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5권 – 22장 : 세상의 주인 – 6화
휘리 노이에스는 불 속을 달려가고 있었다. 사방에서 날리는 불티가 시야를 어지럽히고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연기가 사정없이 소용돌이쳤다. 그의 망토에도 불이 붙었지만 휘리는 상관하지 않았다.
열기는 살을 그을리게 만들고 그의 말은 꼬리와 갈기에까지 불이 붙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말은 이제 불 속에서 도망치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리 고 있었고 그래서 휘리는 고삐를 쥔 손을 놓았다. 휘리는 손을 뒤로 돌렸고 불타는 망토가 한번 흩날렸을 때 그의 손에는 활이 쥐어져 있었다. 그때 망토의 불이 휘리의 머리카락과 상의에도 옮겨붙었다. 하지만 휘리는 침착하게 화살통으로 손을 뻗었다. 살통을 멘 끈이 불타 떨어지기 직전 휘리는 화살 하나를 꺼낼 수 있었다. 휘리는 천천히 활 위에 화살을 재였다. 그리고 휘리는 허공을 향해 두 팔을 들어올렸다.
화르르륵! 그의 소매를 따라 활에도 불이 옮겨붙었다. 활시위가 하얗게 불타오르고 있었지만 이미 동공까지 타들어가고 있던 휘리는 그것을 보지 못 했다. 대신 휘리는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그의 시야 속에는 한 여인이 그를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어머니?
아니면 율리아나?
휘리에게는 아무 상관 없었다.
휘리는 더 높은 곳을 향해 활을 쏘았다.
하리야에게 부축되어 일어나던 에레로아는 갑자기 몸을 떨었다.
에레로아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고통 같기도 하고 웃음 같기도 한 것이 그녀의 가슴속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에레로아는 어리둥절한 표 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은 여전히 바위 위에 서 있었고 파도는 쉼없이 바위를 때리고 있었다. 그리고 하리야는 그녀를 부축한 채 의아한 표 정을 짓고 있었다.
“에레로아? 무슨 일입니까?”
에레로아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하리야의 더 당황해하는 얼굴을 보고는 그녀가 엉뚱한 표정을 짓고 있음을 깨달았다. 얼굴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팔다리는 사정없이 떨렸다. 에레로아는 미칠 것 같은 기분 속에서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벨로린이 그녀 속으로 들어왔다. 놓칠 뻔했지만 에레로아는 가까스로 벨로린을 보았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에레로아는 하리야 를 바라보았다.
“하리야.”
“예, 에레로아.”
“그가 죽었어.”
“예?”
“다섯 번째 검이 부러졌어.”
“휘리………… 휘리 노이에스 말입니까?”
에레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잠시 후 하리야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에레로아는 그 얼굴을 보며 더 크게 웃었고 그러자 하리야도 환 하게 웃었다. 하리야는 열띤 얼굴로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러면?”
“이겼지. 너희들은 이겼어.”
“오, 맙소사, 에레로아!”
하리야는 비명 같은 환성을 지르며 에레로아를 끌어안았다. 에레로아는 그 느낌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잠시 하리야를 내버려두기로 했다. 하 리야는 곧 그녀를 풀어주며 다시 한번 확인하듯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정말, 정말입니까? 우리는 이긴 겁니까?”
“그래. 너희들은 이겼어.”
“으와아아!”
하리야는 에레로아를 놓아주며 다시 괴성을 질렀다. 하리야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향해 휘두르다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기도드리기 직전 하리야는 에레로아를 훔쳐보았다. 에레로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떨어지지. 조용히……”
에레로아는 바위 반대편으로 몸을 옮겨 반대쪽을 바라보았다. 하리야는 감사해하는 눈으로 에레로아의 등을 보고는 곧 고개를 숙여 기도를 드렸다. 물론 말소리는 전혀 내지 않았다. 그러나 곧 하리야는 울음을 터뜨리며 땅에 엎드렸다.
에레로아는 등뒤에서 들려오는 희열에 찬 울음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것은 하리야의 승리이며 폴라리스의 승리지만 동시에 그녀의 승리이기도 했다. 다섯 번째의 검은 부러졌고 이제 오 왕자의 검은 모이지 않는다.
