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2권 9화 – 왕은 아발론 섬에 잠들고 9 : 왕의 명령
왕의 명령
“뭔가 좀 알아냈어요. 연희 씨?”
승희가 말하자 연희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수건으로 이 마에 맺힌 땀을 닦고 종이 한 장을 내밀어 보였다. 원래 룬 문자 가 완벽하게 적혀 있지 않았던지 군데군데 빠진 문구가 많았으 나 그런대로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전부 해석한 것은 아니에요. 아직 몇 구절이 남아 있어요. 그 건 더 골치를 싸매야 그나마 해석이 가능할 것 같네요. 룬 문자 는 정말 어려워.”
연희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현암은 연희가 해독한 종이를 들고 찬찬히 읽어 보았다.
피에 쓰러진 자 피를 짚고 일어나……… 다시 찾을 것이며 숲 을 비추는 태양이 큰 돌 위에 밝게 비칠 때 마지막 제물을 바치 면・・・・・・ 이루어지리라………… 의 명에 의해……………
승희가 물었다.
“빈 칸의 의미는 뭐죠?”
연희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룬 문자의 발음법이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도대 체 어떤 것이 맞는지 명확한 학설이 없어서 정확하게 해독하지 는 못하겠어요. 무슨 단어 같기도 하고 사람 이름 같기도 하고 지명 같기도 하고. 애당초 발음에 대한 이론이 정확히 없는 형편 이니 이름이나 보통 명사들의 내용은 알아내기가 어렵지요.”
“그렇군요.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래요? 그러면 다행이고요. 저 사실 몹시 피곤한데 누워서 마저 작업을 해도 괜찮을까요?”
“예, 그렇게 하십시오.”
연희가 나가려다 뭔가 생각났던지 현암과 승희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그런데 두 분은 서로 편하게 말하면서 왜 저에게는 경어를 쓰 죠? 저도 따지고 보면 승희 씨 또래인데.”
심각했던 분위기가 연희의 이 말 한마디로 묘하게 밝아졌다. 승희는 장난스럽게 펄쩍 뛰면서 연희의 말을 맞받아쳤다.
“또래라뇨! 연희 씨는 스물여섯이고, 전 스물넷밖에 안 되었어요!”
연희가 푸 하면서 웃자 현암의 입가에도 절로 미소가 어렸다.
그러나 곧 현암은 지금은 농담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차 편하게 이야기할 때가 있겠지요. 그렇지요?”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들과 종이 뭉치를 한아름 안고 복도 맞은편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현암은 승희와 함께 내용에 대해서 차분히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무슨 내용을 나타낸 것일까?”
“현암군, 뭐 짚이는 것 있어?”
현암이 두뇌를 가동시키기 시작했다.
“글쎄,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자. 드루이드의 영들이 자신들의 비밀을 알려 주려 했을 것 같지는 않아. 그러니 이 내용은 비밀 을 담고 있지는 않을 거라는 말이지. 자, 생각을 해 보자구. 우리 가 대영 박물관에서 맞닥뜨린 영들은 틀림없이 드루이드의 영이 었어. 드루이드는 켈트족이지. 지금 신부님과 준후가 있는 쪽에 출몰하는 기사들의 영이 아더 왕을 받든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켈트족의 기사들일 거야. 색슨족에 의해서 아더 왕이 멸 망한 이후 켈트족은 나라를 빼앗기고 에이레와 스코틀랜드 지방 으로 쫓겨나게 되고.”
현암이 거기까지 이야기하자 윌리엄스 신부가 보충을 했다.
“당시 대대적인 학살이 있었다는 구체적인 기록도 있습니다.”
“아, 그런가요? 어떤 기록이지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윌리엄스 신부가 뒤적거리면서 한 권의 책을 꺼내 자신이 찾 아낸 대목을 둘에게 읽어 주었다. 연희가 룬 문자에 관한 기록을 찾아서 읽는 동안, 윌리엄스 신부는 역사서를 찾아 켈트족의 멸 망에 관한 내용을 읽어 본 모양이었다.
