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8장 : 산폭풍, 평야로 – 6화
서 소팔라는 씁쓸한 얼굴로 전방을 주시하며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놈들. 꼭 교본대로 노는 녀석들이 있어. 서 킬드온인지 뭔지 하는 녀석은 틀림없이 레이디가 기다리는 침대에 올라갈 때도 교본대로 행동 하려 들 녀석일걸.”
그의 주위에 서 있던 노예병들은 모두 사납게 웃어젖혔다. 더불어 웃기는 했지만 서 소팔라의 마음속은 편치 않았다. 그는 차가운 모래바람 저편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제국 기사단 북좌의 기세는 삼엄했다. 잡병이라고 취급해 버려도 별 이상할 것이 없는 노예병들을 상대로 완벽무쌍한 진형을 펼치고 있었고 그것으 로써 자신들의 자존심을 완벽무쌍하게 만족시키고 있었다. 서 소팔라는 자신이 아직까지도 상대편의 허점을 찾으려 애쓰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 런 자신을 비웃었다.
서 소팔라는 ‘전투 발발 후 10분 내에는 이길 부대가 없다’고 자평했던 노예병들의 폭발력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와 그의 부대가 오 왕자의 땅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는 동안 그 폭발력을 감당해 낸 부대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서 있는 부대는 저 차가운 북방에서 바로 그런 종류 의 전투력을 늘상 상대하고 있는 부대였다. 입 밖으로 내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서 소팔라는 솔직히 임자 만났다는 심정이었다.
서 소팔라는 몸을 돌려 노예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간단한 손짓을 보내었고 곧 두 명의 건장한 노예들이 서로의 팔을 붙잡아 서 소팔라를 태웠다. 노예들의 머리 위로 솟아오른 서 소팔라는 목소 리를 가다듬어 외쳤다.
“어이, 친애하는 잡것들아.”
노예들의 틈에서 다시 웃음 소리가 터져나왔고 무기도 몇 번 오르락내리락했다. 서 소팔라는 팔을 들어올려 그들을 진정시킨 다음 침울하게 말했다. “너희들처럼 불학무식한 것들도 저 앞에서 으스대고 있는 것들이 어떤 종자들인지는 알 거다. 그래, 제국 기사단 북좌다. 믿을 수 있는 정보에 의하 면, 저 살벌한 것들은 식후 운동으로 혼 족 전사 몇 명을 때려잡지 않으면 소화불량에 걸려버리고 마는 특이 체질이라고 한다. 그런데 내가 정말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그 정보를 전해 준 녀석이 혼 족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했다는 점이야. 혼족 전사들은 제국 기사 몇 놈을 두드려잡지 않으면 뒷간 에서의 분출 활동이 원활하지 못하다던가. 응? 왜들 그렇게 웃는 거야. 이건 ‘믿을 수 있는 정보’라고. 아, 그래. 하나 더 알려줄 것이 있다. 그 녀석은 다른 곳에다 대고 우리 소문도 퍼뜨리고 있던데. 서 소팔라의 노예병들은 적을 몇 놈 거꾸러뜨리지 않으면 잠자리에서 영 시원찮아진다고 말이야. 어 이, 어이! 그만들 웃으라고. 이 무례한 놈들. 대장님이 훈시중이잖냐………”
하지만 노예들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웃어대었다. 서 소팔라는 싱긋 웃으며 자칭 ‘훈시’를 계속했다.
“농담은 적당히 하자. 그래, 까놓고 말해서 이건 어쩌면 너희들과 내가 만난 이래 최대의 위기다.”
노예들의 웃음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그들의 대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이에스 자작님의 깃발 아래 다벨, 록소나, 팔라레온, 다케온이 하나로 묶였다. 이런 날이 올 거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바로 우 리 시대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하더라도 그 깃발 아래에서 가장 훌륭히 싸웠고 가장 명예로운 피를 흘려왔던 것은 너희들이다. 너 희들이 바로 이 기적을 제련해 낸 대장장이인 것이다. 나는 너희들이 한없이 자랑스럽다.”
