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8장 : 산폭풍, 평야로 – 1화
데스필드는 잊혀진 탑의 구조를 이해해 보려 했다. 그러곤 분노를 터뜨렸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하다. 아래로 내려가는 것. 물론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잊혀진 탑에는 입구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18층이나 44층, 혹은 126층쯤에 있을지도 모르는 입구를 찾아내는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따라서 그들은 1층에서 다른 목격자들이 발견하지 못했던 입구를 찾거나, 아 니면 입구를 만들거나, 하다못해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창문에서 뛰어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이런 지극히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을 때 데스필드는 이것이 그가 맡은 패스파인딩 중에서 가장 단순한 것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창 밖으로 어둠이 내리깔리고 있을 무렵 데스필드는 벽을 걷어차며 발광을 하고 있었다.
“이건 탑이 아냐, 나무야!”
“뭔 말이냐?”
“자라고 있잖소! 그러니 내려가도 내려가도 계속 그 자리잖아!”
물론 잊혀진 탑이 자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잊혀진 탑은 일반적인 건축물과는 최소한의 근연 관계도 없는 기묘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아 래로 내려간다는 두 사람의 단순한 목적을 매우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잊혀진 탑은 외벽 바로 안쪽으로 둥글게 이어진 환형 통로들과 그것들을 위아래로 잇고 있는 계단들, 그리고 중심부의 둥근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 다. 데스필드는 각 층에서 세 개, 혹은 네 개의 계단을 발견했다. 어떤 층에서는 다섯 개의 계단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올라가는 것이기 도 했고 내려가는 것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전부 올라가는 것이거나 내려가는 것이었다. 어떤 층은 중간의 층을 뛰어넘은 채 연결되고 있는 것 같았고 같은 층임에도 불구하고 통로 중간이 막혀 있어 다른 층을 통해서만이 오갈 수 있는 곳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환형 통로들에는 가끔 중심부의 원형 방으로 통하는 입구가 있었다. 몇 개의 방 안으로 들어가보았으나 데스필드와 파킨슨 신부가 발견 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휑하니 비어 있는 방뿐이었다. 그 방들도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는데, 허리를 굽히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낮 은 방이 있는가 하면 천장을 보기 위해 목을 한참 꺾어야 되는 높은 방도 있었다. 데스필드는 가까스로 중심부의 둥근 방들을 나누는 바닥과 환형 통 로들이 같은 높이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길 찾는 작업을 더욱 헷갈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데스필드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탑의 이 기괴망측한 구조가 아니었다.
“이상해. 본인은 패스파인더요.”
멈춰 선 채 다리를 주무르고 있던 파킨슨 신부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 그랬어? 비밀은 지켜주지.”
“적당히 하쇼. 어쨌든 본인은 패스파인더이므로 철창이나 두꺼운 벽이나 일흔일곱 명의 미녀로 본인을 가둘 수는 있어도 미로로는 본인을 가둘 수 없다고. 그런데 이 탑에서는 패스를 그을 수가 없어요. 아래쪽으로의 그 간단한 패스가 안 그어진단 말이오.”
다시 한번 비꼬아주려던 파킨슨 신부는 헛바람을 삼키며 데스필드를 바라보았다.
“어라? 그러고 보니 그렇군. 너 왜 길 못 찾는 거냐?”
“퍽도 빨리 물어보시는군. 허!”
파킨슨 신부는 그제서야 크게 당황했다. 그는 데스필드에게 이 오후가 다 지나가고서야 길을 못 찾는다는 것을 고백하느냐고 화를 내었고, 데스필드 는 데스필드대로 패스파인더가 헤매고 있는 것을 보고도 아직까지 못 알아차렸냐고 응수했다. 두 사람의 논쟁이라기보다는 말다툼이 고성을 동반하 기 시작한 것은 얼마 있지 않아서였고 그 동안 윈디어는 침울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해학 정신이 풍부한 풍자 시인이 있었다면 이 장면에서 ‘그렇게 바람 사슴은 고등 생물로 자처하는 두 존재의 저등한 대화를 바라보며 언필칭 고등 생물로 태어나지 않은 자신의 행운에 감사하 고 있었다’ 등의 묘사를 생각해 낼 수 있었겠지만 그곳에는 그런 시인 같은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논쟁은 곧 흐지부지해졌다. 이성을 되찾았다기보다는 오후 내내 계단을 오르내렸기 때문에 얻게 된 피로 때문이다. 파킨슨 신부는 초조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럼, 데스필드. 이곳에서 나갈 방법이 없는 거냐?”
