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2권 4화 – 왕은 아발론 섬에 잠들고 4 : 켈트족의 전설
켈트족의 전설
런던탑에서 나온 일행은 근처에 있는 월터 보울의 사무실로 향했다. 월터 보울은 심령학자이니만큼 여러 면에서 지식이 해 박했고, 또 그의 사무실에는 이번 일에 도움이 될 만한 영국사 관련 서적이 많았다. 박 신부는 베케트의 영이 선사한 십자가를 품에 넣었고, 일행은 월터 보울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베케트가 어떤 사람이지요? 알려 주십시오.”
윌리엄스 신부가 간략히 이야기를 해 주었고 월터 보울이 앙 드레 모루아의 『영국사를 꺼내 주어 박 신부는 베케트와 관련된 내용들을 대략 파악할 수 있었다.
헨리 2세의 시절이었다. 1150년대의 일. 헨리 2세가 즉위하자 캔터베리 대주교 디어볼드가 왕의 측근에 신임할 만한 사람을 두었으면 하는 생각에 서기 중의 한 사람인 토머스 베케트를 추 천했다. 토머스 베케트와 헨리 2세는 곧 왕과 신하의 사이를 떠나 각별한 우정으로 맺어졌고 토머스 베케트는 국새상서에 임명되 었다. 베케트는 헨리 왕의 고상한 농담 상대이자 우수한 행정 능 력을 가진 신하였고, 능란한 매 사냥꾼이기도 했다.
그는 1160년에 프랑스 북부 벡생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성직자 임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이끌고 승리를 거두었고, 일대일로 기사 전투를 벌여 이기기도 한 무인이었다. 헨리 2세는 베케트를 대단히 신임했고 베케트는 오만한 권세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대주교 디어볼드가 세상을 떠나자, 헨리 2세는 베케트에게 캔터베리의 대주교직을 주기로 했다. 이것은 왕이 교회에 대한 권리를 빼앗 기 위하여 자기의 측근을 대주교로 앉히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 세속적인 대영주는 대주교로 앉게 되자마자 금욕주 의자로 일변하게 되었다. 그 후부터 그는 여생을 기도와 종무에 바쳤고,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은 그의 육신에서 고행(行 帶)와 자계(戒)의 채찍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것은 성직과 의리를 사이에 두고 갈등한 대표적인 역사 적 예로 남아 있다. 왕과 교회는 여러 번 충돌했으나 베케트는 자 신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교회가 계속 성공하도록 만들었다. 왕은 결국 대로하여 성탄절 경축식 때 베케트에 대한 불만의 소 리를 터뜨렸고, 이 말을 들은 기사 네 명이 배를 타고 영국으로 건 너가 캔터베리에 당도하자마자 대주교를 협박했다. 무인이자 성 직자였던 베케트는 용기와 소신을 가지고 대답했고 제단은 눈 깜 짝할 사이에 기사들의 장검에 난자 당한 베케트의 뇌수로 더럽혀 졌다.
이후 베케트는 성자 서품을 받아 성 토머스 베케트로 불리게 되었다.
영국사에서 베케트의 장을 읽은 박 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큼 믿음에 대한 신념을 깊게 가지고 또 거기에 세속적인 불 행을 겪은 사람이라면 강렬한 염원이 남아 이적을 보일 수도 있 었다. 윌리엄스 신부는 신이 난 듯 베케트에 대한 일화를 가르쳐 주었다.
그 이후 시간이 지나 헨리 8세의 시대가 되자 교회와 왕권은 다 시 대립하게 되었고, 당시 활동하던 간신 토머스 크롬웰의 우상 타파의 투쟁에서 베케트는 첫 번째로 모욕을 당했다. 당시의 캔 터베리에는 성 토머스 베케트의 핏자국이 남아 있었고, 베케트의 유골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크롬웰과 한패였던 크레머는 성 토머 스 베케트의 혈액이 황토로 만든 가짜가 아닌가 의심하여 검사를 시켰다. 뿐만 아니라 성 토머스는 왕에 대한 반역자로서 성자의 자리를 박탈당했다. 토머스 크롬웰은 사람을 보내서 캔터베리에 있던 베케트의 유골을 조각조각으로 부숴 버렸다.
박 신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토머스 베케트는 물론 순교를 두려워하거나 그런 일로 인해 원한을 품을 사람은 아니었으나 유골이 산산이 파괴되어 부관참시를 당한 예로 보아서, 베케트 가 종교를 위한 어떤 신념을 남겨 두고 뭔가 알 수 없는 위험으 로부터 이 일들을 막으려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박신부에게서 자세하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현암과 준후, 승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암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그러한 베케트의 영이 런던탑 안에 나타나서 싸움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베케트는 생전에야 알 수 없지 만 지금의 영적 상태로는 분명 교회 쪽의 성스러운 힘을 지니고 있는 것 같던데요. 그가 대적해서 싸워야 할 만한 사람이라면 어 떤 사람이 있을까요?”
현암의 말에 월터 보울이 대답했다.
“아까 본 무기들 중 땅에 떨어져 있던 것들은 시대가 확실하지 않은 고대의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대부분은 켈트 족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무기 같습니다.”
박신부가 물었다.
“켈트족이요?”
승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아까 이야기를 들었던 드루이드교도도 켈트족의 사제 잖아요? 그러면 이 일은 전반적으로 켈트족과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박신부가 확정적인 말을 더했다.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베케트의 영도 모든 것이 드루이드때문이라고 했거든.”
윌리엄스 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준후가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승희를 자꾸 채근했고, 승희는 귀찮은 듯이 되는 대로 통역해 주었다. 준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그럼 켈트족은 영국에 없는 멸망한 종족인가요?”
