과 의사였소?”
“아니오.”
“좋소. 인정하겠소. 당신은 정말 나를 놀라게 하는구려. 나는 오랜 세월에 걸쳐 그를 따라다녔고, 최근에야 어느 실력 있는 의 사의 도움으로 그 사실을 알아냈는데…………”
우 사부는 사실 오랫동안 정체를 숨기고 전전하며 아하스 페 르츠를 찾았다. 첫 만남에서 현암은 그를 업신여기는 마음까지 가졌는데, 이제 보니 그것까지도 모두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 는 술책이었던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변신 재주는 대단 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지난번 키건과 우 사부가 맞선 것도 결코 우연만은 아닌 것 같았다.
현암은 솔직히 진심으로 그런 상황을 확신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 막연하게 추측만 하던 것을 급 한 김에 조금 살을 붙여 소리친 것뿐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자신 의 추측이 사실과 맞아떨어지자 현암은 놀라다 못해 조금 불안 해질 정도였다.
‘어떻게 이렇듯 잘 맞힌 거지? 차라리 시험 볼 때에 그런・・・・・・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는 정신분열증입니까, 아니면 이중인격이든가………..”
현암은 그런 전문 용어를 영어로 옮길 실력이 안 되어 우물쭈 물하면서 대강 설명해 의사를 전달했고 현암의 질문에 우 사부 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내가 분석한 바로 그는 XXX (현암은 이 말을 알아 듣지 못했다) 상태이며, 당연히 치료는 불가능하오. 아하스 페르 츠 같은 존재가 누가 자신을 치료하게 놔둘 성싶소? 그러니 다른 방법이 없는 거요.”
“좌우간 그를 해치는 건 안 됩니다.”
“도대체 왜 고집을 부리는 거요? 그러면 세 번째 이유는 뭐요?”
“간단하오. 해밀튼 씨는 분명 선한 사람이라 할 수 있소. 그런 사람을 아무리 목적이 올바르다고 해서 지금 없앤다는 것은 옳 지 않은 일이라 믿소. 사실 나는 이 비행기에 타면서 각오를 했 소. 만약 아하스 페르츠가 절대 구제받을 수 없는 자이고, 들은 대로 정말로 엄청난 일을 꾸미고 있다면 자폭을 해서라도 그자 를 없앨 각오요. 그러나 해밀튼 씨의 인격을 희생시킨다거나, 아 무리 악인이라도 아하스 페르츠에게 기회도 주지 않고 단번에 살해하려 한다는 것은 절대 옳은 일이 아니라 여기오.”
“하지만 방법이 없지 않소!”
“방법이 없다 해도 만들어야 하오. 내가 존경하는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소. 일을 해결함에 목적이 아무리 옳다 해도, 옳지 않은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더 복 잡하게 만든다고. 아무리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고 힘들어도 옳은 방법을 통해서만이 옳은 결과를 내는 것이라고 말이오! 그 래서 나는 당신들의 생각에 찬동할 수 없다는 거요!”
현암은 너무 우쭐하여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부끄럽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큰 소리로 말했다.
그때 우사부 뒤에 있던 눈썹이 긴 노인이 우사부에게 귓속말 로 뭐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귀에 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입술 만약간 들썩이는 것 같았는데, 돌연 우사부의 안색이 변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현암은 당황스러웠다.
“저건 전술이 아닌가? 굉장히 높은 공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저 노인들과 싸우면 정말 위험할 수도 있겠구나.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텐데………………”
그렇게 가늠하며 현암은 계속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그리 쉽 지는 않았다. 우사부와 말을 나눈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는데도 별반 상태가 좋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
현암은 조금 우울해졌다. 그때 눈썹 긴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 던 우사부가 현암에게 말했다.
“당신 말에는 확실히 일리가 있다고 스승님께서 말씀하시오. 그러나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하시는구려.”
“방법이 있을 거요.”
“하물며 해밀튼 본인조차 아하스 페르츠를 없애려 하오! 그가 왜 언약궤를 찾으려 하는지 당신도 잘 알지 않소!”
우사부는 이미 해밀튼과 현암이 나누었던 이야기를 엿들은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시치미를 떼고 아닌 척하다니………. 현 암은 화가 나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우 사부가 다시 말 했다.
“당신, 사물의 반대편도 고려해 보시오. 해밀튼은 분명 나쁜 사람이 아니오. 그러나 그는 극단적인 성격을 가진 한 인물에서 갈라져 나온 사람이오. 즉 원래 아하스 페르츠의 선한 성격만 남 은 인물이라는 거지. 그렇다면 그 반대의 인물인 지금의 아하스페르츠가 어떤 인물일지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소? 그는 정말 악과 증오로만 똘똘 뭉친 악마가 아니겠는가 말이오!”
우사부의 말에 현암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 말은 분명히 일리가 있었다. 우 사부는 확신하듯 다시 외쳤다.
“그는 괴물이오. 죽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괴물. 그리고 인간성과 양심 같은 것은 모조리 사라져 버린 괴물에 불과하다 는 거요!”
