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7장 : Wedding March – 4화
포성의 메아리가 길게 꼬리를 끄는 가운데 퓨아리스 4세는 맹렬한 속도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법황은 단숨에 발코니로 달려가 사방을 둘러보았고 플로라 역시 당황하여 가운을 들어올렸다. 그때 포성의 여음 치고는 너무 낮은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법황은 문 쪽을 돌아보며 외쳤다.
“어이가 없군. 그냥 뛰쳐들어와야 할 시간인 것 같은데 노크를 하다니? 어쨌든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핸솔 추기경이었다. 추기경은 약간 난처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간이 좀 안 맞군요. 그의 성격이 급하다는 것을 짐작했어야 하겠지만.”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아, 네. 저 포성에 대해 설명드리고자 왔습니다.”
“응?”
핸솔 추기경은 플로라에게 가볍게 목례하고는 법황을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자케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파킨슨 신부의 핸드건일 겁니다. 아마도 펠라론 게이트 경비병을 쫓아내기 위한 위협 사격일 테지요.”
“잠깐. 자네, 신부의 계획을 알고 있었나?”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도 그가 법황청을 나서자마자 일을 벌일 거라는 건 짐작하지 못했군요. 일단 펠라론 게이트 경비병들에게 반항하 지 말라고 일러두긴 했습니다.”
“말이 거꾸로 된 것 아닌가? 그가 이런 일을 벌일 줄 알았다면 미리 막았어야지.”
“그는 신도고,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라오코네스는…………”
“그가 들어가는 것을 원하고 있었지요.”
퓨아리스 4세는 날카로운 눈으로 핸솔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핸솔 추기경은 신비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는 몸을 돌렸다. 그는 테이블 앞에 서서는 술 병을 들어올렸다.
“라오코네스가 굳이 나서지 않더라도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을 놓고 본다면 그가 파킨슨 신부를 겨냥해서 말한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핸솔 추기경은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그가 신부를 겨냥해서 말한 것이라면 그의 말은 거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만일 라오코네스가 정말로 파킨슨 신부가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싶었다면 바로 어제나 오늘쯤 나타나서 파킨슨 신부를 밟아버리면 그만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미리 나타났지요.”
퓨아리스 4세와 플로라는 당황한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핸솔 추기경은 다음 잔에 술을 따랐다.
“라오코네스가 저보다 더 안목이 없다고 생각하긴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대드래곤은 파킨슨 신부가 용수철 같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겠지요. 저도 알아볼 정도였으니까요. 따라서, 만약 그를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가게 하고 싶다면 들어가지 말라고 하면 됩니다. 그리고 대드래곤은 그렇게 했습니 다.”
“아니, 내버려두었어도 들어갔을 텐데?”
“그건 알 수 없는 문제입니다만 저는 이런 것을 여쭙고 싶습니다. 혹시 그와의 회견이 예상 외로 싱겁게 끝나지 않았습니까?”
퓨아리스 4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핸솔 추기경은 두 개의 술잔을 들어올려 하나를 법황에게, 그리고 하나는 플로라에게 내밀었다. 둘은 엉겁결 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아마 라오코네스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파킨슨 신부는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가고 말겠다는 생각만 하게 되었을 겁니다. 그래서 성하와의 회담은 대 충 끝내버린 거죠. 정말 순진한 악동 같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라오코네스가 원했던 것은 아마 그런 것이었을 겁니다.”
“말이 되는 것 같군. 좋아. 그런데 이 술잔의 의미는 뭐지?”
“그의 귀환을 미리 축하하고 싶어서입니다. 파킨슨 신부는 지금껏 펠라론 게이트에 몸을 던졌던 모험가나 낭만가와는 다릅니다. 그에게는 대드래곤 의 후원이 있지요. 그래서 돌아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 안쪽에 대한 최초의 보고자가 될 수 있겠지요.”
