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7장 : Wedding March – 3화

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7장 : Wedding March – 3화


“유념하셔야 될 것은, 사실을 말씀하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알았어. 사랑해.”

“성하, 제발. 저는 지금 파킨슨 신부님과 이야기할 때의 주의점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 그래?”

“파킨슨 신부님에게는 위험이 없지만 그래서 위험합니다. 그 분은 공주 암살건 때문에 일종의 딜레마에 빠지신 듯합니다. 교회의 종으로서 그 암살 을 도왔어야 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의지에 따라 그것을 저지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궁금해하고 있는 거지요. 어느 것이 더 성사에 가까이 가는 일인 가, 즉 아주 오래된 사효적 효력과 인효적 효력의 대결이, 혹은 더 넓게 형식주의와 실질주의의 대결이 그 분의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듯합니다. 그 대결의 짝을 가리키는 말들은 그 외에도 많겠지요.”

“그렇군. 그런데 위험이 없어서 위험하다는 것은?”

“그 분은 답을 얻고자 할 뿐 그 답을 얻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목적은 없으신 것 같습니다. 질문이 원론적인 것이다 보니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만. 따라서 성하께서 그 분을 책략가나 음모가로 대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적절하지도 못한 일이 될 것입니다. 최악의 경우 그 분의 속에는 있지도 않은 책략이나 음모가 성하의 자극에 의해 생겨나 버릴지도 모르니까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 결국 서로의 믿음에 대해 가슴을 열고 이야기해야 된다는 말이지?”

“예, 성하.”

퓨아리스 4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옷차림을 가볍게 가다듬었다.

“준비됐어. 아, 그러길 바란다는 말이지만.”

플로라는 목례한 다음 온실로 통하는 문을 열고 사라졌다. 법황은 천천히 걸어가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바깥의 대기실에서는 그레이엄과 대화중인 늙은 신부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주고 받았던 것인지 껄껄거리며 웃던 늙은 신부 는 법황의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그레이엄은 법황을 소개하려 했지만 법황이 먼저 파킨슨 신부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웃으며 손을 내 밀었다.

파킨슨 신부는 한쪽 무릎을 살짝 꿇으며 법황의 반지에 접근했다.

“이 만남을 인도하신 주님을 찬양할진저 만나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성하.”

“주님을 찬양할진저 일어나게, 파킨슨 신부.”

신부가 다시 일어나자 법황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으며 집무실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레이엄이 그들의 등뒤에서 집무실 문을 살짝 닫았다. 퓨아리스 4세는 발코니 쪽으로 파킨슨 신부를 안내했다. 발코니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고 파킨슨 신부를 의자에 앉힌 법황은 그의 옆 쪽 의자에 앉았다. 그들의 눈 아래로는 기적의 도시가 여름 햇살 속에 가물거리고 있었다. 파킨슨 신부는 이런 자리 배치에 약간 당황했지만 퓨아리 스 4세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자네가 편한 마음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싶어, 파킨슨 신부. 책상을 가운데 두고 자네를 세워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래도 실례가 될 것 같군.”

“실례라니오, 성하.”

“아니. 나는 테리얼레이드에서의 그대의 활동에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네. 내 주위의 약간 강직한 추기경들 중에는 자네의 활동을 폄하하는 이도 있 지만, 그런 자들조차 스스로 그 일을 맡게 되면 머리를 내두르며 도망치고 말 것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지. 테리얼레이드 교구 신부라니, 정말 대 단한 일이야.”

파킨슨 신부는 쑥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었다. 퓨아리스 4세 역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네가 조력을 구하고자 이 먼곳까지 와주었으니 나는 당연히 교회의 우두머리라기보다는 사도의 맏형이 되어 그대를 대해야겠지. 자, 들려주게. 형제여. 내가 자네에게 어떤 도움을 줘야 하지?”

파킨슨 신부는 한참 동안 말을 못하다가 어렵게 말머리를 뗐다.

