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1권 18화 – 세크메트의 분노 6 : 드러나는 음모
드러나는 음모
마음은 급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일을 시작할 수는 없었다. 요 원들이 호텔 측을 다그쳐서 커크 교수가 묵고 있는 층의 방들을 하나씩 하나씩 비워 가는 동안, 박 신부와 현암은 묵묵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전화를 받았었음에도 불구하고 커크 교 수의 방은 조용하다는 보고가 있었다. 건너편 건물에서 망원경 으로 들여다보니 커크 교수의 방은 불이 꺼져 있었다. 요원들의 말에 의하면 커크 교수는 내내 비서와 함께 있었고, 지금까지 방 을 나가지 않았다고 했다. 현암과 박 신부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 지 않았는지 비상계단 구석에 서서 복도를 내다보고 있었다. 안 면이 있는 박 요원이 다가와서 싱긋 웃으며 말했다.
“테러리스트가 잠입해 들어와 있을지 모른다고 호텔 측에 겁을 주었죠. 그나저나 이번엔 또 어떤 일입니까? 또 저번 같은 일 이라면…………… 아이고오!”
“이번에는 그리 시끄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아직은요.”
농담과진담이 반반쯤 섞인 듯한 박 요원의 말에 현암이 조용히 대답하면서 복도를 둘러보았다. 박 요원이 말했다.
“조금 있으면 검사님이 오실 겁니다. 그때까지는 일단 행동을 하지 말고 기다려 달라는군요.”
박신부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초조했지만 일단 다른 사람들이 모두 피할 때까지는 기다려야 했으니까.
복도 저편에서는 투숙객들이 투덜거리면서 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며 나가는 것이 보였다. 현암이 박 신부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다짜고짜 쳐들어갈까요?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일 것 같은데요?”
“우리끼리만 갈 수는 없지. 만약 커크 교수가 가짜라 하더라도 외국인인 것만은 틀림없으니 외교상의 문제가 생길지도 몰라. 아무리 주술사라도 총은 무서워할 테니 그자의 체포는 백호에게 맡기고 우리는 뒤로 물러서서 경계만 하도록 하세.”
현암이 방 쪽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너무 조용하군요. 아까 승희가 전화로 누구냐고 했었는데, 그 자는 과연 아무 눈치 채지 못한 것일까요? 혹시 그사이에 무슨일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성미 급한 현암이 조급해하는 것을 보고 박 신부가 미소를 짓고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세.”
“연락은 받았소만, 아이고, 왜 이렇게 늦게……….”
박물관 경비원은 늦은 시간에 불쑥 정부 기관에서 온 전화를 받고 긴장되어 있던 차에, 어울리지 않게 여자 둘과 아이 하나가 들이닥치자 당황하면서도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백호가 힘을 써서 엄하게 주의를 내렸을 터인데도 경비원은 빈정거리는 표정 이 역력했다.
“오늘 일은 비밀로 해야 합니다. 지시받은 대로만 하세요!”
승희가 매몰차게 짧고 간결한 어조로 명령하듯 말했다. 안 그 래도 길게 치켜 올라간 눈썹을 곤두세우며 이야기하자 경비원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순간, 경비원이 ‘여자랑 어린아이가 무슨 일 을 하겠어?’ 하고 생각을 하는 것을 승희가 읽어 냈다.
“여자나 어린아이라도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승희가 마음속을 정확히 집어내자 경비원은 얼떨떨하면서 딱 딱한 동작으로 키를 내밀었다. 속으로만 생각하던 것이 밖으로 드러날 경우 누구나 당황한다는 것을 승희는 너무도 잘 알고 있 었다. 준후는 아무 말 않고 있었지만, 연희는 말 몇 마디로 승희가 경비원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것을 보고 신기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문 하나를 열고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서는 승희에게 연 희가 넌지시 말했다.
“사람 다루는 솜씨가 좋으시네요. 후후후.”
승희는 연희의 말을 듣고 눈을 살짝 찡그렸다. 사람의 마음속 을 읽고 투시해 내는 것은 아마 세계에서 아무도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승희의 장기며, 힘이고 능력이었다. 그러나 정작 승 희 자신은 이 힘 때문에 한 움큼의 행복감이라도 맛본 적이 있었 던가. 이런 생각이 들자 승희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연희 씨, 남자 친구 많은가요?”
갑자기 물어보는 승희의 말에 연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 희의 선량한 까만 눈동자를 쳐다보자 승희도 갑자기 마음이 풀 리는 것을 느끼고 눈웃음을 지었다.
“전 말이죠. 남을 사귈 수 없어요. 박 신부님과 현암 군 외에는 요. 그럴 수가 없더군요.”
“예? 왜 그렇죠?”
“남의 마음속이 훤히 보이는 것보다 구역질 나는 일이 있을까 요? 후후후.”
승희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한 손에는 랜턴을 들고 다른 쪽 옆구리에는 이집트학 책을 끼고 빠르게 걸음을 옮겨서 앞으로 나아갔다. 스쳐 지나가는 그 모습에 쓸쓸한 미소가 어려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연희의 착각이었을까? 연희는 왠지 서먹서먹한 눈길로 잠시 동안 승희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옆에서 준후 가 눈을 깜박거리며 자기를 쳐다보고 서 있는 것을 깨닫고는 미 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걸음을 옮겼다. 준후도 훤칠하게 키가 큰 연희의 뒤를 졸졸 따라서 박물관 내부로 향했다.
준비가 다 끝났는지 유물들은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고 내부 도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승희는 불을 켜려 스위치에 손을 갖다 대다가 그냥 떼었다. 공연히 밤에 박물관에 불을 밝히면 혹 소란스러워질지도 몰랐다.
연희와 승희는 이제 다른 생각 없이 자신들이 알고 있던 지식 을 총동원하여 진열된 유물 중에서 단서를 찾아내기 위해 걸음 을 옮겼고, 준후는 뒤에 서서 영적인 기운이 잡히지 않나 투시를 하고 있었다.
“어이구, 다들 와 계시는군요. 조금 늦었습니다. 제 딴엔 서둘 러 오느라고 꽤나 고생했습니다.”
훤칠한 키의 백호는 양복 차림임에도 여전히 머리를 뒤로 늘 어뜨리고 불을 붙이지 않은 맨 담배를 입술로 빙빙 돌렸다. 현암 은 책임감이 강하면서도 고위직임에도 장난기가 많은 백호에게 은근히 호감이 갔다. 그러나 길게 인사를 나눌 만큼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가시죠. 현암 씨 얼굴에 도저히 더는 못 기다리겠다고 씌어 있군요. 하하하.”