핸솔 추기경은 자신의 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혹 우리 시대에는 못 돌아올지도 모릅니다만, 뭐 어떻겠습니까. 그럼, 건배할까요?”
데스필드는 배낭에서 밧줄을 꺼내었다. 그리고 밧줄을 두 겹으로 해서는 그 한쪽 끝을 파킨슨 신부의 허리에 묶었다. 그 동안 파킨슨 신부는 핸드건 으로 담을 겨냥하고 있었다.
얕은 담에는 경비병들이 벽에 붙어서 있었다. 그들은 예상외로 고분고분했고 파킨슨 신부는 그들이 핸드건에 겁을 집어먹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 다. 물론 그들이 고분고분한 이유는 핸솔 추기경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파킨슨 신부의 판단이 꼭 틀리다고는 볼 수 없다. 벽에 붙어선 경비병 들은 신부가 오발이라도 일으킬까 봐 공포에 떨고 있었다.
밧줄을 신부의 허리에 묶은 데스필드는 그 반대쪽 끝을 집어들어 윈디어의 안장에 단단히 묶었다. 빠른 손놀림으로 신부와 윈디어를 연결시켜 놓은 데스필드는 한숨을 돌리고는 약간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펠라론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사방으로 얕은 담장이 둘러친 공터 가운데 그것이 서 있었다. 문이라기보다는 거울을 연상시키는 타원형의 테두리가 보였고 그 안쪽으로는 암흑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크기는 꽤 커서 말에 탄 채로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전체의 모습은 마치 아지랑이처럼 초점이 맞지 않았고 불 분명해 보였다. 똑바로 보기 위해 눈을 부릅뜰수록 더욱 보기 어려웠다. 가운데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암흑 역시 뭔가가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 단지 착시 현상인지 실제로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데스필드는 테두리의 위쪽, 그러니까 보통의 문에서라면 상인방이 있을 부분 에 무슨 글씨나 무늬 같은 것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것이 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그를 흘끔 돌아본 파킨슨 신부가 말했 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뭐요?”
“엘핀으로 그렇게 적혀 있다. ‘거룩하신 주님의 영광에 의지하여’라는 뜻이지.”
“글쎄. 본인은 아무리 봐도 저게 글씨인지 그림인지도 모르겠는데. 혹시 그냥 짐작으로 그렇게 말하곤 하는 거 아니오? 말씀하신 내용도 그렇고.”
“곁눈으로 보면 조금씩 보인다더구나. 꽤 많은 수의 학자들이 도전해서 가까스로 알아낸 거야. 그리고 덕택에 무수한 학자들의 눈이 돌아갔다더군.” 데스필드는 피식 웃고는 매듭을 한번 더 점검했다.
“좋소. 혹시나 못 돌아올 사정이 있으면 밧줄을 당겨 신호하쇼. 본인이 밧줄을 잡아당기리다. 그리고 들어가서 한참 동안 나오지 않으면 역시 당기 겠소. 얼마쯤이면 되겠소?”
“글쎄. 짐작할 방법이 없잖냐. 굶어죽을 것 같다고 생각되면 당겨라.”
“이런! 그건 너무 길잖아요. 포성 때문에 곧 당신들이 몰려올 텐데.”
“아, 그렇군. 알았다. 네가 더 버티기 힘들면 잡아당겨라.”
“그렇게 하지. 핸드건 이리 주쇼.”
파킨슨 신부는 조심스럽게 핸드건을 건네고는 데스필드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쏠 수 없게 해놨다. 네가 이것을 똑바로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사 고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데스필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윈디어에 올라탔다. 그리고 경비병들의 등을 향해 핸드건을 겨냥했다.
파킨슨 신부는 그와 윈디어를 연결하고 있는 밧줄들을 엉키지 않게 바닥에 잘 펴놓은 다음 심호흡을 하고는 펠라론 게이트 앞에 섰다. 데스필드 역 시 잔뜩 긴장한 채 신부의 등을 바라보며 손만 돌려 경비병들을 겨냥했다. (그래서 경비병들은 너무 무서웠다.)
