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5권 – 23장 : 자유, 복수, 해류를 위한 리프레인 refrain – 2화
바스톨 장군은 창문 밖의 녹음만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무표정했고, 그래서 길버트 하드루스 대통령은 눈앞의 노장군이 자신의 말을 이해했는지 의심했다. 그러나 그가 뭐라 말하기 전 장군은 여전히 창 밖을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들을 칩니까?”
“그렇습니다.”
바스톨 장군은 다시 침묵했다. 계절은 초여름이었고 흑사자관의 공기는 답답했다. 엿듣는 귀를 우려해서 창문은 모두 닫혀 있었고 그래서 방 안의 공기는 무겁게 내려앉은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장군은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말했다.
“왜지요? 그들은 작년에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비록 그런 무서운 무기를 가졌다 하나 그들이 당장 휘리 노이에스를 답습하지는 않을 겁니다.” “법황 성하 때문입니다.”
“성하께서요?”
“성하께서 그들에 대해 언짢아 하고 계시는 것은 잘 아시지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의 자녀들을 서로 싸우게 하는 것이 법황의 일입니까!”
느리게 시작된 장군의 말은 격렬한 호통으로 방 안의 공기를 뒤흔들었다. 하드루스 대통령은 깍지낀 손으로 입을 받치며 침울한 표정으로 노장군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하리야 선장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바스톨 장군은 그 질문을 회피했다. 대신 장군은 피로한 음성으로 말했다.
“왜 그래야 한다는 겁니까.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이득은 있습니다. 분명히.”
“분명히?”
“그렇습니다.”
하드루스 대통령은 그렇게 말하며 집무실에 걸려 있는 세계지도를 가리켜보였다. 지도를 바라본 장군은 단숨에 대통령의 말을 이해했다.
“맙소사…… 가능합니까?”
“정보부는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바스톨 장군은 입안이 깔깔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사트로니아의 정보부가 결론을 내린 일에 대해 그가 뭐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장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말입니까? 그들은 그 강력한 대포를…………”
“예. 무서운 무기지요. 하지만 장군께는 친구가 있잖습니까?”
장군은 순간 아찔함을 느꼈다. 그는 처연한 눈으로 대통령을 바라보았고 하드루스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통령은 두 손을 내려 책상에 얹으며 정중하게 말했다.
“한번 더, 사트로니아와 저를 위해 싸워주시지 않겠습니까?”
바스톨 장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매미 소리는 이제 그의 귓속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병사의 방패가 힘껏 내밀어진다. 콰 – 캉! 방패를 든 팔은 아픔보다는 짧은 비애를 느낀다. 팔을 통해 전달되는 충격은 상대방이 자신을 정말 죽일 작정이라는 것을 똑똑히 나타내고 있다. 그 당연한 사실이 이 소음과 혼란 속에서 너무도 애절하게 다가온다. 병사는 방패 너머로 겁에 질린 눈을 내 밀어 상대를 본다.
‘너는 나를 죽이려 한다.’
그러나 증오로 흐려진 병사의 눈은 상대방의 눈에도 똑같은 공포와 슬픔이 배어나오는 것을 보지 못한다. 아니, 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병 사의 방패는 힘껏 밀쳐지고 있었다. 상대방의 발디딤이 흐트러지는 순간 병사의 모닝스타가 그 투구에 떨어졌다. 불꽃과 함께 투구가 날아가고 그 아 래에서 나타난 피투성이의 얼굴이 짧은 순간 병사의 망막에 죽을 때까지 남을 잔영을 그린다. 하지만 상대방은 곧 땅 위에 쓰러지고 병사는 그 뒤통 수를 향해 다시 모닝스타를 휘둘렀다. 두 번, 세 번 하얀 두개골이 드러나며 그 속에서 뇌가 비어져나온다. 병사는 피와 살점, 머리카락으로 범벅이 된 모닝스타를 들어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하늘을 본 병사는 눈을 부릅뜬 모습으로 굳어버렸다.