“응? 물론 최후의 수단은 있지.”
“설마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자거나 창문 밖으로 투신하자는 건 아니겠지?”
“기도하시라고 말할 생각이었는데.”
“그거 반대할 수 없는 말이라 더 짜증나는군. 젠장!”
“농담이오. 창문을 이용하는 건 맞지만 투신은 아니오. 밧줄이 있잖소. 절벽을 내려가듯이 탑의 외벽을 내려가면 돼.”
파킨슨 신부는 고개를 갸웃했다.
“밧줄이 저 아래까지 닿지는 않을 텐데?”
“무슨 상관이오. 중간의 적당한 창문에 도착한 다음 밧줄을 다시 아래로 내리면 되지.”
“어떻게 밧줄을 끌어내리는데?”
“밧줄 중간을 창문 기둥에 걸지요. 그러니까 이렇게.”
데스필드는 손가락으로 ∩ 모양을 그려보였다.
“그리고 밖으로 늘어진 두 가닥을 한꺼번에 잡고 내려가는 거요. 아래에 도착한 다음 한쪽을 놓고 다른 쪽을 잡아당기면 밧줄을 회수할 수 있소. 그 런 식으로 반복하면 언젠간 아래에 도달하겠지.”
“아, 그렇군! 그럼 왜 그 방법을 쓰지 않는 거냐?”
데스필드는 통로 벽에 기대어 서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선, 위험하오. 이 까마득한 높이에서 밧줄 하나 의지해서 외벽을 내려갈 자신 있으쇼? 바닷바람 겁나게 불어오는 지상 수백 피트 높이에서?”
파킨슨 신부는 그 상황을 상상해 보고는 곧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리고 데스필드는 고개를 돌려 그들을 따라오고 있는 윈디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당신 때문에, 윈디어 당신은 그런 재주를 부릴 수 없어. 놔두고 내려가야 될걸. 보나마나 굶어죽게 될 텐데 웬만하면 그러고 싶지 않군요.” “으음. 그렇구나.”
데스필드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고는 미간을 심하게 찡그렸다. 그들이 잊혀진 탑 안에서 위아래로 방황하는 동안 여름의 기나긴 낮도 벌써 끝나가고 있었다. 데스필드는 이대로 계속 움직일 것인가를 놓고 짧게 고민했다. 밤이 오더라도 큰 창문을 통해 달빛과 별빛은 충분히 새어들어올 것이다. 그 러나 데스필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 한숨 잡시다.”
“자자고?”
“그래요. 어두워지면 더 헤매게 될 가능성이 높아. 배고픈 상태에서 너무 움직이는 것도 안 좋을 것 같고. 눈 좀 붙였다가 내일 해 뜨는 대로 내려갈 길을 찾아보지요. 윈디어 당신에게 줄 것이 없다는 게 안 좋군.”
그들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닷바람을 피하기 위해 중앙실로 통하는 입구를 찾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들은 적당한 높이의 방으로 통하는 입구를 발견했다. 안쪽으로 들어간 파킨슨 신부는 아무렇게나 쓰러져 누웠다. 그냥 움직인 것이 아니라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한 것이라 두 사람과 윈디어 모 두 꽤나 지친 상태였다. 데스필드는 윈디어의 안장과 재갈을 벗겨준 다음 안장을 베고 누웠다.
여름인지라 돌건물 안쪽에서는 충분한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일행은 추위로 고생할 염려는 없었다. 오히려 불쾌할 정도의 더위가 일 행을 찾아들었다. 누워 있던 파킨슨 신부는 결국 못 견디겠다는 듯이 일어나서는 헐렁한 신부복을 벗어 바닥에 깔고 누웠다. 그 모습을 보던 데스필 드가 말을 걸었다.
“자, 이제 이야기 좀 합시다. 아까는 길 찾느라 이야기할 겨를이 없었지. 도대체 본인과 당신은 어쩌다가 여기로 날아오게 된 거요?”
“글쎄. 그게 나도 잘 모르겠다.”
“안에 들어갔던 이야기 좀 해보쇼. 거기서 뭔 일이 있었으니까 여기로 날아오게 된 거 아니오? 그 안은, 어, 정말 천국입니까?”
파킨슨 신부는 팔베개를 하며 돌천장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기 직전이라 서쪽을 향한 통로에서는 햇빛이 옆으로 새어들고 있었다. 윈디어가 불평 비 슷한 푸르릉거림을 내고 곧 고요가 찾아들었다.
“글쎄다. 천국은 아닌 것 같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 그렇게 말할 수는 없군. 목소리는 있었으니까.”
