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5권 14화 –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7 : 세 명의 분신
세 명의 분신
하늘 한 귀퉁이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숲을 헤치고 나 와 시야가 트이자마자 눈앞을 가로막은 것은 거대한 산맥이었 다. 산맥까지는 아직도 멀었지만 몹시도 높고 험하며 웅장한데 다가 산 아랫자락을 온통 뒤덮고 있는 빽빽한 정글은 하겐으로 하여금 경외감마저 느끼게 했다.
일기예보에는 거대한 폭풍이 휘몰아친다고 했는데, 꼭 일기 예보가 아니어도 금방이라도 폭풍이 몰아칠 것 같은 후덥지근한 긴장감이 감도는 날씨였다.
하겐은 눈으로 달려드는 커다란 파리와 벌레를 손으로 휘저어 쫓으며 입을 열었다.
“장관이군. 저기인가?”
그의 뒤를 따라 나온 키가 큰 흑인도 잠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내 고향 킬리만자로를 생각나게 하는군. 하지만 여기는 너무 습해.”
하겐이 고개를 끄덕이자 흑인이 다시 중얼거렸다.
“왜 우리만 이런 힘든 길로 가야 하는 거지?”
하겐이 간단히 대답했다.
“포위망을 구축하기 위해서지.”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왜 우리만이 고생을 해야 하냔 말야.”
“산을 기어 올라가는 것보다는 낫지. 이쪽에는 그래도 산길이 제대로 나 있으니까.”
“차라리 산을 오르는 게 낫겠어.”
하겐은 대답하지 않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사이 숲에서 잡 아 열다섯 명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그들은 모두 중년에 접어든 남자들이었지만 머리 색깔과 나이, 그리고 피부색이 서로 달랐다. 그러나 모두의 심각한 표정 속에서 그들 이 뭔가 위험하고도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다는 낌새를 느낄 수 있었다.
하겐이 눈짓을 하자 안경을 끼고 키가 작달막한, 독실한 표정의 남자가 허리에 찬 작은 잡낭에서 지도와 나침반을 꺼내 방향 을 확인했다.
“이제 대여섯 시간만 걸으면 되겠군요.”
남자가 말하자 하겐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 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손을 저어 일행에게 출발 신호를 했 다. 그때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하겐이 놀라 돌아보니, 대열의 맨 끝에 있던 남자가 땅에 쓰러져 있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뱀들이 떼거리로 남자의 몸을 덮고 있었다.
“뱀?”
뱀들은 계속 숲에서 꾸역꾸역 밀려나와 하겐 일행에게 기어오 고 있었다. 뒤로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쓰러진 사람을 그냥 내버 려 둘 수도 없어서 일행이 머뭇거리는 사이 어느새 뱀들은 그들 의 주위를 완전히 포위하고 말았다.
작은 물뱀부터 색깔이 선명한 독사 무리, 그리고 무서우리만 큼 굵고 커다란 아나콘다까지 있었다. 아나콘다는 사람을 통째 로 삼켜 버릴 정도로 컸는데, 그런 뱀이 네 마리나 있었다.
“파치!”
하겐이 이름을 부르자 하겐과 이야기하던 키 큰 흑인이 재빨리 등에 진 배낭에서 피리 같은 것을 꺼냈다. 그가 피리를 입에 대는 순간 높고도 날카로운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뱀들은 조금도 기세가 약해지지 않고 사람들을 향해 덤벼들려고 했다.
“제길! 이놈들은 누군가의 조종을 받고 있어!”
파치는 피리를 던져 버리고 굵직한 동물 뼈로 만든 곤봉을 꺼 내 양손에 들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 무기를 꺼내 들 었다. 하겐이 싸우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뱀들이 덤벼들어 서 사람들은 죽자 살자 하고 뱀들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능력자는 무기나 술수를 발휘해 싸웠지만 일행의 삼분의 일 정도는 특수한 능력이 없는 보통 사람이었다. 그들도 권총이나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한바탕 악전고투가 시작되었지만 뱀의 숫자는 무척이나 많았다.
