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5권 – 22장 : 세상의 주인 – 4화

폴라리스 랩소디 5권 – 22장 : 세상의 주인 – 4화


바스톨 장군은 앞바다에서 벌어지고 있는 해전을 보며 다급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두 척의 터릿 갤리어스는 필마온 함대를 거칠게 공격하고 있었 지만 바로 그렇기에 육지 쪽을 향한 지원 사격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폴라리스는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강철의 레이디 없이 싸워야 했고 그것이 이미 잃어버린 용기병보다 더 큰 손실임은 너무도 분명했다.

해적들은 흉벽 너머로 돌을 던지고 창과 화살을 날려보내며 다벨군의 접근을 막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아래쪽의 다벨군 역시 성벽 너머로 빗발처럼 화살과 창을 날려보내고 있었고 시시각각으로 성벽 위에는 전사자들의 시체가 쌓여가는 형국이었다. 게다가 다벨군이 성벽 바로 아래까지 도달한 이 상 그랜드머더호와 그랜드파더호가 풀려난다 하더라도 지원 사격은 불가능했다. 바스톨 장군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서 파르치! 밖으로 나가 다벨군의 측면을 치시오!”

서 파르치는 약간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상대가 너무 많습니다.”

“공격은 지연시킬 수 있을 거요. 시간을 끌어주시오. 나는 그 동안 어떻게든 용기병들을 회유해 보겠소.”

“그 배신자들을 말입니까?”

“그래요. 부두에서 많이 죽었지만 그래도 상당수 남아 있을 거요. 다림 교회로 피신했다고 하니 그들을 구슬러봐야겠소. 어차피 이제는 강철의 레이 디도 쏠 수 없소. 내가 그들을 회유할 때까지만이라도 시간을 좀 벌어주시오!”

서 파르치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 리저드라이더들에게로 돌아갔다. 바스톨 장군은 오닉스 쪽을 쳐다보았다.

“오닉스 선장!”

큼직한 통을 들어올리던 오닉스는 잠깐 기다리라는 턱짓을 한 다음 한쪽 다리를 들어 허벅지 위에 통을 세웠다. 그의 팔꿈치가 휘둘러지자 통의 뚜 껑은 한번에 박살났다. 오닉스는 통을 성벽 아래로 집어던진 다음 불 붙은 나뭇가지를 던지고 나서야 바스톨 장군에게 몸을 돌렸다. 오닉스의 등뒤로 솟구치는 화염을 보며 바스톨 장군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그렇게 해주시오.”

오닉스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또다시 기름통을 들어올렸다. 성벽을 내려가려던 바스톨 장군은 서 파르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황급 하게 외쳤다.

“전하, 어디로 가십니까?”

빌레스 국왕은 칼자루에 손을 얹으며 바스톨 장군을 돌아보았다. 바스톨 장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됩니다. 전하께서는 이곳에 계셔야 합니다.”

“장군.”

“아니오, 다른 말씀 하시지 마십시오. 시간이 없어서 더 말 못하겠군요. 절대로 가셔서는 안 됩니다!”

바스톨 장군은 굳은 얼굴로 다짐하듯 말하며 성벽을 내려갔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왕은 핏 웃으며 망토를 풀어내었다. 

“장군. 미안하지만 싸워야 된다는 것을 알잖소.”

마왕은 풀어낸 망토를 옆으로 건네었다. 그곳에는 서 하빈저가 서 있었다. 망토를 받아든 서 하빈저는 약간 슬픈 어조로 낮게 말했다.

“기어코 가실 겁니까, 전하?”

“자네는 언제나 그러고 싶어했지만, 그러나 나를 막은 적이 없었지. 어쩔 텐가? 새 역사에 도전해 보겠나?”

“……같이 나가겠습니다.”

“자네는 목도리도마뱀을 못 타잖나. 말을 타고? 관두게. 나를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가 될 거야.”

서 하빈저는 진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서 하빈저는 진실을 말했다.

“전하, 보호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저 역시 전하와 같은 바람을 가졌을 뿐입니다.”

몸을 돌려 걸어가던 마왕은 제자리에 멈춰 다시 서 하빈저를 바라보았다. 서 하빈저는 무표정한 얼굴 위에 두 눈을 활활 불태우며 말했다. 

“이젠 싸우고 싶습니다. 전하. 내일이나 죽음 따위는 무시하고.”


