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1권 11화 – 그 남자는 매일 밤 나를 부른다 4 : 결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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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세계편 1권 11화 – 그 남자는 매일 밤 나를 부른다 4 : 결투


결투

건물 안은 몹시도 어두웠고 보수를 하다가 중단한 듯 쓰레기 며 건축 자재들이 사방에 흐트러져 있어서 한결 을씨년스러웠 다. 현암은 안명부로 주술을 건 눈에 힘을 주면서 잠시 침침한 어둠 속을 둘러보았다. 영기…………. 사방에 영기가 느껴졌다. 현 암이 다가오는 것을 알았던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현암에게 당 한 뒤 경계를 하기 위해 쳐 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 튼 영기가 느껴지는 장벽 같은 것이 건물의 초입을 가로막고 있 었다. 진세는 아니었고 매복 정도였다. 현암은 코웃음을 쳤다. 알 수 없는 분노가 솟아올랐다. 비록 현암 자신과 관계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리도 선량한 여자의 마음을 슬프게 만들고 농락한 자, 그리고 어린아이를 강제로 납치한 자………….

현암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여동생인 현아를 잃은 뒤부터 특히 여성에게 몹쓸 짓을 하는 자들에 대해 매우 화를 잘 냈다. 그리 고 이번 일의 경우에는 노기가 치미는 것을 더더욱 참을 수 없었 다. 지금 맞닥뜨리게 될 그자는 연희라는 여인의 마음에까지 깊 은 상처를 남긴자였으니.

현암은 싸늘한 얼굴로 뚜벅뚜벅 걸었다. 구석에 있던 빈 드럼 통 하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빠른 속도로 굴러왔다. 현암이 눈에 기운을 집중하고 보니 희미한 염체가 드럼통 뒤에 붙어 조 종을 하는 듯했다. 박 신부의 말에 의하면 그자가 만들어 내는 것은 자신의 육체에서 분리된 유체와 사념의 힘으로 별도로 응 결시킨 염체가 있다고 했다. 지금 여기 있는 것은 염체들인 듯했 다. 현암은 위협하듯 굴러오는 드럼통을 가만히 쏘아보다가 손 을 뻗어 드럼통을 막고 ‘폭)’ 자결로 공력을 오른손에 집중시켰다. 태극기공의 18자 구결 중에서도 파괴력이 엄청나서 평소 잘 사용하지 않던 술수였다.

드럼통은 현암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공력을 이겨 내지 못 하고 파편으로 화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드럼통에 스며 있던 작은 유체의 기운이 같이 사그라져 가는 것이 보였다. 현암은 그 모습을 보면서 코웃음을 치고는 나직하게 외쳤다.

“나와!”

현암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면서 빈 건물 안에 메아리치자 그에 응답하듯이 영기를 띤 유체가 곳곳에 흩어져 숨어 버렸다. 그러 더니 사방에 널려 있던 나무토막이며 쓰다 만 자재들이 꿈틀거 리면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암은 여전히 까딱도 않고 있었지만 내심 상대의 능력에 경탄을 했다. 영도 아니고 자신이 만들어 낸 염체만을 운용하여, 그것도 이렇게 강한 염체들을 만 들어 물리력까지 쓴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방법이었다. 녹슨 철근 한 가닥이 뱀처럼 부웅 소리를 내면서 달려들었다. 현암이 오른손에 공력을 집중시켜 맨손으로 잡자 철근은 쇳소리 를 내면서 현암의 오른팔에 찰싹 감겼다. 아무리 그래도 염체 하 나하나의 힘은 보통 사람 한 명의 힘만도 못한 것 같았다. 현암 은 재차 팔에 감긴 철근을 그대로 휘둘러서 반대쪽에서 날아오 는 나무토막으로 후려갈겼다. 퍽 소리를 내면서 철근에 부딪힌 나무토막들은 저쪽 구석에 처박혔다.

“장난치지 마라.”

현암은 힘을 주어 팔에 감긴 철근을 떨쳐 버리고는 산산이 흩 어지는 염체들의 단편에 눈을 돌렸다. 염체들은 이제 계단에 있는 철제 사다리에서 한데 뭉치고 있었다. 그러자 녹슨 철제 사 다리가 생명을 얻은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개로 접힌 사다리 가 접혔다 퍼졌다 하면서 네 발 달린 동물이 달려오듯 다가오는 모습은 보통 사람이라면 기절할 정도로 흉악했다.