현암은 대답 대신 다른 곳으로 말꼬리를 돌렸다.
“당신들은 아하스 페르츠라는 괴물을 정말 처치할 수 있다고 믿는 거요?”
“지금 아하스 페르츠는 소림사의 비전인 ‘사상귀원팔괘진(四 ‘안에 묶여 있소! 조금 있으면 그는 명을 달리할
거요.”
그런데 현암은 무슨 이상한 이름의 진법보다 소림사라는 말에 더 놀랐다.
“소림사?”
“소림사는 무림 본산으로 알려져 있지만, 불학(佛)에서도 군계 일학이오! 파사)의 진법이 아니면 그를 상대하기는…………….”
“그렇다면 당신들이 소림사 사람들이란 말이오?”
“아니오. 우리는 소림사의 비전을 얻었을 뿐, 소림사 사람들은 아니오.”
“그럼 당신들은 어디서 온 사람들이오?”
“우리는 용화교의 신도들이오.”
“용화교?”
어디선가 들어본 듯도, 아닌 듯도 한 이름이었다. 한 일이 초 정도 더 생각해 보니 기억이 났다. 중국에서 불길같이 일어나고 있다는 미륵신앙 일파의 종교 운동이 용화교라는 이야기를 들 은 적이 있었다.
“용화교의 신도라면 미륵신앙이고, 크게 보면 불가의 일원일 텐데 왜 관계도 없는 아하스 페르츠를 해치려는 거요?”
“세상의 일에 관계가 있고 없고가 어디 있겠소?”
그러다가 현암은 저만치 뒤쪽에 그려져 있던 주술 문자 같은 붉은 글자 하나가 돌연 서서히 녹아내리면서 지워지는 것을 보 았다. 그 순간 현암은 생각했다.
‘그렇구나. 나는 진법에 대해 거의 모르지만 아하스 페르츠의 천운은 정말 지독할 것이다. 이 진법은 당연히 강력할 테지만 저 런 방법으로 진이 망가져 버리면 위력을 발휘할 수 없겠지. 이들 의 힘으로는 아하스 페르츠를 도저히 죽일 수 없을 것이다!’
현암은 그 광경을 보자 더욱더 이들을 말려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조금 망설여졌다. 저들도 바보는 아니며, 상당한 능력 을 갖춘 사람들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일단 저들이 하는 대로 맡겨 두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현암은 그때, 백호가 해밀튼과 같이 중앙에 묶여 있다는 데 비 로소 생각이 미쳤다. 왜 해밀튼과 백호가 같이 있는 것일까?
“그런데 그쪽에는 내 동료가 있소. 왜 그를 거기에 묶어 둔 거 요?”
“당신 동료에 대해 잘 아시오? 스승께서 말씀하시길, 그의 내 부에는 아하스 페르츠에 필적할 만한 악이 숨 쉬고 있다는구려. 미안하지만, 그러니 동료는 포기하시오.”
현암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자들은 백호 속에 내재된 블랙 엔젤의 기운을 간파한 것이 분명했다. 블랙 엔젤이 무엇인 가 힘을 발휘하려고 백호에게 들어왔다가 덩달아 잡혔는지도 모 르고, 잡혔다기보다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숨죽이며 구경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허나 그런 것까지 투시할 정도라면 이들은 어 떤 자들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내 동료는 풀어 주시오!”
그러자 눈썹 긴 노인이 뭐라고 중국어로 말하는 듯했다. 우사 부가 그 말을 듣고 번역하듯 현암에게 전달해 주었다.
“미스터 현암, 당신은 물론 우리의 적이 아니오. 비록 가스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당신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소. 그러나 계 속 당신이 우리의 일을 방해한다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소.”
“내 동료도 풀어 줄 수 없다는 거요?”
“풀어 줄 수 없소. 너무나 큰 악이 그의 안에 ……………”
드디어 현암은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내 동료를 해치고, 나까지도 해치시겠다는 거요?”
“당신의 생각은 그르지 않소. 그러나 옳다고 볼 수도 없소. 그 리고・・・・・・ 당신, 혹시 이런 생각은 해 보셨소? 당신은 내가 평생 동안 본 사람 중 최고로 강한 남자요. 하지만 아하스 페르츠나 고반다의 상대는 될 수 없지. 그런 당신이 아하스 페르츠를 따라 고반다의 소굴로 뛰어들려 하고 있소. 그건 용감한 일이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아하스 페르츠나 고반다의 수하에 들어가 게 된다면……? 그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소. 아하스 페르츠나 고반다는 두 배 이상 강해질 거요. 그럴 위험이 있다면, 대단히 죄송하지만 당신을 미리 제거할 수도 있소.”
우사부는 이전까지 볼 수 없던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현암은 당당하게 되받았다.
“내가 그리 쉽게 제거되리라 보오?”
“당신은 여기 계신 분들을 나 정도로 봐서는 안 되오. 나는 일 종의 첩보원 같은 역할이지, 전투원이 아니오. 당신이 강하다는 것은 이미 충분히 알지만, 당신이 내 두 명의 사형과 세 스승을 이길 수 있다고는 보지 않소.
