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5권 – 20장 : 긴 노래 – 2화

폴라리스 랩소디 5권 – 20장 : 긴 노래 – 2화


서 소팔라와서 소사라는 결국 더 이상의 공격을 포기하는 대신 폴라리스 공격에 대비한 교두보를 확고히 해두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폴라리스의 전 략을 그대로 채택하여 절대로 응전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운 다음 다림으로 통하는 도시들 전부에 대한 거미줄 같은 보급망을 구성하기 시작했 다.

하지만 그 작업 또한 쉽지 않았다. 모든 지형을 이동할 수 있으며 심지어 수면까지 달리는 리저드라이더들의 부대는 어떤 험로에서도 반드시 나타나 서 병참을 박살내었다. 심지어 그들은 강을 따라 움직이는 수송선 위까지 난입함으로써 그들의 공격 앞에 안전 지대는 없음을 확실히 했다. 두 형제 는 리저드라이더들의 이 기동성에 대해서는 납득할 수 있었지만 도대체 어떻게 병참 이동을 제 손금 보듯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 고, 그래서 첩자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기사의 면밀한 내사에도 불구하고 첩자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찾고 있는 첩자가 물수리호의 갑판에 앉아 노래 부르길 좋아하는 검은 소녀였다는 사실은, 설령 면전에 대고 말해 줬다 하더라도 그들로서는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계속되는 보급 부족에 첩자에 대한 의심까지 겹치게 되자 다벨군의 사기는 서리 맞은 푸성귀마냥 가차없이 떨어졌다. 이레다벨에서 모든 재정비를 마치고 도착한 서 켈커와 서 기리우가 본 것이 바로 그런 8군단의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림파이어 형제 기사들이 병사 의 사기를 이 정도로까지 추락시켰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했다. 서 소팔라는 잔뜩 주눅든 얼굴로 말했다.

“나는 말이야, 농부의 심정으로 가을이 더 깊어지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네. 기온이 더 떨어지면 저 저주받을 도마뱀 새끼들도 설치지를 못할 테니까. 하지만 이 남부에서는 가을도 느리게 오는군.”

그러나 서 켈커와 서 기리우의 합류는 분명히 새 바람을 일으켰다. 두 지휘관의 합류로 8군단은 이제 최초로 팔라레온의 국경선을 넘어 스베이 요새 를 공격하던 봄의 모습을 거의 회복했고, 그러자 어딘가로 사라졌던 자신감도 서서히 돌아왔다. 그것을 간파한 서 소사라는 기회를 놓칠세라 열심히 휘리의 이름을 팔기 시작했다. ‘이제 노이에스 자작님만 오시면 무적 8군단이 완성된다’는 말은 서 소사라의 제2의 숨소리 비슷한 것이 되었고 그러 자 그 말은 병사들로 하여금 앞서의 패배는 휘리가 없었기 때문에 얻게 된 것이라는 착각을 일으키게끔 만들었다. 병사들은 자신감을 회복했고 패배 에 대한 기억을 잊었다. ‘우리가 질 리가 없다. 휘리 노이에스가 없는 시점에서의, 8군단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패배는 패배가 아니다.’서 소 팔라는 동생의 작업에 단 한마디만 참견했다.

“무적 신화는 좋아. 하지만 그런 신화는 자칫 양날의 검이야, 소사라.”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래. 노이에스 자작님이 없을 땐 항상 진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번에 전설을 만들 수 있다면 다음 번엔 다른 전설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몇 달짜리 신념이라도 신념은 유용한 도구야.”

잇단 패배에도 불구하고 8군단이 사기를 회복하고 있는 반면, 폴라리스 측은 잇단 승리에도 그다지 기세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마왕 빌레스 커리돈을 주축으로 하는 폴라리스 망명 세력들은 폴라리스 수뇌부의 웅크린 자세에 당혹하고 분노하고 있었다. 상대방의 접근을 불허 하는 강철의 레이디와 나가기만 하면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는 리저드라이더. 도대체 무엇을 더 원하는가! 그들이 보기에 폴라리스는 전면전으로 들 어갈 수 있는 충분한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충분하다 못해 그들이 쓰고 싶을 정도의 확실한 요건들이었다. 그런데 폴라리스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 었고 그럼으로써 마왕과서 하빈저, 그리고 그 외 많은 망명객들에게 식욕 상실과 우울증을 선사하고 있었다.

