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1권 22화 – 세크메트의 분노 10 : 침투
침투
박 신부와 현암, 준후와 백호 등 일행은 널따랗게 트여 있는 개활지로 나아갔다. 대략 수백 미터 이상 평평한 초원과 논들이 연속으로 이어져 있는 곳이었다. 민간인은 이미 소개(開)되었 는지 주변에 들어서 있는 자그마한 농가들과 건물들에는 불빛 하나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백호가 언덕배기에서 뒤쪽에 있는 퇴마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곳에는 적외선 탐지기와 멀티 스타라이트 스코프를 갖춘 저격수들이 배치되어 있을 것입니다. 일반 상황이라면 저격수들 을 전방에 배치하지 않겠지만, 지금과 같은 대치 상태에서는 대 단히 위험하지요. 그리고 저격수뿐만 아니라 순찰조가 주변을 경비하고 있을 것입니다.”
박신부가 말했다.
“그러면 여기를 어떻게 통과하지요? 백호 씨라면 어떤 방법을 사용하겠습니까?”
백호가 어깨를 흠칫했다.
“글쎄요. 위장막 등을 옷에 꽂고 포복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현암이 씨익 웃었다.
“포복으로요? 수백 미터 되는 거리를? 남의 눈에 뜨이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걸어가려면 오늘 밤을 새도 모자랄 겁니다.”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긴 해도 그 방법은 안 됩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야 지요. 준후야, 무슨 방법이 없겠니? 안개 같은 것을 일으킬 수 없 겠어?”
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의 안개를 일으키게 할 수는 있지요. 그렇지만 그 정 도의 안개 가지고는 몸에서 나오는 체온은 막을 수가 없는데요.”
박신부가 말했다.
“그거라면 내가 기도력을 펴서 오라 막을 형성하면 감지되진 않을 거야. 아까 잠깐 밖에 나갔을 때, 어느 병사의 적외선 감지 기를 빌려서 그것을 시험해 봤지. 전혀 잡히지 않더군.”
현암이 잘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백호는 여전히 신중했다.
“정말 놀랍군요. 그러나 구름 덩어리 같은 것 하나가 이 개활지를 통과해 간다면 이상스럽게 보이지 않을까요?”
현암이 준후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 근처에 모조리 짙은 안개가 드리워지게 할 수는 없니?”
준후가 놀란 듯 혀를 낼름 빼물었다.
“현암 형, 내가 신인 줄 알아요? 기껏해야 요만큼밖에 안 돼요.”
하면서 준후는 손으로 원을 그려 보았다.
현암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정도 안개가 뭉쳐 지나간다면 아무리 어두워진다고 해도 가까이에 정찰병이라도 있다면 쉽게 의심하고 알아볼 거야.”
박신부가 말했다.
“그렇지만 지금 이런 상태로 무턱대고 뛰어들거나 밤새도록 포 복해서 저곳까지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가야 할 길이 먼데………….”
현암이 생각에 잠겼다. 문득 현암의 손에 쥐어져 있던 세크메 트의 눈을 통해 승희의 목소리가 전달되어 왔다.
현암군, 뭐 해?
현암은 마음속으로 답했다.
음, 승희야 뭔가 알아낸 것이 있어?
승희가 약간 실망스러운 듯이 말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까지 특별한 것은 없어. 지금 연희 씨가 열심히 조사중이어서 간신히 몇 개의 키워드는 찾아냈지만 시간이 더 필요해.
음, 그래? 할 수 없지.
말을 마치려던 현암의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승희야,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대강 감을 잡을 수 있어?
방향이나 거리 같은 것을 정확히 알 수는 없고 주변의 지형은 보이지 않아.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생명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들의 마음뿐이야. 그러면 우리가 있는 곳 주변에 누가 가까이 있는지 다가오고 있는지 알려 줄 수 있겠니?
와우, 지금 보니 굉장히 넓은 곳에 있는데? 주변에 굉장히 많은 것들이 바글거려.
아니, 그런 거 말고, 사람, 그것도 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리 쪽으로 접근하고 있는지, 그런 것의 여부를 알 수 있느냐 말이지.
승희가 한동안 힘을 쓴 듯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굉장히 힘들어. 나무 주변에 수십 명이 움직이고 있어. 그 사람들에 대해서 계속 신경을 쓰고 있으란 말이야?
현암이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하여간 할 수 있는 거니? 누가 우리 방향으로 접근하고 있다면 나에게 알려 줘. 그러면 우리가 전진하는 방향을 바꿀 수 있을 거 아냐.
승희가 물었다.
어디로 가는데?
제6기계화 여단 사령부…………
승희는 놀란 듯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현암도 승희에게 일일이 전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서둘러야 해. 힘들겠지만 꼭 도와줘.
현암의 마음속으로도 승희가 투시하고 있는 것들이 희미하게 는 보였지만, 원래 영적 능력이 좀 무딘 현암으로서는 수십 명을 동시에 투시하는 어려운 작업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다.
현암은 간략하게 백호와 박 신부 그리고 준후에게 상황 설명을 하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준후에게도 최선을 다하여 누 가다가오는지 투시를 하라고 말하고는 일행을 재촉했다.
현암의 말에 박 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박 신부는 입을 꼭 다물고 속으로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박 신부의 녹색 오라가 넓게 퍼지면서 네 사람을 감쌌다. 백호가 맨 앞, 그다음 이 박 신부, 준후, 현암 순으로 넷이 바짝 붙어서 몸을 일으켰다. 준후가 부적을 태우고 주문을 중얼거리자 검은색에 가까운 안 개들이 몰려들어 사방을 캄캄하게 만들었다.
현암이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백호 씨, 방향을 잘 살피고 똑바로 전진하셔야 합니다. 아셨 죠? 가능한 한 빨리 지나갑시다. 승희의 정신력으로도 오래 버티 는건 무리예요.”
백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백 호가 중얼거렸다.
“이거 원, 여러분과 같이 있으니 제가 배운 특공무술이나 침투 방법 같은 것과는 전혀 양상이 달라지는군요. 사실 저는 여러분을 믿고 오긴 했지만 이렇게 당당하게 빨리 걸어서 적의 진지 를 통과해야 하는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오래 떠들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백호는 긴장한 걸음으로 나 침반을 살피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쪽으로 전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박 신부는 입을 꼭 다물고 눈을 감은 채 준후가 미는 대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준후는 한 손으로 박 신부를 밀어 방향을 잡고 들고 있는 부적의 불이 다 꺼졌는지 확인하며 초조 한 걸음을 옮겼다. 불이 꺼지려 하면 준후는 불붙은 부적을 허공 에 날리고 다른 부적을 꺼내어 붙였다. 현암은 맨 뒤에서 세크메 트의 눈을 손에 쥐고 승희로부터 메시지가 오지 않나 신경을 곤 두세우며 걷고 있었다.
현암군, 왼쪽 왼쪽! 거기 대여섯 명쯤 되는 사람들이 접근해 오고 있어.
현암이 나직한 소리로 백호에게 웅얼거렸다.
“백호 씨, 왼쪽에서 사람들이 오고 있습니다. 방향을 꺾으세 요. 방향 잃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백호는 영문도 모르는 채 방향을 오른쪽으로 45도 정도 꺾었 다. 다가오는 사람들과 최대한 거리를 두고 계속 전진하려고 하 는 것이었다.
잠깐, 잠깐! 현암 군. 그쪽에 또 한 명 있어.
현암이 세크메트의 눈을 들고 걸음을 좀 더 빨리 놀려 백호의 뒤에 바싹 붙었다. 잘못하면 현암이 백호에게 지시하는 말소리 가 밖으로 새어 나갈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호 씨, 그 앞에도 사람이 있어요.”
백호가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약간 위쪽으로 가더라도 방향을 135도 틉시다.”
백호의 방향 감각은 정확했다. 일행은 일이 분 정도 위쪽으로 올라가다가 방향을 꺾었다. 한동안 그런 식으로 걸음을 옮기다 가 마침내 백호의 발이 축축한 물구덩이를 밟아 철퍼덕하는 소리를 냈다.
“개활지는 지나왔군요.”
준후가 눈을 굴리며 서서히 안개를 거두었다. 이제 막 냇가에 다다른 듯 주변에는 나무들이 많이 서 있었고, 약 이십여 미터 저편에는 시냇물 하나가 졸졸거리고 흐르고 있었다. 백호가 말 했다.
“저 시냇물만 건너고 나면 지뢰밭이 나올 겁니다. 다행히 여기 까지는 여러분의 힘으로 쉽게 건너왔지만 시냇가에도 경비병이 있을지 모릅니다. 한번 확인해 보지요. 승희 씨한테 부탁해서 확 인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백호가 말하고 있는 동안 박 신부는 기도력을 거두고 한숨을 쉬었고, 준후도 안개를 거두었다. 박 신부와 준후 모두 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꽤 많은 힘을 소모한 모양이었다.
박 신부와 준후가 숨을 돌리는 사이 갑자기 저편에서 두두두 두 하는 헬리콥터 소리가 났다. 백호가 몸을 낮추며 말했다. “헬리콥터로 경비를 하는가 봅니다. 어떻게 하지요? 아까처럼 안개를 일으킬 수 있을까요?”
현암이 아이디어를 냈다.
“지금 그러면 힘의 소모가 큽니다. 냇물 속에서 엎드리고 있으면 열감지에 걸리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요?”
좋은 묘안이었다. 박 신부와 현암 준후, 그리고 백호는 철벅거 리면서 무릎 정도밖에 오지 않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시원한 물속에 들어가 있으면 몸에 있는 열 또는 체온이 감지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넷은 살짝 고개만 내놓은 채로 바싹 냇물에 몸을 감 추고 누워 있었다. 백호가 중얼거렸다.