하늘에서는 산더미 같은 그림자가 병사를 향해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추락의 순간 킬리 스타드는 온몸이 끊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랜드머더호는 150피트의 높이에서 그대로 전장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그랜드머더호 에 걸린 마법은 마지막까지 추락 속도를 늦추긴 했지만 그래도 대지 속도는 사람을 죽일 정도였고 그래서 눈을 떴을 때 킬리 선장은 자신이 죽지 않 았다는 사실이 몹시 신기하게 생각되었다. 그때 시야 한구석으로부터 작고 검은 손이 다가왔다.
“벨………… 로린?”
손을 내밀려던 킬리 선장은 벨로린이 원하던 것이 그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벨로린은 그대로 킬리의 허리띠를 움켜쥐어 ‘위로 들어올렸다’. 벨로린
은 킬리 선장을 어깨에 멘 채 화염에 불타는 그랜드머더호의 갑판을 내달렸고 킬리는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웃음을 지었다.
‘하, 이거 희한한 경험이군.’
그러나 벨로린이 그랜드머더호의 갑판에서 뛰어내렸을 때는 킬리도 웃을 수 없었다.
끔찍한 충격 속에서 킬리는 자신에게 따져물었다.
‘이 정도면 졸도할 만하지 않은가?’
그러나 킬리는 졸도하지 않았고 벨로린이 그를 땅에 내려놓았을 때 그것은 꽤 실감나게 확인되었다. 충격으로 비명을 지르는 킬리를 보며 벨로린은 다급하게 물었다.
“괜찮아? 킬리! 괜찮냐고!”
“그랜드파더호는?”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알 수 있었지만 벨로린은 붉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랜드파더호는 석양의 하늘 속에 검은 실루엣으로 떠 있었고 조금 전 그랜드머더호를 추락시킨 공격은 그대로 그랜드파더호에 가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랜드파더호의 경우에는 훨씬 운이 나빴다. 용골을 파괴당한 마법은 그곳에 걸려 있었다 – 그랜드머더호는 추락했지만 그랜드파더는 갑판을 공격당하고 있었다.
벨로린이 막 입을 열려고 했을 때 화염이 그랜드파더호의 화약고를 강타했다. 벨로린은 허리를 숙이며 온몸으로 킬리를 덮었다.
하얗게 빛나는 섬광과 폭발음이 주위의 모든 것을 강타했다. 검붉은 하늘 속에서 한 송이 거대한 장미꽃이 피어나는 듯한 화염과 함께 그랜드파더호 는 공중에서 폭파되었다. 불똥과 잔해가 전장에 비처럼 쏟아져내렸고 벨로린은 킬리의 가슴을 끌어안은 채 그를 조금이라도 더 가리기 위해 애썼다. 잠시 후 벨로린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머리카락을 가다듬은 벨로린은 킬리를 살폈다. 킬리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말해 주지 않아도 돼. 알았으니까.”
킬리의 꼭 감은 눈에선 눈물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벨로린은 고개를 홱 쳐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랜드파더호를 파괴한 것은 네 장의 날개로 춤을 추며 붉은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벨로린은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라오 – 코네스 — !”
분명히 들렸을 테지만, 라오코네스는 벨로린의 외침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일몰의 왕은 순간을 지배한다. 그는 일몰이 끝나기 전 다시 미노 만으로 돌아가기 위해 날개를 휘저었다. 석양을 향해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라오코네스를 보며 벨로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를 탓할 수는 없다. 그녀 자신이 킬리를 돕듯 저 일몰의 왕은 바스톨 장군을 도울 뿐이다. 라오코네스는 밤을 이끄는 자를 선택했다. 벨로린은 다 시 킬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프겠지만 일어나야 돼. 우리는 전장 한가운데 떨어졌어.”
킬리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이상하게 침착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장이라고…………… 그럼 오닉스는?”