망명객의 신세인지라 목소리를 높일 처지가 못 되었던 그들은 자신들의 불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기로 결심했고, 그래서 직접 승리를 거두고 있는 리저드라이더들을 찾아갔다. 

‘당신들은 폴라리스 평의회에게 계속 승리를 바치고 있다. 이제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지 않은가? 나가서 싸우자고 요청해 보라.’

하지만 리저드라이더들의 우두머리인 서 파르치는 입맛을 다실 뿐 끝내 고개를 세로젓지는 않았다. 참으로 리저드라이더다운 서 파르 치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보시오. 폴라리스는 우리들에게 목도리도마뱀을 내어줬소. 제길. 우리 장인이라 할 수 있단 말이오.”

서 하빈저는 그다지 풍부하지는 못한 문재로나마 이것을 ‘결혼보다 짙고 죽음보다 가까운 리저드라이더와 목도리도마뱀의 결합’이라 표현했고 서 파르치와 리저드라이더들은 그 말을 자신들의 모토로 채택해 버렸다. 리저드라이더들은 다시 한번 목도리도마뱀과 함께 달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도 만족하고 있었고 게다가 폴라리스 평의회의 지시에 따라(사실은 벨로린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한 계속 승리를 거두고 있으므로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망명객들은 할 수 없이 목표를 바꿔야 했다. 그들의 다음 목표는 바스톨 엔도 장군이었다.

‘장군께서 나서주기만 하면 폴라리스는 물론 장군의 조국 사트로니아도 영광된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적은 비루한 모습으로 저 앞에서 그들 의 패배를 기다리고 있고 장군이 할 일은 그저 폴라리스 수뇌부를 이끌고 저 밖으로 나가 준비된 승리를 주워오는 일 뿐이다’에 해당하는 제안이 바 스톨 장군에게 쏟아져 들어왔다. 일가를 이룬 무인에게 이런 말을 건네는 것이 모욕이라는 것도 모르는 한심한 소치라 하겠지만 어쨌든 장군은 노성을 터뜨리는 대신 차분히 대답했다.

“검을 든 후 40년, 이 노병에게 한번도 주워 가진 승리는 없었소. 투미한 재주밖에 없어 그러한지 모르겠으나 지금에 와서야 그렇게 할 수 있다고도 생각되지 않소.”

서 하빈저는 ‘우리는 삽을 들고 산을 움직이려 했다’며 장탄식을 토해야 했다. 서 하빈저의 고군분투를 열심히 청취한 하리야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 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제야 나한테 찾아온 겁니까, 서 하빈저?”

“그렇습니다. 하리야 선장. 우리가 조바심 낸다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조바심을 내지 않는 쪽이 비정상이지 않을까요?”

“무슨 말인지 이해합니다. 예. 당연하지요.”

촛불빛이 밤을 잘라내어 그림자로 펴내는 시간이었다. 막상 전쟁 내각의 주인공은 하리야겠지만 더 피로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서 하빈저 였다. 서 하빈저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는 깊은 한숨을 토하며 말했다.

“내정 간섭에 작전 참견까지 다 해보겠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기다립니까? 8군단은 이미 혹독한 꼴을 당하고 있습니다. 끝장을 봐야 합니다. 시간을 끌면 더 불리합니다. 날씨가 더 추워지면 리저드라이더들은 전선에서 물러나야 할 겁니다. 그리고 휘리 노이에스는 함대를 이끌고 올 테고요.”

“그것까지 아십니까?”