“헬리콥터가 더 가까이 오면 얼굴도 물속으로 집어넣어야 합 니다.”
헬리콥터 소리가 커지면서 검은 하늘 위로 몇 개의 반짝거리 는 불빛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헬리콥터 소리와 몰아치는 바 람 소리까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저공비행을 하고 있는 것이 분 명했다. 박 신부와 준후 그리고 백호는 고개를 푹 파묻었고 현암 은 얼굴을 묻으면서도 불안한 마음에 눈을 크게 떴다. 그때였다.
갑자기 번쩍하며 눈앞이 훤하게 밝아졌다. 냇가에 들어서자 헬 리콥터는 적외선 감지뿐만이 아니라 조명등을 켜서 냇가를 샅샅 이 수색하는 것이었다. 조명은 냇가의 오십 미터 정도 멀리서부 터 켜져서 순식간에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 몸을 일으 켜 뛸 수도 없고 저렇게 저공비행을 하는 헬리콥터에서는 냇물 속에 누워 있는 네 명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여 발각될 우려가 있 었다. 현암이 이를 악물었다.
“나가라, 월향!”
현암이 왼손을 쳐들자 월향검이 소리 없이 날아갔다. 잠깐 번 쩍하는 섬광이 일더니 다가오던 헬리콥터의 조명등이 팍 꺼졌 다. 누워 있는 현암 일행에 조명이 비춰지기 바로 직전의 일이었 다. 헬리콥터의 바람에 물이 마구 찰랑댔다. 헬리콥터는 요란한 굉음과 진동을 남기고 위쪽으로 사라졌고 현암이 내민 팔로 월 향검은 되돌아왔다. 현암이 벌떡 일어나 나머지 셋의 몸을 일으 켜서 다급한 소리로 숲으로 달음질치라고 했다. 위기일발의 상황이었다.
연희는 네 개의 상형문자로 이루어진 단어를 커다랗게 갈겨써 서 놓고 쳐다보는 중이었다.
“이 네 개의 단어, 이것들이 문제예요. 이것들만 알아낼 수 있다면…….”
연희는 이미 여러 권의 조사를 마친 듯, 책 뭉치를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연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서 탈진 상태에 빠져 있 는 듯했다. 승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연희 씨, 뭐 마실 거라도?”
“아뇨, 아뇨. 됐어요.”
연희가 한숨을 쉬면서 다시 책 한 권을 뒤지다가 맘에 들지 않는지 뒤로 휙 던져 버렸다.
“도대체 이 단어들이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낼 수가 없어요. 이것만 알아낸다면…………….”
“임의로 의역할 수 없을까요?”
연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대답했다.
“아주 빈번히 나오는 단어들이에요. 이 단어들은 도대체가 정식으로 쓰이는 있는 말 같지가 않아요. 오히려.”
승희가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오히려 뭐죠?”
“일종의 애너그램, 그러니까 글자 맞추기 수수께끼로 남들이 알아보기 어렵게 만들어 놓은 거 같아요. 상형문자 해독까지는 할 수 있지만 상형문자를 섞어서 수수께끼처럼 엮어 놓은 것은 저로서도 알 수 없어요.”
승희는 네 개의 상형문자 단어들을 종이가 뚫어지게 바라보았 지만 애당초 히에로글리프를 해독할 능력이 없는 승희로서는 그 글자들이 무슨 뜻인지 어떻게 얽히고설켜 있는지 감이 잡힐 리 가 없었다. 그런데 승희가 문득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연희가 걸고 있는 목걸이에서 희미하게 무언가가 느껴졌다. 연희의 구 리 십자가 안에 깃들어 있는 염체였다. 연희는 승희가 쳐다보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고개를 하늘로 치켜들고, 탄식을 했다.
“아, 이것들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이것들을 어떻게 알 아낸다지?”
갑자기 푸른색 빛줄기가 연희의 눈앞을 퍼뜩 지나가면서 파피 루스에 가 닿았다. 승희는 놀라서 다만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 고, 연희도 남자의 염체가 뛰쳐나온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 다. 염체는 파피루스의 한쪽 귀퉁이에 맺히더니 파피루스를 잡 고 확 위로 끌어 올렸다.
“어어, 그러면 안 돼!”
승희가 손을 뻗어 제지하려고 했지만 염체가 손에 잡힐리 없었다. 그렇다고 염체가 끌고 가는 파피루스를 잡아당기다가는 파피루스가 찢어질 판이었다. 염체는 너풀거리는 파피루스를 들 고 눈앞에 비치는 전등 쪽으로 끌고 올라가서 전등불에 비춰 주 었다. 연희가 탄성을 질렀다.
“앗, 저것!”
파피루스에 적혀 있는 히에로글리프는 크게 보아 큰 글자와 작은 글자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중에 연희가 적어 놓은 네 개의 단어 중에 큰 글자 하나가 끄트머리에 씌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염체가 끌어 올려 불빛에 비추자 큰 글자 사이사이 에 희미하게 다른 상형문자인 듯한 자국이 보였다.
연희가 일어나서 마치 허공에서 펄럭이는 듯한 파피루스를 잡 아들자 남자의 푸른 염체는 목걸이 안으로 들어왔다. 연희는 파 피루스를 불빛에 비추어 보면서 그냥은 눈에 보이지 않던 히에 로글리프들을 단어들 틈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러고는 어린애 처럼 깡충깡충 뛰면서 승희를 끌어안았다.
“됐어요! 바로 이거였어요. 이제 이 부분을 해독할 수 있게 됐어요!”
승희는 어떻게 돌아가는 영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아마 그 염체는 연희가 간절하게 마음속으로 해 독을 바라는 것을 느끼고 숨겨져 있던 비밀을 알아내서 풀어 준 것 같았다. 좌우간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연희는 급 하게 손을 놀려 미루어 두었던 해석의 빈 공간들을 메워서 말을 만들기 시작했고, 승희도 세크메트의 눈을 한 손에 든 채, 초조 하게 연희의 해독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저격수들이 배치된 개활지와 시냇물에서의 헬기의 추격을 간 신히 따돌린 일행은 허리춤 정도 오는 잡초와 작은 관목이 무성 한 나지막한 동산 귀퉁이에 도착했다. 백호가 일행을 정지시키더니 긴장된 표정으로 전방을 응시했다.
“뭔가가…………… 있을 것 같군요. 조심하세요. 여기는 발밑이 보 이지 않는 곳이죠. 이런 곳이 지뢰를 매설하기에 좋은 곳이에요.”
백호는 일행을 멈춰 서게 하고 조그마한 장비 하나를 손에 쥐 어 들었다. 삽처럼 생긴 모양이었는데, 백호가 헤드폰을 쓴 뒤 등에 진 배낭의 한 귀퉁이에 그것을 전선줄로 연결하고 뽑자 막 대기 정도로 길어졌다.
“휴대용 지뢰 탐지기입니다. 물론 이것으로 플라스틱 지뢰는 잡아낼 수 없지만 전자 지뢰와 금속 지뢰는 잡아낼 수 있습니다.” 일행은 백호가 조심스럽게 휴대용 지뢰 탐지기를 양쪽으로 휘 두르며 앞으로 거의 몇 센티씩 천천히 전진하는 것을 멍하니 쳐 다보았다. 백호는 상당히 긴장했던지 얼굴에는 땀방울이 흠뻑 흘러내리고 있었다. 일행이 백호의 뒤를 따라가려 하자, 백호가 다급히 소리쳤다.
“안 됩니다. 잠시 기다리세요.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알겠어요?”
백호는 그러면서 약 일 미터 정도를 더 전진하다가 딱 그 자리에 섰다.
“역시…….”
일행은 백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백호의 말 대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백호는 그때부터 조심스럽게 자신이 밟아 온 발자국들을 고스란히, 아주 주의 깊게 밟아 가면서 뒷걸음쳐서 일행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지뢰가 사방에 깔려 있어요. 전자 지뢰도 있고, 밟으면 터지 는 기계식 지뢰, 밟았다가 발을 떼면 터지는 지뢰, 인계철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지뢰 등등 셀 수도 없이 많은 지뢰가 앞에 깔려 있을 겁니다.”
“인계철선이라니 그건 뭐죠?”
“지뢰 사이에 아주 가느다란 철선으로 뇌관을 연결시킨 걸 말 하죠. 그것을 발로 건드리거나 좀 심하게 스치기만 해도, 주변의 지뢰들이 연쇄 폭발을 일으킨답니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지요.”
현암이 말했다.
“지뢰란 밟아야 터지는 것 아니던가요? 그렇다면 제가 빠른 걸음으로 공중제비를 넘으면서 여기를 지나간다면…..”
백호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2차 대전이나 6.25 시대가 아닙니다. 지뢰의 종류도 엄청나게 많고 살상 방법도 무척이나 다양해졌어요. 예를 들면 밟아서만 터지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금속 물체가 다가오면 자동적으로 폭발하게 되어 있는 것도 있지요. 위로 뛰어서 피한 다고 하셨는데 그것도 불가능합니다. 도약 지뢰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러한 지뢰들은 작동되면 공중으로 치솟아 사람의 키나 목 주변에 파편을 뿌립니다. 즉 지뢰를 밟은 사람이 발목이나 다리가 날아가는 게 아니고 목이 잘리고 머리가 박살 나게 만드는 지뢰지요.”
준후는 소름이 끼치는 듯 몸을 떨었다. 박 신부도 움찔했다. 백호의 말은 이어졌다.
“그 이외에 이 탐지 장비로도 잡히지 않는 플라스틱 지뢰들이 있습니다. 또 아주 조그마하게 붙여 놓은 크래커라고 하는 신호 용지뢰나 조명탄을 발사하는 지뢰도 있습니다. 하여간 지뢰 하 나만 터진다 하더라도 공격 헬리콥터나 저격 부대들이 즉각 들 이닥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지요.”
