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5권 – 23장 : 자유, 복수, 해류를 위한 리프레인 refrain – 1화

폴라리스 랩소디 5권 – 23장 : 자유, 복수, 해류를 위한 리프레인 refrain – 1화


밤바다에 떨어진 별들이 물이랑을 타고 넘실대고 있었다.

오스발은 보트용 활차에 기대어 검은 밤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은 활차의 밧줄을 움켜쥐고 있었고 왼손은 바지 주머니에 꽂혀 있었다. 삐 걱이는 문소리에 고개를 돌린 오스발은 주승강구로부터 나오는 율리아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좌우를 둘러보던 율리아나는 곧 오스발을 발견하고는 그를 향해 걸어왔다. 율리아나는 눈을 비비는 시늉을 해보였지만, 만약 침착을 가장하려는 동 작이었다면 그것은 완전한 실패였다. 하지만 오스발은 묵묵히 율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율리아나는 하품까지 해보이고는 역시 실패작이었다 – 오 스발을 향해 말했다.

“당신이 나를 불렀나요?”

“그랬나 봅니다.”

“왜지요?”

“잘 모르겠습니다. 공주님은 역시 반왕이신가 봅니다.”

율리아나는 치맛자락을 쓸어모은 다음 뱃전에 걸터앉았다. 뱃전 바로 바깥에는 매달린 보트가 있었고 율리아나는 보트 선체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 반왕이라는 거, 자상하게 설명해 줬지만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반왕이라서 싱잉 플로라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고, 반왕이라서 자신을 위 해서만 노래 부르는 가수로 하여금 내게 노래 부르게도 할 수 있었고, 반왕이라서 유일한 자유인 xaxos 8 aiwy으로 하여금 복수하도록 했다고요?” “공주님께서 구해 달라고 했을 때 저는 움직여야 했지요.”

“뭐든 다른 사람들의 반대라는 뜻 같아요. 그 말을 생각하다 보면 악마는 당신이 아니라 나인 것 같아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에레로아와 같은 생각을 하지 마세요. 반대인 것은 적이 아니라, 그냥 반대인 것입니다.”

오스발은 갑자기 미소 지으며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에레로아, 불쌍한 여자입니다.”

고개를 내린 오스발은 율리아나가 자신을 향해 따져묻는 듯한 시선을 보내는 것을 보았다. 오스발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공주님?”

“불쌍하다고 했나요? 그럴 수 있지요. 하지만 당신은 우리도, 악마도 사랑하지 않잖아요? 당신 입에서 나오는 말이 정말 동정심 어린 말인지 의심스 럽네요.”

“아니오. 이제는 사랑해야 합니다. 지배해야 합니다. 그들이 복수를 선택했기에.”

“우리를, 그리고 악마를 지배하나요?”

“예. 당신들과 악마들을 내 악의 새장에 넣고 보살필 겁니다.”

율리아나는 파르르 떨었다.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요?”

“행한 대로 보답받지 못합니다. 뿌린 대로 거두지 못합니다. 선행을 행하여도 멸시를 받습니다.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습니다. 처벌을 받는 것은 재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배자는 피지배자를 속이고 피지배자는 지배자를 불신합니다. 무리는 개인을 억누르고 개인은 무리를 증오합니다.” “그건…… 그건 지금도 일어나는 일인 것 같군요.”

“하지만 지금은 선행을 행하는 이에게 갈채를 보내는 이도 있으며 죄의식 속에 죄를 짓는 사람도 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은 키 선장님이 있 지요.”

“키 드레이번은 누구지요? 아니, 뭐지요?”

“그 분은 인간입니다.”

율리아나는 오스발이 ‘인간’을 보통명사가 아닌 고유명사처럼 발음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인간’을 발음하는 이를 한번도 본 적이 없 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가 만족감이 되어 그녀에게 다가왔고 그래서 율리아나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만족감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던 오스발이 준 것일지도 몰랐지만, 그녀는 그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율리아나는 자신의 감상만을 말했다. “나는 그가 싫어요.”

