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외전 17화 – 준후의 학교 기행 6 : 이름 없는 들꽃을 위하여

퇴마록 외전 17화 – 준후의 학교 기행 6 : 이름 없는 들꽃을 위하여


이름 없는 들꽃을 위하여

현암은 당황스러웠다. 아이들이 준후의 행방을 알고 있다는 것은 눈치로 보아 자명했다. 하지만 아무도 준후에 대해 말해 주지 않는 것이 화도 나고 당혹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입장으로 보면 현암은 교실이라는 그들만의 세계에 불쑥 들어온 난입자일 뿐이다. 현암도 교실 아래쪽에서 안의 상황을 엿들었던지라 아이들이 이러는 것도 이해는 간다. 그래도 답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막 전학 온 아인데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건 너무하지 않아? 아, 그런 말 할 때가 아닌가? 그런데 준후는 대체 어딜 갔지?’ 마음 같아서는 직접 학교 안을 쏘다니며 뒤져 보고 싶었지만 워낙 에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학교 안이라 마음 놓고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런데 우물거리는 듯한 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전학생・・・・・・ 찾으세요?”

“저…….”

현암이 반갑게 돌아보니 겁먹은 듯 울상이 된 여자아이가 주저하며 서 있었다.

“어디 갔는지 아니? 내가 말이지, 뭘 좀 전해 줄게 있어서.”

현암이 주섬주섬 변명처럼 늘어놓자 여자아이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옥상으로 갔을 거예요.”

“옥상?”

“네. 성철이 패거리가……………. 아, 더 말 못 해요.”

현암은 그 말만으로 모든 것을 깨달았다. 성철이가 누구인지, 이 아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으나 분명 이 작은 학급에도 나름의 질 서와 세계가 있다. 비록 하나하나는 그렇게 나쁜 아이가 아닐 테지 만보다 짓궂고, 보다 장난스럽고, 때로는 남을 골리기도 좋아하는 이를테면 악의 세력도 존재할 것이다. 그것이 성철이 패거리라는 것 은 분명하다. 아이들이 눈치를 보기도 했지만 준후가 한 기이한 행 동 때문에 아무도 편을 들어 주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데 이 아이는 왜 갑자기 준후의 편을 들어 주는 것일까?

‘이 아이의 입장에서는 꽤나 큰 용기를 낸 모양인데.’

현암은 작게 아이에게 속삭였다.

“고맙다”

그러자 아이가 제풀에 먼저 속을 털어놓았다.

“제 짝이 됐는데, 난 왠지 무서워 말도 못 하고……………. 그런데 그게 미안해서요.”

“그랬니?”

“빨리 가 보세요.”

현암은 아이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맙구나, 정말.”

두 번째 감사를 남기고 현암은 등을 돌려 교실 밖으로 나갔다. 정 확히는 몰라도 무조건 계단을 오르다 보면 옥상으로 통할 것임은 분 명하다. 생각 같아서는 한달음에 뛰어 올라가고 싶지만 아이들이며 선생님들이 있는 학교 안이다. 섣불리 공력을 드러낼 수 없음은 물 론 서두르는 기미조차 보여서는 안 된다. 짐짓 태연한 척 느릿느릿 걸어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속마음은 다급해 죽을 지경이었지만 참 아야했다.


성철이는 옥상 문을 빠져나오자마자 헐떡거리며 큰 몸을 계단 위에 털썩 주저앉히며 말했다.

“아, 씨. 뭐야 저 새끼!”

그러자 뒤따라 온 패거리 중 하나가 말했다.

“성철이 너 왜 튀었냐? 병신같이.”

“그러는 넌?”

성철이 눈을 흘기자 눈총을 받은 아이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아, 씨발. 모르겠다.”

성철이는 고개를 젓다가 거칠게 말했다.

“야, 문 잠가, 문.”

다른 아이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뭐? 촉새가 남았는데.”

“문 잠그면 아예 못 내려오잖아? 그건 좀…”

성철이 신경질을 냈다.

“몰라, 씨발. 빨리 잠가. 너희, 안 무섭냐?”