현암이 말했다.
“예전에 영화를 보니 큼지막한 돌을 지뢰밭에 던져서 그 돌을 징검다리 밟듯 밟고 뛰어가는 것이 있던데요. 그런 방법을 사용 하면 안 될까요?”
백호가 말했다.
“평평한 개활지라면 그 방법이 유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계철선을 거미줄처럼 쳐 놓았다면, 한 돌에서 다른 돌로 건너 뛰는 사이에도 인계철선을 건드릴 수가 있지요. 인계철선은 건 드리기만 하면 밟은 지점 한 군데만 폭발하는 게 아니라, 주변의 수십 군데가 동시에 폭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위험해요. 더군다 나 돌이 떨어진 곳에서 지뢰가 폭발해도 수색대는 들이닥칠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없단 말입니까?”
백호가 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이 초원 지대에 지뢰가 매설된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폭이 좁은 곳을 찾아봅시다. 조금이라도 짧 은 거리를 지나갈 수 있는 게 좋을 테니까요. 최악의 경우, 지뢰 를 하나씩 제거하면서 간다고 가정해도 말이지요.”
“그러죠.”
일행은 천천히 지뢰가 매설된 지역을 지나갔다. 물론 그 주위 에도 산발적으로 지뢰가 깔려 있을지 모르는 일이어서, 백호가 휴대용 지뢰 탐지기로 주변을 훑으면서 앞장섰다. 약 백 미터쯤 내려가자, 돌출된 철조망 같은 것이 보였다.
“저긴 뭐죠?”
이미 안명부를 사용하여 밤에도 밝게 사물을 볼 수 있는 현암 이 그것을 발견했다. 백호가 야간 탐시경을 눈에 대고 보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 저것은 부대 주변에 쳐 놓은 철조망 같군요. 임시로 가설 된 것이겠죠. 요즘은 철조망도 사람이 하나씩 치는 게 아니라 기 계로 돌면서 치게 되어 있죠. 철조망을 치고 난 후 그 바깥쪽에 지뢰망을 매설했을 테니까. 저 부분이 가장 돌파하기 쉬운 부분 이겠군요.”
일행은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철조망이 보이는 곳까지 나아갔 다. 철조망이 있는 곳에서 일행이 있는 곳까지는 약 사십 미터, 무슨 장애물이 있어서 저렇게 솟아 나온 모양이었다. 현암이 아 무리 공중제비를 넘는다 해도 단번에 넘어갈 수 있는 거리는 아 니었다. 다행이라면, 그쪽 부근은 경비가 그다지 삼엄하지 않다는 것뿐.
“이상하군.”
중얼거리는 박 신부를 준후가 쳐다보며 말했다.
“왜 이상하지요?”
“이 부분이 가장 지뢰 매설 구간이 짧은 부분이라면 의당 경비가 더 삼엄해야 할 텐데, 주변에 경비병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군. 왜 그럴까?”
준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호가 야간 탐시경을 끼고 주변 을 면밀히 관찰하고 나서 말했다.
“전기 철조망이군요. 희미하게나마 열이 감지되고 있어요. 아마 지뢰매설 구간이 짧다는 것을 감안해서 그 부분에 전기 철조 망까지 세워 놓은 것 같아요. 정말 준비가 철저하군.”
일단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구간을 뚫고 지나가는 것도 문제 였지만 그 앞을 가로막은 약 이 미터 높이의 전기 철조망도 큰 문제였다. 현암과 백호, 박 신부와 준후는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날아서 가지 않는 한 그 철망들을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한참 동안의 침묵이 지나서야 백호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강행 돌파를 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강행 돌파라니요? 어떤 방법을….”
“지뢰를 모두 터뜨려 버리는 겁니다.”
“그 지뢰를 모두 터뜨리면 경비병들이 벌 떼처럼 몰려올 텐데요.”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 는 없어요.”
“무슨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글쎄요.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만……. 하긴 그것도 말이 안 되는군요.”
“아니, 어떤 방법이죠?”
“저 철망이 있는 곳을 잘 보세요. 튼튼한 철근 구조로 골격이 세워져 있지요? 그 윗부분에 밧줄을 엮는다면 이곳 위치에서 아 슬아슬하나마 공중에 뜬 줄을 맬 각도가 나옵니다. 그러면 그 줄 을 타고 큰 소리 없이 그 위를 넘어갈 수는 있겠네요. 하지만 저 철조망은 전기 철망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무슨 방법이 있지요?”
“철조망만 파괴해 버리면 어떨까요?”
월향검을 꺼내드는 현암을 백호가 말렸다.
“철조망을 끊는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즉각 경비 신호가 울릴 겁니다. 철조망의 전기를 끊지 않고 스위치를 내리는 방법은 없을까요? 스위치를 내리면 어쩌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 는데.”
“무슨 말씀이죠?”
“제 생각이기는 하지만, 외곽을 경비하는 경비원들은 전기 철 망이 끊어졌거나 무언가가 걸렸는가를 감시하는 것이 주된 임무 일 겁니다. 전기 철망에 전원이 아예 차단된다면 뭔가 이유가 있 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갈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죠. 아 니, 아니지. 그렇게 된다면 누군가 저 안쪽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얘기이니, 똑같은 자리를 맴도는 셈이로군.”
백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슨 생각을 했는지 현암이 일 어나서 반대편까지의 거리를 어림잡아 재 보는 것 같았다. 그러 더니 어디 가서 난데없이 큼지막한 돌멩이를 하나 주워 왔다. 그 모습을 보고 백호가 말했다.
“현암 씨, 그걸로 뭘 하시려는 거죠?”
“잠시만요.”
현암은 어리둥절해하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커다란 돌멩이(적 어도 삼십 킬로그램 이상은 되어 보였다)를 앞에 놓고 오른손에 공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현암의 얼굴에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어른거리는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오른손에 가득 맺히기 시작했 다. 현암은 나지막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합하는 작은 기합 소리를 낸 뒤 돌멩이를 들더니 투포환을 하듯 몸과 함께 빙빙 돌리다가 던졌다. 백호가 입을 딱 벌렸다.
그 돌멩이는 상당히 무거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조약돌처럼 날 아가 철조망을 넘어서 부대의 안쪽에 떨어졌다. 안에 떨어진 돌 멩이 소리가 일행이 있는 곳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백호는 현암 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도대체 이해가 안 됐다.
현암 씨,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저래서 무슨 도움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현암이 묵묵히 돌의 낙하지점을 응시하더니, 이번에 준후를 돌아보았다. 현암의 눈빛은 심각했으나 얼굴은 표정이 없었다. 현암이 몹시 긴장했을 때의 얼굴이었다.
“준후야 네가 저런 식으로 안에 들어가서 전기 스위치를 내려 줄 수 있겠니?”
“제가요?”
준후가 눈이 동그래져서 말했다. 일단 몸이 제일 가벼운 준후 를 철조망 안으로 던진다. 그것은 현암이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었다. 박 신부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준후를 저런 식으로 집어 던진다면 다칠지도 모르네.”
백호는 그제야 현암이 말하는 뜻을 알아차렸다. 백호는 현암 의 의견에 동조했다. 준후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다른 방법 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백호가 자신의 배낭을 뒤적거렸다. 거기에는 납작하게 접힌 조끼가 하나 있었다. 조끼는 꽤 커서 준후에게 씌우자 무릎까지 내려왔다.
“준후야, 이것을 입으렴. 이것은 휴대용 구명조끼란다. 이것을 입고 위쪽의 줄을 잡아당기면 순식간에 커다랗게 부풀게 되지. 네가 날아가는 도중에 이 끈을 당겨서 구명조끼를 부풀게 하면 땅에 떨어져도 큰 상처를 입지는 않을 거야. 그러나 한 가지, 머리부터 떨어진다면…………….”
“그 정도는 문제없어요. 저도 이래봬도 몸이 꽤 날쌔다구요. 재밌겠는데요?”
박신부가 고개를 저었다.
“아, 저런…………. 다른 방법은 없는가? 너무 위험해! 아이를 그런 식으로 집어 던지다니 세상에………….”
현암은 단호했다.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만에 하나 저 전기 철망에 준후가 걸리기라도 한다면 어떻게한단 말인가?”
준후가 쾌활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을 거예요. 제가 만약에 전기 철망에 걸릴 것 같으면 뇌전이라도 한 방 쏘아서 철조망을 부수지요. 저도 죽기는 싫거든요. 아니, 아니 …………. 전 현암 형을 믿어요! 실수 안 할 거예 요. 그렇죠?”
한참을 옥신각신하다가 박 신부도 결국 동의했다. 현암도 자 칫하면 준후를 죽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섭게 긴장하고 있었다. 좌우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이 방법밖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결국은 준후를 철조망 너머로 던지기로 합의하였 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준후에게 세크메트의 눈을 쥐어 주었 다. 공력을 모은 현암이 긴장된 모습으로 준후를 쳐다보았다. 준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현암은 마음을 굳게 먹고, 있는 힘을 다해 몸을 허공에 날렸다.
땅에 떨어진 준후는 정신이 아찔했다. 다행히도 늦지 않게 구 명조끼의 끈을 당겨서 큰 충격은 막았지만 아무래도 삼사십 미 터를 날아 땅에 처박힌 지금 제정신일 리가 없었다. 정신이 아찔 한게 그대로 쓰러져 있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조금씩 손발이 움직이게 되자 온몸에 뻐근한 느낌이 왔다. 준후는 힘을 주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전기 스위치가 가까운 곳에 있을까?”
준후는 망설이며 철조망을 바라보았다. 철조망은 평면적으로 땅 위에 설치된 것이었고, 왼쪽 아니면 오른쪽 어딘가에 전원이 있을 것 같았다.