승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일랜드나 아이슬란드, 스코틀랜드 지방에는 아직 도 켈트족이 많이 있어. 물론 드루이드라고 하는 그들의 종교는 없어진 지 오래되었고, 모두가 개신교나 성공회 또는 가톨릭으 로 개종하였지만 명맥은 끊어지지 않고 있지.”
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계속 논의를 거듭했고 모두 가 켈트족과 연관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윌리엄스 신부가 물 었다.
“그렇다면 살인 사건들도 모두가 켈트족의 고대 사제인 드루 이드교에서 저지른 것이라 볼 수는 없을까요?”
박 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차 안에서 자 신들이 추리한 연속 살인 사건이 일어난 배경 가운데 하나가 그 들의 이름에 있다는 것도 이야기해 주었다. 윌리엄스 신부와 월 터보울이 진중하게 박 신부의 말을 들었다. 한동안 얘기를 나누 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월터 보울이 전화를 받더니 급히 말 했다.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가 없군요.”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캐드베리에 유령의 기사들이 지나갔다고 합니다. 목격자만 해도 몇백 명이 되는데, 사람들은 공포에 떨고 있다고 합니다.”
“기사의 유령이요? 캐드베리라면…….”
월터 보울이 말했다.
“아더 왕의 유령이 많이 나타난다는 곳이죠. 이번에도 아더왕의 유령이 아닐까 생각됩니다만.”
승희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더 왕이요? 아더 왕이라면 켈트족의 위대한 마지막 왕으로 숭배되고 있는 전설의 왕 아닌가요?”
“예, 맞습니다.”
박신부가 말했다.
“수백 건의 목격담이 들어오고 있다면 아직도 그 일대를 방황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서두르면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예, 그렇지요. 자, 어서 떠납시다.”
일행이 떠나려는데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월터 보울이 전 화를 받고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일은 그것뿐이 아니군요. 또 심령학적인 일들이 벌어 지고 있답니다. 정신이 없군요.”
“어떤 일들이지요?”
“대영 박물관에 있는 역대 왕들의 초상화가 지워지고 있답니다. 원래 그림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박 신부는 생각에 잠겼다. 이런 심령학적 현상들은 흔한 것이 아니다. 그런 드문 일들이 한꺼번에 벌어지는 것은 거대한 배후 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 아무리 이상한 일이라도 근거와 원인 없이 발생하는 일은 없다. 서둘러 간다면 캐드베리 근처에 출몰한다는 유령기사들을 직접 보고 정체를 밝혀 도움이 될 만 한 것을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대영 박물관 내 역대 왕들의 초상화가 지워지고 있는 것도 범상한 일은 아니었다. 박 신부의 고민을 눈치챈 현암이 말했다.
“좋은 수가 있습니다. 제가 대영 박물관으로 가지요. 신부님은 기사들의 유령이 출몰하는 곳으로 가 보십시오. 만약의 경우 무 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신부님과 준후가 같이 가고, 저와 승희가 같이 간다면 별문제 없이 대응할 수 있을 겁니다. 세크메트의 눈 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면 상황 전달도 간단할 테고요.”
“그것 참 좋은 생각이로군.”
박 신부가 고개를 끄덕이며 합의한 바를 윌리엄스 신부와 준 후에게 말했다. 현암과 승희는 윌리엄스 신부의 안내를 받아 대 영박물관으로 가기로 했고, 박 신부와 준후는 월터 보울의 안내 로기사들의 유령이 출몰하는 곳으로 가기로 합의가 되었다. 막 길을 떠나려는데 승희가 뭔가 떠오른 듯 말했다.
“아차! 연희 씨가 내일 새벽 비행기로 온다고 하지 않았나요?
캐드베리는 여기서 좀 떨어진 곳이라……………. 박 신부님은 마중 못 가시겠네요?”
박신부가 월터 보울과 이야기를 해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럴 것 같군. 현암 군과 승희 둘이 연희 양을 마중해 주 게. 캐드베리는 시골이라 내일 새벽까지 돌아오기는 어려울 것 같아.”
“예, 알겠습니다.”
현암과 승희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희와 준후가 세크메 트의 눈을 각각 나눠 가진 뒤, 두 팀은 각자 갈 길로 향했다. 준후 와 승희가 세크메트의 눈을 가진 이유는 현암은 손으로 힘을 많 이 써야 하므로 쥐고 있기가 어려웠고 박 신부는 (좀 우습지만) 자신의 믿는 바가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근원을 지니고 있는 세크메트의 눈을 여간해서는 만지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캐드베리로 향하는 차 안에서 월터 보울은 박 신부에게 캐드베리에 대한 설명을 간략하게 해 주었다.
“아더 왕의 이야기에 대해서 좀 아십니까?”
박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중세의 유명한 기사이자 왕이었고 원탁의 기사들의 지도자였다는 것밖에는요.”
월터 보울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하. 그 이야기는 아더 왕 이야기를 집대성한 토머스 맬러 리 경이 각색을 많이 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지요. 아더 왕이 원 탁의 기사를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일지 모르지만 중세 기사는 아닙니다. 5세기경에 태어난 사람이지요. 그러니까 철판 갑옷으 로 몸을 두르고 마상 시합용 창을 들고 무장한 기사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더 왕을 가공의 인물로 보는 사람도 많 고 실존 인물로 보는 사람도 많지요. 가공의 인물로 보는 측은 아더왕의 진짜 이름이 아르토리우스라고 생각하고, 또 5세기 말 영국 땅의 지도자였던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와 혼동하 여 생겨난 이름이라고도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아더 왕 자체는 실존 인물이라고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캐드베리는 아더 왕의 성이 있었던 캐멀롯이 실존했다고 추정되 는 장소입니다.”