“무・・・・・・ 무섭긴 하더라.”

그러자 한 아이가 주저하며 말했다.

“그, 근데 그 준후라는 자식. 아무것도 한 건 없잖아. 이건 너무……..”

성철은 반쯤 절규하듯 말했다.

“빨리 문 안 잠글 거야?”

“촉새는?”

다른 아이가 얘기했지만 성철은 고개를 저었다.

“아, 모르겠다. 설마 죽겠냐? 빨리 잠그라니까 뭐해!”

성철은 자기가 직접 나서서 옥상의 문에 자물쇠를 걸어 버렸다.

그러고는 알량한 복수심으로 문 너머에 갇혀 버린 준후를 향해 말했다.

“씨발, 너 이 새끼 혼 좀 나 봐라! 내가 무서워서 가는 것 같아? 내가 이겼지, 그치?”

성철은 주변 아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 씨. 뭐라고 좀 해 봐! 내가 이겼지?”

“그, 그래.”

“성철이 너 지독하다.”

“그래, 씨발 내가 짱이야. 내가 제일 지독하다구. 알았어?”

성철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욕만 늘어놓으며 겁먹은 듯 옥상 계단을 구르듯 달려 내려갔다. 다른 패거리도 그 뒤를 따라갔다.


엉덩방아를 찧은 덕에 늦어진 촉새는 문이 잠겨 있자 급히 소리쳤다.

“어, 어? 뭐야, 뭔데? 야, 이거 열어!”

옥상문을 부여잡고 촉새가 소리를 질렀다.

믿었던 같은 편에게 배신당했다는 기분에 서러워진 촉새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문을 두들겨 댔다. 하지만 이미 문 저편에는 아무도 없었다.

촉새는 겁에 질린 눈으로 준후의 등을 바라보았다.

“너 누구니?”

준후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촉새를 보고 한 말이 아니었다. 준 후는 촉새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고, 준후의 앞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다. 물론 촉새가 뒤에 남아 있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지만.

준후가 허공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본 촉새는 완전히 겁에 질려 버렸다.

‘저, 저놈 뭐야. 미친 거야?’

그러나 미친놈으로 치부하기에는 준후의 행동이 너무도 자연스럽 고 평온했다. 그리고 슬픈 표정까지 지으며 허공을 향해 이야기를 하는데,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점심시간인데도 촉새는 온몸이 떨려 오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무, 무서워. 뭘・・・・・・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야?’


준후가 발견한 것은 작고 희미한 아이의 영혼이었다. 강한 영력을 품은 것도 아니고, 사람들의 일상에 영향을 끼칠 의도나 악의도 없 다. 그냥 마당 한구석에 피어난 풀포기처럼 무력하고, 아이들로 가 득 차 있는 학교 내에서 아무도 발견해 주지 않는 존재였다. 외로움 에 떨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왜 여기 있니?”

준후가 느끼기에도 그리 특별한 영혼은 아니다. 어린 나이에 목숨 을 잃었지만 특별한 것은 아니다. 단순한 사고로 고통을 느낄 틈도 없이 목숨을 잃었다. 큰 미련이 남은 것도 아니다. 평범한 집에서 가 족들과 잘 살아왔다. 더구나 영력조차 약해져 희미해진 상태라 자기 이름조차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뭔가 미련이 남아 승천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스스로도 잘 모르고 있다.

“응……. 그랬구나.”

후는 이 아이에게 남은 미련이 무엇인지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살아생전에도 수줍음이 많고 활달하지 못한 아이였을 것이다. 아이 들과 활기차게 뛰어놀고 싶었다는 단순하고도 아이다운 미련. 그래 서 학교에 남아 있으면서도 정작 아이들이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 옥 상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수줍음. 외로우면서도 더 외로워질 수밖에 없는 곳으로 스스로를 숨기는 모순.

“그래. 너도 외로웠구나.”

준후는 누구와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듯 조용히 말을 이어 갔다. 그 런 준후의 앞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촉새는 분명 준후의 앞에 보이지 않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놀래 주려 고 일부러 그런다고 보기에는 준후의 행동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새는 뭔지 모를 두려움에 질려서 입을 막고 울기 시작했다. 준후는 촉새가 남아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준후가 슬픈 미소를 띄 우며 말했다.