“아무래도 그 테리얼레이드에서의 일부터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 같군요.”

법황은 차분히 기다렸다.

“법황청으로 매년 보고서를 올렸습니다만 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테리얼레이드에서 가장 많이 했던 일은 전도나 봉사나 미사 집전이 아니라 교회 건설이었습니다. 물론 횟수가 가장 많은 것은 아니지만, 가장 많은 시간과 활동을 투입해야 했던 것은 그것이었습니다.”

“알고 있네. 아울러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 미안하게 생각하네.”

“아니오. 제대로 건사하질 못해서 계속 다시 지었어야 했으니, 그건 제 잘못입니다. 물론 테리얼레이드라는 곳이 방화를 일종의 사교 수단으로 삼는 험악한 풍토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어쨌든 저는 연례행사처럼 교회를 재건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교회라는 건물에 대해 어떤 절실한 가 치를 느끼지 못하게 된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가? 계속해서 다시 건축했다는 것은 자네가 교회를 꼭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올바른 태도를 가졌기에 그런 것 아닌가?”

“아니오. 죄송합니다. 제대로 표현하질 못했군요. 그러니까, 교회라는 것이 저에게 어떤 위안이 되질 못했습니다. 농부의 예를 들겠습니다. 농부에 게 밀밭은 소중합니다. 하지만 그 집은 그의 휴식처입니다. 계속해서 재건해야 했던 테리얼레이드 교회는, 제게 농부의 밀밭처럼 어떤 결실 있는 노 동의 대상이긴 했습니다만 마음의 고향이나 기댈 수 있는 안식처가 되질 못했습니다. 절대로 그 일이 힘들거나 고되어서 싫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 지만 교회라는 것은 노동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안식이 되고 위안이 되고 의지가 되어주는 곳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곳은 주님의 집이잖습니 “까?”

“무슨 말인지 알겠네. 이런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자넨 사도가 아닌 건축가의 즐거움을 맛보고 있는 것 같아서 당황스러웠다는 말이군? 사도 인 자네를 이끌어주었어야 할 교회를 거꾸로 건축가인 자네가 계속 이끌었다는 사실이 자네를 당혹시켰다는 것인가?”

“..그런 것 같….. 아니, 그렇습니다. 제가 교회를 이끌게 되었다고 말씀하신 점, 바로 그것입니다. 그 외에도 많을 것입니다. 의지할 수 있는 손이 바로 이 손밖에 없었기에 저는 교회나 성자의 조력, 혹은, 용서하소서. 주님의 도움보다는 파킨슨의 도움을 더 필요로 했습니다. 한마디로 제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저 자신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그런데 자네의 상황을 나에게 설명해 주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군.”

퓨아리스 4세는 내심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이미 핸솔 추기경에게도 밝혔듯이 법황은 이런 종류의 회견에서 말 첫머리부터 구원이니 신의 뜻이니 성전의 기자가 간과한 ・것이라고 그 자신이 믿고 있는 사실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어놓곤 하는 내방자들에게 질린 상태였다. 하지만 파킨슨 신 부는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대신 자기 검열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기 검열은 이미 다음에 파킨슨 신부가 어떤 말을 꺼내어 놓을지를 암시하고 있었다.

“혼란을 느낍니다, 성하. 제가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라 저 스스로가 수행하는 일들의 반복 속에 10년의 세월을 보낸 후, 저는 저 자신이 교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뚜렷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내심 그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 속에 있는 그런 믿음의 존재를 깨닫게 된 것은 다림 교회에서였습니다. 율리아나 공주 암살건 말입니다.”