백호는 박 요원을 포함한 두 명의 요원에게 총을 들게 하고, 자신이 앞장섰다. 그 뒤를 박 신부와 현암이 따랐다. 잠시 후, 일 행은 가짜 커크 교수가 있는 방문 앞에 다다랐다. 백호와 박 요 원이 각각 문 양쪽 벽에 몸을 붙이자 다른 한 요원이 문 앞에 섰 다. 백호가 눈짓을 하자 요원이 노크를 했다.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박 신부에게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승희 나 후보다는 약하지만 박 신부도 약간의 격벽 투시*는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방 저편의 기운이 범상치 않았다. 마치 뭔가 많 은 것들이 바글대는 느낌. 박 신부는 얼른 눈을 감고 투시를 하 기 위해서 기도력을 모았다. 그러나 박 신부가 미처 말을 할 틈 도 없이 요원은 거칠게 문을 박찼다.
“안돼! 물러서!”
박 신부가 소리를 치는 것과 동시에 허공에 찢어지는 듯한 소 리를 지르면서 월향이 현암의 왼손에서 빠져나오려 했고, 현암 은 반사적으로 오른손으로 월향을 붙들었다. 문을 막 열어젖힌 요원과 방 안으로 총을 겨누며 뛰어들려는 백호와 박 요원의 눈 앞에 하얀 것들이 와르르 덮쳐들었다. 방으로 먼저 뛰어들던 요 원이 비명을 지르며 주춤거렸다.
* 대상물이 벽 너머에 있을 때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사물이나 사람의 상태 등을 투시하여 알아내는 주술.
“주의 수호!”
박 신부의 몸에서 오라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와 둥근 형태를 이루더니 세 명의 몸을 감쌌고 날아오던 하얀 것들은 오라에 부 딪혀 타다닥 소리를 내면서 튀었다. 현암이 월향을 날리자 귀곡 성과 함께 월향은 하얀 것들을 뚫고 날아갔고, 월향에 닿은 하얀 것들은 허공에서 확 하고 불이 붙더니 떨어져 내렸다. 박 신부 가 백호와 박 요원을 잡아끌고는 뒤로 물러서면서 큰 소리로 외 쳤다.
“조심해! 저건 주술의 인형!”
현암은 기공력을 오른손에 모으면서 어지럽게 쏟아져 나오는 하얀 물체를 보고는 경악했다. 그건 종이로 접은 사람 형상을 한 인형들이었다. 중앙에는 야릇한 도형과 글자가 씌어 있었지만, 자세히 보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현암은 일단 옆에 있던 큰 장식 용 탁자를 기합 소리와 함께 한 손으로 집어 들고 열려 있는 문 에 밀어붙였다. 후다닥하면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인형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그 힘이 전달되어 왔다. 종이 인형들이 쇠 붙이처럼 강한 힘으로 부딪히는 것으로 보아 주술을 담고 있음 이 틀림없었다. 월향이 다시 날아와 공중에 남아 있던 종이 인형들을 뚫고 현암의 왼손으로 돌아왔다.
박신부는 오라를 잠시 거두어 백호와 박 요원을 풀어 주었다. 백호와 박 요원은 문을 열던 다른 요원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오라가 풀리자 그 요원은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박 신부가 오라 를 발하기 전에 종이 인형들의 습격을 받은 듯, 그의 얼굴과 몸 은 면도날에 수없이 저며진 것처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난자 되어 있었다. 박신부가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이, 이런 악독한……!”
현암은 테이블이 마치 그라인더에 갈리듯 안쪽에서부터 조금 씩 뭉개져 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종이 인형들이 미친 듯 날뛰 며 테이블을 마치 개미처럼 갉아먹고 있었다. 죽은 요원을 잡아 끌었던 백호와 박 요원의 팔엔 다행히 큰 상처는 없었지만, 옷소 매는 날카로운 칼로 베인 듯한 자국으로 너덜너덜했다. 현암이 소리쳤다.
“뒤로 물러서시오! 이건…………….
현암이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와장창 소리를 내면서 현암이 밀어붙이고 있는 테이블의 중간 부분이 우지직 부서져 나가면서 종이 인형들이 흰 나방떼처럼 쏟아져 나왔다.
연희는 작은 수첩에 메모한 이집트 상형문자들을 참고삼아 유 물들에 새겨진 문구를 하나씩 들려주면서 승희와 함께 박물관을 헤매고 있었다. 커다란 단지들, 자질구레한 의식 용구들……
파피루스 문서들은 떨어진 곳에 진열되어 있었다. 박물관 중앙 에는 거대한 돌 제단이 그대로 운반되어 있어서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었다. 승희는 무더기로 진열된 토기 조각들에 흥미를 느꼈다. 토기 조각들은 원래대로 복구되지 못한 단편이었다. 그 런데 그중 눈길을 끄는 토기 조각이 하나 있었다. 다른 것에 비 해 화려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가만히 다가가 보니 무슨 글자 같은 것이 씌어 있었다.
“저기, 저거요. 뭐라고 씌어 있죠?”
연희는 승희가 가리키는 토기 조각을 양미간을 찡그리며 찬찬 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얼마 있다가 수첩을 잠시 뒤적 거리더니 승희에게 그 내용을 일러 주었다.
“‘카’가 돌아오는 날까지 소중히 간직되어라.”
승희가 책에서 ‘카’를 찾는데 그 옆에 토기 조각과 비슷한 상 감이 되어 있는 단지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건…………. “아! 이건…………. 연희 씨, 다시 한번 해석을 해 주세요.”
책을 뒤적이면서 한 무더기 토기 앞에 서 있던 승희가 놀란 듯 신음 소리를 냈다. 연희가 토기 조각에 씌어 있던 문구를 해석해 주었다.
‘카’가 돌아오는 날까지 소중히 간직되어라.”
승희가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카’, 그건 이집트에서 죽은 자의 영혼을 일컫는 말이에요. 그 들은 ‘카’가 돌아올 때 인간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고 미라 를 만들어 보존했죠. ‘카’가 돌아올 때까지 육체를 보존하기 위 해서요. 그런데 문구가 맞다면 저 토기 조각은 카노프스 단지?”
“카노프스 단지요?”
연희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승희가 설명을 덧붙 였다.
“미라의 내장을 꺼내어 보관하는 단지를 말하죠. 중요한 물건 이에요. 부활을 위해 미라를 만들었다면 미라의 내장도 소중히 보관되었을 거고, 분명 그 단지는 미라와 같이 있어야 하는데.”
“미라요? 아니 그렇다면……………..”
“모르겠어요. 그곳은 분명 보통의 신전 석실이었는데, 글 자대로라면 거기에 미라가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그 미 라는 어디 간 거죠?”
승희와 연희는 충격을 받았다. 만약 석실에 미라가 있었다면 그건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그런데 생각을 더 진척시킬 여유 가 없었다. 저만치 뒤에서 준후가 내지르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 이었다. 어느새 문가에 있던 준후와 꽤 떨어졌던 모양이었다.
