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외전 11화 – 보이지 않는 적 5 : 증오를 먹는 자

퇴마록 외전 11화 – 보이지 않는 적 5 : 증오를 먹는 자


증오를 먹는 자

“그런 악령이라면 제가 못 느꼈을 리 없어요.”

준후가 항변하자 박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그놈이 몸을 숨겼는지도 모르지. 준후 너는 섭리를 어긴 일그러진 영혼의 기운만 느낀다고 했잖니.”

“그렇다면 그놈이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말씀이세요?”

“모르겠어. 이렇게 거대한 존재라면, 이건 내가 생각했던 그냥 악 령 차원이 아닐지도 몰라. 만약 자연의 질서조차 거스를 수 있는 신 이라면? 지옥 그 자체라면?”

박신부가 암담한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감싸 쥐었고 준후 의 낯빛도 질렸다. 현암도 두려웠지만 그래도 필사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만약 박 신부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이건 상대할 수 있는 존 재가 아니다. 그러나 오히려 준후는 철모르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상대가 악신이나 지옥 그 자체라고 해도 저는 싸울 거예요.”

“준후야. 너는 나서면 안 돼. 이건 정말 심각한 일이다.”

그러면서 현암은 박 신부에게 말했다.

“신부님이 걱정하시는 게 뭔지 저도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 저도 솔직히 떨리네요. 하지만 아직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 아직 속단할 수는 없지. 어떻게든 놈의 흔적을 찾아야………… 아니, 그러나 이건, 이건 찾고 말고 할 것도 없는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냐. 아무래도 지나치게 생각한 것 같아. 만약 놈이 그렇게 강대 한 존재라면 수십 년 동안 나를 그냥 놔두었을 리가 없지 않나?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박신부는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놈의 몸뚱이 위에 앉아서 여태까지 살아온 셈인데.”

거기까지 말하는 순간 갑자기 현암이 여태까지 두들기고 있던 단말기 화면이 ‘퍽’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 그리고 거기서 깨어져 나온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이 세 사람을 덮쳐 왔다. 현암은 순간적으로 공력을 올려 오른팔을 보호하면서 팔로 준후와 박 신부를 감싸려고 했다. 준후는 이런 경우에 대처할 수 있는 술법을 수십 가지나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벌어진 일에 너무도 놀라 주춤하기만 할 뿐 대처하 지 못했다. 그때 박 신부의 몸에서 연녹색의 오라가 둥글게 피어올 라 세 사람을 거대한 빛의 막 안에 가두듯 퍼졌다. 쏟아져 들어오던 유리 조각들은 박 신부의 오라에 걸려 ‘파스’ 하고 허공 속에서 사 라져 갔다. 박 신부는 분명히 들었다. ‘우후훗’ 하고 사라지는 웃음소 리. 느낌이 아닌 소리였다. 박 신부로서는 절대 잊을 수 없는, 차갑고 도 이죽거리는 듯한 음성……………

“들었나?”

박신부가 말했으나 현암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현암은 기습보다 박 신부의 오라가 이렇게 넓게 퍼져 나가는 것을 보고 더 놀랐다.

“저는 전혀…….”

그러자 깜짝 놀란 듯 얼굴이 새하얘진 준후가 떨면서 말했다.

“전 들었어요!”

“뭐라고? 준후야, 정말이니?”

“네, 들었어요. 그것, 분명히 비웃었죠? 신부님을 비웃었어요.”

“후…….”

박 신부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현암도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뒤를 따르려 했다.

“확인하고 말고도 없군.”

준후도 두려운 듯 울먹였다.

“분명히 놈은 신부님을 노리고 있었어요. 그쪽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어요.”