잠시 후 파킨슨 신부는 큰 소리로 외쳤다.
“에라, 이따가 보자!”
그리고 파킨슨 신부는 펠라론 게이트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파킨슨 신부가 맨처음 느낀 것은 냄새였다.
어떤 희한한 것을 보거나 듣게 되더라도 놀라지 않을 결심이었지만, 신부는 냄새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상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고, 그리고 어두웠다. 파킨슨 신부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지만 아무 빛도 없었기에 팔다리의 희미한 윤곽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파킨슨 신부는 손을 얼굴 앞까지 끌어올려 흔들었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신부는 자신의 이마를 때리게 되었다.
몸이 없어진 것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린 파킨슨 신부는 허리를 더듬어보았고 밧줄이 그대로 묶여 있음을 확인했다. 밧줄은 그의 등뒤에서 뒤로 길게 늘어져 있었고 끊어지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파킨슨 신부는 장님이 된 기분을 느끼며 주위를 더듬어보았다. 하지만 밧줄 이외에 손에 닿는 것 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마디로 아무것도 없었다. 파킨슨 신부는 맥이 풀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조금 후에는 소스라치듯 놀랐다. 그의 생각대로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닥조차도.
그는 자신이 어딘가에 떠 있다고 생각했다. 빛도, 바닥도, 아무것도 없다니. 격하게 호흡하던 파킨슨 신부는 냄새는 있었다고 다짐해 보았지만 그렇 게 생각하자마자 그것이 무슨 냄새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였다. 그의 주위에 있는 것은 아무래도 호흡할 수 있는 공기뿐 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조차 확신할 수는 없었다.
파킨슨 신부는 소름이 돋은 팔을 서로 문지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닥이 없었기 때문에 어디로 걸어갈 수도 없었다. 문득 그 사실이 그에게 공포 로 다가왔다. 걸을 수가 없으므로 뒤로 돌아나갈 수도 없는 것이다. 비명을 지르려던 파킨슨 신부는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밧줄은 연결되 어 있고 여차하면 데스필드가 끌어당겨줄 것이다.
파킨슨 신부는 갑자기 깨달았다.
소리,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다. 파킨슨 신부는 그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다는 것에 놀라움을 느꼈다. 자신의 격한 호흡 소리, 그리고 비명을 지르 기 위해 움직이던 턱과 치아에서 나던 소리, 그리고 이제 파킨슨 신부는 자신의 맥박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소리를 내고 있었고 다른 소리도 낼 수 있다. 당연하다. 왜 말을 할 수 없단 말인가. 나는 말을 할 수 있다. 파킨슨 신부가 그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 것은 아무런 자극도 없었기 때문이 다.
파킨슨 신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다.”
“누가 있습니까?”
파킨슨 신부는 다시 뛰어오를 듯이 놀랐다. 물론, 완전히 수사적인 표현일 뿐이다. 바닥이 없으므로 뛰어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쨌든 파킨슨 신 부는 다시 격한 호흡 소리와 맥박 소리를 내며 전방을 주시했다.
대답이 있었다. 질문보다 먼저. 파킨슨 신부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 목소리는 어떠했더라?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린이인지 어 른인지도 알 수 없었다. 아니, 그것이 제국어로 말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파킨슨 신부는 자신이 무엇을 들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신 부는 다시 질문했다.
“그렇다.”
“누가 대답했습니까?”
파킨슨 신부는 헐떡거렸다. 아무래도 대답이 있는 것 같다. 파킨슨 신부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나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아니다.”
“당신은 신입니까?”
“아니다.”
“그럼 혹시 당신은 악마입니까?”