“피난민들은 어쨌든 정보에 목말라 하니까요. 다림 시내를 배회하면서 각 상관과 대표부들에게 소식을 구걸하는 망명 귀족들의 모습은 이제 진풍경 도 아닙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무엇을 기다리고 계시는 겁니까?”

하리야는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들려줄 수도 없고 들려줘봐야 용인받을 수 있는 대 답도 아니다. 그들이 키 드레이번 한 사람의 참전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들리게끔 말할 수 있겠는가.

“키 드레이번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까?”

하리야는 깜짝 놀란 얼굴로서 하빈저를 바라보았다. 하빈저는 침착한 얼굴 그대로 하리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잘못 듣지는 않으셨을 텐데요. 이렇게 물었습니다. 키 드레이번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까?”

“어째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런 모양이군요.”

서 하빈저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약간 숙였다. 자신의 무릎을 바라보고 있는 이 얌전해 보이는 젊은이를 보며 하리야는 록소나 기사들보다 이 젊은이야말로 마왕의 첫 번째 재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잠시 후 서 하빈저는 여전히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는 제 이성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라 해서 혐오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스스로의 이성의 깊이를 과신하는 것이야말로 비이성적일 테니까 요. 따라서 여러분들의 행동을 특별히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예. 누구에게나 의지할 만한 것은 있어야겠지요. 전하나 저에겐 수복해야 할 고국 의 이름이 삶의 목표입니다. 여러분들은 아직 익숙하지 못한 폴라리스보다는 키 ‘노스윈드’ 드레이번의 이름이 삶의 목표일 수도 있겠지요. 폴라리스 를 위한 전투보다는 키 드레이번과 함께하는 전투라는 것이 더 여러분에게 만족감을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실로 그러하겠지요.”

“고맙습니다. 서 하빈저.”

“별말씀을. 그렇다면 여러분은… 키 드레이번이 나서지 않는 전투에 매진하는 것은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하리야 선장 님. 이 폴라리스가 여러분들의 장난감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장난감에 기대를 걸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리야는 약간 불편한 듯한 기침 소리를 내었다.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셔도 비난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곳 사람들이 간절히 원해서 만들어진 나라도 아니고 당신들이 일생의 비원으로 세운 나라도 아닙니 다. 어쩌다 보니 기회가 되었고 그래서 세운 나라이지 않겠습니까? 냉정하게 볼 때 그렇게 보인다는 것은 부정하실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이곳 사람 들이나 여러분 모두 이 땅을 위해 피를 흘려가며 싸우고 싶은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수틀리면 그대로 배에 올라타 열린 바다로 나가버리면 그만이라는 농담을 하긴 하지요.”

“예. 하지만 우리는 그런 농담을 할 수 없습니다.”

서 하빈저는 손가락을 강하게 깍지껴 턱을 받쳤다가 떼며 말했다.

“당신들이 이 폴라리스라는 나라에 대해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빌레스 전하나 저, 그리고 서 파르치 같은 이들은 이곳 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스톨 장군 같은 분도 마찬가지리라 생각합니다. 그 분이 용병입니까? 아니면 이곳이 제2의 엔도입니까? 다 아닙니다. 그냥 사트로니아로 돌아가셨다면 목숨뿐만 아니라 평생 쌓아둔 명예까지도 고스란히 보존하실 수 있는 그 분께서 이곳에 남으신 것은, 그 분이 이곳을 마지막 전장으로 선택한 것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서 하빈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을 터뜨리는 대신 차분히 대답했다.

“검을 든 후 40년, 이 노병에게 한번도 주워 가진 승리는 없었소. 투미한 재주밖에 없어 그러한지 모르겠으나 지금에 와서야 그렇게 할 수 있다고도 생각되지 않소.”

서 하빈저는 ‘우리는 삽을 들고 산을 움직이려 했다’며 장탄식을 토해야 했다. 서 하빈저의 고군분투를 열심히 청취한 하리야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 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제야 나한테 찾아온 겁니까, 서 하빈저?”

“그렇습니다. 하리야 선장. 우리가 조바심 낸다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조바심을 내지 않는 쪽이 비정상이지 않을까요?”