“죽었어.”
킬리는 눈을 감은 채 왠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작년의 전쟁 후부터 오닉스는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더 이상 마스크를 쓰지도 않고 손짓도 하 지 않게 된 그의 주위에서는 항상 죽음이 풍겨다니고 있었다. 킬리는 앞바다에서 싸우고 있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두캉가와 라이온은?”
“죽었어.”
“……………그 바보 녀석. 올 필요가 없었는데. 왕 노릇이나 하고 있지 부득부득 오더니 이제 레갈루스는 사트로니아에게 먹히겠군. 하리야와 트로포스 는?”
“아직 시내에서 싸우고 있어. 그들은 걱정 마. 에레로아와 아델토가 지켜줄 테니.”
킬리는 눈을 떴다. 하늘에는 선홍빛 구름들이 물결치고 있었고 그 이랑 사이로 밤이 흘러들고 있었다. 킬리는 신음을 토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다행이군. 그럼 나도 싸워야지.”
“안 돼. 넌 지금 일어서지도 못하잖아.”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이 모든 것을 그냥 꿈이었다고 말해 버릴 수는 없어.”
킬리는 한 손으로 땅을 짚었다. 하지만 손은 미끄러졌고 킬리는 다시 호되게 땅에 부딪혔다. 킬리는 숨막힌 비명을 질렀고 벨로린은 황급히 그를 부 축했다.
“안 돼. 지금 당장 물수리호로 가야 해. 하리야와 트로포스도 그쪽으로 대피할 거야. 빨리 가야 해! 기릭스도 더 이상 버틸 수는 없어!”
킬리는 마치 잠꼬대 같은 목소리로 뭐라 말했지만 벨로린은 더 이상 듣지 않았다. 벨로린은 다시 킬리를 들어올려 어깨에 둘러메었다. 하지만 그녀 의 작은 키 때문에 킬리는 발이 땅에 끌릴 지경이었다. 벨로린은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말이, 말이 필요해.
“그 친구는 킬리 선장이군. 그럼 네가 그 벨로린인가?”
벨로린은 황급히 몸을 돌렸다.
완전 무장을 갖춘 기사의 실루엣이 검붉은 하늘을 등진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벨로린은 기사의 말을 보며 반가움을 느꼈지만 곧 좌절감이 찾아왔다. 기사는 창을 들어올리고 있었지만 벨로린이 좌절한 것은 그 때문이 아니다. 벨로린의 시선을 느낀 기사는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우리는 모두 성물을 가지고 다니지.”
“발도 로네스가 알려줬군.”
“험한 짓을 하고 싶지는 않으니 얌전히 내 말을 따라라.”
벨로린은 자신의 어깨에 늘어져 있는 킬리를 돌아보곤 다시 기사를 바라보았다. 창 끝은 그녀의 이마를 겨냥한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벨로린은 침 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당신, 서켈커지?”
서 켈커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나? 들은 대로군.”
“그래. 알고 있어. 들어줘, 서 켈커. 우리는 더 이상 당신들과 싸울 수 없어. 카밀카르 함대와 필마온 기사단은 폴라리스의 전함과 레갈루스의 전함 을 모두 침몰시켰어. 그랜드머더호와 그랜드파더호는 바스톨 장군의 드래곤에 의해 파괴되었고………… 당신들 다벨은 폴라리스의 육군을 전멸시켰지. 폴라리스는 완전히 패배했어.”
켈커는 검은 소녀의 눈에 비치는 석양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악마여?”
“우리를 보내줘.”
“나는 군인이다. 그럴 수는 없어.”
벨로린은 입술을 부르르 떨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기억하겠지. 하리야는 당신을 보내줬어.”
서 켈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창 끝 역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벨로린은 한번 더 크게 호흡한 다음 도박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아밀리아의 이름으로 부탁해.”