“공주님은 그 분을 정말 싫어하는 유일한 분이시지요.”

“무슨 말이죠?”

“입버릇처럼 그 분을 증오한다고 말하는 이 많아도 그것은 모두 말 그대로의 뜻이 아닙니다. 입버릇처럼 자유를 원한다고,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 라고 외치는 이들도 사실은 자유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들 중 자유를 원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자유를 원하는 이가 없다고요?”

“자유는 타인에게 간섭받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무간섭을 견딜 수 있을까요? 아무도 사람을 간섭하지 않는다면 그는 일주일도 지나지 않 아 미쳐버릴 겁니다. 자유를 원한다고 말할 때, 그는 간섭을 받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간섭만큼 자신도 남을 간섭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자신의 자유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자유를 뺏겠다는 것입니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 그들은 복수의 권리 를 원하는 것입니다.”

율리아나는 멍한 눈으로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오스발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그들은 절대로 키 선장님을 증오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나는 왜?”

“공주님은 반왕이십니다.”

율리아나는 활차의 밧줄에 얹힌 오스발의 손을 보며 말했다.

“모르겠어요. 그러면… 우리는 영원한 악의 손아귀에서 신음하게 되는 건가요?”

“아니오.”

“아니라고요?”

“예. 그랬다면 벨로린이 그토록 복수를 원했을 리 없지요. 그녀는 인간을 동정합니다. 이제 그들의 배례의 주이자 증오의 주가 된 나는 아마도 그녀 에게 판데모니엄의 지배자가 받을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을 주겠지요. 그 고통 속에서 미쳐버려 영원히 비명을 지르고 인간을 동정한 자신을 되풀이 되 풀이 죽이게끔 할 겁니다. 자살은 그녀의 삶이 되겠지요.”

율리아나는 숨이 멎는 기분 속에서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다시 말을 꺼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승리자가 아니군요.”

“아니오, 승리자입니다.”

“어째서?”

오스발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오스발은 밧줄의 매듭으로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조금 후 동틀녘이면 자유호는 이 배를 따라잡을 겁니다. 그러니 저는 그 전에 떠나겠습니다.”

“떠난다고요?”

“예.”

율리아나는 오스발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깨달았다. 그는 보트를 묶어둔 밧줄을 풀고 있었다. 서너 명의 선원이 필요한 일을 그는 혼자서 해내고 있 었다. 매듭을 푼 오스발이 보트를 내릴 때 율리아나는 갑자기 몸을 움직였다.

율리아나는 등뒤에서부터 오스발을 껴안았다. 오스발은 잠시 행동을 멈추고는 어깨 너머로 율리아나를 돌아보았다. 율리아나는 오스발의 등에 얼굴 을 묻은 채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일 내가 허락하지 않겠다면? 당신이 무엇이든 간에 아직은 내 노예예요.”

“공주님.”

“나는 허락하지 않겠어요!”

“공주님. 이제 허락은 필요없습니다.”

“무슨 말을……”

“어제까지의 저는 세상의 주인이었고 공주님의 노예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뒤바뀌었습니다. 저는 세상에 복수할 테니까요.”

“난 모르겠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허락이 안 된다면 부탁은 어때요? 가지 말아요. 부탁하겠어요, 애원해요!”

오스발은 밧줄을 놓았다. 하지만 보트는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오스발은 율리아나의 손을 쥐어 자신의 허리에서 떼어낸 다음 몸을 돌렸다. 율리 아나는 눈물 그렁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율리아나는 절대로 오스발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스발은 공주의 두 손을 앞으로 밀며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그녀의 두 손을 허리에 붙이며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감았던 눈을 떴을 때 율리아나는 오스발이 이미 그녀의 앞에서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율리아나는 눈물을 닦아내었다. 오스발은 뱃전 바깥의 보트 속 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도 붙잡고 있지 않았지만 밧줄은 서서히 풀리며 보트를 내려놓았고 율리아나는 점점 낮아지는 오스발의 얼굴 을 보았다. 뱃전 아래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오스발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오스발은 뱃전 아래로 사라졌다. 율리아나는 앞으로 달려가 뱃전에 손을 짚었다.