“어느쪽부터 갈까? 음・・・・・・ 왼쪽.’
준후는 자신이 떨어진 지점에 바람이 팽팽하게 들어간 구명조 끼를 벗어서 돌로 눌러 표시를 해 놓은 뒤, 몸을 숙이고 왼쪽 길을 더듬어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삼사 분 정도 전진하자, 앞 쪽에서 수런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 같은 것이 느껴졌다. 준후는 얼른 근처에 뒹굴고 있던 드럼통 뒤로 몸을 숨겼다.
“안명부가 필요해.”
준후는 안명부를 꺼내서 손에 쥐어 들었다. 눈이 밝아지자 저 멀리 불을 꺼 놓고 있는 작은 초소에 두세 명의 군인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곳에 전기 스위치가 있을까?”
준후가 주변을 자세히 관찰해 보니 초소의 뒤편에 큼지막한 트레일러 같은 것이 웅웅 하는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철망에 전기를 공급하는 발전기였다. 발전기를 정지시키 기만 하면 철망의 전기는 차단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 다. 그렇다면 저 군인들이 모르도록 소리 안 나게 할 수 있는 방 법이 필요했다.
준후는 생각을 해 보았다. 접근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지 않았 다. 날은 어두웠고 병사들은 철조망 건너편만을 주의 깊게 살펴 보고 있을 뿐 자신들의 뒤쪽, 즉 준후가 있는 쪽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준후는 도둑고양이처럼 몸을 이리저리 숨기면서 발전기 쪽으 로 접근해 갔다. 발전기가 제법 크게 웅웅거렸다. 건물의 맞은편 에 있는 발전기 뒤로 몸을 숨긴 준후는 철조망과 발전기가 연결 된 선을 찾아보았다. 그 선만 뽑아내고 나면 철망의 전기는 끊어 지더라도 발전기는 계속 웅웅거릴 테니 건물 안에 있는 병사들 이 별달리 눈치를 챈 것 같지 않았다.
준후가 손을 뻗어 발전기의 코드를 뽑으려고 하는데 힘이 모 자랐다. 분명 뺐다 끼웠다 할 수 있게 되었을 텐데, 어떻게 기계 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지 아무리 안명부로 눈을 밝힌 준후라 해도 빼는 방법을 쉽게 알아낼 수 없었다. 준후는 몇 번 힘을 쓰 다가 홧김에 있는 힘을 다해서 줄을 잡아당겼다. 전선이 빠지면 서 퍽 하는 소리가 나자 초소 안쪽에 있는 경비병들이 그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아이고! 이거 큰일 났구나.”
준후는 발전기 뒤에 숨어서 몸을 오들오들 떨면서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냥 넘어가주세요.’
그러나 초소의 문이 열리면서 두 명의 병사가 재빨리 걸어 나와 발전기 쪽으로 총을 겨누며 소리를 쳤다.
“까치!”
준후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히 발각될 것 같은 상황인데 저들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일까?
“다시 한번 말한다. 까치!”
준후는 저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암호라는 것을 알았다. 까 치라는 것은 오늘의 암호임이 틀림없었고 그에 상응하는 암호를 대지 못하면 저들은 이쪽으로 다가와 준후를 붙잡을 것이 분명 했다. 준후는 마침 들고 있던 세크메트의 눈을 통해서 승희에게 물었다.
누나. 저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서 암호를 가르쳐 줘요. 빨리요.
승희가 마침 세크메트의 눈을 손에 쥐고 있었는지 힘을 쓰는 것 같았다. 병사들은 한 발자국씩 준후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승희가 재빨리 외치는 소리가 준후의 마음에 울렸다.
오작교, 오작교야! 준후야
준후는 온몸이 떨려 왔지만 최대한 목소리를 걸걸하게 하고는 병사들에게 자기도 놀랄 만큼 큰 소리로 말했다.
“오작교! 수고들 한다.”
병사들은 암호 소리를 듣자 겨누고 있던 총을 내려놓고 물어 보았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발전기가 이상해서 살피는 중이다. 너희는 어서 전방이나 경비해 딴 데 신경 쓰지 말고!”
병사들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는 발전기 근처로 다가오기 가 귀찮았던지 수고하라는 말만 남기고 초소로 돌아갔다.
준후는 한동안 콩닥콩닥 뛰는 가슴에 손을 얹고 안정시킨 다 음, 날쌔게 몸을 날려서 구명조끼를 벗어 표시해 놓았던 곳으로 달려갔다. 이제 현암과 백호, 그리고 박 신부에게 신호해서 밧줄 을 걸치고 넘어오게 하는 일만 남았다.
준후가 신호를 보내자 현암이 던진 밧줄이 휙 하니 날아들어 왔다. 준후는 밧줄을 잡아 재빨리 마침 부근에 있던 말뚝에다 단 단히 묶은 뒤 서너 번 잡아당겼다. 밧줄이 팽팽해지면서 현암, 백 호그리고 박 신부가 건너오는 느낌이 밧줄을 통해 느껴졌다. 준 후는 비로소 옆에 동지가 생긴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희가 갑자기 신음 소리를 냈다. 승희는 세크메트의 눈을 한 손에 들고 투시에만 전념하다가 놀라 연희 쪽을 쳐다보았다. 연 희는 지금 막 파피루스의 한 구절을 해독하고 난 다음이었다.
“연희 씨, 왜 그래요? 뭔가 알아낸 사실이 있나요?”
연희는 하얗게 질려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승희는 연희 가 채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파피루스 번역문을 집어 들었 다. 거기에는 여태까지 해석하지 못하고 있던 부분들의 이야기 가 급히 흘려 쓴 필체로 쭉 나와 있었다. 그 내용을 읽으면서 승 희는 간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크메트의 네 사도는 사토니 우쟈 티가 여사제로 입문하기전에 인척 관계에 있었던 사람들이었구나. 그래서 사토니 우쟈 티를 영원토록 수호하겠다는 맹세까지 한 것이로군.”
승희는 그 외의 부분들도 대략 읽어 보았다. 그러나 세크메트 의 대주술에 관한 내용은 그 막강한 위력이나 그 힘으로 이룬 일 들에 대해서는 나와 있되, 주술을 푸는 방법이나 주술을 거는 방 법, 운용하는 방법 등은 하나도 나와 있지 않았다. 그런데 연희 가 막 쓴 구절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는 것을 보고 승희도 몸이 부르르 떨렸다.
힘으로 일어난 자 그 힘으로 망하게 되고, 덧없는 힘을 키운 자 는 그 힘이 스스로에게 죄어들어 오리라. 오감은 믿을 것이 못 되 며, 진리만이 믿을 수 있는 것. 행한 자가 스스로 거두지 않거나 멀리 떨어진 것도 능히 알 수 있는 진실의 눈으로 보지 않는다면, 세크메트의 대주술을 결코 깨지 못하리라.
“결코 깨지 못한다고요? 연희 씨? 이… 이게…… 사실?”
간간이 서 있는 장비들과 그 사이사이로 가끔씩 바쁘게 뛰어 다니는 병사들의 눈을 피하여 일행은 조금씩 부대의 중앙부로 향하고 있었다. 백호가 작은 소리로 일러 준 바에 의하면 제6기계화 여단의 사령부는 전자전 부대와 가장 인접해 있을 것이라 고 했다. 따라서 전자전 부대는 커다란 야외 안테나를 세우게 마 련이었고, 가장 큰 야외 안테나가 설치되어 있는 곳이 사령부라 는 말이었다. 사령실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건물이 아니라 하 나의 커다란 차량이었다. 컨테이너 몇 개를 붙여 놓은 듯한 큰 차량에는 여러 가지 외부 공격에 대한 방호 설비가 되어 있었으 며, 계속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가장 훌륭한 사령부가 될 수 있 다는 것이 백호의 말이었다.
준후가 세크메트의 눈을 들고서 걸음을 옮기다가 몸을 흠칫했 다. 준후가 움직이다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는 바람에 하마터면 경계를 서던 병사에게 들킬 뻔하였으나, 현암이 재빨리 준후의 옷자락을 잡고 어둠 속으로 끌어들여 병사들의 눈에는 띄지 않 았다. 병사가 지나간 뒤 현암이 준후를 보고 나무라듯 말했다. “준후야, 왜 그래?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잖아. 정신 차려야지.” 준후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조금씩 떨었다.
“현암 형, 그게 아니라 이건………….”
“왜?”
“세크메트의 대주술은 깰 수 없대요. 행한 자가 스스로 거두지 않거나, 진실의 눈으로 보지 않는다면……”
“틀림없니? 그렇게 파피루스에 씌어 있는 거야?”
“…….”
말끝을 흐리는 준후의 대답에 모두가 흠칫했다. 세크메트의 환영술을 깰 수 없다면 이들이 목숨을 걸고 부대 내부까지 들어 온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 안에서 언제 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고, 당장 철수할 수도 없었 다. 백호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입니까? 여러분의 힘으로도 안 되는 일이 있단 말입니까?”
준후가 말했다.
“글쎄요. 저로서는 뭐라고 말할 수가…………. 아! 생각이……………생각이…….”
현암이 나지막하고 빠르게 말했다.
“준후야, 침착해. 침착하라구.”
박 신부가 입술을 깨물고 사방을 둘러보며 뭔가 결심이 선 듯 말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것, 시도는 해 봐야 할 것 같아.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해 보도록 하세. 상대의 주술도 어쩔 수 없는 환영에 불과 한 것이야. 우리가 전력을 다하면 주술이 아무리 파괴하기 어려 운 것이라 하더라도 깨어 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네.”
현암도 고개를 끄덕였다. 백호는 그래도 불안한 표정이었으나 여기까지 와서 더 이상 전진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될 수 있었다.