켈트족이 지배하던 시절의 말기, 브리타니아의 추장인 보티건 은 픽트족과 스코트족 외 이방 종족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하여 색슨족에게 원군을 요청하고, 대신 그들의 대장인 헨게스트와 호 르사에게 토지를 제공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브리타니아에 발을 붙이자마자 추장을 배반했고, 더욱 많은 게르 만족의 침공자들이 수비대가 없는 부유한 지방으로 모여들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 418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로마 인은 브리타니아의 모든 재물을 모아 일부는 지하에 감추고 나머 지는 모두 갈리아 지방으로 가져갔다.’
승희가 설명을 약간 덧붙였다.
“그곳이 로마화되었기 때문에 켈트인은 로마인이라 표기된 것 같아.”
“그 밑에 비드 신부라는 연대기 작가가 당시 침공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군요. 건물은 모조리 파괴되고, 사제들은 제단 앞에서 학살되었으며 도망가지 못하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산으로 끌려 가 학살되었다. 나머지는 기아에 못 이겨 항복하거나 그 자리에 서 죽음을 당하거나 노예가 되었다. 일부는 슬픔을 가슴에 안고 바다를 건너 도망쳤다.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은 바위틈과 숲, 산속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당시 켈트 족이 감추어 놓은 듯한 금은보화가 발굴되고 있는데, 이러한 발 견은 모두가 당시의 상태가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파괴된 별장과 가옥에는 화재의 흔적이 역력하고, 출 입구는 황급하게 흙으로 막은 듯 보이며 백골이 즐비했다. 이렇 게 기록되어 있군요.”
현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켈트족이 과거에 당한 수난을 요즘에 되새기는 것이라고 생 각할 수 있겠군. 그러나 여기에서 켈트족이 멸망한 것은 드루이 드들이 쇠락한 것보다는 훨씬 이후의 일인 것 같은데.”
승희가 덧붙였다.
“드루이드들이 로마의 황제의 명에 의하여 몰살된 것은 아마 기원후 1세기경이었을 거야. 그러나 뭐, 드루이드들이 일차적으 로 전멸하고 그다음에는 아예 켈트족을 브리튼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려는 시도가 수 세기 동안 몇 차례 있었지. 그렇게 한 종 족은 색슨족이었고, 켈트족도 어떻게 보면 불쌍한 민족이라고 할 수 있어. 자기의 근거지를 잃어버리고 북방의 산악 지대로 쫓 겨난 셈이니.”
그러나 현암은 승희의 말에 부정적이었다.
“모든 것은 역사에 의한 거고, 다 인과의 법칙을 따르게 되어 있지. 사실 그들도 침략 민족이었잖아. 켈트족 전에 이베리아족 이 있었다며? 이베리아족은 지금 어디 있지? 켈트족이 몰살했기 때문에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은 것 아냐.”
“하긴 그럴 수도 있군.”
“역사는 돌고 도는 법이야. 남의 나라를 침탈한 민족이 잠시 융성은 해도 영구히 번영한 적은 역사상 하나도 없어. 절대로 망 하지 않을 것 같던 로마도 망했고, 그 외에도 많은 제국과 나라 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해 왔지. 그러나 뭐, 그건 내 개인적인 생 각일 뿐이지만 우리 일이나 생각해 보자.”
“흠…….”
피에 쓰러진 자 피를 짚고 일어난다’는 문구는 섬뜩하지 않 아? 앞에 이야기한 켈트족의 고사를 상기해 볼 때, 피 속에 쓰러 진다는 말은 켈트족이 전멸해서 쫓겨간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아. 아니면 켈트족이라기보다 드루이드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도 모르지. 그러나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다음 구절이지.
“다시 찾는다…………. 무슨말일 것 같아?”