보트를 착수시킨 오스발은 밧줄을 풀었고 밧줄은 저절로 감겨 올라갔다. 그리고 오스발은 바닥에 앉아 노를 움켜쥐었다. 그가 자유호에서 다루던 것 보다는 훨씬 가벼운 것이었다. 노는 고물 쪽을 보며 젓는 것이므로 오스발은 율리아나의 얼굴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다른 탈것과 달리 보트는 서로를 마주보며 멀어진다.

뱃전 너머로 나타난 율리아나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도드라졌다. 오스발은 시선을 돌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의깊게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냥, 보았다.

그러나 얼굴을 보는 것도 잠시, 갑자기 몰려든 안개가 둘 사이로 스며들었다. 스톰라이더호와 보트 사이로 스며든 안개가 율리아나의 얼굴을 가리기 직전, 오스발은 율리아나의 입술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오스발은 율리아나의 입술을 읽을 수 있었다.

‘미란 오스발 에레로아.’

오스발이 다시 노를 당겼을 때 이미 안개는 스톰라이더호를 뒤덮었다. 오스발은 어둠 속에서 노를 저으며 율리아나의 말을 생각했다.

에레로아는 엘핀으로 ‘친구’를 의미한다. 하지만 엘핀의 다른 단어들이 그렇듯 이 말 또한 인간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의미를 가지며, 그 활용 또한 변화무쌍하다. 후치사적 용법으로 사용될 때, 즉 단어 뒤에 붙게 될 때 ‘에레로아’라는 단어는 영혼의 친구, 또다른 나로서의 친구를 의미한다. 그리고 약간 조심성 부족한 전승학자들은 이 단어를 ‘연인’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오스발은 다시 노를 당겼다.

별빛을 삼킨 안개는 오스발의 팔다리에 휘감기며 고요히 흘렀다. 빛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안개가 감도는 것으로 보아 아침이 머지 않았다. 방향을 짐작할 것은 아무데도 없었지만 오스발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규칙적으로 노를 당겼다 밀었다.

그리고 오스발은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다시 어둠을 만든 오스발은 자신을 먼 곳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코리 맥거핀은 테리얼레이드의 ‘존경받는 시민’과 ‘조롱받는 시체’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고 있었고, 스스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소년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이 소년을 약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 맥거핀 씨.”

소년은 결국 경칭을 사용하긴 했다. 그리고 그것은 코리가 케록스를 찌른 다음 그에게 생긴 놀라운 변화 중 하나였다.

“맥거핀 씨가 들었다는 말은 맞아요. 케록스 패거리는 다 없어졌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돌아온 건 좀 성급했는데, 케이윈이 새 조직을 만들려고 애쓰고 있어요. 그 자식이 멍청이라는 건 자기만 빼곤 다 알잖아요. 어느 얼간이가 녀석 밑에 들어가겠어요. 그래서 케이윈은 본보기를 필 요로 하고 있지요.”

“그럼 나는 좋은 본보기가 되겠군.”

“그래요. 조언하자면, 남 좋은 일 시키지 말고 다시 도망쳐요.”

이런 조언 역시 소년이 코리에게 품게 된 존경심의 증거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코리를 즐겁게 만들지는 못했다. 코리는 외투 깃을 세우며 주 위를 둘러보았다. 밤거리는 스산하고 어두컴컴하며 적의에 차 있는 교활한 야수 같았다. 그리고 그 위로 1월의 바람이 한 꺼풀 불고 있었다.