현암은 오른손으로 태극패를 꺼내 기합을 불어 넣고는 왼팔을 뻗었다. 그러자 익숙한 귀곡성을 울리면서 월향이 쏘아져 나갔 다. 월향은 똑바로 사다리의 중심부에 엉켜 있는 염체의 더미를 향했고 현암은 거기에 다시 공력을 집중한 태극패를 비추었다. 염체를 묶어 두려는 것이었다.

월향에 정통으로 꿰뚫린 염체들은 허공에서 폭죽과 같은 빛을 내면서 순식간에 무화(無化)되었고 사다리가 둘로 갈라진 채 요 란한 소리를 내면서 양쪽으로 쓰러져 버렸다.

현암은 심호흡을 했다. 아무것도 아닌 염체들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공력을 써야 한다면 계속 상대하기는 힘들었다. 돌아온 월향을 받아 왼팔에 꽂아 넣고 현암은 계단 위로 올라섰다. 위층 이 더 영기가 짙어 보였기 때문이다. 현암의 마음속에서 호기가 일었다. 이건 고대의 결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려라. 일대일이다.’

현암의 차 안에서 연희는 반쯤 넋이 나가 있는 상태에서 서서 히 깨어나고 있었다. 뭔가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 때문에 정신 을 차렸는지도 몰랐다. 몽상 같은 기억 속에서 연희는 자신이 이 름도 모르는 남자를 좋아하게 된 이유를 떠올려 보았다. 물론 남 자는 연희에게 친절했고, 놀랍고 신기한 많은 재주들을 보여 주 고, 어린아이 같은 감춰진 순진한 마음을 연희에게 모두 열어 보 였다. 그러나 그 남자는 자신의 믿음과 마음을 저버리고 동생을 납치해간 악한이 아닌가? 도대체 그 짧은, 며칠도 되지 않은 사 이에 자신의 마음이 이렇게까지 쏠리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현암에게 하지 않은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양쪽 가지가 닳 아 없어진 낡고 자그마한 구리 십자가. 그건 남자가 연희에게 준 선물이었다.

-내 모든 좋은 기억은 여기에 다 들어 있습니다. 나 같은 놈 을 믿어 주다니… 자, 받아 주세요.

연희는 그 작은 십자가 십자가라고 하기도 뭐한 구리로 만 든 막대기 같은 것이었지만ᅳ를 꽉 쥐었다. 진실한 남자라고 생 각했다. 그래서 호감을 느낀 것이었다. 연희의 눈에 남자는 엄청 난 크기로 다가왔다. 자신도 진정으로 남자와 이야기했고 설득 하려 했으며 그가 마음을 돌렸다는 것을 믿었다. 물론 둘 사이에 는 접촉도 특별한 감정을 표현한 적도 없었지만 연희는 남자를 믿고 있었고, 남자도 자기와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연희는 낡은 건물로 눈을 돌렸다.

어쨌든 모든 것은 자신의 탓일지도 몰랐다. 그를 미워하는 척 하기도 싫었고, 그렇다고 그에게 호의를 계속 가질 수도 없었다. 연희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싸우는 소리는 위쪽에서 들 려왔다. 연희가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마치 폭풍우가 휩쓸고 지 나간 듯한 싸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잠시밖에 보지 못했지만, 저 현암이라는 남자도 생각 이상의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었다.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을 위해 저렇게 힘들게 싸우고 있다는 데 생 각이 미치자 가슴이 뭉클해졌다. 연희는 자신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에 쥐고 있던 작은 십자가……………. 연희 는 조용히 그 닳은 십자가를 만져 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돌려주어야 해.’

아직도 연희는 그가 십자가를 주면서 했던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니 돌려주어야 했다. 그의 좋은 기억 의 편린이라도 되살려 주고 이별을 고하는 것이 자기가 할 수 있 는 일의 전부인 것 같았다.