트로포스는 바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트로포스는 물결을 응시했다. 하지만 둘 중 어느 것도 그의 편은 아니었다. 질풍호는 돛대가 부러지고 키가 파괴된 상태로 힘겹게 떠 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랜드파더와 그랜드머더는 포신이 녹을 듯한 사격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필마온 함대 역시 끈질기게 육박하고 있었다. 그들 또한 네 척의 전함에 추적당하고 있는 기함 지브라호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기함을 구출하는 가장 좋은 방법 이 두 척의 터릿 갤리어스를 무력화시키는 것임 또한 똑똑히 파악하고 있었다. 다림 앞바다의 해전은 묘하게도 깃발 쟁탈전 비슷한 것으로 바뀌고 있 었다. 양 진영에서 누가 먼저 상대편의 깃발을 뽑아드는가. 혹은 꺾어버리는가.

그러나 폴라리스 측이 더 불리한 싸움이었다. 다가오는 적으로부터 도망치는 것과 다가오는 적 전부를 파괴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용이한 일인지 는 자명하다. 터릿 갤리어스들을 보호할 전함이 필요했지만 그것이 가능한 위치에 있는 두 척의 배 중 질풍호는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였고 자유호 는 꼼짝도 하지 않는 상태였다. 트로포스는 다시 한번 원망 섞인 눈으로 자유호를 응시했다. 그리고 고지식한 식스는 그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상대 편의 원망이 당연하다는 태도였지만, 그것은 트로포스로 하여금 더욱 부아가 치밀어오르게 만들 뿐이었다.

콰아아앙!

다시 한번 요란한 파열음이 치솟아오른 순간 트로포스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랜드머더호의 고물에서 화염이 치솟고 있었다. 그랜 드머더호의 갑판원들은 황급히 진화에 들어갔지만 아무래도 키가 파괴된 듯했다. 이제 여섯 척으로 줄어든 필마온 전함들은 쾌재를 올리며 그랜더머 더호로 접근하고 있었고 그랜드머더호의 선교 위에서는 킬리가 비장한 눈으로 트로포스를 돌아보았다. 말이 전달될 수 없는 상황에서 킬리는 오닉스 의 손짓을 사용했다.

‘아무래도 어렵겠는데.’

트로포스는 힘겨운 신음을 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접근전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랜드머더호의 패배를 의미한다. 그렇잖아도 전투원의 숫자가 적은 데다가 육상 방어를 위해 많은 수의 전투원을 빼낸 상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필마온 전함들이 그랜드머더호에 밀착하게 되면 그랜드파더호 역시 함부로 사격할 수 없게 된다. 킬리는 슬픈 눈으로 육지 쪽을 바라보며 다시 손짓했다.

‘우리는 엉뚱한 곳에서 싸우고 있군.’

‘뭐라고?”

‘지금 우리가 필요한 곳은 바로 저곳일 텐데.’

킬리는 아쉬움을 떨쳐버리듯 고개를 내저으며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일항사 샤이틴을 불러들였다.

“일항사. 아래로 내려가서 노예들의 쇠사슬을 다 풀어줘라.”

“노예들까지 전투에 동원합니까? 믿을 수 있을까요?”

“아니. 명령이 떨어지면 전원 배에서 뛰어내린다. 싸울 필요는 없다.”

“싸우지 않는다고요?”

“그래. 싸우지 않는다. 모두들 바다로 뛰어들어라.”

샤이틴 일항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선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몸을 딱딱하게 굳히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샤이틴.”

“선장님은 가셔야 합니다.”

“이건 내 배다. 샤이틴, 그리고 자네가 지금 당장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 아니라면 나는 아직 자네의 선장이야. 빨리 내려가서 노예들을 풀어줘.” 샤이틴 일항사는 뭐라 대들듯 어깨를 꿈틀거리다가 몸을 돌렸다. 일단은 노예들을 풀어주는 것이 더 급하므로 자폭에 대해서는 좀 천천히 의논해 보자, 고 생각하며 샤이틴은 주승강구를 바쁘게 내려갔다.

사라지는 일항사의 등을 보던 킬리는 다시 한번 그랜드머더호의 갑판을 죽 둘러보았다. 갑판원들은 다가오는 필마온 전함들을 향해 석궁을 날려보

내거나 화재를 진압하거나 하며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킬리는 그랜드머더호 그 자체를 바라보았다.