서 소팔라는 손을 크게 뿌려 등뒤의 제국 기사단을 가리켜보였다.
“하지만 너희들이 만들어낸 이 기적을 무시하고, 전쟁터에서의 정당한 대결의 결과를 무시하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알량한 힘만 믿고 그 결과를 강제로 뒤집으려 하고 있다. 복수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하지만, 이것은 결국 힘있는 자의 횡포일 뿐이다. 우리가 서 브라도를 암살하기 라도 했다는 말이더냐? 오히려 우리들의 전쟁에 제멋대로 끼여든 것은 그 늙은이 아니냐!”
“우와아아아!”
“그들이 강한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이의 도덕 위에 자신의 도덕을 군림하게 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도대체 뭐가 복수란 말 인가. 이것은 스스로의 힘에 도취되어 피범벅이 된 사냥감 위에서 뒹구는 늙은 맹수의 추악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냥감이 되어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
“우와아아아!”
“그러니, 제군들! 그대들이 만들어낸 기적을 지키기 위해, 우리들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 노이에스 자작님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나는 제안한다. 저 들에게 우리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똑똑히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들의 모든 힘을 한데 모아 폭발시키자. 자, 제군들! 모두들…..”
“튀자!”
노예병들은 신속하게 몸을 돌린 다음 열심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장으로부터 역시 ‘대륙 최고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 는 절기를 마음껏 펼쳐보이고 있는 노예병들의 등뒤로 서 소팔라의 애처로운 외침이 길게 이어졌다.
“이 빌어먹을 놈들아, 그건 내 대사야아아앗!”
탄기 협곡은 미리온 산맥 최남단에 위치하며 다벨 공국과 페인 제국의 연결 통로로 사용된다. 따라서 9월 29일, 탄기 협곡 전투에서 서 소팔라가 그 들 부대의 최고 장기를 펼쳐보인 것은 제국 기사단 북좌에게 다벨 공국의 대문을 열어준 것에 비유될 수 있다. 그러나 서 소팔라는 아무런 접촉도 하 지 않은 채 도망쳤고 그래서 제국 기사단 북좌 역시 약간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서 소팔라가 약간이라도 전투를 벌여줬다면 제국 기사단은 다벨 공국으로 쳐들어갈 명분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 소팔라는 그들을 본체만체하며 도망쳐버렸고, 따라서 그 상황에서 제국 기사단이 탄 기 협곡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것은 명백한 침략 행위가 된다. 서 소팔라는 이길 수도 없는 전투에 매진하는 대신 그들에게 이런 버거운 문제를 집어 던진 것이다. ‘문은 열었다. 한 발짝이라도 들어오면 너는 침략자다.’
그러나 제국 기사단은 거침없는 태도로 탄기 협곡에 들어섰다. 바탈리언 남작은 비명과 환호성을 동시에 올리며 제국 정부를 향해 모든 종류의 항의 문을 무차별 발사했고 그와 동시에 페인 제국을 향해 악성 루머를 포화 사격했다. 그리고 탄기 협곡에서 사라졌던 서 소팔라는 노예병들과 함께 협곡 내에 스며들어 제국 기사단 북좌를 향해 유격 활동을 개시했다. 서 소사라는 형의 유격 활동을 돕기 위해 다벨의 자랑인 롱레인저들을 모조리 끌어모 아 탄기 협곡으로 출발했다. 림파이어 가문의 형제 기사들의 공격은 매서웠고, 그래서 제국 기사단 북좌는 탄기 협곡에서 꽤 긴 시간을 허비하게 되 었다.
하지만 림파이어 기사들도 그들을 영원히 탄기 협곡 내에 묶어둘 수는 없었다. 어차피 이기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휘리 노이에스로부터 ‘이기면 안 된다’는 명령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탈리언 남작은 그때까지도 제국 정부와 제국 기사단 양자에게 계속해서 서신을 파송했다. ‘제국 기사단의 동절기 훈련이 다벨 공국의 영토 내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다벨은 이 사실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한다. 제기랄, 진짜 심각하게 생각한단 말이다!’