어지간해서는 악령이 나타났다고 놀라거나 겁먹을 준후가 아니 다. 그러나 방금 들은 대화대로라면 무서운 일이었다. 온 나라에 퍼 져 있다는, 어쩌면 지상 전체에 퍼져 있을지도 모르는 거대한 존재. 더구나 그놈은 항상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고, 그럼에도 누구도 깨닫 지 못했다.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준후는 두려워 떨었지만 박 신부는 숙연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대가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 또한 그대를 들여다보리니……………. 이런 말 아나, 현암군?”

“니체군요.”

“그래. 똑같이 놈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내가 놈이라는 걸 알아 챈 순간 비로소 움직인 거야. 한때 성직에 몸을 담았던 사람으로 개 인적인 복수심을 입에 올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 나는……………”

박 신부는 쓴웃음을 지었지만 눈에서는 불꽃이 튀는 듯했다. 그러자 현암은 착 가라앉은 긴장된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

“신부님, 전 같이 갑니다.”

“놈이 노리는 건 나야.”

“상관없습니다. 제가 노리는 건 그놈이니까요.”

현암이 말하자 박 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현암이 몸을 일으키자 준후도 화가 나서 외쳤다.

“저도 함께 갈 거예요!”

그러자 항상 인자한 태도를 잃지 않던 박 신부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날카롭고도 엄한 음성으로 말했다.

“안 돼!”

놀란 준후는 그 자리에 굳은 듯 덜컥 멈춰 버렸다. 두 사람은 목표도 없이 무작정 집 밖으로 나섰다. 집을 나서자 현암이 말했다.

“어디로 갈까요?”

“아무 데나.”

박 신부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디로 가든 상관없지 않겠나. 그놈은 어디에나 있는데……”

그때까지도 현암은 냉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몇 가지 요소가 들어맞지 않았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현암이 입을 열었다.

“신부님?”

“왜 그러나, 현암 군.”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그놈의 느낌을 조금 더 구체적 으로 감지할 수는 없겠습니까? 우리 중에서 놈의 느낌을 알 수 있는 건 신부님밖에 없잖아요.”

“이미 느끼고 있네. 방금 말했잖아. 이제는 놈이 틀림없다는 것도 확인했고, 내가 발 딛는 땅 전체, 아니 우리나라 전체에 퍼져 있을 만 큼 거대한 놈이라는 것도.”

“그게 말입니다.”

현암은 거기서 날카롭게 박 신부의 말을 끊었다.

“신부님은 분명 기운이 아주 미약하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약 하다면 넓은 곳에 퍼져 있더라도 실제 밀도가 낮을 터이니 하나로 합쳐도 그렇게까지 무서운 대상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또 그 렇게 넓게 퍼져 있어야만 되는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고요.”

“무슨 말인가, 현암 군?”

“저도 확신하는 건 아닙니다만・・・・・・ 조금 아까 공격을 보고 느꼈 습니다. 그놈이 정말 우리나라를 뒤덮을 정도로 큰 놈이고 더구나 항상 신부님을 들여다보고 관찰하고 있었다면 정말 그 정도 수준의 공격으로 끝냈을까요?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거대한 적이라면 이산 을 송두리째 엎어 버리지 않았을까요?”

현암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박 신부도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현암군, 자네 말은 상대가 넓게 퍼져 있기는 하되 그렇 게까지 두려운 존재는 아닐 수도 있단 말인가?”

“두려운 존재가 아닌 정도가 아니라 어찌 보면 놈의 약점인지도 모릅니다. 단말기를 터뜨린 놈의 공격이 그렇게 위협적이었습니까? 오히려 신부님께서 옛날에 파문당하실 때, 옛 기억을 되돌려서 죄송 합니다만, 그때에도 놈은 별 힘을 쓰지 못했다면서요? 또 놈이 여태 까지 보고 있었다고는 해도 특별히 강한 기운을 느끼게 하지는 못했 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리고 저는 내내 마음에 걸렸어요. 그 할머님의 집 말입니다.”