‘왕국 레갈루스의 방패가 되어야 했을 너를 해적기 아래로 끌어들이고도 모자라, 나는 이제 너를 불태우려 하는구나.’

킬리는 감상적으로 바뀌는 마음을 다잡으며 트로포스 선장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필마온의 전함들을 모두 끌어들인 다음 화약고를 폭파시키겠다. 그랜드파더호에게 피신 명령을 전하고 질풍호의 선원들도 충격에 대비하게끔 하라’에 해당하는 손짓을 보내려던 킬리는, 그러나 트로포스 선장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굳어버리고 말았다.

트로포스 선장은 한 손으로 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짧은 의문문을 보내고 있었다.

‘킬리 선장. 죽는 것이 싫은가, 마법이 싫은가?’


다림 앞바다는 갑작스러운 고요함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랜드머더호와 그랜드파더호는 물론이거니와 필마온 기사단의 함선들도 전장의 한 부분에서 기이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침묵했 다. 그들은 의심스러워하는 눈으로 질풍호를 바라보았다. 해변가의 바위 위에서는 하리야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질풍호를 바라보았고 그 옆에서는 에 레로아가 힘겹게 상체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인 그녀조차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기이한 전조에는 꽤나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결이 사라지고 있었다.

전투를 벌이던 해적들과 기사들은 당혹한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물결은 사라졌고 바다는 번득이기 시작했다. 눈을 비비고 바라보았을 때 바다 는 조금 전까지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속눈썹 너머로, 혹은 자신의 코 언저리에서 그들은 기묘하게 변하는 바다를 보았다. 바다는 금속성의 광 택을 뿌리며 고체로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바라본 바다는 지저분하고 흔들리는 보통의 바다였다.

그리고 질풍호 위에서는 트로포스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세야의 아카나를 움켜쥐고 있었다.

질풍호의 선원들은 언제나처럼 뒤로 물러난 채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들의 선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야 한가운데서 트로포스는 고 개를 떨군 채 길고 복잡한 주문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두 팔에서 일어나던 미미한 경련이 곧 어깨로 옮겨갔고 잠시 후 트로포스의 온몸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갑자기 그의 고개가 홱 쳐들려졌다. 트로포스는 목이 그렇게까지 꺾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머리를 높이 들어올렸다. 그 얼굴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눈은 허옇게 뒤집어져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은 주문과 침과 뜨거운 입김을 동시에 뿜어내었다. 바다가 고요해진 덕분 에 킬리는 그의 주문을 들을 수 있었고 그 중간중간에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섞여 있음을 깨달았다.

“파도의 봉우리를 박찬 갈매기만이 가장 높은 바람을 맛보리라…”

자유호의 갑판에서 정신없이 그 광경을 보던 식스는 누군가가 자신을 옆으로 밀어내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돌린 식스는 파랗게 질린 세실의 얼굴을 발견했다.

“레이디 세실리아?”

세실은 식스의 말을 들은 체 만체하며 질풍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얼간이. 기어코…………”

그때 세야의 아카나가 멈추었다.

트로포스는 놀랍도록 경쾌한 동작으로 일어났다. 그 얼굴은 파리했지만 표정만은 온화했다. 트로포스는 언젠가 부러뜨리려 했지만 그 대신 책상을 찍고 말았던 지팡이를 들어올려 그랜드머더호를 겨냥했다.

그리고 트로포스는 명령했다.

“날아라!”

그랜드머더호는 격심한 진동을 일으켰고, 그래서 킬리는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킬리는 선교에 주저앉은 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몸은 이미 뚜렷이 느끼고 있었지만 그의 머리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랜드머더호는 떠오르고 있었다.

먼저 노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랜드머더호의 선복을 따라 격류가 되어 흘러내리던 바닷물은 이윽고 물방울이 되어 후드득 떨어져내렸다. 노예 들은 노 구멍을 통해 바다를 내다보며 비명을 질렀고 갑판원들은 뱃전에 매달린 채 비슷한 행동을 취했다. 노와 선복 전체에서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지만 그랜드머더호는 더 이상 배가 아니었다. 일찍이 이런 영광을 차지한 배는 어디에도 없었을 것이다. 어떤 배도 가지 못했던 해역을 그랜드머 더호는 미풍을 타고 조용히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랜드머더호는 창공을 항해하고 있었다.