“무슨 말인지 이해합니다. 예. 당연하지요.”

촛불빛이 밤을 잘라내어 그림자로 펴내는 시간이었다. 막상 전쟁 내각의 주인공은 하리야겠지만 더 피로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서 하빈저 였다. 서 하빈저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는 깊은 한숨을 토하며 말했다.

“내정 간섭에 작전 참견까지 다 해보겠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기다립니까? 8군단은 이미 혹독한 꼴을 당하고 있습니다. 끝장을 봐야 합니다. 시간을 끌면 더 불리합니다. 날씨가 더 추워지면 리저드라이더들은 전선에서 물러나야 할 겁니다. 그리고 휘리 노이에스는 함대를 이끌고 올 테고요.”

“그것까지 아십니까?”

“피난민들은 어쨌든 정보에 목말라 하니까요. 다림 시내를 배회하면서 각 상관과 대표부들에게 소식을 구걸하는 망명 귀족들의 모습은 이제 진풍경 도 아닙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무엇을 기다리고 계시는 겁니까?”

하리야는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들려줄 수도 없고 들려줘봐야 용인받을 수 있는 대 답도 아니다. 그들이 키 드레이번 한 사람의 참전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들리게끔 말할 수 있겠는가.

“키 드레이번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까?”

하리야는 깜짝 놀란 얼굴로서 하빈저를 바라보았다. 하빈저는 침착한 얼굴 그대로 하리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잘못 듣지는 않으셨을 텐데요. 이렇게 물었습니다. 키 드레이번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까?”

“어째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런 모양이군요.”

서 하빈저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약간 숙였다. 자신의 무릎을 바라보고 있는 이 얌전해 보이는 젊은이를 보며 하리야는 록소나 기사들보다 이 젊은이야말로 마왕의 첫 번째 재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잠시 후 서 하빈저는 여전히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는 제 이성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라 해서 혐오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스스로의 이성의 깊이를 과신하는 것이야말로 비이성적일 테니까 요. 따라서 여러분들의 행동을 특별히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예. 누구에게나 의지할 만한 것은 있어야겠지요. 전하나 저에겐 수복해야 할 고국 의 이름이 삶의 목표입니다. 여러분들은 아직 익숙하지 못한 폴라리스보다는 키 ‘노스윈드’ 드레이번의 이름이 삶의 목표일 수도 있겠지요. 폴라리스 를 위한 전투보다는 키 드레이번과 함께하는 전투라는 것이 더 여러분에게 만족감을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실로 그러하겠지요.”

“고맙습니다. 서 하빈저.”

“별말씀을. 그렇다면 여러분은… 키 드레이번이 나서지 않는 전투에 매진하는 것은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하리야 선장 님. 이 폴라리스가 여러분들의 장난감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장난감에 기대를 걸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리야는 약간 불편한 듯한 기침 소리를 내었다.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셔도 비난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곳 사람들이 간절히 원해서 만들어진 나라도 아니고 당신들이 일생의 비원으로 세운 나라도 아닙니 다. 어쩌다 보니 기회가 되었고 그래서 세운 나라이지 않겠습니까? 냉정하게 볼 때 그렇게 보인다는 것은 부정하실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이곳 사람 들이나 여러분 모두 이 땅을 위해 피를 흘려가며 싸우고 싶은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수틀리면 그대로 배에 올라타 열린 바다로 나가버리면 그만이라는 농담을 하긴 하지요.”

“예. 하지만 우리는 그런 농담을 할 수 없습니다.”

서 하빈저는 손가락을 강하게 깍지껴 턱을 받쳤다가 떼며 말했다.