위층에서 여자의 비명 소리 같은 것이 길게 울렸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현암의 앞길에 두 가닥의 염체가 뱀처럼 도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두 개의 염체는 서로 배배 꼬면서 협박하듯이 현암 쪽으로 끄덕거렸다. 이미 현암은 네 개나 되는 염체들을 분해시키고 올라오고 있었다. 염체는 순수한 사념만으 로 만들어지는 것이라 했는데 이렇게까지 기묘하고 자유자재로 힘을 발휘하는 염체들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었다.

“비켜!”

현암은 앞을 막고 있는 염체에게 말했다. 말했다기보다는 의사 표현을 한 것이었다. 염체는 애당초 만들어질 당시 만든 자의 생 각을 그대로 담고 있고, 이 염체 또한 앞에 현암이 겪은 것과 마 찬가지로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 분명했 다. 그렇다면 말로 타이르려 해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암이 태극패를 쥔 손에 힘을 주자 염체들은 재빠르게 옆으 로 갈라지면서 검은색으로 바뀌어 갔다. 염체의 색은 그 염체가 만들어질 때의 의도를 말해 주는 것이었다. 이놈들은 매우 악독 한 것이 틀림없었다.

두 가닥의 염체는 실처럼 가는 수백 가닥의 긴 줄 모양으로 바 뀌면서 회오리바람처럼 현암의 둘레를 휘감더니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분명 머리가 되는 부분이 있을 텐데 너무 빨리 도는 바람에 현암은 급소를 찾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아무 데나 공력 을 집중할 수도 없었다. 그 남자의 능력은 이런 것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니 공력을 아껴 두어야 했다.

주변을 돌던 염체들이 일제히 현암이 있는 쪽으로 짓쳐들어왔 다. 현암은 할 수 없이 몸을 한 바퀴 돌리면서 태극기공의 18자 구결 중에 ‘단’ 자결을 응용하여 오른손에 들고 있던 태극패 를 그대로 그었다. 태극패에서 섬광이 비쳐 나오면서 현암이 몸 을 돌림에 따라 소용돌이 모양의 빛줄기가 허공에 그어졌다.

현암에게 쳐들어오던 염체들이 파파팍! 소리를 내면서 허공에 서 어지럽게 폭발하여 먼지로 화했다. 대부분의 염체가 사라졌 으나 시커먼 기운을 띤 굵은 염체 한 가닥이 빙그르르 돌면서 현 암의 머리 위로 솟구쳤다. 현암은 몸을 돌리던 자세 그대로 왼손을 위로 뻗었다.

꺄아아악!

월향의 울부짖음이 들리더니 머리 위에서 불빛이 번쩍했고 월 향은 다시 호선을 그리면서 돌아와 현암의 왼손으로 들어갔다. 현암이 돌아가던 몸을 가볍게 멈추고 기수식의 자세로 계단을 등 뒤로 돌리고 서서 심호흡을 길게 했다. 그때였다. 위쪽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짝짝짝.

조금 톤이 높은, 그러면서도 장난스러운 듯한 가냘픈 목소리가 들렸다.

“훌륭합니다. 하하.”

현암은 고개를 돌리고 나직하게 소리쳤다.

“내려와!”

위쪽의 목소리는 여전히 장난스러운 어조로 들려왔다.

“아니 아니, 누추하더라도 이곳의 주인은 나니까 손님이 올라오시지요. 하하.”

“수작 부리지 마라.”

“하하하하. 나를 그렇게 잡아먹고 싶은가요? 하여간 올라오세 요. 밤바람이 상쾌하답니다. 하하.”

현암은 도대체 저 남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 으나 좌우간 내려오지 않겠다면 이쪽에서 올라가는 수밖에. 현 암은 성큼성큼 계단 위로 올라서기 시작했다.