“하지만 너, 여기 있으면 안 돼. 이제 그만 가 봐야 하지 않겠니?” 

그러자 작은 영혼이 마지막으로 한 가지 염원을 발했다. 마지막까 지도 아이들 무리 속으로 나설 용기는 내지 못했다. 다만 자취가 없 는 옥상이 아니라 아이들이 뛰어놀던 운동장 가운데로 가 보고 싶다는 것.

너무도 소박하고 작은 바람에 준후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운동장에 가보고 싶다고? 그럴까. 그럼?”

촉새는 준후가 몸을 돌리자 기겁을 하며 근처에 쌓여 있던 뜀틀 더 미 뒤로 숨었다. 뜀틀 틈 사이로 보니 준후는 조용히, 그러나 여전히 허공뿐인 옆을 보면서 옥상 문을 향해서 걸어오고 있었다. 촉새는 비록 숨기는 했지만, 더 무서워졌다.

문가에 도착한 준후는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러나 문은 이미 잠겨있었다.

“어? 뭐야?”

준후는 문이 잠긴 것이 이상해 혼잣말을 한 것뿐인데 준후가 자신을 발견한 것으로 착각한 촉새는 이판사판이다 싶어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너, 너……. 뭐야?”

그제야 촉새의 존재를 눈치챈 준후는 무심코 말했다.

“내가 뭘?”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준후는 아차 싶었다.

‘다 내려간 줄 알았는데, 한 명이 남아 있었네? 어쩌지?’

준후는 자기가 경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황했지만 준후는 시 치미를 떼려고 최대한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물론 조금도 적의 없고 진심처럼 보였지만, 새는 더 무서웠다. 차라리 준후가 심각하게 인상을 쓰고 겁을 주었다면 덜 무서웠을지도 모른다. 애당초 촉새가 겁을 먹은 것은 준후의 그 담담하고도 기이하게 자연스러운 태도 때 문이었으니까.

“너, 너 뭐야? 누구랑 얘기한 거야! 너 대체 뭐야?”

‘내가 얘와 이야기하는 걸 들었나 보네. 야단났다.’

준후도 속으로는 당황했으나 겉으로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뭘? 나, 그냥 혼잣말한 건데.”

“아냐! 너 분명히 ! 너! 너! 넌 뭐야?”

“장준후잖아. 오늘 온 전학생.”

“그, 그거 말고…… 너…… 네 옆에 뭐가 있는 거야? 응?”

“아무것도 없다니까. 그런데 이 문누가 잠근 거지?”

“몰라, 인마! 몰라! 저리 가! 꺼져!”

촉새가 두려움에 질려 고함을 지르기 시작하자 준후는 난감해졌다. ‘얘를 봤나? 아니, 보일 리 없는데. 그리고 문은 왜 잠긴 거야?’ 성철 패거리가 그랬다고는 미처 생각도 못하고 준후는 사고로 문 이 잠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끝나 예비 종 소리가 들려왔다. 점심도 먹지 않았는데 시간이 무척 빨리 지나 간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뭔가 자신이 실수한 것 같은데, 교실로 돌아 가지 않는다면 더 큰 문제가 생길 것이다. 어쩌면 촉새도 문이 잠겼 기 때문에 도망치질 못해서 더 시끄럽게 구는 것인지도 몰랐다.

준후는 이제 정말 난감해졌다. 촉새에게 능력을 들킨 셈이고, 학 교에 적응하지도 못했으며, 이대로는 수업조차 빼먹게 된다. 더구나 옥상에서 만난 이 작은 영혼의 소박한 바람조차 들어줄 수 없게 된 다. 그렇다고 주술을 써서 문을 부술 수도 없다. 그렇지 않아도 의심 에 찬 시선으로 자신을 주시하는 눈이 있기 때문이다.

‘아・・・・・・ 모르겠어. 누구든 도와줘요. 누구든지 제발……………..’