창날이 크게 꿈틀했다. 켈커는 부릅뜬 눈으로 벨로린을 바라보다가 그 어깨에 걸려 있는 킬리를 쏘아보았다. 벨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남자가 바로 그야.”
하늘을 등진 켈커의 얼굴은 어두웠고 그래서 그 표정은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벨로린은 보지 않아도 그가 죽일 듯한 시선으로 킬리를 쏘아보고 있음 을 알 수 있었다. 벨로린은 다급하게 말했다.
“부탁하겠어. 전투는 이미 끝났고 당신들은 볼지악 자작의 복수를 완료했어.”
벨로린은 자신의 말에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복수를 선택한 것은 바로 그녀였다. “전투는 끝났어. 당신의 전투만 남아 있고, 나는 당신이 승리하기를 바래. 서 켈커.”
켈커는 벨로린의 말에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벨로린의 가슴께에 늘어져 있는 킬리의 뒤통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 끝은 몹시 흔들렸고 그 것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은 하얗게 변했다.
켈커는 말에서 내렸다.
다가오는 켈커를 보며 벨로린은 이를 악물었다. 최후까지도 켈커의 속마음을 알 수 없었던 벨로린은 켈커의 손이 다가왔을 때 눈을 감았다. 그리고 켈커는 킬리를 들어올려 말에 얹었다.
벨로린이 눈을 떴을 때 켈커는 붉은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을 탈 줄 아나?”
벨로린은 대답 대신 말 위에 뛰어올랐다. 켈커는 뒤로 물러났고 벨로린은 한손으로 킬리의 등을 움켜쥔 채 말을 몰아 달려갔다. 켈커는 창을 짚고 선 채 가만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벨로린은 다림 시내로 들어섰다. 수도의 이름은 아직도 정해지지 않았고 이제 영영 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비규환이 벌어지는 시내를 가로지르 며 벨로린은 눈물을 뿌렸다. 그때 그녀의 무릎 앞에 엎드려 있던 킬리가 정신을 차렸다. 벨로린은 말의 속도를 조금 늦추며 말했다.
“킬리?”
킬리는 고개를 조금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화염과 석양빛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잠시 후 킬리는 자신이 어떤 상 황에 처해 있는지를 깨달은 듯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벨로린은 그의 등을 더 꼭 움켜쥐며 다시 말의 속도를 높였다.
킬리는 웅얼거리듯 말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한 것일까.”
벨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킬리 역시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말했다.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일이었다고 말하기는 쉽겠지. 돛대에 매달려 살아난 뱃사람처럼… 그래. 살았으니 웃자고 말하는 것은………… 쉽 겠지. 하지만…… 하지만……”
벨로린은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내버려둔 채 말고삐를 더욱 힘있게 부여잡았다.
제국력 1025년 6월 33일. 폴라리스의 개국 기념일.
폴라리스는 멸망했다.
오스발은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싼 안개는 이미 푸르스름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아침이 머지 않았다. 오스발은 노를 끌어당겨 보트 위에 내려놓았다. 보트는 이제 해류 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오스발은 두 손을 모아 깍지 낀 다음 무릎에 얹었다.
그리고 오스발은 어둠을 향해 말했다.
“둘 다는 안 되는군요. 그들은 아직 두 개의 태양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가능하겠지요.”
안개가 갈라졌다.
안개 저편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흐릿하게 움직였다. 오스발은 일어났다. 보트 위에 꼿꼿이 선 오스발은 푸르른 안개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십시오. 이 새벽에 하나는 떨어져야겠지요.”
안개 너머로 일렁이는 그림자는 끝없이 커지고 있었다. 보트 위에 서 있던 오스발은 고개를 꺾어 위를 쳐다보아야 했다. 오스발은 두 팔을 옆으로 벌 렸다.
“제국의 공적 제1호와 답을 구하는 마법사여.”
소용돌이치던 안개가 갑자기 찢어지며 저 높은 곳에서 자유호의 이물이 나타났다.
<끝>