안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격은 더 강렬했다. 퓨아리스 4세는 어떤 형태로든 이 이야기가 거론될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토록이나 직설적으로 날아올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본능적인 방어 자세를 취하고 싶은 것을 힘들게 억누르며, 부활의 법황은 차분히 신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쩌면 성전의 말씀 중 가장 많이 어겨졌던 것인지도 모르는 어떤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살인하지 말지니.’ 아무런 조건이 없는 말임에도 불구하 고 이교도에겐 적용되지 않으며 이단심판관에게도 적용되지 않는 말입니다. 전장에 서 있는 신심 깊은 병사에게는 말할 것도 없겠지요. 그리고.. 예. 저 자신도 저 계율을 어겼던 적이 없다고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파킨슨 신부.”

“저를 파문에 처하신다면 겸허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바람의 도시에서 10년 동안이나 살아 있었다는 것에서 그 목숨에 제 것 아닌 핏 자국이 묻어 있음은 이미 짐작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안타깝게도 테리얼레이드에는 제 고해를 받아주실 신부님이 없었습니다. 어쨌든, 이제 성하 께서는 안심하실 수 있겠지요. 저는 성전 원리주의자의 화법으로 성하를 괴롭혀드리고자 찾아온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요.”

“무슨 말인지 알겠네.”

“그리고 저는 성하의 뜻을 거역했습니다.”

파킨슨 신부는 성스러운 도시에서 시선을 옮겨 무릎 앞에 있는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아시겠지요. 위협받았던 것이긴 했지만 어쨌든 키 드레이번을 이끌어들였습니다. 그리고 위협받았다는 말을 변명으로 삼지는 않겠습니다. 만 일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저 스스로가 다림 교회로 쳐들어갔을 테니까요. 키 드레이번은 단지 제 의지를 보다 명확히 드러내어 줬을 뿐입니다.”

“그런가.”

“예. 저는 제 의지로 성하의 뜻을 거역한 것입니다. 테리얼레이드에서 10년 동안 그랬듯이, 저는 제 속에 있는 교회로부터의 명령에 따라버린 것입 니다. 어쩌면 그것은 제게 남아 있는 마지막 원칙의 파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파킨슨 신부는 할말을 다했다는 기분을 느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속마음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을, 마치 그 자신을 피고인 삼아 죄상을 설명하는 검사처럼 객관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파킨슨 신부는 판결을 듣기 위해 재판장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 부활의 법황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옳은 일인지 알고 싶어 이렇게 10년 만에 찾아왔습니다.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데스필드는 법황청 앞 광장의 분수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시간은 제9시 무렵, 여름의 태양이 지글거리며 불타오르는 시간이었다. 손수건을 둘둘 말 아 땀받이 삼아 이마에 묶던 데스필드는 법황청의 정문을 나오는 파킨슨 신부를 보고는 손인사를 보내었다.

“이제 나오쇼?”

파킨슨 신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데스필드가 앉아 있던 분수대로 걸어왔다. 데스필드의 옆에는 하얀 갈기를 가진 흑마가 조용히 서 있었다. 손수건을 질끈 묶은 데스필드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신부를 바라보았다.

“잘 안 됐소?”

“아아.”

“하이야압!”

파킨슨 신부의 말이 끝나자마자 데스필드는 솟구쳐 올랐다.

파킨슨 신부가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데스필드는 분수대의 난간을 밟고 다시 뛰어올라서는 말 안장 위에 올라탔다. 파킨슨 신부뿐만 아니라 흑마도 꽤나 당황한 듯했지만 데스필드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신부를 향해 손을 던졌다.

“잡으쇼!”

묘기에 가까운 몸놀림이었지만, 파킨슨 신부는 눈을 몇 번 껌벅거리다가 말했다.

“뭐냐?”

“튀어야지?”

“튀긴 뭘 튀냐, 자식아.”

“안전한 거요?”

“그럼 안전하지 않을 건 뭐냐?”

데스필드는 투덜거리며 안장에서 내려왔다. 땅에 내려선 데스필드는 윈디어의 하얀 갈기를 쓰다듬어주었고, 윈디어는 머리를 몇 번 뒤채며 푸르릉 거렸다.