“당신들이 이 폴라리스라는 나라에 대해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빌레스 전하나 저, 그리고 서 파르치 같은 이들은 이곳 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스톨 장군 같은 분도 마찬가지리라 생각합니다. 그 분이 용병입니까? 아니면 이곳이 제2의 엔도입니까? 다 아닙니다. 그냥 사트로니아로 돌아가셨다면 목숨뿐만 아니라 평생 쌓아둔 명예까지도 고스란히 보존하실 수 있는 그 분께서 이곳에 남으신 것은, 그 분이 이곳을 마지막 전장으로 선택한 것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서 하빈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이것은 당신들의 나라이고 당신들이 우리에게 무슨 빚을 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요청할 수 없지만, 다만 알아주십시오. 폴라리스에 꿈 을 걸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리야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서 하빈저는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리야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하리야는 창가로 걸어갔다. 어둠 속을 헤매던 하리야의 시선은 곧 목표를 포착했고 하리야는 자유호에 매달린 신호등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키 드레이번은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자유호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식스 일항사는 아무런 말도 전하지 않았고 그것은 자유호의 선원들 역시 마찬가 지였다. 자유호의 선원들은 키 드레이번이 돌아오자마자 다림 시내 곳곳에서 나타나 자유호에 승선했기 때문에 자유호는 언제라도 출항할 수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 배의 모든 것은 그 선장과 마찬가지로 침묵하고 있었다.

문득 하리야는 소스라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키 선장님.’

하리야는 창문을 왈칵 열어젖히며 자유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우리가 제멋대로 당신에게 우리의 소망을 투사하곤 했을 때 당신이 느낀 것은 이런 기분이었습니까?”


칸나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가 모은 그대로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왼손이 위쪽으로 오게 한 다음 가슴 앞쪽에서 수평으로 세 번 원을 그렸다. 그리고 칸나는 두 손을 가볍게 아래로 뿌렸다.

별의별 잡동사니들이 쏟아졌다. 깃털, 뼈, 못토막, 사기 조각, 선원용 단추 등이 칸나의 손으로부터 갑판 위에 쏟아졌다. 칸나는 오른손으로 턱을 받 친 채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마지막으로 빙글빙글 돌던 단추가 움직임을 멈췄을 때 칸나는 묵직한 신음을 내뱉었다.

“횡액이군.”

칸나는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칸나의 앞쪽 선교 난간에 걸터앉아 있었다. 칸나는 단검 자루에 손을 뻗으며 재빨리 일어났지만 상대방은 칸나 쪽에는 시선도 보내지 않은 채 바닥에 쏟아진 잡동사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칸나는 단검을 뽑아 한 바퀴 돌려 똑바로 잡은 다음 말했다.

“벌쳐.”

벌쳐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내 이름이지. 어떻게 아나?”

“물수리호 손님. 벨로린 친구. 그리고 너, 사람…?”

벌쳐는 고개를 들었다. 재미있어하는 표정으로 칸나를 바라보던 벌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희 부족은 바라미와 오랜 세월 한 곳에서 살았지. 쓸데없는 눈이 길러졌을지도 모르겠군. 그건 그렇고 칸나 군. 마귀가 찾아온다는 괘가 나왔구 “먼.”

칸나는 이를 부드득 갈면서 벌쳐를 바라보았다. 벌쳐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바라미는 여기 있나?”

“대사, 없다.”

“여기도 없다고?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그 비린내 나는 쇠토막은 치워라, 칸나. 네 심장을 뽑아내어 거기에 꽂아주기 전에.”

칸나는 더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단검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벌쳐는 싱글싱글 웃기만 할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단검 끝을 벌쳐의 미간에 똑바로 겨 누고 있었지만 칸나는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칸나가 앞으로 돌진하거나 쓰러져버리거나 둘 중 하나를, 혹은 둘 다를 하려고 결심했을 때였다.

벌쳐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쿠. 키 대왕님이시군.”

칸나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키 드레이번이 선교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코트는 없이 검은 셔츠 바람이었고 그 어깨로 검은 머리가 아무렇게나 쏟아지고 있었다. 뱃전을 순시 하는 선장의 보통 모습이었지만 칸나는 키 드레이번이 폴라리스로 돌아온 이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칸나는 뭐라 말하려 했지만 선교 위에 올라선 키가 먼저 벌쳐를 향해 말했다.