그런 대로 평온하던 준후의 표정이 무너지듯 흐트러졌다. 최대한 의 인내심으로 평온을 가장하며 버텨 왔지만 이젠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준후 있니?”

잠겼던 문이 벌컥 열리며 그와 동시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현암이었다.

“혀. 현암 형……”

현암은 그저 준후가 걱정되어 올라온 것뿐이지만, 준후에게는 작 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준후는 순간, 뭔가를 결심했다. 비록 공교 로운 우연의 일치에 불과하다는 것은 준후도 안다. 그러나 이 작은 우연의 일치를 보고 준후는 내심 깨달은 것이 있었다. 준후를 믿어 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역시 퇴마사들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억 지로 보통 사람 흉내를 내는 것보다는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고 주어 진 길을 따라야 하겠다는…………….


현암은 계단을 급하게 뛰어 올라오느라 흥분한 얼굴로 잔뜩 씩씩 거리고 있었다. 준후의 헝클어진 옷매무새와 얼굴 여기저기에 맞아 생긴 붉은 자국이 보이자 현암은 눈을 부릅떴다.

“준후야! 괜찮아?”

준후는 싱긋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너 말이지, 옥상으로 끌려갔다고 누가 그러던데….”

“아니, 그런 일…….”

그런 일 없다고 말하려 했지만 준후 옆에는 촉새도 있었다. 현암에게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아 준후는 그냥 말을 돌렸다.

“별거 아니에요.”

“준후야, 너 정말 괜찮은……………”

“잠시만요, 형.”

준후는 말하면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현암은 당황한 모습으로 뒤에서 어쩔 줄 모르는 촉새의 모습을 보다가 준후의 등에 대고 말 했다.

“너, 조금 있으면 종칠 거야. 교실로 들어가야지.”

준후는 잠시 망설였다. 이대로 교실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그래도 뭔가 단단히 찍힌 모양인데 더 큰 사달이 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준 후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준후는 현암을 보며 이야기했 다.

“형. 내 옆에 얘, 안 보여?”

“뭐? 뭐가?”

현암도 움찔하며 준후의 옆을 보았다. 물론 비정상적으로 강한 시 력을 가진 현암이었지만 영력을 아무 때나 발휘해서 영혼을 볼 수는 없다. 현암은 겁먹고 눈치를 보고 있는 촉새를 노려보았다. 촉새는 제풀에 무서워서 다시 뜀틀 뒤로 숨었다. 현암은 그때서야 살짝 옷 깃을 걷어 왼쪽 팔목 속에 숨겨 둔 월향검의 검집이 드러나게 한 다 음 눈 주변에 잠시 대었다가 뗐다. 그러면 월향의 힘에 의해 몇 분동 안이나마 영적인 것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

그제야 현암의 눈에도 준후의 옆에 떠 있는 아주 희미한 작은 사람 의 형체가 보였다. 그것을 본 현암은 즉시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리 고준후에게 말했다.

“그랬니?”

준후도 간단히 대답했다.

“그래요. 현암 형.”

현암은 잠시 망설였다. 준후는 교실로 돌아가야만 한다. 허나 준 후의 뜻이 이런 것이라면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준후도 역시 아무 런 명예도 이득도 없는, 고통으로 가득 찬 길을 걸어가리라. 이름 없 는 들꽃 같은 가련한 존재들, 나아가서는 이해도 도움도 주지 않는 몰인정한 보통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게 되리라. 마치 자신 처럼. 박 신부처럼. 그러나 할 수 없었다. 그건 준후가 선택한 길이니 까. 그리고 현암 스스로도 그 길을 선택한 입장이니까.

현암은 짧게 말했다.

“다녀와라. 여긴 내게 맡기고.”

준후는 대답 대신 고맙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자잘 한 일은 이제 신경 쓰이지 않았다. 현암이 나섰으니 모든 것은 알아 서 될 것 같았다. 무책임한 것도, 뒷수습을 떠넘기는 것도 아니다. 그 저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기대고 싶은 심정. 현암은 충분히 그럴 수 있을 만큼 믿음직한 형이었다.

준후가 계단을 내려가자 현암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휴우. 별수 없지.”