파킨슨 신부는 당혹했다. 그는 팔짱을 끼려다가 주춤했다. 그것이 옳은 일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답은 자신이 신도 악마도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혼란스러운 것은 아무래도 대답이 질문을 앞서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파킨슨 신부는 질문하기 전에 대답을 알지는 못했 다. 그리고 잠시 후 파킨슨 신부는 자신이 뭐가 ‘전’이고 뭐가 ‘후’인지도 잘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다.”
“혹시 당신은 제 자신입니까?”
“그렇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인 것입니까?”
그냥 당신이란 말이지. 파킨슨 신부는 질문을 멈춘 채 생각에 잠겼다. 이 상황은 왠지 데스필드에게 설명시키면 잘할 것 같은데. 녀석을 여기로 끌어 당길까? 그러나 파킨슨 신부는 그 경우 이곳에서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생각해야 했다.
“아니다.”
“좋습니다. 신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고 저 자신도 아니고 그냥 당신일 뿐이라는 것이군요?”
“네가 가진 개념들을 포기하면 나는 네 속에 구현되지 않는다.”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파킨슨 신부는 다시 질문을 던지기 전에 꽤 열심히 생각해야 했다.
“그렇다.”
“당신이 누군지 알려면 개념의 소거 대신 개념의 확장을 시도하라는 겁니까?”
“지금은 그렇지.”
“어렵습니다. 저는 우주나 신보다 더 큰 개념을 그릴 수 없습니다. 사실 그것들조차 말을 할 수 있을 뿐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습 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지?”
“좋습니다…… 당신이 누구든 간에, 제 질문에 대답해 주실 수 있습니까?”
먼 곳, 혹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부드러운 흔들림 같은 것이 전해져 왔다. 파킨슨 신부는 그것이 웃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흔들림 속에 파킨 슨 신부는 한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이제 이 아무런 자극이 없어서 소름 끼치는 공간은 아무런 자극이 없어서 편안한 곳으로 바뀌고 있었다.
“듣겠다.”
“감사합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옳다.”
“저는 율리아나 카밀카르의 암살을 저지했습니다. 교회가 그것을 원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 말입니다. 제 행동이 옳은 것입니까?”
파킨슨 신부는 맥이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옳다.”
“교회가 제국의 평화를 위해 타율적 순교자로 율리아나 카밀카르를 지적한 것은 옳은 일입니까?”
예상대로의 대답이었다. 파킨슨 신부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윤간범들을 사살한 너 또한 옳다.”
“모두가 신의 뜻이므로 옳다는 것이군요. 밤하늘에 별이 뜨는 것이, 구름이 비가 되는 것이, 손가락을 모두 구부리면 주먹이 되는 것이, 잠잠하던 산 이 화산이 되어 폭발하는 것이, 초경도 치르지 않은 소녀가 윤간당한 후 살해당하는 것이 신의 뜻인 것처럼, 모든 신의 창조물들이 하는 일은 다 옳은 일이라는 말씀이군요.”
파킨슨 신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상대를 향해 사죄를 표했다.
“예. 저도 스튜 속에 든 감자와 당근이 누가 더 요리에 도움되고 있는지를 다툰다면 요리사를 웃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시 부드러운 흔들림이 다가왔다. 파킨슨 신부는 보이지 않는 두 손을 조심스럽게 마주쥐었다. 메마르고 마디가 툭툭 불거진 손가락들이 서로에게 얽혀들었다.
“너는 그것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감자나 당근과는 달리 인간에게는 신께서 주신 자유 의지가 있습니다.”
“너는 왜 인간은 선을 창조할 수 없는지를 묻고 있느냐?”
“자유 의지라는 것이 어쩐지 신께서 주신 어음에 배서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할 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기는 합니다만. 결국 제 문제는 그것인 것 같습니다. 그 어음의 액수가 성전이라는 훌륭한 회계장부에 의해 다 결정되어 있다는 점. 왜 신은 우리에게 공수표를 주시지 않으셨을까 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배서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는 행위뿐입니까? 액수를 적어넣을 수는 없습니까?”
파킨슨 신부는 왈칵 눈물을 흘렸다.