“그 집이 왜?”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기운이 신부님이 알고 있는 그놈의 기운이라고 치더라도, 왜 유독 할머니의 집에서만 강하게 느껴졌는지는 아직 설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라는 것은 없어 요. 그러니…….”

그 순간 박 신부가 눈을 크게 떴다.

“단말기!”

“네?”

“단말기 말이야! 기억하나, 현암 군? 그 할머니의 집에도 단말기가 있었어. 전화 요금! 전화 요금 고지서 기억 안 나나?”

“당연히 기억납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그리고 우리 집에도 단말기가 있었잖나.”

“물론 있었죠. 그걸 통해서 놈이 공격을…………….”

그제야 현암도 느낌이 왔다.

“신부님, 그렇다면 놈이 이용하는 건……?”

“나도 이게 말이 되는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놈이 단말기를 통해서 힘을 연결하고 뭔가를 소통하고 있다면……?”

현암이 고개를 저었다.

“그놈은 악령인데………… 악령이 기계를 이용한다고요?”

박신부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물론 악령이 기계를 만들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사람이 이용하는 것은 악령도 모두 이용한다네. 방금도 높은 단말기를 폭발시켜서 우 리를 공격했어. 악령이 물리력을 써서 돌이나 물체를 움직일 수 있 고, 땅속이나 나뭇가지 속으로도 돌아다닐 수 있다면, 단말기를 움 직이거나 단말기 회선을 이용하지 말라는 법은 없잖은가? 상상 속에서 주술이나 악령은 무조건 고대의 것이고, 배경도 고대가 되는 경우가 많으니 머릿속 상상으로 현대적 문명의 이기와 조합을 떠올리 기는 쉽지 않겠지. 그러나 그건 실제로는 아무 상관없어!”

현암의 머릿속에서 비로소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원인 없는 결 과는 없다. 아무것도 없던 할머니의 집, 그리고 단말기. 넓게 퍼진 전화망…….

“놈의 기운이 널리 퍼져 있는 이유는 단말기를 연결하는 전화선이 넓게 퍼져 있기 때문일까요?”

“그렇게 볼 수 있겠군. 분명 단말기야. 그렇다면 놈이 하필 오늘에 야 나에게 나타난 것도 해석이 돼. 단말기를 집에 들여놓은 것이 오 늘이니까!”

“할머니의 집에서 놈의 기운이 조금 더 강하게 느껴진 것도 설명 이 되겠군요. 그 집에도 단말기가 있었으니까요. 허나 대체 왜 그 집 에서만 기운이・・・・・・ 그놈이 나타나지도 않았었는데…..” 

그때 박 신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증오!”

“증오요?”

“그래, 증오, 현암 군. 자네 악령이 힘을 얻는 게 무엇을 통해서인지 아나?”

“글쎄요.”

“증오심, 미움, 그런 악을 통해서, 정확하게 말해서는 그 악을 통 해서 발산되는 에너지를 얻는 거야. 꼭 이런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 지만 대부분 음의 존재들은 비슷한 음의 에너지를 좋아하지. 그래서 악마가 인간을 타락시킨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악령이 사람을 홀려서 악행을 하게 만든다는 전설도 이루어진 건지 몰라.”

“그런데 단말기가 무슨…………….”

“잊었나, 현암 군. 통신에 접속하여 할머니가 쓴 글을 본 게 자네잖아.”

현암의 머릿속에서 마지막 퍼즐이 맞추어졌다. PC 통신을 좋아하 는 할머니는 엄청난 욕쟁이에 남을 비난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었다. 분명 아까 박 신부가 말했다. 이유 없이 남을 비난하고 헐뜯 는 일은 비난을 당하는 피해자보다 비난을 행하는 사람의 정신을 좀 먹어 들어간다고. 그렇다면 이유 없는 비난과 악의의 행동에 의해서 악령이 힘을 모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악령이 문명의 이기를 사 용한다는 것을 현암은 도무지 믿을 수 없었지만 그렇게 말하면 설명 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박 신부가 느끼는 영적인 기운이 전국 방 방곡곡에 뻗어 있다는 것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박신부가 이를 갈았다.