그 바람 사이로 단검이 날아들었다.

코리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당겨 단검을 피했다. 자칫하면 단숨에 숨통이 끊어질 뻔했지만 도주 생활에서 익힌 감각 덕분에 옷깃이 베이는 것으로 끝 났다. 단검을 쥔 상대방 역시 이 결과에 약간 놀라며 동시에 코리에게 존경심을 느끼는 듯했다. 그 증거로 두 번째 공격이 날아오는 대신 단검은 재빨 리 회수되어 방어 동작에 들어갔다. 코리는 어느새 뽑아든 두 자루의 단검으로 앞과 왼쪽을 방어하며 어둠을 응시했다.

코리는 절망감을 느꼈다. 상대는 셋이었고, 그 중 하나는 꽤 긴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코리는 언제나 볼품 사나운 롱 소드를 차고 다니던 칼잡이를 응시했다.

“케이윈.”

케이윈은 롱 소드 끝을 빙글빙글 돌리며 히죽 웃었다.

“오래간만이야, 코리. 테리얼레이드로 돌아오다니, 뒈지려고 작정했군?”

코리는 그의 말에 동감했지만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았다. 대신 코리는 단검 하나를 케이윈에게 던지고 나머지 하나를 휘두르며 강제로 돌파한다는 계획을 세워보았다. 하지만 그 스스로도 별로 현실감이 느껴지지는 않는 계획이었다.

그 계획도 쓸모없어졌다. 케이윈은 이미 롱소드를 내지르고 있었다.

“콰아앙!”

귀가 얼얼할 정도의 포성이 울려퍼졌다. 케이윈은 움찔하며 롱 소드를 멈췄고 코리는 그제서야 멈춘 롱 소드를 아래로 쳐내린 다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대로 저편을 바라보았다. 대로 저편에서 랜턴이 밝혀지고 있었다.

대로 저편에는 랜턴빛을 등에 진 그림자가 있었다.

랜턴은 그림자의 머리 뒤에서 빛나고 있었고 그래서 그 얼굴을 알아보기는 어려웠다. 그림자는 손에 쥔 이상한 막대기 같은 것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케이윈과 코리, 그리고 칼잡이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그림자는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와 동시에 그 손에 쥐어져 있던 막대기가 빙글빙글 돌 기 시작했다. 코리는 물론이거니와 칼잡이들도 그림자의 주인이 무슨 무기를 다루고 있는 건지 도통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림자는 빠른 속도로 돌리 던 막대기를 갑자기 허벅지 쪽으로 가져갔고 곧 그는 빈손이 되었다.

그리고 말발굽 소리와 함께 그의 등뒤에서 랜턴을 들고 있던 남자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코리와 칼잡이들은 다시 한번 놀랐다. 랜턴이 그렇게 높은 곳에서 빛나고 있던 것은 남자가 무엇인가에 타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그 ‘무엇인가’는 아무리 봐도 말이 아니었다. 그들의 별 대수롭지 않은 박물학 지식을 아무리 돌이켜보아도 그들은 말머리에 뿔이 난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남자가 타고 있는 준마에는 확실히 사슴의 뿔과 같은 것이 왕관처럼 돋아나 있었다. 그들이 공포마저도 느끼고 있었을 때 막대기를 돌리던 남자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역시 즐거운 내 고향이군. 흐음.”

칼잡이들은 그 목소리에 당황했다. 그들은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그때 뿔 난 말에 타고 있던 남자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또 빗나갔군.”

“…………이 망할 자식아. 하늘을 쏜 거다! 공포라고!”

뿔 난 말에 타고 있던 남자는 코방귀를 뀌었고 그 간단한 동작은 막대기를 휘두르던 사내를 거의 미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더 기다릴 수 없었던 케이 윈은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신부, 신부님! 파킨슨 신부님!”

파킨슨 신부는 왈왈거리던 것을 멈추고는 케이윈을 돌아보았다.

