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외전 2화 – 그들이 살아가는 법 2 : 퇴마사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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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외전 2화 – 그들이 살아가는 법 2 : 퇴마사의 길


퇴마사의 길

음식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분위기는 퍽 눅눅했다. 준후는 여전히 도둑고양이처럼 숨어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고 현암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앉아 움직이지도 않았다. 박 신부도 서먹함에 입을 열지 못해 주변에는 무거운 침묵만 겹겹이 쌓여 갔다. 짧았지만 침 묵에 짓눌린 기분이 들 정도로 느린 시간이 흐르다가 마침내 배달부 의 현관 벨 소리가 정적을 깨 주었다. 박 신부가 문을 열어 주고 현암 이 그릇을 날랐다. 박 신부는 애써 명랑한 어조로 준후를 불렀다.

“준후야, 배고프지 않니?”

준후는 대답이 없었다. 그보다도 아직 어디에 숨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대체 어디 숨을 공간이 있기에 이렇게 모습을 감출 수 있 는 것인지 놀랍기만 했다. 박 신부는 메밀국수 그릇을 늘어놓고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이건 괜찮을 거다. 배고플 텐데…..”

박 신부는 말을 하다가 말고 퍼뜩 놀랐다. 한복 자락을 늘어뜨린 준 후가 어느새 자기 옆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 어떻게 기척도 없 이 나타났는지 놀랍기만 했다. 모습을 드러내 다행이라고 생각한 순 간, 꼬마는 코를 씰룩해 보이더니 건방지게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비린내”

“어? 아니 무슨…….”

준후는 화난 표정으로 메밀국수 국물을 담은 종지를 가리켜 보였다.

“비린내 나요.”

“그, 그러니? 다시마 같은 걸로 간을 낸 거라 그럴 수 있겠구나. 허나 고기는 안 들어 있으니………….”

그러나 준후는 샐쭉하게 박 신부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면이 담긴 그릇만 쥐고는 후다닥 달려 나갔다.

“허…… 저런……”

박신부가 탄식하며 준후를 뒤쫓아 모퉁이를 돌아서니 준후는 또 어느새 귀신같이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아니, 맨 국수를 어떻게…………….”

박 신부가 탄식하며 돌아오니 현암이 머쓱하게 앉아 있다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메밀국수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죄송합니다.”

“아, 뭐가 죄송한가. 그나저나 이게 정말 그런가? 난 요리는 몰라…….”

“저도 요리는 모릅니다만, 집중해서 냄새를 맡아 보니 준후 말이 맞는 것도 같군요. 아주 조금이지만 들어 있어요.”

“고기가?”

“예.”

사실 메밀국수 국물은 다시마로 만들지만 맛을 내려고 소량의 육 수를 섞기도 한다. 일본식 메밀국수는 가다랑어포를 쓰기도 하고. 허나 그런 것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박 신부가 우울한 표정으 로 말했다.

“그게 느껴지나?”

박신부는 신기해서 한 말인데 현암은 무슨 죄라도 지은 양 고개를 숙인다.

“예.”

박 신부는 실언했다 생각하고 얼른 말을 중단했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놓인 라면 그릇으로 눈을 돌려 나무젓가락을 집는데, 맞은편 현암의 그릇은 달걀 덩어리만 놔두고 국물까지 비워져 있다.

“벌써 다 먹었나?”

박 신부가 놀라 얼굴을 보니 현암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약간 돌리며 말했다.

“배가 고파서요…….”

빨라도 너무 빨랐다. 더구나 현암 앞에 놓인 나무젓가락은 포장지도 벗겨져 있지 않았다. 의아하게 여긴 박 신부가 물었다.

“자네 젓가락은……?”

그 말에 현암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그냥 마셨습니다.”

“마셔? 그 뜨거운 걸 통째로?”

“습관이 돼서요.”

도대체 무슨 습관이 어떻게 들면 그렇게 되는지 몰라 박 신부가 멍하니 있자 현암이 변명이라도 하듯 주섬주섬 말했다.