박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월터 보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민간에서 전래되는 아더의 성은 예부터 으레 캐드베리였지 요. 캐드베리의 언덕엔 ‘아더의 샘’이라는 장소가 있는데, 여기 서 아더가 타고 다니던 말의 은 편자가 발견되었다고 하지요. 보 름달이 뜨는 저녁이나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아더 왕과 기사들이 말을 타고 언덕 근처를 지나다닌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캐드베리의 발굴 작업은 여러 번 수행되어 왔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정식 발굴 조사에서 켈트인의 도구는 하 나도 나온 적이 없습니다. 오랫동안 아더가 묻혀 있다고 전해져 온 글래스톤베리 수도원 자리와 캐드베리도 지척에 있지요. 글 래스톤베리의 수도원에는 아더 왕의 분묘라고 하는 묘비가 있었 다고 전해집니다만 실제로 아더 왕이 묻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요.”
“그곳에 묻혀 있지 않다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월터 보울은 차를 운전하면서 여유 있는 태도로 미소를 지으 며 박 신부에게 아더 왕의 전설을 간략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아더왕은 켈트족의 왕으로 영국을 지배하고 해외까지 원정을 나간 유능한 왕이었다. 아더 왕에게는 란슬롯이나, 가웨인, 갈라 하드 등의 유능한 기사들이 있어서 여러 가지 모험과 괴물 퇴치 등의 전설 같은 일화를 많이 남겼다. 최후에 아더 왕은 란슬롯과 그의 왕비 기네비어와의 밀통을 의심하여 란슬롯과 전쟁을 벌였 는데, 그 틈을 이용해 불충한 신하인 모드레드가 아더 왕에게 반 기를 들었다. 아더 왕은 결국 자신의 신하 모드레드와 싸워서 이 기기는 했으나 자신도 중상을 입게 된다.
그러나 아더는 전사하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검 엑스 칼리버를 물속에 던진 뒤 부상을 당한 채 아발론 섬으로 가서 지금까지 그곳에 잠들어 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아더는 민중이 자신을 필요로 하면 언제라도 돌아오겠다고 말했다고 하며, 켈트인은 그 이후로도 수백 년 동안 아더 왕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박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전설이 있었군요. 그러나 아발론 섬이라는 것은……… 월터 보울이 미소를 지었다.
“그 지명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지요. 그러나 6세기경이라고 하면 당시 글래스톤베리 수도원의 주변은 시냇물이 주위를 에워 싼 작은 언덕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지질학자들은 추정합니 다. 따라서 건조 지대와는 가느다란 산등성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육계도(陸繫島) * 형태였겠지요. 그곳이 아발론 섬이라고 불 렸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요? 아더 왕이 실제의 인물이었고 사람들이 그토록 숭앙 하는 왕이라면, 왜 아더 왕의 죽음과 매장 장소가 수수께끼에 싸 여 있을까요?”
“아더 왕 연구가로 알려진 작가 제프리 애시에 의한 설명이 가 장 타당하다고 봅니다. 아더 왕은 로마의 문물을 잇고서 당시 비 교적 원시적이었던 색슨인과 전쟁을 치르다가 전사하였다고 보는 견해요. 당시는 색슨 군대가 새로이 진출하기 위해 병력을 증강하고 있을 시기였는데, 아더 왕 진영 내부에 불화가 생겼다 는 당시의 상황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아더 왕의 죽음을 측근이 숨겼을 가능성이 있지요. 아더 왕의 죽음을 당장 공표하면 아군 의 사기는 떨어지고 적의 사기는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지요. 왕 의 명성과 신화적 업적에 대한 두려움이 야만인들, 즉 색슨족을 오랫동안 제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왕 의 죽음을 숨기고 유체를 멀리 옮겨서 몰래 매장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군요. 그러나 그런 아더 왕의 유령이 자주 나타나고 또 낮인데도 이 짙은 안개 속에 유령이 돌아다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혹시 그것이 켈트인의 부활을 꿈꾸는 음모 중 하나 가 아닐지……. 아니, 아니, 너무 확대해서 생각한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월터 보울이 눈을 치켜떴다.
“켈트인의 부활을 바라는 음모라구요?”
박신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이 일이 또다 시 블랙서클의 음모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짙어지고 있었다. 캐 드베리로 달려갈수록 안개도 더욱 짙어졌다.
*사주) 등에 의하여 육지와 연결된 섬.
현암과 승희를 태운 윌리엄스 신부의 차는 금세 대영 박물관 앞에 도착하였다. 월터 보울의 말에 의하면 대영 박물관 내에서 역대 왕들의 초상화가 지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현재 몇몇 목격 자에 의해 발견된 이후, 박물관 측에서 그 구역을 차단함으로써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다고 했다. 그런 다음 몇몇 심령과학 자들을 불렀다고 한다. 윌리엄스 신부가 심령과학회 등 여러 방 면에 발이 넓어 그 덕에 현암과 승희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끝이 막힌 박물관 한쪽 통로에 거대한 초상 화들로 채워져 있던 화폭들이 마치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듯 텅텅 비어 있었다. 흰색과 회색의 얼룩진 무늬만이 그림을 덮 고 있어서 원래의 그림 위에 회색 물감을 덧칠했거나, 또는 애당초 아무것도 칠해져 있지 않은 것같이 보였다.