“놈은 증오를 먹는 거였어. 내가 느낀 것도 영기가 아니라 바로 그 런 증오의 감정일 뿐이었어. 이유 없고 무분별한 증오심・・・・・・ . 아, 나 는 그게 영의 기운이라 생각했었는데 수련 다시 해야겠군.”

현암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박 신부가 영을 느낀 것보다 그런 감정의 흐름을 잡아낸다는 게 더욱 놀라웠다. 아예 이 건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경지였다. 영기를 느끼는 것도 놀랍지만 이런 추상적 흐름을 잡아낼 정도라면, 어쩌면 박 신부는 자신은 물 론 준후보다 훨씬 높은 경지에 올라 있는 것은 아닐지………….

허나 박 신부는 현암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채 분노로 떨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렇게 증오와 악의로 똘똘 뭉친 놈이기에 그런 짓을……”

높은 비난의 에너지, 음의 에너지라고 환산되는 그 증오와 비난 의 감정을 단말기와 통신망을 통해 끌어모으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 고 퇴마사들이 단말기를 들여오자 그것을 통해 박 신부가 여전히 자 신을 추적하는 중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능력을 발휘해서 겁을 주려 했고 그런 시도는 성공할 뻔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준후조차 덜 덜 떨지 않았던가? 겁을 주어 자신을 추적하는 것을 단념하게 할 생 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굳이 공격을 가한 것이리라. 그러나 교활하기 짝이 없는 ‘그놈’도 실수한 것이 있다. 현암과 박 신부가 두 려움 없이 나서서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자기를 찾을 줄은, 그리고 이렇게 빨리 진실에 접근할 줄은 몰랐을지도…………….

“신부님.”

현암이 말했다.

“그럼 우리가 할 일은 당연합니다. 하나뿐입니다. 신부님이 애써주셔야겠습니다.”

“당연하지. 내가 뭘 하면 되겠는가. 우선 놈을 찾아야 되는데.”

“방향을 잡으세요.”

“방향?”

“놈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신부님뿐입니다. 그 이유가 어 떻게 되었든 간에요. 그렇다면 만약 놈이 단말기를 통해 사람들이 터뜨리는 증오와 악의를 흡수하고 있다면 분명 어디론가 그게 전달될 거 아닙니까. 그 증오와 악의의 흔적을 신부님이 느끼시는 거라 면 방향성도 느끼실 수 있을 거 아니에요?”

“그래, 그게 모이는 방향을 찾아 추적하면 놈을 잡을 수 있겠군.”

“맞습니다. 그러니 어서요.”

“글쎄, 잘될지 모르겠지만 해 보겠네.”

박신부는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런 데 그 순간, 박 신부의 집 한 켠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며 굉장한 불 꽃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제야 두 사람은 준후를 집 안에 남겨 두고 나왔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망가졌지만 집 안에는 단말기도 있었다. 놈이 박 신부만 노리고 있을 거라는 건 너무 안이한 생각이 었다.

“준후야!”

현암이 외치면서 집 쪽으로 달려갔다. 박 신부도 급히 몸을 일으켰 는데, 현암은 다급한 나머지 아예 허리를 굽히더니 오른팔에 공력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 땅을 후려쳤다. 현암이 현재까지 익힌 태극기공 중에서 최강의 술수인 ”자결을 발휘한 것이다. 저 멀리 집에서 터진 폭음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굉음이 울리고 땅이 움푹 패었다. 그리고 반동을 받은 현암의 몸은 새처럼 허공을 훌쩍 뛰어넘어 단숨 에 박 신부의 집 담장 너머로 떨어져 내렸다. 단순하고, 무식하기 짝 이 없으며 위험했지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박 신부는 현암의 무지무지한 공력에 기가 질렸지만 곧 있는 힘을 다해 집 쪽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러다가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방금 집에서 터져 나온 불덩어리 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떤 폭발에 의해 터져 나온 불덩 어리인 줄 알았는데,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방향을 바꾸는 것을 보 니 그게 아니었다. 그리고 수백 개에 달하는 불덩어리들은 새 떼처 럼 박 신부 쪽을 항하여 모여들었다.