하겐이 마법의 주문을 외워 파이어볼을 내쏘고, 다른 능력자 들도 제각기 술수를 발해 뱀들을 죽였지만, 뱀들은 끊임없이 나 타나 덤벼들었다. 총을 쏘던 사람들은 실탄이 다 떨어지자 에 게 물려 쓰려져 갔고 능력자들 중 힘이 다한 사람들도 점차 위태 해졌다. 안되겠다 싶어서 하겐이 외쳤다.
“파치! 안 되겠다! 조종자를 잡자!”
그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파치는 짐승 같은 소리를 지르면 서 양손에 든 곤봉을 무섭게 휘둘러 앞을 막고 있던 커다란 아나 콘다 한 마리의 머리를 박살 내 버렸다. 그 틈을 타서 하겐은 파이어볼 세 방을 쏘면서 뱀들의 포위망 밖으로 몸을 날렸다.
“이글아이!”
하겐이 다시 주문을 쓰자 숲과 나무로 가려진 곳이 모조리 투 명하게 변해 하겐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자 숲 속에서 하겐은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한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여자다!”
하겐이 그 여자를 향해 숲을 헤치며 몸을 날리는 순간, 그녀는 힐끗 하겐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싹하리만큼 요염한 미 소였다. 그러나 그녀의 보라색 눈은 악마처럼 기분 나쁜 빛을 발 하고 있었다.
하겐은 움찔하면서도 파이어볼을 한 방 날렸지만 그녀가 한 손을 들자 불덩어리는 그 손에 잡혀 맥없이 꺼져 버리고 말았다.
“제법이군?”
그녀가 말하면서 크게 소리를 내지르자 하겐은 알 수 없는 힘 에 밀려 나가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온몸이 저리고 힘을 전혀 쓸 수 없었다. 이제는 죽는구나 하고 있는 찰 나파치가 달려왔다. 그는 아프리카 전래의 주문을 고래고래 소 리 지르듯 외치며 곤봉을 무섭게 휘둘러 여자에게 덤벼들었다. 순간 그녀가 훌쩍 몸을 날리며 말했다.
“흥, 급한 일이 생겼군. 잠시 목숨을 붙여 주마.”
그녀는 파치가 덤벼들기도 전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일행을 둘러쌌던 뱀 떼도 혼란에 빠지더니 흩어져 도망치거나 남은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다.
하겐은 침울한 표정으로 파치의 부축을 받아 일행에게로 돌아 왔다. 일행 중 네 명이 쓰러졌는데, 그중 두 명은 커다란 아나콘 다에게 몸이 감기고 물려서 차마 눈뜨고 볼 수도 없을 만큼 흉측 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전신의 뼈가 박살난 것이다.
하겐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바이올렛・・・・・・ 틀림없어.”
“그런데 왜 그냥 갔을까? 몰살시킬 수 있는 기회였는데………….”
파치가 중얼거리자 하겐이 침울하게 대답했다.
“글쎄 ・・・・・・・”
헬기의 엔진 소리는 요란했다. 아녜스 수녀는 비행기는 여러 번 타보았지만, 헬기를 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밑바닥까지 모두 유리로 만들어진 헬기의 좌석을 바라보며, 아 무래도 멀미가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탈 헬기는 지 휘용이라 앞 유리가 투명했지만 그녀의 뒤편에서 시동을 걸고 있는 다른 헬기들은 페루군의 중무장 헬기들이었다.
“모두 이 지점으로 가면 되는 겁니까?”
조종사가 아녜스 수녀에게 지도를 보이며 물었다. 안데스 산 맥 부근의 한 점에 붉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아녜스 수녀는 고개를 돌려 뒷좌석에 앉은 침울하고 창백한 인상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딱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의 옆에는 바이올렛이 앉아 있었는데, 항상 입담 좋던 뚱뚱 한 그녀의 얼굴은 며칠 사이에 몹시도 창백해지고 야위어 보였 다. 그녀는 힘없이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고, 금방이라도 창밖 으로 뛰어내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녜스 수녀는 그런 바이올렛에게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조종 사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어서 뜨십시다. 시간이 없어요. 폭풍이 오고 있어요.”