현암이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촉새가 있었다. 울음은 그쳤지만 이젠 준후와 비슷하게 이상해 보이는 어른을 대하자 촉새는 겁에 질 려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어떻게든 저 아이를 달래든지 어르든지 해서 입막음을 해야만 했다. 허나 현암은 난처해졌다. 수습할 방법 이 한 가지밖에는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그것밖에 생각 안 나지? 어휴. 그런 건 정말 창피한…….’

그러나 다른 수는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현암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


조금 시간이 지나 수업 종이 울렸다. 아이들은 짧게 느껴지는 점심 시간이 아쉽기만 했지만, 교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운동장에서 뛰어놀던 아이들도, 복도에 서서 재잘거리며 수다를 떨던 아이들도, 책상을 뒤엎고 장난치던 아이들도 모두 나름대로 시끄럽지만 질서 를 찾아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성철이 패거리들도 마찬가지였고 뒤 늦게 허덕이며 눈물 자국조차 지우지 못한 채 달려온 촉새도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 전학 와서 벌써 갖가 지기행으로 미운털이 박힌 준후라는 아이만 자리에 없었다.

“얘는 어딜 갔지?”

“글쎄?”

“와, 캡이다. 정말 막나가네?”

사정을 잘 모르는 아이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하자 자리에 앉은 성 철은 덜덜덜 떨며 이를 악물고 있었다. 준후를 옥상에 가둔 것이 자 그마한 승리라고 어린 악동답게 믿으며 내심 겁나는 것을 견디는 중 이다. 그 옆에 촉새도 현암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아예 파김 치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떨고만 있다.

선생님이 다시 교실로 들어섰다. 교실로 들어온 선생님의 눈은 당 연히 오늘 전학 온 준후의 자리부터 살폈다. 그리고 준후가 자리에 없자 선생님은 골치 아파 미치겠다는 듯 오만상을 찌푸렸다.

“차렷, 경례!”

반장이 인사를 하고나자 선생님은 짜증 난다는 사실을 숨길 생각도 않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오늘 온 전학생, 어디 갔는지 아는사람?”

그러자 준후 옆에 앉아 있던 겁 많게 생긴 여자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선생님, 저기요…….”

“응? 뭐라고?”

“저기……………. 저기 있어요…………….”

여자아이가 가리켜 보인 곳은 창밖 너머였다. 선생님이 고개를 돌 려보니 수업 종이 울려 텅 빈 운동장 한가운데 준후 혼자 서 있었다. 양팔을 하늘로 뻗은, 다른 사람들은 알아볼 수 없는 기이한 자세를 취한 채.

“도대체 뭐래?”

“미쳤나 봐.”

“정말……. 미친 거 같아, 나 무서워.”

“별꼴이네.”

아이들이 수군거리자 선생님도 화가 나는 듯 교탁을 가볍게 내려쳤다.

“여러분은 신경 쓰지 말고 자, 수업 시작해요.”

준후의 짝이었던 여자애가 조그맣게 말했다.

“저……. 저, 재는요?”

“됐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


준후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마음이 홀가분했다.

“이젠 좀 나아졌니?”

작은 영혼에게서 반응이 왔다. 고맙다고. 이제는 때가 되었다. 작 고도 작은 소망을 달성시키기 위해 준후는 커다란 대가를 치렀다. 허나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전교생의 의혹에 가득 찬 눈초리가 모 두 준후를 향해 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이제 그런 것은 신경 쓰이 지 않았다. 아무도 몰랐을지도 모르고, 또 그냥 두어도 아무 해도 없 고,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해결될 작은 영혼의 작은 소망일 지라도 그것으로 충분했다. 자신이 배우고 느끼고 깨우쳐 나가는 것 은 이런 행동을 통해서이리라. 적어도 자신에게 있어서 배움이나 만 남이나 교류는 학교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준후는 진언 을 외우며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 힘을 발했다.