“어라? 형제. 언어가 많이 순화되셨군?”

“하하, 별 말씀을요.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그 동안 어디 가 계셨습니까?”

“나를 그리워했다고? 아아, 한 대 맞았던 것 때문에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축복을 받고 싶어서지요!”

“아아, 축복? 잘됐군. 그렇잖아도 자네들에게 축복을 내려줄 작정이었는데.”

케이윈의 얼굴이 환하게 바뀌었다. 이제 밤마다 악몽을 꾸는 일도 끝이다. 그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건 케록스의 망령이 붙었기 때문’이라고 말해 줬고 ‘신부에게 축복을 받으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테리얼레이드의 유일한 신부는 봄 이후로 어딘가로 사라졌고 그래서 케이윈은 자신이 영영 케록 스의 귀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좌절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신부가 돌아와서는 화난 기색도 없이 축복해 준다는 것이다. 케록스는 벙실 벙실 웃으며 무릎을 꿇기 위해 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벼락이 쳤다.

확실히 축복이었다. 케이윈은 이름 모를 천사들이 연주하는 하프 소리를 들으며 졸도했고 땅에 쓰러진 그의 얼굴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두 명 의 칼잡이와 코리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파킨슨 신부를 바라보았다. 한 주먹으로 케이윈을 뻗게 만든 -그것은 테리얼레이드의 기준으로도 수준급 의 펀치였다 파킨슨 신부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뿌듯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직 쓸 만하군. 자, 다음은 어느 형제를 축복해 줄까?”

칼잡이들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고 파킨슨 신부는 여유 있게 웃으며 앞으로 척척 걸어갔다. 곧 광란스러운 발자국 소리와 누군가의 턱 깨지는 소 리, 그리고 비명과 신부의 웃음 소리가 대로를 가득 메웠다. 그 모습을 보며 어처구니없어하던 코리에게로 뿔 난 말을 타고 있던 남자가 다가왔다. 

“이봐, 당신.”

코리는 자신을 부르는 사내를 돌아보며 외쳤다.

“시, 신부님을 도웁시다!”

“그건 걱정 마. 신부님 당신은 당신들을 사랑한다더군. 그러니 말릴 수가 있나. 당신들을 사랑하게 내버려두자고. 그런데 당신 말이야. 지금 당장 테 리얼레이드를 벗어나야 하지 않나? 당신, 당신들에게 위협당하고 있던 것 같던데? 그러니 당신들은 당신에게 맡겨놓고 당신은 본인과 그 이야기 좀 진지하게 해보자고. 아, 담배태우나?”

코리는 잠시 동안 몹시 괴로워하며 이 말의 의미를 고구해야 했다.


서 킬드온은 겨울 벌판을 바라보았다.

제국 기사단 북좌의 기사들은 벌판을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다. 가끔 여기저기서 급히 말 달리는 소리와 비명 같은 것이 들려왔지만 그것은 대개 죽은 척하고 있다가 달아나는 혼 족과 그를 뒤쫓는 제국 기사가 내는 소리였다. 혼 족은 포로 대우 같은 것을 바라지 않았고 하르타틱 요새의 낙성을 잊지 않은 제국 기사들 역시 포로 대접을 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제국 기사들은 혼 족의 마지막 잔병까지 처리하기 위해 꼼꼼히 수색하며 돌아 다니고 있었다. 대승의 뒤끝이었지만, 서 킬드온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서 킬드온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투구에 손가락을 얹고는 투구를 또닥또닥 두드렸다.

그는 타르타니어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타르타니어스는 갑자기 사라졌다. 그때까지 군대였던 혼 족은 그 순간부터 그저 많은 수의 야만인에 지나지 않게 되었고 북좌의 기사들은 손쉽게 그 들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물론 순전히 그들만의 힘은 아니었지만, 오늘의 이 승리가 북좌의 영광이며 아울러 근무지 이탈과 하르타틱 요새 낙성에 대한 면죄부가 될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그 정도로 큰 승리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 킬드온의 마음은 평온해지지 않았다.