“조심해요! 뭔가가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중앙에 있는 돌 제단에 갑자기 보이지 않던 구멍이 뚫리더니 뭔가가 달그락거리며 기어 나왔다. 연희는 만들어진 지 수천 년이 지난 돌 제단에서 알 수 없는 것들이 기어 나오자 너무 놀라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승희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방금 본 카노프스 단지의 옆에 있던 그림. 저것들의 정체는 그 그림에 그 려져 있던 것과 동일하다고 승희는 확신했다.
“저건 우샤브티! 미라에 딸린 인형, 미라의 노예들이에요. 틀 림없어! 그 석실에는 미라가 있었어요!”
승희가 소리치는 사이에 사람 팔뚝만한 우샤브티들이 살아 있는 짐승처럼 달그락거리며 잽싼 놀림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연희는 공포에 질려 그냥 얼어붙어 버렸고, 승희가 결연하게 앞 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준후야, 어서!”
우샤브티들은 사자의 머리를 한 사람 형상으로, 흙이나 도자 기로 만든 것 같은데도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승희가 다시 준후를 부르려는 순간, 한 마리의 우샤브티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면서 승희의 얼굴께로 뛰어올랐다.
현암은 일단 기를 최대한 돌려서 몸을 보호하는 한편, 공력 을 집중한 오른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다행히 부서져 나간 테이 블이 현암의 앞을 가려 주어서 별로 상처를 입지 않았고, 공력 이 보호해 주는 현암의 팔에 부딪쳐 오는 종이 인형들은 팅팅 소리를 내면서 튕겨 나갔다. 박 신부도 황급히 오라를 전개해서 백호와 박 요원, 그리고 자신의 몸을 보호하며 성수 뿌리개를 꺼내 들었다.
라틴어로 된 기도문을 읊으면서 박 신부가 허공에 성수를 어 지러이 뿌려 대자 성수에 맞은 인형들은 쭈글쭈글해지면서 힘없 이 땅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그러나 일단의 인형 무리들은 벌레 떼처럼 몰려서 양쪽 복도를 뚫고 나가려 했다.
현암은 일단 인형들이 몰려 나가자 몸을 솟구쳐서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보호할 수 없는 몸 뒤편으로 다시 인형들이 공격해 온다면 큰일이 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악한 주술을 부리는 가짜 커크 교수를 잡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고 순간 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방 안으로 들어간 현암은 다른 기운을 느끼고는 재빨리 몸을 굴렸다. 후끈한 열기가 현암의 몸을 스쳐 벽에 부딪히더니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불기운이었다. 현암은 몸의 중심을 잡고 고 개를 쳐들었다. 놀랍게도 불기운은 테이블 위에 놓인 황금빛 뱀 의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뱀은 실물이 아니고 크기도 그다지 크 지는 않았지만, 번쩍이는 황금빛 몸체에는 예의 상형문자들이 씌어 있었고, 눈은 루비빛으로 반짝이며 고개를 시계추처럼 양 쪽으로 건들거리다가, 현암의 모습이 보이자 다시 고개를 돌렸 다. 그 뒤편으로 알 수 없는 주문을 침중하게 읊고 있는 자의 모 습이 보였다. 상황을 판단한 현암이 다시 뿜어져 나올지 모르는 뱀의 불길을 피해 재빨리 몸을 굴리려는데 뭔가가 발에 걸렸다. 쓰러져 있는 사람의 다리였다. 움찔한 현암이 시선을 아래로 깔 자 배가 갈라진 채 눈동자 대신에 퀭한 구멍으로 천장을 쳐다보 고 있는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시체의 배 속은 텅텅 비어 있었다. 박 신부는 무리 지어 날아가는 종이 인형들을 보고는 십자가 를 꺼냈다. 조금 불경할지도 모르지만 급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 었다. 주술력이 깃든 저런 마물들에게 보통 사람들이 휩쓸린다 면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죽어 버릴 테니 십자가에 기도력 을 가하자 푸른 불길이 이글거리면서 맺혀 갔고, 박 신부는 고함 을 지르면서 십자가를 힘껏 내던졌다. 십자가는 바글거리며 날 아가는 종이 인형들의 중심을 뚫고 푸른 불길을 사방에 퍼뜨렸 다. 허공중에서 굉음과 함께 푸른빛의 폭발이 일어났고, 푸른 불 에 타들어 가는 종잇조각들이 사방에 어지러이 흩날렸다. 불이 붙은 복도의 테이블과 카펫은 삽시간에 타올라 복도를 막았다. 박 신부는 순간적으로 과한 기운을 써서 어지러웠지만 백호와 박 요원을 밀어내면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어서 가서 불을 끄시오! 그리고 절대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 지 못하게 해요. 위험합니다!”
백호와 박 요원은 저번에도 퇴마사들의 능력을 보았지만 창 졸히 일어난 상황에 넋을 잃고 있었다. 보통의 훈련이나 총 같은 것은 이런 싸움에서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음을 지난번 경험으로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백호가 먼저 박 요원을 끌고 복도가 불길에 휩싸이기 전에 민첩하게 뚫고 뛰어나갔다. 뛰던 백호가 허리를 굽히더니 뭔가를 손으로 툭 밀어냈다. 아까 박 신부가 던 진 십자가였다. 박 신부는 십자가를 손에 쥐고 문 안쪽을 들여다 보았다. 문 안쪽에서도 불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커크 교 수로 변장한 주술사가 다른 술수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 틀림없 었다. 박 신부는 이를 악물고 양손에 십자가와 성수 뿌리개를 든 채문 너머로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승희는 엉겁결에 양손을 올려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드는 우샤 브티의 공격을 막으려 했으나, 채 그러기도 전에 우샤브티는 캥하는 소리를 지르며 튕겨 떨어졌다. 푸른 안개 덩어리 같은 것이 승희의 얼굴 앞에 떠 있었다. 승희는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승 희의 눈에 연희가 들고 있는 구리 십자가가 보였다. 십자가 속에 있던 남자의 염체가 뛰쳐나온 것이다. 연희는 놀라서 정신을 차 리지 못한 채 반사적으로 십자가를 쳐든 것뿐이었고, 우샤브티 한 마리가 나가떨어진 것도 그랬지만 푸른 염체가 십자가에서 튀어 나가는 것을 보고 더욱 놀랐다.
승희가 멍한 연희를 잡고 뒤로 당기는 순간, 다시 우샤브티들 이 덤벼들기 시작했다. 우샤브티들의 공력에 승희의 한쪽 바지 자락이 찌익 하고 찢겨져 나갔다.
“물러서요! 준후, 준후야!”
탁탁탁 하고 준후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승희와 연희가 서둘러 뒤로 물러서는 동안, 우샤브티 하나가 덤벼들다가 날아 드는 염체에게 옆구리를 맞고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우샤브티는 넷이나 되었고 염체에게 한 번 맞았다고 별반 타격을 받은 것 같 지도 않았다. 하긴 원래 그것들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닌 인형 이었을 뿐이니.
“인드라의 힘이여!”