“그・・・・・・ 수련할 시간도 아깝고요. 굳이 이것저것 쓰면 설거지도 귀찮고…….”

“자네, 그러다 체해. 탈 나면 어쩌려고………….”

“탈 안 납니다.”

“어허. 아무리 그래도…….”

현암은 고개를 숙인 가운데서도 또 뒤틀린 미소를 입가에 올리며 말했다.

“절대 탈 안 납니다. 공력이 있는걸요. 귀한 공력을 이런 데나 쓰고 있으니…….”

박 신부는 현암의 자조적인 모습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섣불리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 앞의 라면 그릇을 현 암에게 내밀며 말했다.

“시장하면 이것도 들게.”

“아… 아닙니다. 계란도 남겼잖습니까. 배불러서요.”

“남긴 게 아니라 일부러 안 먹은 것 같은데, 육식이라 수련에 방해가 될까 봐 그런 것 아닌가?”

“그렇기도 합니다만, 저는 정말 괜찮으니…………….”

박 신부는 더 권하려다가 현암이 극구 만류하자 하는 수 없이 그 만두었다. 그러다 보니 젓가락을 들기도 무안해졌다. 그러자 현암은 변명이라도 하듯 일어서며 말했다.

“제가 불편하게 해 드린 것 같군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박신부는 고개를 저으며 만류했다.

“가다니. 이보게, 현암 군. 자네 나와 함께한다고 하지 않았나.”

“신부님 하시는 일이라면 뭐든 돕겠습니다만…………. 숙식까지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박신부가 조용히 물었다.

“자네 숙소는 어딘데?”

현암은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순순히 말했다.

“없습니다.”

“잘 곳도 없이 떠돌았단 말인가? 자네 공력은 오른팔에만 몰렸다했으니 다른 부분은 보통 사람이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한데 그렇게 거처도 없이 지내는 것은 불편할 텐데?”

현암은 박 신부의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

“산속이나 숲에서 자는 게 편할 리야 없죠. 다만……”

“경제 사정 때문에 거처를 못 구한건가?”

그 말에 현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 정도로 궁하지는 않습니다. 어디 공사장이나 채석장 같은 데서 며칠만 일해도 앞가림은 됩니다. 단칸방쯤이야 못 얻 을 건 없죠. 다만…………….”

“다만, 뭔가?”

현암은 망설이다 말했다.

“불편해서 그렇습니다.”

“뭐가 불편한데?”

“공력을 계속 다듬어야 하는데, 남들 이목이 있으면 수련에 불편합니다.”

그러자 박 신부는 타이르듯 말했다.

“그렇군. 그렇다면 더더욱 여기 있는 게 낫지 않을까? 누추하긴

하지만 꽤 넓고, 보다시피 언덕 위 외진 곳에 있어서 수련을 하든, 뭘 하든 자유롭다네.”

“하지만 그건…….”

현암이 망설이자 박 신부는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보게, 현암 군. 내 가만 보니 자네는 자네 스스로를 너무 하찮게 보는 것 같아. 자네는 정말 놀라운 청년일세.”

그러자 현암은 피식 웃었다.

“신부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는 어쩝니까. 저는 신부님을 보고 정말 놀랐는데요. 더구나……”

현암은 초점 없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저 꼬마는 정말…… 전 상상도 못 했습니다. 무슨 옛날이야기에서 튀어나온 아이 같아요.”

그 말에 박 신부도 피식 웃었다.

“그러니 함께 지내자는 거야.”

“하지만……”

현암이 망설이자 박 신부는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보게. 여기서 혼자 지내는 게 얼마나 적적한지 아나? 아니, 모 를 리가 없겠군. 자네도 나와 비슷할 테니. 그러니 함께 지내자는 거 야. 그리고 같이 할 일도 차차 찾아보고.”

현암은 입을 다물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했다.

“지난번에 이야기는 간략하게 들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을 한다는 겁니까?”

박 신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간단하네. 그냥 사람들을 도와주는 거지.”

그러자 현암은 눈빛을 날카롭게 하며 물었다.