아이의 영혼이 세상의 순리대로 건너가자 준후는 조용히 한숨을 쉬며 치켜 올렸던 양손을 내려뜨렸다. 비록 직접 보이지는 않지만 교실의 많은 창문 너머에서 쏟아지는 의혹의 눈초리는 준후에게도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부끄럽지도 겁나지도 않았다. 준후는 천천히 몸을 돌려 학교 건물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교실로 향하는 길목의 문 앞에는 현암이 팔짱을 낀 채 조용히 서 있었다. 준후가 어깨를 늘어뜨린 채 터벅거리며 교실로 올라가려고하자 현암은 조용히 말했다.

“가고 싶지 않으면 안 가도 된다.”

현암은 준후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보아 알고 있었다.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 함께 섞여서 살아갈 수 없 는 사람들. 그렇지만 그들을 위해 애쓸 수밖에 없고, 모든 오해와 짐 을 짊어지면서도 버텨 나가야 하는 자신의 입장을 준후를 통해 뼈저 리게 느끼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준후도 그랬다. 그러나 준후는 마음의 짐을 벗은 후였다.

준후는 살며시 웃으며 현암에게 조용히 말했다.

“저도 알아요. 하지만…………….”

“가지 않아도 된다니까?”

“하지만 오늘 수업은 마쳐야죠. 오늘만요.”

숨은 뜻을 알아들은 현암은 묵묵히 말했다.

“기다릴게.”

현암은 팔짱을 낀 채 조용히 서 있었다. 준후는 그렇게 교실로 돌 아갔다. 선생님의 따가운 눈총과 아이들의 의혹과 경멸 혹은 의아함 이 섞인 눈빛을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담담한 미소를 잃지 않고 가만 히 있었다. 성철 패거리와 촉새 등은 아예 준후 쪽으로 눈도 돌리지 못하고 덜덜 떨었다. 그러나 준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헤어 지는 기분으로 마지막으로 한 번, 모든 것을 둘러보고 싶었을 뿐이라 미련도 없었다.


그렇게 썰렁하게, 간신히 수업이 끝나자 선생님은 말했다.

“장준후 학생, 교무실로 좀 내려오겠어?”

사실 선생님으로서는 별러 온 순간이다. 물론 준후도 예상했던 일 이다. 선생님의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이 이상한 아이를 일깨워 보겠다는 따뜻한 숨은 마음까지도 느껴졌다. 준후는 자기도 모르게 슬며시 미소를 지었으나 대답은 하지 않았다.

“장준후 학생, 내 말이 안들…………..”

그때 현암이 불쑥 교실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됐습니다. 선생님.”

“네? 아…… 아니, 누구신지?”

“저, 장준후 학생 보호자 됩니다. 그러니까 형이죠.”

“아, 네. 그런데 이렇게 불쑥 들어오시면…….”

“죄송합니다.”

“그러면 함께 교무실로 가서 말씀을…….”

“그럴 필요 없습니다.”

현암은 조용히 가서 준후의 손을 잡아 데리고 나왔다. 선생님은 어 이가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말없이 멀어지는 현암과 준후의 뒷모 습을 바라보았고, 아이들도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수군거렸다. 단 한 명, 촉새만이 고개를 책상에 파묻고 양손으로 머 리를 감싸 쥔 채 중얼거렸다.

“저, 저…… 저 아저씨, 외계인이야…………. 저 준후란 애도 외계인……”

그러자 준후가 사라져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성철이 선생님의 눈치를 보면서 작게 속삭였다.

“뭐라고, 병신아?”

“저…… 저 아저씨 외계인이라고……”

“어휴 이 병신이………….”

아무도 촉새의 말을 믿지 않았고, 촉새도 그 한마디에 입을 다물었 다. 현암이 촉새에게 무엇을 했는지는 촉새밖에 모른다. 현암 스스 로 생각하기에도 부끄러운 짓이기에 그것은 영원히 비밀로 남을 것 이다. 물론 촉새도 결국은 모든 것을 자기가 잘못 본 것이라 생각하 게 될 테고…….


