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5권 – 저자 후기
저자 후기
『퇴마록』을 마치며
십칠 년 전에 시작한 것을 이제야 끝맺은 기분입니다. 『퇴마 은 1993년 당시 PC 통신 매체인 하이텔에 처음 연재를 시작 하여, 1994년 첫 출간된 이후 2001년에 마무리 지은 바 있습니 다. 그러나 이것이 제 처녀작이고, 또 저는 그때까지 한 번도 소 설을 써 보지 않은 입장임을 감안할 때, 쓰고자 한 것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미숙하고 모자람이 넘쳤던 것도 사실입니 다. 문장력이나 문체 등을 놓고 보면 미숙하기 그지없는 작품이 었지만 다행히 독자분들은 그런 것보다 내용적인 면을 알아주셔 서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퇴마록』은 집필이 중반에 접어들 때까지도 작가라는 인식조차 갖지 않았던 제가 결국은 원래의 전공 대신 소설가의 길을 택하게 만든 작품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딸에게 소설가로 살아가면서 제일 힘들었던 게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던 적이 있는데, 그때 한 대답이 생각납니다.
어딘가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조금 구체적으로 써 보면 이렇습니다.
‘어느 직업이든 마찬가지겠지만, 보통은 많은 준비와 공부를 하고 그 길을 택하는 법이다. 그런데 아빠는 어느 날 갑자기, 아 무 준비도 없이 소설가가 되어 버렸고, 때문에 실제로 글을 써 내면서 준비하는 동시에 모든 것을 맞춰야 했다. 한 가지도 어려 운 일인데 두 개를 병행해야 했다. 거기에 이미 성공을 거둔 후 였기 때문에 실패나 시행착오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이 가혹한 조건들이 정말 너무도 힘들었다.
짧지 않았던 『퇴마록』의 집필 기간에도 초반의 글들은 너무도 미숙했는데, 그런 미숙함이 부끄럽다기보다는 내용의 전달에 지 장을 주지 않을까 신경이 쓰였습니다. 등장인물의 대사도 일부 분은 무미건조하여 성격의 특성이 드러나지 않았고, 지나친 만 연체 및 서툰 표현들이 많아 가독성이 떨어졌으며, 묘사도 부족 한 곳이 많았습니다. 때로 정확히 이해하기가 힘든 부분도 있었 음을 고백합니다. 그런 내용을 수정하자고 여러 번 건의했지 만, 당시에는 출판사에 이러한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 습니다. 그러다 우여곡절 끝에 출판사를 옮기면서 지금이 아니 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개정 계획에 착수했습니다.
처음에는 지금의 제 문체에 맞추어 전면 개정을 할 것도 생각 했지만, 구본 열아홉 권, 개정 신판으로 열네 권에 달하는, 원 고지 이만 매가 넘는 작품을 전부 손본다는 것은 시간적으로도 힘들었고, 그런 노력의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그렇게 손을 볼 경 우 천만에 달하는 독자가 읽었던 추억까지 덩달아 해치지 않을 까 하는 우려가 컸습니다. 그것은 성원해 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옳지 않은 행동이라 생각하였지요.
그래서 과거의 추억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는 선에서 개정 을 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즉 90년대 초반부터 책을 읽은 독자 도 이제는 나이도 들고 생각도 깊어졌으며, 세상도 많이 달라졌 습니다. 그때는 그냥 재미있게 읽으셨던 분들도 지금 다시 보면 (이제는 글을 대하는 눈도 깊어지셨을 테니) 비문에 잘못된 문체 에 눈살을 찌푸리실지 모른다 생각했지요. 그래서 과거에 읽었 을 때 재미있게 보았는데, 지금 다시 읽어도 뭐, 그때와 비슷하 군’ 하는 느낌을 갖도록, 그 선에 최대한 맞추어서 개정을 했습 니다. 이는 꼭 과거 독자분들의 재독만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새로 보시는 분까지 충족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조차 도 거의 일 년에 걸친 숙고와 논의 끝에 나온 결론이었습니다. 그렇게 각 편을 개정을 하였는데, 이제 와 말씀드리면 정말 많 은 부분을 티 나지 않게 손보았습니다. 전체 분량의 삼분의 일 정도가 완전히 다시 쓴 것이며, 몇몇 아주 미진했다 판단되는 작 품들은 아예 새로 집필하기도 했고, 결말을 재구성하기도 했으 며, 아주 부수적인 인물을 빼고 새 등장인물을 넣기도 했습니 다. 이런 것들은 쉽게 눈치채실지 몰라도, 보이지 않게 자연스럽 게 고친 부분도 엄청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사를 모조리 바 꾼 캐릭터도 몇 명 되고, 묘사나 만연체의 지루한 문장을 나누 고 다시 고쳐 쓴 것은 셀 수도 없으며, 의도가 잘못 전달된 부분 들-특히 이야기 흐름상 가설로 제시한 것임에도 개인적 주장 처럼 오해되어 터무니없는 비판을 받았던 이론들, 가령 ‘용봉문 화설’이나 ‘한단고기』의 인용 부분들, 민족주의적 경향이 너무 강하다고 소문이 퍼진 부분 등은 빼지 않았지만 어떤 의도에서 적었는지 더 명확히 했습니다. 과거에 ‘재미있게 보았다’가 현대 에 와서도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손보았 다는 것만 기억해 주시면 됩니다. 진심으로, 엄청난 작업이었습 니다. (웃음)
이쯤에서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일들을 적어 보면 어떨까 싶 군요.
