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5권 – 21장 : 별의 꿈 – 5화

폴라리스 랩소디 5권 – 21장 : 별의 꿈 – 5화


바스톨 장군은 책상 위에 가득한 자료들을 모두 치워버리고 한 장의 지도만을 남겨두었다. 하리야는 그것이 얼마 전에 보았던 지도임을 깨달았다. 바스톨 장군은 책상 주위에 몰려선 사람들 중 한 기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원로에 노고가 많으셨을 텐데 미안합니다만 곧장 시작해야겠소. 서 퀵핸드.”

퀵핸드라 불린 기사는 침착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바스톨 장군님. 그리고 빠른 작전 행동은 우리들 쪽에서 오히려 요청하고 싶은 것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이 이상한 이름은 물론 본명이 아니다. 서 퀵핸드는 법황의 비밀 군대인 용기병은 조직될 때부터 작전이 끝나 해산될 때까지 암호명만을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바스톨 장군이나 하리야도 그들을 바이올 기사단 대신 법황의 용기병으로 대우하기로 결정했다.

“푹 쉬게 해드리고 싶소만 저 바깥쪽에 필마온 함대와 카밀카르 함대가 와 있는 이상 시간을 끌 수가 없군요. 카밀카르 함대의 목적은 현재까지는 다소 불분명하지만 필마온 함대는 분명히 다벨과의 동맹임을 보여주고 있소. 한시라도 빨리 다벨군을 처리해서 필마온을 물러나게 해야 되겠소. 다 벨군을 처리할 전략은 대강 수립해 두었지요. 오늘 낮에 본 당신들의 활약을 놓고 볼 때 내가 미리 세워두었던 전략이 충분히 가능할 듯합니다.”

“말씀하시는데 죄송합니다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오면서 보니 다벨군은 거의 2만은 되는 것 같던데, 그 대군을 한번에 격퇴할 수 있 다는 말씀입니까?”

“1만 8천이오. 그리고 가능합니다.”

서 퀵핸드와 다른 용기병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감탄했다.

“과연 바스톨 장군님이시군요. 빨리 듣고 싶습니다.”

바스톨 장군은 빠르고 정확하게 설명해 나갔다. 용기병들은 몇 군데서 질문을 던졌지만 바스톨 장군은 미리 예상했다는 듯이 여유 있게 대답했다. 그래서 작전의 전달은 단시간에 끝났다. 용기병들은 위대한 무장의 작전에서 허점을 찾아보겠노라고 끙끙거렸지만 곧 포기했다. 병력차가 너무 크면 기계(奇計)라는 것도 통하지 않는 법이다. 이편에서 기계를 부려도 상대편이 우직하게 밀고 오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폴라리스가 보유한 병종들은 모 두 강렬한 특색들을 가지고 있었고 바스톨 장군은 그 특색들을 잘 조화시켜 기계 아닌 기계를 만들어놓았다. 서 퀵핸드는 두 눈 가득히 경의감을 담 은 채 짧게 말했다.

“이것은 가능합니다.”

바스톨 장군은 미소를 지었지만 곧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충분히 아시겠지만, 당신들에게 과중한 부담이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군께서 이렇게 우리들이 도망칠 길까지 배려해 두신 바에야 어떻게 못하겠다고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모레 아침 작전을 시작하겠소. 준비하고픈 것이 있거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하시오.”

“우리는 내일 당장이라도 좋습니다.”

서 퀵핸드는 호기 있게 말했다. 바스톨 장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쪽에선 준비가 좀 필요하니까. 그럼 내일 하루 푹 쉬길 바랍니다.”

서 퀵핸드와 용기병들은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바스톨 장군과 하리야는 서로를 쳐다보며 잔잔한 웃음을 떠올렸다. 하리야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제 끝이군요.”

“그렇소. 결판을 보는 거지요.”

“아, 그렇지. 축배를 들어야지요.”

하리야는 손가락을 튕기고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책상 서랍 속에서 디캔터와 두 개의 잔을 꺼낸 하리야는 두 잔에 와인을 채워 바스톨 장군에게 내 밀었다. 자신의 잔을 들어올리던 하리야는 문득 창 밖을 바라보았다.

창 밖으로 멀리 밤바다를 보며 하리야는 씁쓸하게 말했다.

“그는 끝내 나오지 않는군요.”

“키 선장 말씀이오?”

“그렇습니다. 내일 하루가 더 남아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나올 것 같지 않군요. 물론 키 선장님이 나오거나 나오지 않거나 하는 것은 장군님의 훌 륭한 전략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 일입니다만, 아쉽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바스톨 장군은 동정 어린 시선으로 하리야를 바라보다가 잔을 내려놓았다. 의자를 찾던 장군은 조금 전 지도를 펼쳐놓았던 테이블에 걸터앉으며 말 했다.

“하지만 떠나지도 않았잖소.”

“그렇긴 하지요.”