윌리엄스 신부가 거의 결론에 가까운 말들을 단번에 내세웠다.
“분명 드루이드들에 대한 말일 겁니다. ‘숲을 비추는 태양’, 이 것은 드루이드 의식과 연관이 있지요. 드루이드는 원래 하지에 의식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요. 어떤 힘을 다시 찾는다는 의미 일 것 같군요.”
승희가 한 구절을 짚었다.
“그리고 ‘큰 돌’이라는 표현, 이것은 무엇일까요? 스톤헨지가
아닐까요?”
“스톤헨지요? 그럴 것 같군요.”
윌리엄스 신부가 뭔가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물론 고대 드루이드가 스톤헨지를 건축했다는 것은 낭설이라 고 알려져 있습니다. 스톤헨지는 그보다도 훨씬 이전에 세워졌 어요. 그러나 드루이드들이 그곳을 회합 장소로 이용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 같습니다. 스톤헨지에는 신비스런 힘이 깃들어 있다고 전해지고 있고, 드루이드들이 그 힘을 운용하는 법을 알 고 있었다고 보는 설도 있지요.”
“그렇다면 ‘태양이 큰 돌 위에 밝게 비칠 때 마지막 제물을 바 치면’이라는 것은 하짓날에 스톤헨지에서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 벌어진다는 것입니까? 그러면 그다음 ‘이루어지리라’라는 구절 은 무엇일까요?”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승희가 화제를 바꾸었다.
“준후에게 들은 바로는 캐드베리 일대에서 출몰해 그 수가 계 속 늘어나고 있는 유령 기사들은 아더 왕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 다는데 혹시 그것과 연관이 있는 구절은 없을까?”
“음, 그렇군. 그 일을 같은 맥락으로 풀어 본다면 이것은 드루 이드와 아더 왕, 두 가지가 얽힌 사연이군. 이 두 가지를 공통적 으로 풀 수 있는 것은 켈트족이겠지. 윤곽이 잡히는 것 같아. 그 래! 분명해. 확실히 블랙서클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어. 그러니 까 블랙서클의 코제트가 드루이드를 부추겨서 저주의 의식을 행 하게 하고 폭주족을 이용하여 제물로 쓸 사람들을 잡았을 거야. 내세운 이유야 뻔하지, 뭐. 켈트족의 부흥이라는 거겠지. 아니면 원한을 갚는다거나…………….”
그러고 보면 모든 일이 하나의 귀결점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영국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의문의 연속 살인 사건은 틀림없 이 어떤 주술에 의해 코제트라는 여자에게 힘을 모아 주려는 것 이 분명했고, 또 캐드베리 일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령 기사들 의 움직임은 아더 왕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런던탑과 대영 박물관에서 일어나고 있는 드루이드의 소행으로 인한 이상한 일들. 이 세 가지는 공통점이 있을 것 같았다. 승희가 다시 물었다.
“우리가 목격했던 대영 박물관이나 런던탑에서 일어난 일들은?”
“글쎄……. 런던탑에서도 그들이 꾸미는 일이 있었을 거야.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런데 베케트의 영이 그 시도를 저지 했다고 볼 수 있지. 박 신부님에게 십자가를 전해 주기도 했잖아. 그리고 대영 박물관에서의 일은…………… 아마도 우리가 전에 짐 작했던 대로 켈트족 이외의 왕권을 부정하는 시위라고 보면 되겠지.”
“코제트는 정말 이름에 대한 주술을 위하여 여섯 건이나 되는 살인을 저지른 것일까?”
승희의 말에 현암은 방금 알아낸 비비안이라는 이름의 내력을 윌리엄스 신부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만, 코제트의 이름이 비비안일지도 모른다고 했지? 윌리엄 스 신부님, 비비안이라는 이름을 아십니까? 아까 언뜻 듣기로는 아더왕 전설에 내려오는 여자라고 하던데요.”