하지만 그가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었다. 바탈리언 남작은 제국 수도에서 뜻밖의 저항을 발견하고는 그 저항의 원인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답은 뻔한 것이었다.
9월 36일. 바탈리언 남작은 휘리의 집무실을 박차고 들어오며 외쳤다.
“하드루스 대통령입니다!”
지도를 들여다보던 휘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바탈리언 남작을 바라보고는 턱을 갸웃했다.
“아니, 자네는 바탈리언 남작이야. 믿어도 좋아.”
“농담하실 때가 아닙니다. 사트로니아가 우리들의 공작에 역공작을 걸고 있었습니다.”
“역시 놈들인가.”
“알고 계셨습니까?”
휘리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짐작이었어. 길버트 하드루스 대통령이 그냥 물러날 성격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니까. 그리고 소제국의 힘은 아직도 강력할 테고.”
“그렇습니다. 최대한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돌발 상황이 생기지 않는 한 북좌를 회군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돌발 상황? 그런 것을 기대할 수야 없지. 그렇다면 역시 정면 대결로 가야 하나.”
세실은 키 드레이번의 코트를 머리 위로 들어올려 햇볕을 막고 있었다. 이미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지만 바다 한가운데서 맞이하는 햇살은 아직도 뜨 거웠다.
그때 승강구 쪽에서 철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실은 고개를 돌렸다. 바지만 입은 키 드레이번이 승강구에서 빠져나왔다. 갑판 아래는 이미 바닷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키는 계단을 오른다 기보다는 물 속에서 뛰쳐나오는 자세로 솟아올랐다. 왼손으로 갑판을 부여잡은 키는 오른손을 약간 힘들게 들어올렸고 거기에는 작은 단지가 쥐어져 있었다.
키는 온몸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갑판에 앉아서는 들고 나온 단지를 세실에게 건네었다.
“뭔지 모르겠다. 다른 건 다 쓸려내려갔다.”
세실은 빙긋 웃으며 잘 밀봉된 단지를 열었다. 곧 세실의 얼굴이 환하게 바뀌었다.
“건포도다! 바닷물은 안 들어갔어.”
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의 물기를 대충 닦아내었다. 그러고는 앞쪽의 절벽을 한심스럽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라이트버드호는 가까스로 침몰하지 않은 채 수면 위에 떠 있었다. 핸드건에 명중당한 돛대가 쓰러지며 라이트버드호의 좌현 상당 부분을 박살내고 선복을 쪼개었지만 3L의 배는 그런 상황에서도 뗏목 비슷한 형태가 되어 떠다니고 있었다. 키 드레이번은 3L의 배가 빠른 것은 가벼운 소재로 만들 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다. 바다 위에 이렇게 떠 있다는 것은 그런 그의 가설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돛대가 없기 때문에 세실의 마법도 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키 드레이번은 갑판의 판자를 뜯어내어 노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 혼자 힘으로 스쿠너 를 움직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를 다 만든 키 드레이번은 접안할 만한 해안이 없다는 사 실에 분통을 터뜨려야 했다. 해안은 절벽과 거대한 바위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래서 오히려 다가가지 않는 편이 훨씬 안전할 듯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헤엄쳐 다가갈 수도 없다. 키 드레이번은 물 위를 유유히 오가는 목도리도마뱀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또 다가오는군.”
건포도를 주워 먹던 세실은 고개를 돌려 목도리도마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은 채 뭐라 중얼거렸다. 곧이어 목도리도마뱀 하나가 질겁 한 듯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공포는 전염되었고 그러자 다른 목도리도마뱀들도 덩달아 도망쳤다.
세실은 눈을 뜨며 투덜거렸다.
“짜식들이 기억력이 없는 건지, 상상력이 없는 건지. 무서운 걸 봤으면 다시는 안 와야 될 거 아냐.”
“저놈들이 뭘 본 건지 말해 줄 수 있나?”
세실은 다시 건포도 단지에 손을 집어넣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핸드건을 휘두르는 파킨슨 신부.”