그리고 당신, 시간을 끌려고 해 봤자 소용없소. 그 가스의 유 효 시간은 아직 몇 시간이나 남았소. 어떻게 정신을 차린 것을 보니 당신은 역시 대단하지만,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소. 그렇지 않소? 이런 상황에서 당신이 우리를 모두 죽일 수 있겠소? 사형들과 스승님들은 내 짐 속에 축골공(功)을 발휘해 숨었을 때부터 가스 해독제를 복용하고 있었소. 물론 나도 그렇 고.”
그래도 현암은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소. 아하스 페르츠를 죽이지 않으려 하듯, 당신들도 죽이지 않을 거요.”
그 말을 듣자 우사부가 껄껄껄 웃었다.
“광기까지 부리시는군! 이보시오. 자만심은 스스로를 망치는 이오! 봐주면서 싸우겠다? 당신, 미친 사람이로군. 아무리 공 력이 대단해도 단일 분을 넘기지 못할 거요.”
그 말을 듣고 현암은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우 사부의 말이 옳았다. 지금 현암의 상태로서는 파사신검도, 태극기공의 초 (拳)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단지 사용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 법이라면 월향검을 날려 상대를 제압하는 것과 ‘탄’ 자결의 폭 발력을 사용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두 방법 모두 비행기 안에서 쓰기에는 몹시 위험했다. 월향검이 속도를 붙일 만큼 비행할 거리가 비행기 내부에는 없 으며, 기압차가 심한 고공에서 ‘탄’자 결이 폭발하면 비행기 자 체가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청홍검을 사용해 방어 검술을 쓰는 방법도 있지만 그 또한 안 될 것 같았다. 청홍검은 너무나 예리하고 검신의 길이가 길기 때 문에 방어 검술로 마구 휘두르다가 비행기의 동체를 긁게 된다 면 비행기가 갈라져 즉각 추락하거나 공중 분해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차라리 월향검에 검기를 담아 휘두르니만도 못한 것 같았다.
그런 상황이 되면 아하스 페르츠인 해밀튼을 제외하고 누구도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결말이 오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 다. 하지만…………….
“일 분도 버티지 못해도 좋소. 그러나 당신들의 행동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소.”
“정말 미쳤군. 우리가 하는 일은 비록 손에 피를 묻히게 될지 는 모르지만, 세상을 위한 거요!”
“세상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저질러진 악행을 나는 너무도 많 이 보아 왔소! 더구나 내 동료를 해치는 일은 더더욱 용납 못하 오.”
그때까지 어지간하던 우사부와 노인들이 이제는 분통을 터뜨 리는 모양이었다. 우사부는 답답하다는 듯 발을 굴렀다.
“정말 답답하기 그지없군! 뻔히 알면서도 고집을 부리다니!”
“답답한 것은 당신들이오. 미륵 신앙이라도 불교에서 출발한 것인데, 당신들은 세상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무고한 사람들까지 해치려 하고 있소. 당신들이야말로 아하스 페르츠나 악마에 못지않은 악한들이란 말이오!”
“말 다했소?”
우사부는 호통을 치다가 간신히 감정을 억제하는 듯 말을 이었다.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시오. 이건 솔직히 당신이 두려워서가 아니오. 하지만 당신은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사람 중 가장 공력 이 강한 사람이오. 그런 당신이 아까워서 하는 말이오.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내가 어떻게든 사부들께 말씀드려 당신 동료는 구해주겠소. 그 대신 우리와 손을 잡읍시다.”
현암은 헛소리 말라고 호통을 치려다가 급히 목구멍 밖으로 나오려던 말을 삼켰다. 이들은 현암 자신보다 아하스 페르츠에 대해 아는 것이 훨씬 많은 듯했다.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현암은 생각을 가다듬은 듯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일단 고려해 보겠소. 그러나 나도 묻겠소. 내가 당신들 편을 들고 안 들고는 대답을 들은 다음 결정하겠소. 어떻소?”
“싫소. 당신은 시간을 끌지는 것 아니오?”
“시간을 끌기 싫으면 그냥 덤비시오. 대신 누가 다치더라도 상관않겠소.”
그러면서 현암은 월향검을 빼 들고 공력을 주입해 검기를 만들어 냈다. 현암이 아는 바에 의하면, 지금 세상에 살아 있는 사 람 중에 검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아직까지 없었다. 과연 그들 사이에서 조그맣게 술렁이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현암은 그 틈 을 놓치지 않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을 조금 끌고 싸우지 않을 기회를 잡아 보겠소, 아니면 그냥 누가 죽든 겨루어 보겠소? 최악의 경우, 나는 비행기를 통 째로 떨어뜨릴 수도 있소. 물론 그래 봐야 해밀튼 씨는 죽지 않 을 것으로 나는 믿지만…………….”