오늘 새벽까지 이어진 도박판에서, 그때까지 따지도 잃지도 않으며 노련한 솜씨로 판을 키우던 데스필드는 마지막으로 스완 대거를 테이블 위에 던 졌다. 카드꾼들은 그제서야 그들이 몇 년에 한번 참석하기 어려운, 어쩌면 평생 한번이나 참여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운 진짜 판에 끼게 된 것을 알아 차렸다. 따라서 그들이 포기한 것은 참으로 경탄받을 만한 훌륭한 도박꾼의 자세였다. 남은 것은 자몬 경뿐이었고, 그래서 데스필드는 히죽 웃으며 벨타온 자작을 쳐다보았다. 벨타온 자작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지만 스치기만 해도 상대를 죽일 수 있는 명검인 데다 고고학적 가치도 엄청난 보물인 스완 대거에 걸맞는 보물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데스필드는 자몬 경의 명마 윈디어를 걸 것을 제안했고 자몬 경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오늘 아침, 데스필드는 다분히 악의적인 휘파람을 불며 윈디어를 타고 나왔다. 그가 벨타온 저택의 정문을 나올 무렵 자몬 경의 침실 쪽에서 는 뭔가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고 그래서 데스필드는 퍽 행복했다.

“재미있는 재주다. 이곳에 오자마자 펠라론 최고의 카드꾼을 격파했으니 네놈 명성이 하늘을 찌르겠구나. 그런데 그 말은 왜 탐낸 거냐?”

“조금 전 봤잖소. 도망치려고.”

“도망치려고?”

“당신이 법황 당신의 비위를 건드릴 경우 그렇잖아도 입막음이 필요한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거 아니오.”

파킨슨 신부는 멍한 눈으로 데스필드를 바라보았다.

라오코네스의 일 때문에 그런 생각을 못하고 있었지만, 파킨슨 신부는 교회가 감추고 싶은 비밀의 증인이다. 따라서 법황청은 신부를 행방이 묘연하 게 만들어주고 싶은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데스필드는 바로 그 점에 대한 대비책의 일환으로 윈디어를 확보해 둔 것이다. 파킨 슨 신부는 따스하게 웃었다.

“그래서, 나를 펠라론 밖으로 도피시키겠다고?”

데스필드 역시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본인에게까지 불똥 튀기 전에 도망치려고.”

신부의 얼굴에 떠올랐던 온화한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파킨슨 신부는 으르릉거리며 데스필드를 노려보았지만 데스필드는 피식 웃으며 윈디 어의 고삐를 끌어당겼다.

“적당히 하고 털 눕히쇼. 안전한 거면 갑시다. 혹 말에 타고 싶으쇼?”

“아니, 걷자. 이야기도 좀 하고 싶고.”

신부와 패스파인더는 펠라론의 시내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시내의 정경은 화사하다기보다는 위풍당당하다에 가까웠다. 1700년이나 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법황들이 항상 알뜰하게 관리를 해왔기에 고도 (古都) 펠라론은 아직도 훌륭한 도시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고 그 시내를 오가는 사람들 역시 활기찼다. 그리고 그 활기찬 시민들의 8할 이상이 흥미로 운 듯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돌아보곤 했다. 사람들이 자꾸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 파킨슨 신부는 데스필드를 돌아보았고 데스필드는 턱을 돌려 그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윈디어를 가리켜보였다.

“바람 사슴 당신을 보는 거요.”

“바람 사슴?”

“윈디어(windeer). 바람 사슴. 당신의 이름이자 동시에 품명이지. 말 볼 줄 아는 당신이라면 침을 질질 흘릴 말이오. 본인의 도피 수단으로 선택된 것만 봐도 아실 수 있잖소? 당신은 사무이다크의 고원 출신이오. 그리고 당신의 가계는 어쩌면 말에 속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따르지. 가끔 뿔이 돋는 당신도 있거든.”

“뿔이? 허, 희한하군.”