“예, 물론 압니다. 영국 사람들은 거의 다 알고 있지요. 비비안 은 호수의 여왕을 의미합니다.”
“호수의 여왕이요?”
“예. 호수의 여왕 또는 정령이라고도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사 람이라는 게 타당할 것 같아요. 아더를 돕던 대마법사 멀린을 사 랑하여 다른 데 가지 못하도록 자신의 탑 안에 마법으로 감금시 켜 놓았다는 설이 있지요. 멀린은 대마법사였지만 그것만은 뿌 리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비비안은 후에 아더가 중상을 입었을 때 배에 싣고 떠났던 세 명의 여인 중 한 명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승희가 멀린의 이름을 들어 보았는지 끼어들었다.
“멀린은 아더 왕을 도와 성배를 찾는 데 도움을 준 마법사가 아니던가요?”
승희가 묻자 윌리엄스 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그러나 멀린은 기독교를 수호하던 마법사잖아요. 그렇다면 멀린과 드루이드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가능성은 적지 않을까요?”
윌리엄스 신부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모르는 일이지요. 각 나라마다 고유한 풍속과 외래에 서 들어온 풍습은 어느 정도 상호 공존하기 마련이지요. 원래 기 독교에서는 마법의 존재를 사악한 것이라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멀린이 갖가지 이상한 방법으로 아더 왕을 도왔다고 한다면 단순히 멀린이 기독교를 믿었다는 사실을 가리키지는 않 을 겁니다. 다만 그는 왕을 위하여 술수를 행했겠지요. 그게 아 니라면 얼마쯤 기독교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나 생각할 수도 있고요.”
“다만…………… 왕을 위하여 …… 라고요…….”
현암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왕을 위하여라……’
윌리엄스 신부는 현학적인 말투로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멀린이나 비비안이나 고대의 사람들입니다. 브리튼 사람들 이었거나 켈트족이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쓰던 술수는 단 하나, 드루이드의 영향을 받았겠지요. 일설에 의하면 비비안 은 전통적인 고대의 종교, 즉 드루이드교를 상징하는 존재이며 멀린은 기독교에 의해 개화된 신종교 세력을 상징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승희가 윌리엄스 신부의 말에 대한 문제점을 짚어 냈다.
“전설에 의하면 멀린은 힘을 비비안에 의해 봉인당했다면서 요? 그렇다면 그것이 뜻하는 바는 무엇이죠? 드루이드는 멀린이 활약하던 때보다 이미 사백 년 전에 멸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요. 혹시 비비안을 드루이드나 다른 고대 켈트족이 믿는 종교의 대변자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드루이드의 존속을 암암리에 알 려 주는 것일지도・・・・・・ 아, 그러면……”
말을 끊은 승희의 눈이 빛났다. 윌리엄스 신부와 현암이 승희 를 쳐다보았다. 승희의 말은 계속되었다.
“지금 글자로 나타난 비비안은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더구 나 그 여자가 아더 왕이 데리고 떠난 사람들 중 하나였다면 말이죠. 더군다나 대마법사 멀린을 봉인할 정도의 마력을 지닌 여자라면.”
현암이 뭔가 떠오른 듯했다.
“비비안, 아더 왕, 멀린, 드루이드, 켈트족으로 이어지는군. 모 두가 하나의 뿌리를 갖고 있어. 그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승희야, 아까 준후가 유령 기사들의 이야기를 했다지?”
“응, 수가 늘고 있다고 했어.”
“그거야말로 큰일일지 몰라.”
“뭐가? 아직 유령들은 난폭한 행동은 하지 않은 모양이던데?”
“그런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유령들의 숫자가 계속 늘고 있다 는 데 있어. 유령들의 수가 계속 늘고 사라지지 않고 방황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니?”
“아이고! 그러면 뭐야? 현암군, 그러면 유령들이 그렇게 많이 떠돌아다닐 수 있을 거라 믿어?”