“뭐냐.”

“벌쳐라는 패스파인더올시다, 키 선장님. 물수리호에 잠시 몸을 의탁하고 있지요.”

“이곳엔 어떻게 올라온 거지?”

“아아, 레이디 바라미를 찾던 도중 이곳에 계신가 해서 올라왔습니다.”

“누가 승선을 허락했나?”

“제가 했지요. 키 선장님.”

“재미있는 놈이군. 벌쳐.”

“감사합니다.”

키는 흥미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며 칸나에게 말했다.

“밖으로 집어던져.”

잠시 후 키는 고개를 약간 갸웃한 채 꼼짝도 하지 않는 칸나를 바라보았다. 칸나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키와 벌쳐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그만 무릎 을 꿇었다. 칸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며 이상한 소리를 내었고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키는 미간을 찡그렸다. 벌쳐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친구 오늘 일진이 나빠서 그런가 봅니다, 선장님. 제 발로 나가지요.”

정중하게 목례까지 해보인 벌쳐는 가벼운 걸음으로 걸어왔다. 선교를 내려가기 위해 계단으로 걸어간 벌쳐는 그 앞에 서 있는 키를 보며 어깨를 으 쓱였다.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키는 몸을 오른쪽으로 조금 돌렸다. 하지만 벌쳐에게 길을 내주기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대신 키는 오른손을 앞으로 확 뻗어 벌쳐의 양 볼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잠시 그 자세로 멈춘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칸나는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그 광경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의 머리 저편으로 둥근 달이 요괴스러운 빛을 뿜고 있었고 그래서 둘의 모습은 칸나에게 기이한 실루엣으로 보였다. 바람이 한 차례 키의 머리카락을 흔들었을 뿐 잔잔한 물결 소리 속에 그들은 고요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벌쳐였다.

“이건 무슨 짓이지?”

키의 손에 덮여 있었기 때문에 벌쳐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뿐, 벌쳐의 어조는 평온한 쪽에 가까웠다. 키는 여전히 벌쳐의 얼굴을 움 켜쥔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벌쳐는 다시 말했다.

“이젠 포기할 때도 되었을 텐데. 그래봐야 밀리지 않아.”

칸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키의 팔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공중에 굳어 있는 듯한 그 팔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그와 연결된 어깨는 옷에 덮여 있 어도 뚜렷이 알 수 있을 만큼 부풀어 있었다. 키는 마치 석상이나 벽을 밀고 있는 것처럼 벌쳐를 밀고 있었지만 벌쳐는 키의 손아귀에 쥐인 채 물끄러 미키를 볼 뿐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얼빠진 짓 집어치우게, 친구. 난 네가 측량하고 추리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은 곳에서 구현되는 존재야. 이 정도의 무례는 귀엽게 봐줄 테니 손 내리지. 그렇잖으면 그 손을 그 어깨 속에다 쑤셔박아 주겠어.”

키의 입 안에서 어금니가 서로 부딪히며 듣기 거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손은 여전히 벌쳐의 얼굴을 쥐어짜겠다는 듯이 움켜쥔 채 경 련하고 있었다. 벌쳐가 한숨을 쉬며 왼손을 들어올렸을 때였다.

“아에드……”

벌쳐의 눈에 의혹이 스쳐지나갔다. 벌쳐는 자신의 얼굴 아래쪽을 움켜쥐고 있는 사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키는 불티만 튕겨주면 그대로 폭발해 버 릴 것 같은 눈빛으로 벌쳐를 쏘아보며 말하고 있었다.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칸나는 뒤로 물러나다가 그대로 선교 난간에 머리를 들이받고 말았다. 머릿속에서 벼락이 치며 눈물이 찔끔 새어나올 정도였지만 칸나는 눈을 닦을 겨를도 없이 후다닥 일어났다.

벌쳐는 경련하고 있었다.