그러면서 현암은 검기가 담긴 월향검을 약간 허공에 휘저었 다. 그 순간 현암의 앞쪽 시트들이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반듯 하게 절단되어 바닥으로 후두두 떨어졌다. 내친김에 현암은 아 예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당신들 가스 덕분에 나는 물론 중심 잡기가 힘들지만, 나의 검술 중에는 방어 검술도 있소. 내가 당신들에게 맞거나 말거나 눈을 감고 빈틈없이 초식만 펼치면서 당신들에게 서서히 접근한 다면 당신들 중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을 거요.”
“그러다가 비행기가 박살이라도 난다면…………! 그건 미친 짓이오!”
우사부가 외치자 현암은 여유 있게 대답했다.
“나는 지금껏 싸우면서 목숨을 아낀 적이 없소.’
현암이 약간 허세를 담아 이야기하자 우 사부의 얼굴이 해쓱하게 질리는 듯했다. 사실 현암의 방어 검술에 파사수호검이란 초식이 있기는 했지만, 눈을 감고 휘두른다고 모든 공격을 막을 수 있는 검술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현암이 바라는 것은 다른 데 있었다. 검기를 뿜을 수 있을 정도의 수련을 했다면, 그런 가공할 만한 초식을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것이 무술을 배운 자의 인지상정이라는 사실을 현암은 염두에 두었다.
오히려 보통의 무술 연마자라면 검기나 공력 같은 신비적인 무술에 대해서는 개념조차 없어 무모해질 수 있지만, 지금 눈앞 에 있는 최고의 고수들이라면 그런 것에 대해서도 막연한 개념 을 가질 법했다. 그렇다면 이들 역시 무모한 싸움은 원하지 않으 리라는 것이 현암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그 판단은 맞아 들어가 는 것 같았다.
“좋소. 당신 뜻이 어떤지 말해 보시오.”
우사부의 탄식에 가까운 말에 현암은 씩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 전에 우선 ・・・・・・ 당신들도 행동을 중지해 줘야겠소.”
그러면서 현암은 월향검을 살짝 날렸다. 월향검이 날아들자 막대기를 든 자들이 월향검을 막으려고 막대기로 후려쳤지만 월 향검은 그것을 교묘하게 피해 현암이 노린 대로 비행기 벽에 붙 어 있는 부적 두 장을 떼어 내고 등불 세 개를 꺼 버린 다음 다시 현암의 손으로 돌아왔다.
세 노인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막대기를 든 두 명은 몹시 놀랐는지 멍하니 손을 놓고 월향검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 어・・・・・・ 검술?”
“마음대로 부르시오. 명심하시오. 내가 만약 한눈을 팔 때 나 를 기습하더라도 이 칼만은 조심해야 할 거요.”
그러자 우사부가 다급하게 외쳤다.
“알았소, 알았소. 그런데 당신은 진법을 다 파괴할 생각이오?”
현암은 속으로 아까 문자가 지워졌으니 진법은 이미 깨져 가 고 있었던 것 아니냐고 외치려다가 그냥 그 말을 삼키고 우사부 의 질문에 대답했다.
“일단 당신들 이야기를 들어 봐야겠소.”
현암의 태도에 우 사부는 좀 씨근거리다가 말했다.
“물어보시오.”
“당신 사부에게 듣고 싶소.”
“사부께서는 영어를 못하시오. 내가 대신 답해 주고 막히는 것이 있으면 사부께 여쭈어 보리다.”
현암은 우사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했다.
“당신은 듣자 하니 차이나마피아 소속이라던데……………. 게다가 용화도라니, 어느 것이 진짜 당신이오?”
“어느 것이 내 진짜 얼굴인지는 나도 모르오. 허나 차이나마피 아 역할은 내 얼굴이 아니었던 것 같소. 해밀튼과 성당 기사단에 접근하려고 그곳에 몸을 담았던 것뿐이니까.”
“용화교는 무엇을 바라는 종교요? 그러니까………… 용화교의 궁 극적인 목적은 뭐요?”
“용화교는 세상을 구하러 올 미륵불을 섬기고 그에 맞도록 세 상을 미리 준비시키는 종교요. 지금의 세상은 너무도 잘못 돌아 가고 있소. 앞으로는 새 세상이 와야 할 것이고…………….”
“됐소. 그런데 당신들은 왜 아하스 페르츠를 노리는 거요? 말 세에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요?”
“우리는 판단했소. 아하스 페르츠야말로 타미륵마라고 말이오.”
“타미륵마?”
“미륵이 오실 길을 방해하고 미륵이 오실 날을 늦추는 악마요. 우리의 역술에 의하면, 타미륵마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인데, 아 하스 페르츠가 첫 번째 타미륵마라고 우리는 단정 지었소.”
“흠……. 그렇다면 그 타미륵마들을 모두 없애 버릴 거요?”
“가능하다면, 그래서 미륵이 왕림하셔서 열어 놓을 새 세상을 위한 예비를 할 거요. 우리의 소임은 그것에 있으며, 그를 위해 서라면 죄를 지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오.”
“불가의 근본은 자비에 있지 않소? 살생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가겠소?”