‘그놈이?’

박신부는 오라를 순식간에 끌어 올려 방어 태세를 갖추었지만, 불 꽃들에게서 적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불덩어리들은 박 신 부의 머리 위에 한데 모여들었다. 횃불만큼 크고 밝은 불덩어리 수 백 개가 반딧불 무리처럼 허공을 빙빙 돌며 하나로 합쳐지는 광경 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러나 불덩어리들이 한데 내리꽂히거나 움 직인다면 통째로 집을 날려 버리거나 태워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덩어리는 박 신부의 머리 위를 빙빙 돌기만 할 뿐, 공격을 하지 않았다. 박 신부가 자세히 올려다보니 불덩어리들 의 중심에는 네모진 종이 같은 것들이 있었다. 어지럽게 움직이는데 다 불빛에 숨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언뜻 보기에는 노란 바탕 에 붉은 무늬가 그려진, 준후가 주로 사용하는 부적들 같았다. 박 신부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럼 저게………… 악령이 아니고 준후가 불러낸 건가?”

박 신부가 멍하니 중얼거리는데 저만치에서 현암이 준후를 업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박 신부는 놀라서 외쳤다.

“준후야! 괜찮니?”

현암의 어깨 위로 얼굴을 내밀며 준후가 외쳤다.

“신부님! 쫓으세요!” 현암도 외쳤다.

“놈입니다! 놈이 준후를 덮치려다가 한 방 먹었어요! 도망치고 있으니 이 기회에 잡아야 합니다!”

“놈이 어디 있는데?”

그러자 준후가 아예 현암의 어깨를 짚고 일어서다시피 하며 소리쳤다.

“저걸 따라가세요!”

말하면서 준후가 양손으로 수인을 맺자 현암이 얼른 몸을 잡아 받 쳤다. 준후가 우아하고도 아름답게 기묘한 손동작을 하자, 박 신부 의 머리 위를 맴돌던 불덩이들이 한데 모여 커다란 불덩이를 이루었 다가 다시 겹겹이 겹치면서 조그마한, 그러나 굉장히 밝은 백열하는 불꽃으로 변했다. 희고 눈부신 불덩이는 쏜살같이 어느 방향을 향해 날아갔다. 부적으로 만들어진 불덩이가 방향을 인도하는 것임을 깨 달은 박 신부가 뒤를 따랐다. 현암도 도우려고 왼팔을 들어 월향검 을 날리려 했으나 준후가 말렸다.

“현암 형, 잠깐만요.”

“왜?”

“저건・・・・・・ 신부님께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현암도 그 말이 옳은 것 같았지만 그래도 박 신부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신부님이………….”

준후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저놈, 정말 별거 아니더라고요. 단말기에서 튀어나왔을 땐 저도 긴장했는데………….. 정말 문제없어요. 장담한다니까요. 아, 아까워.”

준후가 입맛을 다시자 현암은 왼팔을 도로 내리며 물었다.

“뭐가 아까워?”

“아, 아까 우리나라 전체에 퍼져 있느니 신이니 지옥이니 해서 겁먹었다고요! 그래서 부적을………… 사………… 삼백 장이나…… 으으…………… 가진 거 다 날렸는데……..”

“그래. 굉장하더구나.”

준후는 버럭 성질을 냈다.

“그게 아니라구욧! 부적 한 장으로 될 놈인데 가진 걸 전부 날렸으니・・・・・・ . 부적 하나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세요?”