위층에서 폭죽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펑펑 들려오고 전에 들 었던 비명 소리가 들려오더니 조용해졌다. 연희는 서둘러서 위 층으로 걸음을 옮기려다가 주춤하고 그대로 멈추어 섰다. 두려 웠다. 싸움이 끝난 것일까? 연희는 아직도 이름을 모르는 남자와 현암의 모습을 번갈아 떠올렸다. 그러자 두 명의 남자가 각기 알 수 없는 이상한 방법으로 있는 힘을 다해 싸우다가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환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아……”

서둘렀어야 했는데.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수 정은 어떻게 됐을까? 어쩌면 혹시 그가 수정에게 다른 짓을?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현암이 쓰러져 있을지 모른다 는 생각이 떠올랐다. 차갑고 무뚝뚝하지만 항상 의연하고 믿음 을 주었던 사람. 자신의 부탁이 거절당했는데도 아무런 대가도 없이 목숨을 걸고 싸워 준 사람. 그리고 그 남자…………. 아무리 마 음을 차갑게 굳히려 해도 연희는 그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용서 한다거나 그에게 홀려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를 이해할 수 있 었기에 가련하다고 느끼는 것인지도 몰랐다. 남자가 현암에게 맞아서 쓰러져 있는 광경도 뇌리에 떠올랐다. 또 그 무서운 칼에 두 토막이 난 모습도……………

마음은 급한데도 연희는 계단을 올라갈 수 없었다. 도리어 몸을 떨면서 뒷걸음질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이게 아니었어. 이러지 않았어야 했는데 내가 나빴어.’

연희는 자기 혼자 이곳을 찾아왔어도 그 남자가 선선히 수정 을 도로 내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현암에게 부탁하는 것 이 아니었는데, 그 때문에 둘이 싸우게 되었고 조용한 것을 보니 둘 다. 아니 어느 한쪽은 죽거나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연희는 눈을 질끈 감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연 희의 큰 눈에서 맑은 눈물이 흘렀다. 연희가 오르고 있는 계단의 바로 아래쪽에서 한 줄기의 검은 염체가 엉켜 가고 있는 것을 연 희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현암은 마지막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곳은 옥상이었다. 오층 건물의 옥상. 그 주변에 불이 켜져 있는 건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거세게 불고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천둥이 치기 시작했다. 옥상 난간 앞에서 무심하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현암은 비를 맞으며 몇 발자국 앞으로 나 서서 나직이 말했다.

“너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번갯불이 번쩍하더니 곧이어 또다시 천둥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남자가 피식 맥없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전에 보았던 분이군요. 대단하십니다. 정말.”

현암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공력을 모으면서 말했다. 머리 칼을 적신 빗물이 얼굴로 줄줄 흘러내렸다.

“블랙서클의 하수인, 철없는 아이의 납치범. 그리고 연희 씨를…….”

말을 이으려다가 현암은 그만두었다. 연희의 이야기를 공연히 꺼낸 것 같아서였다. 남자는 연희의 이름이 나오자 움찔하면 서 고개를 돌렸다. 평범해 보이는 용모였으나 눈이 크고 맑아 보였다.

“연희 씨? 그래, 연희 씨가 이곳을 가르쳐 주었군.”

현암은 고개를 갸우뚱했으나 다시 입을 열었다.

“블랙서클은 뭐냐? 뭘 꾸미고 있지?”

그러나 남자는 그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고통스러운 듯이 웃을 뿐이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럴 거야…………. 물론 그랬겠지…………. 언제나처 럼…………. 나는 항상 그래 왔지…………. 항상…….”

“블랙서클이 뭐지?”

갑자기 남자가 하늘을 보면서 와하하하 큰 소리로 웃어 댔다. 웃음소리와 동시에 남자의 몸에서 세 가닥의 푸른 불줄기가 뻗 어 나왔다. 이번에는 단순히 만들어 낸 염체가 아닌 남자 자신의 유체였다. 유체는 몸에서 은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었 으나 이 유체는 은줄이 아닌 길게 늘어진 형태로 연결되어 있었 다. 안명부로 주술력을 싣고 있는 현암의 눈이 화끈해질 정도로 거센 기세였다. 세 가닥의 기운은 허공을 미친 듯이 떠돌며 솟다 가 엉켜 허공에 왕관 모양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왕관은 하트의 형태를 만들었다. 하트의 빛이 붉게 변하는 듯하더니 퍽 하면서 산산이 부서져서 허공에 거대한 손 모양을 만들었다. 현암이 흥, 하고 코웃음을 치자 남자가 이상하게 뒤틀린 듯한 목소리로 킬 킬거리면서 말했다.

“유치하지? 그래, 나는 유치한 놈이지. 모두들 그러더군. 나 는…………… 나는 말이야. 허공에 무늬를 수놓기 위해서 평생을 노력했지. 이렇게… 하하하.”