우 사부는 유명한 선문답 가운데 하나를 들어 대답했으나 현암의 마음은 찜찜했다. 그 문답은 현암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사람을 죽이는 경우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은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현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용화교에서 바 라는 미륵이란 다름 아닌 기독교에서의 재림 예수이고 메시아일 것이다. 그리고 현암 등 퇴마사가 생각하는 구원자이기도 했다.
‘어차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비슷한 행동을 하는구나. 그나 저나 용화교라니…………. 더더욱 복잡해지는군.’
지금 각 종교와 파벌들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구별되는 것 같 았다. 징벌자의 탄생을 막으려는 이단 심판소 같은 곳, 징벌자의 탄생을 방해받지 않게 하려는 마녀 협회나 칼키파 같은 집단, 그 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구세주가 오게끔 기다리는 시오니즘 일 파나 용화교 같은 파벌. 검은 지하드나 어새신 같은 곳들도 크게 본다면 세 번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방금 용화교와 맞닥뜨린 첫 인상은 이곳도 현암 등과 대화가 통하거나 힘을 합칠 만한 곳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우리의 뜻과 맞는 곳은 한 군데도 없구나. 결국 용화교까지라 니, 내가 전에 추측했던 것보다 일이 더 힘들어지겠군.’
“한 가지만 더 묻겠소. 그렇다면 당신들을 아하스 페르츠만 잡 으면 끝이오? 그다음 타미륵마는 누구요?”
“흠…………. 말해 줘도 상관없을 것 같군. 두 번째 악마는 인도에 서 나타나리라 생각하오.”
“그게 뭐요?”
“바로 칼키를 받드는 자들이오.”
그 말에 현암은 조금 놀라며 말했다.
“해밀튼 씨와 나는 지금 칼키파를 상대하러 가는 거요. 그런데 꼭 지금 이런 짓을 해야겠소?”
“물론 칼키파도 무섭지만, 아하스 페르츠가 더 무섭소, 해밀튼 이 아하스 페르츠인 것을 알았는데 뭘 망설이겠소?”
“아하스 페르츠가 무섭다면 고반다도 무섭지 않겠소? 생각해 보시오. 이런 짓은 그만두고 이제까지처럼 힘을 합쳐 봅시다.”
지난번 악숨에서 칼키파와 대적한 경험이 아직도 생생했고, 칼키파의 모든 고수들은 목숨을 잃었다. 간신히 목숨만 간당거 리던 여자도 결국은 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던 것이다. 그만큼 현암 등과 칼키파들 간의 격전은 치열했다.
그런데 용화교는 칼키파와 정면으로 충돌하려는 것 같으니, 잘 설득하면 되지 않으랴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러나 우 사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칼키파에 대해서 잘 아시오? 우리 용화교는? 그리고 아하스 페르츠는? 그렇게 당신 말 한마디에 간단히 결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오. 칼키파도 우리의 적이지만, 아하스 페르츠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보다 더 큰 적이었소.”
“그러면 고반다는?”
“고반다는 자칭 대성인이라 칭하며 혹세무민하는 자로 알고 있소. 그는 근래에 칼키파라는 종파를 만들고 세상을 파멸시킬 칼키를 맞이한다고 떠들고 있지. 그가 두 번째 타미륵마라고 여 기오.”
“고반다는 아하스 페르츠보다는 덜 두려운 존재요?”
“비슷비슷할 거요. 비교는 할 수 없소. 왜냐하면 둘을 직접 만 나 맞선 사람들 중 살아 있는 자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오.”
“그다음은?”
“세상을 도탄에 빠뜨리려는 자는 모두 타미륵마요. 그들은 무 척이나 많소. 지금은 천기(天)가 열린, 유래 없는 시기이기 때 문에 많은 자들이 그것을 알아보고 온갖 짓을 꾸미고 있소. 우리 는 그들을 막을 거요.”
“그렇다면 검은 편지 결사나 시온주의자, 마녀 협회 등도 당신 들이 말하는 타미륵마에 속하겠군.”
“그럴 거요.”
“좋소 좋소. 한 가지만 더 물읍시다. 그런 일파들은 그렇다 치 고, 당신들이 말하는 미륵이 오면 세상이 어떻게 된다고 믿소?”
“그것은…….”
우 사부는 평소 익히 들어왔던 용화교의 가르침에 대해 주욱 늘어놓았다. 그 말을 들으며 현암은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그렇군요.”
“왜 그러는 거요?”
우사부는 현암의 얼굴을 보며 돌연 안색을 굳혔다. 종교에 심 취해 광신에 가까워지는 자들일수록 교리에 대한 조그마한 비판 조차 용납하지 않게 되는 법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현암은 쓴 웃음을 지었다. 역시 용화교도 다르지 않았다. 몇 마디 듣지 않 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세상에서 그들의 교리만 융성하기를 바랐고, 그것을 새로 오는 세상이라고 불렀다. 공존의 길은 애당초 없었다. 그렇 다면 현암이 보기에 그들 또한 시오니즘이니 칼키파 등과 하등 의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당신들은 소림 진법을 쓴다는데, 지금도 소림 출신은 아니겠지요?”