준후의 날카로운 고함 소리와 함께 세 가닥의 번개가 동시에 승희와 연희의 앞에 날아와 꽂혔다. 와장창 소리가 나면서 대리 석으로 된 바닥이 파이고 불똥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우샤브 티 하나가 반 토막으로 부서지면서 새까맣게 그을었으나, 그 우 샤브티는 절뚝거리며 다시 덤벼들어 연희의 다리에 매달렸다. 깜짝 놀란 연희가 기다란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연희의 흰 바지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승희가 고함을 치면서 우샤브티를 손으로 잡아 떼어 내자 이번에는 손가락을 물려고 했다. 승희는 그 끔찍하고 징그러운 우샤브티를 엉겁결에 허공 으로 집어 던졌다.
“에잇!”
뒤에서 준후는 승희가 맞을까 봐 번개를 발사하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승희가 우샤브티를 높이 집어 던지자 그때서야 강한 번개를 쏘았다. 허공에서 폭죽이 터지듯 우샤브 티의 몸이 산산이 부서져서 자잘한 파편을 사방으로 날렸다.
“감히 산 사람에게 덤비다니! 못된 것들!”
준후가 소리치면서 발로 팔괘의 방위를 밟고 손으로는 수인을 맺었다. 보법은 도가의 수법이었고 수인은 밀교의 술수였다. 더 군다나 놀랍게도 준후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주문은 한국의 토 속 무가의 주문과 흡사했다.
“땅이시여, 땅이시여, 불을 간직한 땅이시여!”
승희와 연희가 서 있던 바로 앞의 땅에 쩍쩍 금이 가면서 불줄 기가 쇠창살처럼 사이사이 치솟아 올랐다. 마치 제트기의 꽁무 니에서 길게 솟는 화염과 흡사한 날카로운 불줄기는 또 하나의 우샤브티의 몸통을 박살 내 버렸다. 우샤브티는 끽 소리 한번 지 르지 못하고 공중에서 순식간에 타들어 재로 변해 버렸다.
나머지 두 우샤브티는 뒤로 물러섰다가 허공에서 서로 부딪혀 얼싸안더니 야구공처럼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면서 쏘아져 들어 왔다. 승희와 연희는 놀라서 몸을 움츠렸으나 놈들은 준후에게 짓쳐들고 있었다.
“준후야!”
승희가 소리를 지르며 몸에 힘을 주었다. 준후에게 힘을 불어 넣으려는 것이었다. 준후는 기합과 함께 방위를 고쳐 밟고 양손을 교차시키며 수인을 맺었다가 짝 소리를 내면서 손을 모았다.
“바람!”
준후의 몸 주위에 바람이 일더니 삽시간에 무서운 기세의 돌개 바람이 되어 빙빙 돌았다. 공 모양으로 동체가 되어 부딪혀 오던 우샤브티들도 그 기세를 알아차린 듯 준후의 바로 앞에서 둘로 갈라져 소용돌이치는 바람의 세력권 밖으로 피해 갔다.
“어라?”
우샤브티가 박살이 날 것으로 기대했던 준후가 몸을 돌리며 주위를 살폈다. 두 마리의 우샤브티들은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 지 않았다. 순간, 준후는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놈 들은 작기 때문에 유물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는 이런 곳이라면 얼마든지 숨을 데가 많다. 준후는 숨을 몰아쉬면서 승희와 연희 에게 소리쳤다.
“주위를 경계해요!”
그러면서 준후는 부적을 몇 장 꺼내어 손에 쥐었다. 방금 쓴 술수는 그동안 생각만 해 오던 것을 처음으로 실행해 본 것이다. 도가와 밀교, 그리고 무가 등 준후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 한데 모은 술수였고 예상했던 것에 비해 아직 위력이 크지는 않았다. 또 승희의 증폭력까지 받았는데도 숨이 찬 것으로 보아 힘의 소 모가 몇 배는 큰 것 같았다.
준후는 부적 두 장을 허공에 띄웠다. 부적들은 살아 있는 듯 허공을 날아 새처럼 준후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준후는 이상한 걸음걸이로 방위를 짚으며 승희와 연희에게로 다가갔다. 승희가 한숨을 쉬었다. 우샤브티를 다 잡지는 못했지만, 준후가 옆에 있 으니 조금 마음이 놓였다. 연희가 와들와들 떨리는 손으로 승희 의 팔을 잡았다. 이상하게 여긴 승희와 준후는 연희가 시선을 따 라 고개를 돌렸다.
“저, 저것!”
돌로 된, 틀림없이 돌로 되어 있는 제단 위에서 붉은 액체가 흘러 넘쳐나고 있었다. 분명히 그것은 피였다. 마치 샘에서 솟아 나듯 피가 넘쳐 나면서, 제단 위에는 무언가가 펄떡거리며 녹아 들어가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던 것들이었다. 가까이 가보았다. 사람의 내장이었다.
승희와 연희가 신음을 터뜨리자 준후의 주변에 떠 있던 부적 들이 폭죽처럼 빛을 발하면서 불덩어리로 변했다. 준후가 소리 쳤다.
“엎드려요!”
부적이 타들어 가는 불빛 아래서 양쪽, 그러니까 일행의 왼쪽 과 오른쪽에서 두 마리의 우샤브티가 쏜살같이 덮쳐들었다.
“우라에우스!”
박신부는 테이블 위에서 불을 뿜어 대는 뱀의 모습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질렀다. 박 신부는 이집트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지난번 브리트라를 받 드는 사교의 무리들과 싸우면서 뱀의 주술적인 측면에 대해 패 연구를 한 바 있어 그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우라에 우스는 이집트의 태양신 라의 수호자로서 불을 뿜으며 태양의 적을 물리친다는 성스러운 뱀이었다.
“현암군, 저자를!”
박 신부에게 우라에우스의 불길이 덮쳐들었다. 박 신부는 오 라를 몸 밖으로 퍼뜨리면서 십자가로 불길 한가운데를 막았다. 우라에우스가 뿜어내는 불길은 화염 방사기에 버금가는 위력이 있었다. 박 신부의 검은 사제복이 타는 듯한 냄새와 함께 머리카 락에서 바지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현암은 너무도 처참한 시체의 모습에 한동안 넋을 잃고 있다 가 박 신부의 고함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현암은 재빨리 상황을 판단해 보았다. 다른 힘보다도 기민한 상 황 판단력이 더 도움 될 때가 많을 정도로 현암의 행동은 신속했 다. 현암은 기합과 함께 대담하게도 우라에우스가 놓여 있는 테 이블의 바로 뒤에 손을 짚고 한 바퀴 크게 텀블링을 하면서 가짜 커크 교수가 주문을 외우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현암은 월향검을 쓸까 생각했지만 사람에게 쓰기는 싫었다. 대신 대강의 공력을 모은 주먹으로 가짜 커크 교수의 턱을 노렸다. 현암의 뒤를 쫓는 화염 방사기와 같은 불길이 커튼에 붙었 다. 불길을 피한 현암이 주먹을 날려 가짜 커크 교수의 아래턱을 강타했다. 현암에게 일격을 당한 가짜 커크 교수는 반대편 벽에 까지 날아가 퍽 하고 부딪히더니 땅에 쓰러졌다. 현암은 몸을 굴 리면서 놈이 있던 자리를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썩은 천 조각 같 은 것과 낡은 파피루스 두루마리가 널브러져 있었고, 곤충 모양 을 한 보석들이 몇 개 흩어져 있었다.