“세 번째 묻는다. 블랙서클이 뭐지?”

현암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남자의 말을 묵살하고 물었다. 남 자는 인상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급한 것 없지 않은가? 그렇게 나를 잡아먹고 싶나? 흠흠, 아 니, 내가 그렇게 쉽게 이야기해 줄 줄 알았나?”

“마지막이다. 블랙서클이 뭐지?”

“하하하. 복수의 단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단체! 미움과 증오의 단체! 재창조의 단체! 이거면 됐나? 푸하하하.”

남자는 크게 소리를 지르다가 번득이는 눈으로 현암을 노려보았다.

“연희 씨를 불러 줘.”

“흠?”

“아니면………… 너는 내 손에 죽는다. 연희 씨가 보낸 사람일지 라도 말이다. 묻고 싶은 것이 있으니 어서 불러, 어서!”

“블랙서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 말 안 하면 너야말로 혼난다.”

현암이 대꾸하지 않고 냉랭하게 답하자 두 줄기의 유체가 뿜 어져 나와서 현암에게 덮쳐들었다. 그런데 현암은 한 줄기의 유 체가 자신에게서 빗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틀림없이 한 가닥은 이곳을 빠져나가 연희에게 가려는 것이다. 현암은 왼팔을 뻗어 월향검을 떨쳐 내면서 공력 실은 오른손의 태극패로 무섭게 쳐들어오는 한 줄기의 유체를 막아냈다.

굉음과 함께 두 줄기의 힘이 맞부딪치자 보이지 않는 폭발이 일어나면서 현암의 몸이 휘청하며 밀렸고, 남자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움찔하면서 몇 걸음을 비틀거렸다. 월향검이 빠른 속도 로 다른 한 줄기의 유체의 앞길로 날아가 귀곡성을 지르자 유체 는 멈칫하면서 뒤로 돌아 남자의 몸으로 되돌아갔다. 현암의 몸 이 부르르 떨렸다. 유체라고 해서 아까 상대한 염체보다 조금 강 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부딪쳐 보니 비교가 안 될 정도 로 강했고 충격도 컸다. 그러나 현암은 재빨리 기운을 조절하면 서 선수를 쳐서 상대의 기세를 제압하려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블랙서클이 뭐지?”

“집요하구나! 연, 연희……………”

남자는 말을 하다 말고 입에서 울컥 피 같은 것을 흘렸다. 아까 현암과 맞부딪치면서 유체의 한 가닥이 소실되어 타격을 입은 것 같았다. 현암은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디면서 다시 물었다. 

“수정이 알지? 그 아이에게…………….”

“이제 그 이야긴 그만해!”

남자는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몸에서 다섯 가닥의 유체를 쏘 아 냈다. 이판사판인 듯했다. 현암도 화가 치밀어 월향을 빼 들 었다. 귀곡성과 함께 우우웅 소리를 내면서 시퍼런 검기가 주욱 뻗어 나왔다.

“뉘우친다면 지금이다.”

“더 이상 뭘 어쩌라는 말이냐!”

남자는 악에 받친 듯한 소리를 지르고는 양팔을 뻗었다. 다섯 줄기의 유체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면서 두 줄기는 현암 위의 허공으로, 두 줄기는 현암의 양옆으로, 그리고 마지막 한 줄기는 이상하게도 현암의 발밑으로 스며들었다. 현암은 의아했으나 일 단 머리 위로 덮쳐드는 두 줄기의 유체를 향해 월향을 휘둘렀다. 두 줄기의 유체는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검기가 닿기 전에 확 하고 가늘게 퍼졌으나, 현암의 검기는 그 기운으로 직접 닿지 않 은 유체들의 가는 자락까지 잘라 버렸다. 잘린 유체들은 다시 팍 팍 하며 플래시같이 어지러운 불꽃을 남기면서 사라져 갔다. 그 러나 현암의 옆구리를 향해서도 두 가닥의 유체가 달려들고 있 었다. 현암은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하려 했으나 갑자기 발밑이 출렁하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피하지 못했다. 발밑으로 숨어들었던 한 가닥의 유체였다.