오만하게 떨어뜨려 두었던 벌쳐의 두 손은 이제 키의 손목을 잔뜩 움켜쥐고 있었다. 피부를 비틀어 떼어낼 것 같은 사나운 손놀림이었지만 키는 벌 쳐의 얼굴을 움켜쥔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키의 손바닥 아래에서 들려오는 벌쳐의 비명은 이상하게 아득하게 들리면서 동시에 날카롭게 갈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키의 목소리는 그 처절한 비명 속에서도 또렷하게 들려왔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수천 필의 피륙이 동시에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비명이 다시 터져나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화광이 번져나오기 시작했다. 벌쳐의 비명 그 자체 가 빛으로 바뀐 듯한 새파란 빛줄기들이 키의 손바닥과 벌쳐의 얼굴 사이에서 새어나와 어지럽게 춤추었다. 그리고 칸나는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기분 속에 헐떡였다.

그의 눈에는 전혀 다른 모습이 비쳐지고 있었다.

키가 움켜쥐고 있는 것은 벌쳐가 아니었다. 사람도 아니었다. 키는 가장 큰 술통보다 더 큰 심장을 움켜쥐고 있었다. 펄떡거리고 있는 거대한 심장 위로 정맥과 동맥이 부풀어 터질 것 같았다. 그것이 터져버렸다고 생각한 순간 칸나는 얼어붙은 피기둥을 움켜쥐고 있는 키를 보았다. 터져버린 모습 그대로 얼어붙은 핏줄기는 겨울 들판의 헐벗은 나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키는 잠을 움켜쥐고 암흑을 움켜쥐고 잊혀진 시간들과 불신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리고 키는 모든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움켜쥐고 있었다. 칸나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유호보다 더 큰 새매의 모가지를 비틀 어쥐고 있는 키 드레이번의 모습이었다. 새매의 날개는 뼈다귀로 이루어진 거대한 그물 같았고 그 그물코마다 불꽃의 깃털이 너울대고 있었다.

그리고 칸나는 키의 발 아래 쓰러져 꿈틀대고 있는 벌쳐의 모습을 보았다.

물결 소리와 삐걱이는 돛대 소리, 그리고 칸나 자신의 격한 숨소리만이 거대한 침묵 위에 아로새겨지고 있었다. 키는 펼친 손을 앞으로 뻗고 있었고 그 손에서 떨어져나온 듯한 모습으로 쓰러진 벌쳐는 아무 소리도 없이 버둥대고 있었다. 키는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하다가 다시 내리며 말했다. “메스꺼운 악마놈이었군.”

벌쳐는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입이 열린 순간 맹금의 포효 같은 소리가 낮게 울려퍼졌다. 칸나는 그 소리를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진저리를 쳤지만 키는 경멸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네 지옥불로 돌아가. 내 배에 네 자리는 없다.”

칸나는 벌쳐가 일어나는 듯하다고 생각했다.

너무도 빠른 움직임이어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인가가 공기 속에서 허락된 것 이상의 속도를 내며 움직인다는 아련한 느낌만이 칸나가 느낀 것일 뿐, 칸나가 본 것은 키 선장과 벌쳐가 거의 동시에 사라졌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머리를 짓누르는 공포가 느껴져왔다. 칸나는 위를 올려 다보았다.

칸나의 정수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전율이 치달았다.

저 까마득한 밤하늘조차 낮다는 듯이 솟아 있는 것이 있었다. 두 다리는 다림 앞바다에 담그고 있었지만 그 허리는 자유호의 메인 마스트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었다. 벌쳐는 그런 까마득한 크기가 되어 다림 앞바다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이미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불꽃이 넘실거리는 입과 코, 투박하게 휘어진 뿔과 늑대처럼 튀어나온 입, 뒷머리와 어깨에 걸쳐 무질서하게 돋아 있는 크고 작은 비틀어진 뿔들. 핏빛 극광처럼 펼쳐진 날개는 하늘을 온통 뒤덮고 있었고 여럿으로 갈라진 꼬리는 마른 나무껍질처럼 죽은 피부가 일어나고 있었다. 통상 있어야 할 위치보다 훨씬 낮은 곳 에 있는 두 눈은 화구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비늘과 털과 물집으로 뒤덮인 벌쳐의 오른손은 키 드레이번을 움켜쥐고 있었다.