현암은 땅을 박차면서 놈의 멱살을 잡고 장난감처럼 번쩍 들 어 올렸다. 제법 덩치가 큰 가짜 커크 교수의 몸뚱이는 헝겊 인 형처럼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우라에우스의 머리가 현암 쪽으로 향했다. 현암은 놈의 주술 을 멈추게 하려고 가짜 커크 교수의 몸을 들어 불길을 막으려 했 으나 우라에우스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불덩어리를 토했다. “아아아악! 우라에우스!”
가짜 커크 교수가 이가 몇 개 부러진 듯, 식식 새는 소리로 비 명을 토하자 측은한 마음이 든 현암은 놈을 한쪽으로 제쳐 놓았 다. 불길이 맹렬한 속도로 현암에게 짓쳐들었다. 현암은 급한 대 로 몸을 납작 엎드리면서 땅바닥의 파피루스와 그 밖의 물건들 을 왼손으로 감싸 쥐었다. 현암의 등으로 불길이 스쳐 지나가자 화끈한 느낌이 전달되어 왔고, 불길은 벽에 부딪혀 온통 불바다 로 만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박 신부가 급한 김에 성수 뿌리개를 우라우스에게로 던졌 다. 우라에우스는 불의 뱀, 물과 상극일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우라에우스의 꼬리 부분을 맞힌 성수 뿌리개에서 성수가 흘러나 오자 황금빛을 내던 뱀의 꼬리 부분이 평범한 나무토막처럼 변 했다.
“크아아아악!”
뱀은 이상한 괴성을 지르며 갑자기 더더욱 심한 불길을 닥치 는 대로 뿌려 대면서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박 신부는 엉겁결에 몸을 문 밖으로 날렸다. 불길 한 가닥이 아슬아슬하게 박 신부가 피한문으로 튀어 나가 벽에 부딪히더니 퍼져 갔다.
현암이 노호를 지르며 두루마리와 석판들을 쥔 채 왼팔을 뻗 었다. 팔에서 월향이 귀곡성을 울리며 쏘아져 나갔다. 월향검은 우라에우스의 불길을 가르면서 힘겹게 앞으로 나아갔다. 현암이 월향의 꽁무니에 달아 주었던 작은 노리개는 불덩어리가 되어 허공에 흩어져 버렸다.
“제길! 이놈의 불!”
현암은 집어 든 유물들을 급히 주머니에 쑤셔 넣고 오른손으 로 태극패를 꺼내는 한편, 왼손으로 넘어진 가짜 커크 교수를 다 시 잡아 올렸다. 가짜는 그 와중에도 현암의 손을 뿌리치며 저항했다.
“이놈이!”
화가 치민 현암이 놈의 머리통을 벽에 되게 찧어 박았다. 쿵 하는 소리가 벽을 통해 전달되어 왔다. 놈은 늘어져 곧 잠잠해졌 다. 현암은 급히 태극패에 기공을 모아 뒤로 밀려나는 월향검에 게 쏘아 주었다. 방 안은 불바다로 변해 있었다. 월향은 찢어지 는 듯한 비명을 지르면서 점점 앞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월향이 밀려난다면 불길은 현암에게로 쏟아질 것이고 피할 곳이라고는 아무 데도 없었다.
“야아아아압!”
갑자기 문 쪽에서 박 신부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불길 때문 에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지만 십자가에 기도력을 모아 집어 던 졌다. 십자가는 우라에우스의 허리에 명중했다. 그러자 명중된 허리가 바스러져 버렸고, 잘린 우라에우스의 몸통에서도 일단의 불기둥이 쏟아져 나왔다. 순간, 월향을 밀어내던 우라에우스의 불기운이 조금 약해진 듯했다. 힘을 얻은 월향이 꺄아아아악 하 는 날카로운 귀곡성을 울리면서 뻗어 나갔고 우라에우스의 머리 가 아가리부터 싹둑 잘리더니 허공을 날았다. 뿜어져 나오던 불 길이 온데간데없이 사리지고 우라에우스의 남은 몸뚱이가 뻣뻣 하게 뻗더니 부러진 막대기 형상으로 바뀌어 버렸다.
돌아온 월향검을 오른손으로 받아 든 현암은 치를 떨었다. 월 향검이 붉게 달구어져 오른손을 공력으로 보호했는데도 뜨거워 오래 잡지 못할 정도였다. 영력이 있는 월향검이 이렇게 달구어 질 정도면 우라에우스의 불길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짐작할 만했다.
우라우스는 부러진 막대기로 변해 버렸지만 방 안의 불길은 지옥을 방불케 했다. 현암은 왼손으로 늘어진 가짜 커크 교수를 질질 끌고 오른손으로 벽에 걸려 있는 액자 하나를 집어 들어서 불길을 헤쳐 나갔다. 손에 들었던 액자가 금세 불덩어리가 되어 난감해하던 차에 갑자기 시원한 것이 현암에게 퍼부어졌다. 박 신부가 소화기를 현암의 몸에 퍼붓고 있었다. 일단 시원했고 지 척도 보이지 않는 불길과 연기 속에서 문의 방향이나마 가늠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현암군, 어서 나와. 어서!”
현암은 소화기 약품 때문에 숨도 들이마시지 못하고, 불길 속 에서 가짜 커크 교수의 늘어진 몸뚱이를 문 쪽으로 공력을 집중 해 던진 다음 자신도 몸을 날렸다.
“어어! 이건?”
준후와 승희, 연희마저도 어이가 없었다. 미친 듯이 양쪽에서 달려들던 우샤브티들이 땅바닥에 떨어져 내린 것이다. 마치 끈 이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오히려 술수를 부려 방어하려고 했던 준후가 허탈했던지 더 어이없어 했다. 그럴 즈음 푸른 염체가 허 공을 빙글 돌아서 연희가 들고 있던 구리 십자가 속으로 스며들었다. 연희가 커다란 눈에 미소를 띠며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연 희의 마음속에서 고마움과 서글픔이 뒤섞인, 쉽게 말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일었다. 대강의 사정을 현암에게 들어 알고 있는 승 희도 그 모습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마음속이 휑했다. 이유 없는 질투심 같은 것도 느껴졌다.
준후가 땅바닥에 떨어진 우샤브티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누군가 부리던 주술이 깨어진 것 같아요. 바로 여기에서 벌어 진주술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러면, 가짜 커크 교수가?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알고…….”