윌리엄스 신부가 옆에 서 있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잠시 뒤에 그 사람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밖으로 나갔다. 복도에는 일 행 외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상한 일입네다. 오늘 아침부터 초상화들의 색깔이 슬며시 옅어지더니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림이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 다. 위에 덧칠이 된 것도 아니고………….”
“그래요?”
현암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공력을 운용해 보았다. 영기가 느껴 지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영기가 느껴지기는 해도 뭔가 자 욱하게 앞을 가린 듯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승희도 눈을 감고 투시를 해 보더니 고개를 갸웃하고 눈썹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승희야, 왜 그래? 알아낸 것이 있어?”
“글쎄….. 이상하네.”
승희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욕설 같은 것이 들리는 듯도 하고 이상한 기운이 가득 찬 것 같 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 뭔가 숨어 있는 것 같으니 조심하라구.”
현암과 승희 그리고 윌리엄스 신부는 초상화들이 진열되어 있 는 복도를 천천히 지나갔다. 고대의 왕들의 상상화부터 역사상 의 왕조, 그러니까 바야흐로 국토 통일이 이루어졌던 헨리 2세 때부터의 초상화들이 나열되었다. 그러나 초상화들이 모조리 지 워져 있는 복도는 대단히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현암은 지워져 있는 초상화 중 맨 처음의 초상화 밑에 붙은 문구를 읽어 보았다.
<헨리 2세>
“이상한 일입네다. 하필이면 왜 역대 왕들의 초상화가 지워졌을까요?”
윌리엄스 신부가 중얼거리자 승희가 말했다. 감이 잡히는 것이 있어서였다.
“제 판단으로라면, 이건 하나의 시위 같군요.’
“시위라고요?”
“역대의 왕권을 부정하는 것이겠지요.”
현암은 고개를 갸웃하는 윌리엄스 신부를 놔두고 빈 화폭을 바라보다가 승희에게 물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간략하게 설명해 주겠어?”
“음, 생각해 봐. 처음으로 영국이 대강이나마 통일되었던 것은 헨리 2세 때지. 그러면 여기서 지금 헨리 2세부터의 초상화들이 지워졌다는 것은, 그 이후의 영국 왕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무언 의 시위가 아닐까? 내 추리력이 어때? 후후후.”
“헨리 2세 이전의 영국에는 무슨 일이 있었지?”
윌리엄스 신부가 아무래도 영국사에 대해서는 더 잘 알 테지 만, 현암의 짧은 영어 실력이나 윌리엄스 신부의 어설픈 한국어 실력으로는 의사소통이 힘들기 때문에 현암이 승희에게 물은 것 이다. 현암의 질문에 승희는 기억을 더듬어 대답해 주었다.
“헨리 2세 때에 있었던 유명한 사람이 성 토머스 베케트야. 그 리고 그전에는 노르만인의 영국 정벌이 있었지. 그러니까 프랑 스 종족의 영국 정벌이라고 할 수 있어. 그전에는 덴마크와 노르 웨이 지방의 데인인이 영국을 거의 다 지배했지. 그 데인인은 알 프레드 왕에 의해 밀려났지만……………. 데인인의 침략 전에는 앵글 로색슨족이 영국을 거의 점령했었고, 그때 켈트족은 물러났지. 그리고 북부의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에이레지방으로 쫓겨났던 거야. 물론 그 훨씬 이전에 이베리아인이 있기는 했지만.”
현암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래? 좀 이상하군.”
“뭐가?”
“우리가 지금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켈트족이야. 그래 서 고대 드루이드 수법에 의해서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지 않는 지 의심하는 것이고. 그런데 헨리 2세 이전에도 여러 왕들이 있 었는데 왜 그 이후의 것들만 지워졌냐는 말이지.”
현암은 말을 마치고 나서 생각을 해 보았다.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있을까? 베케트∙∙∙∙∙∙. 베케트가 있던 시기는 헨리 2세의 시 대. 그렇다면 베케트는 헨리 2세 이후의 왕조에 대하여 힘을 행 사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런던탑 안에서 베케트의 영이 조종 한 것으로 보이는 무기가 다른 무기들을 제압하여 결국은 얌전 하게 만든 것으로 보아, 베케트의 염원이 아직도 영국 땅에 강하 게 깃들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곳에 서 헨리 2세 이후의 초상화들이 지워진 것은 그러한 베케트의 영 에 반발한 드루이드들이 보내는 시위라고 보면 일단 타당성이 있어 보였다.
현암과 승희가 이야기를 하는 사이 윌리엄스 신부는 흰색 얼 룩으로 텅 빈 초상화들을 하나씩 유심히 살펴보았다.
윌리엄스 신부가 몇 개의 초상화들을 들여다보더니 연신 고개를 저었고, 앞으로 가며 계속 빈 초상화들을 살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시죠, 윌리엄스 신부님?”
“이 초상화들에 공통되는 무늬가 나타나는 것 같습네다.”
“무늬요?”
“예.”
현암과 승희는 윌리엄스 신부가 가리키는 초상화의 얼룩무늬 를 자세히 보았다. 그러고 보니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흐릿 한 문자 같은 것들이 얼룩을 이루고 있었다. 승희가 현암에게 물 었다.
“저건 뭐지? 원래 있던 초상화 그림을 지우고 어떤 글자를 거 기에 써 넣은 것 같은데? 영적으로 저런 일도 가능해?” 현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상화뿐이 아니지. 사진 필름에 자기가 생각한 것을 감광시 키는 능력을 지닌 사람도 있고, 피부를 솟구치게 해서 글자를 쓰 는 경우도 많아. 물론 그것은 악마에게 씌었거나 빙의된 상태에 서 나타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영적인 힘을 제대로 구사할 수 있 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야. 인과율에 크게 어긋나는 것만 아니라면…………….”