반왕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에레로아는 먼바다를 바라보았다. 저편 수평선 너머에는 율리아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레로아는 이제 그녀를 죽일 필요가 없다. 에레로아는 뭐 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축하한다. 율리아나. 널 지켜준 그 노예에게 감사……………”
오스발을 떠올린 에레로아는 다시 가슴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에레로아는 눈살을 찡그리며 생각했다.
‘그 놈이 내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야.’
에레로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오스발에 대해 잊으려 애썼다.
지브라호는 더 이상의 모욕적인 회피를 포기한 다음 자랑스럽게 돛을 폈다. 그리고 3L의 배다운 속력으로 노스윈드의 배들을 떨쳐버리며 먼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그 모습은 당당했으며 두캉가는 속으로 경의를 보냈다. 그리고 두캉가는 재빨리 전함들을 반전시켰다. 앞바다에서 질풍호를 포위하 던 필마온의 배들은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노스윈드의 전함들의 모습과 달아나는 기함을 보고는 전의를 상실했고, 그래서 포위를 푼 다음 각 방향으 로 뿔뿔히 흩어져 도망쳤다. 두캉가는 그들에 대한 추적도 포기했다. 다시 부두로 돌아온 두캉가는 두 주먹을 힘껏 내밀며 트로포스의 질풍호를 바라 보았다. 가까스로 아델토에게서 풀려난 트로포스 역시 멋쩍은 표정으로 주먹을 흔들었다.
“이겼어!”
“이겼습니다.”
킬리는 덱체어에 주저앉으며 땀에 젖은 이마를 쓸어넘겼다. 선원들은 서로를 얼싸안은 채 환호하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보며 킬리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한 선원만은 난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킬리는 그 선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그러나, 조타수?”
“저, 선장님. 이제 어떻게 해야 됩니까?”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키를 한번 돌려봐. 앞바다 쪽으로.”
조타수는 포기하는 심정으로 키를 돌렸다. 그랜드머더호는 부드럽게 선수를 돌렸고 잠시 후 다림 앞바다를 향했다. 조타수는 늘상 행해 오던 이 일 에 경악에 가까운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곧 조타수는 돛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장님. 바람이 역풍입니다만.”
킬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일을 떠올리고는 슬그머니 웃음을 지었다. 황급히 웃음을 지운 킬리는 선장다운 태도로 근엄하게 말했다.
“갑판장!”
갑판원들과 얼싸안고 춤을 추던 갑판장은 황급히 선장에게로 달려왔다. 킬리는 그에게 늘상 행해 오던 명령을 내렸지만 갑판장은 어이없어하는 눈 길로 선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킬리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한번 해보자고. 나는 궁금했단 말이야.”
갑판장은 어깨를 으쓱인 다음 선교를 내려갔다. 갑판의 해치에 도달한 갑판장은 해치를 연 다음 아래쪽을 향해 외쳤다.
“노예장! 미속 전진한다.”
갑판 아래에서 당황해하는 반문이 돌아왔다.
“예. 그런데요?”
“노를 저으란 말이다. 핫하하!”
갑판 아래에서는 다시 약간의 소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 소란은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킬리는 미소를 머금은 채 두 손을 비볐다. 자, 과연 어떻게 될까?
잠시 후 그랜드머더호의 노가 일제히 움직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랜드머더호는 다림 앞바다를 향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판 위아래에서 동시에 환성이 솟구쳤고 킬리는 안도의 한숨 같은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타륜을 쥐고 있던 조타수는 아직도 약간 근심스러워하는 기색으로 말했 다.
“선장님. 그런데 어떻게 내려가지요?”
킬리는 껄껄거리며 대답했다.
“응? 자네 어떻게 배를 멈추는지 모르나? 그럼 고참 선원의 지혜를 가르쳐주지. 닻을 던지면 된다구.”
조타수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었고 킬리는 더 큰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저편의 그랜드파더호가 그랜드머더호를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보고는 아예 배를 붙잡고 웃어대었다.
물수리호는 닻을 내렸다.