“나는 나다.”
“오오, 주여. 당신은 주님이십니까?”
“너는 답을 만들 수 있다.”
“알겠습니다. 저는 그것이 궁금합니다.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 인간은 선을 창조할 수 없습니까?”
파킨슨 신부는 눈물을 닦으려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을 더 잘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신부는 눈물을 그냥 흐르도록 내 버려둔 채 어둠을 바라보았다.
“그렇다.”
“답을 만들 수 있다고요?”
“가거라.”
“어떻게 말입니까?”
눈앞의 어떤 암흑이 다른 암흑들의 앞으로 돌출되고 있었다. 혹은 물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암흑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패스파인더가 네 길을 안내할 것이다. 그는 네 안내자이지만 동시에 동행자다. 그를 따르고 그로 하여금 너를 따르게 하라.”
빛은 점점 더 뚜렷한 형체로 되태어나고 있었다. 파킨슨 신부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 빛 속에 떠오르는 것은 그 자신의 모습뿐이었다. 그리고 파 킨슨 신부는 자신이 점점 움직이고 있다는, 혹은 그 빛이 점점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부는 다급하게 질문했다.
“말하라.”
“한 가지 더 알고 싶습니다. 꼭 알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지?”
“신은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파킨슨 신부는 똑바로 섰다.
주위는 다시 빛나고 있었다. 눈물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신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소름이 돋을 만큼 추운 듯 도 하고 몸이 뜨겁게 불타고 있는 듯도 한 이상한 느낌 속에서 신부는 자신의 두 팔을 움켜쥐었다.
그때 그의 등뒤에서 당혹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젠장! 당신을 믿다니, 본인이 얼이 빠져도 한참 빠졌지!”
데스필드의 목소리였다. 파킨슨 신부는 빙그레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나 윈디어에 타고 있던 데스필드는 엉뚱한 방향을 보며 고래고래 고함 지르 고 있었다.
“뭐요? 펠라론일 거라고? 여기가 펠라론이야? 엉? 여기가 펠라론이냐고!
파킨슨 신부는 당황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케산이 아니었다. 은빛 펠라론 파인은커녕 풀 한 포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돌밖에 없었다. 뒤도 돌이고 아래도 돌이고 양쪽 벽도 돌이었다. 그들은 큼직한 돌로 만들어진 어떤 통로 같은 곳에 서 있었다. 신부의 오른쪽 벽으로는 커다란 창문이 통로를 따라 달리고 있었고 그 중간중간에 적당한 간격을 두고 돌기둥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창문을 통해 푸른 하늘과 멀리 떨어진 수평선이 보였다. 하늘과 수평선의 각도 는 아무래도 그들이 서 있는 곳이 엄청나게 높은 건축물 안의 통로라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윈디어에서 내린 데스필드는 창문 쪽으로 달려가 바깥을 내다보고는 더 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미치겠어. 여기가 도대체 어디야? 맙소사, 수백 피트는 되겠네! 얼씨구? 바다가 새카맣게 보이네? 말씀 좀 해보쇼! 여기가 어디요?”
신부를 향해 몸을 돌리던 데스필드는 그제서야 말을 멈췄다. 파킨슨 신부 역시 황당한 얼굴로 데스필드를 마주보았다. 파킨슨 신부를 바라보던 데스 필드의 얼굴에 갑자기 동정심이 떠올랐다.
“쯧쯧. 나잇값도 못하고 삐지셨소? 그렇다고 울 건 또 뭐야. 본인이 잘못했소. 맘 상해하지 마쇼. 에이, 또 늙은이 변덕으로 꽁해 있을 건 아니죠? 코 한번 풀고 잊으쇼.”
“……데스필드?”
“예?”
“주님은 너를 사랑하신다.”
“본인 생각에도 그럴 만해.”
“하지만 나는 그러질 못하겠다!”