『퇴마록』은 제게 성공과 유명세를 안겨 주기도 했지만, 저를 굉장히 미워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사람들도 많이 만들었 습니다. 국수주의자라는 비판이 자주 떠도는 것은 저로서는 참으로 쓴 웃음을 짓게 만드는데, 한창 『퇴마록』을 집필하던 90년 대 초중반에서는 오히려 반대로 ‘그런 식으로 흐지부지하게 쓰 다니, 너는 애국심도 없느냐?’라는 비난을 심하게 받았습니다. 소위 『한단고기』 신봉자들에게 그런 애매모호한 인용 따위로 과 거사를 모독하지 마라!’는 식으로 공격당한 것이 얼마인지. 민 족주의적이라 지적받는 와불이 일어나면」(『퇴마록 – 혼세편』 1권)에서 ‘왜 와불을 일으켜 세우지 않았느냐는 항의와 원성도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퇴마록』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많지만 그 근본은 결국 여느 소설처럼 인간을 투영해 보는 데 있습니다. 앞 서 이야기한 내용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는 너무 그럴듯하 니까 오해를 사지 않느냐는 시비까지 나오는데, 소설가로서는 감 사하게 생각합니다. (웃음) 이것이 작가의 천형인가 싶기도 하더 군요.
즐겁게 재밌는 일 역시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퇴마록』의 등장 인물 이름을 마음대로 지어 붙였습니다. 그런데 ‘무서운 이야기 에 여자 친구 이름이 나와서, 여자 친구가 공포에 젖어 있다’는 귀여운 항의성 메일을 받은 적이 있죠. 물론 이건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만 나름대로 변명거리(?)를 만들기 위해 이름 공모를 한 적도 있습니다. 특히 악역이나 살해당한 사람, 귀신에 씌이는 사람들 등, 안 좋은 역할을 맡는 인물에 쓸 테니 자원해 달라고 한 거죠. 그런데 참으로 기이한 본명을 가진 분들이 대거 지원해 서 신기한 터라 즐겁게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예를 들면 초상화가 부르고 있다」(『퇴마록 – 국내편 1권)에 서 참으로 전형적인 이름을 가진 깡패 무리가 나오는데, 모두 실 제지원하신 분들의 본명입니다. 지금이야 오래되어서 당사자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지원을 받아 넣은 이름이죠. 그 외의 인물 중에는 주변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 많습니다. 예 를 들자면 초치검의 비밀」에 등장하는 안재민 기자나 귀화」(이 상 모두 퇴마록 – 국내편 2권)의 주인공 공동준, 두 사람은 제 절친입니다. 요즘은 멀어져서 자주 보지 못하는데, 안 교수는 국 내 모 대학에 있고 공 교수는 도미하여 미국의 한 대학에서 강의 하고 있습니다. 또 이후에도 죽음을 당하는 역할을 담당할 사람 들은 지원자 위주로 하는 게 전통이 되어 왔는데, 거의 모든 그 런 인물들은(적어도 이름만은 제 주변에 실제 모델이 있으며, 혹 겹치거나 혼선을 줄 경우는 이름 앞뒤 글자를 바꾸는 방법을 많이 이용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퇴마록』은 그런 분들과의 만남 을 다시 기억해낼 수 있는 앨범과 같은 작품이기도 하죠.
『퇴마록 말세편」의 최종 결말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아쉬 움들이 남아 있는 줄 압니다. 작가로서 물론 독자분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닙니다. 저를 욕하고 비난하는 형태로 나타 나더라도, 그건 여러분들의 아쉬움에서 비롯된 것이니 그런 것 에 화를 내거나 기분이 상할 이유도 없고요. 하지만 결말은 원래 의 모습 그대로 두었습니다. 개정을 하더라도 이 이상의 결말은 없다 생각하기도 했고요. 마지막으로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소설 속의 인물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당신이 다시 책을 펴는 순간,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같은 책을 읽더라도, 이 책을 읽은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이었더라도, 몇 시간만큼 당신이 변화 되어 이전에 못 보았던 작은 묘사나 감정의 편린 하나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등장인물들 모두와 그들이 그려진 책 속의 세상 을 다시 한번 살려내는 행위가 됩니다.”
이것이 독자 여러분과, 제가 창조하여 고생만 시킨 『퇴마록』 등장인물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합니다.
개정판 작업을 끝맺을 수 있게 길을 열어 주신 문학동네 강태 형사장님과 편집에 오래 애쓴 엘릭시르 편집부, 그리고 많은 관 계자 여러분들, 그리고 독자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2012년 9월 15일
이우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