“키 드레이번이 당신들에게 무엇인지 정의내리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라 생각됩니다. 하리야 선장. 하지만 나는 이런 생각을 하지요. 산은 그저 그곳에 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겠소?”

하리야는 창턱에 잔을 내려놓은 다음 바스톨 장군을 돌아보았다. 바스톨 장군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천천히 말했다.

“산을 사랑하는 자 중에서 산봉우리를 자신에게 끌어내리려 하는 사람은 없소. 거꾸로 자신이 거기로 올라가지.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 은 항상 나 스스로를 거기로 이끄는 것이지 그것을 내게로 끌어오는 것은 아닌 것 같소.”

“…..장군께서는 엔도를 자기에게 끌어오는 대신 사트로니아에 주셨지요. 그리고 지금은 하드루스 대통령에게 자신을 주고 있고.”

“나를 본보기로 삼으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겠소. 모든 이에게는 자신의 방식이 있으니까. 하지만 하리야. 나는 당신과 당신의 동료들이 키 드레이 번에게 다가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오. 어딘가로 떠나지 않고 언제나 기다리는 산처럼 키 드레이번은 저곳에 있소. 충분하지 않습니까? 멋진 승리를 만들어 그에게 주시오.”

하리야는 웃으며 창턱에 내려놓았던 잔을 들어올렸다. 그는 잔을 앞으로 내밀었고 바스톨 장군 역시 잔을 들어올려 가볍게 부딪혔다.

‘챙.’


밤안개 속에 고요히 잠겨 있는 해안이 있었다.

안개가 이 해안가를 덮은 지 800년, 그 이후로 햇빛은커녕 별빛도 이 해안에는 닿은 바 없다. 푸르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언제나 안개에 젖어 있는 백사장은 희기만 하다.

그 안개 속 가장 깊은 곳에서 대드래곤 라오코네스는 눈을 떴다.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이자 동시에 지상의 생물의 왕. 또 다른 하이마스터 비니힐이 존재와 부재에 걸쳐 있다면 라오코네스는 밤의 세계와 낮의 세계에 걸쳐 있다. 그래서 그는 일몰의 왕이다. 그의 해역은 슬프고, 언제나 안개 속에 잠겨 있는 미명의 영역이다.

눈을 뜬 라오코네스는 멀리 보았다.

아주 멀리.

그리고 조금 더 멀리.

대드래곤 라오코네스는 선택했다.


알버트 선장에게 노래를 불러주던 벨로린은 갑자기 노래를 멈췄다. 그녀의 뒤편에 앉아 있던 라미와 벌쳐는 의아한 듯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벌쳐가 먼저 말했다.

“벨로린? 무슨 일이야?”

벨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라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벨로린에게 다가가 그녀의 뒤편에 섰다. 허리를 굽힌 라미는 벨로린이 미세하게 떨고 있다는 사 실을 깨닫고는 놀랐다.

“벨로린?”

벨로린은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방금 또 하나의 하이마스터가 선택했어.”

“누군데?”

벌쳐가 반색하며 말했다. 라미는 사나운 눈길로 벌쳐를 바라보았지만 벌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벨로린은 천천히 돌아앉아 라미와 벌쳐를 바라보 았다.

“우리들 중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아서 별명도 사용하지 않는 왕다운 이가 있지.”

“일몰의 왕 라오코네스! 그가 선택했나?”

“조금 전에.”

“어떤 선택이지?”

벨로린은 자꾸만 부풀어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이를 악물었다. 한참 후에야 벨로린은 겨우 말을 꺼내었다.

“낮의 끝에 매달린 자와 밤을 이끄는 자. 그는 밤을 이끄는 자를 선택했지.”

“그렇다면?”

벨로린은 절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3:1이야. 직스라드, 비니힐, 라오코네스는 모두 자유를, 그리고 복수를 선택한 것은 나 하나뿐. 남은 것은 너희 둘과 아델토뿐이군.” 

벨로린은 라미와 벌쳐의 얼굴을 동시에 쏘아보며 으르릉거렸다.

“부탁하진 않겠어.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일이니까. 벌쳐 너의 말대로, 저 두 발 달린 벌레에겐 너무 큰 선물이었는지도 모르지.”

벌쳐는 아무 말 없이 벨로린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물수리호의 선상에서 사라졌다. 라미는 그 사라지는 모습을 보다 가 다시 벨로린을 돌아보았다. 벨로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차갑게 말했다.

“아냐, 라미. 저 꼴사나운 거짓말쟁이는 나의 앙숙이지만, 그래서 나를 가장 잘 알지. 너도 좀 꺼져주겠나? 나 자신을 동정하고 싶어. 그리고 그런 모 습 별로 보이고 싶지 않아.”

라미는 허리를 폈다. 그리고 조금 후 라미의 모습도 사라졌다.

홀로 남은 벨로린은 알버트 선장에게 매달려 자신과 인간을 위해 통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