상념에 잠겨 있던 서 킬드온은 헛기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전장의 피로 범벅이 되다시피 한 기사 하나가 말에서 내리고 있었다. 기사는 가볍게 목례하며 말했다. 

“여기 계셨군요.”

서 킬드온은 잠시 입을 다문 채 기사를 바라보았다. 기사는 투구를 벗어 옆구리에 끼고 다른 손으로는 고삐를 쥔 채 서 킬드온에게로 걸어왔다. 서 킬드온의 어깨 너머로 벌판을 바라본 기사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대승을 거둔 전장을 바라보며 홀로 승리의 기쁨을 더 연장시키고 계십니까? 전우들과 나누는 기쁨도 기쁨이겠지만 이 또한 아취가 있군요.”

“특별히 그렇진 않소. 서 소사라.”

서 킬드온은 마지못해 붙여준다는 듯이 ‘서’를 사용했지만 서 소사라는 거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서 소사라는 서 킬드온의 옆에 선 다음 그가 말한 것처럼 ‘홀로 승리의 기쁨을 연장시키듯 벌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 킬드온은 자신이 아무래도 외교관의 소양은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소사 라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당연할 것이다. 그와 함께 전략을 세우고 함께 전선을 달려 이 승리를 쟁취했고, 그 모든 과정은 실감 넘치는 피와 소음과 붉은빛으로 뒤덮여 있었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 킬드온은 자신이 서 소사라와 함께 싸우고 있다는 이 현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인인 그에게 적은 언제나 적이 고 아군은 언제나 아군이다. 서 킬드온은 가까스로 ‘외교관들에게는 적과 아군의 구분이 없으며 단지 어느 것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원동 력인지 알아내는 것이 중요할 것이라고 짐작해 봤지만 그 이상은 그에겐 무리였다.

어쨌든 그로서는 다벨군을 제국 기사단의 용병으로 고용시킨 바탈리언 남작의 재주가 어떤 것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바로 그가 총책임자였음에 도 불구하고.

그때 서 소사라가 다시 그에게 몸을 돌렸다.

“전투 전에도 말씀 나눈 바 있습니다만, 향후 더 큰 전쟁은 없을 듯합니다.”

“내 생각도 그러하오. 용병의 계약 조건은 끝난 것 같군요. 돌아가시려오?”

“그렇습니다. 급료나 전리품의 분배 같은 자질구레한 것들은 다른 사람들이 처리하겠지요. 물론 계약대로 행해질 것입니다. 저는 다른 용건이 있어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킬드온은 올 것이 왔다는 심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또 하나의, 그로서는 불가사의에 가까운 귀결.

“제국 기사단의 영용함과 그 출중함에 대해서는 일찍이 수도 없이 들었으나 실제로 이 두 눈으로 본 바 사람들의 말 전하는 것이 오히려 서툴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크게 감탄하고 감복한 저는………….”

으로 시작된 소사라의 일장연설은 킬드온의 넋을 반쯤 빼놓았다. 킬드온은 상대방의 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큰 불편은 없었다. 그게 무슨 내용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그 자신에게는 결정권이 없었지만 그에 대한 회답도 결정되어 있었다. 킬드온이 신경 써야 될 것은 오직 소사라의 말이 끝나는 시점을 포착하는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킬드온은 약간 늦게, 그러니까 소사라가 헛기침을 했을 때야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무, 물론 우리로서도 큰 영광이고 기쁨이오.”