“소림이나 불교는 그 본령을 잃고 장식 종교가 되어 버린 지 오래요. 우리는 용화교도요. 소림사의 가르침 같은 것은 이제 우 리에게 없소.”
“그렇소……?”
장식 종교라는 표현이 신선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 한 장식 종교보다 더더욱 큰 화를 불러일으킬지도 몰랐다. 좋지 않은 것에 반대된다고 좋은 것이 된다는 보장은 없는 법이다. 아무튼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끌어 보았으나 여전히 눈앞이 빙빙 도는 현상은 멈추지 않았다. 공력은 상당히 회복되었지만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좌우간…… 언제까지 시간을 끌 참이오?”
우사부는 호통을 치고는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이 절대 악한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고 있소. 그 때문에 나는 당신을 위해 말하는 거요. 우리와 힘을 합하거나, 정 안 되면 그저 잠자코 우리 일을 보고만 있으시오. 알겠소?”
“아니, 나는 끼어들어야겠소.”
“목숨이 아깝지 않소?”
“물론 아깝지만, 내가 안 죽으면 그만 아니겠소?”
그 순간 우 사부가 눈짓을 하자 막대기를 든 두 남자가 현암의 앞을 막아섰다.
현암은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진법도 망가진 참에 내가 당신들을 두려워할 것 같소?”
그 말을 듣자 우사부는 슬쩍 옆을 보면서 말했다.
“당신은 진법을 깨뜨려 시간을 벌려고 한 모양인데, 이제 늦었다는 것을 아오?”
“무슨 소리요?”
“부적이나 등롱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왜 모르겠소? 사상귀원팔괘진이란 건 실은 가짜요. 부적이 팔괘의 방위에 있 으니 그런 줄 알았겠지? 허나 실제 펼쳐진 진은 삼재복마현현진 (三才伏魔玄玄陣)이란 말이오. 우리 스승들이 직접 몸으로 삼재의 방위를 짚고 진법을 쓰시는 것이고, 이제는 다 끝나가고 있소.”
현암은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시간을 끈 것이 아니라 우사부가 시간을 끈 것이었단 말인가?
별안간 앉아 있는 세 명의 노인에게서 환한 기운이 솟구쳐 나 오기 시작했다. 분명 체내의 내력을 극도로 발휘했기에 나오는 현상이었다. 만약 진법으로 합쳐져 그 기운이 완전히 발휘되면 현암의 탄지공을 능가할 정도로 강력한 힘이 될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현암은 큰 소리로 외쳤다.
“먼저 한 가지 묻겠소, 해밀튼 씨.”
“그는 지금 수면 가스에 취해 있소.”
우사부가 나서자 현암은 훙 하고 일부러 크게 코웃음을 쳤다.
“수면 가스에 취한다고요? 죽지 않는 영혼인 아하스 페르츠가 말입니까?”
“아무리 영혼이라도 몸을 빌리지 않으면………….’
중얼거리는 우 사부를 보며 현암은 짐짓 비웃음을 지으며 다 시 크게 외쳤다.
“해밀튼 씨! 당신, 실망할 것을 알면서도 기대를 갖는 겁니까? 이번에도 당신은 죽을 수 없습니다. 분명 안 될 겁니다. 괜한 기 대갖지 마십시오!”
수면 가스가 지독한 것은 틀림없었지만 아하스 페르츠가 그 정도로 강하다면 이런 가스에 의식을 잃을 리가 없다고 현암은 믿었다.
‘공력이 좀 있다 해도 나 정도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가스 라면, 영적인 존재인 아하스 페르츠에게는 더욱 안 먹혀들 것이 다. 그렇다면 해밀튼 씨가 조용히 있는 것은…………….’
해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해밀튼은 자기 자신이기도 한 아하 스페르츠가 세상에서 없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즉 자기 자신 을 누군가가 죽여 주기를 원하고 있다고 봐도 좋다. 그래서 그는 아무 저항을 하지 않고 정신을 잃은 척 그들이 하는 일에 몸을 맡기고 있는 것 같았다. 잘되면 죽게 되어 다행이고, 안 되면 할 수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그러나 해밀튼은 대답이 없었고 우 사부의 비웃는 소리만 들 렸다. 현암이 다시 외쳤다.
“해밀튼 씨, 당신은 나를 믿고 언약궤를 찾으라고 보내는 게 아닙니까? 그 일을 내게 맡긴 이상, 날 믿으십시오! 어서 대답해 보시오!”
그때 해밀튼이 눈을 뜨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소! 당신 눈은 속일 수 없군.”
해밀튼이 눈을 뜨자 우사부와 다른 사람들이 몹시 놀라는 표 정을 지었다. 다만 우 사부의 스승이라는 세 노인만 여전히 미동 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몸에서 솟아나던 찬란한 기운은 잠시 움찔하더니 다시 그들의 몸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래도 현암은 신경 쓰지 않고 외쳤다.