필마온 전함들의 선원들은 그들의 돛대 높이로 솟아오르는 그랜드머더호를 보며 주저앉거나 비명을 질렀다. 개중에는 바다로 뛰어드는 자들까지 있 었다. 그리고도 그랜드머더호는 계속해서 떠오르고 있었다. 킬리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뱃전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이제 아래로 까마득히 보이는 질풍호의 갑판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트로포스가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트로포스!”

트로포스는 킬리처럼 고함을 지르는 대신 손을 들어올렸다.

‘킬리. 가서 바스톨 장군과 오닉스를 돕게.’

다시 고함을 지르려던 킬리는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그들을 도우라고?”

‘그래. 강철의 레이디는 모든 땅에서 사용이 금지되었지. 그리고 땅 위에 떠 있는 배를 땅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 가서, 그들을 돕게.’

킬리는 다시 손짓을 보내었지만 그것은 트로포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트로포스는 지팡이를 돌려 그랜드파더호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랜드파더호 의 선상에서는 돌탄 선장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더듬거리고 있었다.

“이, 이퐈. 어, 처, 청말? 안 퇘. 맙소사 – !”

트로포스는 빙긋 웃으며 외쳤다.

“날아라!”


다림 교회를 향해 황급히 달려가던 바스톨 장군은 문득 주위가 어두워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좌우를 둘러본 바스톨 장군은 대로 위를 움직이고 있는 거대한 그림자를 발견했다.

‘구름 그림자인가?’

하늘을 올려다본 바스톨 장군은 다음 순간 천식 증세를 보이고 말았다.

다림 앞바다에서 떠오른 두 척의 터릿 갤리어스는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그들을 올려다보는 필마온 기사들을 무시한 채 고요히 선수를 돌렸다. 이물 을 육지 쪽으로 돌린 두 전함은 그대로 허공을 미끄러졌다. 그리고 바스톨 장군이 올려다보았을 때 두 척의 전함은 지상 150피트 정도의 높이를 유지 한 채 다림 상공을 통과하고 있었다.

바스톨 장군은 얼굴이 빨갛게 될 때까지 격렬하게 기침한 다음에야 겨우 호흡을 회복했다. 150피트라는 까마득한 높이인 데다 평소에는 관찰이 불 가능한 각도에서 보고 있었지만. 바닷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면야 배를 아래쪽에서 보기는 어렵다 – 장군은 겨우 그것이 그랜드머더호와 그랜드파 더호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장군은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맙소사! 포환을 못 날려보내니 아예 배를 날려보내는군. 못 말리겠는데!”

정신없이 웃던 장군은 문득 대로 한가운데서 말을 멈춰 세운 채 껄껄거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다지 품위있어 보이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떠올 렸다. 장군은 당황하며 자신이 무슨 일을 하던 중인가를 떠올리려 했다. 그러자 더 큰 당황이 그를 엄습했다.

“잠깐. 내가 지금 용기병들에게 화력을 구하러 가고 있었나?”

바스톨 장군은 고개를 내려 멀리 보이는 다림 교회의 종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장군은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날고 있는 두 척의 터릿 갤리어스 를 보았다. 일제 사격으로 80발. 그러나 하늘에 떠 있으니 이제는 좌우의 함포를 모두 사용할 수 있다. 장군은 지금 다림 상공을 가로질러 외성 쪽을 향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깨달았다.

그것은 160문의 강철의 레이디다.

장군은 다시 한번 품위는 별로 없지만 희열은 충분한 함성을 질렀다.

“내가 왜? 강철의 레이디가 160문인데!”

바스톨 장군은 말을 돌렸고 자신이 달려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 달려갔다. 그리고 그의 머리 위에서 나란히 날고 있는 두 척의 전함을 향해 팔을 휘 두르며 함성을 질렀다. 뱃전으로 고개를 내민 선원들은 아래쪽의 대로를 달리는 노장군을 알아보고는 손을 흔들어보였고 그 작은 동작은 바스톨 장 군을 거의 실신하게 만들었다. 장군은 기사들의 퍼레이드를 향해 팔을 휘두르는 개구쟁이처럼 비명을 지르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어떻게 보더 라도 수부의 자질을 가졌다고는 말할 수 없는 바스톨 장군은 그 순간 모든 뱃사람들이 느끼는 공포는 느끼지 않았다.