현암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왕의 명령・・・・・・ . 그들은 왕의 명령을 받들려고 나온 것이라 했어! 왕의 명령이 계속 확산되면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이거야말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어. 죽은 고대 켈트족의 영들이 모조리 일어난다고 생각해 봐.”
승희도 생각을 고쳐먹었다. 퇴마사들은 여태까지 악령이나 초 자연적인 존재와 수없이 싸워 오면서 상당히 둔감해져 있었다. 그냥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유령 정도는 그들에게 별것이 아 니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다르다. 집 안에 유령이 불쑥 나타나고 유령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닌다면? 그 광경에 태연히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윌리엄스 신부도 얼굴이 해쓱해졌다.
답답해진 승희는 세크메트의 눈을 꺼내 통신을 해 보려 했으 나 준후와 박 신부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통신이 되지 않았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윌리엄스 신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제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군 요. 왕의 기사의 유령들은 나타나고 살인 사건도 계속될 것 같고.”
현암이 단안(案)을 내렸다.
“더 이상의 희생자가 생기는 것을 막는 것이 급할 것 같습니 다. 일단은 승희야, 네가 그 폭주족 두목을 투시해 봐. 뭔가 잡힐 것 같아.”
코제트라는 여자가 마지막 제물이 될 사람을 폭주족에게 요 구하고 있다면, 놈들은 분명 빠른 시간 내에 희생될 사람을 잡아 코제트에게 넘겨주려고 할 것이고, 놈들을 추적하면 코제트가 어디 숨어 있는지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다가는 자칫 놈들이 사람을 살해하는 것을 막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현암이 여기까지 말하자 승희가 해결책을 제시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때? 내가 투시를 계속하면서 놈들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고 미행하는 거야. 그러면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놈들의 악행을 막을 수 있고, 운이 좋으면 코제트라는 여자와 드루이드의 일당까지 한꺼번에 잡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윌리엄스 신부가 말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경찰에게 알릴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제가 이 사건의 담당자를 잘 알고 있고, 그 사 람도 저를 믿고 있으니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그런데 연희 씨는 어떻게 하지?”
승희가 난처한 듯 묻는데 마침 연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이야기중이었나요? 저를 어떻게 하다니요?”
연희는 여전히 장난스러운 태도로 큰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현암은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간략히 연희에게 말해 주었다. 일 행의 의견에 연희도 수긍했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뒷부분의 문구를 이제야 해독했어요. 후후후.”
연희가 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아까의 룬 문자를 모 두 해석한 내용이 씌어 있었다.
피에 쓰러진 자 피를 짚고 일어나 잊힌 것들을 다시 찾을 것이 며, 숲을 비추는 태양이 큰 돌 위에 밝게 비칠 때 마지막 제물을 바치면 왕의 소원이 이루어지리라. 검과 지팡이와 호수의 명에 의해…….
준후와 박 신부는 대단히 난처한, 속수무책의 지경에 빠져 있 었다. 캐드베리 일대를 점령하다시피 한 유령 기사들 때문이었 다. 처음에 열 명 정도였던 유령 기사 무리는 수가 점점 늘어나 하루사이에 백을 헤아리는 숫자로 늘어났고, 그 무리도 여러 갈 래로 갈라져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캐드베리 일대의 주민 들은 공포에 질려서 마을을 떠나갔고, 혼란을 우려한 경찰들은 외부에서 캐드베리로의 진입을 차단했다. 난데없는 유령 소동은 매스컴에까지 알려졌으나, 경찰의 결사적인 저지로 기자들은 들어오지 못했다.
영국 정부의 입장도 대단히 난처해 보였다. 만약 떠돌아다니 는 유령 군대, 그것도 대낮에 버젓이 대로를 활보하는 유령들이 공공연히 매스컴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여파는 걷잡을 수 없었 다. 일부 사람들은 유령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기도 했지만, 대부 분의 경우는 유령을 보자마자 까무러치거나 놀라서 달아날 것이 고 유령들이 돌아다니는 마을은 황폐화될 것이 분명했다.