파킨슨 신부는 중간중간 하품을 하며 그가 펠라론 게이트 안쪽에서 본 것을 설명했다. 사실 본 것이라곤 마지막의 빛 이외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파 킨슨 신부는 그 안에서 그가 나누었던 대화를 정리해 보려 애쓰며 데스필드를 향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와 데스필드 사이로 비쳐들고 있는 햇빛 때문에 데스필드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파킨슨 신부는 그 햇빛 속을 떠다니는 금빛 먼지 너머로 데스필드를 보기 위해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냐, 데스필드?”
데스필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파킨슨 신부는 눈을 더 찌푸렸지만 그가 잠든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조금 후 담배 연기가 진 하게 피어올랐다.
“당신이 만난 것이 신 당신일까?”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데스필드.”
“어려운 건가? 글쎄. 본인이 생각하기로 신 당신이라면 척 보자마자 아, 당신이구나 하고 알아야 될 거 같은데.”
“그건 알 수 없지. 데스필드. 네 말대로 주님과 다른 모든 것을 구분하는 것이 있기는 하다. 주님은 유일한 창조자고 나머지는 전부 창조물이라는 점. 따라서 주님은 다른 그 어떤 것과도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그 특징은 우리가 주님을 알아보는 데 도움될지 도움되지 않을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창조물은 창조자를 설명할 수 없는 법이기 때문이야. 망치가 그것을 만든 대장장이를 설명할 수 있겠냐? 하지만 대장장이는 망치를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겠지. 그와 같다. 나는 주님의 창조물이란 말이야.”
“그렇다면 악마는 척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흐음. 악마는 그래도 우리와 같은 창조물이지. 절대 창조자라는 대명제를 둔 상태에서 악마와 우리는 같은 범주, 그러니까 창조된 것이라는 공통점 을 가지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마의 재주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겠지. 성전에서도 나타나듯이 악마의 변장 능력은 상상을 뛰어넘으니까.”
“아아. 악마 당신의 재주 같은 건 알 바 아니고, 본인은 한 가지만 지적하겠소. 본인이 여기로 오게 된 건 아무래도 본인이 당신과 밧줄로 연결되어 있어서요. 간단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고,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간단하지요?”
“그렇지요. 데스필드.”
“그러면 나는 왜 여기로 온 거냐?”
“바로 그것을 제기하고 싶은 거요. 당신은 답을 만든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들었다. 내가 답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했지.”
“답을 만든다는 말은 답의 창조자가 된다는 뜻도 있고 답의 일부가 된다는 뜻도 있습니다.”
“흐음. 그렇군. 요리사 당신이 빵을 만든다. 이 경우는 빵의 창조자가 된다는 뜻일 거요. 당신들은 모임을 만들었다. 이 경우는 모임의 일부가 된다 는 뜻이지.”
“어라? 그렇구나. 그렇다면 내가 답의 일부가 된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군?”
“그렇다면 당신은 이곳에서 누군가의 답이 되어줄 수도 있다는 의미인 거요?”
“그렇습니다. 파킨슨 신부님은 이곳에서밖에 만날 수 없는 누군가의 답이 되는 거죠.”
“이곳? 잊혀진 탑으로 날아오게 된 것은 그 때문인 거요?”
“잠깐만. 여기서밖에 만날 수 없는 것이 누군데?”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당신이 올바른 답이냐는 거지요. 당신이 찾고 있는 별은 뭡니까?”
“나는 인간이 선을 만들 수 있는지를 알고 싶다.”
“선? 선이라고 했소?”
“그래.”
“그게 무슨 뜻이쇼, 신부님 당신? 선을 만든다니.”
“나는 주님을 믿고 그 분을 사랑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장할 수 없는 영원한 어린아이일까? 우리는 영원히 신의 보호를 받고 그 분의 지도를 받아야 되는 존재일까? 나는 신으로부터 독립하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신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언제까지 나 그 분을 사랑할 것이며 그 분 또한 언제까지나 우리를 사랑할 것을 믿는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더 우월한, 더 훌륭한 것이 되기를 바라 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느냐? 국화를 키운다는 것은 언젠가 탐스럽게 피어날 그 꽃봉오리를 기대한다는 것 아니겠느냐? 나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심 을 믿기에 그 분이 우리의 발전과 성장을 기대할 것을 믿는다. 그 분이 우리의 번영과 행복을 바라시는 것처럼.”
“흐음. 선을 만든다라.”
“율리아나 공주의 건이 바로 그런 것입니까?”