승희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얼룩무늬를 쳐다보았고, 윌리 엄스 신부는 수첩을 꺼내 얼룩을 주의 깊게 옮겨 그렸다. 현암은 혹시나 하여 승희와 윌리엄스 신부에게 물러나라고 한 뒤 태극 패에 공력을 집중하여 한 초상화를 비춰 보았다. 태극패에서 푸른빛이 뻗어 나와 벽에 걸려 있는 초상화를 비추자 희뿌연 옷을 입은 사람 모습이 비춰졌다. 희미하게 나타난 그림의 얼룩은 바 로 그 옷에 회색으로 새겨진 글자인 듯했다.
“어엇, 저거!”
윌리엄스 신부와 승희가 놀라서 뒤로 몇 걸음을 물러섰다. 현 암도 내심 놀랐다. 영력을 비추어 보았을 때, 흰옷 입은 사람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거기는 분명히 영이 깃들어 있었다. 그렇다 면 그 영이 초상화를 가리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현암은 영력으로 태극패에서 빛을 조심스럽게 발하면서 서서히 다가갔 다. 그러자 초상화 속의 그림처럼 평면으로 화폭에 붙어 있던 사 람의 모습이 왈칵 움직이며 자신이 둘러쓰고 있던 후드를 젖히고 눈빛을 번득였다. 그 사람의 머리는 도끼인지 뭔지에 맞아서 반쪽으로 쪼개져 있었으며 눈은 튀어나올 듯했고 입을 헤 벌리 면서 흉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윽!”
“Oh, Damn!”
승희와 윌리엄스 신부가 놀라서 신음을 흘렸고 그림 속에 붙 어 있던 영은 현암을 향하여 왈칵 달려들었다. 동시에 다른 초상 화 속에 붙어 있던 영도 보통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가시화된 채로 길게 꼬리를 끌며 그림 속에서 뛰쳐나왔다. 아까 어디에 있 는지 알기 어려웠던 영기가 바로 이것들이었다.
현암은 달려드는 영을 피해 재빨리 몸을 틀어 공력을 끌어모았다. 현암의 왼팔에서 월향검이 날아 현암의 오른손에 뛰어들
었다.
초상화에서 튀어나온 흰옷차림의 영들은 하나같이 큰 상처들 을 입어 흉악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서서히 하나의 대열을 이루 더니, 윌리엄스 신부와 승희 쪽으로 다가왔다. 현암에게 덮쳐들 던 영은 현암을 잡지 못하자 자기들의 무리로 향했고, 무리를 이 룬 영들은 복도 내부에서 흩어지기 시작하더니 세 사람의 주위 를 에워싸고 휘휘 돌았다.
경비원들이 통행을 차단하고 있어서 건물 내에 다른 사람의 모습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승희는 흰옷을 입은 흉측한 모 습의 영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돌자 매우 놀랐다. 윌리엄스 신부 는 십자가를 꺼내 들고 기도를 읊으면서 뒷짐을 지고 서 있었고, 현암은 선 자세 그대로 오른손에 월향검을 들고 대치했다. 흰옷 을 입은 영들은 무슨 소리를 지르고 있었으나 무슨 말인지 윌리 엄스 신부는 물론 현암, 승희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승희가 긴장한 채 생각했다.
‘이럴 때 연희 씨가 있어야 하는데…….’
승희는 손에서 세크메트의 눈을 꺼내어 꼭 쥐었다. 그러나 안 타깝게도 준후가 세크메트의 눈을 쥐고 있지 않아서인지 느낌이 전해져 오지 않았다. 흰옷 입은 영들의 무리는 마치 춤추는 것처럼 번득이는 눈동자를 하고 처참한 상처를 입은 흉악한 모습으로 점점 포위망을 좁혀 들어왔다.
준후는 짙은 안개에도 불구하고 차창 밖의 경치를 구경하느라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러나 캐드베리로 다가갈수록 안개는 더욱 짙어져서 바깥 경치를 볼 수 없게 되자 이내 잠이 들었다. 박 신부는 월터 보울의 옆자리에 앉아서 자신들이 가고 있는 길의 지도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캐드베리라는 지명은 세 곳이 있었다. 캐드베리 힐, 캐드베리 캠프, 캐드베리 캐슬, 거기서 조금 더 가면 퀸즈 캐맬, 웨스트 캐맬이라는 도시가 나온다. 박 신부 가 그 지명들을 보고 빙긋이 웃으며 월터 보울에게 말했다.
“모조리 ‘캐’로 시작하는군요.”
월터 보울이 답했다.
“그것은 ‘캠’에서 유래된 것이지요. 캠이라고 불리는 강이 있 었다는 고대 켈트족의 기록이 있습니다. 캠이라는 것은 꼬불꼬 불하다는 켈트어에서 유래하는데, 캐멀롯이라는 지명도 캠 강 근처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은 캐드베리 힐, 캐드베리 캠프, 캐드베리 캐슬 중의 어느 곳이지요?”