사태가 확산되자 이제는 경찰들이 무리 지어서 마을 일대를 요소요소 경비하고 있었다. 경찰들은 다가오는 유령 기사들을 향해 총을 쏘기도 했고, 대화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아무 반응 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영력이 없는 사람들이 영들과 대화 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행히 경찰들의 공격적인 행위에도 유령들은 놀라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직접 피해를 끼치지도 않았다. 그냥 건물을 뚫고 지나가서 반대쪽으로 나오 거나 무리를 지어 돌아다닐 뿐이었다.
경찰들이 경비를 시작하자 박 신부와 준후, 그리고 월터 보울 이 곤란해졌다. 경찰은 외부인을 속히 이 지역에서 소개(시 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고, 더군다나 외국인인 박 신부와 준후에게 이러한 광경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다. 유령들과 제대 로 접촉하지도 못하고 경찰들을 피해 다니는 처지가 된 것이다. 유령들과 접촉을 하려고 하면 반드시 경찰들이 나타났고, 경찰 들은 일행을 유령들의 손에서 구한다는 명목으로 외부로 내보내 려고 했다.
일행은 벌써 두 번이나 유령 기사와 대화를 시도하다가 경찰 에 잡혔고, 아무도 월터 보울이나 박 신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중이떠중이들이 오만가지 핑계를 늘 어놓으며 현장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기 때문에, 경찰들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사건이 수습될 때까지 모든 사람들을 소개시 키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이거 무슨 신세인지 모르겠군요. 하루아침에 유령들이 이렇 게 늘어나고, 우리는 쫓기는 상황이 되어 버리다니. 하하하.”
텅빈 식당의 이층 테이블에 걸터앉아 월터 보울이 맥 빠진 표 정으로 힘없이 웃었다. 일행은 유령 기사를 몇 번 만나기는 했지만, 경찰들의 방해 때문에 다시 이야기를 나눠 볼 기회는 없었 다. 박 신부나 준후는 최선을 다하여 사건의 실마리를 찾으려 애 써 보았지만, 이렇게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니 힘을 쓸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뭔가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도대체 아더 왕이 무슨 목적으로 유령 기사들을 끌어모으려는지. 이 일들은 분명 드루 이드와 블랙서클과도 연관이 있을 겁니다. 아까 현암 군과 승희 가 알아낸 것을 보아도 틀림없지요. 문제는 이들이 어떤 짓을 한 것인지, 무엇 때문에 죽은 자의 유령들이 이곳에 모여드는 것인 지에 있습니다. 그것만 알아낸다면.”
박신부가 말을 잇는 사이, 부근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경찰들이 유령을 향하여 총을 쏘고 있었다. 준후가 안타까워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점점 더 짙어지는 길 저편 안개 속에서 십여 명쯤 되는 일단의 유령 기사들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데 희한하게도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말굽 소리는 들려왔다. 순찰을 돌던 네댓 명의 경찰들이 저지하려 했으나, 유령 기사들은 말을 달려서 경찰의 머리를 훌쩍 뛰어넘더니 안개 속으로 사 라져 갔다.
경찰들이 부산스럽게 무전기로 보고를 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아마 이런 보고가 이미 수천 건도 넘었을 것이고, 본부에 서도 이 대책 없는 사태에 골머리를 앓고 있을 것이다.
사실 박 신부나 준후로서도 뚜렷한 대책은 없었다. 유령이 한 정되어 있다면 주술을 써서 대처할 수 있었겠지만, 계속 숫자가 늘어가는 유령들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었다. 어젯밤에 마주친 유령 기사의 검은 분명 사람에게도 위력을 보이지 않았던가. 몇 몇 유령을 섣불리 건드렸다가 분노를 사서 사람들을 공격이라도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유령들에 대해 전혀 방어를 할 수가 없지만 유령들은 주술력이 깃든 무기로 사 람을 해칠 수도 있었다.