칸나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냥 꺽꺽거리는 소리만 내며 올려다보는 가운데 벌쳐는 상처 입은 맹금처럼 부르짖었다.

“죽음 속에 턱까지 담그고도 그 입으로 오만을 지을 수 있겠는가!”

키는 대답하려 했지만 가슴을 움켜쥐고 있는 상대방의 손아귀는 호흡조차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바꿔놓고 있었다. 그래서 키는 눈을 부릅떠 상대방 을 노려보았다. 벌쳐는 그 눈초리에 격분해 왼손을 들어올렸다. 탑이 움직이는 것 같은 기세로 왼손을 까마득히 들어올린 벌쳐는 키를 노려보며 외쳤 다.

“머리를 터뜨려주겠다!”

벌쳐가 오른손에 쥔 키의 정수리를 향해 활짝 편 왼손을 내려치려는 순간이었다.

“지겨운 거짓말쟁이. 장난은 그쯤에서 집어치워.”

칸나는 이 갑작스러운 목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지 몰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저 높은 하늘에서는 벌쳐 또한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사 방을 둘러보던 벌쳐는 곧 이를 악문 채 그르릉거렸다.

“벨로린!”

칸나는 물수리호 쪽을 바라보았다. 벨로린은 너무 검어서 오히려 잘 보이는 모습으로 물수리호의 메인 마스트 꼭대기에 서 있었다. 두 팔을 가볍게 끌어안은 채 하늘에 있는 벌쳐를 올려다보던 벨로린은 삼엄하게 말했다.

“그 창피스러운 짓 당장 집어치우시지.”

“이 년! 누구에게 명령하는가!”

“그럼 제안이라고 해두지. 나로서는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지만. 당장 그만둬!”

벌쳐는 폭풍 같은 포효를 뿜어내었지만 벨로린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벌쳐를 쏘아보았다. 칸나는 가슴을 움켜쥔 채 물수리호와 하늘을 번갈아 쳐다 보았다.

잠시 후 벌쳐의 모습은 나타났을 때처럼 갑자기 사라졌고 고개를 숙인 칸나는 조금 전과 비슷한 모습으로, 하지만 쥐고 있는 자와 쥐어 있는 자가 바 뀐 모습으로 서 있는 키 드레이번과 벌쳐를 보게 되었다. 벌쳐를 노려보던 키는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볼을 움켜쥐고 있는 손을 거칠게 쳐냈다. 벌쳐 는 짧게 노성을 터뜨렸지만 그 외에는 별 짓을 하지 않았다. 대신 벌쳐는 선교를 내려간 다음 그대로 갑판을 가로질러 부두로 이어진 널판을 걸어내 려갔다.

키는 그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물수리호 쪽을 바라보았다. 칸나는 키의 시선을 따라 다시 물수리호를 보았지만 메인 마스트 꼭대기는 비어 있었다. 칸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고 이번엔 키의 모습이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당황하여 사방을 둘러보던 칸나는 갑자기 들려온 물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키 드레이번은 보트 하나를 내린 다음 물수리호 쪽으로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그때 주승강구가 열리며 식스 일항사가 갑판으로 나왔다.

“무슨 물소리야? 어라. 보트에 타고 있는 건………… 키 선장님인가?”

멀어져 가던 보트를 보던 식스는 갑자기 누군가가 어깨를 당기는 것을 느끼곤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자유호의 조타수 칸나는 눈을 데구루루 굴리 며 말했다.

“소리, 못 들었나?”

“소리? 들었으니까 나와본 거 아닌가.”

“아니. 그 소리 아닌 소리.”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칸나?”

칸나는 고개를 홰홰 가로젓다가 몸을 돌려버렸다. 그래서 식스 일항사는 잠시 동안 누가 버려놓고 신경 쓰지 않는 물건처럼 서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