“그렇게 하고 대가라도 받자는 겁니까?”

박 신부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천만에. 절대 그럴 수 없지.”

“그러면 영웅 놀이입니까?”

박 신부는 말도 되지 않는다는 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원, 무슨 소리를 내가 그럴 나이인가? 도리어 절대 남들이 알아 채게 하면 안 된다네. 뭐, 경우에 따라 피해 당사자야 알아챌 수밖에 없겠지만 가급적 소문내지 않도록 당부해야 하네. 그게 유일하게 요 구할 대가라면 대가겠지.”

“보통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들을 잡는 건가요?”

“그렇지.”

현암은 조금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보통 사람의 기준으로 저를 보면 아주 강하겠죠. 허나 전 이제 보 통 사람들은 모르는 존재와 세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나도 안다네.”

“그 세계의…… 뭐랄까…………… 아득한 깊이에 비하면 제가 얻은 능 력쯤은 별것 아닐지 모릅니다. 세상의 순리에 따라 대부분 이쪽을 건드리지 않을 뿐이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우리 세계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는 걸 아실 텐데요.”

“그렇겠지.”

박신부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현암은 따지듯 말했다.

“그런 것을 섣불리 드러낸다면・・・・・・ 그런 몇몇 존재가 피해를 끼 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피해가 벌어진다는 것도 아시겠죠?” 

“당연하네. 우리는 절대 비밀리에 움직여야 하고, 가급적 이런 힘 이 있다는 사실도 감춰야 해. 간단하게 우리 경우만 해도 그런 게 알 려지면 당장 동물원 원숭이처럼 구경거리나 실험 재료가 될지도 모르잖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더구나 이런 게 ‘진짜’라고 알려지면 제 일 먼저 사기꾼들이 ‘나야말로 진짜다’라고 떠들어대며 움직이겠고, 혹세무민하는 사이비 종교에 ・・・・・・ 아,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요.” 

박신부는 실없이 웃었다.

“귀신, 악령, 악마 들어 사람을 해치는 것보다 천 배 만 배 많은 피 해자들이 나오겠지.”

“제가 삼 년 동안 떠돌면서 이런 일을………… 아, 우리가 하는 일을 뭐라고 불러야 하죠? 무슨 엑소시즘이라고 할 수도 없고…….” 

박신부는 웃으며 말했다.

“엑소시즘이 우리말로는 구마 의식이네. 그러나 이건 가톨릭에서 쓰는 용어이니 그대로 쓰기는 그렇고・・・・・・ 나는 퇴마(退)라고 한다 네. 내가 부르는 말이네만.”

그러자 현암은 말했다.

“퇴마・・・・・・ 퇴마라………… 그러면 우리는 퇴마사(退)가 되는 건가요?”

“뭐 그렇게 부를 수 있겠지. ‘이런 일하는 사람’이라고 부르기엔 어색하니 명칭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현암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그러면 퇴마・・・・・・ 행, 그런 일을 퇴마행(退魔行)이라 부 르면 될 것 같네요. 괜찮나요?”

“내가 지은 말을 써 주니 고마울 뿐이네. 계속하게.”

“예. 그렇게 퇴마행으로 사람을 도운 게 일곱 번입니다. 하찮은 것 까지 포함해서요. 그런데 사기꾼들을 본 횟수는 수백 번도 넘습니다.” 

박신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네. 심한 경우는 내가 구해 준 사람이 후에 내 비밀을 폭로하 겠다고 협박한 경우도 있었고 사기꾼으로 몰려 벌금형을 받은 적도 있네. 그러니 절대 비밀이어야 해. 이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야. 비밀 을 지킬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세상에 도 움이 될 테니까.”

현암도 웃으며 대답했다.

“뭐, 순순히 고맙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악령을 쫓아 주려 남 의 집에 들어갔다가 도둑으로 몰려 철창 차까지 타 본 적이 있습니 다. 여자 꽁무니나 쫓아다니는 놈으로 몰려 잡혀간 적도 있고요. 사 실 그 여자에게 뭔가가 쓴 것 같아서 그런 건데 다시 나타나면 아예 콩밥을 먹게 해 준다고 하더군요.”