결국 방법은 유령들이 저렇게 돌아다니는 자세한 이유를 알아 내는 것뿐이었다. 그들을 쉬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지 않는다면 일은 걷잡을 수 없어질지도 몰랐다.
박신부는 안타까움에 이를 악물었다. 박 신부의 몸 안에서 고 요한 울림이 전해져 왔다. 베케트의 염원이 깃들어 있는 십자가 에서 느껴지는 울림이었다. 이 십자가가 왜 지금 우는 것일까? 알려 줄 것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박 신부의 머리를 스쳤다.
“준후야, 잠깐만! 뭔가 느껴지지 않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준후가 박 신부의 말을 듣고 의아한 표 정을 지었다. 그러나 박 신부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느낌이 왔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
“바로 이 건물 안에 영이 있어요! 아래층 같아요!”
준후의 외침에 박 신부가 몸을 일으켰다. 순시중인 경찰들에게 노출되지 않고 영과의 대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서둘러야 했다.
“준후야, 가자!”
박 신부와 준후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몸을 돌렸고 월터 보울이 뒤를 따랐다.
“잊힌 것을 다시 찾는다? 그리고 왕의 소원?”
승희는 연희가 번역한 글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윌리엄스 신 부가 흥분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검과 지팡이와 호수, 검은 분명 왕을 상징합니다. 아더왕의 무기는 신검인 엑스칼리버였지요. 지팡이라면 아마도 멀린, 늙 은 마법사인 멀린을 상징할 겁니다. 그리고 호수는 호수의 여왕 인 비비안입니다!”
현암의 얼굴이 굳어졌다.
“잊힌 것들은 무엇일까? 잃어버린 켈트족의 왕국? 왕권? 숨겨진비밀의 마법?”
현암의 물음에 연희가 대답했다.
“알 수 없지요. 뒷부분의 왕의 소원과 관련 있지 않을까요? 왕이 바랐던 것은 무엇일까요?”
아무도 말이 없었다. 정확한 내용을 알 수는 없었으나 분명 가장 중요한 것임은 틀림없었다. 현암이 고개를 돌려 문을 가리켰다.
“차차 알게 되겠지. 일단은 가보자구.”
“어디로요?”
연희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물었다.
“폭주족을 추적하러 가는 거예요. 위험할지도 모르니 연희 씨는 안 가도 돼요. 그렇지, 현암군?”
“음, 위험한 일이라구요? 그러면 당연히 저도 가야죠!”
예기치 않은 말에 일행은 연희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집중되 어 쑥스러웠는지 연희가 장난스럽게 말을 돌렸다.
“아니, 그러면 내가 룬 문자나 해석하려고 여기 왔단 말이에 요? 애당초 따돌릴 거면 왜 불렀어요? 뭣하면 나중에 장례라도 치러 달라는 말인가요?”
미소 짓는 연희의 커다랗고 검은 눈을 보자 현암조차 저절로 미소가 배어 나왔다. 현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승희도 씨익 웃었다.
“좋아요, 언니. 하지만 잘해야 해요?”
“후후후. 그래, 승희야!”
연희는 웃으면서 승희의 어깨를 탁 치고는 제일 먼저 방을 나섰다. 윌리엄스 신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연희의 뒤를 따랐고, 현암과 승희도 어깨를 으쓱하면서 방을 나섰다.
“저기요, 신부님!”
준후가 계단을 내려오는 박 신부에게 손짓을 했다. 식당의 일 층 마룻바닥에서 유령 기사 하나가 서서히 솟아 올라오고 있었 다. 큰 체격에 빛나는 투구를 쓰고 커다란 철판 방패와 작살처럼 생긴 창을 들고 있었다. 박 신부 품속의 베케트 십자가가 계속 울렸고, 그에 맞추어서 박 신부의 몸에서 오라가 일어났다.