“글쎄요. 이 무늬는 뭐죠?”
고개를 묻고 있던 연희가 흠칫하면서 준후가 가리키는 우샤브 티에 눈을 돌렸다. 가슴에 새겨져 있는 무늬와 상형문자들……………. 그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 무늬는 아까 현암과 박 신부를 기습 한 종이 인형에 그려져 있던 무늬와 같은 것들이었다.
승희가 깜짝 놀라면서 제단 쪽을 쳐다보았다.
제단! 그쪽에 아까 피와 내장이………….”
잠깐 동안 우샤브티 때문에 잊고 있었던 제단의 괴이한 일이 셋의 뇌리에 떠올랐다. 셋은 일제히 돌로 만든 제단 위를 살펴보 았으나, 어느새 제단 위에 있던 내장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붉은 피가 흘러 나와 제단을 적시고 있었다.
“이건 도대체 무슨 일이지? 무서워……………”
연희가 끔찍한 듯 중얼거렸고 승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종류의 경험이 연희에 비해 약간 많을 뿐, 승희라고 해도 속이 뒤틀리고 겁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준후가 눈을 빛내며 이야 기했다.
“다른 곳으로 물건을 옮기는 술법은 선도나 밀교에도 있어요. 공간 이동이라고 하나요? 하여간 저건 제단에 바치는 제물이에요.”
승희가 두려운 듯이 제단을 보고 나서 자신들이 지나쳐 온 전
시실을 들여다보았다.
“내장・・・・・・ 카노프스 단지…………….”
연희가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승희는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뭔가 말하려다가 고개를 저으
면서 중얼거렸다.
“아니야, 아니야. 모르겠어.”
준후는 호기심이 이는지 느린 걸음걸이로 천천히 제단 쪽으로 다가서기 시작했다.
현암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불에 옷이 마구 그을린데 다가 약품까지 뒤집어쓴 현암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요원들이 소화기로 불길을 간신히 잡아 가고 있었고, 복도에 났던 불도 이미 다 꺼졌다.
스프링클러 작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박 신부도 손수건으 로 얼굴과 사제복을 닦아 내고 있었고 백호는 쓰러져 있는 가짜 커크 교수의 얼굴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변장술이 좋군. 우라질 놈. 왜 남의 나라에서 이상한 짓을 하 는 거야?”
백호가 놈의 얼굴 아래를 잡고 위로 그대로 젖히자 얼굴을 뒤 덮고 있던 얇은 막이 벗겨지면서 놈의 원래의 얼굴이 드러났다. 오십 대 정도의 얼굴이 검게 그은 남자였고, 확실치는 않지만 진 짜 커크 교수와 같은 국적인 영국인처럼 보이진 않았다. 현암에 게 얻어맞은 얼굴 한쪽은 퉁퉁 부어올랐고, 머리를 심하게 부딪 혀서인지 아니면 불기운을 세게 쬐어서인지 아직까지 정신을 차 리지 못하고 있었다.
현암은 월향검을 꺼내더니 소화기 약품에 젖은 옷으로 문질 러서 식힌 후 정성껏 닦았다. 월향은 그 뜨거운 불을 헤치고 나 왔음에도 불구하고 기특하게 상감 하나 떨어지지 않고 반짝거렸 다.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의 칼은 아니었다. 현암이 안도의 한숨 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드디어 살아 있는 블랙서클 일원을 잡았군요. 이제 모 든 게 서광이 비칠 것 같네요.”
그러나 들뜬 현암에 비해 박 신부는 그다지 편한 기색이 아니었다. 현암은 박 신부의 그런 모습이 의아했던지 물었다.
“왜 그러시죠? 이제 놈도 잡았는데.”
“음? 음・・・・・・ 아니네. 뭔가가……”
“뭐가요?”
“흠! 세크메트의 분노. 그건 과연 무엇일까? 이자가 엄청난 주 술을 부린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정도로 홍 박사의 영이 죽어서까 지 기겁을 했던 걸까?”
“예? 음. 어쨌든 이놈이 주술을 걸지 않으면 세크메트인지 뭔 지의 분노도 일어나지 않는 것 아닐까요?”
“글쎄・・・・・・・”
박신부는 뒷짐을 지었다. 현암도 박 신부의 말을 듣고 다시 생 각을 해 보았다. 왔다 갔다 하던 박 신부가 입을 열었다.
“이자는 무슨 의식을 행한 것 같아. 저 안에 있던 시체를 언뜻 보았지. 그리고 아까 있던 우라에우스, 그 뱀 말이네. 그것과 종 이 인형들은 의식을 방해하지 못하게 쳐 놓은 호법의 역할이었 던 게 아닌가 싶어.”
“예,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까의 시체는 정말 참혹 했거든요. 지금은 다 타버렸을 테지만요.”
현암은 주머니에 말아 넣었던 석판과 파피루스, 보석들을 꺼냈다.
“이것들로 무슨 의식을 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집어 왔지요. 이크! 이 종잇조각은 오래되어서인지 막 부스러지네.”
“조심! 부스러뜨리지 말게. 흠, 일단 연희 양에게 해독해 달라 고 해야 할 것 같군. 어떤가?”
눈을 돌려 저쪽을 보니 백호가 놈에게 물을 끼얹어 정신이 들 게 한 다음 다그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놈은 한마디도 하지 않 았다. 현암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럼, 승희의 도움도 필요하겠군요.”
박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래도 예감이 이상해. 기다리지 말고, 피곤하더라도 우리가 먼저 박물관으로 가세.”
현암이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백호에게 뒷수습을 맡기고 현암과 박 신부는 박물관으로 향했 다. 현암은 주워 온 유물들을 봉지에 잘 넣어 들었고, 박 요원과 다른 한 명의 요원이 비틀거리는 가짜 커크 교수를 끌고 뒤를 따 랐다. 현암은 아까 굉장한 위력을 보인 종이 인형들의 정체가 궁 금해서 박 신부의 성수에 맞아 찌글찌글하게 우그러진 인형들 중 하나를 주머니에 넣었다. 백호는 이곳을 수습하고 나면 곧 자신 도박물관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현암과 박 신부는 차를 타려다 가 그냥 도보로 박물관까지 가기로 했다. 준후와 승희, 연희가 있 는 박물관은 걸어서 가더라도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암이 빠르게 걸음을 옮기면서 박 신부에게 물었다.
“신부님은 아까 속이 다 후벼져 있던 시체를 보셨습니까? 몹 시 참혹하더군요.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을까요?”
“그거야 알 수 없지. 나도 잠깐 그 시체를 보기는 했어. 그러나 단순한 살인이라고는 볼 수 없고, 무슨 목적에 의해서 그런 것 같네. 저자는 정말 참혹한 짓을 했더군.”
박 신부는 말을 하면서도 노여움을 풀지 못하는 듯 끌려오는 가짜 커크 교수를 치를 떨며 노려보았다. 그때 현암이 갑자기 무 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빠르게 말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꾸몄던 걸까요? 또 다른 저주받은 의식을 행하던 것이었을까요?”