박 신부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래서 포기했나?”

현암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기가 생겨서요. 힘은 들었지만 눈에 안 띄게 숨어서 떼어 냈죠. 그러니 다시 볼 일도 없고 콩밥은 간신히 피한 셈이죠. 결과적으로 는 잘됐지만 기분은 좀 그렇더군요. 사기꾼에 도둑에 치한에…… 하하. 안 들어 본 욕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을 고집했나?”

“신부님과 같을 텐데요. 아마도.”

“말해 보게나. 같을지 아닐지는 모르는 것이니.”

“뭐・・・・・・ 이 귀한 내력을 물려받았는데 마땅히 다른 할 일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자네, 그 힘 정도면 스포츠로는 뭘 해도 거의 세계 제일일 텐데? 금메달 같은 것에 관심이 안 들던가?”

현암은 고개를 저었다.

“스포츠는 인간 본연의 의지와 노력을 가지고 하는 건데, 이런 특 별한 공력 같은 걸 쓰면 반칙이죠. 약물 도핑이나 뭐가 다릅니까. 그 럴 생각 없습니다.”

“내가 얻은 건 일종의 신성력이라 생각되니 그럴 수 없지만, 자네 의 공력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진 거니 그럴 필요까지는………….”

“아닙니다. 이것도 불가와 도가의 힘이고, 선행을 위해 쓰라고 얻 은 건데…… 그걸 팔 수는 없습니다. 물론…… 하하. 막노동할 때 주위에 사람이 없으면 조금 쓴 적도 있습니다만, 더 이상의 욕심은 없습니다.”

“선행이라. 그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생각하고 말고도 없습니다. 선행은 보통 착한 일로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그냥 ‘옳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말도 있잖은가?”

“원, 그러면 그게 선행입니까? 그냥 사기나……………. 좋게 봐줘도 장사죠.”

“허허. 그건 종교의 교리에도 나오는 말인데, 너무 매정한걸?” 

현암은 한숨을 쉬었다.

“그거야 보통 사람들에게 제발 더 악해지지 말라고 당부하느라 그 런 거지, 실제 그런 뜻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뭐,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그건 자기 마음이겠지만,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현암은 심드렁하게 이야기했지만 박 신부는 내심 그가 대견했다.

“뭐 그러니 나와 함께 퇴마행을 하자는 걸세. 백지장도 맞들면 낫 다고 하니 혼자보다는 여럿이 낫겠지. 이거, 퇴마행이란 말을 붙이 니 뭐가 되어 가는 것 같군.”

현암도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제가 얻는 것은요?”

박 신부도 웃으며 간단하게 말했다.

“없어.”

“위험한 일은 끝도 없이 생기겠고요?”

“아. 당연하지. 부상은 드물지 않을 거고,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 네.”

“그런데 아무 대가도 바라서는 안 되고,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 아야 하며, 그러다가 무슨 꼴을 당해도 그냥 버텨내야만 하는군요.” 

“그래. 참 말이 안 되지?”

“아닙니다. 정말 마음에 듭니다. 애당초 그래 보여서 따라온 것이 지, 그중 하나라도 신부님이 다른 말씀을 하셨다면 전 벌써 사라졌을 겁니다.”

박 신부도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럴 줄 알았어.”

그러자 현암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가?”

“뭐, 예를 들자면…… 이미 죽은 영혼이 있습니다. 아주 억울하게 어떤 놈에게 당해 죽은 거죠. 그래서 자기를 죽인 자에게 복수를 하려고 합니다. 한데 그 범인이 뻔뻔하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런 경우는요?”

박신부는 망설이지도 않고 딱 잘라 말했다.

“살려 줘야지.”

“분명 죄를 짓고, 원인 제공을 한 게 그놈인데도요?”

박 신부는 조금도 까딱 않고 말했다.