일행은 걸음을 빨리 옮겨서 사령부 근처까지는 도달할 수 있 었으나 더 이상은 접근하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그 주위는 휴대 용 철조망과 바리케이드로 철저하게 감시되고 있었고, 정작 사 령부 역할을 하고 있는 거대한 컨테이너 입구가 육중한 철문으 로 굳게 닫혀져 있었다. 그 주변도 여러 명의 병사들이 똑바른 자세로 경비를 하고 있었다. 기강이 엄한지 보초들이 한눈을 판 다거나 딴짓을 하는 일은 없었다.
“큰일이군. 어떻게 뚫고 들어가지?”
박신부가 중얼거렸다. 백호는 뭔가 생각난 듯 머리를 탁 치더니 배낭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것은 신경가스 수류탄입니다. 이것을 터뜨리면 어떨까요?”
그러나 현암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을 이런 데서 터뜨리면 적이 침투한 것으로 생각하여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끔 안으로 들어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하는데………….”
박신부가 한참 동안 뭔가를 생각하더니 조그마한 소리를 내 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렇지! 성동격서! 그래, 내가 옛날에 군대에 있을 때의 경험 을 한번 되살려 보지. 다른 쪽에 신경이 쏠리게 하면 가능할 것같아. 신경을 쓰게 만드는 상대가 적이라고 절대 보이지 않게 말이지.”
“그건 무슨 뜻입니까?”
“백호 씨, 지나오면서 그 봉황이라는 지대지 미사일이 가설되어 있고 병사들이 거기에서 이십사 시간 대기하듯이 앉아 있는 모습 보지 못했소?”
박 신부의 말을 듣고 보니 모두가 그 광경을 언뜻 본 기억이 났다. 박 신부가 신중하게 말했다.
“그건 전부 서울 쪽으로 향하게끔 고정되어 있었소. 만약의 사태에 미사일이 발사된다면 큰일이오. 설마 그럴 리는 없을 것이 라 믿습니다만……………. 하지만 그것 역시 장담할 수 있는 것도 아 니죠. 지금 장인석 소장은 제정신이 아니니 언제 발사 명령을 내릴 지도 모르오.”
얘기 도중에 백호의 얼굴이 아연한 듯 희게 질리는 것이 어둠 속에서도 느껴졌다. 서울을 향한 미사일 공격이라는 것은 평소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태가 달랐 다. 환영에 씐 장인석 소장은 아예 서울이 적에 의해 점령되었다 고 간주하고 미사일 발사를 명령할지도 몰랐다. 백호가 약간 더듬 거리면서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요?”
“절대 적의 내습이 아니라는 것, 즉 미사일을 발사시키거나 진 군을 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주지시킬 수 있게끔 저들의 주의를 끌 수 있어야 하오.”
백호가 물었다.
“그게 뭐지요?”
박신부가 말했다.
“준후야, 네가 힘을 좀 써 줘야겠다.”
준후가 되물었다.
“예.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신부님, 어떤 일이죠?”
“네가 부리는 리매들 말이다. 그들이 혹시 총을 맞아도 죽지 않니?”
준후는 박 신부의 의도를 깨달았다. 리매들이라면 당연히 병 사들에게는 괴물로 보일 것이다. 그런 괴물이 활개치고 돌아다 닌다면 당연히 정신이 빠져 버릴 것이다. 그런 괴물이 설쳐 댄다 고 해서 적군이 침투했다는 보고는 할 수도 없을 것이고, 한다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사이에 사령부 차량 내 로 잠입하자는 이야기였다.
“글쎄요. 죽지는 않겠지만 상처를 입을 텐데…………. 좀 불쌍하네요.”
현암이 옆에서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일단 사람이 살고 봐야 할 것 아니냐. 리매들이 야 네가 또 술수로 고쳐 주면 될 거 아니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준후가 결심이 선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려다가 박 신부를 힐끗 쳐다보았다.
“어느 쪽에서 리매가 나타나야 저 경비병들의 시선을 쏠리게 할 수 있을까요?”
박신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사령부 근처에 거대하게 굉음을 내며 가동되고 있는 기계가 있었다.
승희는 자신도 모르게 성질을 부리며 책이며 종잇조각들을 마 구 집어 던지고 있었다.
“세상에, 세상에~ 신고 있는 능력을 못 믿는 게 아니었지만, 엄청난 화력을 보유하고 있는 군부대 내로 들어가서 멀쩡하게 살아 나올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단 하나, 가능성이 있다면 장 인석 소장의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것뿐인데, 파피루스의 기록 에 의하면 행한 자가 스스로 거두지 않는다면 깰 수 없다고 되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제는 어디로 숨었는지 자취조차 보이지부님과 현암, 준후가 죽을지도 모르는 그 부대 안으로 뛰어들었다는데, 우린・・・・・・ 우리는 도와줄 수 있는 길이 없다니.”
승희가 홧김에 파피루스를 잡아 찢으려는 것을 연희가 뜯어 말렸다.
“아니에요. 진정하세요. 이런 때일수록 침착해야 합니다. 자, 진정・・・・・・ 진정…….”
물론 승희는 그들이 갖고 있는 능력을 못 믿는 게 아니었지만, 엄청난 화력을 보유하고 있는 군부대 내로 들어가서 멀쩡하게 살아 나올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단 하나, 가능성이 있다면 장 인석 소장의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것뿐인데, 파피루스의 기록 에 의하면 행한 자가 스스로 거두지 않는다면 깰 수 없다고 되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제는 어디로 숨었는지 자취조차 보이지 않는 세크메트의 사도들이 주술을 거둔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승희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진실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주술을 깰 수 없다고 했죠? 그건 장인석 소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요?”
연희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상황이 급작스 러워지자 오히려 연희는 차분해졌고 정신이 맑아지는 듯 눈빛이 짙어졌다.
“자, 잘 생각해 봅시다. 우선 제가 번역한 부분은 의역이 많으 니 그중에서 뭔가 단서가 될 수 있을 만한 내용이 있나. 중요한 내용은 다시 해석해 보도록 하겠어요.”
승희가 소리를 빽 질렀다.
“지금 저 따위 문서나 해석하고 있는 게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어요?”
연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이 분명 있을 거예요. 현재까지 우리 가 이 문서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이러한 문서를 애당초 추종자들이 그렇게까지 엄중하게 보관을 해서 그 관 속에 주의 깊게 넣어 놓았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요. 거 기다가 눈에 보이지 않는 비밀 문자까지 넣어 해독을 어렵게 한 것을 보면, 분명 이 문서에는 비밀이 있어요. 이 이외의 문서들 은 모조리 블랙서클의 손에 넘어갔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이것 하나뿐이에요. 이것만이 유일한 희망이니만큼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말아야죠.”
승희는 차분하고 조리 있는 연희의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승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하 여 세크메트의 눈을 손에 쥔 채 눈을 감고 네 명이 잠입해 있는 군부대 주위로 투시를 시작했다. 그러나 부근에 사람이 많아서 인지 승희의 능력으로도 도저히 위치나 기타 여러 가지 것들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단지 마음으로 대화하는 것밖에는 그들에 게 도움을 줄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승희는 또다시 발을 동동 굴렀고, 가슴이 미어지는지 마른침을 꼴딱꼴 딱 삼키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울고 있었다.
“괴물이다!”
삽시간에 사령부 주위의 경비병들은 공포에 휩싸이며 혼란에 빠져들었다. 정체를 알 수 없고, 사람의 키를 훨씬 넘는 거대한 두 개의 희끄무레한 형체가 주변에 가설된 철조망을 닥치는 대 로 쥐어뜯으며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혼돈 상태에 빠져 우왕좌왕하면서 리매들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으나, 리 매들은 그런 물리적인 총탄 같은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듯 오히 려 총을 쏘는 병사들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들었다.
위장을 하고 장비의 어두운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일행은 그런 리매들과 준후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준후는 리매들을 조종하느라 힘들어 보였다. 리매들은 무척 흥분했는지 발 전기쪽으로 가라는 준후의 말을 듣지 않고 자꾸 경비병들 쪽으 로 다가갔다. 준후가 땀을 흘리면서 중얼거렸다.
“큰일 났네요. 리매들이 흥분해서 말을 잘 듣지 않아요. 빨리 경비병들을 유인해야 하는데.”
현암이 상황을 판단한 후 준후에게 말했다.
“그러면 미안하긴 하지만 경비병들을 유인하지 말고 때려눕히 라고 해.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다.”
박신부가 멍한 듯 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준후도 대단히 미 안한 듯 싱거운 웃음을 지으면서 리매들을 향해 중얼중얼 주문 을 외웠다.
“으아악!”
“아이쿠!”
잠시 동안 우지끈거리는 소리와 총소리가 뒤섞여 나더니 이 내 잠잠해졌다. 잠시 후 리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오자 일행은 얼른 어둠에서 빠져나와 사령부가 위치해 있는 컨테 이너 차량으로 걸음을 옮겼다. 막강한 힘을 가진 리매 두 마리는 순식간에 병사들을 두들겨 팼다. 주변에는 다섯 명의 병사가 질 펀하게 뻗어 있는 웃지 못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준후가 당황 한 듯 소리쳤다.
“리매들이 흥분해서 더 이상 옆에 두고 있을 수가 없어요. 잘못하면 난동을 피울 것 같아요.”
박신부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러면 이제 되었으니 도로 돌려보내렴.”
현암이 먼저 뛰어나가 사령부 역할을 하고 있는 거대한 컨테 이너 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문은 잠겨 있었다. 백호 는 주변을 경계하면서 걸음을 옮겼으나 비명 소리를 들은 듯 수 런거리는 움직임이 들려왔다. 백호가 준후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저 경비병들을 잠시만이라도 제지해야 돼. 리매들을 저쪽으 로 보내렴.”