“그렇지. 나는 주님의 사랑으로 성장한 내가 선을 만들 수 있을지, 주님 얼굴에 기쁨이 피어오르게 할 수 있을지를 알고 싶다. 성전이나 교회처럼 주 님이 만들어놓으신 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만들어낸 선으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그 분을 영광되게 해드릴 수 있을지 알고 싶단 말이다.”
“그건 언젠가 들어본 것 같군. 착한 노예 당신과 어리석은 노예 당신의 예였지요? 그리고 당신은 주인 당신이 시키지 않은 짓을 해서 주인을 기쁘게 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고?”
“그렇다. 그리고 내 문제가 뭔지도 말했지?”
“그 주인이 전능자라는 것이지요. 전능자의 명령은 완벽한 명령이고, 따라서 그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웃 기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래, 맞았어!”
“당신의 말대로라면 당신은 헛짓을 하고 있는 것이군, 안타깝게도.”
“아냐, 데스필드. 생각을 해봐라. 전능자이신 주님이 만드신 이 몸이 늙으면? 우리는 지팡이를 만들어 짚을 수 있다. 다리가 잘려나가면 의족을 만들 수 있고, 먼 곳을 보기 위한 망원경이나 작은 글씨를 보기 위한 안경 같은 것도 생각해 봐라. 성전에는 그것을 만들라거나 만들지 말라는 말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들을 만들어서 우리를 보완하고 그럼으로써 신을 더 찬미할 수 있지 않느냐?”
“그렇군.”
“만약 지팡이나 의족, 망원경 등이 신이 원하신 것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팡이가 필요없는 다리, 혹은 망원경이 필요없는 눈 따위를 가지게 되었을 거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을 만들어 사용하지. 그렇다면 우리는 선을 만들 수는 없을까? 우리는 더 착해지고, 더 많이 사랑할 수는 없을까? 주님이 만들어주신 이 몸을 더 정갈히 다루는 것처럼, 주님이 만들어주신 성전이나 교회보다 더 많이 사랑할 수는 없을까?”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그것은 배교는 아닌 것 같군요.”
“그렇지? 하지만 아직도 확신은 없다.”
“이제 당신이 좇는 별이 뭔지 알 것 같군요. 당신은 스스로 당신을 만들고자 하는 자. 그렇다면 당신의 반대는 세계에 의해 만들어지는 자아의 소유 자로군요.”
“그 당신이 누군데?”
“있습니다. 무리 속에서 더 두드러지는 자. 보입니다. 한 무리에 속해 있고 그곳을 벗어날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자. 그곳에서만 자신이 살아 있음 을 느끼는 자. 하지만 그 속에서 유난히 두드러지는 말투. 예, 보입니다. 이제 답은 만들어졌습니다.”
“답이 뭔데?”
“당신이 선택되었습니다. 파킨슨 신부님.”
“당신이 이곳으로 온 거니까.”
“그런데, 데스필드?”
파킨슨 신부는 미간을 문지르며 데스필드를 바라보았다. 이미 해는 졌고 그래서 오히려 데스필드의 모습은 더 잘 보였다. 그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햇살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둘이서 이야기 나눈 거 맞냐?”
데스필드의 얼굴 역시 파킨슨 신부처럼 의혹에 싸여 있었다. 하지만 데스필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어, 그렇잖으면?”
“그렇지. 이상한 말을 했군. 여기는 우리 둘밖에 없지.”
“아니, 하나 더 있소. 윈디어 당신이 있잖아.”
“아아, 그렇군.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꼭 여러 명이랑 이야기를 나눈 기분이야.”
데스필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편한 자세를 취했다. 돌벽은 순식간에 찾아든 어둠 속에 기이한 질감으로 되태어나고 있었다. 데스필드는 파이프를 챙기며 말했다.
“그만 주무쇼. 여기 뭐가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 불침번은 안 서도 되겠지.”
“그래. 잘 자라.”
그 시각, 다림 만에 떠 있는 물수리호의 메인 마스트.
짙은 밤 속에 물결은 고요하다. 알버트 ‘네일드’ 렉슬러 선장의 머릿결을 흐트러뜨리던 바람이 흠칫하여 물러난 자리에는 벨로린이 앉아 있었다. 벨로린은 알버트 선장의 다리에 등을 기댄 채 갑판에 앉아 있었다. 돛대에 못 박힌 시체와 그 발치에 앉아 있는 검은 소녀의 모습은 소름 끼치는 모 습이었고 그런 정제된 공포만이 가질 수 있는 섬세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 주위에는 그 모습을 보며 매혹되거나 겁에 질릴 눈 동자가 없었다.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다. 가끔 물수리호의 고급 선원들이 순찰을 돌기도 했고 다른 용무로 갑판을 가로지르는 선원들도 있었다. 하 지만 물수리호의 과묵한 선원들은 돛대 쪽에는 눈길도 보내지 않았고 벨로린 역시 그들 때문에 주의를 흐트러뜨리는 일은 없었다.