“그래도 살려야 하네. 이보게, 현암 군. 자네는 알 만한 사람이니 원칙이니 윤리니 복잡하게 가지 않고 잘라 말하겠네. 나도 그렇고 자네도 사람일세. 그러니 무슨 경우가 있어도 사람 편이야. 적어도 목숨에 관한 한.”

현암은 박 신부가 말하는 사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마지막에 눈을 빛냈다.

“목숨…………… 과 죄를 다르게 보십니까?”

“절대 같을 수 없지. 가급적 죄를 뉘우치게 해야 하고 영혼의 원한 도 달래야겠지만 죽게 두어서는 안 돼.”

“그렇게 하면 그냥 처리하는 것보다 몇 배는 어려울 텐데요?”

그러자 박 신부도 검은 안경을 고쳐 쓰며 굳은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그렇게 해야 하네.”

“다른 길은 없는 겁니까?”

박 신부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현암은 잠시 동안 박 신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야 하겠죠. 그래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차피 하던 일인걸요. 뭐.”

그렇게 말하는 현암의 입꼬리는 아까와는 달리 자조적으로 비틀어지지 않았고, 박 신부의 눈에도 훨씬 좋게 보였다. 박 신부도 고개 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러니 이제 여기서 지내게 공연히 떠돌아다니지 말고.” 

그러자 현암은 뭔가 말하려 했다. 사실 나름대로 걱정이 있었다. 허나 박 신부는 입을 막듯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동안 외롭지 않았나? 서로 터놓고 기댈 만한 사람이 없어서 말 이야. 자네는 강단이 있는 것 같으니 잘 모르겠지만 내가 그랬네. 정 말 외롭고 적적해서…………….”

박 신부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현암도 더 말을 할 수 없어 고개만 살짝 까닥해 보이고 말았다. 박 신부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보았다. 눈에서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는 것이었다. 박 신부 는 곧 다시 고개를 돌려 아무것도 없는 천장 언저리의 허공을 바라 보며 말했다.

“준후야, 듣고 있니? 너를 만나게 돼서 정말 반갑단다. 너도 낯가 림 그만하고 이리 나오지 않겠니?”

박신부가 말했으나 대답이 없었다. 현암이 걱정되는 듯 주위를 둘 러보자 박 신부는 가만히 손을 들어 제지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조금 있다가 사박사박하는 조그만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엉 뚱하게도 거실 문 뒤로 오른쪽 눈까지만 살짝 고개를 내민 준후가 보였다. 답답할 정도로 맑은 눈망울이었다. 박 신부가 웃으며 이리 오라는 듯 손을 벌리자 준후는 머뭇머뭇하며 망설이다가 입을 오물거리며 들릴 듯 말 듯 조그맣게 말했다.

“그…… 그…… 밀교에서 배운 교리에 의하면요, 저는 그・・・・・・ 그 러니까 모르는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박 신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아니잖니.”

그러자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준후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저…… 정말 여기 있어도 돼요? 그게, 그러니까…………, 나는, 음………… 밀교 밖으로는 한 번도 나가 본 적이 없고, 그러니까………….”

박 신부는 아무 말 없이 미소만 띠며 준후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 을 얹었다. 그러자 준후는 갑자기 확 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박 신부 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엉엉 슬프게 울어 댔다. 그것을 보고 현암 도 슬픈 기분이 되어 조용히 눈을 돌렸다. 박 신부가 커다란 손을 들 어 준후를 품에 안고는 가볍게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래, 이제 괜찮아. 아무 걱정하지 말아라.”

준후는 엉엉 울면서 말했다.

“그…………… 아버지를 제가 그런 거・・・・・・ 아시죠? 그건, 정말…….” 

준후가 목이 메어 말을 잘하지 못하자 박 신부는 계속해서 등을 토 닥이며 말했다.

“이젠 잊으렴, 그냥 악몽이었다고 생각하려무나. 그게 낫지 않겠니?”

현암도 눈물이 날 것 같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창밖을 보니 이미 늦은 밤이었다. 박 신부는 준후를 품에 안은 채 말없이 걸음을 옮겨 거실을 나섰다. 그러면서 살짝 손을 들어 현암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현암은 박 신부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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