“캐드베리 힐입니다. 캐드베리 힐은 예전부터 요새로 이용하 기에 좋은 곳이었지요. 캐드베리 힐의 요새 성벽은 고대부터 있었는데 기원후 6세기, 그러니까 아더 왕 시대에 성벽이 대대적 으로 보강되었다는 흔적이나 기록이 있지요. 특히 민간에서 전 래되는 아더 왕의 성은 예부터 캐드베리에 있다고 알려져 왔습 니다. 민간의 전설을 그대로 믿을 수 없지만 많은 부분이 진실을 담고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 신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민간의 전설이나 구 술되어 오던 이야기들이 진실로 밝혀진 예가 얼마나 많은가. 예 부터 내려오던 전설이나 시, 문학 작품들을 진실로 믿었기 때 문에 고고학에 있어서 개가를 올린 경우는 수없이 많다. 슐리만 이 호메로스의 시를 백 퍼센트 믿지 않았으면 트로이는 발견되 지 못했을 것이고, 미케네 문명도 땅속에서 그대로 잠자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빌론의 공중정원이나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의 갖가지 문명들, 남미의 마추픽추 등도 여전히 땅속에 잠들어 있을지 모른다. 이런 것을 볼 때 오히려 민간에서 전래되고 있는 전설이나 이야기들이 오히려 역사 왜곡을 거치지 않은 진실한 이야기를 담고 있을 가능성은 많다. 박 신부는 이곳 캐드베리에 서 아더왕의 유령이 자주 나타난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다.
“미스터 보울, 아더 왕의 출몰에 대한 다른 이야기들은 없습니 까?”
월터 보울은 그 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모양이었다. 박 신부의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튀어나왔다.
“많지요. 캐드베리 지방의 마을 사람들에게서는 온갖 이야기 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까 ‘아더의 샘’ 이야기는 했지요? 다른 이야기를 해 드리지요. 캐드베리 언덕은 속이 텅 비어 있어서 금으로 된 빗장을 벗기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전설이 있습니 다. 아무도 들어가 본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요. 어떤 고대의 시에 따르면 성 요한의 이브에 빗장을 열고 안을 엿보니까 신하들에 게 둘러싸인 살아 있는 아더 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고 합니 다. 물론 언덕 주변에서 그 빗장을 본 사람은 없지요. 실제로 이 지방 사람들이 왕을 믿는 마음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좀 옛날입니다만 고고학자들이 이 언덕을 방문했을 때 노인들이 왕 을 데리러 왔느냐고 물었던 사실이 기록으로까지 남아 있지요.”
박 신부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글래스톤베리의 수도원에 아더 왕의 분묘가 있다고 하던데 그것은 어떤 것입니까?”
“제 기억에 따르면 1190년경에 아더 왕과 왕비 기네비어의 유골이 옛 성모 예배당 양쪽 끝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1270 대에 두 사람의 유골은 에드워드 1세의 명령으로 이곳에 만들어 진 검은 대리석 묘로 옮겨졌고, 그 묘는・・・・・・ 음, 그렇지! 1593 년 수도원이 헐리기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현재 글래스톤베리의 수도원에 아더 왕의 유골이 있는 것은 아니지요. 사실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아더 왕의 유골이 진실로 에드워드 1세의 통치 기간에 발굴되었던 것은 아닙니까?”
월터 보울은 웃었다.
“알 수 없습니다. 전 국민에게 역사적으로 인기가 있는 아더 왕의 가계와 자신의 혈통을 이으려는 시도는 많았습니다. 특히 헨리 8세의 경우 자신의 가계와 이 대영웅을 연결시키려고 여러 노력을 했지요. 왕위에 오르기 전에 세상을 떠난 헨리 왕의 형이 아더라는 이름을 가졌던 것하며 그가 건조한 윈체스터 성에는 저 유명한 원탁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원탁은 물론 아더 왕 시대의 것이 아니지요. 길이가 십팔 피트 정도 되고 윗면에 중세 복장을 하고 왕좌에 앉아 손에 홀을 든 아더 왕의 그림이 있으며 아랫부분에 흰색과 초록색의 방사상 무늬가 나누어 칠해져 있 고, 각각의 무늬 끝에는 아더의 유명한 기사들의 이름이 기록되 어 있지요. 이 그림은 16세기경에 헨리 8세가 그리게 했던 것입 니다. 원탁을 자신의 가문의 상징인 흰색과 초록색으로 칠하게 한 것이지요.”
“그렇군요.”
박 신부도 영국 역사상의 대영웅이었던 아더 왕에 대한 숭배 정신이 팽배했었다는 것. 그리고 그 노도가 생각보다도 크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아더 왕이 정말로 잠들어 있는 곳은 어디일까? 전설로 전해지는 아발론 섬일까? 월터 보울은 박 신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설명을 덧붙였다. “영국의 왕들이 하나같이 자신들의 가계를 아더 왕과 연결시 키는 데에 열심이었다면 에드워드1세도 그랬을 수 있지요. 그래 서 자신의 통치 기간 중 무슨 예언이라도 받은 척하며 아더 왕의 유골이 발굴되었다고 단언을 했지만, 사실인지는 알 수 없습니 다. 글래스톤베리의 수도원은 큰 화재로 온통 타 버린 적이 있는 데 복구 작업에 필요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하여 아더 왕의 유골 이 발견되었다고 수도사들이 사실을 날조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길게 나누는 동안 박 신부와 준후를 실은 차는 캐드베리에 당도하고 있었다.
“저들은 드루이드의 영들이 틀림없어요. 흰옷을 입고 있고.” 소리를 지르던 윌리엄스 신부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 다. 주위를 돌던 드루이드들이 일제히 우 하고 이상한 소리를 질 렀기 때문이다. 소리가 웅웅거리며 반향이 되자 지나온 복도가 갑자기 벽으로 막힌 것처럼 보였다. 완전히 문 없는 방에 갇혀 버린 꼴이었고, 여기서도 바깥쪽이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 외부 사람들 역시 닫힌 벽을 통해 안쪽을 볼 수가 없었다. 승희가 외쳤다.