현암은 양 옆구리에 쇠망치로 강타당한 것 같은 타격을 느꼈 다. 입에서 크윽 하는 숨이 새어 나오는 동시에 무릎을 굽혀 손 에 들고 있던 월향을 아래로 찍었다. 검기가 콘크리트 바닥에 박 히면서 번쩍하는 섬광을 내고 콘크리트가 폭발하여 움푹 파인 자국이 만들어졌다. 바닥으로 숨어들었던 유체가 파괴되자 그에 연결되었던 두 가닥의 유체도 공중에서 부르르 떨었다.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현암의 눈에 남자의 몸도 넘어지는 것이 흐릿하 게 보였다. 현암은 그 짧은 사이에도 끝이 잘려서 멎어 있는 한 가닥의 유체를 향해 월향검을 날렸다. 번쩍하는 섬광이 일어나 면서 넘어지려는 남자의 몸이 감전된 것처럼 펄쩍 뛰더니 무릎 이 꺾였다.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현암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반쯤 앉은 자세를 취했다. 비록 두 가닥의 유체를 산화시켜 큰 타격을 주기는 했지만 현암이 입은 타격도 몹시 컸다. 공력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는데도 유체는 현 암의 몸속으로 투과해 내부에 직접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돌아 오는 월향검을 손에 받아 들고는 울컥 피를 토했다. 월향검의 느 낌도 좋지 않았다. 검으로 치는 순간에 유체가 격렬하게 폭발하 여 월향의 혼도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현암이 심호흡을 하는 동안 남자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옥 상에 올라온 연희는 움찔했다. 현암과 남자 모두가 비에 젖은데 다가 입가에 선혈을 흘리고 있어서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연희 의 입에서 가는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만해요. 그만!”

현암은 정신을 흐트러뜨리지 않았으나 남자는 연희의 모습을 보자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남자의 입에는 가는 미소가 걸렸다. 

“연・・・・・・ 연희 씨!”

“그만해요. 그만! 제발 그만둬요!”

“연………… 연희 씨・・・ 내, 내가 그렇게도…………”

연희의 눈이 현암을 향했다. 현암은 침중히 말을 않고 공력을 운행하고 있었으나 연희의 눈에는 현암의 상처가 더 심해 보였다. 

“그만둬요! 내게서 떠나요! 어서요!”

연희는 소리치면서 들고 있던 십자가를 던지려다가 남자 쪽으로 내밀었다.

“이젠…..제발⋯⋯⋯⋯⋯ 수정이를……”

“으아악!”

남자의 입에서 광폭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푸른 기운 이 수십 개나 뻗쳐 나왔다. 극심한 분노였다. 엄청난 기운이 덮 쳐 오는 것을 느낀 현암은 공력을 운행하다 말고 번쩍 눈을 뜨면 서 몸을 날려 연희의 앞을 막고 섰다.

“조심해요! 저자는 지금………….”

현암은 직감적으로 남자가 필생의 힘을 다 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유체를 여러 가닥으로 분할하는 것은 한꺼번에 수십 배의 힘을 끌어다 쓰는 것과 같다. 따라서 열두 개로 유체 를 나눈다는 것은 목숨을 건 사생결단 현암은 연희의 손에 들린 십자가를 보지 못했고 따라서 왜 남자가 갑자기 저렇게 노기를 띠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왜?”

유체들은 놀랍게도 각각이 소리를 지르면서 허공에서 점차 형 태를 갖추어 엉겨 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남자 자신의 형상이었 다. 삽시간에 사람의 형상을 한 유체가 열두 개로 불어나 모두 한결같이 “왜?”라는 소리를 지르면서 현암과 연희에게 덮쳐들었다.

현암은 동시에 공격해 들어오는 많은 수의 상대를 대적할 방 법을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언뜻 현암의 머리에 스쳐 가는 게 있었다. 지난번 강화도에서 분신술을 쓰는 일본의 대선사 묘운 의 영과 대적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부동심결!”

현암은 연희의 앞으로 몸을 내밀며 월향을 허공에 던지고 양 손을 합창하듯 마주했다. 열둘의 유체가 무서운 기세로 덮쳐드 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현암의 몸에서도 황금색 광채가 마치 태 양 빛처럼 폭발되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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