조종사는 아녜스 수녀의 자못 곱상한 얼굴을 보며 웃었다. 아 녜스 수녀가 수녀복이 아닌 평복을 입고 있어 조종사는 그녀가 수녀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게릴라들이라도 나온 건가요?” 아녜스 수녀가 딱 잘라 말했다.
“명령받은 대로 뜨기나 하세요.”
조종사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고 다소 화난 듯 조종간을 당겼다. 아녜스 수녀가 탄 헬기가 요란한 로터 소리와 함께 이륙 하자 뒤를 이어 두 대의 거대한 수송용 헬기와 세 대의 중무장 헬기가 떴다. 중무장 헬기에는 발칸포와 지상 공격용 로켓 포드, 그리고 대전차 미사일까지 장착되어 있었다.
헬기가 이륙하는 순간, 아녜스 수녀는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이유도 알 수 없이 기분이 나빴다. 급히 고개를 돌려 보니 비행 장 저편 구석에 한 명의 여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기다란 검 은 머리의 여자였는데, 상당히 나이가 든 노파 같았다. 그 여자 가 손을 쳐드는 것을 아녜스 수녀는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 에서 두 개의 보랏빛 눈이 번쩍이는 모습도 바로 그 순간, 귀가 터질 듯한 굉음과 함께 아녜스 수녀가 탄 헬기가 크게 흔들렸다. 흔들리는 와중에 저만치에서 같이 이륙 하던 중무장 헬기 한 대가 폭발하여 불덩어리가 된 채 땅으로 떨 어져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안 돼!”
아녜스 수녀가 소리를 지르는 순간 여자는 다시 손을 쳐들었 고 이번에는 수송용 헬기 한 대의 꼬리 로터가 박살났다. 꼬리 로터를 잃은 헬기는 원심력 때문에 빙빙 돌다가 마구 휘청거리 면서 떨어져 내리더니 땅에 처박혀 와장창 찌그러져 버렸다.
“저 여자!”
아녜스 수녀가 조종사에게 외쳤다.
“저 여자를 쏴요! 폭탄이건 뭐건 모조리 ! 어서!”
그 말에 조종사 역시 외쳤다.
“미쳤어요? 여긴 우리 공항이오! 더구나 사람을…!”
폭발의 충격 때문에 조종사는 헬기의 중심을 잡는 것만도 바빴다. 아녜스 수녀는 더 볼 것도 없이 헬기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사오십 미터가 넘는 높이였지만, 아녜스 수녀는 원소력 중 바람의 기운을 극도로 사용하면 그 정도의 높이라도 다치지 않 고 내릴 수 있었다.
아녜스 수녀는 있는 힘을 다해 원소력을 써서 땅에 내린 후 바 람처럼 몸을 날려 검은 머리의 노파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노파는 보라색 눈을 한 번 더 번쩍이더니 말없이 사라졌다. 정말 로 연기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아녜스 수녀는 양손에 기운을 극도로 몰았다가 그녀가 없어지 자 애꿎은 땅바닥을 박차듯 힘껏 굴렀다. 그녀가 다시 눈을 돌려 뒤를 보니, 나머지 헬기들은 놀라서인지, 다시 정비를 해야 한다 고 생각해서인지 서서히 땅에 내리고 있었다.
아녜스 수녀는 그쪽으로 달려가서 막 땅에 내린 지휘용 헬기에 올라탔다.
“뭐 하는 거예요? 어서 다시 띄워요!”
“하… 하지만 정비를…………….”
조종사는 아녜스 수녀가 공중에서 뛰어내려 날아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보고 기가 질려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녜스 수녀가 무서운 얼굴로 조종사에게 명령했다.