“당신은 지금 죽을 수 없을 겁니다. 당신 자신은 죽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지 모르겠지만, 그럴 수 없을 겁니다. 어서 정신을 차리고 일단 거기서 벗어나시오!”
조용한 목소리로 해밀튼이 되받았다.
“나는 그럴 능력이 없소.”
“저자를 치시오!”
우 사부가 다급한 나머지 영어로 외쳤다가 다시 중국어로 외 쳤다. 허나 현암은 뒤로 비틀거리면서 물러나자마자 월향검에다 청홍검까지 꺼내 양손에 들면서 소리쳤다.
“왜 능력이 없다는 거요? 아하스 페르츠의 그 무시무시한 능 력은 모두 어디 갔단 말이오!”
현암은 내심 비행기 안이 좁기 때문에 두 남자의 기다란 봉도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막대기 를 든 두 남자가 동시에 기합 소리를 내며 갑자기 막대기를 반으 로 나누어 양손에 드는 것이 아닌가. 한 개의 장봉이 두 개의 단 봉으로 바뀐 셈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무서운 기세로 도합 네 개 의 단봉을 풍차같이 돌리면서 현암에게 덤벼들었다.
현암은 아차 싶었다. 소림 무예의 기세는 정말 대단했고, 게다 가 현암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어서 그들의 무예는 더더욱 환상적으로 보였다. 현암은 월향검과 청홍검에 검기를 돋우어 그들의 봉을 단번에 잘라 낼 요량으로 두 개의 검을 풍차같이 돌리면 서 버티려 했다.
놀랍게도, 검기에 부딪혔는데도 그들의 봉은 절단되지 않았 다. 분명 느낌으로는 어느 정도까지 칼날이 검에 박히는 것 같았 는데, 더 이상 봉이 절단되지는 않는 것이었다.
그때 해밀튼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나도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이러는 거요! 당신은 벌써 잊 었소? 내가 주술을 사용한다면 내 안의 아하스 페르츠가 눈을 뜨게 되오! 그러면 당신을 비롯한 여기 모두는…………….”
해밀튼의 목소리를 거기까지 들었을 때 현암의 몸에는 무수 한 타격이 왔다. 그것도 보통의 타격에 공력이 더해진 무서운 타 격이었다. 비록 공력이 회복되었으나 현암은 무섭게 휘몰아치는 단봉들을 도저히 막아 낼 수 없었다.
현암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공력을 가급적 돋우어 아픔을 줄 이고 팔을 들어 머리를 보호하는 것뿐이었다. 그들의 타격은 무 시무시한 것이라 공력이 돌지 않는 머리에 한 방이라도 맞으면 정신을 잃어버리거나 죽음을 당할 우려마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검을 휘두르는 데 제약이 심해졌다. 월향 검을 던지고 싶었지만 좁은 비행기 안에서 기체에 구멍이 날까 봐 그것마저 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열 대 이상 맞고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나던 현암은 의자에 걸려 뒤로 나동그라졌다. 현암은 해밀튼이 수면 가스 따 위로 정신을 잃지 않았으리라 확신했고, 그것을 마지막 카드로 계산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확실히 지난번 해밀튼은 그 때문에 자신은 주술을 쓸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도 현암은 일이 어떻게 되든 일단 해밀튼이 살아나려면 방어를 해야 한다고 외치려 했는데 상대방의 공격이 너무도 심 한 바람에 그 말조차 할 수도 없었다.
거의 절망적인 상황으로 치닫는 순간, 현암은 오기가 치밀었 다. 현암은 공력을 있는 대로 퍼부어 파사수호검 초식을 펼쳤다. 비행기 안임을 감안해 검기를 길게 뻗치기보다는 검기를 강하게 뻗는 데 신경을 썼다.
그러나 적들의 단봉은 절단되지 않았다. 그들도 상당한 내공 을 지니고 있어서 그것으로 봉을 보호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 다면 제아무리 단단하게 만들었어도 나무로 만든 봉이 검기 앞 에서 잘리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같은 부위를 세 번 정도 맞히면 절단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눈이 빙빙 도는 상태에서는 봉을 자를 수도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해밀튼은 계속 소리쳤다.
“나는 할 수 없소! 차라리 모험을 하는 편이 나을 거요. 만약 이들이 실패한다 해도 내가 주술을 쓰지 않으면 몇몇은 살아남을 거요. 성공한다면 좋고……………. 그러나 내가 주술을 사용하게되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거요. 아무도・・・・・・・ 당신에게는 미안하오. 그러나 방법이 없구려.”
해밀튼은 잠잠해졌다. 눈을 감고 담담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 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현암은 예닐곱 대를 더 얻 어맞았다. 그중 두어 대는 후려친 것이 아니라 찔러 들어온 것이 라 통증이 몹시 심했다.
다행히 적들도 검기의 무서움을 아는 듯, 적극적으로 쳐들어 오지 못하고 주변에서 봉을 돌리다가 빈틈이 생기면 순간적으로 공격하는 것이라 버틸 수 있었지, 그게 아니라면 제아무리 강철 같은 현암일지라도 벌써 드러누웠을 것이었다.