“앗, 저런! 복도의 입구가 없어졌어요. 이게 도대체 무슨 술수죠?”
현암이 소리쳤다.
“환영술이야! 신경 쓸 것 없어. 이들을 물리치면 자연히 사라질 거야.”
현암은 월향검을 잡고 있는 손에 공력을 넣었다. 웅 소리를 내 며 검기가 솟아나자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드루이드의 영들이 놀란 듯 무슨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윌리엄스 신부가 소리쳤다.
“저건 고대 언어인 것 같습네다. 뭔가 말을 하고 있는데………… 루와 누아다. 그리고 발로르와 오그마, 비비안…………. 신들과 그 리고・・・・・・ 잘 알아들을 수 없어요.”
주위를 둘러싸고 빙빙 돌고 있는 드루이드 영들은 아직 공격 해 오거나 무슨 수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현암 일행은 긴장 을 늦추지 않고 서로 등을 맞댄 채 그들의 행동을 찬찬히 살펴보 고 있었다. 그들이 외치는 내용을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켈트 족의 고어로 말하기 때문인지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루 누아다. 발로르, 오그마, 비비안 등이었고 특히 발로르라는 말이 많았다.
주위를 돌던 드루이드들이 그 자리에 정지했다. 소름 끼치는 몰골들이었다. 맴돌기를 멈추고 세 사람을 무서운 눈초리로 째 려보자, 그들의 상처에서 피가 샘솟듯 흘러나와 흰옷을 삽시간에 붉게 물들였다. 놀란 승희가 헉 하는 소리를 내는 것을 듣고 현암이 저들을 응시하며 날카롭게 말했다.
“정신 차려! 이건 환영의 술수일 뿐이야. 정신을 혼란시키는 것에 불과하니까 신경 쓰지 마!”
다시 드루이드들이 ‘발로르’라는 소리를 크게 지르면서 오른 손을 각자의 눈에 가져다 댔다. 셋은 긴장한 채 그들이 하는 짓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그들이 왼쪽 눈을 빼내서 일제히 둥근 눈알을 불쑥 내밀었다.
“윽!”
끔찍한 모습을 보고 승희가 기겁을 했다. 그러나 그것뿐이 아 니었다. 그들이 눈을 뽑아 내밀자 갑자기 세 사람의 몸은 단단한 것에 묶인 것처럼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마비시키는 주술을 부린 듯했다. 현암조차 이를 악물고 공력을 운행하여 몸을 움직 이려 했으나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드루이드들은 히죽히죽 웃으면서 셋을 향해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 들어왔다. 승희도 전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몸은 석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고, 입도 떨어지지 않아 소리조차 낼 수가 없었다. 옆에 있는 윌리엄스 신부는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리려는 듯이 눈꺼풀을 조금씩 움직여 봤으나 눈 도감기지 않는 것 같았다.
자신의 눈을 빼들고 흉측한 웃음을 흘리며 다가오는 드루이드들의 모습은 눈을 돌리고 싶도록 끔찍했지만, 고개도 눈도 돌 려지지 않았다.
현암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건 가위 눌린 상태와 흡사하다. 어쩌면 단순한 환각일지도 몰라.’
현암은 몸에 공력을 운행시키던 것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히 죽히죽 웃으며 다가오는 드루이드들의 깨어지고 찢어진 참혹한 모습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노려보면서 월향을 쥐고 있지 않은 손가락 마디 끝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가위에 눌렸을 때는 몸의 가장 끝부분부터 풀어야 한다. 제 발, 제발 풀려 다오. 저놈들이 쓰는 수법이 사람을 가위 눌리게 하는 것과 흡사한 것이라면 좋을 텐데.’
안간힘을 모은 현암의 손끝이 어느 순간 갑자기 움직이기 시 작했다. 심리적인 술수로 최면술과 비슷한 방법을 쓴 것이 분명 했다. 몸에 전기가 퍼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몸이 다시 움직이는 것을 느끼자 현암은 소리를 지르면서 검기가 길게 뻗어 있는 월 향검을 파사신검 제4초식에 따라서 손을 휘저어 무서운 속도로 허공에서 한 바퀴 돌렸다. 회전력을 얻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 월향은 무서운 속도로 가속되어 바퀴처럼 주위를 둥글게 쓸어 나갔고, 눈알을 내밀며 다가오던 드루이드들의 팔목이 월향검의 검기에 의해 우수수 잘려 나갔다. 사방에 고함 소리가 터지고 메아리치면서 흰옷의 영들은 뒤로 물러났다.
현암이 승희와 윌리엄스 신부를 손으로 툭 건드리자 깊은 잠 에서 깨어나듯, 몸을 꿈틀거렸다. 윌리엄스 신부가 “땡큐” 하고 말하면서 십자가를 꺼내어 목소리를 높여 기도를 하기 시작했 다. 기도 소리가 들리자 주변에 있던 손목이 달아난 영들은 몹시 괴로워하는 모습이었다. 월향의 검기에 의해서 잘린 손들은 어 디론가 사라져 버렸지만, 잡고 있던 눈알들은 징그럽게도 허공 을 날아 각자의 눈구멍으로 들어갔다.
월향검을 받아 쥔 현암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길게 검기를 뿜 어 앞에 있던 드루이드들을 옆으로 그었다. 검기에 의해서 두 명 의 영의 허리가 잘리면서 비명 소리가 허공에 퍼지고, 영들은 서 서히 옅어지다가 퍽 하고 사라졌다. 그러자 주변에 둘러서 있던 영들이 소리를 질렀다. 이번만은 어떤 소리를 지르는지 윌리엄 스 신부도 대강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저주의 말을 퍼붓고 있습네다. 조심…….”