“어서 가요!”
그녀의 뒷좌석에 앉은 뚱보 바이올렛은 거의 기절 직전이었지만, 그 옆에 있던, 침울하고 창백한 인상의 남자는 눈썹 하나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성호를 긋고 조종사에게 말을 건넸다.
“어서 갑시다. 시간이 없어요. 불쌍한 희생자들의 영혼은 주께 서 돌봐 주실 겁니다.”
산맥의 맞은편에서는 일단의 사람들이 라마를 타고 험한 산비 탈을 올라가고 있었다. 원주민 안내자의 인도에 따라 사십 마리 가 넘는 라마가 긴 행렬을 이루었다. 라마들은 험하고 바위 부스 러기가 널려 있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벼랑가를 태연하게 잘도 걸어갔다. 그 위에 탄 사람들 중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하지만 막밟고 지나간 벼랑가의 바위 부스러기가 우르르 낙 하해 높이를 알 수 없을 정도의 벼랑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 가 들릴 때마다 어깨를 움칫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중에 는 무색 화상과 용화교의 십육나한들도 끼어 있었다. 무색 화상 은 눈이 잘 보이지 않았으므로 십육나한 중 한 명이 그가 탄 라 마의 고삐를 대신 잡고 앞서 나가며 그를 인도하고 있었다.
험준한 산굽이를 대열의 반 정도가 돌아 들어갔을 때였다. 무 색 화상이 있는 대열 중간에서는 앞서 돌아 들어간 대열이 보이 지 않는 곳이었는데 별안간 대열이 멈추어 섰다. 그리고 대열의 앞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주민 안내자의 목소리였다.
소리가 들리자 앞장선 제일나한이 손짓을 했고 통역관이 재빨리 무색 화상에게 달려갔다.
“누가 앞을 막고 있답니다.”
통역관이 무색 화상에게 전달하자 무색 화상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어떤 사람인가? 남자인가 아니면……………”
“여자랍니다. 그것도 혼자인데 길을 비켜 주지 않는답니다.”
“여자가?”
무색 화상이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대열의 앞쪽에서 굉음과 사람들의 비명 소리, 라마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고 곧이어 몇 마리의 라마와 사람들이 벼랑 아래로 굴러떨어지 는 소리가 났다. 무색 화상은 라마의 등에 탄 채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십육나한들 중 네 사람이 그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굽이를 돌아서는 순간, 그들 앞에 커다란 구름 덩이 같은 것이 날아들었다. 무색 화상은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양손을 뻗었고 네 사람의 나한들도 동시에 손을 뻗어 구름 덩이 같은 것을 후려 쳤다.
퍽 소리와 함께 구름 덩이가 부서져 없어지는 순간, 무색 화상 은 뒤에서 연이어 다른 구름 덩이가 날아오자 깜짝 놀랐다. 이미 공력을 한 번 발휘한 뒤라 호흡이 맞지 않아 이어지는 것을 받아 칠 자신이 없었다. 무색 화상은 급히 몸을 훌쩍 날렸고 세 사람의 나한도 몸을 날렸는데 한 명은 너무 길이 좁아 미처 몸을 날 리지 못하다가 그 구름 덩이에 맞았다.
“아아악!”
길게 비명을 지르면서 그 사람은 미칠 듯한 고통에 온몸을 마 구 문지르며 그대로 벼랑 아래로 떨어져 내려갔다. 무색 화상은 허공에서 몸을 빙글 회전시켜서 몸을 거꾸로 세운 채로 호흡을 조절한 다음 벼랑을 발로 내디뎠다가 다시 아래로 제비처럼 날 아 다그쳐 들어갔다.
무색 화상의 손이 휙휙 허공을 가를 때마다 쿵쿵 하는 소리가 났다. 두 개의 구름 덩이를 쳐내고 나자 흑단 같은 검은 머리를 발치까지 기른 소녀의 모습이 나한들의 눈에 보였다. 무색 화상 은 물론 그녀를 볼 수 없었다. 무색 화상의 손이 그 여자를 후려 치려는데 여자가 까르르 웃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오는 거야? 숨바꼭질이라도 해 볼까?”