소사라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목례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소사라는 투구를 쓴 다음 다시 말 위에 올랐다. 그러곤 빠른 속력으로 언덕을 내려갔다. 킬드온은 멍한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보며 정치가로 태어났 다면 좋았을걸, 하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도대체 왜 서 소사라를 제국 기사단 북좌의 남부 파견대(웃기지도 않는 명칭이다)의 용병대장으로 임명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라트랑 후작 에름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통로를 걷고 있었다. 창 밖으로는 눈이 소복하게 쌓인 카밀궁의 정원이 흰빛을 가득 뿌리고 있었지만 후 작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러나 발걸음을 멈춘 후작은 문을 흘끔 바라보고는 다시 창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후작은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웃는 표정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후작은 통로 저편에서 두어 명의 시녀들이 후작의 그런 모습을 훔쳐보며 소리 죽여 깔깔거리는 것은 알지 못했 다.

충분히 얼굴이 밝아졌다고 판단한 후작은 방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을 열면서 동시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방 안쪽에서 당혹한 목소리가 들 려왔다.

“에름? 왜 무릎을 꿇으세요?”

“응? 아아, 교회가 아니었습니까?”

“교회라니오?”

“이런. 성화(聖畵)가 보이기에 난 교회에 들어온 줄 알았어요.”

벽난로가의 의자에 앉아 있던 이루미나는 큰소리로 웃었다. 에름 후작은 빙그레 웃으며 아내에게 걸어가서는 그녀 옆에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아내의 부풀어오른 배에 살짝 키스하며 말했다.

“너도 안녕? 작은 레이디.”

이루미나는 자신의 배에 올려진 남편의 얼굴을 보며 빙긋 웃었다.

“으흠. 이건 선전포고인가요? 좋아요. 나는 준비되었어요. 아들이에요.”

“딸이라니까. 우리 가문엔 아들이 드물었고 그건 당신 가문도 마찬가지잖아요.”

“내 뱃속에 들어 있는 것이 뭔지 모를까요?”

“안 돼, 안 돼요. 그럼 우리는 끝장입니다.”

“끝장이라니오?”

“우리 공주님의 전용 재단사와 무용 선생 등과의 계약을 방금 마치고 오는 길이거든.”

이루미나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외쳤다.

“에름! 이 애는 아직 나오지도 않았어요.”

“견실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가신들에게 물어본 결과 요즘 애들은 조숙하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더불어 그 친구들이 매일 죽을 상을 하고 있는 이 유가 나 때문이 아니라 눈 깜빡할 사이에 커버리는 애들 때문이라는 유익한 정보도 얻게 되었고. 뭐, 얼마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겁니다.”

부부는 큰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이루미나는 심술궂은 표정을 지으며 무릎에 내려놓았던 옷감을 들어올렸고 에름 후작은 그것이 남아용 옷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큰소리로 헛기침을 하며 아내의 발치에 앉아 그 다리에 몸을 기대었다.

바느질을 시작한 이루미나는 실을 잡아당기며 잔잔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 고민이 뭐죠, 에름?”

에름 후작은 두 손 들었다는 시늉을 해보였다. 이루미나는 민첩하게 바늘을 놀리며 말했다.

“도움은 못 되겠지만 들어드릴 순 있지요. 내게 말해 봐요. 어쩌면 두 사람 몫의 지혜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에름 후작은 빙긋 웃으며 창 밖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저 눈이 그치면 봄이 찾아올 것이다.

“다벨의 서 소사라가 제국 기사단의 용병대장이 된 것은 알고 있지요? 의무는 없고 권한뿐인,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름뿐인 직함이지만 어쨌든 그건 작용하는 이름이지요. 그런 식으로 바탈리언 남작은 제국에 불침 선언을 하게끔 한 것뿐만 아니라 서 브라도의 일까지 흐지부지되게 만들어놓았지 요. 그 정도까지는 나와 내 가신들도 뚫어봤어요. 그런데 요즘 이상한 말들이 나돌아다니는군요. 바탈리언 남작은 한 낚시로 세 마리 고기를 낚을 작 정이라는.”