그런 무심한 눈동자조차 없는 어떤 시간.
벨로린의 눈동자가 갑자기 빠르게 움직였다.
벨로린은 왼손으로 갑판을 짚었다. 하지만 일어나는 대신 벨로린은 허리를 뒤틀며 갑판에 무릎을 꿇었다. 알버트 선장을 올려다보는 자세가 된 벨로 린은 선장의 다리에 얼굴을 묻었다. 굵은 혈관과 신경줄, 그리고 과장되고 왜곡된 근육들 속에 검은 입술을 묻은 채 벨로린은 낮게 속삭였다.
“아버지.”
벨로린의 왼손은 알버트 선장의 다리를 쓰다듬고 있었고 그 오른손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가슴께에 이른 벨로린의 오른손은 곧 녹슨 못대가리를 찾아내었다. 벨로린은 오른손 집게손가락으로 그 못대가리를 누르듯이 하며 말했다.
“이제 세 명의 하이마스터가 선택을 끝내었어요.”
벨로린은 머리를 뒤로 젖혔다. 하지만 머리카락과 어둠에 가려진 알버트 선장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벨로린은 선장의 머리 위로 보이는 별을 향 해 말했다.
“그리고 그들 중 둘이 이미 저편으로 넘어갔어요.”
벨로린은 못대가리에 손을 짚은 채 서서히 무릎을 일으켰다. 알버트 선장의 다리를 지나 그의 아랫배, 그리고 가슴에 이를 때까지 그녀의 얼굴은 선 장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그녀의 모습은 마치 고목을 기어오르는 검은 뱀처럼 보였다.
“비니힐에게 선택된 파킨슨 신부는 안되었군요. 그는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할 테죠. 하긴 그에게는 도움이 필요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비니힐 역 시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는 마스터는 아니지요. 비니힐이 그를 선택한 것은 혹 아무 도움도 주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요? 존재(be)하지도 부재(nihil) 하지도 않는 그 하이마스터의 성격은 나로서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나는 그런 의심이 들어요. 아니면 라오코네스의 장난일지도 모르지요. 신부를 그 곳으로 보낸 건 그니까. 어쨌든 파킨슨 신부는 안됐어요. 킬리 선장이나 서 발도에 비하면…
벨로린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조금 후 그녀의 작은 몸이 파르르 떨렸다.
“내가 또 동정했나요?”
벨로린은 녹슨 못대가리에 이마를 기대었다. 그녀의 작은 이마의 반을 덮을 만큼 큰 못이었다.
알버트 선장의 거친 머리카락들이 바람에 떠올랐다. 바람이 사그라들었을 때, 나부끼듯 떨어진 그 머리카락은 벨로린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벨로린은 흠칫하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거기 바보처럼 못 박혀 있는 주제에.”
쓸쓸한 시신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키의 흉내인가요? 아니, 당신은 또다른 키 드레이번일 수도. 아니, 그게 아닌가요? 저자는 아직 심장에 못이 박히지 않은 알버트 렉슬러인 건가요? 아버지, 부탁이니 악마를 동정하지 말아요.”
벨로린은 알버트 선장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려 애썼다. 하지만 그녀의 작은 키 때문에 고개 숙이지 않는 알버트 선장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는 어 려웠다. 벨로린은 피로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동정하세요.”
벨로린은 검은 손을 들어올려 검은 머릿결을 쓸어넘겼다.
“이제 넷. 그리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요.”
벨로린은 진저리를 치며 알버트 선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두 손으로 선장의 가슴에 박힌 못을 덮고는 그 위에 이마를 얹었다.
“철탑의 인슬레이버는 아직 찾지 못했어요. 새매의 공작? 그 거짓말쟁이는 종잡을 수가 없지요. 일몰의 왕은, 오오, 아버지. 나는 왕의 이름을 가진 자의 흉중은 알 수 없어요. 하지만 그가 신부를 잊혀진 탑으로 보낸 것으로 볼 때 나와 뜻을 같이 할 것 같지는 않아요. 그리고 황금의 조커는 아직 나 타나지도 않았고.”