하리야는 벌벌 떨면서 하늘 저편으로 멀어져 가는 그랜드파더호와 그랜드머더호의 고물을 바라보았다. 그의 머리의 이성적인 부분은 그 순간 바스 톨 장군이 느끼는 기쁨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지만 그의 감성은 그렇지 못했다. 늘상 보아왔던 배였고 게다가 그의 동료들이 타고 있는 배였지만, 뱃 사람 하리야는 하늘을 날고 있는 배의 모습에서 한 가지 공포밖에 느끼지 못했다. 에레로아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봐, 하리야 선장. 유령선을 떠올리고 있는 건가?”

하리야는 움찔하며 에레로아를 바라보았다. 에레로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 미소의 의미를 깨달은 하리야는 얼굴을 붉혔다. 그 미소에 는 ‘악마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네가 유령선에 떨고 있는 건가?”라는 조소가 담겨 있었다. 하리야는 약간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젠장, 바라………… 에레로아. 나는 뱃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래. 하늘을 나는 유령선은 폭풍이나 전염병의 전조라지. 하지만 안심해. 저건 그랜드파더호와 그랜드머더호니까.”

“나도 압니다. 음, 진정해야겠지요.”

하리야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애썼다. 이 전투의 특이한 점은 전투 발발 이후부터 지금까지 폴라리스가 전혀 지휘 계통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당사자 각자의 판단에 따라 싸우고 있다는 점이다. 킬리는 자의에 따라 용기병들을 날려버렸고, 바스톨 장군은 아무런 지휘권도 가지지 못한 상태에 서 폴라리스의 육상 방어를 책임지고 있었다. 두캉가는 노스윈드 선단의 4개 전함을 지휘하며 지브라호를 쫓고 있었고 트로포스는 자의에 따라 두 척의 터릿 갤리어스를. 그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육상 방어로 돌렸다. 모든 사람들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있는 가운데 그나마 최고 책임자 라 할 수 있는 하리야는 이 해변가의 바위 위에 앉아 넋놓고 구경하고 있었다.

하리야는 지금까지의 상황에 불만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자신도 뭔가 행동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비록 그와 바스톨 장군이 수립했던 모든 전략이 폐기된 상태였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하리야는 생각하기 위해 애썼다. 그가 고민했던 것, 즉 바스톨 장군을 지원할 병력은 두 척의 터릿 갤리어스가 파견됨으로써 해결되었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순간 하리야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앞바다를 노려보았다.

“자폭하려는 건가!”

두 척의 터릿 갤리어스가 하늘로 날아가버림에 따라 여섯 척의 필마온 전함이 목표를 잃은 채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림 앞바다에는 자유호를 제외하고도 아직 폴라리스의 전함이 한 척 남아 있었다. 그리고 하리야는 트로포스 선장이 두 척의 터릿 갤리어스를 날려보낸 이유가 꼭 육상 지원만 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느꼈다.


트로포스는 10년 동안 잠을 못 잔 듯한 피로감을 느꼈다.

트로포스는 10년 동안 잠만 잔 것 같은 생경함을 느꼈다.

바다, 그리고 그의 배는 고요했다. 조금 전까지 들려오던 전투의 소음들은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고 잔잔한 물결 소리만이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트로포스는 어디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트로포스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갑판에 닿는 무릎의 느낌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잘 됐어.’

두캉가 선장은 지브라호를 격침시키거나 하다못해 다시는 찾아올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의 피해를 입혀 돌려보낼 것이다. 그리고 킬리와 돌탄은 다 벨군을 상대로 비슷한 일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앞바다에 남아 있는 여섯 척의 필마온 전함은 질풍호를 폭파시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설령 그들이 질풍호의 폭발에서 도망친다 해도 두캉가 선장은 지브라호를 처리한 다음 천천히 그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트로포스는 한번의 마법으 로, 터릿 갤리어스를 하늘로 끌어올린다는 발상의 전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가장 효율적으로 마법을 쓴 것 같군. 훌륭해, 트로포스.’