현암은 혹시라도 비행기 기장이나 다른 사람까지 영향을 줄까 봐 사자후를 쓰지 않으려 했지만 더는 어쩔 수 없어 깊은 숨을 들이마시려 했다.
바로 그때 우 사부가 적들의 등 뒤에 숨은 채 다가오더니 스프 레이 캔 같은 것을 꺼내 허공에 솨악 뿌렸다. 수면 가스가 틀림 없었다.
지금 간신히, 그것도 오랜만에 본 현아의 도움으로 버티고 있 는데 한 번 더 수면 가스를 마셨다가는 쓰러질 것이 뻔했다.
‘제길!’
현암은 급히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호흡을 멈추었다. 수면 가스는 마시지 않을 수 있었지만 사자후도 쓸 수 없었고, 조금만 지나면 활동이 훨씬 둔해질 것 같았다.
우사부는 간헐적으로 수면 가스를 뿌려 댔고, 두 남자는 철통 같이 봉을 휘둘러 현암이 가까이 가지 못하게 했다. 급기야 현암 은 이대로 버티기는 힘들겠다 싶어졌다.
그나마 천만다행인 것은 우 사부의 스승이라는 세 노인이 끼 어들지 않는 것이었다. 지금 세 사람도 감당하지 못하는 판에 다 시 그들의 스승 격인 세 사람이 끼어든다면 현암은 금방 끝장나 버릴 것 같았다.
돌연 현암은 묘한 기운을 느꼈다. 그 느낌은 검고 어둡고 사악 했으나 전에 만나본 적이 있는 친근한 것이었다.
그 기운은 이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힘들지? 도와줄까?
‘필요 없어!’
이런…………. 이대로라면 너, 그냥 죽어. 너만 한 자가 이렇게 개처럼 죽 는 건 그리 보고 싶지 않은데? 그러니 말만 해. 도와준다니까?
바로 블랙 엔젤의 교태 넘치는 목소리였다. 지금 상황에서, 물 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듯 그 목소리가 반갑게 들리는 것 은 어찌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현암은 이를 악물고 속으로 외쳤다.
‘네가 선의로 나를 돕는다고 생각할 수는 없어!’
그래. 너 바보 아냐, 원 참 좋아, 나도 공짜는 아냐. 언젠가 내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면 돼. 아주 사소한 걸로 말야. 어때? 좋지 않겠어?
‘헛소리!’
그러는 사이 마음이 어지러워져 현암은 다시 서너 대의 타격 을 입었다. 더구나 호흡조차 하지 못하고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 자 숨이 너무도 가빴다. 한동안은 버텨 왔지만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이것저것 다 집어치우고 숨이라도 크게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눈앞에 노란 동그라미들이 빙빙거리며 나타 나 돌기 시작했고, 단봉들은 더더욱 강한 기세로 다가들었다. 블랙 엔젤의 다급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 고집불통! 부탁은 안 들어줘도 돼! 네가 가진 것 중 소중한 것 을 하나 줘. 내가 그냥 나서기는 아무래도 그렇잖아. 그러니 ・・・・・・・
현암은 속으로 고함을 치려 했으나 눈앞이 흐려져 그마저 뜻 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오락가락하는 의식 속에서 무의식적으 로 고개를 흔들어 댔다.
그때 막 달려들어 결정타를 먹이려던 두 사람은 현암이 야릇 하게 고개를 휘젓자 뭔가 무서운 술수를 쓰는 게 아닐까 지레짐 작하고 훌쩍 날아 뒤로 몇 걸음 물러서 버렸다.
이미 현암이 휘두른 검기에 의해 좌석들은 모두 토막 나 거의 없어졌기 때문에 비행기 안은 공터나 다름없었다. 만약 방금 저들이 물러나지 않았으면 현암이 큰 틈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에 적들은 현암의 머리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었을 것이다. 저들 도 고수들인 만큼, 현암의 머리는 현암의 몸만큼 단단하지 않으 며 그곳이 급소라는 것을 파악한 상태였다.
그러니 현암은 목숨이 날아갈 뻔한 위기를 천행으로 모면했다 고 봐도 좋았다.
현암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꺾으며 풀썩 쓰러지는 찰나 청 홍검을 바닥에 박아 세워 놓고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우사부가 다시 뭐라고 지껄이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끝장을 내라는 소리 겠지. 그 와중에도 그는 수면 가스를 다시 한번 뿌리고 있었다. 그때 또다시 음성이 들렸다. 블랙 엔젤도 어지간히 놀랐는지 한결 사근사근해졌다. 사실 현암이 죽어 버리면 블랙 엔젤로서 도 좋을 것이 없었다.
아아… 고집쟁이! 좋아. 그럼 이걸 받아 주지. 간다!
현암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블랙 엔젤이 뭘 받아갔는지 신경조차 쓸 수 없었다.
다음 순간, 묶여 있던 백호가 기이한 소리를 내면서 새처럼 몸 을 솟구치는 모습만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 에 무엇인가가 검은 물체 같은 것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다가 깜 박정신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