잠시 폭력적인 장면이 연출되고 나서 데스필드와 파킨슨 신부는 자신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연구해 볼 만한 침착과 여유를 되찾았다.
“너 어떻게 된 거냐? 여기가 어디지?”
“허! 본인이 어떻게 알겠소? 어, 아마도 벽에 붙은 경비병들 당신의 엉덩이 품평해 주고 있던 중이었을 거요. 어느 당신에게 짝궁둥이라고 말해 주었 는데 당신이 결사적으로 아니라고 주장하더군. 마치 평소에 당신 엉덩이 보고 살았던 것처럼 말이야. 그래서 약간의 언쟁을 일으키던 중이었는데, 갑 자기 뭔가 슬쩍 당겨지는 느낌이 들더라고. 본인은 당신이 밧줄 당기는 줄 알았소.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갑자기 이런 희한한 곳이던데. 그럼 당신 도 여기가 어딘지 모르는 거쇼?”
“그래. 모르겠다. 난 그냥 펠라론 게이트 밖으로 도로 나온 줄 알고 있었는데.”
데스필드는 이맛살을 퍽이나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다가 다시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파킨슨 신부도 그 뒤를 따랐다.
창밖을 내다본 순간 파킨슨 신부는 현기증을 일으켰다.
건물 외벽이 휘어져 있는 느낌을 줄 정도로 높은 곳이었다. 데스필드의 말대로 수백 피트는 될 만한 높이였고 저 아래쪽으로 까마득히 해안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가 보였다. 두서없이 쌓여 있는 바위들을 덮치는 파도들은 아무래도 수십 피트는 될 것 같은 크기였고 그래서 신부는 그들이 얼마나 높 은 곳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더 황당한 것은 그들의 눈 아래에서 날아다니고 있는 갈매기들의 모습이었다. 이제 파킨슨 신부는 다른 사람들에게 날 고 있는 갈매기의 등이 어떤 모습인지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눈을 꾹 감았다가 위를 돌아본 파킨슨 신부는 더 이상 놀랄 기분도 들지 않았다. 건물의 위쪽은 구름 속으로 까마득히 멀어지고 있어 그 끝이 잘 보이지 않았다.
파킨슨 신부는 데스필드를 돌아보았다. 데스필드는 머리를 휘휘 내젓다가 신부를 돌아보았다.
“어딘지 알 만하오.”
“흐음.”
“바닷가에 서 있는 이 정도 높이의 탑이라면, 아니 바닷가가 아니더라도 이 정도 높이의 탑은 전세계에 하나밖에 없지 뭐.”
파킨슨 신부도 짐작할 수 있었다. 대륙의 동쪽, 그리고 카밀카르의 서쪽에 있는 이 유명한 그러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가진 탑은 카밀 카르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카밀카르에 다가가는 배들은 모두 하늘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까마득히 솟아오른 이 탑을 보며 카밀카르의 방향을 짐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카밀카르 자신은 이 탑을 자신의 영토에 포함시키고 싶어하지 않으며 심지어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뱃사람들은, 특히나 폭풍이 불어올 것처럼 수평선이 불그스름하게 불타오르는 석양 무렵 햇살을 받아 버밀리언 으로 고요히 타오르고 있는 이 탑의 모습을 보는 뱃사람들은 카밀카르의 그런 태도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곤 한다. 땅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서 내려오는 것 같은 그 초절적이고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듯한 모습을 보며.
“잊혀진 탑?”
“그런 것 같소.”
그리고 데스필드는 찡그린 눈으로 파킨슨 신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칫하면 본인이나 당신도 잊혀질 수 있소. 본인이 알기로 잊혀진 탑에는 입구가 없단 말이야. 그러니 설명 좀 해주시겠수? 본인이 도대체 어떻게 수천 마일이나 떨어진 이 잊혀진 탑 섬에 나타나게 된 거지?”
파킨슨 신부는 어떤 대답으로도 데스필드를 만족시킬 수 없을 것 같은 기분 속에 암담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