“아주 여유 있는 소리를 하는구나.”

“그게 아니라 정말・・・・・・ 영력으로 따지면 저건 정말 별것 아닌 놈이라고요. 장난으로도 잡겠다. 그런데 삼백 장이나 준후가 여전히 툴툴거렸지만 현암은 말했다.

“그래. 증오라는 건 얼핏 강해 보이지만, 실제는 아주 약해 빠진거지. 더구나 목적도 분별도 없는 증오는.”

“무슨 소리예요?”

현암은 훗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준후 너, 언제까지 업혀 있을 거야? 다친 데도 없으면서.”

“누가 업히고 싶어 업혔나. 다짜고짜 업었으면서…..”

준후가 투덜대며 내리자 현암은 비로소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아 픈 듯 얼굴을 찡그렸다.

“야야, 정말 공연히 다친 건 나다. 이렇게 날아서 떨어지면 아무리 나라도 온전할 것 같아?”

“하긴, 많이 아파요?”

“나 죽으면 네 탓이다.”

“원참. 세상에 그렇게 무식하게 몸 굴리는 법이 어디 있어요? 거참. 사람의 힘으로 그런 게 정말 가능한 줄은…….”

“유도 미사일 같은 불덩어리 부적을 삼백 장씩 날리는 건 사람 같고?”

“아, 부적 이야기 하지 말라니까요! 아까워서 눈물날것 같은데………….” 

그때 저편에서 부적의 불꽃이 아름답게 펑 터지며 사그라지는 것 이 보였다. 준후가 말했다.

“끝났네요.”

“그래, 신부님 마음이 풀리셨어야 하는데…”

생각하던 현암은 다른 생각을 했다.

‘그놈이 정말 소멸되었을까? 아니, 애당초 신부님은 증오심을 쫓 은 거였고 높은 증오를 먹고 크는 괴물이었으니 애당초 악령이 아니 었는지도…….’

그편이 더 말이 되는 것 같았다. 정말 악령이었으면 월향을 통한 자신의 투시나 준후의 감지에 걸리지 않았을까? 놈이 박 신부의 상 상대로 증오심을 먹고 커지는 존재라면 그것은 악령이 아니라 증오 심 자체가 아닐까? 많은 인간들의 이유없고 분별없는 증오심과 악 의가 뭉쳐서 생긴, 악령도 영혼도 아니라 할 수 있는 어떤 다른……. 

‘그러면 그게 바로 기적이게? 인간이 만들어 낸 최초의 다른 생 명? 허허. 그게 증오 덩어리라면 참・・・・・・ 서글프겠지.’

그러나 그렇다면, 그 존재는 인간이 존속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인간들이 남을 증오하고 헐뜯는 한, 끝없이 태어나 인 간을 해치게 되는 것은 아닐지. 통신의 접속자가 많아지고 단말기 숫자도 늘어나게 되는 날이 오면 어쩌면 지금의 미약한 존재가 아 닌, 더 강대한 존재가 되어 그를 창조해 낸 인간들에게 되돌아올지 도・・・・・・ . 보이지 않는 적이 되어서. 그래서 인간의 증오로 인간을 해 치는 악의의 화신이 되어서………….

생각하던 현암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통신 사용자라야 몇 명 되나, 뭐. 대 부분 좋은 사람들인데, 그렇게 나쁜 인간들이 늘어날 리 있겠어? 지 금 보아하니 기껏 몇백 명일 텐데, 열 배가 더 늘어나도 별것 아니겠 지. 백만 명 천만 명이 통신을 할 일이야 없겠지, 설마? 쓸데없는 생 각 하지 말자. 그런 미래의 일, 알게 뭐람.’

현암은 생각을 지워 버리고 몸을 일으켰다. 저만치에서 박 신부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박 신부를 맞이하여 이번 일, 큰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별것 없던, 첫 번째 퇴마행의 뒤처리를 생각할 때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