파킨슨 신부는 감탄하는 눈으로 윈디어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데스필드는 윈디어를 바라보는 신부의 눈빛이 곧 어두워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파킨 슨 신부는 다시 앞을 돌아보며 혼자말처럼 말했다.

“어쩐지 이놈이 내 신세에 대한 알레고리인 것 같다. 나도 교회의 품종에 속하지 않는, 뿔 돋은 신부가 된 기분이거든.”

데스필드는 어깨를 으쓱인 다음 앞을 보며 말했다.

“말 무리 중에 섞여들어간 사슴 당신은 따돌림당하겠지. 그래, 저기 법황청 목장의 종마 당신들은 테리얼레이드에서 온 야생 사슴 당신을 따돌리던가요?”

파킨슨 신부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따돌린 건 아니다만 말이 통하지가 않으니 따돌림당한 거나 마찬가지다.”

“성하 당신이 대답을 안해 주던가요?”

“아냐. 주님께 맹세코 그 분께서는 성의를 다하셨다. 확신할 수 있어. 그 분은 자신의 명령을 거역한 이 부하 성직자를 전혀 꾸중하시지 않으셨고 내 의문과 갈등에 모든 열의를 다해 참여해 주셨다. 난 사실 오늘 아침까지도 독실한 신앙심으로 이름이 높았던 것도 아니고 이적이 함께한 것도 아닌 로데인 백작이 어떻게 교회의 정상에 서게 되었는지 의아하게 여기곤 했다. 주여, 저를 용서하소서.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 분은 왕이 될 만 한 분이다.”

“그런데?”

“사실 내가 던지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법황이 계시기나 하겠느냐. 1700년 동안 펠라론과 교회를 다스렸던 모든 법황께서 부활하신다 하더라도 대답하실 수 있을지 솔직히 의심스럽다. 그 분께서도 고백하셨지.”

“고백?”


퓨아리스 4세는 시무룩한 얼굴을 술잔을 들어올렸다.

“솔직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어. 그 자의 질문에 어떤 답을 준다면, 그것이 어떤 대답이든 간에 교회 체제 전체의 붕괴를 가져올 대답이 될 거라 고.”

플로라는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동정 어린 눈빛으로 법황을 바라보았다. 법황은 술잔 속에 담긴 주홍색 액체, 혹은 그 위를 어른거리는 자신의 얼굴 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장 모범적인 대답은 교회의 체제에 순응하라는 것이지. 단순해. 주님이 성전을 만드시고 성전이 교회의 뿌리가 되는 것이므로 교회는 주님의 뜻 이자 바로 주님이지. 교회에 내재된 치명적인 결함만 없다면 더할 수 없이 단순하지.”

“교회에 내재된 치명적인 결함이라 하셨습니까?”

“지붕이 있어야 성가대가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 비가 올 때 특히 잘 드러나지.”

플로라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기울이며 법황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법황은 취한 것이 아니었다.

“혹은 벽이 있어야 신부가 성전을 읽을 수 있는 점. 바람을 막아줄 벽이 없으면 초가 꺼지거든. 아, 물론 바닥이 있어야 되지. 꼭 고려해야 되는 중요 한 문제야. 실수로 바닥을 준비하지 않으면 기도 중인 신도들이 판데모니엄까지 한없이 떨어질 테니까.”

플로라는 이제 고개를 똑바로 세워 법황을 바라보았다. 법황은 술잔을 내려놓고는 팔걸이에 두 팔을 던진 채 맥없이 위를 바라보았다.

“순종과 헌신의 서원은 복잡한 자기 기만이지.”

“성하.”

“파킨슨 신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지. 10년의 세월 동안 바람의 도시에 있었으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고 결정을 내리는 쓸데없는 시간의 낭비도 필 요없었을 거야. 모든 구조, 생명이든 건축물이든 사회 구조든 모든 구조물에는 너무 당연해서 별로 언급되지 않는 공통점이 있지. 그것이, 최소한 순 간은 넘어서는 시간 동안은 버티고 있을 것. 항상성을 가질 것.”