“세 마리? 어떻게 말이죠?”

“급료, 용병대장의 급료 말이오. 지금껏 거기에 대해 한마디도 안한 그 참을성에 놀라야 할까. 어쨌든 용병대장은 급료를 받는 것이 당연하잖습니 까.”

“주면 되잖아요? 그게 이름뿐인 직책이라면 터무니없는 액수를 요청하지는 않을 텐데요.”

“액수가 아닙니다. 남작은 현물을 원하고 있어요.”

“현물이라니오?”

“레모 산 작렬포.”

이루미나는 바느질을 멈추고는 놀란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다가 창문 너머로 정원을 돌아보았다. 바로 그 정원에서 언젠가 작렬포가 불을 뿜었던 적 이 있었다. 그리고 그 끔찍한 무기에 검을 휘둘러 불꽃을 일으키던 사내도 그곳에 서 있었다.

이루미나는 소름 끼친다는 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어떻게 그가 그것을 원할 수 있지요?”

“레모인들은 그들의 대포를 어쨌든 페인 제국에 바쳐야 하지요. 그들은 조금 더 오래 비밀에 붙여두고 싶었을 테지만 키 드레이번이 바로 우리 정원 에서 그것을 공공연한 무기로 만들어버렸지요. 그러니 그들은 하루라도 빨리 아자르 황제에게 그것을 진상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만들었습니다. 보 아주십시오.’ 그렇잖으면 비밀 무기를 제조한다는 혐의를 받을 수 있으니까. 다른 무기와 달리 대포에 대해서 제국은 꽤 민감합니다. 강철의 레이디 의 전력이 있어서. 그런데 전통적으로 그런 신무기의 시험 사용은 제국 기사단에게 그 권한이 있지요.”

“그리고 서 소사라는 제국 기사단의 용병대장이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바탈리언 남작은 그 대포를 급료 삼아 받고 시험 사용까지 해주겠다는 제안을 보낸 겁니다. 그리고 그 제안은 이미 90% 이상 통과된 모양입니다.”

“예. 그들은 그 무서운 무기를 가지게 되겠군요. 그런데 왜 고민하시는 거지요?”

“무기를 가지면 싸우고 싶겠지요. 그런데 다벨이 폴라리스를 노릴 리는 없습니다. 비록 서 휘리의 일 때문에 이를 갈고 있을 테지만, 두 척의 공중 전함은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습니다. 저 휘리 노이에스도 바로 그 공중 전함의 공격 아래 전사했지요. 더군다나 그때는 지금처럼 완전한 공중 전함 으로 태어나기 전인데도 그들은 1만이 넘는 다벨군을 몰살시켰습니다. 작렬포 정도로 폴라리스를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라트랑? 전쟁인가요?”

에름 후작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든 임신부가 그렇듯이 이루미나 역시 조그마한 일에도 쉽게 불안을 느끼곤 했다. 그래서 에름은 환한 표 정으로 말했다.

“설마요. 그들이 바로 작년에 일으킨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고 제국인들은 모두 그들을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폴라리스가 증명해 준 바 해군이 시원찮은 다벨은 절대로 바다를 낀 나라를 쓰러뜨리지 못합니다. 전쟁 같은 것은 일어날 리가 없습니다. 다만 좀 언짢은 제안 정도는 들을 각오를 해야겠지요. 그들과의 관세협정이 다가오고 있거든요.”

“아아, 그렇군요.”

그리고 에름은 갑자기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게다가 바탈리언 남작도, 그 쟁쟁한 다벨의 사장군(四將軍)들도 모두 독신이란 말입니다………… 나는 놈들이 우리 공주님에게 끔찍한 제안이라도 해올 까 봐 걱정되어 죽겠군요. 약혼? 어림없는 소릴. 만일 그렇다면, 젠장. 전쟁입니다!”

이루미나는 그만 웃어버렸다.

“걱정 말아요. 아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