박 신부는 집으로 돌아가 차를 세워 놓고, 택시를 타고 다시 학교 로 향해 오는 길이었다. 교장과도 안면이 있는 처지에 핑계 없이 학 교안을 어슬렁거리는 것도 그렇고, 또 현암을 붙여 놓은지라 박신 부는 조바심이 나는 것을 억지로 눌러 참고 하교 시간에 맞추어 기 다렸다. 그러나 막상 다시 학교로 향하자 택시가 왜 그리 느리게 가 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답답했다. 몇 번이나 시계를 보았는데 하교 시간보다는 조금 빠르게 도착할 것 같았다. 그러나 택시에서 내렸을 때, 분명히 하교 시간보다는 빨리 왔음에도 불구하고 박 신부는 손 을 잡고 교문을 나서는 준후와 현암을 볼 수 있었다. 박 신부는 주변 을 둘러보았다. 다른 학생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 기도 전에 나온 것이 분명했다.

박 신부는 인상을 쓰면서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현암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것을 보고 박 신부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자세한 것까지야 알 수 없었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뭔가 잘되 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박신부는 안타까웠지만 일단 준후의 표정부터 살폈다.

“준후야.”

“네, 신부님.”

“괜찮니?”

“네, 그럼요.”

“너, 학교…….”

준후는 살짝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이제 됐어요. 충분히 본걸요.”

“정말 괜찮니? 별일 없었어?”

현암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글쎄요. 뭐 별일은 없었다고 봐야죠. 그러니까 그게……………..”

“됐네, 현암 군. 더 말할 필요 없어.”

박 신부는 반대쪽의 준후의 손을 잡았다.

“가자, 이럴 줄 알았으면 차를 놓고 올 필요 없었는데, 허허.”

현암과 준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 신부도 공연히 묻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준후에게 물었다.

“준후야, 아이들은 어떻든? 내일은 어떻게 할 거니?”

“학교 말하는 거라면, 이제는 됐어요.”

박 신부도 예상 못 하던 바는 아니었지만, 준후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어둡지는 않아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그랬니? 허나 네가 가고 싶다고……”

“내가 있을 곳은 학교가 아니에요. 이제 알 것 같아요.”

“준후야, 그렇지는 않아. 준비가 덜 되어서 그런 것이니, 언젠가는 반드시 학교에 가야지.”

“글쎄요. 나중에 ……………. 아주 나중에 내키면요.”

준후가 시니컬하게 말하자 현암이 분위기를 추스르려 말했다.

“준후 너, 그 소리 누가 들으면 불량 학생인 줄 알겠다.”

박신부가 그래도 조금 안타까운지 말했다.

“그래도 아이들과 사귀고 어울려 보는 것도 귀중한…….”

준후는 그제야 속마음을 보이는 듯 조금 날카로운 눈매를 하고 빠 르게 말했다.

“도대체 전 아이들이 그렇게 경솔하고 버르장머리 없고 제멋대로 고 무지한지 몰랐어요. 정말로 걔네들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요. 나는 도저히 그런 병아리 떼 같은 무리하고는 어울릴 수 없어요.” “그렇게 아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던?”

준후는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마음에 들고 들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이미 저와는 너무 격 차가 커서, 무엇으로도 그 차이를 좁힐 수 없을 것 같아요. 대화가 통 할 것 같지도 않고, 무엇을 바라보아도 같은 관점이 될 수 없으니 친 해질 수도 없을 것 같아요. 왜 아이들은 그렇게 무지하고 제멋대로 일 수 있는 거죠?”

“준후야, 그건…….”

박신부가 달래려는데 준후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데・・・・・・ 그렇게………… 멋대로 할 수 있는 그 바보들이…………… 저는 왜 이리 부럽죠?”

현암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고 박 신부도 고개를 숙였다.

오히려 준후가 두 사람을 위로하듯 고개를 들며 말했다.

“정말 약 오르고 화나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그래도 저는 저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으니까요. 현암 형, 신부님. 그런 표정 짓지 마세 요. 저, 언젠가 학교 갈 거예요. 꼭 다시 학교 갈 거라니까요.”

밝게 말하고 있었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세 사람 모 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세 사람은 그렇게 그들만의 세계로 돌아 갔다. 준후가 학교 생각을 다시 하게 될 때까지는 아무래도 꽤나 오 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