준후는 위급한 상황을 깨닫고 리매들을 즉시 병사들 쪽으로 돌진시켰다. 그러면서도 마음씨 착한 꼬마는 마음속으로 한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너무 세게 때리면 안 돼. 사람들을 세게 때리면 절대 안 된다.’
현암은 철문이 잠겨 있자 월향검을 빼들고 손에 검기를 집중하고 있었다. 우웅 하는 소리가 나면서 검기가 쭉 뻗어 나오자, 현암 은 월향으로 가차 없이 문을 그어 버렸다. 그러자 철로 된 문은 두부처럼 간단하게 잘렸고 현암이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덜컹 하 는 소리를 내고 열렸다. 그러나 그 안에는 또 하나의 철문이 있 었다. 아마 두꺼운 이중문으로 차폐되어 있어서 외부에서 나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안쪽은 아주 조용했다.
“아니, 이런! 첩첩이도 막아 놨군.”
현암은 다시 검기를 쏟으며 철문으로 다가들었으나 이번에는 이상한 힘 같은 것이 문에 깃들어 있었던 듯, 검기가 가까이 오 자파팍 하는 환한 불꽃을 일으켰다. 베려면 베지 못할 것은 없 었지만, 불꽃이 너무 환하게 일어나서 간신히 숨어 있는 일행의 위치가 노출될 염려가 있었다. 현암이 어떻게 할까 잠시 생각하 는 동안 박 신부가 나섰다.
“이 문에는 주술이 걸려 있는 것이 틀림없네. 내가 주술을 풀지.”
박 신부는 외치면서 문에 성수를 뿌리자 성수가 떨어진 곳마 다 퍽퍽 소리가 나면서 흰 연기가 문에서 피어올랐다.
“됐네.”
박신부가 말하자 현암은 검기를 세운 월향검으로 문의 자물 쇠가 걸린 부분을 쳤다. 철문이 쩍 하고 갈라지자 현암은 문을 발로 차는 동시에 몸을 두어 바퀴 안으로 구르듯이 들어갔다. 박 신부가 그 뒤를 따랐고, 준후도 곧바로 안으로 들어섰다. 최후로 백호가 만약에 사태에 대비하여 경기관단총을 꺼내 든 채 문을 닫으며 컨테이너 차량 안으로 들어섰다.
“당신들이 인민군의 특사인가?”
난데없이 터져 나오는 고함 소리에 몸을 굴려 들어갔던 현암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곱슬머리에 체격이 좋은 오십 대의 남자가 일행을 째려보고 있었다. 그 뒤에는 세 명의 영관급 장교가 서 있었다. 백호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장인석 소장님 맞으시죠? 저는 특수지검 특수수사반을 맡고 있는 백호라고 합니다. 즉각 이 무모한 진격 행위를 중단시키고 병사들에게 본래의 위치에 복귀하라고 명령하십시오.”
장인석 소장은 어이가 없는 듯한 표정으로 반문하였다.
“뭐라고? 다짜고짜 우리에게 무조건 항복하라는 말을 하다니 당신이 제정신이야?”
백호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놀랍기는 박 신부나 현암, 준후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가 백호의 말에 대한 장 소장의 말은 그야말로 동문서답이었다. 현암이 소리쳤다.
“장인석 소장! 서울로의 진군을 즉각 중지시키시오.”
장인석 소장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 태도는 당당했고 전혀 어색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인민군 사령관 자리를 준다고 해도 내가 거기로 갈 사람인가 귀관도 군인인데,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장 소장의 말에 백호와 박 신부 그리고 현암과 준후 모두가 얼 떨떨했다. 이건 동문서답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박 신부가 들 고 있던 세크메트의 눈으로 승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부님, 지금 그곳 사령부까지 들어가는 데 성공하셨군요.
응. 그런데 이건 도대체………….
승희의 이야기가 빠르게 울려왔다.
장인석 소장은 지금 환영 상태에 빠져 있어요. 마음속을 집중해 보니 장인석 소장은 신부님을 인민군 부대에서 온 특사로 알고 있어요. 지금 서울이 북한의 공격에 의해 점령된 것으로 믿고 있고, 현재 대치중인 부 대도 북한의 특수 부대로 생각하고 있어요. 신부님이나 백호 씨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장인석 소장에게는 회유나 항복을 권유하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아요.
백호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준후가 결판을 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준후는 기합을 넣으면서 부적을 한 움큼 꺼내 들었다. 그것을 보고 뒤쪽에 있던 참모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소장님, 조심하십시오. 무기를 꺼내다니! 저자는 소장님을 암살하려는 모양입니다.”
준후가 꺼낸 부적 뭉치가 그들의 눈에는 권총으로 보이는 모 양이었다. 참모 하나가 준후에게로 달려드는 것을 현암이 잽싸 게 걷어차자, 참모는 벽에 등을 찧으면서 넘어져 버렸다. 나머지 두 명의 참모가 권총을 빼 들려는 자세를 취했다. 백호가 몸을 날려 한 사람을 끌어안고 넘어졌고, 현암은 나머지 한 사람의 멱 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화가 난 현암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신 차려! 정신을 차리란 말이야.”
정말 우습지도 않게 멱살을 잡힌 참모의 입에서는 신음 소리와 함께 얼토당토않은 말이 흘러나왔다.
“고문하려면 해 봐라! 작전 기밀 누설 못해!”
도대체가 말이 통하지를 않았다. 준후는 재빨리 부적을 여러 장 꺼내서 허공에 날렸다. 부적들은 허공에서 불이 붙은 채 장인 석 소장의 몸을 향해 날아갔으나 장 소장은 그때까지도 눈을 똑 바로 뜬 채 의연하게 서 있었다.
장 소장은 의연한 군인이었고 인격도 훌륭해 보였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는 전혀 맞지 않았다. 양측은 우스꽝스러운 아이들 의 연극을 하는 것과 흡사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다. 준후가 던 진부적들은 장인석 소장의 몸에 부딪혔으나 아무런 효과도 없 이 도로 튀어나왔다. 박 신부는 만약의 사태가 일어날 것에 대비 해서 십자가를 들고 기도력을 끌어 올렸다. 박 신부의 손에 든 세크메트의 눈을 통하여 승희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신부님, 세크메트 사도의 영들은 그들의 의식 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 어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그들을 꺼낼 수 없을 것 같아요. 너무나 깊숙이 들어가 있어서 흔적조차 거의 느껴지지 않는…… 맞아요, 아마도 그들의 뇌리에 들어 있을 것 같네요.
박 신부는 현암에게 맞고 넘어진 뒤 몸을 일으키려는 참모에 게 급한 걸음으로 다가갔다. 그 참모가 몸을 일으키며 권총을 꺼내려 했기 때문이었다. 박 신부는 십자가를 든 한쪽 손으로 권총 을 꺼내려는 참모의 손목을 꽉 잡았고, 오라를 집중하여 그 사람 의 몸에서 세크메트의 사도들의 영을 몰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 참모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오히려 박 신부에게 고래고래 욕을 해대고 있었다.
“특사를 가장하고 들어와서 사령관님을 암살하려고 하다 니………….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이런 사령관님! 어서 피하세요.”
장인석 소장은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더니 조그마한 전자시계 같은 것을 꺼내어 가슴에 찰칵 소리가 나게 갖다 댔다. 째깍째깍 소리를 내면서 불이 점멸하는 것이 보였다. 장인석 소장이 외치 는 소리를 듣고 막 참모들과 씨름을 하고 있던 백호와 현암, 박 신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희는 나를 암살하려고 했지? 내가 죽더라도 제6기계화 여 단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를 몰아내고 서울을 탈환 할 때까지는 지금 내가 죽으면 너희가 점령하고 있는 서울에 우리의 미사일이 날아갈 것이다. 너희가 나를 죽이면 미사일이 날 아가는 시간만 앞당기는 셈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오 분 후면 자 동으로 미사일은 날아가게 된다. 너희 마음대로 해라. 서울이 파 괴되는 것은 유감이지만, 너희 손에 넘겨주느니 이러는 편이 낫다. 미사일을 멈추어 보겠다고? 하하하. 비밀번호는 나만이 알고 있다.”
백호가 참모 한 명을 급하게 쓰러뜨리며 소리쳤다.
“봉황, 봉황 미사일입니다. 저것이 발사된다면 정말 큰일이에요.”
백호나 박 신부, 현암과 준후, 더 나아가서는 군부의 어느 누 구도장인석 소장이 저토록 무모함에 빠져 있을 줄을 몰랐을 것 이다. 장인석 소장은 서울이 이미 북한에 의해 완전히 점령된 것 으로 가정하고 제6기계화 여단이 보유한 최고의 무기인 봉황 지 대지 미사일을 서울을 향해 발사하려 하고 있었다. 군사령부에 서도 어떤 목적이나 협상 없이 장인석 소장이 서울로 진군할 것 이라고는 믿지 않았고, 또 이렇게 미사일이 발사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미사일이 발사되면 시민들이 대피 할 여유도 없이 서울의 요소요소를 파괴할 것이고, 수많은 희생 자가 나올 것임은 자명했다.
참모 중 한 사람이 경비 벨을 눌렀는지 문틈으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까 현암이 월향검의 검기를 이용 하여 손잡이를 잘라 버렸기 때문에 문을 잠글 수도 없었다. 바깥 에서 들어오려고 하는 인기척이 들리자 백호가 재빨리 뛰어나가 문을 막았다. 그러고는 온 힘을 다해서 문을 밀면서 소리쳤다. “얼른 무슨 방법을 좀 생각해 봐요.”
현암이 최후의 방법을 쓸 준비를 했다. 이미 많은 공력을 소모 했지만 공력을 모으자 현암의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현암은 승희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
‘네 힘을 빌리자. 어쩔 수가 없어.’