박 신부는 준후와 함께 천천히 걸어 나가 기사의 앞에 섰다. 유령기사도 흠칫하는 표정이었다. 준후를 통해 유령 기사의 목 소리가 울려왔다.
당신은 누구요? 어찌하여 그런 놀라운 모습으로 내 앞에 서는 것이오?
주님의 이름으로 묻는다. 기사여, 그대는 어찌하여 평안히 쉬지 않고 죽은 자의 몸으로 일어나 무엇을 하려 하는가?
유령기사의 당황스러움이 전해졌는지 그가 타고 있는 유령
말이 진저리를 쳤다.
나는 왕의 부름을 받았소. 모든 왕의 기사들은 왕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소.
왕이라면 그대들의 군주 아더를 말하는가?
그렇소.
왕이 그대들을 부르기로 약속하였는가?
아더왕께서는 돌아온다고 약속하고 떠났소. 남은 우리는 왕을 기다 리며 싸우다가 하나씩 죽어 갔소. 그래도 우리는 왕이 돌아오실 것을 돌아오셔서 브리튼을 지배하실 것을 믿소. 그래서 차가운 땅속에서 기 다리고 있었소. 오랫동안 기다려 왔소.
아더왕이 그대들을 불렀단 말인가? 아더 왕은 어디에 있는가? 아더왕이 직접 부른 것은 아니오. 멀린의 목소리가 나를 깨웠소. 멀린은 우리를 아더왕과 떨어질 수 없도록 엮어 놓았소. 멀린의 목소리가 내 잠을 깨웠소.
박 신부의 눈이 빛났다. 왕의 기사들이 어째서 모여드는 것인 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아더 왕의 마법사인 멀린은 주술을 사 용하여 기사들의 영을 아더 왕과 일치시켜 놓은 것이 틀림없었 다. 그리고 색슨족과의 치열한 전투중에 아더 왕은 중상을 입었 고, 돌아온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기사들은 왕의 말을 믿고 전투를 수행하다가 전사했고, 왕의 명령을 지키려는 마음과 멀 린의 주술의 영향으로 영이 그대로 못 박혀 버린 듯했다. 그랬다 가 지금 부름을 받고 땅속에서 몸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아더왕이 무슨 명령을 내렸는가?
아직 왕의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소. 다만 왕의 밑으로 모이라는 멀린의 명령이 들렸을 뿐이오. 나도 가야 하오.
아더왕이 직접 명을 내린 것이 아니란 말인가?
멀린의 소환이오. 아더 왕의 명령이 곧 내려질 것이라 말했소.
박 신부가 입술을 깨물었다. 기사들을 불러일으킨 것은 멀린 의 주술이지 아더 왕의 명령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멀린이 아더 왕의 이름을 빌려 명령을 내리고 있다고 보아야 하나? 박 신부는 그렇게 단정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련의 사건들로 보아 드루이드들이 멀린의 주술을 익혀서 왕의 기사들을 불러냈다는 가정이 더 타당성 있어 보였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아직 왕이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유령 기사들은 모이라는 것 외에는 다른 명령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모인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도 모르오. 그러나 왕은 브리튼의 지배자요.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위해 싸워야 하오.
그대들은 죽은 자다. 이제 와서 왕권과 영광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유령 기사는 슬픈 듯이 박 신부의 얼굴과 몸에서 비추어 나오는 오라를 바라보았다.
당신에게서는 성스러운 기운이 보이는구려. 나도 이제는 쉬고 싶소. 하지만 나는 맹세를 한 몸이오. 명예로운 기사로서 내가 한 맹세는 지켜 야만 하오. 동료들도 모두 맹세를 지킬 것이고 왕의 명령이 떨어지면 무 슨 일이든 할 것이오. 해내고야 말 것이오.
하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소. 동료들이 기다리오.
유령 기사는 더 이상 박 신부의 설득을 듣지 않고 홀연히 말을 달렸고 물이 스며들듯 벽을 투과하여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