벨로린은 온기를 구하듯 알버트 선장의 몸에 더 바싹 다가섰다. 그러나 그녀가 원하는 것은 따스한 피에서 흘러나오는 온기가 아니다. 그녀가 원하 는 것은 알버트 선장 아니면 아직 매장이 끝나지 않은 묘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시체와 죽음의 냉혹함에 몸을 깊이 빠뜨리며 벨로 린은 흐느끼듯 말했다.
“아버지. 더 아는 자는 더 불안한 법이죠. 모든 것을 아는 나는 모든 것을 두려워할 수 있어요. 남은 그들 중 과연 몇이나 나와 함께해 줄까요?”
알버트 선장의 머리카락이 다시 벨로린의 어깨에 흩뿌려졌다. 하지만 벨로린은 물러나지 않았다. 대신 벨로린은 조심스럽게 혀를 내밀어 자신의 얼 굴 앞에 늘어진 그 머리카락을 핥았다.
“내 선택을 철회하고 싶어요. 판데모니엄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갑자기 그녀의 의식 한가운데서 이질적인 경악이 솟아났다.
‘그게 무슨, 그러면 당신이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
거침없이 나아가던 노래에 갑자기 불협화음이 섞여든 것 같은 충격이 벨로린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벨로린은 알버트 선장의 머리카락을 깨물며 모 든 의식으로 외쳤다.
‘닥쳐! 플로라!’
의식의 저편에서 한없는 공포가 느껴졌다. 벨로린은 가슴을 부풀려 그 공포를 한껏 들이마시며 잔인하게 말했다.
‘비루한 년. 돌려보내도 돌려보내도 또 돌아오는구나. 법황의 첩질로 만족할 수 없는 거냐!’
한없는 공포 속에서 슬픔이 긴박하게 소용돌이쳤다. 벨로린은 의식의 채찍질을 중단한 채 짧게 호흡했다. 어쨌든 그녀는 자신이 불합리한 분노를 토 해내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옥의 지배자는 빠르게 자신을 되찾았다. 그녀는 동정심을 가진 하이마스터다.
‘불쌍한 것.’
주저하는 듯한 희망이 다시 그녀에게 다가왔다. 벨로린은 이 급격한 의식의 변화가 번잡하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잊어라. 플로라. 내가 조금 전에 한 말들을 모두 잊어라. 그리고 돌아가라.’
벨로린은 머릿속의 이물감이 아득히 멀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와 접촉해 보려던 플로라는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잊고 돌아갔을 것 이다. 절대로 망각하지 않는 그녀지만, 노래의 불꽃이 명령을 내린 이상 그녀에게는 감정의 희미한 자취마저 남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플로라는 그 녀가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임을 망각한 상태에서,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다시 접촉하려 할 것이다.
벨로린은 여전히 알버트 선장의 가슴에 이마를 기댄 채 극히 짧은, 마치 비명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고개를 든 벨로린은 자신의 입술에서 늘어진 머 리카락들을 보았다. 조금 전 그녀가 물어 끊어버린 알버트 선장의 머리카락들이다.
벨로린은 손가락을 들어올려 입 앞에서 휘저었다. 머리카락은 손가락에 감겨 입술에서 떨어져나왔고 벨로린은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벨로린은 눈을 감은 채 손가락을 입 안에 집어넣었다.
“그 친구의 맛은 어때? 시체 중의 시체라. 정말 진귀한 거지.”
벨로린은 맹렬한 속도로 몸을 돌렸다.
물수리호의 뱃전에 한 사내가 걸터앉아 있었다. 달빛이 그 머리에 떨어져 가볍게 부서지고 있었고 발치에는 커다란 배낭이 놓여 있었다. 벨로린이 똑바로 바라보는 가운데 사내는 일어섰다. 그가 일어서자마자 먼지가 일어나 달빛 속에서 반짝였고 그래서 사내는 마치 후광을 뿜어내는 것처럼 보 였다.
벨로린은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뜨리며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후에야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두 팔을 벌린 채 알버 트 선장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사내는 그 모습에 짧은 웃음을 터뜨리고는 메인 마스트를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벨로린 앞에 선 사내는 그녀의 조그만 키 너머로 알버트 선장을 거리낌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동안 벨로린은 섬뜩한 눈초리로 사내의 턱을 올 려다보았다. 잠시 후 사내는 감탄했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건 정말 걸작이군. 나도 맛 좀 보게 해주겠어?”
사내는 말 끝에 입술을 살짝 핥았다. 분명히 조롱하기 위한 의도임을 알고 있었지만 벨로린은 사람이나 동물이 내는 것 같지 않은 으르렁거림으로 사내를 후려갈겼다.