법황은 한숨을 내쉬었다.

“순종? 좋아. 혼 족의 대족장이 어느 날 나에게 교회를 해산하고 신앙을 버리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에 순종해야 되나? 글쎄. 나는 정중히 펜을 들어 답장을 보내겠지. ‘짖어 시간 있으면 이리 와. 화끈하게 세례해 줄 테니까. 그리고 주님의 영광이 실현되었다고 주장하겠지. 아마 손이 있는 모든 추기경들은 박수를 보낼 거라 생각되는군.”

플로라는 생긋 웃었다.

“실로 그러하겠지요.”

“모든 구조에는 그런 것이 있어야 하지. 내부의 구조를 지키기 위해 바깥의 영향을 어느 수준에서 차단하는 장치. 생물이라면 그 피부일 테고 건축 물이라면 그 설계일 테고 사회 구조면 그 규범이지. 이제 이런 것을 생각해 볼까. 교회의 규범은 뭐지? 신앙이야. 순교는 용납되지만 배교는 용납되지 않아. 교회는 목숨보다 신앙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말이지. 그래서 순교자들은 이교도들의 칼날에 반항하지 않고 자신의 목을 내놓는 거지.”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렇다면 순교는 신앙을 위해 자기 자신에게 저지르는 범죄야.”

“예?”

“살인 방조야. 알겠나? 자기를 죽게 내버려뒀으니까. 살인 방조는 살인과 똑같은 거지. 자, 신앙을 위해 자신에게 범죄를 저질러도 된다면, 타인에게 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자신과 남을 똑같이 대해야 되니까. 그래서 파킨슨 신부는 단검으로 상대방을 찌르지. 난 겉으로 보기엔 궁색해 보이 는 그 신부가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 칼잡이들의 종부성사를 해치웠는지 정말 궁금해. 어쨌든, 그렇다면 보통의 순교자와 파킨슨 신부의 차이는 뭐 지? 자신에게 저지르는 죄와 남에게 저지르는 죄의 차이인가? 하지만 모두가 주님의 자식인 것을.”

“하지만 그것은……”

“그래. 궤변이지. 그리고 왜 궤변이 되는지에 접근하는 순간 교회 체제는 위기를 맞게 되는 거야. 안타깝게도 파킨슨 신부가 건드리고 있는 것이 바 로 그 지점이고.”

퓨아리스 4세는 다시 술잔을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찡그린 표정으로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던 플로라는 조심스럽게 술병을 들어 빈 술잔을 채웠다.

“그것에 대해서는 말씀하셨습니까?”

“그거라니?”

“펠라론 게이트 말입니다.”

“안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말했어.”

“뭐라고 하던가요?”

“아무 말도. 돌려서 말했지만 뜻은 명확하게 전달되었을 거라고 생각해. 난 거기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해 보였지. 즉 그것을 허 락해 줄 수도 없고 허락하지 않을 수도 없는 나로서는, 아흔아홉 눈이 모두 감길 때까지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는 거지. 아마 쉽게 이해했을 거야. 그 러니 무의미한 요청을 하거나 고집을 부리거나 하지는 않은 것이겠지.”

“그렇지 않으면……”

“응?”

플로라는 약간 수심이 깃들인 얼굴로 발코니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펠라론 시내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법황의 허락 같은 것은 아예 신경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일 수도 있겠군요.”


“본인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겠군. 어쨌든 당신이 찾던 답은 물 건너간 거요?”

데스필드는 질문했고, 그리고 잠시 후에 걸음을 멈췄다. 옆에서 걸어오고 있던 파킨슨 신부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데스필드는 그들이 걸어오고 있던 뒤쪽을 바라보았다.

파킨슨 신부는 대로 가운데서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지만 자신 속에 깊이 잠겨 있는 신부는 그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데스필드는 신부에게 걸어가서는 그 앞에 섰다.

“뭐하는 거죠?”