트로포스는 스스로에게 보내는 공치사를 들으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자족감에 빠져 있을 시간은 아니었다. 질풍호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 이므로 필마온 기사단이 접근하도록 해야 한다. 그랜드파더호와 그랜드머더호가 목표에서 제외됨으로써 그들이 질풍호로 달려들 가능성이 높아지긴 했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질풍호를 공격하는 대신 지브라호를 구출하러 달려가버릴 수도 있다. 트로포스는 다시 지팡이에 힘을 주며 일어나려 했다. 그리고 트로포스는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이 지팡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쥐고 있는 것은 누군가의 다리였다. 자줏빛 행전이 두 정강이를 감싸고 있었고 그 위로는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바지가 우스꽝스럽게 부풀어 있 었다. 허리는 노란색 물방울 무늬 비단 새시로 꽉 졸라매져 있었고 비리디안 빛 격자 무늬 셔츠와 황금빛 조끼가 서로를 완벽히 무시하는 모습으로 하나의 상체 위에 모여 있었다. 트로포스는 한 가지 생각밖에 떠올리지 못했다.

‘상당히 파격적인데?’

트로포스는 이 해괴한 복장을 한 여자의 도저히 성별을 짐작할 수 없는 복장이었지만 그 옷 아래의 몸은 그럭저럭 여성의 선을 가지고 있었다.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부풀다 못해 옆으로 쳐진 모자가 두 귀를 다 덮고 있었고 그 아래로는 금발이 흩날리는 가운데 여자는 부드럽게 웃었다. 트로 포스는 그 여자의 위아래 입술이 서로 다른 색깔을 하고 있는 것에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이갈기의 요정과 코골기의 요정이 더불어 축복하는 듯한 이 아름다운 날 그대 앞에 선 이자의 이름은 아델토라 하오.”

트로포스는 반갑다고 말하기에 앞서 짧은 순간 갈등을 겪어야 했다.


바람을 끊으며 날아든 창날이 다시 리저드라이더의 투구끈 아래로 파고들었다.

턱 아래를 파고든 창날은 연구개를 관통하여 단숨에 뇌를 헤집어놓았고 따라서 창이 뽑히기도 전에 이미 리저드라이더는 죽어 있었다. 무서운 힘으 로 창이 당겨질 때 리저드라이더의 시체 또한 목도리도마뱀 위에서 떨어져 땅 위를 뒹군다.

창을 들고 있던 병사는 숨을 헐떡이며 시체를 바라보았다. 병사는 자신이 한 짓을 누가 보았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끼듯 충혈된 눈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 모든 것을 까맣게 잊었다. 조금 전 자신이 쓰러뜨린 상대방의 눈빛마저도. 그곳에는 우둘투둘하고 단단한 피 부 사이로 번득이는 눈이 있었다. 그 냉혹한 눈으로 주시당하자 병사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빨들이 희게 번득이는 입이 벌어지고 역한 입김이 병 사에게 확 풍겨올 때도 병사는 현실을 부정한다.

이런 일이 있을 수는 없어.’

지금까지 보아왔던 목도리도마뱀이 애완동물로 여겨질 정도로 흉측하게 생긴 놈이 병사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좌우로 펼쳐지는 무시무시하면서도 아름다운 프릴.

“쫴애애애애액!”

“으아아아!”

병사는 괴성을 지르며 창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이번에는 프릴 뒤에서 또다른 창이 날아와 병사의 창을 쳐내었다. 그 순간 그 흉측한 목도리도마뱀 이 앞으로 돌격했다. 병사는 목과 가슴의 아픔보다는 자신의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느낌에 더 당혹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 깨달은 병사는 끔찍한 공포를 느꼈다. 병사를 깨물어 올린 목도리도마뱀은 그의 몸을 허공에 대고 흔들고 있었다.

잠시 후 목도리도마뱀은 물고 흔들던 것이 이미 시체임을 깨닫고는 그것을 옆으로 집어던졌다. 도마뱀에 타고 있던 마왕은 옆으로 비껴들었던 장창 을 한바퀴 돌려 고쳐 잡으며 발로는 도마뱀의 허리를 걷어찼다. 하지만 목도리도마뱀은 앞으로 달려가는 대신 으르릉거리며 펄쩍 뛰어올랐고 마왕은 아뿔싸 하는 표정으로 멋쩍게 웃었다.

‘아차, 말이 아니지.’