벨로린의 낮은 으르렁거림은 창검이 되어 사내를 침범해 들어갔다. 하지만 사내는 침착한 동작으로 뒤로 물러나며 어깨를 으쓱였다.
“부드럽게 살자구, 부드럽게.”
“그 얼굴은 뭐지?”
“아, 이 얼굴? 너라면 알겠군.”
“데스필드. 그 패스파인더의 얼굴이다.”
데스필드의 얼굴을 한 사내는 싱긋 웃었다. 벨로린은 그 얼굴 너머에 있는 것을 지그시 노려보며 질문했다.
“데스필드가?”
“벌쳐라고 불러줘. 어쨌든 그런 이름이니까. 그리고 선택이라면 아직 내리지 않았어. 둘 다 봐야 선택을 내릴 수 있는 거 아냐.”
“둘 다?”
벨로린은 눈살을 찌푸리며 벌쳐를 쏘아보았고 벌쳐는 잔잔한 웃음을 지으며 턱을 움직였다. 그 턱이 가리키는 곳을 본 벨로린은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알버트 렉슬러!”
벌쳐는 맑게 웃었다.
“당연하잖아. 이 얼굴을 보자마자 알았어야지.”
“못 박혀 움직일 수 없는 자와………… 움직임 위에 못 박힌 자.”
“정확해.”
“알았어.”
잠시 후 벨로린은 아프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알았어.”
벌쳐는 고개를 끄덕였다. 벨로린은 잔뜩 일그러진 턱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네 선택은 뭐지?”
“선택하지 않아.”
“무슨 말이야? 둘 다 찾아놓고 선택하지 않는다니.”
벌쳐의 얼굴이 변했다. 벌쳐는 뭔가 쑥스러운, 혹은 겸연쩍은 듯한 얼굴이 되었고 벨로린은 의혹에 찬 표정으로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벨로 린은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벌쳐는 더욱 낭패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고 벨로린은 그 얼굴을 보며 더 크게 웃었다.
“안됐군. 벌쳐. 깔깔깔.”
“그렇게까지 좋아할 필요는 없을 텐데. 너답게 동정심을 좀 발휘해 보면 안 되나.”
“아, 지금 그러고 있잖아? 정말 불쌍하게 됐군. 거짓말쟁이 하이마스터. 다른 때나 다른 장소, 다른 존재에게라면 분명히 거짓말을 할 수 있을 텐데.”
“뭐, 피장파장이잖아.”
“무슨 말이야?”
“너도 내게 거짓말은 못해.”
“아아, 알고 싶은 게 있나? 물론 거짓말을 관장하는 너에게 거짓을 말해서 창피를 당할 생각은 없어. 왠지 꽤 악마답지 않은 대화가 되겠군. 진실만 말하는 대화라니·· 깔깔깔!”
벨로린은 다시 허리를 꺾으며 웃었고 벌쳐는 그녀의 웃음이 진정될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이제 질문 좀 해도 될까?”
“아, 그런데 미안해. 내가 먼저 질문 좀 해야겠어.”
“그러시지. 나 역시 거짓말을 단번에 알아보는 너에게 거짓을 말해서 창피를 당할 생각은 없어. 알고 싶은 것이 뭐지?”
벨로린의 몸이 갑자기 앞으로 쏘아졌다.
벨로린의 손이 벌쳐를 향해 포환처럼 날아들었다. 만일 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면 그 속도만으로 몸이 꿰뚫릴 정도의 빠르기였다. 하지만 벌쳐 역 시 대포에서 튕겨나가는 것처럼 몸을 뒤로 튕겼다. 그래서 벌쳐는 벨로린의 손에 관통당하지는 않았다. 대신 벨로린의 손에 멱살이 잡힌 채 갑판 끝 까지 밀려났다. 벨로린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쳐를 뱃전까지 밀어붙였고 뱃전에 부딪힌 벌쳐는 어쩔 수 없이 허리를 뒤로 꺾어야 했다. 벨로린은 벌 쳐를 뱃전 너머로 밀어붙이며 강하게 외쳤다.
“열어!”
벨로린의 손아귀에 붙잡혀 뱃전에 걸쳐 누운 극히 불안한 자세에서, 벌쳐는 씁쓸하게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뱃전 옆의 검은 바다가 맹렬한 속도 로 함몰되며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이 생겨났다. 분명히 항구의 바닥이 있을 테지만 그런 것은 무시되는 것 같았다. 구멍은 그저 끝없이 깊게 이어지 고 있었다. 벌쳐는 곤란하다는 듯이 웃으며 다시 벨로린을 돌아보았다.