“발을 구르고 있다고나 할까.”

데스필드는 미간을 찡그리며 신부의 이마를 바라보았다. 파킨슨 신부는 고개를 들며 씨익 웃었다.

“제기랄. 그 사슴의 비유 마음에 든다. 좋아. 말(馬)은 할 수 없지만 사슴은 할 수 있는 것이 있지.”

“그게 뭔데요?”

“뿔로 들이박는 거지.”

데스필드는 핏 웃으면서 질문했다.

“그래, 뭘 들이박으려오?”

“펠라론 게이트. 안내해.”

“뭐요?”

“다시 말할까? 여기서 펠라론 게이트까지의 패스를 그으란 말이다. 난 그게 자케산에 있다는 것 말고는 어디 있는지 몰라.”

데스필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데스필드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허락받으셨소?”

“아니.”

“그럼 또 거역하겠다는 거요?”

“허락은 하지 않으셨지만 반대도 하지 않으셨다. 그 분은 라오코네스 출현이라는 사실에 당황하신 것 같아.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는 아예 이야기도

하지 않음으로써 신도의 정당한 권리를 부정하지도, 하지만 인정하지도 않은 상태로 몰아가실 생각인 게야. 주여, 사도 중의 사도를 불쌍히 여기옵소 서. 성하께는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들어가 봐야겠다.”

“법황 당신이야 그렇다 치고, 그럼 라오코네스 당신은? 애초에 아무도 거기 들어가지 말라고 한 것은 라오코네스 당신……”

파킨슨 신부는 고함을 버럭 내질렀다.

“그 쓸데없이 용적 많이 차지하는 비효율적 피조물 녀석이야 내 알 바 아냐! 아니, 그 놈 괘씸해서라도 난 기어코 들어가 볼 테다.”

“……당신 지금 일몰의 제왕 당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 맞지요?”

“거어럼.”

데스필드는 갑자기 이 용맹무쌍한 신부의 마음속에 두려움이라는 것이 있기나 한 건지 궁금해졌다. 그는 침착을 되찾으려 애쓰며 말했다.

“당신의 시도가 펠라론에 불벼락을 이끌어올지도 모른다는 건 생각해 봤소?”

“뭐?”

“당신이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갔을 경우 라오코네스 당신이 나타나서는 ‘아무도 들어가지 말랬잖아!’라고 노기등등하게 외치며 1700년 묵은 포도 주병을 깨버릴 거라는 것을 생각 못해 봤냐고.”

“……데스필드?”

“아-?”

“몰래 들어가자.”

데스필드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한참 동안 왈왈거렸고 그 동안 파킨슨 신부는 그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는 찬송가 를 불렀다.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 찬송가를 부를 때쯤 파킨슨 신부는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데스필드를 발견했다. 신부는 푸짐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럼 안 듣고 있었군?”

“그렇게 물었었냐?”

데스필드는 두 손으로 자기 목을 조른 다음 발로는 복잡한 스텝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데스필드가 3연속 스핀을 시도할 때쯤 파킨슨 신부는 심드렁 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적당히 해둬. 법황청에겐 피해가 안 돌아갈 방법으로 할 테니까.”

“어떻게!”

“안내나 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데스필드는 당신이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 더 불안해 등으로 말해 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두 가지 진실이 있었다. 첫째, 이 막무가내를 평생의 신조로 삼고 있는 듯한 신부를 설득하는 것은 잊혀진 탑의 이름을 맞추는 것보다 더 힘들 것이며, 둘째, 그가 받아들인 벌쳐의 의뢰는 파킨슨 신부를 펠라론 게이트까지 펠라론이 아니라 안내하라는 내용이었다. 마치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을 예측이라도 했다는 듯이 그런 의뢰를 한 벌쳐에 대해 소리없는 욕설을 퍼부으며 데스필드는 윈디어의 고삐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속으로는 절망적인 추측을 해보았다. ‘설마 이 알 량한 스완 대거로 맞서 싸워야 되는 당신이 라오코네스 당신은 아니겠지?’