“종이 인형들은 분명 의식을 보호하기 위해서 날렸던 걸 거야. 또 지팡이로 우라에우스를 만들어 낸 것도 그렇고.”
“맞아요. 이집트 고대의 술수 중에 지팡이로 뱀을 만드는 것이 있었다죠?”
“그렇네. 성경에도 나오지.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가 파라오 에게 지팡이로 뱀을 만드는 이적을 보이자, 애굽의 주술사들도 같은 이적을 보이는 구절이 나온다네. 물론 모세가 만든 뱀이 다 른 주술사들이 만든 뱀을 모조리 삼켜 버리기는 하지만.”
“좌우간, 그러한 주술도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닌데 주술로 수호를 삼고서 행하던 의식이라면 분명 상당히 거창한 것이었을겁니다.”
현암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저놈이 의식을 행하고 있던 곳은 호텔 방에서였다. 그런데 죽은 사람의 들어낸 내장은 어디 에 있었을까?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분명 그것들은 의식이 행해 지던 장소의 석판 부근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아 까 현암이 그 위로 재주를 넘고 가짜 커크 교수를 때려눕히고, 또 석판과 두루마리와 보석들을 집어넣을 때에도 그런 지저분한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한 사람의 속을 모조리 들어냈으니 그 양 도 상당할 것이고, 호텔 방은 탁 트여 있으니 일부러 감추어 놓 지만 않았다면 현암의 눈에 뜨이지 않았을 리 없었다. 아니, 의 식을 행하면서 제물을 감추어 놓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생각을 하다 보니 박물관에 거의 도착해 있었다.
우샤브티들이 힘을 잃은 박물관 내부는 조용했다. 수위들도 안 에서 한바탕 벌어진 활극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연희와 승희는 조금 전 사람의 내장 같은 것이 제단 위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 나빴지만, 준후는 그런 일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영적인 면에서 이상한 것이 없다면, 겉으로는 아무리 이 상하게 보이는 일일지라도 준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뭔지는 모르지만, 이제 별일은 없을 것 같아요. 조용하네요. 아무것도 느껴지는 것도 없구요.”
준후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안심한 연희와 승희가 힘을 잃 은 우샤브티와 카노프스 단지의 조각 등을 찬찬히 훑어보는 동 안준후는 돌로 된 제단 근처를 돌면서 관찰하고 있었다. 커다란 한 개의 검은 돌로 만들어진 제단인 듯싶었으며, 그 앞에는 다음 과 같은 문구-아마도 진짜 커크 교수가 조사하여 붙여 놓은 해 설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가 씌어 있는 팻말이 있었다.
이 거대한 돌로 된 검은 제단은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집트에서는 구하기 힘든 화성암으로 만들 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아마 화산 지대에서 운반해 온 것이 틀림 없다. 이 제단은 피를 상징하는 석류즙과 술, 그리고 미약을 섞은 즙을 끼얹어 세크메트에게 제사를 지내던 물건이었을 것이라 추 측되며, 인신 공희도 치렀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톤의 무게가 나가는…………….
준후는 적혀 있는 글들이 생소했던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느새 승희와 연희도 준후의 뒤에 서서 팻말을 읽어 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연희가 뭔가 이상했던지 고개를 갸웃거리자 승 희가 물었다.
“왜 그러죠. 연희 씨?”
“이상해요.”
“뭐가요?”
“저 팻말에 쓰인 말들이요.”
“어디가 이상하죠? 내가 보기엔 별로……..”
승희는 살짝 눈을 찌푸리면서 연희의 얼굴로 시선을 향했다. 연희의 눈은 우샤브티가 튀어나왔던 작은 구멍을 향하고 있었다.
“이 돌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로 되어 있다는 말은 잘못된 것 같아요.”
“예, 맞아요. 아까의 그 우…………… 뭐라던 인형들이 여기서 튀어 나왔으니까요.”
준후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우샤브티가 튀어나온 구멍을 덮 고 있었던 듯한 돌 조각을 집어 들었다. 돌 조각은 제단 전체를 이루고 있는 돌과 거의 같은 색이었으나 그 주변에 결이 흐릿하 게 보였다.
무늬가 이상했던지 그 돌을 받아 든 승희가 찬찬히 들여다보 고 있는데 준후가 물었다.
“승희 누나, 고고학을 했으니까 알 것 같은데요.”
“응?”
“새로 발굴된 유물은 철저히 검사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요?”
“그야 물론이지. 유물을 손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라면 모든 검사를 다 한단다.”
“검사는 누가 하지요?”
“그야 물론 발굴을 담당한 사람들이…………….”
“그러면 이 제단을 발굴해 낸 사람들이 제단에 나 있는 구멍과
감추어진 우샤브티에 대해 몰랐을 거라고 생각해요? 전 그게 이 상해요.”
승희는 놀란 듯이 소리를 지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연희는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뭐가 튀어나온 게 아니었다. 승희 가 소리를 친 것 외에는…………….
“그래! 그렇다면 혹시?”
“승희 씨, 무슨 생각이라도?”
승희는 돌 조각을 만지작거리면서 연희에게 말했다.
“연희 씨, 이 제단은 용암이 굳은 돌로 이루어져 있어요. 즉 화 성암이죠. 그런데 저 우샤브티들이 튀어나온 구멍을 보면.” 승희는 돌 조각에 나 있는 결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부분을 보면 놀랍게도 고대 이집트인들은 우샤브티를 넣 고 그 틈을 용암으로 막았거나, 아니면 돌을 녹여서 용접을 한 것 같아요. 신기하지요?”
연희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쇠도 아니고 돌을 녹여서 용접을 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준후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전 그냥………….”
“아니야. 준후야, 중요한 걸 짚어 주었어. 음……. 이 정도의 구멍은 모르긴 몰라도 X선으로 투시했으면 나왔을 텐데. 그러면 저 우샤브티들이 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었을 것 아니겠니? 물 론 돌을 용접한 것까지는 짐작하지 못했을지 몰라도 속에 빈 공 간이 있는지는 조사해 보았어야 마땅한데. 이상하네.”
승희는 기이하다는 눈으로 제단을 쳐다보았다. 겉에 묻은 피 말고는 제단에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준후야, 정말 여기 아무런 느낌은 없지? 아무런 영적인 조짐 도 없는 것이 확실하니?”
“분명해요. 그냥 물건일 뿐이에요. 아까 우 뭐라는 인형이 날 뛰었을 때는 주술력이라는 느낌이 확 왔지만.”
연희가 정리를 했다.
“자, 자. 우리는 아까 피와 내장이 제단 위에 있는 것을 보았 어요. 그러나 지금은 사라졌지요. 우리가 헛것을 본 건 아니라는 게이 핏자국으로 증명됩니다. 그런데 준후의 말에 의하면 공간 이동인가 하는 술법으로 물건을 나타나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 했으니 사라졌을 수도 있어요. 그럼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그리 고 왜?”