벨로린은 벌쳐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강하게 밀어붙이며 말했다.
“네가 그 신부를 그곳으로 보낸 거냐?”
벌쳐는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상대는 뭐든 알아버린다. 그래서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아니. 그건 사실 일몰의 왕의 작품이야.”
“흥. 왕이라 이거지. 그래서 파킨슨 신부가 비니힐의 답 중에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군. 하지만 아무리 왕이라 해도 이건 반칙인 것 같은데.”
“뭐가 반칙이라는 거지?”
“파킨슨 신부를 그곳으로 보내서 비니힐로 하여금 그를 선택하게 만들었잖아.”
“아, 거꾸로야. 비니힐은 잊혀진 탑에서가 아니면 우리들 불쌍한 존재 쪽에 교차 접촉할 방법이 없는걸. 그래서 일몰의 왕은 그를 그곳으로 보낸 거 지.”
“어쨌든 그래서 비니힐은 한쪽밖에 못 봤잖나! 돌탄 선장도 보여줘야…………”
노하여 외치던 벨로린은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리고 조금 후 벨로린은 놀란 얼굴이 되었다.
“데스필드?”
벌쳐는 자신의 불안한 상황을 잊은 채 가볍게 박수를 보내었다.
“아아, 파킨슨 신부의 반대쪽은 돌탄 선장이었나? 선택이 끝나서 곧장 알게 된 것이군. 그래, 맞았어. 비니힐은 양쪽 다 본 거야. 데스필드는 패스파 인더고 그는 언제라도 두 지점 사이에 패스를 그을 수 있지. 한 지점인 파킨슨 신부가 있으면 데스필드는 다른 쪽인 돌탄 선장까지 패스를 그을 수 있 어. 물론 데스필드 자신은 알지 못했겠지만 비니힐은 그의 능력을 살짝 빌려쓸 수 있었겠지.”
벨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래서 너는 데스필드로 하여금 그를 따라다니게 한 거냐?”
“그것도 일몰의 왕의 부탁이었지.”
“그래, 알았어. 반칙은 아니군. 비니힐이 그곳에서밖에 나타날 수 없으니까. 흐음, 역시 왕이시군.”
서쪽을 쳐다보며 차갑게 웃던 벨로린은 다시 벌쳐를 돌아보았다. 그때까지 차분히 기다리던 벌쳐는 벨로린의 얼굴을 향해 웃었다.
“자, 이제 나 좀 똑바로 세워주지 않겠나?”
벨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끌어당겼다. 놀랍게도 벌쳐의 몸은 휴지 조각처럼 날아 벨로린의 어깨 너머로 떨어졌다. 꽈당! 하는 소리가 났어야 정상이겠지만 벌쳐는 공중에서 몸을 돌려 똑바로 섰다. 그리고 벨로린이나 벌쳐 모두 그 사실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벌쳐는 그저 옷매무새를 가 다듬었고 벨로린은 뱃전 너머를 향해 말했다.
“닫아.”
바다에 생겨났던 바닥 없는 구멍이 사라졌다. 벨로린은 벌쳐를 돌아보았고 벌쳐는 한쪽 손을 허리에 얹은 채 싱긋 웃었다.
“그럼 나도 질문 좀 할까?”
“질문이 뭐지?”
“간단한 거야. xards daiuwv은 어떻게 되었지?”
벨로린은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상대는 거짓말을 관장한다. 그래서 그녀는 맹렬한 웃음 소리를 터뜨렸다.
“푸핫하하하!”
벌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벨로린을 바라보았지만 벨로린은 한참 동안이나 웃어댄 다음에야 가까스로 말문을 열었다.
“후아, 하. 나는 몰라.”
“뭐라고? 아직 나타나지 않은 거야?”
벌쳐는 경악한 얼굴로 외쳤다. 하지만 벨로린은 잔인한 웃음만 돌려주었다.
“선택한 하이마스터는 이제 겨우 셋이야. 아직 넷이나 남아 있어. 아아. 혹시 네가 지금 선택하면 xaxôs daiwv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 르지. 하지만 나는 네가 뭐라고 말할지 알아. 다른 마스터들의 선택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거지? 네가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되길 바라는 거지? 동정심 을 발휘해 드리지. 안됐군, 듀크. 내 질문에는 대답 다 해줬는데 자기 질문에는 답을 얻지 못했으니, 그 좁아터진 소갈머리에 얼마나 화가 날까. 하하 하!”
“제기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