바람이 나무를 빗질하는 싸르륵거리는 소리가 펠라론의 낮은 오후를 채우고 있었다. 물론, 높은 오후는 황금의 태양의 영토였다.

신부와 패스파인더는 펠라론 강의 강변을 따라 걸어가다가 역류의 법황 로키가 자케산의 산불을 끄기 위해 강물을 역류시킨 로키 대로에 접어들었 다. 발길 돌리는 곳마다 남아 있는, 혹은 증거하고 있는 법황들의 기적들을 보며 파킨슨 신부는 점점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법황은 신의 이름을 가지며 기적으로써 그 이름을 증거한다. 그리고 1700년의 펠라론 역사에서 그 기적의 고리가 끊어진 적은 한번도 없다. 창조자 의 이름은 유릴란드였고 오펠이었고 라우스였고 로키였고 지금은 퓨아리스다. 따라서, 이성의 나침반이 비록 인간을 가리키고 있더라도 파킨슨 신부 는 퓨아리스 4세를 창조자 주님 그 자신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언젠가 핸솔 추기경이 지적했듯이 너무도 단순하다. 법황이 곧 신이며 따라서 배교는 법황의 기준에 맞는가 틀리는가로 결정된다. 그리고 이 단순명쾌한 진실은 파킨슨 신부에게 배교자의 낙인을 찍는다.

그리고 여기에 어떤 변명이 있을 수 있는가. 이 도시에서 눈 닿는 곳마다 보이는 것은 법황과 신의 일치를 나타내는 증거들뿐이다. 파킨슨 신부는 주 위를 둘러보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결국 펠라론 파인의 은빛 물결 속에 들어섰을 때야 파킨슨 신부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좀 편하게 걸을 수 있게 되 었다.

“저게 진짜 은이면 얼마나 멋질까.”

데스필드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가 가리키는 것은 은빛 바늘처럼 보이는 펠라론 파인의 침엽이었다. 햇살 속에 그 침엽들은 하얗게 불타고 있었고 그래서 그 아래를 걷는 두 사람을 몽환적인 기분에 젖게 만들었다. 파킨슨 신부가 웃으며 대답해 주려 할 때 데스필드가 말했다.

“다 왔소. 이 앞이오.”

눈앞에서 대로는 둘로 갈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데스필드는 계곡 쪽으로 향하는 길을 가리켰다. 그 안쪽으로는 포장이 되지 않은 산길이 이어져 있 었고 저 멀리 얕은 담장 같은 것이 얼핏 보였다. 파킨슨 신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길 쪽으로 들어섰다. 데스필드가 당황하여 말했다.

“어? 잠깐만. 여기서 멈춘 것은 계획 같은 것이 있으면 들어보자는 의미였다고요.”

“아, 계획? 있지. 너는 이대로 돌아가거라.”

“뭐요?”

“돌아가라고. 이제 됐으니까.”

“아, 그건 안 되겠는데. 본인은 끝까지 봐야겠소. 젠장. 그리고 본인에겐 본인 나름대로의 계획도 있단 말이오.”

“뭔 말이냐?”

“그건 있다가 말해 주지. 본인이 지금 알고 싶은 건 당신이 아직까지도 거기 들어가볼 생각이 있느냐 하는 거요.”

“있다. 확실해.”

“이런, 썩을. 좋소. 경비병은 어쩌고? 멍청한 순례자 당신이나 광신도 당신, 혹은 실연당한 철부지 청년 당신이 뛰어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칼솜씨 좋은 경비병 당신들이 배치되어 있소.”

“그래. 그들이 있어서 다행이지.”

파킨슨 신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단숨에 그 의미를 알아들은 데스필드는 못 살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알았소. 젠장.”

그리고 그들은 산길 쪽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조금 후, 펠라론의 하늘 아래로 강력한 포성이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