그러나 빌레스의 손은 허리춤의 석궁을 향하고 있었고 도약의 최정점에 도달했을 때 마왕은 전장의 저편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서 파르치는 등뒤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다벨 중장보병 하나가 가슴에 꽂힌 쿼렐을 움켜쥔 채 나동그라지고 있었다. 서 파르치 는 저편을 보았고 그곳에서는 다시 땅에 내려선 마왕이 빈 석궁을 옆으로 집어던지는 광경이 보였다. 석궁에 얻어맞은 중장보병은 비틀거렸고 마왕 은 장창을 휘둘러 중장보병의 복부를 사정없이 꿰뚫고 있었다.

“꽤나 바빠 보이시는군요, 전하!”

“자네 목숨까지 책임지려니 좀 바쁘군.”

서 파르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지만 마왕은 싱긋 웃으며 자신의 목도리도마뱀을 달리게 만들었다. 트라이어드, 다른 목도리도마뱀보다 세 배는 더 빠르고 세 배는 더 힘세고 세 배는 더 못생겼다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마왕의 도마뱀은 보라색 번개처럼 전장을 치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점에서 마왕은 다벨군의 최고의 악몽은 아니었다. 마왕의 오른팔이자 마왕의 방패였던 서 하빈저는 자신의 몸과 타고 있는 말 전체를 하나의 검으로 바꾼 듯한 기세로 다벨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 기백 넘치는 공격은 록소나 중장기병이 왜 대륙에서 가장 터프하다는 명성 을 듣고 있는지를 잘 말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비록 그가 이 전장의 유일한 록소나 중장기병이 아니었더라도 서 파르치는 그가 록소나 중장기병의 표상이 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서 파르치와 마왕과 서 하빈저, 그리고 리저드라이더들은 그런 식으로 성벽으로 육박하는 다벨 중장보병대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후려치고 있었다. 공격 그 자체보다도 그들이 야기하고 있는 공포가 먼저 중장보병대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목도리도마뱀이 으르릉거리는 가운데 성벽을 올라가고 싶 어하는 병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관찰하던 서 소사라는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형의 노예병이 존경스럽군. 물론 도망치지 않았다면 더 존경스러웠겠지만.”

부러진 다리를 등자에 묶은 모습으로 말에 타고 있던 서 소팔라는 난처한 듯 어깨를 으쓱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망친 노예병을 떠올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형제의 대화를 듣고 있던 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떻게든 정리를 해야겠군. 서 켈커! 나가서 저 무례한 놈들을 쫓아버려라.”

서 켈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투구를 덮어썼다. 그러나 그가 달려나가기 전 서 소팔라가 기겁한 목소리로 외쳤다.

“자, 잠깐! 하늘을 봐!”

하늘을 올려다본 다벨의 지휘관들은 그들이 가장 저질스러운 악몽에 단체로 초대받은 기분을 느꼈다.

빌레스 국왕은 끌어당겼던 장창을 내찌르려다가 멈칫했다. 그의 적수였던 중장보병은 마왕의 공격을 전혀 방어하지 않고 있었다. 마왕은 전투중이 었고 따라서 상대방이 싸울 의사가 있든 없든 거꾸러뜨릴 충분한 용의가 있었지만, 호기심은 별개의 문제다. 그래서 마왕은 트라이어드가 공격하지 못하도록 고삐를 뒤로 끌어당기며 정중히 질문했다.

“이 자식아, 그렇게 넋빼고 있으면 안 찔릴 줄 아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장보병은 방패를 옆으로 늘어뜨린 채 참 바보 같은 얼굴로 멍청히 서 있었다. 당혹감을 느낀 마왕은 ‘이봐, 이 얼빠진 친구 좀 보게 하는 듯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고 그러고는 더 당황해 버렸다. 주위의 많은 병사들이 비슷한 증세, 즉 무기를 늘어뜨린 모습으로 하늘을 보 고 있었다. 그 중에는 서로 무기를 맞댄 모습으로 똑같이 하늘을 보고 있는 병사들도 있었다. 이 거대한 시대적 흐름에 동참하기 위해 마왕은, 눈살을 조금 찌푸리긴 했지만 근엄하게 하늘을 보았다.

‘제군들이 그렇게 원한다면, 나도 보아주지.’

그리고 마왕은 그들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저 멀리서 목이 졸린 듯한 ・마왕은 그것이 아무래도 서 파르치의 목소리 같다고 생 각했다 비명이 들려왔다.

“배가 하늘을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