키는 차갑게 웃으며 해안가를 바라보았다. 목도리도마뱀들은 어떻게 물리칠 수 있더라도 상륙하지 않는다면 굶어 죽거나 목말라 죽을 판국이다. 세 실은 비를 부를 수 있지만 자칫 비를 불렀다가는 아슬아슬하게 떠 있는 라이트버드호를 완전히 침몰시킬지도 모른다. 키는 좌우를 둘러보며 어느 쪽 에 모래사장 같은 것이 있을지 고민해 보았다. 하지만 현재 위치에서는 잊혀진 탑과 해안 절벽이 시야를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에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키는 일단은 제멋대로 흘러가게 놔두자고 결정했다. 결정을 마친 키는 갑판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세실은 단지를 내려놓은 다음 손가락을 빨면서 키를 바라보았다.
“안 먹어?”
“생각 없어.”
“무슨 계획 있어?”
“일단은 상륙해야지.”
“그리고?”
“섬 위에서 목도리도마뱀들의 공격을 버텨낼 수 있다면, 뗏목을 만들어야겠지. 그리고 음식과 물을 준비하여 이 섬을 벗어나야지.”
“아주 쉽게 말하는군?”
“1년이면 어떻게 될 거야. 여기서 판재를 뜯어낼 수도 있고 연장도 건져낼 수 있으니까. 만일 재수없어서 맨몸으로 상륙한다면 3, 4년 정도 걸리겠 지. 네 마법과 내 복수 말고는 연장이 없으니까.”
“아, 그래. 3, 4년이란 말이지.”
세실은 늙은 자신보다도 더 쉽게 시간을 년 단위로 취급하는 사람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때 하늘을 보던 키가 고개를 조금 돌렸다. 키는 누운 채 세실을 똑바로 바라보았고 세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야?”
“얼간이를 보고 있다.”
“아, 그러셔?”
키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3, 4년은 희망 사항일 뿐이다. 어쩌면 평생 저 섬을 못 벗어날 수도 있다. 아니, 상륙하자마자 목도리도마뱀의 밥이 될 수도 있고.”
“알아. 그런데 그것과 내가 덮어써야 하는 오명 사이에는 무슨 관련이 있지?”
“돌아가라고 했을 때 돌아갔어야지.”
“흐응.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나는 죽음이 무섭지 않다네, 젊은 친구.”
“그럼 뭐가 무서운가.”
“답을 얻지 못하고 죽는 것.”
키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을 괘씸하게 여긴 세실은 단지 속에서 건포도를 하나 꺼내어 키의 얼굴을 향해 집어던졌다. 뺨에 건포도를 맞은 키는 찡그 린 표정으로 세실을 바라보았다.
“왜 웃는 거야, 이 꼬마야.”
“죽음은 안 무서운데 답을 얻지 못하고 죽는 건 무섭다고? 같은 말 아닌가?”
“같은 말이라니?”
“죽음 자체는 무서운 것이 아냐. 사람들은 죽음이 가져오는 기회의 상실을 무서워하는 거지.”
“쳇. 찬성해 줘야 될 것 같군. 그래, 내가 실언했다. 하지만 나는 무섭지 않아.”
“왜?”
“네 옆에 있으니까.”
“또 내가 답을 찾아낼 거라는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이군, 젠장.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이 굶주린 목도리도마뱀밖에 없는 곳에서 내가 그걸 찾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세실은 잠시 입을 다문 채 어깨에 걸쳐두었던 키의 코트를 들어올렸다. 코트를 옆에 내려놓은 세실은 먼바다를 쳐다보며 말했다.
“라트라인에 도착하기 전날 밤, 에름 후작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더군. 그는 라이온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던데.”
키는 아무 말 없이 하늘만 바라보았다. 세실은 입술을 한번 실쭉거린 다음 계속 말했다.
“라이온의 평가인지 에름 후작의 평가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에 의하면 너는 복수 그 자체라더군. 나는 그 말이 재미있다고 생각해.”
“어떤 점에서.”
“복수. 복수는 되돌려주는 것이지. 그렇다면…”
“그렇다면?”
“사랑도 복수라고 할 수 있겠지.”
“뭐?”