부두에 정선한 노스윈드의 전함들 전부에서 함성과 웃음 소리가 드높았지만 물수리호만은 고요했다. 노를 멈추게 된 노예들의 한숨 소리조차 없는 가운데 선원들은 조용히 움직이며 전투의 뒤처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벨로린 역시 폴라리스가 올리는 환성에는 동참하지 않고 있었다.
벨로린은 긴장한 채 서 있었다. 그녀의 한손은 알버트 선장의 허리띠를 꼭 움켜쥐고 있었고 다른 손은 자신의 바지춤을 틀어쥐고 있었다. 매서울 지 경으로 번득이는 눈은 질풍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질풍호에서는 아델토가 그녀를 향해 손을 젓고 있었지만 벨로린은 그녀의 머리 위, 돛대에 앉아 있 는 벌쳐를 바라보고 있었다.
벌쳐는 한가롭게 다리를 흔들며 먼바다를 보고 있었다. 그는 벨로린의 눈길에도, 폴라리스인들의 기쁨에도, 그리고 다시 트로포스를 괴롭히고 있는 아델토에게도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는 그저 수평선을 쏘아보며 자신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 있었다.
벨로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벌쳐를 쏘아보았다.
문득 벌쳐의 오른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눈은 여전히 수평선을 향하고 있었지만 벌쳐의 손만은 그와 분리된 생명체인 것처럼 움직였다. 이윽고 멈춰 선 그 손의 집게손가락은 벨로린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벨로린은 그 손가락이 그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벨로린은 몸을 틀어 알버트 ‘네일드’ 렉슬러 선 장을 보았다가 다시 벌쳐를 보았다.
알버트 선장을 가리키고 있던 벌쳐의 손가락은 이제 허공에 글자를 쓰고 있었다. 엘핀이었고, 벨로린은 입속으로 그 글자를 읽었다.
기릭스.
자신의 이름을 다 쓴 새매의 공작은 다시 손을 내렸다. 그리고 벨로린은 두 얼굴 가득히 웃음을 지으며 두 팔을 들어올렸다. 벨로린은 하늘을 껴안겠 다는 듯이 두 팔을 벌렸다. 참을 수 없는 함성이 그녀의 입을 통해 터져나왔다.
“복수다!”
“그들은 인간에게 복수하기로 결정했군요.”
“무슨 말이죠, 발?”
“그들은 이 세계에 살 수 없습니다. 존재할 수는 있지만 생존할 수는 없지요. 그래서 그들은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자 신의 의사를 표현했습니다. 나라면 이런 식으로 살겠다는 거죠. 그리고 그들은 인간들에게 복수하기로 결정했지요.”
“발………… 도대체 무슨 말이죠?”
오스발은 어두운 미소를 지으며 율리아나를 돌아보았다.
“공주님. 새장의 문을 열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율리아나는 얼어붙은 얼굴로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이 힘없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오스발은 뱃전에 허리를 기대며 차분하게 말했다.
“아름다운 새를 소유한 자는 그 새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입니다. 새장을 만들고 먹이를 줘야 하고 관심을 보내야 합니다. 깃털을 가다듬고 발톱을 깎아줘야겠지요. 새가 들려주는 노래에 대한 복수로써………… 그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는 새의 노예입니다. 주인이 되고 싶다면, 진실로 주 인이 되고 싶다면 새장의 문을 열고 새를 날려보내줘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그는 소유의 속박에서 벗어나 새의 주인이 되고 그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겠지요.”
오스발은 빙긋 웃었다.
“그렇다면 진정한 주인은 어떤 이겠습니까?”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자……”
“그렇습니다.”
오스발은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나는 손끝부터 감각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곤 흠칫했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스발은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말에 맞장구를 치듯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세상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저는 세상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주인……”
“그렇습니다.”
“세상의 주인, 세계의 왕…… 그렇다면 당신은…..”
율리아나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녀는 자신이 조금도 놀라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을 나직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세상을 사랑하지는 않겠군요.”
“예.”
“당신은 악마군요.”
“그렇습니다.”
정오. 세상은 가장 밝은 밤 속에 꿈꾸고 있었고 폴라리스의 함성은 모든 것을 삼키는 소용돌이로 시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함성 속에서 자유호는 먼바다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