현암은 장인석 소장과 참모진들이 환영에 휩싸여 있다는 생 각을 해냈다. 거기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부동심 결. 현암이 승희에게서 힘을 끌어 모아 공력을 방출하는 순간 현 암의 몸에서 눈을 뜰 수 없게 하는 현란한 광채가 나와 컨테이너 차량 안을 가득 채우고 작게 나 있는 창틈새로까지 찬란하게 뻗어 나갔다.
연희는 자신이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 피루스의 문구를 보면 세크메트의 대주술을 깨뜨릴 수 있는 방 법은 오로지 스스로 행한 자가 방법을 거두는 것과, 멀리에 떨어 져도 볼 수 있는 진실의 눈을 가지는 것이라고 했다.
“스스로 행한 자, 진실의 눈・・・・・・ 무슨 뜻일까?”
스스로 행한 자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주술을 건 사람이라고밖에 해석이 되지 않았다. 비밀 문자가 더 발견되지 않나 하고 파피루스를 비추어 보고, 뒤집어 보고 여러 가지 방법 을 써 보았지만 나올 수 있는 해석은 그것 한 가지였다. 그렇다 면 멀리 떨어져서도 볼 수 있는 진실의 눈은 무엇을 말하는가? 연희가 곰곰이 생각을 하고 있는데 승희가 몸을 움찔하더니 희 미하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헝겊 인형처럼 테이블 위에 푹 꼬꾸라졌다.
“나아쁜………….. 현암 군.”
현암이 승희의 힘을 강하게 끌어다 썼기 때문에 탈진하여 쓰 러진 사실을 연희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승희가 과로로 인해 쓰러졌나 보다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승희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면서 들고 있던 세크메트의 눈이 데구르르 굴렀다.
“저것을 쥐고 있으면 다른 한쪽을 쥐고 있는 사람과 의사소통 이 된다지?”
연희는 세크메트의 눈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긴박하게 돌아 가고 있는 사령부실 컨테이너 내부의 상황이 벼락처럼 연희의 마음속에 나타나는 바람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령부실 내부를 가득 채운 금빛 광채가 언제 나타났었냐는 듯이 홀연히 사라지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현암의 모습이 보였다. 백호는 여전히 옆에 있던 굵다란 쇠막대기를 문 사이에 찔러 넣은 채 그 앞을 막고 버티고 있었으나, 바깥에서 경비병들 이 밀어내는 압력이 심해져서 버티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준후와 박 신부는 현암의 부동심결로 인해 장인석 소장의 환영 이 깨졌는가를 초조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장인석 소장이 눈이 부신 듯 눈을 몇 번 껌뻑껌뻑하더니 현암의 앞으로 다가왔다. 박 신부와 준후는 긴장했다. 장인석 소장이 정신이 든 것일까? 그러 나 그 순간 장인석 소장은 아까 참모 한 사람이 떨어뜨린 권총을 집어 들고 현암의 머리를 향해 겨누며 소리쳤다.
“같이 지옥으로 가자! 나는 대한민국의 국군 소장이다. 한명 이라도 더 데리고 가겠다!”
위기의 순간이었다.
순간 준후가 인드라의 뇌전을 장 소장이 들고 있는 권총을 향 해발하자, 권총에는 파팍 하는 불꽃이 튀었고 장 소장은 준후가 쏜 뇌전의 충격으로 권총을 놓치면서 손목을 감싸 쥐고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참모들이 준후에게 다가섰다.
“네놈 정말 대담하구나. 자살 특공대냐? 아니면 암살자냐?”
나이 어린 준후를 보고 저런 소리를 하는 걸 보면 아직도 참모 들의 환영 상태가 풀리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현암이 쓸 수 있 는 최고의 술수인 부동심결. 그 부동심결을 발해도 깰 수 없는 환영이 있다니. 지금 생각해 보니 그들의 환영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박혀 있는 환영인 듯했다. 백호가 뒤에서 소리 쳤다.
“신부님, 준후야, 현암 군. 정말 미안하오. 하지만 이게 최후의 방법인 것 같아요. 우리 모두 저승에서 만납시다.”
백호는 조그마한 라디오 같은 것을 하나를 들었다. 백호의 말투로 보아 자폭용 폭탄 같았다. 박신부가 외쳤다.
“그런 짓은 안 돼. 백호 씨!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봐!”
박신부가 소리치는 순간 권총을 떨어뜨린 참모들이 준후에게 덮쳐들었다. 사람에게는 주술을 쓰지 않는 준후를 구하기 위해 박 신부는 순간적으로 기도력을 모아서 커다란 오라 구체를 만 들었다.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넓게 퍼져 나간 오라 막은 방을 가득 채우며 참모들과 장 소장을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박 신부 는 내친김에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하여 그들을 벽에 납작하게 짓 눌러 놓았다. 준후가 그 틈바구니 속에서 백호의 손에 들려 있는 폭탄을 보고 뭔가 생각해 낸 듯 소리쳤다.
“잠깐만요, 백호 아저씨. 승희 누나에게 연락하면 자동 발사 장치의 비밀번호를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좋은 생각이었다. 백호도 승희의 투시력은 익히 알고 있었기 에 폭탄을 던져 버리고 문을 막는 데에만 최선을 다했다. 지금 세크메트의 눈은 박 신부가 쥐고 있었는데 온 몸에 힘을 모아 기 도력을 발하느라고 세크메트의 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준후가 장인석 소장에게로 다가가 가슴에서 깜빡거리고 있는 자동발사 장치에 손을 뻗었다. 남은 시간은 이 분 일초. 준후가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신부님, 어서요!”
사령부 내의 숨 막히는 상황을 알게 된 연희는 놀란 나머지 온 몸이 떨리고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당장 승희의 도움이 필 요한 판이었는데, 정작 승희는 쓰러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크메트의 눈을 쥐고 있는 자신은 아무런 도움 도 되지 못했다.
“아, 이렇게 끝나고야 만단 말인가.”
연희는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차량 안에 서는 박 신부와 백호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병사들을 제지하고 있었으나 그 힘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준후는 발 을 동동 구르며 장인석 소장의 가슴에 있는 자동 발사 장치에 손 을 얹고 승희가 비밀번호를 말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박신 부는 승희가 쓰러졌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계속 승희를 불러 대 고 있었다.
“먼 곳의 일이 이렇게 환하게 보일 수도 있다니. 이 세크메트 의 눈은 정말 유용하구나. 이런 것을 가지고도 도움을 주지 못하 는 나는 도대체… 앗! 가만…….”
연희의 머리에 뭔가 퍼뜩 스쳐 지나갔다. 세크메트의 눈, 세크 메트의 눈을 가지고 있으면 먼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도 마치 옆에서 보는 것처럼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맞아! 그렇다면 파피루스에 씌어 있던 ‘진실의 눈’이라는게 어쩌면…….”
연희의 머릿속으로 갑자기 많은 생각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사토니 우쟈 티가 파라오의 군대에 의해 공격을 받을 때 세크 메트의 네 사도는 세크메트의 황금 상이 부서지는데도 유독 세 크메트의 눈만을 뽑아서 사토니 우쟈 티에게 전해 주었다. 또 사 토니 우쟈 티는 세크메트의 눈이 파라오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 록 자신의 심장 속에 넣으면서까지 그것을 지키려고 했다. 그리 고 세크메트의 눈이 가지고 있는 힘이 파라오에게 들어가지 않 도록 영원히 그것을 감추어 달라는 말까지 남기고는, 용암으로 만든 제단 모양의 관 속에 몸을 숨겼다. 혹시 파피루스에서 말하 는 ‘진실의 눈’이라는 것은 바로 세크메트의 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상형문자로 쓰인 진실은 세크메트와 거의 같은 글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순간, 연희의 눈이 커졌다. 현재 퇴마사 일행이 전혀 깨뜨리지 못한 세크메트의 대주술을 풀 수 있는 열쇠는 바로 가까이, 세크메트의 눈에 있다고 생각했다. 연 희는 세크메트의 눈을 손에 쥔 채 자기가 추론한 사실을 빠른 생각으로 박 신부에게 전했다.
박신부는 연희의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번이 마지 막이나 다름없었다.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기도력을 발하고 있 는 상태에서는 자신이 들고 있는 세크메트의 눈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또, 실제로 어떻게 세크메트의 눈을 이용하여야 주술을 깰 수 있는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어차피 마지막 시도나 한번 해 보자.’
박 신부는 자신의 몸을 움직이기 위해 기도력을 풀었다. 벽에 눌려 버티고 있던 장인석 소장과 참모들이 제 힘에 쏠려 우르르 넘어졌다. 박 신부는 손에 들고 있던 세크메트의 눈을 장인석 소 장에 손에 쥐어 주었고 세 명의 참모들은 넘어졌다가 재빨리 일 어나 박 신부와 준후의 목덜미를 조였다.
“윽!”
문 쪽에서 백호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바깥의 경비병들이 백 호가 잡고 있던 문을 밀고 들어온 것이다. 백호가 와당탕 굴러 넘어지면서 총을 든 경비병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와 박 신부 와 준후 그리고 백호의 머리에 대고 총을 겨누었다. 경비병들은 구석에 쓰러져 있던 현암은 채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그때 장인석 소장의 우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들인가? 이 사람들은 누구야?”
장인석 소장은 당황한 듯 외치고 있었다. 준후가 언뜻 보니 제 정신으로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준후가 소리쳤다.
“소장님! 소장님 가슴에 달린 발사 장치.”
“지금 무슨 소릴 하는거야?”
장인석 소장은 마치 자신의 가슴에 발사 장치가 달려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처럼 황당하다는 듯이 준후를 쳐다보았다. 참모 중 하나가 재빨리 준후의 입을 틀어막았으나 이번엔 박 신부가 고함을 쳤다.