“사랑은 대상이 있어야 되는 거야. 대상 없는 사랑은 없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아침 인사에는 아침 인사, 노래에는 환호, 키스에는 키스, 애정에 는 애정……”
세실은 빙긋 웃었다.
“생각해 보니,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모든 좋은 것들은 복수군.”
키는 조용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세실은 자신에게 말하듯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그것을 알고 있지. 복수라는 말이 섬뜩하면서도 뭔지 모를 아련한 그리움, 통쾌함 따위를 주는 것은 그 때문이겠지. 그리고 사람이 경멸이나 증오보다 무시를 더 참기 어려워하는 것도 그 때문일 테고. 경멸은 복수의 한 형태지만 무시는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으니까.”
“노망인가.”
“젠장, 집어치워, 이 빌어먹을 꼬마야. 잘난 건 알지만 정말 괘씸하군. 어쨌든 그 말이 사실이라면 너는 내 질문에 답을 줘야 하지. 무시하거나 거부 하거나 도망치거나………… 모를 수도 없어. 넌 알고 답을 말해 줘야 하지. ‘질문에 답’이 복수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까 노망이라고 하는 거다.”
“흥. 시험해 볼까?”
“뭐.”
세실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키 드레이번. 나는 여기가 싫어. 그러니 나를 구해 줘.”
“어떻게?”
“어떻게도 할 필요 없어. 벌써 그렇게 되었으니까. 그만 일어나, 짜식아.”
키는 세실을 돌아보았고 그녀가 비웃음 같은 것을 흘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비웃음의 원인을 추리해 보려던 키의 귀에 고함 소리가 들려온 것은 잠시 후였다.
“키 선장니 임!”
키는 벌떡 일어났다. 그가 하늘을 보고 있는 사이에 다가온 질풍호 위에서는 트로포스가 맹렬하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키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질풍호를 바라보다가 세실을 돌아보았다. 세실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키의 코트를 들어올리며 일어나고 있었다. 키에게 코트를 건넨 세실은 한쪽 눈 을 찡긋해 보이고는 곧 큰소리로 웃었다.
북소리는 느릿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고원 위를 별스러운 기세로 치닫던 바람이 모닥불에서 불티를 퍼올려 사방에 흩뿌렸다. 하지만 모닥불 주위에 정좌한 전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상의를 벗은 전사들의 구릿빛 몸 위로 모닥불의 반사광이 춤을 추었다. 불티를 퍼올리던 바람은 이제 그들의 머리카락을 흩날렸지만 전사들은 미동 도 하지 않았다. 그들 중 일부가 바람을 피하는 척하며 저편의 황야를 훔쳐본 것은 그야말로 잠깐 동안의 일이었을 뿐이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별을 읽는 무녀를 어떻게 훔쳐본다는 말인가.
그때 바위 위에 앉아 별을 바라보던 무녀가 몸을 일으켰다.
검은 옷과 검은 베일로 몸을 감춘 무녀는 지팡이를 이리저리 던지며 걸어왔다. 풍성한 옷에도 불구하고 가냘퍼 보이는 무녀는 전사들이 만들고 있던 구릿빛 원진 속으로 성큼 들어왔다.
그때 바람이 검은 베일을 흔들었고 짧은 순간 무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전사들은 재빨리 눈길을 피했지만 그래도 그들 중 몇몇은 무녀의 얼굴에서 대정령과의 합신을 나타내는 흔적을 보게 되었다. 짓무른 이마에 눈썹이라는 것은 뽑다만 털처럼 몇 가닥 매달려 있었고 코는 없어져 두 개의 구멍만 뻐끔 뚫려 있을 뿐이다. 일그러진 볼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땀인지 고름 인지 구별하는 것은 모닥불빛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윗입술은 썩은 고깃덩이처럼 말려들어가 잇몸이 다 보였고 그 안에서는 흐물거리는 잇몸이 짧게 반짝였다. 당연한 일이다. 인간의 몸으로 위대한 대정령과 동침한 여성은 저렇게 될 수밖에 없다.