윌리엄스 신부가 현암에게 말하는 사이, 윌리엄스 신부가 읊 던 기도에 고통을 받고 있던 드루이드들이 기회를 얻은 듯 전열 을 가다듬고 다시 일행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방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였다. 흰 원통이나 유리 병 속에 갇힌 형국이 되어 버린 세 사람은 바깥쪽을 전혀 볼수 가 없었다.
주변의 공기가 갑자기 빠져나가 진공 상태가 된 듯 숨이 막혀왔고, 짓누르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윌리엄스 신부와 승희가 신음을 냈다. 승희가 안간힘을 써서 정신을 차리고 주저앉아 힘 을 집중하자 현암의 몸에서 뜨끈한 기운이 솟아올랐다.
“야압!”
현암이 기합을 발하면서 드루이드들이 회전하여 만든 흰벽 의 한가운데로 검기가 길게 솟은 월향검을 똑바로 찔러 넣었다. 허공에서 비명과 함성이 들리더니 검기에 부딪혀 허리가 사라져 버렸다. 실내인데도 폭풍우 같은 소용돌이 바람이 주변을 가득 채우며 현암과 윌리엄스 신부, 승희의 머리와 옷자락을 마구 날렸다.
현암이 찔러 넣은 검기에서 간신히 벗어난 서너 명의 영이 벽 쪽으로 도망쳐 가는 모습이 보였으나 현암도 많이 지쳐 있었다. 상황이 일단 정리됐다고 생각한 현암이 그때까지 길게 뻗어 있 던 검기를 거두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막힌 것으로 보였던 복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훤하게 뚫려 있었으며, 역대 왕들 의 초상화도 원상 복귀되어 있었다. 윌리엄스 신부가 손수건을 꺼내어 줄줄 흐르는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드루이드…………… 드루이드들이 아까 했던 말들, 이제 조금씩 생각이 납네다.”
현암에게 힘을 보내어 숨이 찬 승희가 되물었다.
“어떤 것 말씀이죠? 루그, 누아두……. 이것 말인가요?”
윌리엄스 신부가 한국어로 말하기가 힘든 듯,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네, 맞습니다. 그것은 고대 켈트족이 믿던 신들의 이름이지 요. 그리고 비비안이라는 이름은 켈트족의 전설에 나오는 호수 의 여왕 이름일 겁니다.”
승희는 아까 드루이드들이 눈을 빼 들면서 발로르라는 이름을 외쳤던 것이 기억났다.
“발로르……………. 발로르라는 것은 어떤 신을 의미하지요? 이것 도신의 이름 맞나요?”
“예, 발로르는 외눈의 마력으로 적들을 마비시킨다고 하는 신 입니다. 방금 사용한 드루이드 영들의 술수가 바로 그 술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발로르는 원래 드루이드들이 믿던 신들 중에서도 포보르족・・・・・・ . 즉 악신 쪽에 속합니다.”
승희가 반문했다.
“그러면 그 드루이드들은 상당히 악질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자신들이 섬기는 좋은 신 외에 악신까지 빌려서 우리를 상대하 려는 것을 보면 분명 좋은 무리들은 아닐 것 같아요.”
윌리엄스 신부가 중얼거렸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이런 일들을 꾸미 는지 알 수가 없군요.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있으면 좋을 텐데……………다만 흰옷을 입은 드루이드의 영들이었다는 것과, 참혹한 상처가 있었다는 것밖에는 알아낸 것이 없으니.”
“좌우간 이러한 일들을 꾸미는 것이 드루이드의 소행이라는 것은 밝혀졌잖아요? 드루이드의 자취를 가장 강하게 찾을 수 있 는 곳이 영국 내 어딥니까?”
윌리엄스 신부가 승희의 말에 대답했다.
“일단은 스톤헨지지요. 스톤헨지에서 매년 하짓날 신드루이드 의 의식이 열린답니다. 일전에 고든 케사르 씨가 죽은 곳도 그곳 이었잖습니까? 물론 신드루이드들을 의심할 수도 있지만, 신드 루이드는 고대 켈트족의 드루이드교를 심오한 지혜의 소산으 로 이상화하는 교단이라서 이런 무모한 짓을 벌일 수 있는 곳은 아니고…………. 도대체 단서를 잡을 수가 없군요.”
승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암이 말했다. 윌리엄스 신부는 한 국어를 약간 알고 현암도 영어를 조금은 할 줄 알아 듣는 것은 가능하기에 각자 자신의 언어로 말해도 그럭저럭 의사소통은 되 었다.
“그렇다면 살인 사건들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알아보죠? 그리 고 아까 윌리엄스 신부님이 적은 문자도 단서가 될 수 있을 것 같고요. 오늘은 이쯤 해 두고 호텔로 돌아가는 게 어떨까요? 내 일 아침이면 연희 씨가 온다고 하니까요.”
윌리엄스 신부가 말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여기 문제는 해결되었으니 남은 시간 동안 살인 사건에 대한 기록들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언어학의 천재라는 아가씨, 서연희 양을 차분히 기다려 봅시다. 허허.”
셋은 대영 박물관을 걸어 나왔다. 나오면서 윌리엄스 신부가 대영 박물관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원과 다른 사람들에게 일이 해결되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사람들은 초상화가 금세 원상 복귀된 것을 신기해했다. 몇몇은 윌리엄스 신부와 낯선 두 명의 동양인에게 어떤 방법을 썼냐고 질문을 해 댔지만, 아무 대꾸 없 이 윌리엄스 신부의 차를 타고 그곳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