“장소장님! 미사일 발사를 어서 중단시키시오!”
순간, 참모 한 사람이 뭐라고 소리를 질러서 박 신부의 말소리 를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었다. 장 소장의 가슴에 달린 발사 장치 는 이제 십 초 정도의 시간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무슨 미사일이 어떻다는 말들인가? 민간인들이… 어? 아 니, 이걸 누가!”
장 소장이 말하다 말고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에 달려 있는 미사일 발사 장치를 보고 기겁을 했다.
장인석 소장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러나 재빠르게 자동발사 장치의 비밀번호를 조작했다. 발사 장치는 발사 이 초 전에 정지 했다. 박 신부와 준후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이 초만 늦어 미사일이 발사되었다면…………. 장인석 소장은 흥분한 듯 미 사일 발사 장치를 가슴에서 와락 떼어 책상 위에 놓고는 참모들 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지금 이게 뭐야? 이 민간인들은? 언제 여기에 들어온 건가? 그리고 너희는 여기가 어디라고 총을 뽑아?”
장인석 소장의 호통에 병사들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박 신부와 백호, 준후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의 빛이 나돌았다. 세크메트의 눈을 단지 들고만 있어도 환영술은 깨어지는 것. 그것이 세크메트의 진실이었던 게 분명했다. 그런데 저쪽에서 장 소장 을 공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소장, 당신이 스파이인 줄은 몰랐소.”
장인석 소장과 기뻐하던 박 신부, 준후와 백호 그리고 우르르 몰려 들어온 많은 경비병들까지도 놀라서 참모를 쳐다보았다. 참모의 눈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장인석 소장! 당신은 미사일을 자폭시킴으로써 우리 부대를 괴멸시키려고. 어째서 그런 짓을…”
장 소장은 깜짝 놀라서 말했다.
“아니, 윤 참모!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도대체……”
다른 쪽에 있던 참모 한 명이 장인석 소장의 가슴에서 떼어 내 서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미사일 자동 발사 장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은 스파이일지도 모르는 이 민간인들의 회유에 그것을 함부로 발사했소.”
박신부가 입술을 깨물었다. 비록 장인석 소장의 몸속에 들어 있던 세크메트의 사도의 영은 어디론가 빠져나간 모양이었지만, 나머지 세 참모들은 아직도 환영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 분명했 다. 그들은 또 다른 환영을 만들어 냄으로써 이번엔 장인석 소장 을 공격 목표로 삼고 있었다.
“자네들 미쳤나? 이게 무슨 짓이야?”
참모 하나가 경비병들의 인솔자인 듯한 병사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상병, 어서 장군을 체포하게!”
장인석 소장도 지지 않고 버텼다.
“무슨 소리야! 상병, 어서 이 헛소리하는 작자들과 사령부 안에 함부로 들어온 이 사람들을 모조리 체포해!”
박 신부와 준후는 병사들이 총부리를 코앞에 들이대고 있는 바람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박 신부가 간신히 장인석 소장에게 말했다.
“손에 들고 있는 보석을 어서 참모들에게…………….”
장인석 소장은 박 신부의 말을 듣고 손에 들고 있는 보석을 힐 끗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로써는 박 신부 말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왜 그 보석을 참모들에게 전해 주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뿐더러, 보석이 왜 자기 손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장 소장은 박 신부의 말은 완전히 무시한 채 다시 명령했다. “상병! 뭐 하는 건가. 어서!”
경비 분대를 인솔하고 온 상병은 당황했다.
“예. 아……. 이건 도대체………………”
그런데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백호가 천천히 문 쪽으로 손을 뻗고 있는 것이 준후의 눈에 들어왔다. 준후의 머리에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방금 장인석 소장에게로 빠져나간 그놈은 어디로 간 것일까? 혹시 그놈이 백호에게로 간 것이라면……….
“안 돼요!”
“이놈! 헛소리 마라!”
준후가 소리쳤으나 뒤에서 준후를 잡고 있던 참모도 마주 소 리를 질렀고, 백호의 손이 그쪽으로 뻗어 가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한 병사는 조용히 하지 않으면 사살이라도 하겠다는 듯, 더욱 더 총부리를 들이대며 준후의 목을 꽉 조였다.
준후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백호의 눈은 거의 풀려 있었고 자폭 장치의 모양이 폭탄처럼 생기지 않았기 때문인지 근처에 있는 경비병들도 장인석 소장과 참모들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을 뿐, 군복 차림의 백호가 쓰러진 채 그것에 손을 뻗는 것은 보지 못하고 있었다. 준후가 발을 동동 굴렀으나 경비병은 넋이 빠진 듯 참모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저 사람 저 사람이 폭탄을………… 저건 폭탄……………으윽!”
말을 하려는 순간 백호의 손이 자폭 장치에 닿았다. 그러나 그 순간,
“으윽!”
갑자기 컨테이너 차량 안에서 두 사람이 와당탕탕 넘어졌다. 한 사람은 막 자폭 장치로 손을 뻗으려던 백호였고, 또 다른 사 람은 근처에 있던 경비병이었다. 급한 나머지 현암이 그 둘을 집어 던진 것이다. 현암은 눈을 부릅뜬 채 몸을 일으켰다. 막 정신을 차리는 중에 준후가 떠드는 말을 들은 것이다. 박 신부는 현 암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현암군! 어서 저 세크메트의 눈을 저자들에게…………!”
이번에는 경비병들의 총구가 현암을 향했으나 현암은 비틀거 리는 몸으로 태극기공 십팔자 구결 중 ‘추’ 자결을 운용하여 경 비병 한 명을 밀어젖혔다. 기공력이 실린 여파로 뒤에 있던 경비 병들까지 와르르 쓰러뜨렸다. 참모들이 놀라고 있는 사이, 앞을 가리고 있던 총부리가 없어지자 준후는 재빨리 몸을 빼어 정신 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장인석 소장에게서 세크메트의 눈을 빼 앗아들며 말했다.
“소장님, 이 참모들을 잡아야 해요. 어서요!”
박신부가 뒤편에 있던 두 명의 참모를 엎어치기로 패대기쳤 고, 현암은 준후의 뒤쪽에 있던 참모 한 명을 낚아챘다. 준후는 재빨리 백호의 손에 세크메트의 눈을 쥐어 주었다. 백호의 풀린 듯한 눈이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 몇 번이고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무슨 짓을….?”
말할 사이도 없이 경비병들이 다시 우르르 일어서고 있는 모 습이 보였다.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진 경비병들은 어찌할 줄을 몰랐고, 당황하고 있기는 장소장도 마찬가지였다. 박 신부가 재 빠른 동작으로 넘어진 참모들에 손에 잠깐씩 세크메트의 눈을 대었다 뗀 다음, 다시 현암에게 넘겨주었다. 현암이 마지막 남은 참모의 손에 그것을 갖다 대자 방 한가운데서 아우성 같은 소리 가 울려 퍼지면서 푸른 불꽃이 엉겨 갔다. 넘어졌다 일어난 경비 병들이 놀라서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고, 장인석 소장도 입을 딱 벌리고 말을 잇지 못했다. 사자의 형상을 한 아스라한 기운들이 한데 엉켜서 방 한가운데에 일렁이는 푸른색의 안개를 만들고 있었다. 세크메트의 눈의 힘에 의해 떨어져 나간 사도의 영들의 허공에 뭉치기 시작한 것이다.
“사악을 꾸미고 인간을 우롱하는 자들이여!”
박 신부가 이를 악물면서 남아 있는 기운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려 기도력을 발하자, 영들은 오라에 갇힌 듯 그 자리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비명과 함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몸부림쳤다. 컨테이너 차량 전체가 와르르 흔들거렸고, 생전 듣 도보도 못한 사태에 다른 사람들도 거의 넋을 잃고 있었다.
준후가 화가 난 듯한 모습으로 부적을 꺼내어 허공에 뿌렸다. 부적들은 허공에서 저절로 불이 붙은 채, 세크메트의 네 사도들 이 아우성치고 있는 곳으로 불덩어리가 되어 뚫고 들어갔고, 그 때마다 작은 폭발이 일어나며 처절한 비명 소리와 아우성이 사 방에 메아리쳤다.
현암은 짧은 순간이지만 생각에 잠겼다. 중간에 정신을 잃는 바람에 사건의 전모는 몰랐지만, 어쨌든 저 기운들이 세크메트의 사도들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대로 놓아두기엔 세크메트 사도들의 영은 너무 위험했다. 비록 한 사람을 위한다는 맹세 때 문이었다지만 그들은 스스로의 힘을 편협한 곳에 쓰는 악을 범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힘을 소유한 자, 그 힘 때문에 스스로 짓눌린다고? 너 희야말로 그런 짓을 한 것이다.’
현암은 힘을 잃고 아우성을 치며 박 신부의 오라에 붙잡혀 있 는 네 사도들의 영을 향해 월향검을 날렸다. 허공에 푸른 폭발이 일어나며 컨테이너의 두꺼운 유리창이 깨지고 안의 집기들도 충격에 의해 밀려났다. 안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약간씩의 충격 을 받고 벽에 부딪혔다가 앞으로 넘어져 굴렀다. 오직 박 신부와 현암, 준후만이 제정신을 차린 채 서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영 적인 폭발로 인한 충격으로 모두 쓰러져 정신을 잃고 있었다. 현암이 돌아온 월향검을 받아들고 천천히 팔을 내리는데 연희의 목소리가 세크메트의 눈을 통해 울려왔다.
어떻게 된 건가요? 이제는 끝난 거예요?
끝났어요, 연희 씨.
현암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씩 웃었다. 박 신부와 준후도 마주보고 같이 웃었다. 세크메트의 분노는 이제 거두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