베일은 다시 가라앉았고, 전사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모닥불 옆에 도착한 무녀는 잠시 숨을 고르듯 가만히 서 있었다. 조금 후 그녀의 오른손이 힘들게 올라갔다. 둘둘 말린 붕대 끝에서 비어져나온 파들 거리는 손가락이 전사들 가운데를 가리켰다.
지적받은 노전사가 몸을 일으켰다.
다른 전사들과 마찬가지로 상의를 벗고 있었지만 그 드러난 상체에서는 탄탄한 전사의 근육만 찾아볼 수 있을 뿐 노쇠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다만 희게 세고 있는 옆머리와 얼굴의 굵은 주름살에서, 그리고 온몸에 아로새겨진 흉터들에서 그의 연륜을 느낄 수 있었다.
북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힘찬 걸음걸이로 무녀를 향해 걸어간 노전사는 무녀 앞에 정좌하여 앉았다. 그리고 두 무릎 위에 손을 얹은 채 허리를 똑 바로 펴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검은 무녀의 계속 떨리는 손끝이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어둠 속 어디에선가 아름다운 소녀가 걸어나왔다.
나이 열대여섯이나 되었을까. 더없이 아름다운 옷을 입고 몇 시간이나 다듬었을 것이 분명한 머리를 하고 있었지만, 불쌍하게도 정신이 반쯤 나가버 린 상태였다. 어제 아침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되는지 알았을 때 소녀는 벌써 한번 기절했었고 지금까지도 침착을 되찾기는커녕 더욱 무서워하고 있 었다. 물론 내일이 오면 소녀의 또래 친구들은 소녀를 감히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게 되겠지만 그건 내일의 일이다. 소녀는 가장 억센 전사들조차 감히 가까이하기 어려워하는 대정령의 애인을 향해 똑바로 걸어가고 있는 자기 자신을 거의 믿을 수 없었다. 그녀가 믿고 신뢰하는 것은 자신의 다리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피뿐이었다. 하긴 그 때문에 선택된 것이다. 피는 액막이가 되어 난폭한 대정령으로부터 소녀를 보호할 것이다.
소녀는 손에 받쳐든 쟁반을 똑바로 앞으로 내민 채 무녀의 앞에 섰다.
무녀의 손이 천천히 뻗어나왔을 때, 공포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소녀다운 호기심으로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소녀는 친구들의 말대로 무녀의 네 번 째와 다섯 번째 손가락이 없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소녀는 재빨리 무녀의 손짓대로 쟁반을 노전사의 무릎 앞에 내려놓고는 그 옆에 무릎 꿇었다.
허리를 꼿꼿이 편 자세로 정좌하여 있던 노전사는 눈을 감았다. 소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노전사의 희게 센 옆머리를 한 움큼 쥐어들었다. 그리 고 소녀는 ‘이 정도면 될까요?”라고 묻듯이 무녀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검은 베일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소녀는 울고 싶은 마음과 기절해 버리고 싶은 마음을 절반씩 느끼며 가까스로 쟁반 위에서 빨간 끈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소녀는 노전사가 아파하지 않기를 충심으로 기원하며 머리카락 끝 을 빨간 끈으로 묶었다.
노전사는 눈을 떴다. 그리고 쟁반 위에 놓인 두 번째 물건인 가위를 집어들었다.
노전사는 묶인 머리카락을 서슴없이 잘라내었다.
머리카락은 묶인 그대로 툭 떨어졌다. 노전사는 가위를 도로 쟁반 위에 던졌고 소녀는 땅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려 쟁반 위에 놓았 다. 그리고 그것을 들어올려 무녀의 발 앞에 살짝 내려놓았다.
느린 북소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일어난 소녀는 조심스럽게 전사들 틈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돌아온 소녀는 곧장 졸도해 버렸 다. 물론 이런 경우 긴장이 풀린 소녀가 혼절해 버리는 일은 흔한 일이므로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녀의 어머니와 이모, 고모들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소녀를 수습해 갔다. 내일이 되면 그녀들은 실수 없이 일을 마친 소녀를 크게 칭찬할 것이다.