그러자 남은 세 명의 나한들도 제각기 주먹과 발로 여자를 공 격해 들어갔다. 무색 화상의 손이 여자의 몸에 닿으려는 순간, 그녀의 모습은 마치 마술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네 사람이 급히 공력을 거두고 몸을 돌려 자리에 섰는데, 이번에는 대열의 뒤편에서 비명 소리와 함께 라마와 사람이 벼랑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
무색 화상이 분노하면서 몸을 날리려는데 무색 화상의 뒤편에 여자의 모습이 마술처럼 휙 하고 나타났다. 그것도 한 명의 나한 바로 등 뒤에 워낙 가까운 거리였고 좁은 벼랑길이었기 때문에 무색 화상은 그녀의 기운은 느낄 수 있었지만 손을 쓸 수도 없었 다. 그녀는 또 까르르 웃으면서 마치 술래잡기라도 하듯 한 명의 나한을 밀었다.
“너, 쳤다.”
그 나한은 공력도 상당하고 많은 수련을 쌓은 사람이었으나 등 뒤에 순식간에 나타나서 밀치는 데에는 어찌할 수 없었다. 비 명 소리와 함께 나한이 떨어져 내리자 무색 화상은 이를 갈면서 그녀를 덮치려 했지만 그녀는 이번에는 깡충깡충 뛰어서 벼랑길 저쪽으로 가 버렸다.
“급한 일이 생겼으니 나중에 놀아주지. 안녕.”
그녀가 다시 한번 손을 뻗자 벼랑길 한 모퉁이가 굉음과 함께 터져 나갔다. 라마들이 놀라 날뛰고, 사람들은 그녀를 상대하기 보다 놀란 라마들에 올라탄 자신들이 벼랑 아래로 떨어지지 않 으려고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사이 그녀는 다시 흔적도 없이 사 라졌다.
무색 화상을 따라온 네 사람 중 이제 두 사람만이 살아남았는데, 그들은 모두 어깨를 덜덜 떨 만큼 화가 나 있었다. 그러나 무색 화상은 노기를 드러내지 않고 그중 제육나한에게 물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았는가?”
“예.”
“그녀의 머리가 검은색이었나?”
“그렇습니다.”
“동양인이었나?”
“아닙니다. 남미 여자 같아 보였습니다.”
“눈 빛깔은?”
“예?”
“그 여자의 눈 빛깔을 물었다.”
“음・・・・・・ 보라색이었던 것 같습니다. 언뜻 보아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말에 무색 화상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역시 ・・・・・・ 그 여자인가?”
돌연 무색 화상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모두 내려서 등을 벼랑에 바짝 붙이고 걸어라! 저쪽은 우리 가 올 것을 알고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니 우리 도보는 즉시 있는 힘을 다해 상대해야 한다!”
무색 화상의 말대로 일행이 라마에서 내려 벼랑에 등을 붙이고서자 제육나한이 물었다.
“그 여자는 누굽니까?”
“바이올렛이다. 아마 그 여자의 분신이겠지. 모두 세 명이 있 다고 들었는데 역시 놀랍고도 무섭구나. 극히 조심해야 한다. 조 심・・・・・・ “
제사나한이 물었다.
“그런데 왜 그냥 가 버렸을까요? 우리를 모두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런 좁은 길에서는 방법이 없지 않았습 니까?”
“글세・・・・・・ . 그건 알 수 없지. 혹시……”
무색 화상은 뭔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으나 입을 열어 말하지는 않았다.
“좌우간 어서 벼랑길을 수리해라. 이러다가는 일식 때까지 도 착할 수 없겠다.”
일식까지는 이제 열두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조금 있으 면 이 일대에 거대한 극저기압의 폭풍이 휘몰아치리라. 그 전까 지산을 벗어나려면 서둘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