승희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요. 저도 그걸 의심했죠. 저 제단은 원래 세크메트에게 공물을 바치는 제단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 흉측한 제물들이 제단속으로 빨려든 것은 아닌가 생각한 겁니다. 우샤브티들이 튀어나올 공간이 숨겨져 있다면, 다른 공간이 안에 있는 것은 아 닌가 해서지요.”
연희가 무서운 듯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주춤거리며 조금 뒤로 물러섰다.
“다른 공간이요? 제물이 저절로 빨려든다고요? 돌을 뚫고?”
“그 정도의 일은 신기한 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아무래도 이 상한 느낌이 들어요. 분명 아까의 제물은 어떤 주술사에 의해 이 리로 공간 이동된 것이 틀림없고 우샤브티들이 날뛰다가 조용해 진 것도 아마 그 주술사, 그러니까 가짜 커크 교수와 관련이 있 을 거예요. 아마도 현암 군과 박 신부님에게 제지당했는지도 모 르죠. 그러나 아까의 공간 이동을 통해 제물이 바쳐졌다면 왜 제 단에서 아무런 반응도 없죠? 그게 더욱 이상해요.”
“가짜 커크 교수가 두 분의 손에 제지당했다면 의식도 중단되 었는지 모르죠.’
“그러나 중간에 제지당했다면 제물은 그냥 남아 있어야 하는 데 다 없어졌잖아요.”
“제물까지 바쳐진 다음에 중지된 것일지도……………”
“고대의 제례 관습에 따르면 제물을 바치고 받아들여지면 실질적으로 그 제사는 끝난 거예요. 그렇게 강한 주술로 바친 제물이 받아들여졌는데 이렇듯 조용할 리는 없지요.”
승희는 제단을 쏘아보았다.
“제 짐작인지는 모르지만 아까부터 드는 생각이 있어요.”
“그게 뭔데요?”
“저 제단은 평범한 제단이 아닐지도 몰라요. 미라의 관…….. 승희의 상상은 연희에게 조금 비약적으로 들렸다. 돌로 만든 제단 자체가 관이라니?
“미라의 관이라구요? 아니, 관을 왜 저런 형태로…………”
“무슨 이유가 있겠죠. 아아, 생각해 보면 얼마나 완벽한 것일 까요?”
“뭐가요?”
승희는 머리가 아프고 복잡한 듯, 고개를 휘휘 저으면서 머리 를 식히는 듯했다. 그러자 연희가 돌연히 빠른 속도로 대신 이야 기를 시작했다.
“자, 덴데라 지하에서 발굴된 것은 하토르의 분노의 변신인 세크메트의 석실이었어요. 그리고 발굴 와중에 뭔가 있다는 것 을 안 블랙서클이 끼어들고 발굴 책임자인 홍 박사님과 커크 교 수는 죽었죠. 블랙서클은 뭔가 노리고 있어요. 홍 박사님의 영이 세크메트의 분노를 경고한 것과, 가짜 커크 교수인 주술사가 우 리나라에 굳이 들어온 것을 보면, 블랙서클은 이 전시회를 계기 로 하여 우리나라에 세크메트의 분노를 뒤집어씌우려는 계획을 꾸미는 것 같아요. 맞지요?”
승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샤브티들이 튀어나오고, 또 싸움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힘을 잃고 떨어져 내린 것은 그 주술사가 제지당했다고 볼 수 있 지요. 그런데 그사이에 그 흉악한 제물은 바쳐지고 말았어요. 그 리고 우샤브티들이 튀어나온 것으로 보아 저 돌 제단에는 빈 공 간이 있다는 말이 되는데, 발굴 조사단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언 급조차 하지 않았어요. 그건 저 제단이 블랙서클의 음모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말이죠.”
“맞아요. 제 생각도 그래요.”
“승희 씨의 추측, 아까부터 승희 씨는 미라의 내장을 보관하는 카노프스 단지나 우샤브티 같은 것으로 볼 때 석실에는 미라가 감추어져 있었을 것이란 말을 계속했죠. 그런데 저 제단이 승희 씨의 상상대로 미라의 관 그 자체라면?”
승희가 말했다.
“우샤브티들은 무덤을 지키는 인형, 미라의 노예들이에요. 그 래서 그런 생각을 한 거죠.”
연희는 말을 끊었다가 화제를 돌렸다.
“일단 거기서 중지하고 제가 생각한 것도 들어 봐 주세요. 세 크메트는 인간의 피를 즐기는 난폭한 신이지요. 아까 저는 저 아 래쪽의 큰 항아리들을 살펴보았죠. 거기에는 홍 박사님의 편지에서 보았던 두 번째 문구들이 새겨져 있더군요. ‘분노여 잠들라’라는 홍 박사님의 두 번째 편지를 기억해요? 아까 저, 토기 조각에서 나온 문구……..”
“예, 기억해요.”
“그건 세크메트를 진정시키기 위한 핏빛의 술과 미약을 담아 두는 항아리들이었어요. 저 항아리들에 담은 미약을 제단 위에 붓는 것이 아마도 의식의 일부였을 것 같아요.”
“그건 어디서 보셨죠?”
“안내 책자에서요. 현관에 무더기로 쌓여 있던 것을 하나 빼서 읽어 보았죠. 그런데 승희 씨의 말을 듣고 보니 그게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단 안에 미라가 들어 있다면, 과연 미 라에게 직접 제물을 바치는 셈이죠. 그리고 이번의 그 내장도 직접….”
승희가 소리쳤다.
“가만! 내장……………. 카노프스 단지………….”
“예?”
“그런데 우리는 카노프스 단지의 조각을 보았어요. 그건 미라 와 함께 소중히 간직되어야 하는 것이죠. ‘카’가 돌아와 미라가 부활할 때를 위해서 말이죠. 혹시, 아까의 그 내장은 깨어져 없 어진 카노프스 단지 안에 들어 있던 원래 것 대신에 바쳐졌다고 생각하면 안 될까요?”
준후는 두 여자의 이야기를 다 알아듣기는 어려웠지만 마지막 말에는 몸을 떨었다. 연희도 겁먹은 표정이 되었다.
“그럼, 설마・・・・・・ 미라를 되살리는 게 블랙서클의 의도?”
승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단을 째려보았다.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는 게 타당하겠군요. 그러나 왜 아무 일 도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게 더 궁금하군요.”
셋은 아무 변화도 느낄 수 없는 제단을 살펴보았다. 세크메트 의 분노란 무엇일까? 과연 저기에 숨겨진 알 수 없는 미라의 부 활이 그 시작일까? 의식과 함께 블랙서클의 음모는 중단된 것일 까? 오히려 지금의 영적인 평온 상태가 폭풍 전야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현암과 박 신부 가가짜 커크 교수를 끌고 전시실의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