모닥불 가에서는 무녀가 복잡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성한 손으로도 간단한 일은 아니기에 무녀의 작업은 느렸다. 무녀는 쟁반 위에 놓인 세 번째 물건인 풀인형을 들어올렸다. 조금 전의 소녀가 어제 하 루를 꼬박 사용하며 정성들여 만든 것이다. 무녀는 풀인형의 배 부분을 분해하여 그 속에 전사의 잘린 머리카락을 집어넣은 다음 그 위에 불그스름한 침을 뱉었다. 무녀는 풀인형을 다시 조립하여 몇 번 다듬었고 잠시 후 풀인형은 감쪽같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풀인형을 쟁반 위에 놓은 무녀 는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북소리가 딱 멈췄다.
무녀는 지팡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주문을 외웠다. 음산한 목소리였다. 전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모닥불가에 앉아 있던 노전사 역시 마찬가지였 다. 다른 전사들과 달리 모닥불가에 앉아 있는 노전사의 얼굴에서는 약간 귀찮아하는 표정도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노전사는 무녀의 주문이 끝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주문이 끝나자 노전사는 풀인형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노전사는 전사들의 원진 한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에는 다른 전사들과는 달리 화려한 옷을 걸친 늙은 전사가 찌푸린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노전사는 풀인형을 그에게 내밀었다.
“대족장. 내 맹약의 인형을 받아주소서.”
전통에 따라 화려한 털가죽옷을 입고 있는 대족장은 내키지 않는 눈길로 인형을 바라보았다. 대족장은 전사의 어깨 너머 무녀를 바라보았지만 검은 무녀는 이제 아무 관심 없다는 몸짓으로 모닥불을 뒤적거리다가 아예 원진 바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대족장은 다시 노전사를 바라보았다.
대족장은 인형을 받아들었다.
맹약은 성립되었다.
이제 노전사가 배신할 경우 대족장은 보관하고 있던 인형을 무녀에게 넘길 것이다. 그리고 정신이 제대로 박힌 전사라면 차라리 목숨을 내줄지언정 맹약의 인형이 무녀의 손에 들어가게끔 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족장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대족장이 일어났다.
각 부족을 대표하는 전사들은 그렇잖아도 당당한 자세를 더욱 당당해 보이게끔 했다. 잔뜩 수축된 그들의 근육들에서 핑핑 소리가 날 것 같았다. 나 란히 걸어간 대족장과 노전사는 이윽고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섰다. 대족장은 모닥불 너머 노전사의 눈을 매섭게 바라보았지만 노전사 역시 날카롭 게 그 눈길을 받아내었다.
대족장은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대족장은 모닥불 아래쪽으로 손을 뻗어 재와 흙먼지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모닥불 너머로 그것을 집어던졌다. 반대쪽에 서 있던 노전사는 온몸에 재 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잘 싸워라, 타르타니어스, 성명판을 채우도록.”
타르타니어스라 불린 노전사는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갑자기 북소리가 터져나오며 원진에서는 무시무시한 함성이 솟구쳐올랐다.
9월 36일. 다벨 공국에서 휘리 노이에스가 제국 기사단과의 정면대결을 고민하던 바로 그 시각, 제국 기사단 북좌가 떠나간 하르타틱 요새는 혼 족 의 공격 아래 무너지고 있었다. 물론 제국 기사단 북좌는 방어군을 남겨놓고 떠났지만 그들은 14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혼 족이 쳐내려올 것이 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혼 족의 모든 부족이 참가하는 대동맹이 성립된 것이 제국에 알려진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지만, 14만이라는 그 엄청난 숫자만으로도 제국은 이미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제국은 그 대동맹이 누구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는지도 짐작해 냈다. 이합집산의 경향이 강한 혼 족을 대동맹으 로 이끌어 지휘할 수 있었던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레프토리아 회전에서 하이낙스를 돕기 위해 대족장에게 맹약의 인형을 바쳤던 혼 족의 맹장은 다 시 한번 맹약의 인형을 바치고 혼 족의 모든 부족의 협조를 얻어낸 것이다.
그리고 까마득한 하늘에서 분노의 벼락으로 산봉우리를 매만지던 산폭풍은 노호하며 제국의 기름진 평원으로 내려섰다.
<5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